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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음성박씨)

 

 

본관(本貫): 음성(陰城)

시조(始祖): 박서(朴犀)

유래(由來):

 

음성 박씨(陰城朴氏)의 시조(始祖) 박서(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 고종(高宗)때  몽고(蒙古)의 장수(將帥) 살리타이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그는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이를 물리쳐서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음성백(陰城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죽성박씨(竹城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서(犀)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음성(陰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재

시조 서의 아들 재가 고려조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역임했다.

 

박현계(朴玄桂)

시조의 손자 현계(玄桂)는 충숙왕(忠肅王)때 전리총랑(典理摠郞)과 평해부사(平海府使)를 거쳐 정승 윤석(尹碩) 등과 함께 조적(曹 )의 난(亂)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이등공신(二等攻臣)에 책록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슬하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문서(文瑞)는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차남 문길(文吉)은 지군사(知郡事)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다.

 

박순(朴淳)

∼ 1402(태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음성(陰城). 증조는 공부상서 재( 師 )이고, 할아버지는 전리총랑 현계(玄桂)이며, 아버지는 군사(郡事) 문길(文吉)이다.

1388년(우왕 14) 도평의사사지인(都評議使司知印)으로 요동 정벌군에 종사하다가 위화도회군에 관련된 이성계 ( 李成桂 )의 글을 우왕에게 전했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상장군 ( 上將軍 )이 되었다.

태조가 여러 왕자를 죽이고 즉위한 태종을 미워해 함흥에 머물러 있자 태종은 사자를 여러 번 보내 태조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문안사 ( 問安使 )로 파견된 사람 중에서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뒤 태종이 신하들에게 “ 누가 가겠는가. ” 라고 하자 오직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인 그가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하인도 없이 망아지가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에 갔다. 이윽고 태조가 있는 곳에 이르러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놓고 어미 말만 타고 가니 어미 말이 가지 않으려 하였다.

태조는 말의 행동이 이상해 그 까닭을 물으니 “ 새끼 말이 길가는 데 방해가 되어 매어놓았더니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짐승일망정 지친(至親)의 정이 있는 모양입니다. ” 하고 비유해 대답하니 태조가 슬퍼하였다.

함흥에 체류하던 어느 날 태조와 함께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새끼를 껴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이었는데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때 그는 장기판을 옆으로 치우고 태조의 귀환을 간곡히 청하였다. 이에 태조도 한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였다.

귀로의 길에 오르자 태조를 모시는 신하들이 그를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 ( 龍興江 )을 건너갔으리라 생각해 신하들의 청을 승낙하면서 강을 건넜으면 쫓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급병으로 중도에서 지체하다가 겨우 배에 올랐으므로 살해되고 말았다.

태종은 그의 공을 기록하게 하고는 관직과 토지를 내리는 한편 자손의 등용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任氏)에게 묘지를 내렸으며, 그의 고향에 충신 · 열녀의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민정중 ( 閔鼎重 )이 시장 ( 諡狀 )을 지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박정(朴淨)

순(淳)의 아우 박정(淨)은 세종(世宗)때 직제학(直提學)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박소(朴昭)

순의 아들 박소(昭)는 좌승지(左承旨)로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했다가  형을 받았다.

 

박숙진

순의 손자 숙진(叔: 병조참판의 아들)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박숙무(朴叔楙)

숙무(叔楙)는 세종때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

 

박숙달(朴叔達)

숙달(叔達)은 성종(成宗)때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박광옥(朴光玉)

1526(중종 21)∼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자회(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곤(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전라도 광주에 세거(世居)하였다. 10세 때 정황(丁潢)의 문하에 들어갔다.

1546년 (명종 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나주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또, 향약을 실시하고, 기대승 ( 奇大升 )· 박순 ( 朴淳 )·이이(李珥)· 노사신 ( 盧思愼 ) 등과 교유하였다. 1560년 목사 유경심 ( 柳景深 )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學憲)·학규(學規)를 제정하였다.

1568년(선조 1)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 ( 內侍敎官 )에 임명되었다. 157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종부시주부가 되었으며, 운봉현감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 ( 荒山大捷碑 )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충청도의 도사를 거쳐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직강을 거쳐 영광군수·밀양부사가 되어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전주의 교수와 사예·사섬시정·봉상시정 등에 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가 일어나자, 전에 정여립의 전장직 진출을 막은 이경중 ( 李敬中 )을 탄핵한 죄로 삭탈관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고경명 ( 高敬命 )· 김천일 ( 金千鎰 )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 ( 李洸 )의 무능을 탄핵했으며, 새로 감사에 부임한 권율 ( 權慄 )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목사로 재임하다가 죽었다.

1602년(선조 35) 나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벽진서원으로 고쳐졌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 ( 龍巖書院 )에도 제향되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 懷齋遺集≫에 전한다.

 

박지성(朴至誠)

광해군(光海君)때 이이첨 일당의  전횡을 탄핵했다.

 

박호원(朴浩遠)

영조(英祖)때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남.

 

박정규(朴廷珪)

아산현감(牙山縣監)을 지냄.

 

박종언(朴宗彦)

영조(英祖)때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

 

박내양(朴來陽)

순조조(純祖朝)의 정언(正言).

 

박준흠(朴俊欽)

목도서설(木圖書說)의 저자(著者).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음성 박씨(陰城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1,569가구, 6,3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無學大師(무학대사) 의 일화

 

이씨 조선이 만들어 질 때 의전을 맡은 이가 저 유명한 무학대사다.

무학대사는 영남 삼기 사람으로 속성이 박()씨 본관은 음성이라고 한다다.

18세에 출가해 소지선사에게 계를 받고 진천 길상사와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20세 때 원나라에 가서 인도승려 지공을 만난다. 또 고려 명승 나옹의 제자가 됐다. 그 후 설봉산 토굴에서 수도하고 있던 무학은 이씨조선이 세워지자 태조의 요청으로 왕사가 된다.

 

무학대사가 한양 즉 지금의 서울답사를 나섰다.

고려시절에는 이곳을 남경이라고 불렀으며 산이 험하고 앞에는 강이 있어 천년도읍지로 아주 적지였다.

하지만 답사결과 좀처럼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무학이 고민에 빠져 생각하고 있는데 한 늙은이가 나타났다.

여기에서 십리를 더 가면 스님이 찾는 곳이 있을 것이오. 그때 무학이 고민하면서 서 있던 곳이 지금의 왕십리다.

 

무학이 그 노인의 말대로 십리를 더 가니 적당한 땅이 있었다. 삼각산 아래 지금의 광화문 근처였다. 지세를 본 무학대사는 감탄했다.

왕궁을 지을 땅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앞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火氣)가 염려됐다. 무학대사는 비방으로 해태 한 쌍을 만들어 화기를 제압하고 이곳을 도읍지로 선정했다.

 

태조는 그 이듬해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1394년 무학이 선정한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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