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진천송씨(宋)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진천송씨)

 

본관(本貫): 진천(鎭川)

시조(始祖): 송순공(宋舜恭)

유래(由來):

 

진천 송씨 (鎭川宋氏)는 당나라 호부 상서(戶部尙書) 송주은(宋柱殷)7대손 송순공(宋舜恭: 신라 때 대아찬을 역임)의 후손으로 전하나 계대가 불명하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후손 인()을 일세조로 받들고 있다.

1125(인종 3)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에서 출생한 인()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일찌기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거치면서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오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진천백(鎭川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진천(鎭川)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송원겸(宋元謙)

인의 아들 원겸(元謙)이 타고난 재질로 학업에 정진하며 지덕을 닦아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국운을 바로 잡는 데 공을 세웠고, 벼슬이 은자광록대부(銀紫光錄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상주국(上柱國)에 이르러 명재상으로 명망이 높았다.

 

송순(宋恂)

인의 손자 송순(: 원겸의 맏아들)이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송희(宋憘)

송희()는 전리판사(典理判書)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송언기(宋彦琦)

순의 아들 언기(彦琦)는 고종 때 등과하여 금주 현령(金州縣令)과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지내며 명어사로 이름을 떨쳤으며 몽고와의 강화 교섭에 명외교관으로 활약하였다.

 

송언상(宋彦庠)

방어별감(防禦別監)과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송유의(宋由義)

전리판사(典理判書) ()의 아들 형제 중 장남 유의(由義)는 충렬왕 때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거쳐 합문 지후(閤門紙侯)를 지냈다.

 

송유신(宋由信)

희의 차남 유신(由信)은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을 지내고 합문 지후(閤門紙侯)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송징(宋徵)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거쳐 한림원사(翰林院事)에 오른 송징()은 첨의시랑(僉議侍郞)에 이르렀다.

 

송소

( )는 문하평리(門下評理)와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역임.

 

송무(宋懋)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했다.

 

송반(宋盤)

조선조에 와서는 고려 말에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두문불출로 절의를 지켰던 광보(光輔: 군수 소의 셋째 아들)의 아들 송반()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소윤(禮賓寺少尹)을 지내고 세조가 즉위하자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송익(宋翼)

판안변부사(判安邊府使) (: 서령 임의 아들)의 둘째 아들 송익()은 개성 도사(開城都事)를 거쳐 군수를 역임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송찬(宋贊)

1510(중종 5)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치숙 (治叔), 호는 서교(西郊).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효(善孝)이고, 아버지는 사지 ( 司紙 ) 세증(世曾)이며, 어머니는 민휘(閔徽)의 딸이다.

1537(중종 3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3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45(명종 즉위년)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다음해 시독관· 교리 ( 校理 헌납 ( 獻納 ) 등을 지내고, 다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병조정랑·홍문관부교리·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1551년 검상(檢祥사인 ( 舍人 전라도구황어사(全羅道救荒御史)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전한 ( 典翰 직제학·승지를 지낸 뒤 1557년 대사간이 되었다. 1561년 필선 ( 弼善 )을 거쳐, 우승지·한성부우윤, 1567년에 도승지·형조참판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이해 진위사 ( 陳慰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0(선조 3) 호조참판으로 명종실록의 편찬에 관여하였고, 경상감사가 되었다.

1573년 경기감사·영흥부사를 지냈고, 이 해 진하사 ( 進賀使 )로 또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94년 첨지중추부사·우참찬을 거쳐, 판돈녕부사·판중추부사 등의 직에 올랐다. 중종·인종·명종·선조의 4조에 걸친 중신으로 장수하였다.

 

송영구(宋英狗)

1556(명종 11) 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 馬 ), 호는 표옹(瓢翁) · 일호(一瓠) · 백련거사(白蓮居士). 세웅(世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억수(億壽)이고, 아버지는 영()이다. 어머니는 사온서영(司 倍 署令) 하세준(河世濬)의 딸이다.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다.

