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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회덕황씨(黃)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회덕황씨)

 

 

본관(本貫): 회덕(懷德)

시조(始祖): 황낙(黃洛)

유래(由來):

 

 

회덕 황씨(懷德黃氏)의 시조는 한나라 유신(儒臣)으로 평해에 표착한 황낙(黃洛)이다. 그러나 상계가 실전되어

정확한 계대를 알 수 없으며, 고려 때 형부 전서를 지낸 후손 윤보(允寶)가 좌명공신으로 회천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로 하고 회덕(懷德)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황유(黃裕)

윤보(允寶)5세손 유()가 조선 태종의 부마로 회천위에 올랐다.

즉 숙안옹주(淑安翁主)의 남편이 황유(黃裕 ( 1421 ~ 1450)이다.

()는 맹용(孟容)이요, 황자후(黃子厚)의 아들이었다.

나이 12세에 태종(太宗) 후궁(後宮)의 딸 숙안옹주(淑安翁主)와 결혼하여, 회천군(懷川君)에 봉하였는데, 35년 가정대부 회천군이 되고 44년 사은사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곧 봉헌대부(奉憲大夫)로 승봉되고 48년에는 병을 칭탁하여 숙배하지 않아 봉헌대부를 파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직첩을 도로 받았으나 2년 후 졸()하니, 나이 30이었다. 조정에서 치조(致吊)?치부(致賻)?치전(致奠)하고, 시호를 양도(良悼)라 하였는데, 온화하고 양순하고 낙()을 좋아하는 것을 양()이라 하고, 중년에 일찍 죽은 것을 도()라 한다. 네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렸다. 관가에서 장사(葬事)를 치르게 하였다.

인용<흥덕장씨 천년역사)

 

황종해(黃宗海)

덕휴(德休)의 아들 종해(宗海)는 인조 때 학자로 명성을 날렸는데, 일찍이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한 후 연산의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예학을 강의 받았다. 그 후 수차에 걸쳐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진력하여 저서로후천집(朽淺集)을 남겼다.

자는 대진(大進)이다. 할아버지는 황윤림(黃潤琳)이고, 아버지는 황덕휴(黃德休), 어머니는 참봉(參奉) 성우(成羽)의 딸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부인은 이홍벽(李弘璧)의 딸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며, 황덕기(黃德基)가 숙부이다.1610(광해군 2)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행장을 지었다.

1611(광해군 3)정인홍(鄭仁弘)이황(李滉) 등을 모함하자 호남·호서의 선비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인홍을 논척하기도 하였다. 1613(광해군 5)광해군이 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자 과거 공부를 폐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이후 장유(張維)가 천거하여 후릉 참봉(厚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32(인조 10)최명길(崔鳴吉)목서흠(睦敍欽)의 천거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으며, 1640(인조 18) 장원 별제(掌苑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황종해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도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만나 예를 논하고 묻기도 하였다. 퇴도 선생 산거시 발(退陶先生山居詩跋), 심성정리기설(心性情理氣說)등의 문장을 지었다. 또한 남전 향약(藍田鄕約)을 정리하여 촌규범례(村規凡例)46조를 만들기도 하였다. 1642(인조 20) 1224일에 사망하니, 안여룡(安汝龍김광훈(金光勳) 등이 장례를 맡아 삼성동(三省洞)에 장사를 지냈다.

 

 

황덕부(黃德簿)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황찬(黃燦)

숙종 때 목사를 역임하며 청백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많은 치적을 남긴 찬()이 유명했다.

 

황세정(黃世楨)

동지중추부사 세정(世楨)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송준길의 수제자로 일컬어졌다.

1622(광해군 14)1705(숙종 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주경(周卿), 호는 제곡(霽谷).조부는 장악원주부(掌樂院注簿) 황영남(黃穎男)이고, 아버지 황덕윤(黃德潤)은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750(영조 26) 경오식년문과(庚午式年文科)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고령박씨(高靈朴氏)선교랑(宣敎郞)을 지낸 박공(朴珙)의 딸이다.

3세 때 부친을 여의자 종숙모(從叔母) 조씨를 따라 고향 회덕에 내려와 자랐다. 6세 때 처음으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밑에서 글을 익혔으며 9세 때는 당시 재상이었던 최명길(崔鳴吉)에게 강목(綱目)을 배웠다. 이후 동춘당의 큰 아들 송광식(宋光栻)과 함께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서도 수학하였다.1656(효종 7) 여러 선비들이 추천하여 영릉참봉(英陵參奉)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3년 뒤에 다시 교관(敎官)을 제수 받았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연기(燕岐)로 돌아와 조그만 집을 지었는데 우암이 제곡유거(霽谷幽居)’라는 네 글자를 써 보내오자 그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평소 윤휴(尹鑴)와 가까웠는데, 기해년 복제(服制) 문제로 우암과 동춘당이 관직이 추삭되고 유배당하자, 그 억울함을 알리고 반대파들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로 인해 곧바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1680(숙종 6) 유배지에서 돌아와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지내다가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그 뒤 연풍현감(延豊縣監)으로 부임하였다.1694(숙종 20) 가을 문생들이 그의 공적을 상소하여 벼슬을 청하니 통정(通政)의 품계와 첨추(僉樞)의 직을 하사받았다. 1701(숙종 27) 다시 판서 김창집(金昌集)의 추천으로 가선(嘉善)의 반열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05(숙종 31) 223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 이듬해 4월 전의(全義)의 사촌(沙村)에 부인과 합장하였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회덕 황씨는 남한에 총 1,553가구, 6,63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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