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宋(양주송씨)
본관(本貫): 양주(楊洲)
시조(始祖): 송도성(宋道成)
유래(由來):
양주(楊洲) 송(宋)씨는 조선 개국 초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낸 송도성(宋道成)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여산 송씨의 시조인 송유익(宋惟翊)의 후손으로 전하나 상계(上癸)를 고증(考證)할 수 없고, 누대(累代)로 양주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사족(士族)의 후예인 후손들이 선조(先祖)의 원향(原鄕)인 양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송효지
도성(道成)의 증손 효지(효智:이권의 아들)가 조선 초에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송희주(宋希周)
효지의 아들 희주(希周)는 주부(主簿)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송순령(宋舜鈴)
참봉(參奉) 덕림(德林)의 손자 순령(舜鈴)이 직장(直長)을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송동윤(宋東胤)
1729(영조 5)∼1799(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양주 ( 楊州 ). 자는 하승(夏承), 호는 서계(西溪). 아버지는 형태(亨泰)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학창(學昌)의 딸이다. 조원승(趙元升)의 문인이다.
1762년(영조 38) 증광시 ( 增廣試 )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771년 승문원의 저작을 거쳐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지낸 뒤 직강 ( 直講 )으로 있으면서 어제시(御製詩)를 반하(頒下)하였다.
병조좌랑에 재직할 때 병영 ( 兵營 )에서 징수하는 군포(軍布)를 너무 과중히 책정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사에게 보고하여 세리의 횡포를 막는 방안을 모색하고 책정된 군포의 분량을 격감시킴으로써 민생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예조좌랑으로 재직할 때는 태백산사고 ( 太白山史庫 )에 실록을 보관하는 일에 공로가 있었다. 1789년(정조 13) 이후로 충청도도사·사헌부감찰·삼례찰방(參禮察訪)을 역임하였다. 1791년 63세 되던 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교육을 통한 후진양성과 고을의 폐단과 악습을 개혁하는 데 매진하였다. 저서로는 ≪서계유집≫이 있다.
송영호(宋永祜)
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김창숙(金昌淑) 등과 더불어 만주와 몽고 지방에서 개간사업을 일으켜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영호(永祜)는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을 결의하고 국내로 돌아와 자금을 모으다가 피체되어 3년 간 옥고를 치루었다.
송재호(宋在祜)
재호(在祜)는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면도칼로 목을 잘라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수개월간 입원치료를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양주(楊洲) 송(宋)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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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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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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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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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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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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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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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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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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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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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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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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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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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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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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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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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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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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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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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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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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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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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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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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炳(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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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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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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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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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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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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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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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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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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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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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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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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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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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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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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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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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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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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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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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양주(楊洲) 송(宋)씨는 남한에 총 362가구, 1,6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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