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은진송씨(宋)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은진송씨)

 

본관(本貫): 은진(恩津)

시조(始祖): 송천익(宋天翊)

유래(由來):

 

은진(恩津) ()씨는 중국 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예로 전하며, 그의 7세손 송순공(宋舜恭)의 후손 자영(自榮)이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유익(惟翊)은 여산 송씨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아들 천익(天翊)이 은진 송씨의 연원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선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고려조에서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原)으로부터 세계를 잇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송명의(宋明誼)

대원의 증손 명의(明誼)1362(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거쳐 사헌부 집단(司憲府執端)에 이르렀으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충남 대덕군 동면 신촌리에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다.

 

송극기(宋克己)

명의의 아들 극기(克己)는 젊은 나이에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에 선발되어 개성에서 살았는데 단명하였다.

 

송여해(宋汝諧)

쌍청당(雙淸堂) ()의 증손 여해(汝諧:예조 정랑 순년의 아들)1494(성종 25)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성종의 자문에 응했다.

 

송세충(宋世忠)

1468(세조 14)1527(중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 ( 恩津 ). 자는 서가(恕可). 계사(繼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년(順年)이고, 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여해(汝諧)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의 딸이다. 이심원 ( 李深源 )의 문인이다.

1498(연산군 4) 사마시를 거쳐 1513(중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좌랑·예조좌랑·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경상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호조정랑·병조정랑·경기도사·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한성부서윤 등을 지냈다. 그 당시 공무처리에 철저하였던 까닭으로 함안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늙은 어머니가 있어 나아가지 않고 광흥창수(廣興倉守)에 머물렀다가 뒤에 가평군수를 지냈다.

 

송기수(宋麒壽)

1507(중종 2) 1581(선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 ( 恩津 ). 자는 태수(台 馬 ), 호는 추파(秋坡) · 눌옹(訥翁). 순년(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원헌납 여해(汝諧)이고, 아버지는 군수 세충(世忠)이다. 어머니는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原)의 딸이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 1534(중종 2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당 ( 湖堂 )에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농을 좋아하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면서 선생이나 연장자와 교유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당시 권세가이며 간신인 김안로 ( 金安老 )에게 아부하지 않아 모함에 걸려 물러나 있다가, 김안로 일당이 물러난 뒤 등용되었다.

1538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부임하고, 이어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승진했으며,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강원도어사로 나가 공채 ( 公債 )를 적발하여 조정에 간하기도 하였다. 1542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1544년 홍문관직제학에 올랐다.

인종 때 우승지를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명종이 나이가 어려서 문정왕후 ( 文定王后 )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윤원형 ( 尹元衡 )이 이기(李 咬 ) · 임백령 ( 林百齡 ) · 정순붕 ( 鄭順朋 )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도승지로서 이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덕은군(德恩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사림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그에게 말하면서 규암(圭庵 : 종형 麟壽의 호)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 하니 동산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한송이 매화가 있다면 어찌 매화가 상한다고 가시덤불을 없애지 않겠는가. ” 라고 하였다. 결국 인수가 처형되자, 사람들로부터 형을 모함한 공신으로 지목받았다.

1546(명종 1)에 호조참판 ·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이어서 외직으로 경기도관찰사 ·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550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형조참판 · 공조참판을 지내고, 잠시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였다. 1555년 이조참판으로 등용되고 이어 형조참판을 역임했는데, 형조참판으로서 성절사 겸 사은사(聖節使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지동지중추부사(知同知中樞府事) · 예조참판을 지내고, 1559년 명종의 특명으로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곧 이어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 명종은 성년이 되면서 윤원형의 전횡을 싫어하여 사림의 인물을 뽑아 대간에 배치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사를 바로 하고,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 동안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는데, 윤원형이 제거되자 을사사화 이후에 죄를 입은 당대의 명사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어 좌참찬을 거쳐 형조판서 ·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67년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덕흥군 ( 德興君 )의 제3자인 하성군(河城君)으로 대통을 잇게 했는데, 이 일로 여러 대신들 사이에서 입승(入承 : 방계로 임금의 대를 잇는 것) 의절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 때 그가 경전에 의거하여 사군(嗣君)은 마땅히 오모백포(烏帽白袍)를 입고 소여(小輿)를 타고서 광화문 서협(西夾)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의절이 정해졌다.

