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밀양손씨(孫)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밀양손씨)

본관(本貫): 밀양(密陽)

시조(始祖): 손순(孫順)

유래(由來):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 (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원손(遠 孫)으로 효자보응(孝子報應)의 주인공인 국효(國孝) 손순(孫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일명 손순(孫舜) ’ 이라고도 한다.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鶴山), 어머니는 운오(運烏)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더불어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얻은 곡식으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린 자식이 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민망히 여긴 그는 부인에게 이르기를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다. ” 고 하면서, 자식을 버려서 어머니의 배를 부르게 하려 했다.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 교외로 가서 묻기 위해 땅을 파다가 기이한 돌종 石鐘 을 얻었다.

부부가 이상히 여겨 나무 위에 걸고 두드려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였다. 이 이물(異物)을 얻음은 아이의 복으로 생각한 그들은 자식을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대궐에 들리었다.

왕이 종소리를 듣고 사자를 보내어 조사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알고는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매 땅이 석종을 솟아내었으니 효는 천지에 귀감이 된다. ” 라고 하였다. 효행에 대한 포상으로 집 한 채와 해마다 벼 50석을 받았는데, 뒤에 그는 옛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홍효사 ( 弘孝寺 )라 하고 석종을 안치하였다.

손순은 무산(茂山) 대수촌장(大樹村長)인 구례마 ( 俱禮馬 )의 후손이다. 모량부 손씨인 그는 비록 가세가 기울었으나 6두품 귀족 신분이었다. 신라사에 손씨로서 진평왕의 후비인 승만부인 ( 僧滿夫人 )이 있고, 그밖에 역사적으로 활동한 인물로 이름이 전하는 것은 손순이 거의 유일하다.

그 뒤 시조 순()의 손자 익감(翼減)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중흥조(中興祖) 긍훈(兢訓: 시조의 7세손)이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데 훈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손긍훈(孫兢訓)

긍훈(兢訓)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匪賊)을 방어하는 데 많은 위훈을 남겼으며,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 데 앞장섰다.

 

손변

고려 때 천안부 판관(天安府判官)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변( : 광리군 긍훈의 9세손)이 유명하다.

 

손효려(孫孝麗)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손빈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빈은 병부 상서(兵部 尙書)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고, 1340(충혜왕 복위 1)에 일어난 조 적의 반란 때는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와 정당문학(正堂文學상장군(上將軍) 등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손책(孫策)

현감 중견(仲堅)의 증손 손책()은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주 목사(樹州牧使)에 이르러 조선 개국(開國)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다.

 

손수경(孫守卿)

1356(공민왕 5). 고려 후기의 문신.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1326(충숙왕 13) 중랑장이 되었고, 1332(충숙왕 복위 1)에는 대호군으로 전 왕인 충혜왕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뇌물을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39(충혜왕 복위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가서 형부에 투옥되자 함께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이 공으로 1342년 판종부시사 ( 判宗簿寺事 )1등공신에 책록되고, 토지 100()과 노비 10구 등 많은 은전을 받았다.

1343(충혜왕 복위 4)에는 한양군(漢陽君) 한종유 ( 韓宗愈 )와 함께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물을 바치고 돌아왔으며,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어 서연 ( 書筵 )에서 시강(侍講)하였다.

이어 찬성사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왕자 저( : 뒤의 忠定王)를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와 즉위시킴으로써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 판삼사사 의창부원군(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判三司事義昌府院君)으로 피봉되었다.

왕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곧 좌정승에 이어 우정승이 되었으며, 이 해에 또다시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역임한 다음에, 1356년 전 호군(護軍)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서자인 석기(釋器)를 추대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손서륜(孫敍倫)

1457(세조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돈중(敦中). 아버지는 참봉 순조(順調)이다. 1450(세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단종즉위 후 집현전박사가 되었는데 세조의 왕위찬탈 후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1457(세조 3) 순흥에 유배중인 금성대군 ( 錦城大君 )과 외삼촌인 순흥부사 이보흠 ( 李甫欽 )과 함께 단종복위를 기도하자 그 역시 이 모의에 참여하여 남주(南州) 일대에서 격문을 돌리고 의사(義士)를 모집하다가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손비장(孫比長)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영숙(永叔), 호는 입암 (笠巖). 아버지는 현감 민()이다. 부안 출신. 1464(세조 10)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469(예종 1) 예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신숙주 ( 申叔舟 ) 등과 세조실록예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471(성종 2)에는 그 공로로 이조정랑으로 승진되고 1475년 장령이 되어 여러 차례 시무소(時務疏)를 올렸다. 1476년 전첨으로 문과중시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부제학·참찬이 되어, 간언에 기꺼이 따를 것과 대간의 임기를 연장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된 시무4(時務四條)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다음해 대사간·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1478년 승지로서 왕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 예에 어긋났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1485년 서거정 ( 徐居正 )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공조참의·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예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손홍록(孫弘祿)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부제학 비장(比長)의 종손이다. 이항 ( 李恒 )의 문인이다.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오희길 ( 吳希吉 )과 함께 국왕의 어영(御影)과 역대의 전주사고 ( 全州史庫 ) 소장 실록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옮겨 잘 보관하였다.

