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순창설씨:경주설씨(薛)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薛(순창:경주설씨)

 

 

본관(本貫): 순창(淳昌):경주(慶州)

시조(始祖): 설거백(薛居伯)

유래(由來):

 

설씨(薛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원훈(元勳)으로 지금의 월성군 천북면(月城郡川北面) 화산(花山)·물천(勿川)·동산리(東山里)와 안강읍(安康邑) 일대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다스렸던 촌장(村長)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7년 다른 5부(五部)의 촌장들 과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초대 왕(王)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웠다고 하며, 서기 32년 봄 3대 유리왕(儒理王) 때 고야촌이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면서 설씨(薛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설(薛)씨는 설거백(薛居伯)을 시조로 받들고 서라벌 (徐羅伐)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자승(子升)이 고려 인종(仁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순화 백(淳化伯 : 순창의 옛 지명)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이관(移貫)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설사(薛思)

신라시대에 불유사상(佛儒思想)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사(思) 즉 원효대사(元曉大師)는 설(薛)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617(진평왕 39) ∼ 686(신문왕 6). 신라시대의 승려. 성은 설씨(薛氏), 원효는 법명(法名), 아명은 서당 ( 誓幢 ) 또는 신당(新幢). 경상북도 압량(押梁 : 지금의 慶山郡)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그의 아들 설총 ( 薛聰 )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원효의 집은 본래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어머니가 원효를 임신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을 하였다.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 불렀다고 전하며 또, 밤이 이상하게 커서 이를 사라밤 〔 裟羅栗 〕 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행 적〕 원효는 15세경에 출가하여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 ( 典籍 )을 섭렵하여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기록에는 원효가 고구려로부터 망명하여 완산주 ( 完山州 )에 와 있던 보덕 ( 普德 )을 스승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시대적으로 보아 자장 ( 慈藏 )으로부터 불도를 배웠을 가능성이 많다.

원효는 34세 때 스스로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하다가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 ( 義湘 )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요동까지 갔다가 도중에 고구려군에게 잡혀 귀환하였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여행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 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 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로 홀로 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것은 655년에서 660년, 즉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 실계(失戒)의 사실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실계 뒤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였다.

어느 날 한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하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에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 화엄경 ≫ 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 ” 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 무애가 無 寐 歌 〉 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다. 혹은 금빛 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혹은 ≪ 화엄경 ≫ 에 대한 주소(註疏)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 ( 祠堂 )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 ( 坐禪 )하는 등 임의로 기회를 좇아 생활하되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행적 또한 뚜렷한 어떤 규범을 따르지 않았고, 또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받았던 밥상을 내동댕이치고 사람을 구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입 안에 물고 있던 물을 뱉어 불을 끄기도 하였다.

한날 한시에 여러 곳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온 천하를 다 찾아도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교화방법은 중국의 고승 배도(杯度)나 지공(誌公)을 닮은 데가 많았다.

〔업 적〕 원효가 ≪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 ≫ 을 찬술할 때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여 온다. 한번은 국왕이 100명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을 초청하여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를 열었을 때 상주(湘州) 사람들이 원효를 천거하자, 다른 승려들이 그 인품이 나쁘다고 헐뜯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왕후가 종기를 앓게 되어서 아무리 좋은 약을 다 써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왕은 왕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영험이 있다는 명산대천을 다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리던 중 한 무당이 말하기를, “ 사람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약을 구하게 하면 그 병이 곧 나을 것 ” 이라고 하였다. 왕은 곧 당나라에서 좋은 약과 의술에 능한 사람을 구하도록 사신을 보냈다. 왕명을 받은 사신 일행이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바닷물 속으로부터 한 노인이 솟아올라 사신들을 용궁으로 데리고 갔다.

용왕은 자기의 이름을 금해(鈐海)라 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 경들 나라의 왕비는 바로 청제(靑帝)의 셋째공주요. 우리 용궁에는 일찍부터 ≪ 금강삼매경 ≫ 이라는 불경이 전하여 오는데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으로 되어 있소. 원만하게 열린 보살행(菩薩行)을 설명하여 주는 불경이오. 신라 왕비의 병으로 인하여 좋은 인연을 삼아, 이 불경을 당신들의 나라로 보내어 널리 알리고자 사신들을 부른 것이오. ”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효가 이 ≪ 금강삼매경 ≫ 에 대한 주석서 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게 되었다.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 · 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원효는 ≪ 금강삼매경 ≫ 의 강해(講解)를 시작하였다. 그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 금강삼매경 ≫ 의 강설을 끝내고 원효는 “ 지난 날 나라에서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그 속에 끼일 수도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 혼자 그 일을 하는구나. ”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고승들은 부끄러워하면서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그 뒤 조용한 곳을 찾아 수도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 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 대승기신론소 ≫ 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 금강삼매경론 ≫ 은 인도의 마명 ( 馬鳴 ) · 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 ( 和諍思想 )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 · 무애사상(無 寐 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 하나 ’ 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사 상〕 (1) 일심사상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 금강삼매경론 ≫ · ≪ 대승기신론소 ≫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 :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 ( 六波羅蜜 )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 · 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 · 불성 ( 佛性 ) · 열반이라고 불렀다.