이황 ( 李滉 )과 친숙했으며, 선조 초에는 경연에서 학문을 강론하면서 자문 구실도 많이 하였다. 1570(선조 3) 이조판서를 다시 역임,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

1573년 좌참찬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4()를 섬기면서 부귀와 장수를 누렸으나, 을사사화에 가담했다고 하여 사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 楸坡集 이 있다.

 

송인수(宋麟壽)

1499(연산군 5) 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 ( 恩津 ). 자는 미수(眉 馬 ) 또는 태수(台 馬 ), 호는 규암(圭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계사(繼祀)의 고손이며, 정랑 순년(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 ( 府使 ) 여해(汝諧)이고, 아버지는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세량(世良)이다. 어머니는 유승양(柳承陽)의 딸이다.

진사 ( 進士 ) 엄용공(嚴用恭)에게 배웠고, 김안국 ( 金安國 )에게 지도를 받았다. 1521(중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이 때 김안로 ( 金安老 )가 정권을 장악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인사 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이어서 경연의 전경 ( 典經 )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로 충청도 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 · 잡역의 폐해를 보고하였다. 1525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 · 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어 검토관 ( 檢討官 )으로서 경연에 참여했는데, 육조낭관 임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교리 · 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는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어서 승정원동부승지와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는데, 윤원형 ( 尹元衡 ) · 이기(李 咬 )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을 받들어 영암에 기영정(耆英亭)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하였다. 이 때 남평현감(南平縣監) 유희춘 ( 柳希春 ), 무장현감(茂長縣監) 백인걸 ( 白仁傑 )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동지사 ( 冬至使 )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런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여 있던 중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선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규암집 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송응형(宋應泂), 송응개(宋應漑)

기수의 아들 응개(應漑)와 응형(應泂)도 선조 때의 명신으로 대사간(大司諫)과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각각 역임했다.

 

송방조(宋邦祚),

1567(명종 2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 ( 恩津 ). 자는 영숙 (永叔), 호는 습정(習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세량(世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구수(龜壽)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응기(應期)이며, 어머니는 판서 이윤경(李潤慶)의 딸이다.

1590(선조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영동에 피난하여 현감 한명윤 ( 韓明胤 )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정자(權知正字박사를 지내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어 영남지방의 향시 ( 鄕試 )를 관장하였다.

뒤에 금교도역승(金郊道驛丞병조좌랑·고산도마승(高山道馬丞)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가 후금을 치려고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자 1617년 비변사에 의하여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어 평안도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로 임명되었다.

이 때 명나라에 들어가는 보빙사 ( 報聘使 )의 짐을 검색하려고 용천관(龍川館)에 갔다가 갑자기 죽었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1665(현종 6)에 영동의 초강서원 ( 草江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습정집이 있다.

 

송갑조(宋甲祚)

방조 아우 갑조(甲祚)는 광해군 때 성균관의 유생(儒生)으로서 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유적에 삭제되었고, 인조반정으로 강릉 참봉(江陵參奉)에 천거되었으며, 이 괄(李 适)의 난에 왕을 공주로 호종했다. 정묘호란 때는 남하하는 세자를 따라 완산에 내려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비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가했다.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 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은진 ( 恩津 ). 아명은 성뢰(聖 困 ).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 ( 奉事 )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 ( 都事 )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 ( 懷德 )의 송촌(宋村) · 비래동(飛來洞) · 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 ( 宋浚吉 )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擊蒙要訣 · 기묘록 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 · 이이(李珥) · 조광조 ( 趙光祖 )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 ( 連山 )의 김장생 ( 金長生 )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 ( 金集 )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 ( 生員試 )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 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 ·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 己丑封事 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 ( 金自點 )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 · 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 丁酉封事 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 ( 趙大妃 )의 복제 문제로 예송 ( 禮訟 )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숙종 1) 정월 덕원 ( 德源 )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 垢 ) ·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 ( 奉朝賀 )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 ( 金錫胄 ) · 김익훈 ( 金益勳 )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 ( 尹拯 )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 · 정읍 · 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 ( 諡狀 )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덕원 · 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1744(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 朱子大全 주자어류 朱子語類 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 · 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 至治主義 )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 · 정치 · 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 · 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

먼저 철학사상을 살펴보면,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 의 실천 문제였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그의 이기 · 심성론(理氣心性論)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으나, 실상은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이기 · 심성론에는 주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이의 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 여러 상이한 이론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정립하였다.

