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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소씨(蘇)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진주소씨)

본관(本貫): 진주(晉州)

시조(始祖): 소백손(蘇伯孫)

유래(由來):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부소나무)를 심어 소()를 성()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61세손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소복서(蘇福瑞)

소복서(蘇福瑞)661(문무왕 1)~742(경덕왕 1)에 사람이며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다.

시조인 각간 경()의 손자이며, 아명은 치자이다.

공은 677(문무왕 17)에 일직이 화랑이 되었는데, 6792월 탐라(지금의 제주도)정벌 때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696(효소왕 5) 청주 총관을 지냈으며, 707(성덕왕 6)에 굶주린 백성에게 구휼을 베풀어 선정을 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었다.

 

소억자(蘇億滋)

소억자(蘇億滋)679(문무왕 19)~739(효성왕 3)

복서의 아들인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다.

청주총관 복서(福瑞)의 아들인 그는 711(성덕왕 10) 한주 총관을 지내고, 725(성덕왕 24) 4월 발해에 사신으로 다녀와 외교적인 곡을 세워 그 공을 인정 받았다.

 

소격달(蘇格達)

891(진성영왕 5)~983(성종 2)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다.

자는 유달(有達)이고, 호는 모은(募隱),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시조 慶의 11세손이며, 강주도독 송의 아들이다.

914년 화랑이 되고, 916(신덕왕 5) 하동에 증산산성을 쌓아 후백제를 방어한 공으로 하동태수가 되었다.

당시 후삼국의 난세로 925년 왕봉규가 권지강주사가 되어 독립국 행세를 히게 되고, 강주 고을의 향방이 난처해지자 공은 고려에 귀부할 것을 결심하고, 926(태조 9) 군사 1턴을 거느리고 고려에 들어가 대장군이 되어 태조 왕건의 삼한통합을 도왔다.927년에 태조가 강주(진주)를 공략할 때 이에 참전하여 왕봉규를 멸하고, 934(태조 17) 태조가 운주를 공략할 때 큰 공을 세웠다.

1054(문종 8) 12월에 삼한벽상공신 태부에 증직되었다.아들은 진흠(振欽)이며, 5세손 계령의 딸은 헌종비 희순왕후가 되었다.

춯전 (진주소씨 세덕록)

 

소목(蘇穆)

800(애장왕 1)~870(경문왕 10)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소목(: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다.

청주도독 상영의 장자에며, 시호는 희경(僖景)이다.

838(민애왕 1) 김양의 난을 평정하였고, 후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위에 열거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소은(蘇恩)

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 최치원 ( 崔致遠 )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급찬 ( 級飡 ) 김영(金穎)이 하정사 ( 賀正使 )로 당나라에 갈 때 2인의 수령(首領) 중 한 사람으로 김영을 수행하였는데, 이때 기탁(祈卓) 8인이 대령(大領)으로서 역시 하정사를 수행하였으며, 함께 간 유학생은 최신지(崔愼之) 8인이었다.

그런데 입조장에 의하면 이때 수령으로 파견된 사람은 당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뽑았다고 하므로 소은은 중국 유학생 출신임이 분명하다.

종래 소은이 수령으로서 당나라에 건너간 연대를 최신지의 경력을 역산하여 885(헌강왕 11)일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입조장의 내용을 여러모로 분석해 볼 때 진성여왕 말년, 혹은 효공왕 즉위 초인 897년 경이 아닐까 짐작되고 있다.

 

소문(蘇汶)

문장이 뛰어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소 문 (蘇 汶)은 웅주도독 은의 아들이며, 강주 도독 송의 아우이다.

소목, 소은과 함께 당시 소씨의 삼대문장이라고 칭송을 받았다.공은 도한 9479(고려 정종 2) 진주 소씨 최초의 대동보인 <동근보)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전해지며, 지금은 그 서문만 남아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동부는 안동권씨 문중의 족보이다.

 

소계령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소경보(蘇景輔)

소경보(蘇景輔)는 진산부원군 계령의 아들이고, 문하시중 광보의 아우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소광보(蘇光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소세린(蘇世麟)

세린(世麟)문하시중 경보의 아들이고, 이부상서 세기의 아우이며, 시호는 문정9文貞)이다.1147(의종 1)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고, 인종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 충신효제에의염치(忠信孝悌禮儀廉恥)를 백성에게 가르칠 것을 건의하였다.