(2) 화쟁사상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 화엄경 ≫ · ≪ 반야경 ≫ · ≪ 열반경 ≫ · ≪ 해심밀경 海深密經 ≫ · ≪ 아미타경 ≫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 ≫ 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화쟁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 쟁론(諍論)은 집착에서 생긴다. 어떤 이견(異見)의 논쟁이 생겼을 때, 가령 유견(有見)은 공견(空見)과 다르고 공집(空執)은 유집(有執)과 다르다고 주장할 때 논쟁은 더욱 짙어진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을 같다고만 하면 자기 속에서 서로 쟁(諍)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異)도 아니요 동(同)도 아니라고 설한다. ”

또 “ 불도(佛道)는 광탕(廣蕩)하여 무애무방(無 寐 無方)하다. 그러므로 해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체의 타의(他義)가 모두 불의(佛義)이다. 백가(百家)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견문이 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 하니, 이것은 마치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본 사람이 그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 함과 같다. ” 라고 하였다. 원효는 이처럼 철저한 논리의 근거를 가지고 화쟁을 주장하였다.

(3) 무애사상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 寐 人 一道出生死). ” 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 ”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저 서〕 현재 알려져 있는 저서로는 ≪ 대혜도경종요 大慧度經宗要 ≫ 1권(存), ≪ 금강반야경소 金剛般若經疏 ≫ 3권(失), ≪ 반야심경소 般若心經疏 ≫ 1권(失), ≪ 법화경종요 法華經宗要 ≫ 1권(存), ≪ 법화경방편품요간 法華經方便品料簡 ≫ 1권(失), ≪ 법화경요략 法華經要略 ≫ 1권(失), ≪ 법화약술 法華略述 ≫ 1권(失), ≪ 금강삼매경론 ≫ 3권(存), ≪ 화엄강목 華嚴綱目 ≫ 1권(失), ≪ 화엄경소 華嚴經疏 ≫ 10권(제3권 存), ≪ 화엄경종요 華嚴經宗要 ≫ (失)이 있다.

그리고 ≪ 화엄경입법계품초 華嚴經入法界品抄 ≫ 2권(失), ≪ 대승관행 大乘觀行 ≫ 1권(失), ≪ 일도장 一道章 ≫ 1권(失), ≪ 승만경소 勝 壇 經疏 ≫ 2권(失), ≪ 미륵상하생경기 彌勒上下生經記 ≫ 3권(失), ≪ 유마경종요 維摩經宗要 ≫ 1권(失), ≪ 유마경소 維摩經疏 ≫ 3권(失), ≪ 금광명경소 金光明經疏 ≫ 8권(失), ≪ 능가경소 楞伽經疏 ≫ 7권(失), ≪ 능가경요간 楞伽經料簡 ≫ (失), ≪ 능가경종요 楞伽經宗要 ≫ 1권(失), ≪ 해심밀경소 解深密經疏 ≫ 3권(序存)이 있다.

그리고 ≪ 부증불감경소 不增不減經疏 ≫ 1권(失), ≪ 방광경소 方廣經疏 ≫ 1권(失), ≪ 범망경종요 梵網經宗要 ≫ 1권(失), ≪ 범망경소 梵網經疏 ≫ 2권(失), ≪ 범망경약소 梵網經略疏 ≫ 1권(失), ≪ 범망경보살계본사기 梵網經菩薩戒本私記 ≫ 2권(上卷存), ≪ 보살계본지범요기 菩薩戒本持犯要記 ≫ 1권(存), ≪ 보살영락본업경소 菩薩瓔珞本業經疏 ≫ 3권(序 · 上卷存), ≪ 사분율갈마소 四分律 珏 磨疏 ≫ 4권(失), ≪ 대승육정참회 大乘六情懺悔 ≫ 1권(存)이 있다.