임진왜란중 춘추관·성주·충주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탔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뒤에 의주 행궁(行宮)으로 왕을 찾아가 중흥6(中興六策)의 시무책 ( 時務策 )을 건의하여 왕의 포상을 받고, 별제 ( 別提 )에 임명되었다. 태인 남천사(南川祠)에 제향되었다.

 

손영제(孫英濟)

석학(碩學) 이퇴계(李退溪)의 문인(門人)으로 학명(學名)을 떨쳤던 영제(英濟)는 선조(宣祖) 때 도산서원(陶山書院) 건립 때 사재(私財)를 털어 조력(助力)했다.

 

손덕순(孫德淳), 손덕심(孫德沈)

덕심(德沈)과 덕순(德淳)은 임진왜란 때 영천(永川)의 창암(倉巖)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손응록(孫應祿)

이순신(李舜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골포(安骨浦) 전투에서 순절한 응록(應祿)이 유명하다.

 

손기양(孫起提)

1559(명종 14) 1617(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 方 漢) · 송간(松磵). 할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이고, 아버지는 생원 겸제(兼濟)이다. 어머니는 신취(辛鷲)의 딸이다. 이이 ( 李珥 )의 문인이다.

약관의 나이로 백가(百家)의 책을 탐독, 학식이 매우 깊었다. 1585(선조 18)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92년 성현찰방(省峴察訪)이 되어 왜란을 당하자 중대를 모아 역마 ( 驛馬 )를 적절히 배치하면서 전쟁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어 15097년 왜가 재침하자 관찰사가 왕의 호종을 위해 떠나버려 얼마 동안 외로이 텅 빈 산성을 지켰는데, 이 때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1600년 성균관전적으로 중학교수(中學敎授)를 겸했고, 이듬해 경주제독이 되어 무너져 가는 옛 문물을 복구하는 데 힘썼다.

이 때 그는 성묘중건상량문 聖廟重建上樑文 을 찬했는데, 이 내용이 동경지 東京誌 에 실려 있다. 이어 1602년에 울주판관을 지냈으며, 이 해 얼안당기 鳥 岸堂記 를 찬하기도 하였다. 이 해 체찰사 이덕형 ( 李德馨 )의 천거로 영천군수가 되었고, 1610년 창원부사를 지냈다.

1612(광해군 4)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쳐,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여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 ( 李滉 )의 학통을 이은 정구 ( 鄭逑 )와 도의 ( 道義 )의 계()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성리학자이다. 정경세 ( 鄭經世 ) · 조호익 ( 曺好益 ) · 이윤 ( 李潤 ) · 이전(李 唆 ) 이준 ( 李埈 ) 등 영남 명유들과도 교유가 있었다.

만년에는 역학 ( 易學 )에 전심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으며, 평일에 독서할 때는 논어 만 읽는 성벽이 있었다. 저서로 배민록 排悶錄 2권과 철조록 輟釣錄 1권 등이 있다.

 

손상륭(孫尙隆)

상륭(尙隆)은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다.

 

손병희(孫秉熙)

1861(철종 12) 1922. 동학 · 천도교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사업가.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응구(應九), 그 뒤 규동(奎東)으로 고쳤으며, 일본 망명 때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썼다.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동학교도들은 성사(聖師), 천도교 제3세교주, 교종 ( 敎宗 ) 의암성사 또는 후천황씨(後天皇氏)라고도 불렀다. 충청북도 청원 출신. 두흥(斗興)의 큰아들로 어머니는 둘째부인 최씨이며, 방정환 ( 方定煥 )은 사위이다.

서자(庶子)로 어린 시절부터 자기와 같은 약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이 자라났다. 가난 속에서도 호방한 기질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의리도 남달리 뛰어났다.

12세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려고 가다가 눈길에 쓰러진 사람의 구휼비로 지급하는가 하면, 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친구에게 자기 집의 돈 있는 곳을 알려줘 그 돈으로 친구 아버지를 풀려나게 한 적도 있었다.

