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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徐)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徐(이천서씨)

 

 

본관(本貫): 이천(利川)

시조(始祖): 서신일(徐神逸)

유래(由來):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연원(淵源)은 기자(箕子)의 40세손 기준(箕準 :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재위기간 20년)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천(利川)의 서아성(徐阿城)에 와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지명(地名)을 따서 성(姓)으로 삼았

다고 하고, 일설(一說)에는 예맥(濊貊 :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 추장(酋長) 인 여수기(余守己)의 아홉 아들이 각기 여러 고을의 장(長)이 되어 많은 치적(治績)을 쌓았으므로 백성들이 여(余) 자에 중인변을 붙여서 서씨(徐氏)의 성(姓)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서씨(徐氏)의 대종(大宗)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始祖)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효공왕(孝恭王 : 제52대 왕, 재위기간 : 897 ∼912)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내다가 국운(國運)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利川)의 효양산(孝養山) 기슭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은거(隱居)하면서 스스로 처사(處士)라 칭하고 후진훈도(後進訓導)에 여생을 바쳤다.

 

가문의 중요 인물

 

서신일(徐神逸)

신라 말 고려 초의 호족. 광종 때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필(弼)의 아버지이다. 교외에 살 때 사슴이 뛰어 들어오자 화살을 뽑아주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와서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해하면서 “ 사슴은 내 아들인데 공에게 힘입어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이 되게 하리다. ” 라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80세에 필을 낳았는데, 필을 이어 희(熙) · 눌(訥)이 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서희(徐熙)

942(태조 25, 943?) ∼ 998(목종 1). 고려 전기의 정치가이며 외교가.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필(弼)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신일(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이어 재상위에 올랐고, 다시 아들 눌(訥) · 유걸(惟傑)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 ( 左僕射 )를 지냈다.

특히 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스스로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 · 내의시랑(內議侍郎) 등을 거쳤다.

983년(성종 2)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 ( 內史侍郎平章事 )를 거쳐 태보 ( 太保 ) · 내사령 ( 內史令 )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중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수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봉산군(蓬山郡)을 격파한 뒤, “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 ” 는 등의 위협을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동조하자 성종도 찬성하였다. 이 때 소손녕도 안융진 ( 安戎鎭 )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해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으로부터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받자, ‘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 ’ 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했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 ” 는 것과, “ 고려는 우리 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 ” 고 두 가지를 들었다.

그러나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 우리 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 : 곧 遼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盜據)해 완악(頑惡)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朝聘)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 라고 반박, 설득하였다.

이와 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 ( 歸州 ) · 흥화진 ( 興化鎭 )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한편 그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근엄하고 사리에 밝았던 것 같다.

일례로 성종이 서경에 행차했을 때 미행(微行)으로 영명사 ( 永明寺 )에 가서 놀이를 하고자 하는 것을 상소, 간언해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 지존(至尊)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 ” 라고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다시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 ” 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御酒)를 올리도록 한 사실에서도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를 올려 ‘ 시정(時政)의 일곱 가지 일 ’ 을 논한 것이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 그러나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자신에게 돌렸다고 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그는 말과 주과(酒果)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 그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996년(성종 15)에 병으로 개국사 ( 開國寺 )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해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천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서눌(徐訥)

신라 말 고려 초의 호족. 광종 때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필(弼)의 아버지이다. 교외에 살 때 사슴이 뛰어 들어오자 화살을 뽑아주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와서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해하면서 “ 사슴은 내 아들인데 공에게 힘입어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이 되게 하리다. ” 라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80세에 필을 낳았는데, 필을 이어 희(熙) · 눌(訥)이 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서유걸(徐惟傑)

우복야(右僕射)를 역임했다.

 

서정(徐靖)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1065년(문종 19) 전중소감(殿中少監)으로 거란에 다녀왔으며, 1089년(선종 6)에 삼사사(三司使)에 임명되고 계속해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어 재추의 반열에 들었다.

1092년에는 서북면병마사 겸 중군병마사(西北面兵馬使兼中軍兵馬使)로 나갔다가 곧 참지정사 ( 參知政事 )에 올랐으며, 다음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다.

