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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成)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成(창녕성씨)

 

 

본관(本貫): 창녕(昌寧)

시조(始祖): 성인보(成仁輔)

유래(由來):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고려 때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 중윤(戶長中尹)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고종(高宗 : 추정) 때 창성(創姓) 한 것으로 전하며, 창녕읍(昌寧邑)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대지면 모산리맥산(大地面牟山里麥山)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어느 해 정월 초 송경(松京)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 곳에 갔다가 병사(病死)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던 그의 아들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등에 업고 울며 천리 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 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니 지금의 묘자리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혀 있었는데도 묘자리 넓이 만큼은 눈이 녹아 있어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그후 창녕 성씨는 시조의 손자 공필(公弼)·한필(漢弼) 대(代)에서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져서 6세에 내려와 기(紀 : 판윤 한충의 아들, 판서를 역임)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명성을 떨쳐 영남지방의 명문(名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성여완(成汝完)

1309(충선왕 1) ∼ 1397(태조 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한생(漢生 : 일명 匡自), 호는 이헌(怡軒). 창녕 성씨의 시조인 인보(仁輔)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전객서부령 공필(公弼)이고, 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郎) 군미(君美)이며, 어머니는 삼사좌윤 오천(吳 蓚 )의 딸이다.

1336년(충숙왕 복위 5)에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簽書密直) · 정당문학을 역임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민부상서로 있을 때 신돈 ( 辛旽 )이 처형당하자 그 당류로 지목되어 장류(杖流 : 장형을 받고 유배됨)당하였다가 1378년(우왕 4)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에 다시 발탁되었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정변에 아들 석린(石璘)이 참여, 9공신이 되었으나 1392년에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 ( 李成桂 )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포천 계류촌(溪流村)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고려 구신(舊臣)의 회유책으로 검교문하시중, 창녕부원군에 봉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석린(成石璘)

1338(충숙왕 복위 7) ∼ 1423(세종 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할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郞) 군미(君美)이고, 아버지는 부원군 여완(汝完)이다. 어머니는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1341년 동정직 ( 同正職 )으로 사온서승(司 倍 署丞)을 받고, 1355년에는 사마시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다.

승진하여 사관 ( 史官 )으로 있을 때, 이제현 ( 李齊賢 )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항상 글을 짓게 하였다. 이어 예문관 ( 藝文館 )의 공봉 ( 供奉 ), 삼사 ( 三司 )의 도사 ( 都事 ), 전의시 ( 典儀寺 )의 주부 ( 注簿 ) 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 : 뒤의 尙瑞院)의 필도치( 斂 斤 赤)로 등용하였다. 다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 · 지인상서(知印尙書) · 예부총랑(禮部摠郎) 등을 역임했는데, 신돈 ( 辛旽 )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내직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 삼사좌윤(三司左尹) · 밀직사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 · 지신사(知申事) · 제학 ( 提學 ) 등을 지냈다.

 

1380년(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나라 장수 양백연 ( 楊伯淵 )이 원수(元帥)가 되고, 그는 부장 ( 副將 )이 되어 맞아 싸웠다.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여러 장수가 이에 따라 적을 무찔렀다. 그 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그도 함안에 유배되었다.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 ( 昌原君 )에 봉해지고 바로 정당문학 ( 政堂文學 )에 올랐다. 외직으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주 · 군에 의창 ( 義倉 )의 설치를 건의했는데, 조정에서 이를 채택하여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와 대사헌이 되었다. 1390년 지공거 ( 知貢擧 )로서 이조(李朝)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 ( 錄券 )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가 되었고, 1393년(태조 2)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를 거쳤다. 이듬해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3인, 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 · 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 도절제사 ( 都節制使 ) · 평양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다. 익대공신 ( 翊戴功臣 )의 녹권이 내려지고,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 ( 佐命功臣 )이 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2년(태종 2) 영의정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1415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 廓 杖)이 하사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물었는데,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석린이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 양화(養和) ’ 라고 이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성석용(成石瑢)

대제학(大提學)을 역임.

 

성석연

대사헌(大司憲)·우정승·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

 

성석번

낭장(郎將)을 역임.

 

성달생(成達生)

1376(우왕 2)∼1444(세종 26). 여말 선초의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효백(孝伯). 정당문학사의(政堂文學商議) 여완(汝完)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 석용(石瑢)이다.

1390년(공양왕 2) 생원시에 급제하고 부음(父蔭)으로 벼슬에 나갔다. 1400년(정종 2) 2월 낭장 재직시에 평소부터 그를 총애했던 왕세제(王世弟) 정안군(靖安君)의 천거로 호군 ( 護軍 )에 초수(超授)되었다. 그리고 1402년(태종 2) 조선시대 처음으로 실시된 무과에서 장원으로 급제, 대호군에 승진되었다.

1407년에는 흥덕진병마사(興德鎭兵馬使)로서 그 곳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410년 무과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 다시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에 승진했으며, 그 뒤 웅무시위사첨절제사(雄武侍衛司僉節制使)·판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에는 경성절제사로 파견되어 뛰어난 무예로써 야인 위무에 공헌하고, 다음 해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7년 전라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 1418년(세종 즉위년) 동지총제를 거쳐 내금위삼번절제사(內禁衛三番節制使)가 되어 상왕(上王 : 太宗)과 세종이 모화루(慕華樓)에서 명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 별운검총제(別雲劒摠制)의 직책상 패검(佩劒 : 칼을 참)했는데 이 일로 세종으로부터 질책받아 파직되었다.

같은 해 함길도병마도절제사 겸 판길주목사로 파견되면서 복직되었으나, 곧 강상인(姜尙仁) 옥사에 연루되어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다. 그러나 곧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배려로 사면되었다.

1419년 중군총제에 서용되었고, 같은 해 대마도정벌과 관련되어 전라·경상·충청도 수군도처치사(水軍都處置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승선을 꺼려 무단 하륙한 일로 논죄된 뒤 연산 ( 連山 )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고 다시 좌군동지총제에 서용되었다.

