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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소씨:진주소씨(邵)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진주소씨:평산소씨)

 

본관(本貫): 진주(晉州)

시조(始祖): 소백손(蘇伯孫)

유래(由來):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부소나무)를 심어 소()를 성()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61세손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소복서(蘇福瑞)

복서(福瑞)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다.

 

소억자(蘇億滋)

복서의 아들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다.

 

소격달(蘇格達)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다.

 

소목(蘇穆)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소목(: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다.

 

소은(蘇恩)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 최치원 ( 崔致遠 )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급찬 ( 級飡 ) 김영(金穎)이 하정사 ( 賀正使 )로 당나라에 갈 때 2인의 수령(首領) 중 한 사람으로 김영을 수행하였는데, 이때 기탁(祈卓) 8인이 대령(大領)으로서 역시 하정사를 수행하였으며, 함께 간 유학생은 최신지(崔愼之) 8인이었다.

그런데 입조장에 의하면 이때 수령으로 파견된 사람은 당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뽑았다고 하므로 소은은 중국 유학생 출신임이 분명하다.

종래 소은이 수령으로서 당나라에 건너간 연대를 최신지의 경력을 역산하여 885(헌강왕 11)일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입조장의 내용을 여러모로 분석해 볼 때 진성여왕 말년, 혹은 효공왕 즉위 초인 897년 경이 아닐까 짐작되고 있다.

 

소문(蘇汶)

문장이 뛰어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소계령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소경보(蘇景輔)소광보(蘇光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소세린(蘇世麟)

경보의 아들 세린(世麟)은 현달하였다.

 

소경손(蘇慶遜)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 산수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소함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소희철(蘇希哲)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다.

 

소문철(蘇文哲)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소을경(蘇乙卿)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다.

 

소천(蘇遷)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소천()은 고려말에 명망을 떨쳤다.

 

소세량(蘇世良)

1476(성종 7)1528(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병암(屛巖). 중군사정(中軍司正)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며,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석주(碩珠)의 딸이다.

좌찬성 세양(世讓)의 형이다. 1496(연산군 2)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 ( 小說 불경 ( 佛經 )에까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문장과 글이 물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1507(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원에 들어가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대간 ( 臺諫 시종(侍從)으로 시강(侍講)하였으며, 주서(奏書)와 상소는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516년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서리들의 기강을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4년 후 홍문관수찬, 사헌부의 지평·장령, 홍문관의 ·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1522년 사간· 좌부승지 ( 左副承旨 동부승지 ( 同副承旨 ) 등을 역임하였다. 1524년 대사간에 승진되었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부사를 자원하였다. 이때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평생 글을 좋아하여 가산은 돌보지 않았으며 효우(孝友)하였고 향리(鄕里)의 후배를 양성하여 크게 교화하였다.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암집 屛巖集1권이 있다.

 

소세양(蘇世讓)

1486(성종 17)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중군사정(中軍司正)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다.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석주(碩珠)의 딸이다.

1504(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 顯德王后 )의 복위를 건의, 현릉 ( 顯陵 )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 ( 李荇 )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 ( 王子師傅 )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 ( 進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 ( 星州史庫 )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 ( 春秋館 )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인종 1) 윤임 ( 尹任 )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 ( 律詩 )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양곡집 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소세영(蘇世榮)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소상진(蘇尙眞)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소제(蘇濟)

진주성(晋州城)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소동(蘇仝)

행진(行震: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소동()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소영복(蘇永福)

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수(重綏), 호는 사은(四隱). 익산 출신. 대사간 세량(世良)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민선(敏善)이다. 서윤 ( 庶尹 ) 응선(膺善)에게 입양되었다. 김은휘(金殷輝)의 문인이다.

1582(선조 15) 진사가 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혼 ( 成渾 )으로부터 출사할 것을 여러 번 권유받았으나 학문이 미진함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의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 ( 龍華山 )에 작은 성을 쌓아 향토 방위에 참여했으며, 난 후 국정 전반에 관한 시무책 ( 時務策 )을 조정에 올려 가납(嘉納)되기도 하였다.

