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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송씨(宋)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여산송씨)

 

본관(本貫): 여산(礪山)

시조(始祖): 송유익(宋惟翊)

유래(由來):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때 진사(進士)로 나라에 훈공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문헌에 의하여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 경조(京兆)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손 자영(自英)이다. 그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인 유익(惟翊)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천익(天翊)은 은진 송씨(恩津宋氏), 막내 문익(文翊)은 서산 송씨(瑞山宋氏)의 시조가 되어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연원(淵源)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건의 손자대에 와서 운( :개성원윤을 지냄)을 파조(派租)로 하는 원윤공파(元尹公派), 방영(邦英:밀직부사를 역임)을 파조로 하는 밀직공파(密直公派), 원미(元美:소윤을 지냄)를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 (:지신사를 지냄)을 파조로 하는 지신공파(知申公派), (:정가공)를 파조로 하는 정가공파(正嘉公派) 등 크게 다섯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송숙문(宋淑文)

시조의 아들 숙문(淑文)이 고려 원종(元宗)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했다.

 

송송례(宋松禮)

? 1289(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1270(원종 11)에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로서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함께 권신 임유무 ( 林惟茂 )를 죽이고 그 여당인 사공 ( 司空 ) 이응렬 ( 李應烈 )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 ( 宋君斐 )를 귀양보내고 서방3(書房三番)과 조성색(造成色)을 없애고 왕정(王政)을 복고(復古)시켰다.

뒤이어 상장군이 되어 세자 심(: 忠烈王)이 몽고에 가자 그를 수행하였다. 1272(원종 13)에 원나라에 가서 전년에 국호를 몽고에서 원()으로 고친 것을 축하하였다. 그 해 탐라의 삼별초 ( 三別抄 )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검열하는 한편, 충청도지휘사(忠淸道指揮使)가 되어 군사를 징발하였다.

1273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징발, 보충하는 일을 맡았다. 1274(충렬왕 즉위년)에 첨정동사(僉征東事)가 되어 제1차 일본정벌에 참전하였으며 그 해 재추(宰樞)로서 곽자여(郭子璵)와 함께 개체(開剃 : 몽고풍속인 剃頭 屯 髮)하는 일에 앞장섰다.

찬성사 중찬(贊成事中贊)으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아들로는 충렬왕 때 추성찬화안사공신낙랑공(推誠贊化安社功臣樂浪公)에 봉해진 빈( )이 있다.

 

송간(宋侃)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충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호는 서재(西齋). 할아버지는 고려 중랑장 인충(仁忠)이다. 세종·문종·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이르렀다.

1455년 왕명으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려는데,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에 가서 복명하고, 고향 여산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상을 마치고, 흥양 ( 興陽 ) 마륜촌(馬輪村) 산정(山亭)에 숨어 지냈다.

10여년 뒤에 가족이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천을 돌아다니며 대성통곡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생애를 마쳤는데, 지금도 그곳을 서재동(西齋洞)이라 한다. 1793년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송건(宋建)

간의 6세손 송건(:현령 하형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 조방장(助防將) 양사준(梁士俊)의 선봉으로 나가 공을 세우고 성주 판관(星州判官)이 되었으며, 뒤에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상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올라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져서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송천희(宋千喜)

?1520(중종 15). 조선 전·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구부(懼夫). 충손(忠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이고, 아버지는 극창(克昌)이며, 어머니는 정극종(鄭克從)의 딸이다.

1489(성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91년 한림·주서를 거쳐, 1495(연산군 1)에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왕의 친행시 예의에 벗어난 일을 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그 뒤 1497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된 뒤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병조참지를 거쳐, 1506(중종 1)에 공조참의를 지냈다. 이 후 황해도관찰사·동부승지·부제학·경상도관찰사·우윤·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12년에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개성부유수를 거쳐 1515년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1519년에 신진유사(新進儒士)들에 의하여 배척받은 뒤 지중추부사로 1520년에 죽었다

 

송세림(宋世林)

1479(성종 10)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헌중(獻仲), 호는 취은(醉隱) · 고은(孤隱) · 고송(孤松) · 눌암(訥庵). 계성(繼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복리(復利)이고, 아버지는 군수 연손(演孫)이며, 어머니는 김보첨(金甫添)의 딸이다.

1498(연산군 4) 진사가 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상을 당하여 초상 중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벼슬에 오르지 않아 갑자사화를 면하였다. 이 때문에 스스로 취은 이라 호하였다.