그리고 ≪ 발심수행장 發心修行章 ≫ 1권(存), ≪ 육현관의발보리심의정의함 六現觀義發菩提心義淨義含 ≫ 1권(失), ≪ 조복아심론 調伏我心論 ≫ 1권(失), ≪ 광백론종요 廣百論宗要 ≫ 1권(失), ≪ 광백론촬요 廣百論撮要 ≫ 1권(失), ≪ 광백론지귀 廣百論旨歸 ≫ 1권(失), ≪ 삼론종요 三論宗要 ≫ 1권(失), ≪ 중관론종요 中觀論宗要 ≫ 1권(失), ≪ 장진론종요 掌珍論宗要 ≫ 1권(失), ≪ 장진론요간 掌珍論料簡 ≫ 1권(失), ≪ 유가초 瑜伽抄 ≫ 5권(失)이 있다.

그리고 ≪ 유가론중실 瑜伽論中實 ≫ 4권(失), ≪ 성유식론종요 成喩識論宗要 ≫ 1권(失), ≪ 양섭론소초 梁攝論疏抄 ≫ 4권(失), ≪ 섭대승론세친석론약기 攝大乘論世親釋論略記 ≫ 4권(失), ≪ 섭대승론소 攝大乘論疏 ≫ 4권(失), ≪ 중변분별론소 中邊分別論疏 ≫ 4권(存), ≪ 변중변론소 辨中邊論疏 ≫ 4권(失), ≪ 잡집론소 雜集論疏 ≫ 5권(失), ≪ 보성론종요 寶性論宗要 ≫ 1권(失), ≪ 보성론요간 寶性論料簡 ≫ 1권(失)이 있다.

그리고 ≪ 인명론소 因明論疏 ≫ 1권(失), ≪ 판비량론 判比量論 ≫ 1권(存), ≪ 인명입정리론기 因明入正理論記 ≫ 1권(失), ≪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 ≫ 2권(存), ≪ 기신론별기 起信論別記 ≫ 2권(存), ≪ 대승기신론종요 大乘起信論宗要 ≫ 1권(失), ≪ 대승기신론요간 大乘起信論料簡 ≫ 1권(失), ≪ 대승기신론대기 大乘起信論大記 ≫ 1권(失), ≪ 대승기신론사기 大乘起信論私記 ≫ 1권(失), ≪ 기신론일도장 起信論一道章 ≫ 1권(失)이 있다.

그리고 ≪ 이장의 二障義 ≫ 1권(存), ≪ 초장관문 初章觀文 ≫ 2권(失), ≪ 이제장 二諦章 ≫ 1권(失), ≪ 십문화쟁론 ≫ 2권(存), ≪ 유심안락도 遊心安樂道 ≫ 1권(存), ≪ 안신사심론 安身事心論 ≫ 1권(失), ≪ 구도비유론 求道臂喩論 ≫ 1권(失), ≪ 청변호법공유정론 淸辨護法空有淨論 ≫ 1권(失), ≪ 성실론소 成實論疏 ≫ 16권(失), ≪ 아미타경통찬소 阿彌陀經通讚疏 ≫ 2권(失), ≪ 무량의경종요 無量義經宗要 ≫ 1권(失), ≪ 무량수경종요 無量壽經宗要 ≫ 1권(存)이 있다.

또 ≪ 무량수경요간 無量壽經料簡 ≫ (失), ≪ 무량수경사기 無量壽經私記 ≫ 1권(失), ≪ 아미타경소 阿彌陀經疏 ≫ 1권(存), ≪ 무량수경소 無量壽經疏 ≫ 1권(失), ≪ 열반경종요 涅槃經宗要 ≫ 2권(存), ≪ 열반경소 涅槃經疏 ≫ 5권(失), ≪ 반주삼매경소 般舟三昧經疏 ≫ 1권(失), ≪ 반주삼매경약기 般舟三昧經略記 ≫ 1권(失), ≪ 미륵상생경종요 彌勒上生經宗要 ≫ 1권(存) 등이 있다.

 

설총(薛聰)