22세 때인 1882(고종 19) 큰조카인 천민(天民)의 노력으로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3년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 ( 崔時亨 )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이 사이에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산되었다.

1892년에는 최시형 등 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 ( 崔濟愚 )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했고, 동학대표 40여 명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며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다시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帳內)에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 ’ 척왜척양 등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최시형의 참모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 무렵 정부의 부정부패는 심화되었으며,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 ( 趙秉甲 )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대항해 동학접주 전봉준 ( 全琫準 )이 남접(南接) 산하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일대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 · 북접의 관계가 미묘해지자 최시형은 타협 조절을 대도소 ( 大都所 )에 맡겼다. 손병희는 두령으로서 대도소장 김연국 ( 金演局 ) 등과 함께 남접에 대한 성토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지영 ( 吳知泳 )의 중재로 1894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타협해 갈등은 해소되었다.

그 뒤 김연국의 뒤를 이어 북접통령(北接統領)이 되어 통령기(統領旗)를 받고 공주전투 등 항일구국전선에 나섰다. 또한 북접 산하 동학교도를 지휘, 통솔해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패배해 남접과 헤어졌다.

이 후부터 최시형과 함께 충주 부근에 이르렀으나 1214일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그 뒤에 최시형과 손병희 등 주요 간부들은 관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생존한 북접 간부들의 노력으로 교세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탄압의 손길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의 교세 확장, 포교에 힘썼다.

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8971224일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에는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

교주가 된 뒤에는 먼저 두령이 참석한 데서 설법식(設法式)을 거행하고 이후 여러 지방을 돌며 동학의 재건에 진력하였다.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뒤 포교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재건 구상을 위해 미국 시찰을 계획하였다.

1901년에는 동생 병흠(秉欽) · 이용구 ( 李容九 )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대판(大阪)에 머물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책동이 두려워 그 해에 상해(上海)로 가서 수 개월을 지내며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좌절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일본에 이미 망명해 있던 권동진 ( 權東鎭 ) · 오세창 ( 吳世昌 ) · 조희연 ( 趙羲淵 ) · 이진호 ( 李軫鎬 ) · 박영효 ( 朴泳孝 ) 등과 만났으나, 가명을 썼으므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망명생활 중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의 재건에 힘쓰면서 교도들에게 새로운 문명학술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유학을 알선해 유학생이 상당히 나왔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 ( 進步會 )를 조직하게 하여 조직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교도의 교양을 위해 삼전론 三戰論 을 발표하고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

진보회는 지방회원이 11만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했지만, 그동안 태천(泰川)의 관치사건(串侈事件) 등으로 많은 회원이 참살, 익사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발전, 390여 개의 지회조직을 비롯해 30여 만명이 단발(短髮)을 실천하는 등 생활개선에 앞장서 관민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동학교도인 것을 알게 되자 정부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봉기 당시를 생각해 일본측과 교섭, 이를 탄압하므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이토(伊藤博文) 등이 친일세력을 기르기 위해 조직한 유신회 ( 維新會 )의 송병준 ( 宋秉畯 )과 합세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보회가 확대되자 손병희의 지령을 배반한 이용구와 합병함으로써 진보회의 혁신운동은 실패하였다.

나아가 친일화함으로써 정부개혁과 일본과의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승국의 일원으로 행동하려던 본래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 갑진혁신운동도 실패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용구의 동학 배반과 친일추구화를 나중에야 알고서 이용구 일파를 동학교에서 축출하는 한편, 동학의 이용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사후대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동학포교 46121동경대전 東經大全 도즉천도(道則天道) ’ 를 인용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며 본래의 종교운동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 동학의 본지(本旨)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 ’ 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와 같이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한 때문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어서 우리 도()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도라, 후천개벽은 인심개벽(人心開闢)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인심개벽은 정신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정신개벽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천도(天道)를 잘 행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어서 이용구 등 친일 배교분자(背敎分子)들의 매국행위를 보고 19061월에 일본에서 귀국해, 216일에 천도교대헌 天道敎大憲 을 반포하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茶洞)에 설치하였다.

이미 천도교를 선포할 때 오세창 등을 6임소(任所)에 임명했고, 자신은 대도주(大道主)의 직무를 겸무하며, 교도를 설교하고 일요일을 시일(侍日)이라 정해 시일식(侍日式)을 거행하였다.

귀국 후 천도교의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며 친일 배교한 이용구 일파까지도 회유 시켜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용구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의 포섭공작을 펴면서 손병희를 중상모략하며 천도교의 파괴를 꾀하였다.