1420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뒤, 경상우도수군도절제사·경상우도수군도안무처치사·좌군총제를 거쳤다. 1422년 여연 ( 閭延 )에 침입한 야인의 격퇴를 위해 특별히 평안도도관찰사로 파견되었으며, 다음 해 관내의 기민을 구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424년에 다시 총제에 서용되었고, 다음 해에는 다시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

1427년 공조판서로 입조했다가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두 번째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 뒤 도총제·함길도병마도절제사·함길도도절제사·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4년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충청도 초수리(椒水里)에 행행(行幸)한 세종을 수가(隨駕)했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능숙한 무예로 북변의 진수와 시위에 공헌함이 많았고, 필법에 뛰어났다.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성승(成勝)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적곡(赤谷). 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後) 석용(石瑢)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 달생(達生)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삼문(三問)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 1440년(세종 22)에 경상도병마절제사를 거쳐, 1446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1년(문종 1)에 정조사 ( 正朝使 ) 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1453년(단종 1)에 의주목사가 되고, 1455년(세조 1)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禪位)를 받자,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후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서 그의 아들인 삼문을 비롯, 박팽년 ( 朴彭年 ) · 하위지 ( 河緯地 ) · 이개 ( 李塏 ) · 유성원 ( 柳誠源 ) · 김질(金 銷 ) 등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들과 유응부 ( 兪應孚 ) · 박쟁(朴 怨 ) 등의 무신을 포섭하여 배후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조종하였다.

세조가 그를 달래기 위해 벼슬을 지중추원사로 높였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해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여는 그 날에 거사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동지중지추원사인 유응부와 당상(堂山)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 뒤에 별운검 ( 別雲劒 )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는 명을 내려 거사는 중지되었다.

이에 뒷날 관가(觀稼 :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 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배반, 세조에게 밀고하였다.

그 결과 아들 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잡혀가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다. 이 때 아들 삼문 · 삼빙(三聘) · 삼고(三顧) · 삼성 ( 三省 )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그 뒤 1784년(정조 8)에 판서 엄숙 ( 嚴璹 )의 상소로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오늘날 그에 대한 상세한 행장이나 전기 등이 없는 것은 당시 그의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문명 높은 성삼문의 아버지였음을 생각할 때, 문무를 겸비한 재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묘는 홍주 ( 洪州 ) 노은동(魯恩洞)에 있다.

일설에 노량진 사육신 묘역 안에 일찍이 ‘ 成氏之墓(성씨의 묘) ’ 라고 쓴 작은 비석이 세워진 두개의 묘가 있어, 그 한기는 그의 묘이고 다른 한기는 성삼문의 묘라는 구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삼문의 묘밖에 없다. 장릉(莊陵 : 端宗의 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고,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성삼문(成三問)

1418(태종 18)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 ( 死六臣 )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 달생(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 ( 都摠管 ) 승(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 塾 )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홍문관修撰) · 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 예기대문언두 禮記大文諺讀 ≫ 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 鄭麟趾 ) · 최항 ( 崔恒 ) · 박팽년 ( 朴彭年 ) · 신숙주 ( 申叔舟 ) · 이개 ( 李塏 )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 ( 音韻 )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 · 김종서 ( 金宗瑞 )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그에게 정난공신 ( 靖難功臣 )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그가 국새 ( 國璽 )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 ( 朴仲林 ) · 박팽년 · 유응부 ( 兪應孚 ) · 허조(許 璽 ) · 권자신 ( 權自愼 ) · 이개 · 유성원 ( 柳誠源 )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 · 박쟁(朴 怨 )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 ( 尹師路 ) · 권람 ( 權擥 ) · 한명회 ( 韓明澮 )를, 병조정랑 윤영손 ( 尹鈴孫 )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 銷 )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 ( 鄭昌孫 )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 나으리(進賜 : 종친에 대한 호칭) ’ 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 ( 姜希顔 )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승과 이개 · 하위지 ( 河緯地 ) · 박중림 · 김문기 ( 金文起 ) · 유응부 · 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 삼빙(三聘) · 삼고(三顧) · 삼성 ( 三省 )과 아들 맹첨(孟瞻) · 맹년(孟年) · 맹종(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 ( 經筵 )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 ( 南孝溫 )은 ≪ 추강집 秋江集 ≫ 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 ( 彰節祠 ),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 ( 東鶴寺 )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송시열 ( 宋時烈 )이 쓴 〈 홍주성선생유허비 洪州成先生遺墟碑 〉 와 〈 연산성선생유허비 連山成先生遺墟碑 〉 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 매죽헌집 ≫ 이 있다.

 

성부(成溥)

한편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사달(士達)의 아들 성부(溥)도 절신으로 이름이 높다.

고려 말에 형부 총랑(刑部摠郞)을 역임했던 부(溥)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개성(開城)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며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후에 양주(楊州)의 서산(西山)에 숨어 살면서 송산(松山)의 조 견(趙 ), 사천(沙川)의 남을진(南乙珍)과 더불어 <유양삼은(維楊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성담수(成聃壽)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수(耳 馬 ), 호는 문두(文斗). 예문관대제학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槪)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희(熺)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성삼문 ( 成三問 )의 재종제이다.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천성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세간의 명리에 욕심이 없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자, 그의 아버지 희도 친족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고 김해에 안치되었다.

3년 뒤에 풀려나서 공주에 돌아왔으나, 마침내 충분(忠憤)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이 일에 충격을 받아 벼슬을 단념하고 선영이 있는 파주의 문두리에 은거하였다.