 

소경손(蘇慶遜)

1132(인종 10)~1196(명종 26)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 산수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수문전 대학사 이관의 아들이며, 시호는 장렬(莊烈)이다.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집권 후 사정의 난을 일으키자 이 난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상장군겸 개성순무사에 올랐다.그 후 추밀원사가 되었으나 무신정치로 조정이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소함(蘇涵)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호는 월호(月湖)이며, 시조 경의 22세손이고, 무종의 아들이다.고려 때 산원동정을 거쳐 좌우위 상장군에 이르렀으며, 1254(고종 41) 몽고의 침입 때 2천명의 보졸(步卒)을 거느리고 아모간의 1만 군사와 싸우다 진위에서 순절하였다.

 

소희철(蘇希哲)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다.

 

소문철(蘇文哲)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자는 군철(君哲)이며, 좌우위상장군 함의 아들이다.일찍이 문과에 올랐으며, 몽고의 침입 때 대군을 맞아 싸우다 아버지 함이 순절하자 이에 격분하여 수많은 적을 죽였다.

후에 정의대부,금오위상장군을 거쳐 상장군이 되었다.

 

소을경(蘇乙卿)

1325(충숙왕 12)~1385(우왕 1)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다.

판도판서 약우의 아들이다.1350(충정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1365(공민왕 14) 광정대부에 오르고 개성윤이 되었으며,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1370(공민왕 19) 판도판서를 지냈으나, 잦은 정변과 외침으로 나라가 어지럽자 1374년 진위로 낙향하였다.

출전( 진주소씨 세덕록)

 

소천(蘇遷)

1352(공민왕 1)~1396(태조 5)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소천()은 고려말에 명망을 떨쳤다.

판도판서 을경의 아들이다.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1369(공민왕 18) 문과에 장원하고, 사재감 소윤에 이르렀다.

1392(공양왕 4)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포은선생이 변을 당하자 전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출전(진주소씨 세덕록)

 

소세량(蘇世良)

1476(성종 7)1528(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병암(屛巖). 중군사정(中軍司正)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며,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석주(碩珠)의 딸이다.

좌찬성 세양(世讓)의 형이다. 1496(연산군 2)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 ( 小說 불경 ( 佛經 )에까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문장과 글이 물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1507(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원에 들어가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대간 ( 臺諫 시종(侍從)으로 시강(侍講)하였으며, 주서(奏書)와 상소는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516년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서리들의 기강을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4년 후 홍문관수찬, 사헌부의 지평·장령, 홍문관의 ·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1522년 사간· 좌부승지 ( 左副承旨 동부승지 ( 同副承旨 ) 등을 역임하였다. 1524년 대사간에 승진되었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부사를 자원하였다. 이때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평생 글을 좋아하여 가산은 돌보지 않았으며 효우(孝友)하였고 향리(鄕里)의 후배를 양성하여 크게 교화하였다.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암집 屛巖集1권이 있다.

 

소세양(蘇世讓)

1486(성종 17)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중군사정(中軍司正)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다.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석주(碩珠)의 딸이다.

1504(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 顯德王后 )의 복위를 건의, 현릉 ( 顯陵 )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 ( 李荇 )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 ( 王子師傅 )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 ( 進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 ( 星州史庫 )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 ( 春秋館 )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인종 1) 윤임 ( 尹任 )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 ( 律詩 )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양곡집 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소세영(蘇世榮)

1486(성종 17)~15539명종 8)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자는 화정(和政), 호는 계전(桂田)이며, 홍문관 대제학 현손의 손자이고, 자언의 아들이다.

1540(중종 35) 조산대부,상원군수로 부임하여 문무를 권장하고 군민을 사랑하여 농업과 산업을 권장, 군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니, 이를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졌다.1699(숙종 25) 상원 대덕서원에 제향되었다.

 

소상진(蘇尙眞)

1548(명종 3)~1592(선조 25)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조선의 의병으로 보성 출신이며, 자는 실보(實甫), 호는 서암(書庵)이다

.신라 각간 경의 33세손이며, 옥연포 만호 규의 장남이다.