이에 일제를 배경으로 하는 일진회와 맞서는 것이 여러모로 불리함을 깨닫고, 1906917일 자신이 가장 신임하고 재정문제까지 맡아 처리하던 이용구 이하 62명에 대해 동학으로부터 출교처분(黜敎處分)을 내렸다.

이들은 손병희의 망명기간 중 재정권을 거의 위임받아 처리했기 때문에 동산 · 부동산이 그들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타격이 컸다. 이에 정교 분리를 내세워 오직 종교활동만을 전개하기로 하고, 당면한 재정난은 교도들이 한줌의 쌀을 내는 성미법(誠米法)의 제정을 통해 타개책을 모색하였다.

19114월 일제가 성미의 염출마저 금지시키는 탄압을 받았으나, 교도의 자발적인 특별의연금으로 보충시켜나갔다. 19143월에는 무기명성미제가 실시되어 재정상태는 호전되었으며, 이는 3 · 1운동 때 운동자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한편, 천도교에서 쫓겨난 이용구 · 송병준 등 친일파는 시천교 ( 侍天敎 )를 만들어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폈다. 이에 비해 천도교는 교세도 약화되었고 재정도 궁핍하였다.

이에 1907년 손병희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도주의 직을 김연국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김연국은 대도주의 직을 지닌 채 평소 비난하던 시천교의 대례사(大禮師)로 취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손병희는 19081, 박인호 ( 朴寅浩 )에게 대도주의 직을 맡게 하였다.

손병희는 일본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임을 깨달았다. 귀국 후 먼저 보성학교를 비롯해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 · 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 · 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등에 정기적인 보조와 일시적인 보조를 하여 학교폐쇄를 면하게 하였고, 또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에도 관계하였다.

또한 여자교육기관인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돕고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하였다. 1914년 말에는 동덕여자의숙의 경영권도 인수하였다. 이 밖에도 지방에는 대구의 교남학교 ( 嶠南學校 ) · 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7, 8개교에 관계하였다.

또한 최석창(崔錫彰) · 민건식(閔建植) 등의 도움을 받아 출판기관으로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시설은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경무총감부에 계류되었다.

1910년 초 사동(寺洞) 중앙교당 옆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해 천도교월보 1호를 내고 뒤이어 보성사와 병합해 보성사로 하고 시설을 확충하였다.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운영난이 심각했지만 잘 극복하였다.

1910년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가 일진회의 활동을 금지, 해산시키자 시천교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또한 일제는 천도교의 교세 확장을 막기 위해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하고, 천도교의 재원인 성미법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포교에 더욱 힘쓰고 교당 건립에 진력해 45일의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 814일의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 그리고 1224일의 인일기념일(人日紀念日)3대 행사에는 시일식을 마치고 축연을 베푸는 등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대안동(大安洞) 중앙교당이 성립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혹독해져 갔지만, 우리의 민족의식은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천도교측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에 이미 천도교도 중 민중봉기를 건의한 신도가 있었고, 1917년에도 같은 건의가 있었다.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국제정세가 한국독립에 유리해졌다. 이에 권동진 · 오세창과, 1919년 일본 동경(東京)2 · 8독립선언에 접한 최린 ( 崔麟 ) · 권동진 · 오세창이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하였다.

손병희는 천도교측의 대표로 3 · 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그 해 120일경 권동진 · 오세창 · 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 · 오세창 · 최린 · 정광조 ( 鄭廣朝 )에게 일임하였다.

19192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였다.

논저로는 수수명실록 授受明實錄 · 도결 道訣 · 명리전 明理傳 · 천도태원설 天道太元說 · 대종정의설 大宗正義說 · ()의 신인시대(神人時代) · 무체법경 無體法經 · 성심신삼단 性心身三端 · 신통고 神通考 · 견성해 見性解 · 삼성과 三性科 · 삼심관 三心觀 · 극락설 極樂說 · 성범설 聖凡說 · 진심불염 眞心不染 · 후경 後經 · 십삼관법 十三觀法 · 몽중문답가 · 무하사 · 권도문 · 삼전론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손정도(孫貞道)

1872(고종 9)1931. 독립운동가·목사. 자는 호건(浩乾문세(文世), 호는 해석(海石).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생.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0년에 선교사로 동삼성에 파견되었을 때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다짐하였다.