단종복위와 관련된 죄인의 자제에게는 전례에 따라 참봉벼슬을 제수하여 그들의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직역(職役)에 복무하였으나, 그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와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1782년(정조 6)에 김시습 ( 金時習 ) · 원호 ( 元昊 ) · 남효온 ( 南孝溫 ) 등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세상에서 김시습 · 이맹전 ( 李孟專 ) · 원호 · 조려 ( 趙旅 ) · 남효온 · 성담수 등을 생육신이라 일컬어 함안의 서산서원 ( 西山書院 )에 함께 봉향하였다.

창녕의 물계서원 ( 勿溪書院 )에 성송국(成松國) · 성삼문 · 성수침 ( 成守琛 ) · 성운 ( 成運 ) · 성제원(成悌元) · 성혼 ( 成渾 ) 등 성씨일문의 여러 현인들과 함께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성담중(成聃仲), 성담년(成聃年)

담수의 아우 담년(聃年)과 사촌 담중(聃仲 : 참봉 소의 아들)도 불사담학(不仕聃學)의 가통(家統)을 이어 명망이 높았다.

 

성제원(成悌元)

담년의 손자 제원(悌元 : 장흥 부사 몽선의 아들)은 초가집에서 죽을 먹어도 기상이 있었다는 학자(學者)로 이지함·서경덕(徐敬德) 등과 더불어 선도(仙道)에 기운 유학추향(儒學趨向)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유명했다.

 

성염조(成念祖)

암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염조(念祖)는 세종(世宗)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도승지(都承旨)·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판한성부사와 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성봉조(成奉祖)

1401(태종 1) ∼ 1474(성종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효부(孝夫) · 유행(攸行). 아버지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엄( 蓂 )이며, 부인은 세조비 정희왕후 ( 貞熹王后 )의 동생이다. 문음 ( 門蔭 )으로 순승부행수(順承府行首)가 되고 이어 한성부소윤에 승진되었다.

1430년(세종 12) 지풍덕군사(知豊德郡事)를 거쳐 1438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다. 그 뒤 지사간원사 ( 知司諫院事 )를 거쳐 1441년 동부승지에 이어 우부승지, 형조 · 호조 · 공조의 참의와 충청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447년 경상도도절제사가 되고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452년(문종 2) 대사헌이 되었고, 단종 원년인 이듬해 형조참판 · 함길도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그는 세조의 동서로서 가자(加資 : 자품이 오름)되어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에 올랐다.

공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로서 사육신 사건을 다스렸다. 1457년 우참찬에 승진되었고, 1462년 우찬성, 1468년에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가 되었다. 1471년(성종 2)에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리공신 ( 佐理功臣 ) 3등으로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올라 궤장( 廓 杖)이 하사되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성임(成任)

1421(세종 3) ∼ 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경(重卿), 호는 일재(逸齋) · 안재(安齋). 참판 석인(石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엄( 蓂 )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염조(念祖)이이다.

1438년(세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44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승정원주서로 특진되었으며, 1453년 계유정란 때 세조를 도와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예문관직제학을 거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역임하면서 ≪ 국조보감 國朝寶鑑 ≫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7년(세조 3)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첨지중추원사로서 당상관에 올랐다. 이듬해에 병조참의로 옮겼다가 곧, 승정원으로 옮겨 기밀 사무를 취급하면서 동부승지에서 도승지로 올랐다.

1461년 세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이조참판에 제수되어 인사 행정과 함께 악학도감제조(樂學都監提調)를 겸하여 음률의 정비에 힘썼다. 회주사(回奏使)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옮겼다가 중추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464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가서 민정과 군정을 다스리며 사냥을 즐기다가 의금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형조참판 ·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역임하며, ≪ 경국대전 ≫ 편찬에 참여하였다.

1466년 발영시 ( 拔英試 )에 을과로 급제, 형조판서에 올라 지중추부사 · 지의금부사를 겸하고 사법 행정에 힘썼다. 곧 이조판서로 옮겨 인사관리법을 개정하면서 인사 행정에 기여했으나, 인사 부정이 있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69년 친상으로 사임했다가 1471년(성종 2) 공조판서로 다시 부임하여 이듬해 명나라 황태자 책봉사(冊封使)로서 연경에 다녀왔다.

그 뒤 신숙주 ( 申叔舟 )의 추천으로 성균관에서 후진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이어 지중추부사 · 개성부유수를 역임하고, 1482년 좌참찬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 지중추부사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식견이 풍부하며 글씨와 시문이 뛰어났다.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해서 · 행서를 특히 잘 썼으며, 글씨로는 〈 원각사비 圓覺寺碑 〉 · 〈 한계미묘비 韓繼美墓碑 〉 · 〈 최항신도비 崔恒神道碑 〉 등이 있고, 경복궁 전문(殿門)의 편액과 왕실의 사경 ( 寫經 ) 등 국가적 서사(書寫)를 많이 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여 율시에 일가를 이루었다. 일찍이 중국의 ≪ 태평광기 太平廣記 ≫ 를 모방하여 고금의 이문(異聞)을 수집, ≪ 태평통재 太平通載 ≫ 를 간행하였다. 그의 문집인 ≪ 안재집 ≫ 이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성간(成侃)

1427(세종 9)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 지중추부사 염조(念祖)의 아들이며 유방선 ( 柳方善 )의 문인이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전농직장(典農直長) · 수찬 ( 修撰 )을 거쳐 정언 ( 正言 )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는 경사(經史)는 물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도 두루 섭렵하여 문장 · 기예(技藝) · 음률(音律) · 복서 ( 卜筮 ) 등에 밝았다.

특히, 시부(詩賦)에 뛰어나, 〈 궁사 宮詞 〉 · 〈 신설부 伸雪賦 〉 등을 남겼으며, 패관문학에 속하는 〈 용부전 弁 夫傳 〉 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저서로는 ≪ 진일재집 ≫ 이 있다.

 

성현(成俔)

1439(세종 21) ∼ 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 弁 齋) · 부휴자(浮休子) · 허백당(虛白堂) · 국오(菊塢).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이다.