이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16(중종 11) 능성현령(綾城縣令)으로 재직중 방납 ( 防納 )폐단의 제거, 책 인쇄로 인한 과중된 잡세 ( 雜稅 )폐지, 군액(軍額)충당을 위한 중 의 추쇄(推刷 : 세금수취의 인정단위가 될 수 있도록 일반 백성으로 환속시킴.)와 절 의 소각, 우전입마(郵傳立馬 : 역참의 말을 길러 공용에 이용하던 제도)의 폐에 대한 개선 등을 내용으로 한 지방행정제도 개혁안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 상소로 중종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벼슬도 가자(加資)되었다. 뒤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이르러 병으로 사퇴하였다. 당대 문명을 떨쳤고 그림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어면순 禦眠楯 이 있다.

 

송세형(宋世珩)

?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헌숙(獻叔), 호는 반곡(盤谷). 계성(繼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복리(復利)이고, 아버지는 군수 연손(演孫)이다. 어머니는 김보첨(金甫添)의 딸이다. 형은 교리 세림(世琳)이다.

문장에 능했으며 1524(중종 19)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에서 수업하면서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1528년 진사로서 사행무역(使行貿易)의 폐단 등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거의 모두 채납시켰다.

153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발탁되었으나, 김안로 ( 金安老 ) 일당에게 배척되어 크게 진출하지 못하였다.

중종이 잠저시(潛邸時 : 왕에 즉위하기 전의 시기) 그의 아버지 연손이 중종의 사부(師傅)였던 관계로 어려서 중종과 같이 지낼 때가 많았다.

뒤에 왕위에 오르자 중종이 이를 잊지 않고 자주 불러 안부를 물었는데, 김안로 일당은 그들의 간사한 행동의 정상이 위로 알려질 것을 염려, 모함하고 배척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려나자 비로소 중용되어 이듬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42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올랐다.

이 때 이황 ( 李滉 )과 함께 조광조 ( 趙光祖 )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청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장령·사간을 거쳐, 1544년 국왕의 특지로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일파가 득세하면서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에 책록되고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예조참판으로 승진하고 호산군(壺山君)에 봉해졌다. 1547(명종 2) 외직으로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이듬해 내직으로 돌아와 공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동지의금부사 ( 同知義禁府事 )를 겸하고, 곧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대사헌·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51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국가 재정을 절약하였다.

그 해에 이조판서가 되어 당시 문정왕후 ( 文定王后 )와 연결되어 불교 세력의 강화를 꾀하고 있던 보우 ( 普雨 )의 불법함을 여러 차례 상소하고 탄핵하며 그를 주살할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조판서를 연임하던 중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면서 행정 능력도 있었는데, 특히 재정에 밝아 시폐 개혁에 힘썼다.

 

송여종(宋汝悰)

1553(명종 8) 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언온( 雕 防 ). 아버지는 찰방 창()이다. 무예를 익히고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여러 차례 실패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안군수(樂安郡守) 신호 ( 申浩 )의 막료로서 종군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 李舜臣 )을 따라 한산도싸움에서 무공을 세웠다. 또 왕에게 올리는 이순신의 보고문을 가지고 밤새 적진 사이를 돌파하여 행재소 ( 行在所 )에 이른 공으로 술잔을 하사받고 녹도만호(鹿島萬戶)에 임명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7년 원균 ( 元均 )의 휘하에 있다가 한산도에서 패전하였지만,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기용되자 그의 휘하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녹도만호로서 조 · 명연합군과 함께 나아가 적선 6척과 적군 70명을 포획하였다.

1599년 단성현감, 1600년 절충장군 ( 折衝將軍 )에 오르고 이어 사복시정 · 임류진첨사(臨溜鎭僉使) · 흥양현감 등을 거쳤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고, 이 해 곤양군수(昆陽郡守)를 거쳐 1607년 경상좌도우수군우후(慶尙左道右水軍虞候)에 이르렀다.

 

송현수(宋玹壽)

? 1457(세조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아버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복원(復元)이며, 단종의 장인이다. 1454(단종 2)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로 있을 때 딸이 단종의 비로 책봉되자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고, 곧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를 제수받았으며 이어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조가 즉위한 뒤 윤대(輪對 : 관원들이 왕과 대좌하여 응대하기도 하고 또 정사의 잘잘못을 아뢰는 일) 때에 상왕의 보필을 당부받기도 하였다. 1456(세조 2) 성삼문 ( 成三問 )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대간 ( 臺諫 )의 처벌요구가 있었지만 세조의 두둔으로 처벌을 면하였다.

