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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보성선씨(宣)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宣(보성선씨)

 

 

본관(本貫): 보성(寶城)

시조(始祖): 선윤지(宣允祉)

유래(由來):

 

선씨(宣氏)는 중국(中國) 시평(始平:협서성 관중도 흥평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선백(宣伯)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선(宣)씨는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인 선윤지(宣允祉)가 1382년(고려 우왕 8)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歸化)하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은거(隱居)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 후 선윤지(宣允祉)는 유교(儒敎)의 진흥에 앞장섰고 인재 양성에 진력하며 보성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고려 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와 우문각대제학(右文閣 大提學)을 지낸 선원지(宣元祉)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선천계(宣天桂)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이 있었는데,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밝혀져서 1978년 합의에 의하여 동행(同行)으로 합보(合譜)를 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선안혁(宣安赫)

시조의 아들 안혁(安赫)이 태종(太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다.

 

선화(宣和)

증손 선화(和:호조 참판 광유의 아들)는 태종 때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진정(陳情)으로 두 번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선형(宣炯)

1434(세종 16) ∼ 1479(성종 10).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명여(明汝).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광유(光裕)이고, 아버지는 증 우찬성 의화(宜和)이다. 1451년(문종 1) 무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56년(세조 1) 12월 경흥부사로서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녹훈되었다.

1457년 3월 경상좌도수군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를 거쳐 안주목사 · 한성부윤 · 판종성부사(判鐘城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상호군 ( 上護軍 )으로서 도체찰사 ( 都體察使 ) 한명회 ( 韓明澮 )를 수행, 그의 신임을 얻었다. 10월에는 회령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한명회의 추천으로 증질(增秩)되었다.

1463년 4월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이듬해 정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4월에는 다시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1465년 정월에 경상도제언순찰사(慶尙道堤堰巡察使)가 되어 경주 북천(北川)의 제언 수축에 공을 세웠다. 6월에는 의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절도사 김겸광 ( 金謙光 )과 뜻이 맞지 않아 교체되었다.

1467년 정월 비록 무장이지만, 성품이 염간(廉簡)하다고 하여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이시애 ( 李施愛 )의 난이 일어나자 선군 ( 船軍 ) 동원을 적극 주장하였다. 같은 해 7월 형조참판으로서 1,000인의 군졸을 이끌고 오자경 ( 吳子慶 ) · 한계미 ( 韓繼美 ) 등과 1진을 이루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적개공신 ( 敵愾功臣 ) 3등에 녹훈되고 황해도병마사 · 수군절도사에 임명되는 동시에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 6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성종 즉위에 공이 있어 좌리공신 ( 佐理功臣 ) 4등에 녹훈되었다.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8월 자헌대부 ( 資憲大夫 )로 유성군에 다시 봉해졌다. 그러나 1473년 2월 영안북도절도사로 있을 당시 올적합(兀狄哈)이 온성 지방에 침입했으나 이를 구원하지 못했다고 하여 군기실오(軍機失誤)의 죄를 입어 고신 ( 告身 )을 회수당하였다.

이듬해 5월 사헌부 ·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특명으로 고신을 돌려받고, 그 뒤 유성군으로 북방에 대한 변사(邊事)에 자문하는 등 한가하게 지냈다. 1477년에는 지중추부사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도 보성의 오충사 ( 五忠祠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양(平襄)이다.

 

선국충(宣國忠)

문종(文宗)때 순무사(巡撫使)를 지낸 청유(淸裕)의 아들 국충(國忠)은 세조(世祖)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선거이(宣居怡)

1550(명종 5)∼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판서 형(炯)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도사 ( 都事 ) 상(祥)이다. 1569년(선조 2)에 선전관 ( 宣傳官 )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 ( 李鎰 )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 ( 李舜臣 )과 함께 녹둔도 ( 鹿屯島 )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진도군수를 역임하고 이어 청백(淸白 : 맑고 깨끗한 행세)으로 성주목사를 거쳐 1591년에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7월에 한산도해전에 참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 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전라도병사로서 전라순찰사 권율 ( 權慄 )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이 때 크게 부상당하였다.

이어 다음해인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권율이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다.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 ( 屯田 )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또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수사가 되고 다음해 황해병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울산 전투에 참가, 명장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전투에서도 서로 도와 이름이 높았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의 오충사 ( 五忠祠 )에 제향되었다.

 

선약해(宣若海)

1579(선조 12) ∼ 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백종(伯宗). 퇴휴당(退休堂) 윤지(允祉)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부사 ( 府使 ) 의문(義問)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 선전관 ( 宣傳官 )이 되었다.

1631년(인조 9)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국서 (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 ( 大義 )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가 승진되었다.

이와 함께, 금편(金鞭 : 금으로 도금한 말의 채찍) · 초구(貂 汨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갑옷) · 옥배(玉盃) 등을 하사받았다. 뒤에 평산부사 ·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보성의 오충사 ( 五忠祠 )에 제향되었다.

 

선세강(宣世綱)

1576(선조 9)∼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谷). 아버지는 참의 봉장(鳳章)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광해군 10) 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使)를 제수받았다. 그 뒤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당상관이 된 뒤에 홍주영장(洪州營將)·안동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 ( 許完 )과 함께 경기도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패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장흥의 포충사 ( 褒忠祠 ), 보성의 오충사 ( 五忠祠 )에 제향되었다.

 

선극례(宣克禮)

세강의 9세손 극례(克禮)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무용(武勇)을 떨쳐 명망이 높았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왜군 섬멸에 전공을 세웠으나 잔적을 소탕하다가 아깝게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선해수(宣海壽)

해수(海壽)는 판관(判官)으로 전장에서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계승하였다.

 

선세휘(宣世徽)

세강의 아우 세휘(世徽)는 문신(文臣)으로 유명했는데, 전적(典籍)과 춘추관 (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거쳐 장령(掌令)을 지냈으나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데 가담했다가 화(禍)를 입었다.

 

선여경

여경은 임진왜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였고 평양(平壤) 전투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다.

 

선여룡(宣汝龍)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선중의(宣仲義)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선경백(宣敬伯)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선의경(宣義卿)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1

圭(규),錫(석)

鎬(호),泳(영)

25

戊(무),茂(무)

成(성)

29

壬(임),性(성)

重(중)

22

鐘(종),泰(태)

永(영),相(상)

26

己(기),起(기)

熙(희)

30

癸(계),天(천)

發(발)

23

浩(호),來(래)

柱(주),炳(병)

27

庚(경),慶(경)

康(강)

31

 

24

東(동),容(용)

炳(병),壽(수)

28

幸(행),宰(재)

新(신)

32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선씨(宣氏)는 남한(南韓)에 총 7,754 가구, 33,6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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