성현은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1466년 27세로 발영시 ( 拔英試 )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되었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 ( 待敎 ) 등을 거쳐 사록 ( 司錄 )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29세로 경연관 ( 經筵官 )이 되었다. 그리고 예문관수찬 · 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그는 형 임(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 관광록 觀光錄 ≫ 이라 하였다.

성현은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서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이듬해에 한명회 ( 韓明澮 )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왔다. 147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간 · 대사성 · 동부승지 · 형조참판 ·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현은 1488년에 평안도관찰사로 있었다.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이 해에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대사헌이 되었다.

성현은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성현은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았다.그래서 한 달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 해에 유자광 ( 柳子光 )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 악학궤범 ≫ 을 편찬하였다.

성현은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에서 〈 쌍화점 雙花店 〉 · 〈 이상곡 履霜曲 〉 · 〈 북전 北殿 〉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한편으로는 관상감 · 사역원 · 전의감(殿醫監) · 혜민서 ( 惠民署 )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성현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 한성부판윤을 거쳐서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에 ≪ 용재총화 弁 齋叢話 ≫ 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에 수 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그러나 그 뒤에 신원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현의 저서로는 ≪ 허백당집 ≫ · ≪ 악학궤범 ≫ · ≪ 용재총화 ≫ · ≪ 부휴자담론 浮休子談論 ≫ 등이 대표적이다.

 

성세창(成世昌)

1481(성종 12) ∼ 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 엄( 蓂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한성부사 염조(念祖)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현(俔)이다. 어머니는 이숙(李塾)의 딸이다. 김굉필 ( 金宏弼 )의 문인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어 저작 ( 著作 ) · 박사 ( 博士 )로 승진되었고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509년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인사 행정의 불공정한 처사로 서반 ( 西班 )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동반 ( 東班 )으로 복직되어 사간원헌납 · 홍문관교리 · 사헌부집의 등 삼사 ( 三司 )의 요직을 거쳤고, 사간원사간으로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임하였다. 1517년 홍문관직제학으로 있을 때 조광조 ( 趙光祖 ) 등이 현량과 ( 賢良科 )를 실시하려 하자, 그 폐단을 지적하고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1519년 정국이 위태롭게 되어가자 평소 친했던 김정 ( 金淨 ) · 이자(李 秕 ) · 김수온 ( 金守溫 )의 의기를 충고하고 자신은 신병을 이유로 파주 별장에 거처하면서 화를 피하였다. 1521년 다시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형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주문사 ( 奏聞使 )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관하 선산군수가 여악 ( 女樂 )을 설치한 것이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고 일시 파직되었다. 그 뒤 성균관대사성 · 동지중추부사 ·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광필 ( 鄭光弼 )이 영의정이 되면서 예조참판 · 이조참판이 되어 기묘사화에 죄를 입은 사람들을 등용시키는 데 힘썼다.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530년 대사헌 · 홍문관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권신(權臣) 김안로 ( 金安老 )를 논척(論斥)하려다가 도리어 평해에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1537년 김안로와 그 일당이 숙청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부우윤 · 형조판서 · 이조판서 · 대사헌 · 예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일시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곧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어서 예조판서 · 호조판서 ·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좌의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판중추부사 · 영경연사 · 홍문관대제학 · 예문관대제학 · 지성균관사 등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임 ( 尹任 ) 등이 숙청되고 윤원형 ( 尹元衡 ) 등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들에게 미움을 받아 좌천되었고 마침내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귀양갔다가 죽었다. 선조 때에 복작되었다.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 오랫동안 홍문관에서 봉직했으며 문형 ( 文衡 )을 맡아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필법에 뛰어났고 글씨 · 그림 · 음률에 정통하여 3절(三絶)이라 불렸다. 저서로는 ≪ 돈재집 遯齋集 ≫ · ≪ 식료찬요 食療纂要 ≫ 가 있다.

글씨로는 파주의 성이헌여완갈(成怡軒汝完碣), 경기도 광주의 부사정광보묘비(府使鄭光輔墓碑) · 이집의수언묘비(李執義粹彦墓碑), 파주의 성지사세명묘비(成知事世明墓碑), 용인의 정포은갈(鄭圃隱碣), 홍주의 민대사헌휘비(閔大司憲暉碑), 익산의 소자파표(蘇自坡表) 등이 있다

 

성준(成俊)

1436(세종 18) ∼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시좌(時佐). 참판 석인(石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엄( 蓂 )이고, 아버지는 참판 순조(順祖)이다. 어머니는 동지총제(同知摠制) 이난(李蘭)의 딸이다.

1456년(세조 2) 사마시에 합격, 145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69년(예종 1) 세자시강원필선 · 사섬시첨정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479년(성종 10)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의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다음 해 우승지 · 형조참판 ·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484년 한성부우윤 ·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형조판서로 세자시강원좌빈객을 겸하였다.

1488년 대사헌 · 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1490년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영안도절도사로 나아가 북정부원수(北征副元帥)로서 도내에 쳐들어온 야인을 정벌하였다. 1494년(성종 25) 병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찬성이 되고, 1498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삼수군 ( 三水郡 )에 야인들이 침범하자 서정장수(西征將帥)가 되었다. 1500년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 한치형 ( 韓致亨 ), 우의정 이극균 ( 李克均 )과 함께 시폐십조를 주청,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을 경계시키기 위해 ≪ 국조보감 國朝寶鑑 ≫ 의 열독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1503년 영의정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했으나 갑자사화 때 앞서 성종비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한 죄로 직산에 유배되고 이어 배소에서 잡혀와 교살되었다. 중종 때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명숙(明肅)이다.