() · ()의 선후 문제나 혼합성 不相離 · 분리성 不相雜 등과 같은 문제는 항상 이율배반적인 쟁점을 가진 것이었으나,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입론처(立論處 : 관점)에 따라 범주화(範疇化)하여 각기 타당성을 논증, 형식 논리의 모순을 극복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이 · 기의 관계를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 이는 이 · 기의 상호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고 논리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 · 기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 ” 라는 이이의 대명제를 받아들여, 이것을 이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도 동()과 정()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이가 기를 주재하기 때문이며, 기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는 동과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기가 이를 운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원두(源頭)의 측면에서 말하면, · 기에 선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논리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말하는 것이며, 유행(流行)의 측면에서 말하면, · 기에 선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변화의 세계에서는 이 · 기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입론처에 따라 타당성을 인정하고 범주화하여 통합하는 방법은 상이한 특수 이론들을 수용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밖에 형()과 기()의 혼동을 분별하여 형 · · ()의 관계에 삼단설(三段說)을 세운 것도 그의 독창적인 면이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마음을 기 心卽氣 로 보는 정통적 입장에 있었으나, 입론처에 따라서는 마음도 태극이 되는 것(心爲太極)이라 하여 마음 본체의 무궁함을 말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마음이 발하기 전의 상태를 성품 으로, 마음이 이미 발한 상태를 정()으로 보았다. 마음이 발한다는 것은 곧 기가 발하여 이가 실리는 현상인데 이것이 칠정(七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리파 ( 主理派 )에서는 칠정과 사단(四端)을 엄격하게 분별했으나, 그는 사단도 칠정에 속하는 것이며 불선(不善)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것이 성품에서 발할 때 절도에 맞으면 도심(道心)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인심(人心)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수양론 ( 修養論 )이 전개되는데 그 핵심은 정의를 모아 集義 기상을 기르는 일 養氣 이었다. ‘ 정의를 모으는 일 은 곧 대학 의 성의 · 정심(誠意正心)으로서 그는 이것을 정직 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수양론도 곧 정직으로서 기상을 기르는 일(以直養氣) ’ 로 압축되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 활동의 저력은 기상이고 그것은 정직으로서만 길러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직은 수양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정직의 실천을 일생의 지표로 삼았고, 제자와 후손들에게도 강조하여 마지않았다.

그런데 정직에 의한 기상의 도야는 불굴의 의지를 함양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독선과 흑백 논리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었고 화합과 타협에 장애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조선 중기의 사림정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치의 원리를 대학 에서 구했는데, 그것은 수기치인 ( 修己治人 )으로 표현된다. ,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수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는 통치자의 도덕성 확립을 강조하였다.

특히, 임금은 만화(萬化 : 만물의 조화나 변화, 특히 인간 사회의 모든 변화)의 근본이므로 군덕의 함양이 정치의 제일 과제라고 믿어, 맹자의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바르게 된다(一正君而國正). ” 는 주장을 정치 활동의 지표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왕에게 수신 · 제가 · 면학을 강조하고 사심과 사은(私恩)을 억제할 것을 권하였다.

실제 정책면에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건의하였다. ,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여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궁중의 연악과 토목 공사를 억제하며, 공안 ( 貢案 )을 바로잡고, 군포를 감해 양민(良民)의 부담을 줄이며, 사노비의 확대를 억제하여 양민을 확보하며, 안흥에 조창 ( 漕倉 )을 설치하자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정쇄신책은 이이의 변통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생 안정과 국력 양성 문제는 그 자체가 당면한 급선무였기도 하지만, 그는 북벌(北伐) 실현을 위한 선결 과제로 인식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에서 또하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예치(禮治)의 이념이었다. 이는 공자의 통치 철학이기도 했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 ” 고 강조하였다.

