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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죽산박씨)

 

 

본관(本貫): 죽산(竹山)

시조(始祖): 박언립(朴彦立) 

유래(由來):

 

죽산(竹山)은 경기도(京畿道) 용인군(龍仁郡)과 안성군(安城郡) 일부에 속해있던 옛 지명임.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신라왕족(新羅王族)의 후예(後裔)로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왕자(王子)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으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

 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아들 기오(奇悟)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태조(太祖)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죽산(竹山)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충숙(朴忠淑)

죽주백(竹州伯) 기오(奇悟)의  손자 충숙(忠淑)이 고려 현종(顯宗)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박정유

1089(선종 6)∼1145(인종 23). 고려 중기의 무신. 영후(永侯)의 아들이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경원군판관(慶源郡判官)이 되었다.

인종 때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1132년(인종 10)에 합문 ( 閤門 )에 엎드려 상소하여 3일 동안이나 시사(時事)를 말하는 등 왕의 뜻에 거슬려 인주(仁州 : 지금의 인천)의 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당시 공과(功課)가 최상이 되므로 발탁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며, 그 뒤 20여년 동안 대간 ( 臺諫 )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일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1138년에 잡단 ( 雜端 )으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최관(崔灌), 시어사 인의(印儀) 등과 함께 추밀사(樞密使) 진숙 ( 陳淑 )이 묘청 ( 妙淸 )의 난으로 서경을 칠 때, 남의 노비와 보대(寶帶)를 뇌물로 받은 것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뒤에 우부승선 ( 右副承宣 )과 추밀원부사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시호는 충질 ( 忠質 )이다.

 

박인석(朴仁碩)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육화(育和: 정유의 아들)의 아들로 기사(騎射)에 능했던 인석(仁碩)은 명종(明宗)초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북원(北原)에 은거(隱居)했다가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와 형부 원외랑을 지내고, 초토

판관(招討判官)으로 경주(慶州)의 초적(草賊)을 토벌하는 데 공(功)을 세워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박전지(朴全之)

1250(고종 37) ∼ 1325(충숙왕 12).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행산(杏山). 전법판서를 지낸 휘(暉)의 아들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해 사국(史局)과 한림원의 벼슬을 지냈다.

1279년(충렬왕 5) 원나라 세조가 양반자제를 뽑아 입시하게 하자, 원나라에 들어가 그 곳의 명사들과 사귀어 명성을 떨치고 원나라의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가 되었다. 귀국 후 이부와 병부의 시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안동부윤이 되었다.

재능이 인정되어 전중윤지제교(殿中尹知製敎)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세자(世子 : 뒤의 충선왕)의 시강을 맡아 보도(輔導)함이 많았다. 또한, 세자가 원나라에 있을 때에는 고생을 꺼리지 않았다.

1298년에 충선왕이 즉위해 사림원 ( 詞林院 )을 두었는데, 이 때 최참(崔 蓚 ) · 오한경(吳漢卿) · 이진(李 山 ) 등과 함께 사림원학사가 되어 전주(銓注 : 인사행정)를 담당했으며, 충선왕의 즉위교서를 지었다.

뒤 이어 삼사좌사사림학사 승지(三司左使詞林學士承旨)가 되었고,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 · 중경유수(中京留守 : 開城府判尹)가 되었다. 그 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1307년에 판비서시사 권수밀직부사(判秘書寺事權授密直副使)가 되었다.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으며, 1321년(충숙왕 8)에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가 되어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하였다. 이 무렵 심왕 ( 瀋王 )의 무리가 왕을 원나라에 무고하는 글에 서명을 강요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정승이 되어 치사하고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에 봉해졌다. 그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며 강직했으나 결단성이 적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박원형(朴元亨)

1411(태종 11) ∼ 1469(예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 문선(文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충(永忠)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고( 劒 )이며,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한(瀚)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계공랑(啓功郞),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이 되었다. 1438년 의금부도사를 거쳐, 이듬해 감찰로서 정조사 ( 正朝使 )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1440년 승문원부교리(承文院副校理), 이듬해 병조좌랑, 1443년 사복시판관이 되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사복시윤(司僕寺尹)이 되고 이듬해 지사간원사 ( 知司諫院事 ) · 지제교 ( 知製敎 )를 거쳐 1453년(단종 1)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이 해 계유정난에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을 도와 좌부승지 · 우승지를 지내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도승지에 오르고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고 1457년 호조판서로서 명나라 사신 진감(陳鑑)의 원접사 ( 遠接使 )가 되었다.