 

성경온(成景溫)

1463(세조 9) ∼ 1506(연산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아(士雅). 지중추부사 엄( 蓂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참판 순조(順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준(俊)이며, 어머니는 참의 이계기(李啓基)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여러 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빙고별좌(氷庫別坐)에 제수되었고 이어 사헌부감찰 · 호조좌랑 · 우사어 ( 右司禦 ) · 의금부도사 · 사도시주부 · 익위사익찬 등을 역임하였다. 150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공조정랑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아버지 준이 윤씨의 폐위에 찬성하는 상소로 연산군의 뜻에 거슬려 갑자사화 때 직산에 유배되어 교살되자, 형 중온(仲溫)과 함께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가 해도(海島)로 이배(移配)되었다.

연산군이 아버지를 용서해주지 않고 그에게 대죄를 씌우려 하자 “ 아들된 자가 어찌 남의 손에 의하여 사약을 받으리요. ” 하고 자살하였다.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성수침(成守琛)

1493(성종 24) ∼ 1564(명종 1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 · 죽우당(竹雨堂) · 파산청은(坡山淸隱) · 우계한민(牛溪閒民). 한성부윤 득식(得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충달(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세순(世純)이다. 어머니는 강화부사 김극니(金克 堀 )의 딸이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 ( 趙光祖 )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 ( 賢良科 )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 이 때부터 과업(科業)을 폐하고 ≪ 대학 ≫ 과 ≪ 논어 ≫ 등 경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1541년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학덕으로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선비)로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牛溪)에 은거하였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 · 예산현감(禮山縣監) · 토산현감( 痒 山縣監) ·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564년 사지 ( 司紙 )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했으며, 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미두 ( 米豆 )와 역부(役夫)를 지급해주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하였다.

조선 초기 성리학의 토착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사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대의명분과 요순(堯舜)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불가능하게 되자, 은일(隱逸 : 초야에 묻혀 학자로서만 활동)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 청송집 ≫ 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썼는데 〈 방참판유령묘갈 方參判有寧墓碣 〉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수종(成守琮)

1495(연산군 1) ∼ 1533(중종 2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숙옥(叔玉). 한성부윤 득식(得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충달(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세순(世純)이며, 어머니는 김극니(金克 堀 )의 딸이다. 수침(守琛)의 아우이다. 조광조 ( 趙光祖 )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 때 남곤 ( 南袞 ) · 김구 ( 金絿 ) · 김식 ( 金湜 ) 및 조광조 등이 시관 ( 試官 )으로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물러나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과방(科榜)에서 삭제되었다.

그 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았다. 그러나 1566년 그의 아들 이(耳)가 삭방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명종의 특명으로 홍패를 받고 방목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질이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자신은 죽을 먹으면서 매일 세 번씩 상식(上食 : 음식을 올림.)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선조대에 기묘명인(己卯名人)으로 추복(追復 : 명예를 회복함.)되었으며,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절효(節孝)이다.

 

성세장(成世章)

선조 때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성희안(成希顔)

1461(세조 7) ∼ 1513(중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 예문관대제학 사달(士達)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온서직장(司 倍 署直長) 효연(孝淵)이고,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찬(瓚)이다. 어머니는 종실인 덕천군 생(德泉君生)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이어 부수찬으로 승진했으며, 당시 성종의 숭유정책(崇儒政策)에서 국왕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다.

그 뒤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가 되었다가 관위가 누진되어, 1494년(성종 25) 교리로서 한어이문(漢語吏文)의 질정관 ( 質正官 )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연산군이 즉위해서도 문무의 요직을 거쳤다. 1499년(연산군 5)에는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으로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 이계전(李季全)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501년 유구국(琉球國) 사신의 내빙으로 선위사 ( 宣慰使 )가 되어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1503년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로서 사은사 ( 謝恩使 )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 왕세자 책봉에 대한 하례를 하고 돌아왔다. 이어서 형조참판이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고, 1504년에는 이조참판으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양화도(楊花渡)의 망원정(望遠亭)에서 유락을 즐길 때,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올렸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무관 말단직인 부사용 ( 副司勇 )으로 좌천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더하고 민심 또한 더욱 흉흉해지고 있던 1506년, 박원종 ( 朴元宗 )과 함께 반정(反正)을 도모, 명망가이던 유순정 ( 柳順汀 )을 참여시키고, 신윤무 ( 辛允武 ) · 박영문(朴永文) · 홍경주 ( 洪景舟 ) 등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진성대군 ( 晉城大君 )을 옹립, 거사하였다.

반정이 성공하자 거사의 주역으로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형조판서에서 곧 이조판서를 제수받고 숭록대부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으로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 반정의 뒤처리를 하였다. 거사에 앞장서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은 차례가 있다며 박원종 · 유순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세 번째에 서기도 하였다.

한편, 중종 즉위에 명나라 고명(誥命: 왕의 즉위를 인정하는 의전제도)이 어렵게 되자, 청승습사(請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이어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이 되어 ≪ 연산군일기 ≫ 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1509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 뒤 반정공신의 다수를 이루는 무관을 옹호하여 사풍(士風)을 능멸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오히려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513년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성혼(成渾)

수침의 아들 성혼(渾)은 유학계(儒學界)의 거목(巨木)으로 문하에서 조 헌(趙 憲)·이 귀(李 貴)·정 엽(鄭 曄) 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시켜 더욱 명성을 떨쳤다.

 

성영(成泳)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

 

성하종(成夏宗)

함경도 관찰사와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냄.

 

성이성(成以性)

승지(承旨) 안의(安義)의 아들 이성(以性:부제학에 추증) 등도 수령(守令)으로 고을을 다스리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성기운(成岐運)

1847(헌종 13)∼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정객. 본관은 창녕(昌寧). 충청남도 공주 출신. 노론파의 자손으로 의익(義益)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1884년 3월 주청상무서기관(駐淸商務書記官)이 되어 청나라 톈진(天津)에 주재하면서 약 1년간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뒤 귀국하였다.