 

서순(徐諄)

정의 손자 서순(諄 : 좌복야 균의 맏 아들)이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에 올라 강직(剛直) 하기로 유명했다.

 

서견(徐甄)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찬(瓚)의 아들이다. 1369년(공민왕 1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으며, 다음해 다른 간관 ( 諫官 )들과 함께 조준 ( 趙浚 )· 정도전 ( 鄭道傳 )· 남은 ( 南誾 )· 윤소종 ( 尹紹宗 ) 등 이성계 ( 李成桂 ) 일파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곧 정몽주 ( 鄭夢周 )가 피살되고 이성계와 조준·정도전이 실권을 장악하자 김진양 ( 金震陽 ) 등과 더불어 유배되었다.

 

서광준(徐光俊)

고려 고종(高宗) 때 영평(永平)에 살며 빈민규휼(貧民救恤)과 인재(人財) 등용에 공(功)이 많았던 인(鱗)의 손자 광준(光俊 : 고려말 사재감정을 역임)은 기산(箕山)에 은거(隱居)하며 백이숙제의 정절(貞節)을 견수하여,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분신자결했던 중보(仲輔)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서선(徐選)

1367(공민왕 16) ∼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숙(大叔) · 언부(彦夫), 호는 해화당(海華堂) · 신당(莘堂). 신일(神逸)의 후손이고, 대관서영 염(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내부시사 진(璡)이고, 아버지는 현령 원(遠)이다. 어머니는 정윤 최홍의(崔洪義)의 딸이다. 원천석 ( 元天錫 )의 문인이다.

1393년(태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396년에 문과에 급제, 이듬해 부봉사 ( 副奉事 )아 되었다. 1398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400년 문하주서가 되고, 이듬해 주부 ( 注簿 ), 병조좌랑 · 이조좌랑 겸 지제교,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으나, 계사(啓事)의 잘못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 죽산 ( 竹山 )에 유배되었다.

1405년(태종 5) 전사시영 · 세자시강원좌문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그리고 1408년 동부대언 · 경연참찬관 · 보문각직제학 · 지제교(知製敎) · 춘추관편수관 겸 군기감사, 지공조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1411년 우부대언 겸 군자감사, 지호조사가 되고, 이듬해 좌부대언 · 집현전직제학 겸 판사재감사 · 지형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에 우사간이 되어서도 말을 잘못해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事)로 좌천되었다. 1415년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어 동료들과 서얼의 차별 대우를 진언하였다. 그 뒤 예조우참의 · 우대언을 거쳐, 141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419년(세종 1) 고부 겸 청시부사(告訃兼請諡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 뒤 경기도 · 경상도 · 전라도 등의 관찰사와 형조 · 예조 · 이조의 참판 등 내외직을 지내고, 142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429년 판한성부사로 절일사(節日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431년 좌군도총제가 되었다. 마음가짐이 굳세고 자신이 맡은 관직에 부지런하며 정성스러웠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이천의 설봉서원 ( 雪峯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서강(徐崗)

?∼1461(세조 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후산(后山). 고려 내사령 ( 內史令 ) 희(熙)의 후손이며, 효손(孝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晉)이고, 아버지는 혼(混)이다. 어머니는 김순생(金筍生)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집현전부교리(集賢殿副校理), 경연부검토관(經筵副檢討官)으로 ≪세종실록≫ 편찬에 기사관 ( 記事官 )으로 참여하였다. 다음해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병요 兵要≫ 편찬에 참여, 품계가 한 단계 오르게 되었다.

1454년 행집현전부교리(行集賢殿副校理)로 ≪문종실록≫ 편찬에 기주관 ( 記注官 )으로 참여한 뒤, 사간원의 우헌납 ( 右獻納 )· 좌헌납 ( 左獻納 )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 뒤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로 원종공신 일등에 책봉되었다. 지사간원사 ( 知司諫院事 )를 거쳐 1459년(세조 5) 예문관직제학으로 사헌부감찰 이근(李覲)과 함께 왕명으로 ≪잠서주해 蠶書註解≫를, 다음해 김구 ( 金鉤 )· 최항 ( 崔恒 ) 등과 함께 ≪손자주해 孫子註解≫를 교정(校正)하였다.