이듬해 금성대군 ( 錦城大君 ) ()와 순흥부사 이보흠 ( 李甫欽 )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게 되자, 의금부에서는 그 역시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있다 하여 모역죄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주장하였고 결국 추국 ( 推鞫 )을 받게 되었다.

추국의 결과 장() 100에 영원히 원방의 관노(官奴)에 속하게 하고, 처자 역시 관노비에 충당되었다가 정창손 ( 鄭昌孫 ) 등의 주장으로 교사(絞死)되고 말았다.

그 뒤 아들 거( )가 과거를 보려 하자 대간의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이 특별히 허락하였고 조카인 영()도 대간에 임명되는 등 그 일문에 대한 서용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숙종 때 영돈녕부사에 추증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정조 때 정민(正愍)이라는 시호를 내려졌다.

 

송질

1454(단종 2)1520(중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가중(可仲). 진생(辰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만달(萬達)이고, 아버지는 도정 ( 都正 ) 공손(恭孫)이다. 어머니는 박겸형(朴謙亨)의 딸이다.

1477(성종 8)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 같은 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82년에는 진현시 ( 進賢試 )에 발탁, 홍문관정자를 거쳐 1485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이 때에 나라에서 재정 긴축을 강화하여 관찰사와 수령에게 사저곡(私儲穀 : 사사로이 개인이 싸놓은 곡식)과 제사사(諸寺社)의 장리곡(長利穀 : 곡식을 대여하여 주고 그 이자를 절반이나 받는 높은 이율의 곡식)을 철저히 조사하여 본주인의 용도를 제하고 그 밖의 것은 감봉(監封)하게 했는데, 그는 이 일의 추진을 주관하였다.

그 일례로 충청도 진천 지방의 재상 신균(辛均)과 상장군 오유종(吳有終)은 모두 사저곡이 수만 석에 이르나 관청의 감봉은 100석에 불과함을 밝히고 진천 고을의 관리를 징계조치하였다. 아울러 각 지방에 농장을 가지고 있는 재상들에게 스스로 납속(納粟)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어 병조정랑에 임명되고, 다시 승정원의 동부승지·부승지를 거쳐, 1496(연산군 2) 우승지가 되었다. 이 때 그는 왜인들이 불법적인 약재무역을 횡행하자 이의 단속을 주청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했는데 때마침 그 지방에서 유행하던 역질(疫疾)의 치유에 힘써 지방민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오랫동안 북방의 국방을 다스렸다. 1501년에는 도민 임지성(林之盛)의 변란을 사전에 파악, 진압했으며, 그 공로로 형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같은 해에 천추사 ( 千秋使 )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서 공조·호조·이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특히 동지춘추관사 ( 同知春秋館事 지의금부사 ( 知義禁府事 )를 겸임하며, 경재소 ( 京在所 )의 당상관별감을 토성조관(土姓朝官)으로 임명시켜 풍속을 바르게 하고, 왕자·제군(諸君)이 이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50세 때 정헌대부 ( 正憲大夫 예조판서가 되고, 이어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06(중종 1) 중종반정 때 예조판서로서 정국공신 ( 靖國功臣 ) 3등에 책록되고, 여원군(礪原君)에 봉군되었다. 1509년 함경도체찰사가 되어 동북 육진 지방의 사민입거책(徙民入居策)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북도 일원을 순찰한 뒤 무산·풍산 지방의 이배도 移排圖를 제작하여, 진상하기도 하였다.

1512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그러나 대간들로부터 탐오(貪汚)하다는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시호는 숙정(肅靖)이다.

 

송인(宋寅)

1517(중종 12) 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 蓬 菴). 영의정 질( )의 손자이며, 지한(之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의령남씨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죽자 외가에서 자랐다.