655(태종무열왕 2) ∼ ? 신라 중대의 대학자. 자는 총지 ( 聰智 ).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 ( 奈麻 )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 ( 元曉 ),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 ( 翰林 )에 이르렀다. ≪ 증보문헌비고 ≫ 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 삼국유사 ≫ 〈 원효불기 元曉不羈 〉 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 ∼ 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 ( 九經 )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 ( 强首 ) · 최치원 ( 崔致遠 )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 삼국사기 ≫ 에 “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 라 했고, ≪ 삼국유사 ≫ 에는 “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 :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 〔 海東 〕 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 ” 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 吏讀 · 吏道 · 吏吐 · 吏套 · 吏頭 · 吏札 ’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 표기법인 향찰 ( 鄕札 )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했다고 해서 이것을 이두 또는 향찰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향가 표기식 방법, 즉 향찰은 설총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 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 서동요 薯童謠 〉 · 〈 혜성가 彗星歌 〉 와 선덕여왕 때의 〈 풍요 風謠 〉 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봄이 타당하다.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또는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필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 때 국학 ( 國學 )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 삼국사기 ≫ 를 엮을 때 이미 “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 ” 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 〈 화왕계 花王戒 〉 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 ≪ 삼국사기 ≫ 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 〈 화왕계 〉 는 〈 풍왕서 諷王書 〉 라는 이름으로 ≪ 동문선 ≫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 ( 文廟 ) 동무(東 黛 )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설경(薛鏡)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29세손 설경(鏡)이 태조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다.

 

설신(薛愼)

39세손 설신(愼)은 고종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순화백(淳化伯)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공검(公儉)과 인검(仁儉)이 뛰어났다.

 

설겅검

고종 때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공검은 예부 낭중(禮部郎中)과 군기감(軍器監)을 거쳐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지내고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여 청렴으로 이름을 떨쳤다.

 

설인검

겅검의 아우 인검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설지충(薛之沖)

공검의 아들 지충(之沖)은 충숙왕(忠肅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설봉(薛縫)

지충의 아들 설봉(縫)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였다.

 

설안통(薛安統)

충정왕조(忠定王朝)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손자 안통(安統 : 봉의 아들)은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설위(薛緯)

조선조서 세종(世宗) 때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설위(緯)가 시(詩)와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다.

 

설효조(薛孝祖)

창덕궁직장(昌德宮直長) 훈( )의 맏아들 효조(孝祖)는 목사(牧使)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설계조(薛繼祖)

효조의 아우 계조(繼祖)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功)을 세워 정난삼등공신(靖難三等功臣)으로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다.

 

설주(薛柱)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역임하였다.

 

설초(薛礎)

옥구현감(沃溝縣監)을 역임하였다.

 

설우범(薛禹範)

우범(禹範)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남원(南原)·거제(巨濟)·옥포(玉浦)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의 주(義州)로 피난 가는 선조(宣祖)을 호종(扈從)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이르렀다.

 

설랑후

영조(英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창후(昌 )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설응정(薛應貞)

간성군수(杆城郡守) 겸 수군방어사(水軍防禦使)를 지냄.

 

설술남(薛述男)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역임하였다.

 

설흥범(薛興範)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설광윤(薛光潤)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61

鎭(진)

65

在(재)

69

在(재),榮(영)

62

洙(수)

66

澈(철),錫(석)

70

鉉(현),瑢(용)

63

東(동)

67

相(상),泰(태)

71

濟(제),鐘(종)

64

煥(환)

68

燦(찬),植(식)

72

樟(장),潤(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설씨(薛氏)는 남한(南韓)에 총 8,177 가구, 34,2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325 밀양 손.jpg 밀양손씨(孫) 청남 14-08-29 6972
324 경주 손.jpg 경주손씨(孫) 청남 14-08-29 4337
323 진주 소.jpg 평산소씨:진주소씨(邵) 청남 14-08-29 4080
322 성씨(星) 청남 14-08-27 2414
321 창녕 성.jpg 창녕성씨(成) 청남 14-08-27 5759
320 경주 섭.jpg 경주섭씨(葉) 청남 14-08-27 2713
319 경주 설.jpg 경주설씨(薛) 청남 14-08-27 3111
순창 설.jpg 순창설씨:경주설씨(薛) 청남 14-08-27 4625
317 선우.jpg 태원선우씨(鮮于) 청남 14-08-27 3640
316 보성 선.jpg 보성선씨(宣) 청남 14-08-27 5613
315 월성 석.jpg 월성석씨:경주석씨(昔) 청남 14-08-27 4665
314 해주 석.jpg 해주석씨(石) 청남 14-08-27 3698
313 충주 석.jpg 충주석씨: 홍주석씨(石) 청남 14-08-27 3946
312 안음 서문.jpg 안음서문씨(西門) 청남 14-08-27 3170
311 서씨(西) 청남 14-08-27 2314
310 평당 서.jpg 평당서씨(徐) 청남 14-08-27 2855
309 절강 서.jpg 절강서씨(徐) 청남 14-08-27 2617
308 장성 서.jpg 장성서씨(徐) 청남 14-08-27 3535
307 이천 서.jpg 이천서씨(徐) 청남 14-08-27 3990
306 연산 서.jpg 연산서씨(徐) 청남 14-08-27 3484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