1885년 4월 홍문관수찬, 1889년에는 형조참의·좌부승지·한성부소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0년 9월 인천부사 겸 감리(仁川府使兼監理)가 되어 각국과의 교섭 및 통상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1900년 11월 주차일본전권공사(駐箚日本全權公使)로 약 반년간 주재하면서 일본을 연구하였다.

1902년 12월 철도원 총재로 경부선철도공사에 관여하였고, 1904년 이후 경상남도·충청북도·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906년 11월 박제순 ( 朴齊純 ) 친일내각의 농상공부대신, 1907년 6월 중추원부의장, 1908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역임하였다.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한 뒤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성재한(成載翰)

1860(철종 11)∼1906. 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일명 재평(載平). 충청남도 예산 출신.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발표되자 예산·홍성·보령 등지를 전전하며 항일투쟁을 위한 동지규합과 여론조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1906년 4월 민종식 ( 閔宗植 )이 홍산 ( 鴻山 ) 지치(芝峙)에서 의거한 소식을 듣고 그 휘하에 들어가 박제현 ( 朴齊賢 )과 함께 운량관(運糧官)에 임명되어 홍주입성전에 참전하였다.

그 뒤 홍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보병·기병 등 많은 병력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며칠간 성을 사수하였으나, 4월 9일 새벽 적의 강력한 화약 사용으로 성이 함락되었다.

이 때 주장(主將)인 민종식은 피신하였으나, 그는 전태진(田泰鎭)· 서기환 ( 徐基煥 )·전경호(田慶浩)· 유준근 ( 柳濬根 )과 함께 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군의 총탄 앞에 육탄으로 대항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成三問(성삼문) 선생의 전설.

 

 1)

 明(명) 황제를 감탄시킨 제주

성삼문(成三問) 선생은 학자로서도 유명하거니와 그의 충절(忠節)은 사육신(死六臣)의 애화(哀話)와 함께 길이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 찬란한 빛을 남기고 있다.

일찍이 그가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라고 한다.
명(明)나라 황제가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볼 양으로 어전에 중국의 신비들을 불러 모으고 두루마리 하나를 내 보이며,

[지금, 짐이 가진 두루마리에는 백로(白鷺)의 그림이 그려져 있소, 이 백로(白鷺)를 두고 시(詩)를 지에 보시오.] 라고 하였다.
성삼문(成三問)선생은 즉시


        雪作衣裳玉作趾(설작의상옥작지)
        蘆渚窺魚幾多時(노저규어기다시)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발굽을 지어
                갈대 숲 물가에서 얼마나 물고기를 엿보았던가?


하고 두 구절을 지으니, 황제는 벽에 그림 두루마리를 펴서 거는데, 그것은 먹으로만 그린 묵화(墨畵)였다.
황제는
[그대의 시에는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발굽을 지어....”라고 하였는데, 이 그림은 흰 눈과 같이 백색의 의상도 아니며 붉은 옥으로 된 백로의 발굽도 아니니, 시와 그림이 맞이 않구나.]
하며, 성삼문(成三問)선생을 트집을 잡아 당황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선생은
[외신(外臣)의 시가 다 만들어지려면 아직도 두 구절이 있는데 나머지 까지 체워 보겠습니다.] 하고 다음과 같이 이었다.

        偶然飛過山陰縣(우연비과산음현)
        誤落羲之洗涓池(오락희지세연지)
                우연히 날라 산음현을 지나다가
                잘못으로 왕희지의 벼루 씻는 물에 떨어졌구나.

산음현(山陰縣)은 왕희지(王羲之)가 살전 고장이다.

백로(白鷺)는 처음에 흰색 이였는데 왕희지 벼루 씨는 못에 빠져 먹물이 배어 검어졌다고 하는 재치에 황제이하 모든 선비들이 놀라 마지않았다고 한다.

雪作衣裳玉作趾(설작의상옥작지)
蘆渚窺魚幾多時(노저규어기다시)
偶然飛過山陰縣(우연비과산음현)
誤落羲之洗涓池(오락희지세연지)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발굽을 지어
        갈대 숲 물가에서 얼마나 물고기를 엿보았던가?
        우연히 날라 산음현을 지나다가
        잘못으로 왕희지의 벼루 씻는 물에 떨어졌구나.

 

2)
 

 꽃 색이 다른 이유

성삼문(成三問) 선생이 명(明)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明) 황제가 선생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선생에게 병풍 하나를 내 보였다.

그 병풍에는 아름다운 매화가 그려져 있고, 매화꽃 꽃봉오리 색깔이 각각 달랐다. 어떤 것은 진홍색이고 어떤 것은 엷은 홍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꽃가지 사이에는 앵무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황제는
[이 꽃은 진홍이고, 이 꽃은 엷은 홍색이니, 아마도 이유가 있을 터이니 그 이유를 시로 써 보아라]하였다.
선생은 한참 병풍의 그림을 보시다가, 즉시 다음과 같은 시를 이어 바쳤다.

一樹開花色不同(일수개화색부동)
難將此意問東風(난장차의문동풍)
其間鸚鵡能言語(기간앵무능언어)
說道深紅映淺紅(설도심홍영천홍)
         한 나무에 핀 꽃의 색깔 같지 않으니
        그 뜻을 봄바람에 물어보기도 어렵구나.
        그 가운데 있는 앵무새가 말을 잘하니
        붉은 꽃은 연한꽃이 비치는 이야기해 주겠지.

이 재치 있는 시를 본 황제와 신하들은 선생의 재주에 탄복하고 모두 혀를 내 둘렀다고 한다.

 

 

3)

    伯夷叔齊(백이숙제) 무덤을 지나며.