10세에 중종의 셋째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 · 충훈부 · 사옹원 · 상의원 등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 ( 李滉 ) · 조식(曺植) · 이민구 ( 李敏求 ) · 정렴(鄭 毆 ) · 이이(李珥) · 성혼 ( 成渾 )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글과 글씨에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와 궁전의 액()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그는 특히 오흥 ( 吳興 )의 필법을 받아 해서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암유고 124책이 있다. 그의 글씨는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神道碑) · 송지한묘갈(宋之翰墓碣), 남원의 황산대첩비 ( 荒山大捷碑 ), 부안의 김석옥묘비(金錫沃墓碑), 여주의 김공석묘갈(金公奭墓碣), 남양의 영상홍언필비(領相洪彦弼碑), 광주 ( 廣州 )의 좌참찬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 등에 전한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송익필(宋翼弼)

1534(중종 29) 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할아버지는 직장 ( 直長 ) ()이고, 아버지는 판관 사련(祀連)이다.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사련이 안처겸 ( 安處謙 )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 ( 初試 )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 · 성혼 ( 成渾 )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다. 특히 예학 ( 禮學 )에 밝아 김장생 ( 金長生 )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갈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 ( 鄭汝立 ) · 이발 ( 李潑 )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조헌 ( 趙憲 )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 ( 李山海 )의 미움을 받아 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 ·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그 문하에서 김장생 · 김집 ( 金集 ) · 정엽 ( 鄭曄 ) · 서성(徐 賂 ) · 정홍명 ( 鄭弘溟 ) · 강찬(姜澯) · 김반(金槃) · 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 · 최경창 ( 崔慶昌 ) · 백광훈 ( 白光勳 ) · 최립(崔 凌 ) · 이순신(李純臣) · 윤탁연 ( 尹卓然 ) · 하응림 ( 河應臨 )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했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다. 또한 아무리 고관 · 귀족이라도 한 번 친구로 사귀면 () ’ 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 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송순례(宋純禮)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문백(文伯). ()의 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3(선조 16) 아산진(阿山鎭)을 지킬 때 여진인이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여 동방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이 해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물리쳐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악비(岳飛 : 중국 남송의 충신)정충록 精忠錄을 하사받고 이산군수가 되었다. 1588년 탐오하다 하여 군수직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뒤 다시 제주목사·전라도방어사 등을 지냈다.

흥양(興陽 : 지금의 高興)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송홍연(宋弘淵)

순례의 손자 홍연(弘淵)은 임진왜란과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다.

 

송상현(宋象賢)

1551(명종 6)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부사맹 ( 副司猛 ) 승은(承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용교위 ( 進勇校尉 ) ()이고, 아버지는 현감 복흥(復興)이다. 어머니는 충의위 ( 忠義衛 ) 김승석(金承碩)의 딸이다.

10세에 경사(經史)에 두루 통했으며 15세에 승보시 ( 陞補試 )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1576(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저작 ( 著作 ) · 박사 ( 博士 )에 승임(陞任)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158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들어와 예조 · 호조 · 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 ( 質正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 ( 經歷 ) · 집의 · 사간과 사재감 ( 司宰監 ) · 군자감 ( 軍資監 )의 정()이 되었다. 1591년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 하자 이 때 부사인 그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 ” 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 뒤 적군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朝服 : 관원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뒤에 이조판서 ·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 충렬사 · 개성 숭절사(崇節祠) · 청주 신항서원 ( 莘巷書院 ) · 고부 정충사 ( 旌忠祠 ) · 청원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송상인(宋象仁)

1569(선조 2) 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성구(聖求), 호는 서곽(西郭). 부사맹 ( 副司猛 ) 승은(承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용교위 ( 進勇校尉 ) ()이고, 아버지는 현감 복흥(復興)이다. 어머니는 충의위 ( 忠義衛 ) 김승석(金承碩)의 딸이다.

부사 상현(象賢)의 아우이다. 1605(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 · 예문관검열을 거쳐 함경도북평사(咸鏡道北評事)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형조좌랑이 되었다. 1612(광해군 4) 김직재 ( 金直哉 )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10년 동안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소환되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오르고 이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관서 지방에 어사로 나가 선유(宣諭 ; 임금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림.)하였다. 그 뒤 성균관의 사예 ( 司藝 ) · 사성, 사헌부의 장령 ( 掌令 )과 집의 ( 執義 ), 홍문관교리 · 사도시정(司 歸 寺正) ·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다가 안동부사로 전보되었으나 그 곳에서 민정을 숙정(肅正: 엄격하고 바름)하고는 사임하였다.

1627(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어사로서 충청도에서 조운 ( 漕運 )을 감독, 세공의 조달에 힘썼다. 돌아와서는 사헌부집의 ·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남원부사가 되었다. 부사 재임 때 작폐를 일삼던 도적을 소탕하여 어사가 통정대부 ( 通政大夫 )로 추천, 임명했으나 사고로 사퇴하였다.

