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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월성박:경주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월성:경주박씨)

본관(本貫): 월성(月城): 경주(慶州)

시조(始祖): 박언의(朴彦儀)

유래(由來):

 

월성 박씨(月城朴氏)는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의 아들 8형제 중 막내인 언의(彦儀)가 월성대군(月城大君)으로 봉군(封君)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월성(月城)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귀(朴龜)

공조전서(工曹典書) 겸형(兼亨: 월성대군의 10세손)의 손자 귀(龜: 문하시중 유의 아들)가 고려 말에 중군사정(中軍司正)·부령을 지냈으나 고려가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인천(仁川)에 있는  산중(山中)에 은거(隱居)하니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장아산(藏我山)이라 불렀다. 그 후  조선 태종(太宗)이 여러 차례에 걸쳐 벼슬을 하사하며 그를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고, 망경대(望京臺)에 올라 망국의 한을  통곡으로 달래다가 장아산에서 일생을  마쳤다.

 

박민수(朴敏樹)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역임하고 영남(嶺南) 의흥(義興)으로 낙향했던  박옹(雍)의 증손 민수(敏樹)는  효성(孝誠)이 뛰어나 부상(父喪)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박응상(朴應祥)

민수의 둘째 아들인 응상(應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70세의 병든 몸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다.

 

박종남(朴從男)

응상의 조카  종남(從男)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공을 세워 병조정랑(兵曹正郞)과 평안도절제사(平安道節制使) 겸 순무사(巡撫使)가 되었다.

 

박홍미(朴弘美)

1571(선조 4) ∼ 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초명은 경립(敬立), 자는 직재(直哉) · 군언(君彦), 호는 관포(灌圃). 현룡(顯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환(尹 瀛 )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1611년(광해군 3) 병조좌랑, 1614년 대동찰방을 지냈고, 그뒤 정언 · 지평 · 수찬 · 교리 · 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사친(私親)인 김씨를 추숭(追崇)할 때 반대상소로써 극간(極諫)하였다.

그리고, 이이첨 ( 李爾瞻 ) 등에 의한 옥사와 1615년 인목대비유폐사건 등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조익 ( 趙翼 )이 장유 ( 張維 )에게 천거하여 벼슬길에 다시 나왔으며, 첨정 ( 僉正 )과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병으로 인하여 외직을 구하였으며, 창원부사로 임명되어서는 청렴과 덕정으로 여섯번이나 포상이 내려졌다. 그뒤 1629년 승지에 임명되고 경주부윤 · 삼척부사 · 도승지를 거쳐 1635년 이조참판 및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강도 ( 江都 )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서산에서 죽었다. 일찍이 장유 · 이식 ( 李植 ) · 정홍명 ( 鄭弘溟 )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저서로는 ≪ 관포집 灌圃集 ≫ 3권 2책이 있다.

 

박홍중(朴弘中)

1582(선조 15) ∼ 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자건(子建), 호는 추산(秋山). 아버지는 희룡(熙龍)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교관 ( 敎官 ) 복경(福慶)의 딸이다.

성혼 ( 成渾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99년(선조 32) 진사시에 합격, 1609년(광해군 1) 참봉 · 사산현감(四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고,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김제남 ( 金悌男 ) · 이원익 ( 李元翼 ) · 남이공 ( 南以恭 ) · 정택뢰 ( 鄭澤雷 ) 등을 변호하고, 폐모론을 일으킨 이이첨 ( 李爾瞻 ) · 윤인(尹 婦 ) · 정조 ( 鄭造 ) · 이위경 ( 李偉卿 ) 등의 처벌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이정구 ( 李廷龜 ) · 이식 ( 李植 ) · 이항복 ( 李恒福 ) · 서성(徐省) · 김상헌 ( 金尙憲 ) 등 당시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저서로는 ≪ 추산집 ≫ 이 있다.

 

박천우(朴天祐), 박종석(朴宗碩)

영조(英祖) 때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남.

 

박능일(朴能一)

한말(韓末)에 능일(能一)이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울분으로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함으로써 가문을 빛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2

道(도)

25

斗(두)

28

 

23

顯(현)

26

鉉(현)

29

 

24

祚(조)

27

海(해)

30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성 박씨(月城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5,120가구, 20,5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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