1912년 하얼빈에서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이 때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914년에 석방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 해 410일과 11일 이틀간에 걸쳐 동지 이동녕(李東寧) 30여 명과 같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회의를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 회의장에서 개최했을 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 이동녕을 이어 임시의정원의 의장이 되었다. 박은식 ( 朴殷植 신채호 ( 申采浩 ) 등과 같이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이 되었으며, 평안도 대표로 37세 때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 바도 있다. 19221028일 결성된 한국노병회 ( 韓國勞兵會 )를 김구 ( 金九 여운형 ( 呂運亨 ) 16명과 같이 발기하였다.

이보다 앞서 19201월에는 김구· 김철 ( 金澈 ) 10여 명과 같이 의용단 ( 義勇團 )을 조직,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를 발기, 그 회장이 되었다. 1922223일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동삼성 길림(吉林)으로 가서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孫順(손순) 공의 설화.

1)

       손순의 효도

손순은 집이 가난하여 처와 더불어 남의 집 품을 팔아 간신이 노모를 봉양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렵게 마련한 밥과 고기를 어머니에게 드려도, 철부지 어린 아기가 어머니 밥상 곁에 다가가 다 빼앗아 먹어 버리니 어머니는 편히 밥을 드실 수가 없었다.
이를 본 효자 孫順(손순)은 부인에게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해 자식을 버립시다. 자식은 또 낳으면 되지만 어머니는 한번 가시면 다시 얻기 어려우니 어머니를 위해 자식을 버리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밤, 산에 가서 아기를 묻을 구덩이를 파내려 갔다.
그런데 한참 땅을 파니 그 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돌종(石鐘)이 나오는 지라 이것은 반드시 하늘이 아기를 버리지 말라는 뜻이라 생각하여, 아기와 종을 함께 집으로 가져 와서 종을 처마 끝에 매달고 두드리니 맑고 깨끗한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새벽에 그 종소리를 들은 왕이
[어디서 이토록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나는지 알아보아라.]하였다.

신하는 곧 조사하여 遜順(손순)의 孝行(효행)을 왕에게 상세히 보고 하였다.
크게 감동한 왕은 손순에게 살만한 집과 歲米(세미) 50석을 살으로 내려 만고의 효행을 표창하니, 遜順(손순) 내외는 그날부터 어머니도 잘 모시고 자식도 잘 기르면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2)손순매아설화(孫順埋兒說話)

손순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손순의 어린 철부지 아들이 어머니에게 드린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어 어머니가 편히 밥을 드실 수가 없으므로, 하루는 부부가 의논하여 자식을 파 묻기로 결정했다. 아이를 묻기 위해 취산(醉山) 북쪽으로 데리고 가서 땅을 파니 그 속에서 석종(石鐘)이 나왔다.

부부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시험삼아 그 종을 쳐 보니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처가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이니 아이를 묻지 말자고 하여 그냥 아이와 종을 갖고 되돌아왔다. 종을 대들보에 달고 치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왕이 이 아름다운 종소리의 근원을 알아 오게 하자 사자가 그 집에 와서 살펴보고 사실대로 고했다.

왕은 부부의 효행을 가상히 여기고 집과 식량을 주었다. 손순은 자신의 묵은 집을 절을 짓는 데에 기부하여 홍효사(弘孝寺)라 하였고, 석종을 그 절에 안치했다. 뒤에 백제의 도둑이 들어와 그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석종이 발견된 곳은 완호평(完乎坪)이다.

 

 

3)

신라 하대의 효자.

손순은 서라벌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鶴山), 어머니는 운오(運烏)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더불어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얻은 곡식으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아 왔다.

그런데 어렵게 양식을 구해 어머니에게 식사를 올려도 어린 자식이 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민망히 여긴 그는 부인에게 이르기를
“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다. ” 고 하면서, 자식을 버려서 어머니의 배를 부르게 하려 하자고 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 교외로 가서 아ㅣ를 묻기 위해 땅을 파다가 기이한 돌종(石鐘〕을 얻었다.

부부가 이상히 여겨 나무 위에 걸고 두드려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고 아름다우면 멀리 멀리 까지 퍼저나갔다.
이 이물(異物)을 얻음은 아이의 복으로 생각한 그들은 자식을 묻지않고 다시 업고 종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온 서라벌에 퍼직 대궐에 까지 들리었다.

왕이 종소리를 듣고 사자를 보내어 종소리 나는 연유를 조사하여 손순의 그 사유를 자세히 알고는
“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매 땅이 석종을 솟아내었으니 효는 천지에 귀감이 된다. ” 라고 하였다.

효행에 대한 포상으로 집 한 채와 해마다 벼 50석을 받았는데, 뒤에 그는 옛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안치하였다.

 

 

 

孫秉熙(손병희)  선생의 일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라.