1629년에 다시 전라도관찰사에 특임되었으나, 모함으로 물러났다. 그 뒤 병조참지 ·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였다.

 

송대립(宋大立)

한편 현감 관(:간의 6세손)의 아들 대립(大立)은 정유재란 때 창의 별장(倡義別將)으로 권 율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흥양(興陽)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송희립(宋希立)

대립의 아우 희립(希立)은 노량 싸움에서 전상(戰像)을 입고 다대포 첨절제사(多大浦 僉節制使)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송심(宋諶)

1590(선조 23)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사윤(士允). 아버지는 창의별장(倡義別將) 대립(大立)이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아버지가 창의별장으로서 많은 의병을 모아 흥양 ( 興陽 )에서 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하자 이를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다.

한때, 균전사 권진 ( 權縉 )이 호남의 민전 ( 民田 )을 감사하기 위해 내려왔을 때 그의 용맹성을 보고 대성할 것을 예견하였다. 또한, 도사 ( 都事 ) 김시강(金時講)이 유생들에게 강()을 하과(下課 : 왕이 의 과제를 냄.)할 때 그는 자청하여 병서(兵書)를 훌륭하게 강하였다.

1614(광해군 6) 무과에 급제, 북변(北邊)의 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수군통제사 구굉 ( 具宏 )의 막료가 되어 그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고, 이어서 전라도병마우후(全羅道兵馬虞候)가 되었다.

1635년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이 되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북병사 이항 ( 李沆 ),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휘하의 척후장(斥候將)으로 남한산성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양근 ( 楊根 )에 이르렀을 때 이미 강화가 성립되자, 중영(中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며 본국으로 철수하는 청군 소속의 몽고병을 추격, 안변남산역(安邊南山驛)에 이르러 전후영장(前後營將)과 함께 적을 공격, 부족한 병력으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흥양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었다.

 

송징은(宋徵慇)

원주 목사 시철(時喆)의 손자로 숙종 때 등과하여 삼사(三司)의 관직을 거쳐 대사성과 호조 참판을 역임한 징은(徵慇)은 박학하고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약헌집(約軒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다.

 

송성명(宋成明)

1674(현종 15)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성집(聖集군집(君集), 호는 송석(松石). 참의 시철(時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순(光洵)이고, 아버지는 호조참판 징은(徵殷)이다. 어머니는 민도(閔燾)의 딸이다. 1699(숙종 25)에 생원시에 합격, 1705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1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었으며 강도 ( 江都 )에서 무재(武才)를 시험하기 위해 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1713년에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의 겸문학 ( 兼文學 )을 겸임하였다.

1715(숙종 41) 부교리로 있으면서 소장(疏章)의 출납에 대한 내의원 ( 內醫院 )의 방금(防禁)이 심하다고 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계언(啓言)이 왕의 비위를 거슬려 파직되었다. 그 뒤 1717년에 보덕 ( 輔德 ), 1719년에 사인 ( 舍人 )으로 임명되었다.

경종 즉위년인 1720년에 부응교·동부승지가 되었는데 정치의 득실을 상소하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723(경종 3)에 승지·대사성, 그리고 황해감사를 역임했고, 영조 즉위 후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또한 실록청당상 (實錄廳堂上)으로 제수되어 숙종실록개수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가서 태조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 ( 李仁任 )의 아들로 명나라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에 잘못 기재된 것의 정정을 요구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윤·이조참판·부제학에 임명되었고, 1729(영조 5)에는 형조참판·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사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가 곧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공조참판·동경연(同經筵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31년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도목정사(都目政事 :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던 제도)을 실시하여 공조판서로 임명되었고 반송사(伴送使)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대사헌·판윤· 지의금부사 ( 知義禁府事 예문관제학 겸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1735년에는 좌참판을 거쳐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임기 동안 도내에 문학을 권장하여 교육을 진흥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6년에는 공조판서로 임명되고 그 뒤 좌참찬·대사성·좌참찬에 거듭 임명되었다. 1739년에 다시 공조판서에 이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문명이 있었으며, 저서로 송석헌집과 편서인 해동명신록이 있다.

 

송진명(宋眞明)

성명의 아우 진명(眞明)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3도의 관찰사와 이··예조의 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올랐으며, 학행과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송인명(宋寅明)

1689(숙종 15)1746(영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성빈(聖賓), 호는 장밀헌(藏密軒). 참의 시철(時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광연(光淵)이고, 아버지는 징오(徵五)이며, 어머니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이단상(李端相)의 딸이다.