1461년 대사성이 되었는데, 같은 해 7월 왕이 충순당(忠順堂)에서 종친 ( 宗親 )·재추(宰樞)를 불러 연회를 열고, 그도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이 때 왕은 그에게 병서(兵書)·장자(莊子)·노자(老子)·불교 등에 대해서 강(講)하게 했는데, 그는 왕의 숭불(崇佛)을 논변하다가 불경죄로 몰려 장(杖) 40여 도(度)를 맞고 후원(後苑)에 감금되었다가 교살당하였다.

그 뒤 세조는 언사(言事)에 의한 사사(賜死)를 뉘우치고 그의 후손을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였다. 1470년(성종 1)에는 그의 장모인 참판 이정손(李廷孫)의 처 윤씨(尹氏)의 상언 ( 上言 )으로 직첩(職牒)이 회복되었다. 평소 성품이 너그럽지 못하고 경박하다는 평이 있었으며, 시비의 변론을 좋아했다고 한다.

 

서기(徐起)

1523(중종 18) ∼ 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 · 구당(龜堂) · 이와( 蓬 窩). 구령(龜齡)의 아들이다. 서경덕 ( 徐敬德 ) · 이중호 ( 李仲虎 ) · 이지함(李之 旅 )을 사사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기술의 이론까지 통달하였으며, 선학(禪學)을 좋아하였다. 특히, 이지함을 만나면서 비로소 유학 ( 儒學 )이 정도(正道)임을 깨닫게 되었다. 홍주 ( 洪州 )와 지리산 · 계룡산 근처로 거처를 옮겨다니면서 오로지 학문과 강학에만 전념하였다. 충청남도 공주의 충현서원 ( 忠賢書院 )의 별사(別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 고청유고 孤靑遺稿 ≫ 가 있다.

 

서경충(徐敬忠)

1566(명종 21)∼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군보(君輔). 고려의 명신 서희 ( 徐熙 )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함경도에까지 침입해오자 순찰사 ( 巡察使 ) 윤탁연 ( 尹卓然 )을 찾아가 적군을 토벌할 방략을 제안하여 복병장(伏兵將)으로 기용되었다.

이어 300여명의 병사를 모집하여 함흥·홍원에서 왜군을 크게 섬멸하였으며, 그 공으로 군공일등(軍功一等)에 참록(參錄)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위좌부장(忠武衛左部將)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활약은 정문부 ( 鄭文孚 )의 의병활동과 더불어 함경도인의 기개를 크게 떨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행적은 신여철 ( 申汝哲 )이 지은 ≪북관지 北關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득천(徐得天)

득천(得天)과 사원(思遠) 부자(父子)는 임진왜란 때 사재(私財)를 털어 무기(武器)와 식량을 구입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서사적(徐思迪)

사원(思遠)의 아우 사적(思迪)은 아버지와 형이 전사하자 7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월성(月城)의 금장산(金莊山), 선산(善山)의 금오산(金鰲山), 형산강(兄山江) 등지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공을 세워 3부자 (父子)가 크게 명성을 떨쳤다.

 

서사근(徐思近)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했다.

 

서효행(徐孝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서지관(徐志寬)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서호(徐號)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역임했다.

 

서경천(徐慶千)

동래부사(東來府使)를 역임했다.

 

서상국(徐相國)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역임하였다.

 

서인원(徐仁元)

인원(仁元)은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

 

서예원(徐禮元)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됨.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34,156가구, 144,2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徐神逸(서신일)  선생의 일화

사슴의 보은

서(徐)처사 서신일(徐神逸)이 가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숨겨주어 사슴의 보은으로 80노령에 고려 충신이 된 서필(徐弼)을 낳았으며, 서필은 다시 거란의 대군을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徐熙)를 낳아 결국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했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徐起(서기) 선생의 일화.

1)

서고청 설화(孤靑 徐起 說話)

서고청의 어머니는 이진사 집 하인이었는데, 문둥병에 걸려 주인집에서 쫓겨나 유성 온천 근방의 공암(孔岩)이라는 바위굴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소금장수가 비를 피해 바위굴로 들어왔다가 여자를 보고 관계를 맺은 뒤, 성만을 가르쳐 주고 달아났다. 그 뒤 여자는 잉태를 하고 문둥병도 나아 다시 주인집에 들어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서고청이다.