청주에 사는 한 젊은 청년 하나가 장터에 갔다가 돈이 두둑이 든 지갑 하나를 주웠다. 장터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서 누가 그 지갑을 잃어버렸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청년은 주인에게 지갑을 찾아주고 싶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주운 지갑을 들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으면  분명 지갑의 임자가 당황하며 이곳을 찾아 올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얼마 쯤 시간이 흘렀을 때 한 남자가 나귀를 이끌고 무엇인가 찾는 듯 땅바닥을 두리번거리면서 청년 곁을 지나쳐 갔다. 청년은 뛰어가 그 사람에게「무엇을 찾으십니까?」「아, 글쎄. 오늘 이 장터에 나왔다가 여기 어디서 돈 300냥이 든 지갑을 잃어 버렸다오. 그래 지금 그것을 혹 찾을까 싶어 돌아다니는 거라오.」한숨을 푹 내쉬는 남자 앞에 청년이 지갑을 내밀었다.

깜짝 놀란 주인은 너무나 고맙다고 말 하며, 이것은 잃어버린 돈이나 다름없으니 돈 150냥을 사례로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 하기를
.「제가 욕심이 있었다면 이 지갑을 통째로 가졌을 겁니다. 사례는 필요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귀한 곳에 이 돈을 쓰십시오.」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리가 똑바르던 이 청년이 바로 독립선언서의 주창자인 33인 민족 대표중의 한 분인 손병희 선생이었다.

선생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귀한 돈 잃은 사람의 마음을 한 아름 갖고 돌아갔으니, 몇 푼의 사례를 받는 것 보다 더 득을 본 것이 아닐까?

 

 

 

 

 

 

遜順(손순)의 효행.

 

홍효사는 신라의 대효자 遜順(손순)의 지극한 효성으로 이적을 낳은 아름다운 전설이 담긴 곳이다.

 

월성군 현곡면 남사동 종동리 즉 북골에 遜順(손순)의 유허지가 있는데, 여기가 홍효사지이다.

손순은 신라 제42대 흥덕왕 때의 사람이며 아버지는 학산, 어머니는 운오라고 했다.

 

일찌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는데 지성을 다 했다. 어려운 가정에서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서 근근히 그날 그날의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손순에게는 어련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언제나 늙은 할먼니의 음식을 먹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장날이면 나무를 지고 시정에 가서 판아 돌아올 때는 반드시 고기반찬을 사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나 구차한 살림이라 가기 부부와 어린 아이에게는 고기반찬이 잘 돌아 가지를 않았다.

 

그려하여 철 모르는 아이는 식사 때마다 할머니의 밥상을 떠나지 않고 또 늙은 할머니 역사 손자를 귀엽게 여기어서 늘 밥상 곁에 두고 밥상을 받을 때마다 고기반찬을 손자에게 먹여 주었다.

 

할머니는 음식과 고기반찬을 손자에게 주어버리니 배고픈 것을 참아야했다. 그래서, 하루는 손순이 생각하니 늙은 어머니를 위한 효도가 이린 아이에게 가고 어머니에게는 효성의 보람이 없고 보니 이에 결심을 하고 아내와 상의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어머니의 굶주림이 너무 심하니 차라리 이 아이를 땅 속에 묻어 버리고 어머니만 배부르게 해 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소.”

 

어머니께 대한 효성에 방해가 되는 이 아이를 없애자고 의논한 이 부부는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에 가서 땅을 파는데 문득 땅 속에서 둘 종이 나왔다.

그들 부부는 이상하게 여겨 잠깐 나무 위에 달아 두고 두드려 보았는데 그 소리가 은은하고 심히 부드러웠다.

 

아내는 말하였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 하늘이 내려 준 이 아이의 복인 듯하니 묻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남편도 또한 그러리라 여겨 아이는 아내가 업고 손순은 팽이 자루에 돌 종을 걸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 돌 종을 자기 집 처마에 달았더니 바람결에 울리는 묘한 종소리는 멀리 대궐까지 들리고 성 안에서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홍덕왕이 종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말하였다.

서쪽의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냐는데 맑고 은은한 것이 보통 물건이 아난 듯싶소. 빨려 이를 알아보도록 하시오.”

 

왕의 사자가 그 집에 가서 알아보고 사실대오 자세히 임금께 아뢰었다.

 

왕은 단식하며 말했다.

 

옛날에 중국 한나라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이 금 솥을 주었다고 하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하자, 땅 속에서 돌 종이 솟아나왔으니 천세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가 다 한 결같이 친지의 귀감이로구나! ”

 

하면서 효자 손순에게 칩 한 채를 주고 해마다 쌀 50석을 내려 노모를 편안히 봉양하도록 하라고 영을 내렸다.