1719(숙종 45)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 있을 때 당시 세제로 있던 영조의 총애를 받아,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가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어 붕당의 금지를 건의하여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협조하였다.

1727(영조 3)에 죄인의 관작을 삭탈할 때 그들의 과거 합격도 취소하자는 경연관 ( 經筵官 )들의 건의를 저지시켰다. 1731년 이조판서가 되어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온건한 인물들을 두루 등용하여 당론을 조정, 완화함으로써 영조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다.

우참찬·호조판서 등을 거쳐 1736년에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도성의 권세 있는 집에서 공물을 사들이는 것을 금지시킬 것을 건의하여 영조의 재가를 얻었다. 1740년에 좌의정이 되어 당쟁을 억누르고, 탕평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하여 영조의 명으로 박사수 ( 朴師洙 )와 함께 신임사화의 전말을 기록한 감란록 勘亂錄64책을 편찬하였다. 사람됨이 기지와 정략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송익보(宋翼輔)

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 ( 礪山 ). 자는 원직(元直). 광순(光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휘은(徽殷)이고, 아버지는 정명(正明)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의 딸이다. 경기도 용인 출신.

1714(숙종 40) 진사시에 합격한 뒤 교관 ( 敎官 )을 거쳐, 1731(영조 7) 강서현령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를 지내고, 다음해 충청도관찰사로 재직중 인척 송익휘(宋翼輝)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1742년 대사간을 거쳐 그 다음해 평안도를 순찰하고 서울로 돌아와 그 지방의 군비실태와 군민(軍民)의 어려움을 사실대로 보고하여 정책에 반영하였다. 1744년 황해도관찰사, 다음해에 대사간·승지를 역임하였다

 

송문재(宋文載)

익보의 양자 문재(文載)가 영조 때 대사간과 대사헌을 거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다.

 

송면재(宋冕載)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창명(昌明)의 손자 면재(冕載)는 순조 때 정조부사(正朝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한성부판윤과 대사헌을 거쳐 예·형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헌종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송영대(宋榮大)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와 예조 참의를 역임.

 

송영윤(宋榮潤)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송주옥(宋柱玉)

주옥(柱玉)은 한말에 부패왕조의 폭정을 개탄하여 국가와 민중의 안전을 위한 개혁을 도모코저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을 수령으로 민중시위를 열다 피체되었다.

 

송수만(宋秀萬)

수만(秀萬)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산림 개발권을 요구하자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여 이를 철회시켰으며 을사조약 후에는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송양섭(宋良燮)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다.

 

 

 

동래부사 宋象賢(송상현) 선생의 일화.

 

송상현은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으로 본관은 여산이다.

 

선조 3(1570), 20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정원정자로 보임되었다. 선조 11(1578)에 저작랑이 되고 이듬해에 박사에 서임되었다가 나아가서 경성판관이 되었다. 선조 16년에 사헌부지평으로 돌아와 예조, 호조, 공조의 정랑(正郞)이 되었다. 이듬해인 1548년 종계변무사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20년에 다시 들어와 지평(持平)이 되고, 21년에 백천군수로 나아가 3년만에 전직되어 들어와서 충훈부경력, 사헌부집의, 사간원사간, 사재군자감정이 되었다. 선조 24(1591)에 집의 (執義)로서 통정대부에 올라 동래부사가 되니 곧 임진왜란 바로 전년이었다.

 

송상현은 동래로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집무를 수행함에 있어 오직 성의와 신의로써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들 따르기를 마치 부모와 같이 하였다.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였으며, 임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1592414일 오전 왜군에 의해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전투가 끝나자 적군의 일부 병력은 동래성으로 진출하였다. 부산과 동래는 가까운 거리이고 또 부산의 행정관할은 동래부에 있었기 때문에 적군의 동태는 곧 동래에 알려졌다. 이 때에 경상좌병사 이각이 울산병영에서 동래부에 왔으나 적의 대군이 밀어닥친 것을 알고 도망하였다.

 

한편, 양산군수 조영규의 구원이 있었다. 동래성에 적군이 침입한 것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14일로 그들은 여세를 몰아 내침하여 포위하고 15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전투가 전개되었다고 한다. 송부사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다. 적은 취병장(聚兵場, 현 동래경찰서)에서 진출하여 백여명의 군사로 하여금 한 목패를 남문밖에 세웠다. 송부사는 군 관 등에 명하여 나가보게 하니 글에는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고 쓰여 있었다.

