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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울산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울산박씨)

 

 

본관(本貫): 울산(蔚山)

시조(始祖): 박윤웅(朴允雄)

유래(由來):

 

울산 박씨(蔚山朴氏)는 신라 경명왕(景明王: 제 54대 왕, 재위기간: 917 ∼ 924)의 막내아들인 국상공(國相公) 교순(交舜)의 7세손 윤웅(允雄)을 중조(中祖)로  받들어 기일세(起一世)하여 왔다.  울산박씨세보(蔚山朴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문종(文宗) 때의 국감(國監) 경목(慶穆)의  손자이며 평장사(平章事) 형립

(亨立)의 둘째 아들로 울산현교동(蔚山縣校洞)에서 태어나, 1099년(고려 숙종 4) 동여진(東女眞)의 10만 대군이 침공해 왔을 때 이를  물리쳤고, 예종(睿宗) 때 재침한 여진족을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장군과 더불어  격퇴시켜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흥려백(興麗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

리하여 후손들이 울산(蔚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후대로 내려와 종파(宗派)인 용당파(龍塘派)를 비롯하여 20개 파로 갈라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우(朴祐)

중시조(中始祖) 윤웅(允雄)의 아들 우(祐)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다.

 

박연(朴演)

웅의 증손 연(演)은  봉의랑(奉儀郞)으로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역임하여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박유(朴愈)

고려 말 감무(監務)를 지내고 한림(翰林)의 벼슬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던  유(愈)는 봉상시정(奉常寺正) 길우(吉佑: 시조의 10세손)의 아들로 후에  예산대흥(禮山大興)으로 옮겨 살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박인량(朴寅亮)

대제학(大提學) 천익(天翼)의  아들 인량(寅亮)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박이문(朴而文)

조선조 임진왜란 때  합천(陜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박영정(朴英挺)

외구와의 전쟁에서 순절(殉節)한 영정(英挺: 선전관을 지냄)이 유명했다.

 

박홍(朴泓)

1534(중종 29) ∼ 1593(선조2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청원(淸源). 할아버지는 한( 円 )이고, 아버지는 별제 ( 別提 ) 영무(英珷)이다. 어머니는 직장 ( 直長 ) 정인걸(鄭仁傑)의 딸이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서 출생하였다. 1556년(명종 11)에 23세로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임명된 이후 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 · 정평부사(定平府使) · 종성부사(鍾城府使) 등 외직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서 왜적의 선봉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본진을 소각하고 죽령 ( 竹嶺 )으로 후퇴, 적을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령 ( 鳥嶺 )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한성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뒤라 행재소 ( 行在所 )로 찾아가던 중, 도원수 김명원 ( 金命元 )을 만나 좌위대장(左衛大將)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 참여하였다. 이어 신길(申 跌 ) · 유극량 ( 劉克良 ) 등과 함께 병사를 나누어 파주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해 평양으로 탈출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뒤, 사헌부를 위시한 조신들로부터 영토를 지켜야 할 신하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군율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때가 전시이고 또 후퇴하던 과정에 종군한 것이 감안되어 처벌을 면하였다.

같은 해 6월에 평양이 함락되자 순변사 ( 巡邊使 ) 이일 ( 李鎰 )과 함께 평산으로 들어가 병사를 모으고 있던 중, 당시 이천(伊川)에 있던 세자의 명을 받고 세자를 호위 시종하면서 성천으로 들어갔으며 우위대장 · 의용도대장(義勇都大將)에 임명되었다.

그 뒤 평양 방면으로 나아가 여러 차례 왜적과 접전했으나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다. 1593년 1월에 평양이 수복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까지 종군하였다. 그러나 지병이 재발해 치료를 위해 귀향하던 중 사망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박율

효종조(孝宗朝)에서 문과에 급제한 율은 현종(顯宗) 때  은산현감(殷山縣監)을 거쳐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박두세(朴斗世)

1650(효종 1) ∼ 1733(영조 9).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사앙(士仰). 충청도 대흥 출신. 할아버지는 이건(以建)이며, 아버지는 율( 僻 )이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직이 제수되었으며, 1686년 의금부도사로 권대운 ( 權大運 )을 압송할 때 편리를 보아주었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진주목사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남인에 속하였으며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문장에 특히 능하였으며 운학 ( 韻學 )에도 매우 밝았다. 작품으로 〈 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 〉 가 있는데, 그 내용은 1678년 과거에 실패한 선비가 귀향하던 길에 요로원의 주막에서 양반인체하면서 유식을 자랑하는 인물을 상대로 주고받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당시 사회의 실정을 폭로하고, 정치제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세태를 풍자하였다. 운학에 관한 저술로 ≪ 삼운보유 三韻補遺 ≫ 와 그것을 증보한 ≪ 증보삼운통고 增補三韻通考 ≫ 가 있다.

 

박응한(朴應漢)

한말(韓末) 고종(高宗) 때의 석학(碩學) 임헌회(任憲晦)의 학통(學統)을 따랐던  응한(應漢)이 학행(學行)이 고명한 학자(學者)로 이름을 떨쳤고, 저서(著書)로 신암집(新庵集)을 남겨 충절(忠節)의 가문에 학맥(學脈)의 전통(傳統)을 남겼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3

錫(석)

26

煥(환),魯(노)

火(변)

29

注(주),源(원)

水(변)

24

漢(한),恒(항)

27

載(재),基(기)

土(변)

30

業(업),植(식)

木(변)

25

義(의),之(지)

28

鉉(현),鎭(진)

金(변)

31

熙(희),火(변)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산 박씨(蔚山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4,526가구, 18,3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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