 

이래서 효자 손순의 효성은 온 나라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뒷날 효자 손순은 어머나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얻은 자기 집을 절로 삼고 돌종을 달아주고 자식 된 자가 그 도리를 다할 것을 기원하였다 했다.

 

이래서 그 철의 이름도 홍효사라고 했던 것이다.

 

진성여왕 때 후백제의 도척때 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 와서 노략질을 해는데 그 때 돌 종을 도둑질해 갔다고 한다,

 

출전 <경주시지>

 

 

 

손덕침 선생의 효행

 

눈 속에 돋아난 미나리

 

모헌 손 덕침 선생은 1537(중종 32)에 영천 이곡이라는 곳에서 老巖(노암) 손 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 주민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큰 눈이 내려 길을 분간할 수도 없는 추운 겨울 어느 날 병석에 계신 어머 니께서 미나리를 먹고 싶어 하였다. 공은미나리를 구하려 사방으로 찾아 헤매던 중 홀연히 개울가 눈 속에 새파랗게 돋아난 미나리가 보이자 반가와 눈물을 흘리며 캐어 돌아와 어머니께 드렸다.

 

그 미나리나물을 맛있게 잡수 신 뒤로부터 병환이 차차 낫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고을 사람들은 공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그 어머니의 병환이 나았다고 하였으며 또 조정에 서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 효성을 가상히 여겨 벼슬을 내렸다.

 

1592(선조 25) 413일 왜적들이 수십만 대군으로 침입해 들이오니 동래, 기장, 울산, 경주 등이 차례로 떨어지고 이어 영천성은 왜장 법화의 수만 군사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왜적이 물밀듯이 북상하니 5월에는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 임금님은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손 덕침 선생은 선조 임금님이 의주로 피난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 덕호에게 급히 달려가 임금님의 피난길을 호위하라 이르고 고향에 남아서 적군을 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공이 이곡 본가에서 의병을 일으킬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그해 7월에 신녕에서 권응수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는 말이 들려 왔다. 이에 손 덕침 선생은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군사를 일으킴에 아우 덕기로 하여금 늙으신 어머니를 업고 산중으로 피난하라 이르고 막내아우 덕순과 더불어 노복들로 의군을 편성하는 한편 의병을 모집 하였더니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공은 스스로 의병장이 되고 아우 덕순을 부장으로 삼아 의기를 높이니 그들의 기상은 하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왜적을 무찌르자면 더욱 강력한 의병 조직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미 영천 주남 들판에 진을 치고 있는 권 응수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와 합치기로 결덩하니 이 날이 723일이었다. 손 덕침 선생이 권 장군의 진영으로 의병을 이끌고 가던 중 지금의 영천군 고경면 창상에서 왜적을 만나 격전을 벌이어 많은 왜적을 죽이고 이를 격퇴시켰다. 잠시 후 왜적의 대부대가 퇴각하덩 적과 합세하여 또다시 공격하여 오므로 공은 이들을 맞아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가 날이 어두워져 할 수 없이 지금의 영천 동운산으로 후퇴하여 밤을 세우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권 장군이 있는 추평으로 기기 위하여 행군하던 중 창암에서 또다시 왜적을 만나 격전을 하게 되니 이 날 전투가 더욱 치열하여 선생은 왼쪽팔에 적탄을 맞았고 의병 진영은 궤멸의 위기에 놓였다. 이에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왜적 수십 명의 목을 베니 의병은 사기 백배하여 다투어 나아가 혈전을 벌인 끝에 드디어 왜적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다. 이 후부터는 왜적은 감히 이 지방을 넘보지 못하였다.

 

창암 전투에서 비록 승리는 하였으나 의병 중 죽고 부상한 자가 많았으므 로 부득이 본가가 있는 이곡으로 회군하여 죽은 자를 장사지내고 부상자는 치료하였다.

이 때 권응수 장군이 휘하의 부장 전 삼달을 보내어 창암 전투의 장쾌한 승리를 치하하는 한편 힘을 모아 영천성 탈환을 꾀하지고 전하였다.

이 무렵 피난에서 돌아오신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직접 전투에 출천 하지 못하고 아우 덕순에게 의병 수백 명과 군량미를 주어 출천할 것을 명 하고 권 장군에게 답하기를 나는 평소에 무술과 병법을 익힌 바 없으나 나 라가 위태로운 이 때 나 혼자만 펀안히 있을 수 없어, 이 한 목숨 나라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약간의 의병을 규합하여 창암에서 승첩하였으나, 적은 군사로 성을 회복하기가 힘들어 계책 수립에 골몰하던 중 다행히 그대의 부대 가 영천에 당도하였다 하니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 즉시 달려가 협력하고 싶으나, 구십 노모의 병환이 위독하여 부득이 아우를 보내니 성공을 빕니다.”하였다.