19세때 현령 남평인 문준(文準)의 딸과 결혼하였고, 다년간 병서를 읽고 무예를 연마하여 담약과 용력을 겸전하여 통훈대부 사재감 주부에 제수되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달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근왕하기 위해 필마단창으로 상경하던 도중 전주에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만나 의병을 모집한 후 그와 같이 영남으로 내려갔다. 진보군수 임계영이 의병을 일으켜 분전한다는 말을 듣고 그와 합세하여 임게영이 우의장, 장윤이 부장, 그가 별장이 되었다.

그는 항상 홍의를 입고 선두에서 돌격하여 연전연승하니, 왜적이 옹의만 보면 홍의장군이 나타났다고 하며 겁에 질려 그의 예봉을 피해 달아났다.

부장 장윤이 그의 용맹을 보고 아끼면서 "나라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의병 뿐이요, 의병이 믿는 것은 장군 밖에 없으니, 자중하여 목숨을 보전하기 바라오."하자 "장부가 전지에서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리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나의 듯이오."라고 대답하였다.

그 해 1213일 성주 싸움에서 불과 의병 백여명으로 천여명의 적을 상대하여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하지 못하고 장병이 후퇴하려 하자 "적을 보고 피하는 자 어찌 의병이라 하랴."고 외치며 혼자 적진에 뛰어 들어가 좌충우돌 무수한 적을 베니, 아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승세를 굳혔으나 패주하는 적장 모리휘원을 추격하다가 적탄을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조정에서 공의 숭고한 정충보국의 정신을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 예조참의에 증직하였고, 나주의 정렬사에 배향하였다.1978년 여러 후손들이 발의하여 국가의 보조와 문중의 협조로 이를 중수하고, 군수가 사적비를 세웠다.

 

소제(蘇濟)

1551~1593(선조 26)

진주성(晋州城)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가서 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조선의 의병이고 자는 경즙(景楫), 호는 적은(迪隱)이며, 직장 연의 6대손이고 인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비범해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좋아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아버지가 병으로 위중하자 약을 구하러 3백리 길을 하루 사이에 다녀 와 달여 드려서 수개월을 연명시키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한 가운데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병졸을 이끌고 남원을 지날 때 백의로 왕진의 군문에 들어가니 황진이 기꺼이 맞아들여 병마 한 부대를 주었다.

그는 군중 앞에서 칼을 어루만지며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다짐하자 장졸이 모두 울었다 한다.황진과 함게 진안 방면에 들어 온 적을 무찌르고, 7월에 전주에 침입한 적을 맞아 싸워서 대승하였다.금산에 있는 적이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공시억, 위대기, 황박 등과 함께 진산 이현에서 주야로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대파하여 물리쳤다.

그 때 공은 많은 상처를 입어 온 몸이 피로 물들었으나 30여 적을 베었다 한다.이듬해 봄에 김천일, 최경희, 이종인, 황진과 함께 진주에 가서 성을 수비하다가 619일 적이 단성, 곤양, 사천 등지를 차단하고 진주를 향해 쳐들어오니 아군은 고립되고 적세는 산과 들을 메웠다.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비오는 듯한 적탄에 맞아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진 적도 많았다.

28일 왜적이 땅 밑으로 굴을 파고 쳐들어오니 힘을 다해 싸워도 사태는 불리하였다. 그는 탈출 못 할 것을 직감하고 일기장 끝머리에 ""자를 써서 짚신과 함께 말에 실려 내몰았다.

그 이튿날 성은 함락되고 황진,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 등이 차례로 죽고 공도 적탄에 맞아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72일 말이 호초일기와 짚신 한짝을 싣고 돌아왔으므로 초혼장이 거행되었다.한성부 주부에 추증되었으며, 17889정조 12) 정문의 은전이 내려졌고, 금성 장렬사, 금산의 대첩단에 제향되었으며, 금산 금곡에 비가 세워졌다.

 

소동(蘇仝)

행진(行震: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소동()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소영복(蘇永福)

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수(重綏), 호는 사은(四隱). 익산 출신. 대사간 세량(世良)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민선(敏善)이다. 서윤 ( 庶尹 ) 응선(膺善)에게 입양되었다. 김은휘(金殷輝)의 문인이다.

1582(선조 15) 진사가 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혼 ( 成渾 )으로부터 출사할 것을 여러 번 권유받았으나 학문이 미진함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의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 ( 龍華山 )에 작은 성을 쌓아 향토 방위에 참여했으며, 난 후 국정 전반에 관한 시무책 ( 時務策 )을 조정에 올려 가납(嘉納)되기도 하였다.

