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徐(연산서씨)
본관(本貫): 연산(連山)
시조(始祖): 서준영(徐俊英)
유래(由來):
연산 서씨(連山徐氏)의 시조(始祖) 준영(俊英)은 서신일(徐神逸 : 이천 서씨의 시
조)의 후손으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해 온 연산지방(連山地方)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하지 못한다.
그 후 연산 서(徐)씨는 준영(俊英)의 아들 보(寶)의 후대에서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조선조에서 참군(參軍)을 지낸 의민(義敏)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2세손 종수(宗秀)가 현감(縣監)을 지내고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가문의 중요 인물
서연(徐憐)
서연(憐)은 현감 종수(宗秀)의 아들로 19세 때 무과(武科)에 장원(壯元)하여 제주 판관(濟州判官)으로 나가 10대 명관(名官)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제주도에는 한라산 (漢拏山) 석굴에 큰 뱀이 있어 풍우조화(風雨造化)를 부린다고 하여 사신(蛇神)을 숭배하는 관습 이 있었다. 심지어는 사신을 모시지 않으면 불행이 닥친다고 하여 시집까지 꼭 신주(神主)를 옮겨 다가 모시곤 하여 폐해가 극심하였다.
그는 제주 판관으로 나가 이 사신당(蛇神堂)을 두들겨 부수고 민심(民心)을 안정(安定)시켜 도민(島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고, 지금까지도 제주 남부(濟州南部)에 사는 사람들은 사신당을 숭배하고 있다고 한다.
서천령(徐千齡)
연(憐)의 아들 천령(千齡)은 현감(縣監)을 역입했다.
서후적(徐後積)
연의 증손 후적(後積:감찰 주의 아들)도 현감(縣監)을 역임.
서택선(徐宅善)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서간세(徐幹世)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했다.
서병덕(徐秉德)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서기환(徐基煥)
기환(基煥)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홍주성(洪州城) 전투에 참가했다가 접전중 순절하여 연산 서씨를 대표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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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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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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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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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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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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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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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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泳(영),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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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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錫(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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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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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원),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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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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穆(목),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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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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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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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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寅(인),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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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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然(연),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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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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模(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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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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燮(섭),烈(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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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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坤(곤),均(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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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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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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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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廷(정),圭(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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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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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현),鏞(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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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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喆(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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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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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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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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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산 서씨 (連山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1,485가구, 6,3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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