160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수천 권의 서책 속에 묻혀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1605년 김장생 ( 金長生 )이 익산군수로 있을 때 매번 그의 방문을 받아 군정자문(郡政諮問)에 응하였다.

이와 아울러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경전(經典) · 사서(史書) 등 귀중한 전적 ( 典籍 )들을 나라에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 煉 書閣)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 무렵 향리 일대가 한해로 매년 흉년을 겪게 되자 40여 리에 달하는 수로 건설을 건의, 농민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뿐만 아니라, 천문 · 지리 · 의복(醫卜) · 병법(兵法) · 관방(關防)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했으며, 성혼에게 종유(從遊 ; 좇아 사귐.)하는 한편, 조헌 ( 趙憲 ) · 정경세 ( 鄭經世 ) · 한백겸 ( 韓百謙 ) · 황신 ( 黃愼 ) 등과의 친교가 두터웠다.

광해군 때 조카 명국(鳴國)이 대북 · 소북간의 당쟁에 관여, 몰락하자 이에 연좌되어 대명(待命) 중에 질병을 얻어 죽었다.

 

소동도(蘇東道)

1592(선조 25)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유(子由), 호는 면와(眠窩). 전라북도 익산 출신. 첨사 세공(世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건()이고, 아버지는 찰방 만선(萬善)이다. 1617(광해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는 벼슬하지 않았다.

1623(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 ( 西人 )이 집권하자 163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된 뒤 1646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곧 면직되었다. 이듬해 평안도 은산부사를 지내고 정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암행어사로서 민정과 수령의 치적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650(효종 1) 의주부윤이 되어 호란 후 피폐하여진 민생을 구제하고 국방과 영선사업에 힘썼다. 뒤에 경주부윤을 거쳐 165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수령전최(守令殿最 : 근무 성적의 평가)에 공정을 기하였다. 익산지방의 대표적인 명문출신으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몸소 실천하였으며, 화암서원 ( 花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소응무(蘇應武)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

 

소두산(蘇斗山)

1627(인조 5) 1693(숙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억선(億善)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동명(東鳴)이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문인이다.

1652(효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60(현종 1) 식년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663년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직언 때문에 권신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1672년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진휼책을 잘한 공로로 수상하였다.

1675(숙종 1) 제주목사, 1681년에 강릉부사 · 의주부윤 · 함경북도병마절도사 · 동래부사 ·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 · 공홍도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1688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울분 끝에 병사하였다.

중요 외직(外職)을 역임할 때마다 남인들로부터 권신들에 부탁하여 여러 번 고을을 다스리며 탐학(貪虐)을 자행하였다. ” 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서인집권하에서도 대간으로부터 처신이 근신하지 못하여 공의(公議)에 버림받았고, 향촌에 있을때는 무단(武斷), 수령 재임 때에는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시문은 월주집 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소진형(蘇鎭亨)

1885(고종 22)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논산 출신. 1919년 대한광복회 ( 大韓光復會 ) 간부인 우이견(禹利見권영만(權寧萬이재환(李載煥) 등과 협의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남도지역의 부호를 조사한 뒤 군자금납부요구서와 이에 불응할 때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문서 19통을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그 뒤 수금된 자금 2,000원을 임시정부 특파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주어 송금하도록 하였으며, 1920년 경신학교 ( 儆新學校 )에서 임시정부 후원단체인 독립주비단(獨立籌備團)을 조직하고 그 해 음력 9월에 이 단의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뒤 임시정부로부터 독립공채를 받아 이를 각지의 부호들에게 배부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각종의 독립운동 관계문서를 인수하여 이를 배포함으로써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20년 일본경찰에 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았다. 1982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소휘옥(蘇輝玉), 소진우(蘇鎭佑),소천술(蘇千述),소휘태(蘇輝泰)

한말(韓末)에 구국의 충정(忠貞)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 소씨를 더욱 빛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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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남한(南韓)에 총 9,191가구, 38,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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