160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수천 권의 서책 속에 묻혀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1605년 김장생 ( 金長生 )이 익산군수로 있을 때 매번 그의 방문을 받아 군정자문(郡政諮問)에 응하였다.

이와 아울러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경전(經典) · 사서(史書) 등 귀중한 전적 ( 典籍 )들을 나라에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 煉 書閣)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 무렵 향리 일대가 한해로 매년 흉년을 겪게 되자 40여 리에 달하는 수로 건설을 건의, 농민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뿐만 아니라, 천문 · 지리 · 의복(醫卜) · 병법(兵法) · 관방(關防)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했으며, 성혼에게 종유(從遊 ; 좇아 사귐.)하는 한편, 조헌 ( 趙憲 ) · 정경세 ( 鄭經世 ) · 한백겸 ( 韓百謙 ) · 황신 ( 黃愼 ) 등과의 친교가 두터웠다.

광해군 때 조카 명국(鳴國)이 대북 · 소북간의 당쟁에 관여, 몰락하자 이에 연좌되어 대명(待命) 중에 질병을 얻어 죽었다.

 

소동도(蘇東道)

1592(선조 25)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유(子由), 호는 면와(眠窩). 전라북도 익산 출신. 첨사 세공(世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건()이고, 아버지는 찰방 만선(萬善)이다. 1617(광해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는 벼슬하지 않았다.

1623(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 ( 西人 )이 집권하자 163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된 뒤 1646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곧 면직되었다. 이듬해 평안도 은산부사를 지내고 정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암행어사로서 민정과 수령의 치적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650(효종 1) 의주부윤이 되어 호란 후 피폐하여진 민생을 구제하고 국방과 영선사업에 힘썼다. 뒤에 경주부윤을 거쳐 165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수령전최(守令殿最 : 근무 성적의 평가)에 공정을 기하였다. 익산지방의 대표적인 명문출신으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몸소 실천하였으며, 화암서원 ( 花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소응무(蘇應武)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

 

소두산(蘇斗山)

1627(인조 5) 1693(숙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억선(億善)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동명(東鳴)이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문인이다.

1652(효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60(현종 1) 식년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663년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직언 때문에 권신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1672년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진휼책을 잘한 공로로 수상하였다.

1675(숙종 1) 제주목사, 1681년에 강릉부사 · 의주부윤 · 함경북도병마절도사 · 동래부사 ·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 · 공홍도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1688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울분 끝에 병사하였다.

중요 외직(外職)을 역임할 때마다 남인들로부터 권신들에 부탁하여 여러 번 고을을 다스리며 탐학(貪虐)을 자행하였다. ” 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서인집권하에서도 대간으로부터 처신이 근신하지 못하여 공의(公議)에 버림받았고, 향촌에 있을때는 무단(武斷), 수령 재임 때에는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시문은 월주집 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소진형(蘇鎭亨)

1885(고종 22)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논산 출신. 1919년 대한광복회 ( 大韓光復會 ) 간부인 우이견(禹利見권영만(權寧萬이재환(李載煥) 등과 협의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남도지역의 부호를 조사한 뒤 군자금납부요구서와 이에 불응할 때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문서 19통을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그 뒤 수금된 자금 2,000원을 임시정부 특파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주어 송금하도록 하였으며, 1920년 경신학교 ( 儆新學校 )에서 임시정부 후원단체인 독립주비단(獨立籌備團)을 조직하고 그 해 음력 9월에 이 단의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뒤 임시정부로부터 독립공채를 받아 이를 각지의 부호들에게 배부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각종의 독립운동 관계문서를 인수하여 이를 배포함으로써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20년 일본경찰에 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았다. 1982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소휘옥(蘇輝玉), 소진우(蘇鎭佑),소천술(蘇千述),소휘태(蘇輝泰)

한말(韓末)에 구국의 충정(忠貞)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 소씨를 더욱 빛냈다.

 

蘇斗山(소두산)  선생의 일화.

고전적을 바준 소두산

 

옛 날에는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입각해서 묏자리니, 꿈 해봉이니 하는 것에 무척 신경을 많이 썼는데 다음 일하도 그런 종류의 이야기로 실제(實際) 인물들 사이에 오간 일화이다.