이어 형조 · 이조 · 예조의 판서를 거쳐 함길도도순찰사로 나가서는 부령진(富寧鎭)을 설치해 관방(關防)을 튼튼히 하였다. 1459년에는 우리 나라에서 야인(野人)에게 관작을 준 일에 대해 힐책하러 나온 명나라 사신 진가유(陳嘉猷)의 원접사가 되었으며, 이어 주문 겸 사은사(奏聞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2년 이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예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1464년 우찬성을 거쳐 1466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467년 함길도에서 이시애 ( 李施愛 )의 반란이 일어나자 함길도존무사(咸吉道存撫使)가 되어 백성을 존무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예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 ( 申叔舟 ) · 한명회 ( 韓明澮 ) 등과 함께 원상(院相 : 어린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던 원로 대신)이 되어 승정원에 나가서 서무(庶務)를 의결했으며 익대공신 ( 翊戴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영의정이 되었다.

성품이 청렴했고, 시문에 능했으며, 과문(科文 : 율법의 조문)에 특히 뛰어났다. 또한 사체(事體 : 사리와 체면)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명나라 사신들의 접대에는 항상 뽑혔다.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박홍구(朴弘耉)

1552(명종 7) ∼ 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초명은 홍로(弘老), 자는 응소(應邵), 호는 이호(梨湖). 영의정 원형(元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수(洙)이고, 아버지는 도정 ( 都正 ) 난영(蘭英)이며, 어머니는 남대년(南大年)의 딸이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2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이듬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 때 김우옹(金宇 裵 ) 등과 같이 김응남 ( 金應南 )의 제주목사 임명을 다시 회수하기를 청하였다. 1590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593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으며, 군량미 조달을 위해 전라도에 조도어사(調度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다시 교리가 되었다. 1595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승진해 시독관 ( 侍讀官 )을 겸했으며, 우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부족한 군량미 확보에 힘을 다였다.

1597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대사성 · 도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다녀와 1599년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고, 도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에는 대사헌, 이어서 호조참판 ·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어 ≪ 황화집류 皇華集類 ≫ 를 편찬하였다.

1603년 행대사헌 ·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05년 형조판서, 이듬해에는 상호군 ( 上護軍 )이 되었는데, 형조판서 재직 때 피죄관노(被罪館奴 : 죄인의 혐의로 잡힌 관소속의 노비)의 추국(推鞫 : 죄인을 심문함)을 철저히 하지 않고 성급히 매듭지은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07년 병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가 되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와 지경연사(知經筵事)을 겸했으며,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호조판서에 이어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좌찬성에 승진하여 가례도감제조(嘉禮都監提調)를 겸하였다. 1618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시약청도제조(侍藥廳都提調)를 겸하였다.

이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 때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 ( 仁城君 )을 추대하려 한다는 복위 음모와 관련, 역모죄로 사사(賜死)되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박신룡(朴信龍)

인조(仁祖)때 무과에 급제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권지중군(權知中軍)으로 용만(龍灣)전투에서 순절하였다.

 

박명현(朴名賢)

정유재란(丁酉再亂)에 공을 세워 정난이등공신 (靖難二等攻臣)에 책록되고,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진 명현(名賢: 원형의 후손)이 유명했다.

 

박성룡(朴成龍)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한 명룡(命龍)의 형인 성룡(成龍)이 용만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는 정묘호란 때  안주(安州) 방어전에서 단신으로 화살을 쌓아놓고 적 수백명을 섬멸했으며 손가락을 다쳐 활을 쏘지 못하게 되자 혼자 칼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용전하다가 전사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안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박계성(朴繼成)

일문(一門)에서  충(忠)·효(孝)·열(烈)을 배출한  계성(繼成)은 임진왜란 때 권  율(權  慄)의 막하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에는 구례(求禮) 전투에서 순절하자 그의 부인도 뒤를 따라 자결했으며,  

 

박승성(朴承成)

계성의 아우 승성(承成)과 사촌동생 언정(彦貞)도 싸움터에서 순절하여 이름을 떨쳤다.

 

박종유(朴宗儒)

재흥(載興)의 아들 종유(宗儒)는 영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경전(經傳)과  백가(百家)에 통달했고,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했으다.

 

박주현(朴周鉉)

고종(高宗)때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주도했던 주현(周鉉)은  가산(家産)을 풀어 군자금을 제공했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순절였다.

 

박건채(朴健采), 박치의(朴治毅),박치조(朴治祚)

평북(平北) 선천(宣川)에서 항일운동에 공헌했다.

 

 

朴有鵬(박유붕) 선생의 전설.

 

스스로 눈을 찌른 박유봉선생.
박유봉 선생은 관상을 잘 보는데, 자기의 용모를 보니 한 쪽 눈이 애꾸가 되어야 귀하게 되는 상이라, 스스로 한 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관연 나중에 벼슬이 南陽(남양)府使(부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출전: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 1981)>

 

 

朴元亨(박원형)공의 두 딸.