서고청은 종 노릇을 하며 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공부를 하였다. 후에 그는 재주가 인정되어 주인집에서 공부를 시켰다. 친구들이 아비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하자 서고청은 어머니에게 자기의 출생 사연을 물어서 듣고는 공암 근처에서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암을 바라보고 웃는 소금장수 영감을 만나 웃는 이유를 물어본즉, 그가 바로 자기의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부자 상봉을 하였다. 그 뒤 서고청은 서당을 개설하여 많은 학동을 가르쳤는데, 서당이 분벽사창(粉壁紗窓 : 하얗게 꾸민 벽과 비단으로 바른 창이라는 뜻으로 주로 여자가 거처하는, 아름다운 방을 이르는 말)이었다.
어느 날 서고청이 출타한 때 한 사람이 찾아와 서당에 똥칠을 하고 사라졌는데, 서고청이 돌아와서 학동들로부터 이지함(李之菡)이 그랬다는 사연을 듣는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심충겸(沈忠謙)의 모부인이 과부로 살면서 沈相(심상)을 키웠는데, 徐起(서기)을 한 번 매질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밖에서 갈도성(喝導聲 : 지체 높은 이의 행차 때, 길 인도하는 下隷가 앞에 서서 소리를 질러 행인을 비키게 하는 소리)이 요란해 물어보니, 사대부들이 徐起(서기)가 죄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방문하는 소리라고 하였다. 이에 부인은 徐起(서기)를 불러 문자를 아는지 확인하고 아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徐起(서기)가 늘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서 아들을 가르치자 부인은 뒤에 徐起(서기)에게 良人(양인)이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徐起(서기)는 분수를 범하는 일이라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徐起(서기)는 송익필(宋翼弼)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삼노(三奴)의 명인(名人)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1523(중종 18) ∼ 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 · 구당(龜堂) · 이와( 蓬 窩). 구령(龜齡)의 아들이다. 서경덕(徐敬德) 이중호(李仲虎) 이지함(李之 旅 )을 사사하였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徐隲(서질)의 효핼전설

 

세상에 효자가 많기는 하지만 스승을 위하여 친아들의 예()로써 정성을 다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효자 윤은보(尹殷保)는 본관이 坡平(파평) 호는 철효(節孝)로 지례현 사람이다.

 

서질(徐隲)은 자를 덕이(德以), 호를 남계(南溪)라 하고 이천인(利川人) 아간(阿千) 신일(神逸)9세 손이다.

 

두 사람은 늘

우리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사람답게 길러 주시는 분은 스승님 이사다. 아들이 없는 우리 스승님을 모시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고, 두 사람은 다투어 스승을 모셨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스승과 함께 나누며 지냈다. 이 두 분의 스승은 장지도(張志道)였는데 후일 스승이 돌아가시자 두 제자는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친아들의 예로써 여묘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윤은보는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기별 이 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공은 병든 아버지를 간호함에 잠시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온갖 정성을 다한 끝에 다행히 아버지 병환이 낫자 다시 스승의 묘소로 돌아가 여묘에 들어갔다.

 

몇 개월 후, 윤은보의 꿈에 아버지가 편찮아 누워 계셨다. 곧 집으로 달려가 보니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했다.

 

하늘이시여, 제발 저의 아버님의 병환을 낫게 해 주시고 대신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구 아버지는 운명하셨다.

윤은보는 아버지의 산소 옆에 막을 짓고 못다한 효도를 애통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돌풍이 불어 제삿상에 놓였던 향합이 날아가 버렸다. 윤 효자는

나의 정성 이 부족하여 향합이 날아갔구나. 이 불효를 어찌 할고

 

하며 지성을 다해 서묘를 계속했다.

캄캄한 밤이면 산에서 온갖 짐승들의 울음소리기 그치지 않았고 조그마한 운박 속에서 비바람을 이겨내기는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부모님을 향한 뜨거운 효심으로 살을 에는 겨울에도 사묘에 정성을 다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였다.

