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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경주설씨(薛)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薛(경주설씨)

 

 

본관(本貫): 경주(慶州)

시조(始祖): 설장수(薛長壽)

유래(由來):

 

설씨(薛氏)는 회골계(回 系)의 후예(後裔)가 설련하(薛輦河)에 세거(世居)하면서 성(姓)을 설(薛)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원(元)나라 태부(太傅)인 극직(克直)의 6세손 설문질(薛文質)이 원조(元朝)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후 설문질의 손자 설 손(遜)이 원(元)나라 순제(順帝 : 마지막 왕, 재위기간 : 1333-1368) 때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치고 단본당정자(端本堂正字)로 있으면서 황태자(皇太子)에게 「경전(經典)」을 강론했으나 승상(丞相)의 비위에 거슬려 단주 유수 (單州留守)로 좌천되었다가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여 1358년(고려 공민왕 7) 고려에 망명하자 공민왕(恭愍王)은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친히 사귄 친구 사이므로 그를 부원후(富原侯)에 봉하고 논과 밭을 내려주어 우대하였다.

이듬해 아들 5형제가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화하여 맏아들 장수(長壽)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공양왕(恭讓王) 때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화(禍)를 입을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태조(太祖)에 의해 풀려나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계림(鷄林)을 사적(賜籍)받아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전후 8차례나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시(詩)·서 (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안렴부사 (按廉副使)을 역임한 아우 경수(慶壽), 미수

(眉壽)와 함께 가문(家門)을 반석(盤石)위에 올려놓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설미수(薛眉壽)

1359(공민왕 8)∼1415(태종 15).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천용(天用). 원래 원나라의 고창(高昌) 사람으로서 고려에 귀화하였다. 아버자는 숭문감승(崇文監丞) 손(遜)이며, 장수(長壽)의 아우이다. 1376년(우왕 2)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였다.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판각문사(判閣門事)가 되었다. 그 뒤 공조전서(工曹典書)·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중군총제(中軍摠制)·병조참지·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지의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03년에는 계품사(啓稟使)로, 1406년에는 성절사로, 이듬해에는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사은사로 두 차례, 전후 다섯번에 걸쳐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는 그가 중국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인데, 항상 마필이나 금·은 등 공물의 감면을 주선하여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1407년에는 참지의정부사로 재직중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고, 호조와 공조의 판서를 거쳐, 1410년 예조판서,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1414년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그는 효우(孝友)가 뛰어나 항상 공손하고 근신하였으며, 네 형이 모두 먼저 죽자 어린 조카들을 잘 돌보아 길렀다. 의정부에 재직했을 때는 관대함을 숭상하여 분경(奔競 : 大官이나 勢道家에 출입하면서 獵官이나 利權運動을 하는 행위)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호는 공후(恭厚)이다.

 

설순(薛循)

? ∼ 1435(세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 자는 보덕 ( 輔德 ). 고려 때 귀화한 위구르(Uighur, 回 結 )출신 손(遜)의 손자로 장수(長壽)의 아들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 1420년(세종 2) 교리, 이듬해 좌사경(左司經), 1425년 시강관을 거쳐 인동현감이 되었다.

1427년 문과중시에 합격, 이듬해 왕명으로 ≪ 효행록 孝行錄 ≫ 을 증수하였고, 1431년 집현전부제학으로서 ≪ 삼강행실도 ≫ 를 편수하기 시작, 1434년 완성하였으며, 그해 이조 우참의가 되어 윤회 ( 尹淮 ) 등과 함께 ≪ 통감훈의 通鑑訓義 ≫ 를 저술하였고,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여러 분야의 학문에 박학하였으며 특히 역사에 뛰어났고,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설유(薛猷)

좌참찬(左參贊) 미수(眉壽)의 아들 설유(猷)가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다.

 

설침(薛琛)

부승(副丞) 동인(同寅 : 순의 아들)의 아들 설침(琛)은 군수(郡守)를 역임.

 

설종한(薛宗漢)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다.

 

설만구(薛萬耉)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였다.

 

 

元曉(원효) 대사의 설화.

 

1)

원효모의 꿈.

원효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 할 때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였다. 그리하여 보통아기가 아닌 휼륭한 아기를 잉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과연 해산할 때가 되자 오색구름이 산모가 있는 집과 땅을 덮어서 더욱 이상하게 생각 하였다.
원효는 천성이 남달리 총명하여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궁리해서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쳤다.

 

2)

자루없는 도끼

어느 날 원효가 미친 듯이 서라벌 거리를 누비며 노래를 불렀다.
“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고 하였다.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 대사께서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하신다.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유익이 없다. ”
고 말하고 궁리(宮吏)를 보내어 원효를 데려오게 하였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때마침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가 일부러 물 가운데 떨어져 옷을 적시니 요석궁(瑤石宮)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였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공주가 거처하고 있었다. 원효가 요석궁에 머무르게 된 뒤, 공주는 잉태하여 우리 역사에 빛을 남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3)

원효의 무애가

원효는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뒤로는 승복을 벗어던지고 세속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이름하였다. 길거리에서 광대가 춤추며 노는 것을 보고 큰 표주박을 하나 얻어서 춤추는 도구로 삼고 그것을 이름하여 ‘ 무애(無碍 ) ’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 화엄경 ≫ 의 게구(偈句)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는 무애를 가지고 〈 무애가 〉 를 부르며,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음영(敎化吟詠)하고 다녔다.
이에 가난하고 몽매한 무리들까지 모두 원효의 익살스러운 무애가를 듣고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염불 한마디는 다 하게끔 되었으니, 원효가 끼친 교화는 참으로 컸다. 

                                                

4)

움직인 원효의 초상화
원효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설총이 절을 하니 원효의 초상화의 상이 문득 고개를 돌려 설총 쪽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초상은 그 이후 돌아보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다시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41

基(기)

45

烈(열)

49

植(식)

42

鎭(진)

46

在(재)

50

煥(환)

43

源(원)

47

鉉(현)

51

圭(규)

44

杓(표)

48

澤(택)

52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설씨(慶州 氏)는 남한(南

韓)에 총 442가구, 1,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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