예는 유교 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복제예송(服制禮訟)에 깊이 개입했고, 만년에는 종묘제도의 이정과 문묘배향 문제, 정릉의 복위와 효종의 세실 문제, 만동묘의 설치 등 국가적 전례 문제에 정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는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 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 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6595월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 趙大妃)의 상복을 3(2)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 1)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尹 頊 )의례 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 ( 斬衰 )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 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 는 예외 규정 四種說 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도 하고,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 ( 鄭太和 ) 등 대신들은 의례 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 경국대전 에 장자 · 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6603월 허목 ( 許穆 )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윤선도 ( 尹善道 )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 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不貳斬) ’ 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설에 따라 대공복(大功服 : 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년복으로 번복되었다.

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 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 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 ” 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제로 효종과 비밀 대담 獨對 을 가지기도 했고, 왕과 비밀 서찰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북벌 계획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과의 비밀 대담이나 서신 왕래에서 그가 건의한 것은 극히 이념적이고 원론적인 것이었으며, 실제적 대책은 아니었다.

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給料兵 : 직업군인)을 줄이고 민병(民兵 : 농민군)을 활용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북벌의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하였다.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 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춘추대의의 관념에서 나온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강력한 이념이 국내 정치에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 이념은 송시열 자신과 그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북벌론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침묵되었다가 숙종 초기에 다시 제창되었는데, 효종대에 그의 북벌론은 그 이념성과 함께 부국안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숙종대에 국가의 전례 문제와 결부되어 다시 제창된 존주론(尊周論)에는 오직 당쟁에서 대의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성만이 강조되었다.

사회사상을 살펴보면, 송시열은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또 실제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먼저 사회신분 문제에 있어서 양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특권은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우선 양민에게만 지워졌던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 노비종모법 ( 奴婢從母法 )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 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또 서북 지방(평안도 · 함경도) 인재의 등용과 서얼(庶 椧 )의 허통 ( 許通 )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회 정책은 양민의 생활 안정이었다. 이를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 ( 大同法 )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 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빈민의 구제를 위한 사창 ( 社倉 )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도 노비제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노비도 같은 인간임을 인식시켜 부당한 사역이나 가혹한 행위를 억제하도록 역설하였다. 충절이나 선행이 드러난 경우에는 서얼 · 농민 · 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기나 묘문 · 제문을 지어 표창하였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효행 · 정절 · 순종 등 전통적 미덕을 강조했으나, 동시에 가계의 관리와 재산 증식 등 주부권과 관련된 경제적 구실도 중시하였다. 사회 풍속 면에서는 중국적 · 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토속적 · 비유교적인 것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혼례 등의 예속과 복식,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세속과 다른 중국 습속들을 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교화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다. 문장은 한유(韓愈) · 구양수(歐陽修)의 문체에 정자(程子) · 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 () · () · () · () · 소차(疏箚) · 묘문 등 모든 글에 능했으나, 특히 비() · () · 지문(誌文) 등 묘문에 명성이 있어 청탁을 받아 지은 것이 수백 편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영릉지문(寧陵誌文: 효종릉의 지문)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서체는 처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매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그 글씨를 받아 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고 현재도 많이 전하고 있다.

그는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 · 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 · 이유태 ( 李惟泰 ) · 유계 ( 兪棨 ) · 김경여(金景餘) · 윤선거 ( 尹宣擧 ) · 윤문거 ( 尹文擧 ) · 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山黨)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權 魅 ) · 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 ( 金尙憲 )의 손자들인 수증(壽增) · 수흥(壽興) · 수항(壽恒) 형제들, 민정중 ( 閔鼎重 ) · 민유중 ( 閔維重 ) 형제, 이후원 ( 李厚源 ) · 이시백(李時伯)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 ( 南九萬 ) · 박세채 ( 朴世采 ) · 이경석 ( 李景奭 )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그는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경석 · 윤휴 및 윤선거 · 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 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 ( 權尙夏 ) 외에 김창협 ( 金昌協 ) · 이단하 ( 李端夏 ) · 이희조 ( 李喜朝 ) · 정호 ( 鄭澔 ) · 이선(李選) · 최신 ( 崔愼 ) · 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진다.