까마귀 한 마리가 묘 주변을 돌 다가 향합을 물어다가 묘 앞에 던져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효자의 지성에 까마귀 가 감동했구만. ”

 

하고, 감탄함고 윤 효자의 효심을 칭송했다.

서묘를 끝낸 그는 자신의 앞길을 밝혀 참삶의 길을 열어 준 스승을 잊지 못해 초하루 보름에는 꼭 스승의 묘를 찾아 예를 드렸다.

 

서질은 아들이 없는 스승을 위해 3 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시묘를 하였다. 그렌데, 大喪(대상) 날이 되자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승의 제삿상에 고기를 올리고자 눈길을 나섰으나 눈이 키를 넘게 쌓여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서질은 눈길에 막혀 스승의 제사상에 고기 한 점 드리지 뭇 함을 슬퍼하여 밤새도록 동곡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 밖에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눈길에 누구일까?’ 이상가게 생각하고 문을 열자, 커다란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사라지고 있었다. 날이 새어 밖으로 나가 보니 묘 앞에 큰 노루 한 마리가 있었다.

새벽에 호랑이가 물어다 준 것이었다. 하늘에 닿은 효자의 지성에 감동되어 호랑이가 노루를 던져 줬으며 뒷사람 들이 그 곳을 정성현(精誠峴)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에도 스승의 묘를 극진히 보살피다 부모님이 벙환으로 앓아 눕자, 약을 구하기 위해 온갖 청성을 다했다. 마을 사람들은 연세가 많아서 힘들 것이니 농사나 지으며 임종을 기다려야지 살임만 버릴 뿐이라고 말렸으나, 그의 열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병이 있으면 약이 있겠지살을 에이는 추운 겨울에도 약초를 찾아 눈쌓인 산을 수 심리씩 들어가 길을 잃고 해멘적 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시자, 눈 덮인 산을 닷새나 헤매다가 꿩을 잡아 드렸다. 갖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노환이 깊어 돌아기시자, 그 에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모념 산소를 6년 동안이나 떠나지 않고 시묘하니, 세상 사람들이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했다.

 

한번은 서질이 시묘 도중 병이 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집안사람이

“3년 시묘도 힘든 터에 어찌 6 년이나 시묘를 하느냐?”

 

라고 말하며,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만류하였다. 그르나, 그는

이 몸을 부모님이 물려주시었는데 무엇이 아까워 내 몸 생각만 하는 불 효를 저지를까.”

 

하며 죽는 날까지 집으로 돌이가지 않겠노라고 거절했다.

하루는 꿈에 부모님이 말씀 하시기를

 

네 장성은 가륵하나 6년 시묘 동안 네 몸이 허약할 대로 허약해 졌으니 내 마음이 아프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내려가서 살림을 돌보도록 하여라.” 고 하시며, 흘연히 사라졌다.

 

다음 날 서질이 얼어냐니 아프던 몸이 가쁜하게 나아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효자를 돌보았다고 칭찬했다.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서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데 이 소중한 몸 을 주신 부모남의 은해를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어버이를 공경함은 으뜸가는 천륜 도리이니 세대가 다르다고 어찌 변할 수 있겠는가 !

 

서질과 윤은보의 가륙한 효성이 나라에까지 알려져 세종대왕이 두 사람에게 旌閭(정려)를 내려 지금도 그 정려각이 지례면 교리에 남아 있다.

 

<참고 문헌 내 고장 우리 향토, 효열행지

 

 

 

서질의 정려각.

 

 

 

 

 

徐甄(서견) 선생의 일화.

 

태조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울 때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후에는 고려조 신하들도 많이 기용했다. 이들 가운데 사헌부 장령 서견(徐甄)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대사헌 강희(강희)와 함께 이성계파인 趙浚(조준)鄭道傳(정도전)등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고는 관직을 사직하고 금천(지금의 시흥)에 살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태조가 이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고려조 신하가 그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만일 우리 이씨가 망한 뒤 이씨를 사모하는 신하가 있다면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그냥 내버려 둬라이 말에 임금 앞에서 무슨 역모나 발견한 듯 벌떼같이 일어났던 신하들이 잠잠해졌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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