 

송부사는 또한 목패에다 "싸워서 죽은 것은 쉬어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고 글을 써서 적중에 던졌다. 막중한 대군을 앞에 두고 송부사는 결사의 굳은 뜻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적군은 15일 아침 적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아군의 주력은 남문루를 중심으로 집결되었다. 남문에서 피아 양군이 사력을 다해 격전을 치렀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 , 군이 죽을 힘을 다하여 결사항전 하였으나, 워낙 막강한 적군의 무차별 살육이 감행되는 가운데 성민들의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루었다.

 

송부사는 문인답게 죽을 각오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호상에 걸터앉아 사람을 시켜 빨리 조복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 위에 입고 의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호상에서 내려 북향사배하고는 붓을 잡아 부채에 "외로운 성에는 달이 흐려지고 다른 성진에는 지척이 없다. 군신의 의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 그 어찌 가벼우리까라고 글을 써서 부모님께 하직의 인사를 사람을 시켜 보냈다"고 한다.

 

송부사의 주위에는 군관 송봉수, 김희수 등 4 5, 향리 대송백, 부리, 소송백, 관노 철수, 매동 등이 좌우에 열입하고 있었는데 적병들이 앞으로 핍박함에 송부사, 김희수, 대송백 등은 격투 끝에 전사하였다. 이 동래부의 전투에서 이름을 전하는 자는 송부사의 측근에는 종행인 신여로, 금섬이 있으며, 이밖에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군기시첨정 김사모 등이며, 부민으로는 다만 김상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이촌녀 등이 전한다. 순사한 후 선조 27(1594)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 하였으며, 충렬공의 시호를 내리고 숙종 7년에는 좌찬성을 가증하였다. 동래의 충렬사, 송공단, 정읍의 정충사, 고부의 선충사, 청주의 신항서원, 송경의 숭렬사, 경성의 화곡서원에서도 모시고 있다.

 

 

 

宋亮(송량)선생 가문의  충효.

 

효곡리에 빛나는 경모사의 천통

 

고요하고 맑은 산골 마을 언덕진 곳에 아담한 옛날집 한 채가 자리잡고 있다. 맞배 기와집으로 400여 년 전에 세워졌으며 이 집을 경모사라고 부른다.

 

이 곳에 20여 호의 마을이 있고 본래 소곡이라 불렀으나 지극한 효자가 났다고 하여 효곡리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 1534(중종 29) 충효와 도덕을 밝힐 큰 꿈을 안고 태어난 아이가 있었으니 성은 송 (), 이름은 양()이다.

 

자라나면서 더욱 총명하여 학문과 인격을 닦는 일과 덕성을 기르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다. 일찍이 퇴계 이 황을 찾아가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배웠고 정 국성, 하 락 등 인망이 높은 사람들과 가까이 사귀면서 인격을 닦았다.

그의 나이 마흔 일곱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매일 새벽에 무덤을 찾아 슬퍼하는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서 일년상을 치렀다. 집이 가난하여 홀로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는 일이 어려웠는데 약한 몸으로 산에 가서 사냥을 하여 극진하게 봉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3 년 뒤에 아버지가 또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는데 통곡하고 슬퍼하는 절차가 조금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3 년 동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를 살았다.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한 마을 사람들이 소곡리라는 마을 이름을 효자가 난 마을이란 뜻으로 효곡리로 고쳐 부르자고 의논하고 그 때부터 마을 이름이 효곡리로 바뀌었다.

 

그 때 고을 선비들이 모여 그의 효행을 낱낱이 기록하여 상소문을 올려 나라에서 표창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송 양의 지극한 효성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지만 그 학문과 덕행이 나 무랄 곳이 없어 한 가지만으로 표창할 것이 아니다.”

하고 세자의 강학 책임을 맡고 있던 하락이 말하여 표창은 중지되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가족이 모두 상주군 모동면에 있는 백화산으로 피난하여 머물고 있었다. 여기에 갑자기 왜병이 쳐들어와서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왜병 몇 명이 칼을 들어 그를 내리치려고 했다. 이 때 맏아들 이 회가 재빨리 달려와 몸으로 막아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이어 열 세 살된 송 양의 어린 아들 이 필도 죽음을 당했다. 이 틈에 겨우 몸을 피해 살아난그는

아들은 아비를 위하여 죽을 줄 알았는데 신하된 도리로 임금을 위해 죽 지 못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랴.”