사신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伯夷叔齊(백이숙제)의 무덤 앞을 지나게 되었다. 선생은 伯夷叔齊(백이숙제) 무덤 앞에 있는 비석을 향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當年叩馬敢言非(당년고마감언비)
忠義堂堂日月輝(충의당당일월휘)
草木亦霑周雨露(초목역점주우로)
愧君猶食首陽薇(괴군유식수양미)
        백이숙제 당년에 무왕의 말을 두드리며 감히 잘못을 말         하니
        충성과 의리가 당당하게 해와 달처럼 빛이 난대.
        풀과 나무 역시 주나라 비와 이슬에 젖어 자란 것이니
        임금께 부끄럽게도 수양산의 고사리를 캐 먹었다니.

그랬더니 무덤 앞 비석에서 땀이 났다고 한다.
아마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영혼이 선생의 꾸지람을 받고 민망해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 한시는 뒤에 선생의 충절을 대표하는 시조로 다시 지어졌는데, 우리가 다 잘 아는 시조이다.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 하노라.
        주려 죽을 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귀 뉘 따해 났다니.

 

4)

죽음을 앞두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죽음을 당하는 형장(刑場)으로 끌려가면서도 선생의 태도는 의연하고 담담하였다.
남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선생의 당당한 자부심은 다음 시에 잘 나타나고 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북소리 둥둥 사람의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바라보니 서산에 해는 지려 하네
        듣기로 황천에는 주막이 없다던데
        오늘 밤엔 누구 집에서 자고 갈고.

 

그리고 선생의 절개는 다음 시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 건곤(乾坤) 할재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또한 다음 한시에도 선생의 변함없는 충절이 잘 나타나,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難復生今世上(난부생금세상)
幸爲此男子身(행위차남자신)
無一事成功去(무일사성공거)
靑山嘲綠水嚬(청산조녹수빈)
        이 세상에 다시태어나기 어려워도
        다행이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한 가지 일도 성공 못시키고 떠나니
        청산도 비웃으며 녹수도 비웃는다.

 

 

 

5)

하늘에서 출산을 세 번 묻다.

지금부터 약570여년 홍주 노은동이라는 마을에 「성승」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 부인한테 태기가 있어 아기를 막 낳으려고 진통을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낳았느냐?」
「낳았느냐?」 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묻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아기 우는 소리가 온 마을에 우렁차게 퍼졌으며 귀여운 옥동자가 태어났다.

그래서 부모는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구나. 이는 필경 하늘이 내려주신 아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의 이름을 하늘에서 세 번 물었다고 三問(삼문)이라고 지었다 한다.
                                                     
                                            <출전: 논산군지(1981)>

 

 

 

 

成仁輔(성인보) 선생의 일화.

묘에 대한 설화

창녕읍(昌寧邑)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대지면 모산리맥산(大地面牟山里麥山)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성인보는 어느 해 정월 초 송경(松京)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 곳에 갔다가 병사(病死)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던 그의 아들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등에 업고 울며 천리 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 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니 지금의 묘자리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는데도 묏자리 넓이만큼은 눈이 녹아 있어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는데 나중에 풍수에게 물으니 그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였다.

 

 

成三問(성삼문) 선생의 일화.

 

단종 복위의 거사가 탄로 나자 세조기 국청을 열고 성삼문을 親鞫(친국)했다. ‘네가 어찌하여 과인을 배반했느냐.’

배반이 아니오. 임금을 복위시키려 함이었소. 이 어찌 배반이라 하시오? 내 마음은 백성들이 다 알 것이오. 나리(수양)가 남의 지리를 꿰차고 앉아있으니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서 차마 上王(상왕)의 처지를 볼 수가 없어 모의를 한 것이오. 내가 이 일을 꾸민 것은 하 늘에 두 해기 없듯이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오.”

 

세조는 몹시 화가 치밀어 발을 동동구르면서 물었다.

네 이놈! 내가 선위를 받을 때는 어찌하여 한 마디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과인을 배반하느냐!”

그때는 여건이 매우 불기능 했기때 문이오. 내가 선위를 막지 못 하였음은 뒷날을 기약함었소. 내가 끝내 그 기회를 잡지 못해 원통하기 그지없소이다.”

네가 나에게 신이라 일컫지 않고 끝내 나리(왕자에 대한 호칭)라 하니, 네가 과인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

상왕이 계신데 나리가 나를 어떻게 신하로 삼을 있겠소. 나는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 집 곳간을 살펴보시오!”

 

모진 고문에 성심문은 모의에 가담한 사람들을 말하지 않을 없었다.

 

朴彭年(박팽년) · 李塏(이개) · 河緯地(하위지) · 柳誠源(유성원) · 兪應孚(유응부) 등 사육신의 이름과, 朴炡(박정) 등 모의에 가담한지들의 이름이 속속들이 밝혀졌다.

성삼문은 세조의 혹독한 친국을 받았다. 그는 쇠를 달구어 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질렀다. 쇠가 식어지자 성삼문이 외쳤다.

다시 달구어 오너라! 나리의 고문이 몹시 독하구나.”

성삼문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成豊世(성풍세)의 효행

 

꼬리 잘린 잉어 그림

 

성 풍세(成豊世)1572(선조 5)에 고령군 다산면 나정동(高靈郡 茶山面羅亭洞)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퍽 가난한 농가였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윈 그는 집이 가난하여 공부를 제대로 못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착하고 영리하여서 남달리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록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지만, 바른 행실과 효성으로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되어 보겠다고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어머니 앞에 나아가 문안을 드렸고,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여 눕게 되면 침식을 전폐하고 지성으로 간병하는 갸륵한 모습을 본 온마을 사람들은 그 정성에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안전한 곳을 찾아 피란을 떠나는 이가 많았다. 이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병이 들어오게 되자 성 풍세도 홀어머니와 함께 보퉁이를 지고 조금 떨어진 노곡동으로 피란을 갔다. 난을 피하며 객지에서 고생스레 살게 된 어머니를 뵐 때마다 풍세는 지난날보다 더욱 효성을 다해야 겠다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 었다. 그러나, 왜병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병역을 면제 받을 군포를 나라에 바칠 수 없게 된 풍세도 나라의 부름으로 군에 입대하였다.