1584(선조 17) 유학으로서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 ( 注書 ) · 사과 ( 司果 )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 ( 鄭澈 )의 종사관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서 성절사 ( 聖節使 )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완산에 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99년 충청도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고 문학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조정랑 ·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 사간원사간을 지내고 청풍군수 ·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607년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곧 권신 정인홍 ( 鄭仁弘 )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광해군 2) 사간에 임명되고 이어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으로 선조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61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 행사직(行司直)으로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또 낙서 등으로 비방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했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에 제향되었다.

 

송영망(宋英望)

인조반정의 삼등공신(三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송주빈(宋周賓)

임진왜란 때 아들과 더불어 순절한 주빈(周賓)이 유명했다.

 

송도남(宋圖南)

1576(선조 9)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 세증(世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하()이고, 아버지는 봉사 ( 奉事 ) 응일(應一)이며, 어머니는 박응현(朴應賢)의 딸이다.

1609(광해군 1) 생원시에 합격, 활인서별제·의금부도사를 거쳐 1615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근무하였다. 그 뒤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강원도도사를 거쳐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을 때 병으로 부임할 수 없게 되었었다.

이 때 이조에서는 변방고을에 부임함을 꺼린다고 하여 탄핵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영유현령(永柔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하자 안주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손자 정필(廷弼)의 요청으로 정표(旌表)가 세워졌으며, 숙종 때에 안주의 충민사 ( 忠愍祠 )에 제향되었으며, 영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뒷날 전공이 크게 인정되어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내리었고, 자손도 서용되었다.

 

송기손(宋基孫)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직암(直庵) 신 경(申 暻)과 더불어 <삼학사>로 불리웠던 기손(基孫: 수동의 아들)은 학행으로 유명했다.

 

송입(宋笠)

백순(伯純)의 아들 송입()은 이 괄의 난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보성 군수(寶城郡守)를 지내고, 병자호란에는 죽산 부사(竹山府使)가 되어 남한산성을 수비한 공으로 재령 군수(載寧郡守)로 나갔으며 장수산성을 축조하고 돌아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를 지냈다.

 

송순현(宋順鉉)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송섬(宋暹)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指)를 역임했다.

 

송창(宋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좌찬성과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된 송창()은 유명했다.

 

송수옹(宋秀雍)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역임하였다.

 

송의손(宋宜孫)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역임하였다.

 

송택휴(宋宅休)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역임했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1

()

28

(),()

35

(),()

22

()

29

(),()

36

(),()

23

(),()

30

(),()

37

(),()

24

()

31

(),()

38

()

25

(),()

32

()

39

()

26

()

33

()

40

 

27

(),()

34

(),()

41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천 송씨는 남한에 총 6,003가구, 25,194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345 홍주 송.jpg 홍주송씨(宋) 청남 14-08-29 3899
344 청주 송.jpg 청주송씨(宋) 청남 14-08-29 3749
진천 송.jpg 진천송씨(宋) 청남 14-08-29 4126
342 은진 송.jpg 은진송씨(宋) 청남 14-08-29 4912
341 용성 송.jpg 용성송씨(宋) 청남 14-08-29 3508
340 연안 송2.jpg 연안송씨-2(宋) 청남 14-08-29 4066
339 연안 송1.jpg 연안송씨-1(宋) 청남 14-08-29 3494
338 여산 송.jpg 여산송씨(宋) [1] 청남 14-08-29 5079
337 양주 송.jpg 양주송씨(宋) 청남 14-08-29 2508
336 야성 송.jpg 야성송씨:야로송씨(宋) 청남 14-08-29 5744
335 신평 송2.jpg 신평송씨-2(宋) 청남 14-08-29 3625
334 신평 송1.jpg 신평송씨-1(宋) 청남 14-08-29 3314
333 문경 송1.jpg 문경송씨(宋) 청남 14-08-29 3367
332 덕산 송.jpg 덕산송씨(송) 청남 14-08-29 2719
331 남양 송.jpg 남양송씨(宋) 청남 14-08-29 4249
330 김해 송.jpg 김해송씨(宋) 청남 14-08-29 3067
329 평해 손.jpg 평해손씨(孫) 청남 14-08-29 4054
328 청주 손.jpg 청주손씨(孫) 청남 14-08-29 3363
327 일직 손.jpg 일직손씨(孫) 청남 14-08-29 5888
326 비안 손.jpg 비안손씨:병산손씨(孫) 청남 14-08-29 3135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