하며 북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보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편 그의 맏딸 송씨는 노 경건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갔다. 산속에 피난하여 머물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친 왜병이 남편을 죽이고 그는 피할 새도 없이 붙들려 포로가 되었다.

나를 어서 죽여라. 나는 죽어도 너희들을 따라가지 않겠다.”

하며 송씨 부인은 성난 얼굴로 크게 꾸짖었다. 화가 난 왜병은 송씨 부인의 왼팔을 칼로 쳤다.

 

그리고는 오른팔마저 쳤다.

두 팔이 잘린 송씨 부인은 스스로 구렁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이 날이 바로 친정 오빠 이 회 가 화를 입던 날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딸은 남편을 위해서 효()와 열()로 빛을 남겼으니 참으로 훌륭한 가정교육의 결과라 하겠다.

그의 막내딸은 정 이괄에게 시집갔었는데 왜란을 피하여 호남 장수현으로 이사하여 살고 있었다. 일찌기 남편을 여의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지성으로 봉양하던 중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고향 선산 (先山)에 안장하고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은 시어머니가 살아 계셨기 때문인데 이제 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박복한 이 한 몸은 또 어디로 갈 것인가하고 통곡 하면서 목을 메어 죽었다 한다.

 

상주 땅에 숨어 영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학문과 행실을 닦으며 살고 있는 송 양은 효성이 지극할 뿐 아니라 학문이 깊어 경서에 통달하였다 하며 한강 정 구가 송 양을 천거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의병을 일으켜 세운 공도 인정되어 그는 현릉 참봉에 임명되었다. 현릉에 도착한 그는 한시도 게으르지 않고 성심으로 근무했다.

 

그래서, 그의 성설함이 인정되어 군사 전략상 요지인 유곡도 찰방으로 승진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아랫사람을 항상 자식과 같이 사랑했다. 가혹한 명령을 내려 억지로 부리지 아니하고 못 살게 졸라 괴롭히는 일도 없었다. 얼굴에는 항상 온화한 기운(和氣)이 넘치고 의연하여 태산과 같이 무거운 기상이 흘렀다.

 

이러한 기상은 평소에 말과 행동이 공손하고 두터운 덕성과 자질로 성현을 존경하고 학문과 덕행을 쌓으며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아 부모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우러나온 것이다.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서는 병란 뒤의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동지 몇 분과 힘을 합하여 낙사계(洛社契)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낙동강변에 오현사(五賢祠)를 세우고 젊은이들을 모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출전<상주군 상주고등학교 황 교감

참고 문헌 愚谷集, 商山誌,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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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여산 송씨는 남한에 총 48,209 가구, 200,3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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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진천 송.jpg 진천송씨(宋) 청남 14-08-29 4125
342 은진 송.jpg 은진송씨(宋) 청남 14-08-29 4912
341 용성 송.jpg 용성송씨(宋) 청남 14-08-29 3508
340 연안 송2.jpg 연안송씨-2(宋) 청남 14-08-29 4066
339 연안 송1.jpg 연안송씨-1(宋) 청남 14-08-29 3494
여산 송.jpg 여산송씨(宋) [1] 청남 14-08-29 5079
337 양주 송.jpg 양주송씨(宋) 청남 14-08-29 2508
336 야성 송.jpg 야성송씨:야로송씨(宋) 청남 14-08-29 5744
335 신평 송2.jpg 신평송씨-2(宋) 청남 14-08-29 3625
334 신평 송1.jpg 신평송씨-1(宋) 청남 14-08-29 3314
333 문경 송1.jpg 문경송씨(宋) 청남 14-08-29 3366
332 덕산 송.jpg 덕산송씨(송) 청남 14-08-29 2719
331 남양 송.jpg 남양송씨(宋) 청남 14-08-29 4249
330 김해 송.jpg 김해송씨(宋) 청남 14-08-29 3067
329 평해 손.jpg 평해손씨(孫) 청남 14-08-29 4054
328 청주 손.jpg 청주손씨(孫) 청남 14-08-29 3363
327 일직 손.jpg 일직손씨(孫) 청남 14-08-29 5888
326 비안 손.jpg 비안손씨:병산손씨(孫) 청남 14-08-29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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