그 밖에 그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 ( 韓元震 ) · 윤봉구 ( 尹鳳九 ) · 이간(李諫)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 주자어류소분 · 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 · 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 · 경례의의 經禮疑義 · 심경석의 心經釋義 · 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 · 주문초선 朱文抄選 · 계녀서 등이 있다.

문집은 1717(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 尤菴集 이라 하였다. 이후 1787(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 宋子大全 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9대손 병선(秉璿) · 병기(秉夔)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 宋書拾遺 9, 속습유 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 7책으로 간행했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송준길(宋浚吉)

1606(선조 39) 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은진 ( 恩津 ).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 ( 同春堂 ). 세영(世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응서(應瑞)이고, 아버지는 영천군수(榮川郡守) 이창(爾昌)이다.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고, 20세 때 김장생 ( 金長生 )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 ( 洗馬 )에 제수되었다.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 ( 內侍敎官 ) · 동몽교관 ( 童蒙敎官 ) · 시직(侍直) · 대군사부 · 예안현감 · 형조좌랑 · 사헌부지평 · 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 정경세 ( 鄭經世 )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 ( 金集 )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 ( 宋時烈 )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 ( 副司直 ) · 진선 ( 進善 ) · 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 ( 金自點 ) · 원두표 ( 元斗杓 )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집의 · 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효종 9) 대사헌 ·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쳤다.

1659년 병조판서 ·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 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이른바 예송 ( 禮訟 )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 1)를 주장할 때 그를 지지하였다.

이에 남인 ( 南人 )의 윤휴(尹 頊 ) · 허목 ( 許穆 ) · 윤선도 ( 尹善道 )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우참찬 · 대사헌 · 좌참찬 겸 좨주 · 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단지, 1665(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

1673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1675(숙종 1) 허적 ( 許積 ) · 윤휴 · 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 ( 禮學 )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 ( 文廟 )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 상소가 있은 다음 1756(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충현서원 ( 忠賢書院 ) · 봉암서원 ( 鳳巖書院 ) · 돈암서원 ( 遯巖書院 ) · 용강서원 ( 龍岡書院 ) · 창주서원 ( 滄洲書院 ) · 흥암서원(興巖書院) · 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 어록해 語錄解 · 동춘당집 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다.

 

송규렴(宋奎濂)

학문이 뛰어나 우암· 동춘당과 함께 <삼송>으로 일컬어졌던 규렴(奎濂:이조 판서 국전의 셋째아들)이 유명했다.

 

송주석(宋疇錫)

시열의 손자 주석(疇錫)향동문답(香洞問答)을 저술하 이름을 날렸다.

 

송덕상(宋德相)

정조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송능상(宋能相)

그외 영조 때 묘향산에서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떨쳤다.

 

송환기(宋煥箕)

인상(寅相)의 아들로 이조 판서와 우찬성(右贊成)을 지내고성담집을 저술했다.

 

송치규(宋穉圭)

환명(煥明)의 아들로 <이기일도설(理氣一途說)>을 지지했던 치규(穉圭)는 유명했다.

 

송달수(宋達洙)

철종 때 승지(承旨)를 거쳐 이조 참의를 역임했다.

 

송근수(宋近洙)

고종 때 좌의정(左議政)으로 개화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송병선(宋秉璿)

병선(秉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여 애국의 기개를 보였다.

 

송학선(宋學先)

1893(고종 30)1926. 항일독립운동가. 초명은 인수(仁壽학선(學善). 서울에서 출생하여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阿峴北里 : 지금의 서울 아현동)로 이주,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인쇄직공 성진(聖振)의 아들이다. 성품이 과묵하고, 남과 언쟁을 하지 않았으며, 청결한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집안이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13세 때 가족이 흩어져 거리를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도 하였다. 1909년 남대문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오쿠다농구회사(奧田農具會社)의 고용인으로 일하게 되고, 아버지 역시 인쇄공으로 일하게 되어 한가족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7년 뒤 각기병으로 실직하였다.