진주 소씨 소두산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고전적이라는 사람은 현종(玄宗) 때 이호동(梨湖洞)에서 자란 사람으로 주역의 달인라고 일커러진 명도(明道)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풍수지리에 통달했던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서자 태생이어서 명도(明道)에게서까지도 서자의 차별을 받았다.

그래서 뒤에 명도(明道)가 죽자 묘터를 잡는데 그 안가품으로 좋지 못한 자리에 자리를 잡아 그를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신안(神眼)을 가졌다고 하는 고전적이 묘터를 골랐으니 누구도 탓하지 않았지만 그와 동문(同門)인 소두산(蘇斗山)이 그 지방 목사(牧師)로 와서 이를 알고는 고전적을 하옥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 소두산 목사가 인통(간인을 넣는 통)”을 세 번 떨어뜨리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해몽할 수 있는 사람은 고전적밖에 없었다.

그 해몽으로 인해 소두산 목사는 크게 출세를 하게 되어 그 보답으로 고전적에게  전적(典籍)이라는 벼슬을 주게 되었다고 한다.

 

 

蘇奏(소주)의 결심

 

소진(蘇奏)이라는 변설가()가 있었다.

 

()는 이자(李子)라고 하였으며 동주(東周)의 사람으로서 , 동쪽에 있는 제 ()나라에 가서 귀곡(鬼谷)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종횡자재의 변재를 배우고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관직에 나가기를 구했었다. 그러나 오륙년이 지나도, 남이 알아주기는 고사하고, 방황하느라고 많은 여비만 소비 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가친척들까지 몰래 소진을 비웃으면서

 

()의 사람은 옛부터 모두 산업(産業)에 종사하여 벌이를 한다든지 또는직공이나 장사를 하면서 세금을 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는 본업을 버리고 단지 의론(議論)이나 변설만을 일삼고 있으니 생활이 어려움은 무리가 아니야.

 

라고 그를 비난했으며, 아내나 형수는 베를 짜면서 얼어나 마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소진은 야속한 세상인심을 대하고는 심한 분노와 두려움을 절감하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고, 책만 뒤적이며 독백하였다.

 

이제껏 많은 책을 읽었지만, 아무 일이건 이룩한 것이 없다면 만 권의 서적을 읽은들 아무 소용도 없구나.

깊이 느낀 바 있어서 마침내 처박아 두였던 주서(周書) 태공망(太公望)의 비결인 병서(兵書) 만을 숙독 연구하였다.

일 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치를 해독하고, 왕의 사정을 헤아리고, 가깝게 하여 이야기 할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췌마(揣摩)의 일편(一篇)을 저술하고는,

이것만 있으면 반드시 당시 부국강병을 바라는 국왕들에게 절대 필요한 지침서가 되리라.

혼자 자부하고는 곧 주() 나라 현왕(顯王)을 찾아갔다.

 

그러나 현왕을 모시는 신하들은 일찍이 소진의 성장과 行蹟(행적)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무턱대고 그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시금 진()나라에 가서 혜왕(惠王)을 만났으나 왕은 상앙(商央)을 죽인 뒤라 변사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등용되지 못했다.

다시금 조() 또는 연())나라에 일 년간 머물면 서 왕을 만났고, 계속해서 제(), ()나라 왕에게 합종(合從)의 계략을 강의하여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다.

 

마침내 제 나라의 승상(丞相)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전에 본체도 않던 형수가 이미 알고 멀리까지 마중 나왔다.

소진은 쓴 웃음을 지으며

전날에는 나를 보고 베틀에서 일어나지도 않더니, 오늘 육십리 밖에까지 마중 나온 것은 무슨 뜻인지요.

라고 물으니 형수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금 여섯 나라의 벼슬을 갖고 돌아왔으니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조상의 이름을 드높혔으므로 마중 나온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소진은

지금 이렇게 금의환향할 수 있는 것은 지난 날 형수께서 나를 몹시 부끄럽게 하였으므로, 다시금 결심하게 한 연유이지요.

라고 오히려 사의를 표하였다는 것이었다.

출전<불교설화집 정두서 저>

 

 

 

 

 

 

출전 <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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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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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남한(南韓)에 총 9,191가구, 38,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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