 

아우 덕순은 공의 명을 받아 즉시 출전하여 권 장군을 도와 수 일간 성중 의 왜적과 교전한 끝에 적을 섬멸시키고 727일 영천 성을 탈환하였다.

이 무렴 손 덕첨 선생이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고 있던 중 낙오한 적병 수 십 명으로부터 불시에 기습을 받았다. 왜적들은 어머니가 누워 계신 안방 까지 들어와 병환 중의 어머니를 창으로 내리 찌르려고 할 때 선생은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 어머니를 구했으나 자신은 등에 심한 부상을 당하여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감동한 외적도 효자를 차마 죽일 수 없다.”하고 물러갔다.

 

선생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덕순을 붙러 왕이 피난을 하고 백성이 죽음의 길에 서 헤매고 있는 이 때를 당하여 내가 기필코 왜적을 쳐부수려 하였으나 병세가 이와 같이 중하니 네가 나 대신 월성 전투에 참가 하여 권 장군을 도와 월성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이 명에 따라 덕순은 월성 전투에 출전하여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니, 선생이 아우의 전사를 전해 듣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너의 형 덕호는 왕의 피난길을 호위하러 갔고, 네 또한 죽을 자리에서 죽었으니 나는 무엇을 하리오?”라고 말하며 덕순의 시체를 찾을 길이 없어 그의 의관으로 무덤을 만들고 그 넋을 위로하였다.

선생은 왜적으로부터 어머님을 구하다 다친 부상으로 수년간 병석에 누워 있던 중 어머니의 상을 당하니 그 슬픔이 하늘에 닿아 식음을 전폐하고 주야로 통곡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선생은 자신의 병환은 돌보지 않은 채 돌아가신 어머님만 생각하다 다친 상처가 악화되어 1595(선조 29) 1216일 향년 60 세로 왜란 중에 세상을 뜨니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충과 효를 기리었다.

 

 

참고 문헌孝烈行誌(효렬행지)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진사공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45

()

51

(),()

57

(),()

46

()

52

(),()

58

(),()

47

()

53

()

59

(),()

48

()

54

(),()

60

(),()

49

()

55

(),()

61

 

50

(),()

56

(),()

62

 

 

명천공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45

(),()

51

(),()

57

(),()

46

(),()

52

(),()

58

(),()

47

(),()

53

(),()

59

(),()

48

(),()

54

(),()

60

(),()

49

(),()

55

(),()

61

 

50

()

56

(),()

62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밀양 손씨(密陽孫氏)는 남한 (南韓)에 총 58,367가구, 243,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밀양 손.jpg 밀양손씨(孫) 청남 14-08-29 6971
324 경주 손.jpg 경주손씨(孫) 청남 14-08-29 4336
323 진주 소.jpg 평산소씨:진주소씨(邵) 청남 14-08-29 4079
322 성씨(星) 청남 14-08-27 2412
321 창녕 성.jpg 창녕성씨(成) 청남 14-08-27 5759
320 경주 섭.jpg 경주섭씨(葉) 청남 14-08-27 2711
319 경주 설.jpg 경주설씨(薛) 청남 14-08-27 3110
318 순창 설.jpg 순창설씨:경주설씨(薛) 청남 14-08-27 4623
317 선우.jpg 태원선우씨(鮮于) 청남 14-08-27 3640
316 보성 선.jpg 보성선씨(宣) 청남 14-08-27 5611
315 월성 석.jpg 월성석씨:경주석씨(昔) 청남 14-08-27 4664
314 해주 석.jpg 해주석씨(石) 청남 14-08-27 3697
313 충주 석.jpg 충주석씨: 홍주석씨(石) 청남 14-08-27 3946
312 안음 서문.jpg 안음서문씨(西門) 청남 14-08-27 3170
311 서씨(西) 청남 14-08-27 2314
310 평당 서.jpg 평당서씨(徐) 청남 14-08-27 2855
309 절강 서.jpg 절강서씨(徐) 청남 14-08-27 2617
308 장성 서.jpg 장성서씨(徐) 청남 14-08-27 3534
307 이천 서.jpg 이천서씨(徐) 청남 14-08-27 3989
306 연산 서.jpg 연산서씨(徐) 청남 14-08-27 3483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