일본인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일제에 대한 원한이 쌓였고, 사회적·민족적으로 항일의식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토(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 安重根 )을 숭배하고, 자기도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19263월 잠시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양식도(洋食刀)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 칼을 품고 과자행상을 가장해 사이토를 노렸다. 그 해 426일 순종이 죽자, 사이토가 조문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올 것을 기대하고 428일 금호문(金虎門) 앞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오후 130분경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올라 이들을 찔렀다.

그러나 이들은 총독 일행이 아니라 경성부회 평의원인 다카야마(高山孝行사토(佐藤虎次郎이케다(池田長次郎) 등이었다. 현장에서 붙잡혀 19261110일 사형이 확정,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宋時烈(송시열) 선생의 일화.

 

1)

기생의 유혹에 태연한 젊은 송시열

송시열이 과거시험을 본 뒤 문과에 급제하고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청주를 지나게 되었다.
그 때 청주 목사가 그를 시험해 보려고 고을 기녀 중에 제일 예쁘고 맵시 있는 자를 시켜 송시열을 잠자리로 모시도록 했다.
곱게 단장한 기녀가 방에 들어와서 잠자리에 들려하자 송시열은 기녀에게 물러가라고 하지도 않고 끝까지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누구도 물리치기 어려운 여자의 유혹을 잚은 나이의 송시열은 태연이 이겨낸 초인적인 힘을 가진 진정한 인격자이었다.

 

2)

맹자 1000번 독

어느 때 제자 박광일이 묻기를
「선생님은 맹자(孟子)를 3,000번이나 읽으셨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하니 이에 선생은 웃으시면서
「내가 맹자를 천 번 읽었지만, 앞에 두서너 편은 일생동안 외왔으니 몇 천 번 읽었는지 정화하게 알 수가 없네.」라고 대답하셨다 한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19

(),()

23

(),()

27

(),()

20

(),()

24

(),()

28

(),()

21

(),()

25

(),()

29

(),()

22

(),()

26

(),()

30

(),()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은진 송씨는 남한에 총 44,939 가구, 187,3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345 홍주 송.jpg 홍주송씨(宋) 청남 14-08-29 3899
344 청주 송.jpg 청주송씨(宋) 청남 14-08-29 3750
343 진천 송.jpg 진천송씨(宋) 청남 14-08-29 4127
은진 송.jpg 은진송씨(宋) 청남 14-08-29 4913
341 용성 송.jpg 용성송씨(宋) 청남 14-08-29 3508
340 연안 송2.jpg 연안송씨-2(宋) 청남 14-08-29 4067
339 연안 송1.jpg 연안송씨-1(宋) 청남 14-08-29 3495
338 여산 송.jpg 여산송씨(宋) [1] 청남 14-08-29 5079
337 양주 송.jpg 양주송씨(宋) 청남 14-08-29 2509
336 야성 송.jpg 야성송씨:야로송씨(宋) 청남 14-08-29 5746
335 신평 송2.jpg 신평송씨-2(宋) 청남 14-08-29 3625
334 신평 송1.jpg 신평송씨-1(宋) 청남 14-08-29 3314
333 문경 송1.jpg 문경송씨(宋) 청남 14-08-29 3367
332 덕산 송.jpg 덕산송씨(송) 청남 14-08-29 2721
331 남양 송.jpg 남양송씨(宋) 청남 14-08-29 4249
330 김해 송.jpg 김해송씨(宋) 청남 14-08-29 3067
329 평해 손.jpg 평해손씨(孫) 청남 14-08-29 4056
328 청주 손.jpg 청주손씨(孫) 청남 14-08-29 3364
327 일직 손.jpg 일직손씨(孫) 청남 14-08-29 5889
326 비안 손.jpg 비안손씨:병산손씨(孫) 청남 14-08-29 3135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