 

그가 상주진관(尙州鎭管)에서 훈련을 받는 중에도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가 늘 걱정이 되어, 고된 하루의 훈련을 마치고 해가 진 뒤 진영을 빠져나 가 집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이튿날은 남보다 일찍 얼어나 아침밥을 지어드 리고는 다시 진영으로 달려왔다. 상주진과 그의 집은 거리가 멀었고 길목에 는 깊은 계곡과 높은 산으로 길이 험할 뿐 아니라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등 위험하였으나,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마다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모셨으며, 낮에는 충성스러운 군인의 본분을 다했다.

 

이런 일이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풍세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상관이 초병을 불러 물었다.

풍세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풍세는 고령 다산 사람으로 편모를 모시고 있다가 입대했습니다. 어머니 가 걱정이 되어 저녁이 되면 집으로 달려갔다가 새벽에 돌아오곤 합니다.” 라고 대답하자, 초병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상관은 그 날 군관을 시켜 풍세 의 뒤를 밟도록 했다. 일과가 끝나고 해가 지자 풍세는 전과 같이 군문을 빠져나가 산길을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디선가 커다란 호랑이가 나티나 풍세 앞에 너붓이 엎드리지 않는가.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군관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풍세는 태연하게 호랑이의 목을 잡고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알았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고령을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이 놀라운 사실을 듣고 알게 된 진영에선 이튿날 풍세를 불렀다.

그대의 갸륵한 일을 들어서 잘 알았다. 하늘도 무심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지금 곧 진영에서 나가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하여라.”

하고 크게 칭찬하면서 풍세를 득별히 집에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풍세는

제 비록 배우지 못하고 병서에 어두워 의장은 될 수 없으나 일개 졸병으 로서나마 보국하여 백성된 직분을 다하겠읍니다. 어찌 제 혼자 집으로 돌아가겠읍니까 ?”

하고 상관 앞에 엎드려 고하였다.

과연 충과 효를 겸비한 훌륭한 청년이구나. 나라 일은 우리가 맡을 터이 니 염려 말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잘 봉양하면서 집안일을 돌보아라. 그 일 또한 나라 일이다.”

 

진영에선 풍세를 가상히 여겨 술과 음식을 대접했으나 먹지 않았다. 홀로 계신 어머니가 생각나서였다. 이를 눈치챈 상관은 별도로 음식을 준비하여 집으 가져 가게 하였다. 200 리나 되는 귀향길이었지만 술 한 방울 쏟아지지 않았으며 음식은 그 때까지도 따뜻했다. 물론 그 날도 호랑이 등에 업혀 순식간에 가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여든 셋의 어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누우시자 대구에 좋은 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시간을 다투어 사문(沙門) 나루를 건너게 되었다. 그때 도 이상하게 잉어 한 마리가 배 위에 뛰어 올랐다. 사공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므로 값을 주고 산 뒤 꼬리를 잘라 강물에 넣어 주면서

돌아올 때 가져 가겠다.”

하니 주위 사람들은 모두 비웃기만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꼬리 잘린 잉어가 배에 뛰어 오르니 모두가 감복하여 발아래 옆드리며 우러러보았다. 급히 서둘러 집에 온 풍세는 약과 잉어를 어머니께 드렸더니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어머니의 병환은 깨끗이 나았다. 그 해 여름도 지나고 초겨울이었다. 어머니가 생대추를 원하셔서 풍세는 무턱대고 집을 나섰다.

 

들과 산은 보얗게 내린 눈으로 은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어머니를 위한 일인데 설마 어딘가에 싱싱한 대추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뒷동산으로 오를 때였다.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사이 거미줄에 싱싱한 대추가 매달려 있었다. 풍세는 너무 기뻐 단숨에 달려가 열매를 따서 어머니께 드렸더니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지성도 아랑곳없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머니는 날로 노쇠하여서 그 해 겨울에 끝내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그 후도 그의 가난은 여전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년 후 제사에 쓸 고기 한 마리도 없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우연히 큰 꿩 한 마리가 난데없이 날아와 마당에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 꿩을 황급히 잡아 제사에 쓸 수 있게 되었다.

 

1649(효종 원년) 그도 세상을 떠나니 그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는 비각을광복 직후 고령군 다산면 나정동에 성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비각 사면 에는 꼬리 잘린 잉어와 그를 태워 나른 호랑이, 그리고 꿩과 대추 등의 그림이 아름다운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효행이 온갖 행실의 근원이라 하며 그의 비각을 백원문(百源門)이라 부르고 있다.

 

출전고령군 노곡초등학교 교감>

참고 문헌 孝烈行誌, 大伽倻의 얼 , 大伽倻, 高靈大觀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3

文(문),武(무)

40

九(구),義(의)

47

和(화),秀(수)

34

均(균),培(배)

41

承(승),滿(만)

48

南(남),七(칠)

35

善(선),銀(은)

42

東(동),彩(채)

49

孝(효),致(치)

36

康(강),雨(우)

43

容(용),志(지)

50

百(백),錄(록)

37

元(원),春(춘)

44

中(중),在(재)

51

雲(운),浩(호)

38

夏(하),然(연)

45

商(상),錦(금)

52

來(래),相(상)

39

信(신),敎(교)

46

準(준),洪(홍)

53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남한(南韓)에 총 37,894가구, 158,3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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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안음 서문.jpg 안음서문씨(西門) 청남 14-08-27 3169
311 서씨(西) 청남 14-08-27 2313
310 평당 서.jpg 평당서씨(徐) 청남 14-08-27 2855
309 절강 서.jpg 절강서씨(徐) 청남 14-08-27 2615
308 장성 서.jpg 장성서씨(徐) 청남 14-08-27 3533
307 이천 서.jpg 이천서씨(徐) 청남 14-08-27 3989
306 연산 서.jpg 연산서씨(徐) 청남 14-08-27 3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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