 

今夜燈前酒數巡(금야등전주수순)

汝今三十二靑春(여금삼십이청춘)

吾家舊物惟淸白(오가구물유청백)

好把相傳無限人(호파상전무한인)

<해설>

등잔불 밝혀 놓고 술 몇 잔 기울이니

내 나이 벌 써 서른둘이로구나!

우리 집에 대대로 전할 물건 오직 청백이니

잘 간직하였다가 자손만대에 진하라.

 

위에 시는 효녀 文娘(문낭)孝娘(효낭)11대 조인 文獻公(문헌공) 죽산 朴元亨(박원형) 선생의 戒子詩訓(계자시훈)이다.

효녀 문랑은 숙종 19년 효랑은 숙종 21년에 忠義偉公(충의위공) 수하(壽河)의 딸로 경북 금릉군 감천면 도평동에서 태어났다.

 

문헌공의 유훈이 그대로 가훈이 되어 이 가정은 모든 일을 맑고 밝고 깨끗 허케 처리해 갔다. 언니 문랑이 6 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으나 친어머니 못잖게 지성으로 모셨고, 아흔 살이 되신 할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에선 널리 효녀로 손꼽혔다. 게다가 연만하고 비범한 식견은 어른도 못 당할 정도여서 딸이지만 아버지는 손수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화기애애하게 지나던 집안에 1769(숙종 25) 청천벼락 같은 일이 생겨났다.

대구 사람인 청하현감 박경여(朴慶餘)란 부호요, 세세 권세가인 사람이 죽산 박씨 선산(先山)에 자가 할아버지 묘를 이장하려 한 것이다.

 

그는 명당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권력을 휘두드고 남의 선산을 점령하는 파렴치한 권세가의 한 사람이었다. 박수하 공은 즉각 박경여에게 이장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으나 권세를 믿고 항의를 묵살해 버렸다.

박경여는 버젓이 묘를 이장 한 뒤 비석까지 세우는 일 등 뻔뻔스런 짓을 보란 듯이 강행했다.

 

분격한 박수하공은 감사와 성주목사에게 진정을 하어 바로잡아 줄 것을 호소했으나 당시 감사 홍 모(이름을 밝히지 않음)는 박경여와 친척 지간에 있는 지라 박경여를 감싸고 해를 넘기면서 박수하 공을 음양으로 위협까지 했다.

 

내 대에 와서 이런 불효를 저지르다니 ! ”

밤잠을 못 이루고 가슴을 치며 박수하 공은 드디어 擊錚(징이나 꾕가리를 울려 억울함을 직접 임금께 호소하던 얼)을 해서라도 이 억울함을 풀 생각으로 상경할 것을 결심했다.

 

아버지의 이런 속셈을 눈치 챈 두 자매는

방백 수령이 다 박갱여 편인데 조정이라고 어찌 다르겠습니까? 집 안에 할머님이 계시는데 천릿길을 가 헛일 하실 일이 두렵습니다. 차라리 시간을 두고 때를 기다림만 못할 것 갔습니다.”

간곡히 만류하였지만

 

내가 진 죄를 누구에게 물려주나 ! ” 하고는 상경 하고 말았다.

상경 한 박수하 공은 격쟁으로 호소할 기회를 얻었으나, 사실 조사할 소임을 받은 판도의 감사는 조사를 지연시키고 만행을 자행하자 울분이 치솟은 박 수하 공이 벌목하는 박경여의 종을 몇 차폐 때란 일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저편은 트집을 잡기 시작하여 이 모라는 사람은 조정의 명을 받고 산소 문제를 조사 나왔으나 이 모는 박경여와 친적이라

 

공정한 조사기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 말을 문제삼아 관을 모독했다고 공을 하옥시키고 중죄로 다스려 하옥된 7 일 만에 笞杖(태장)을 맞고 운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휴대용 칼은 맏이에게 전해 주고 유복자의 이름은 追意(추의)로 하게 해 달라. 입었던 피묻은 옷은 뒷날 자식들이 장성하면 돌려 주기 바란다.”

하고 숨은 거두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안 두 효녀는 슬픔이 격해 까무러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중얼거리며 복수를 다짐한 언니 문랑은 남녀 종) 서너 명을 데리고 先山(선산)으로 가 박경여 조부의 묘를 손으로 파헤쳐 관을 불사르고 말았다.

이때 손가락이 다 피로 물들었다 한다. 이렇게 하면 박경여가 당장 달려 올 것이라 생각했으나 영 나타나지 않자 문랑은 관가에 지초지정을 털어놨다. 심지어 성주 목사는 문을 잠그고 문량을 아예 만나주지 도 않았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러던 8 일째 되는 날, 박 경어가 창검을 갖춘 군졸 백명을 거느리고 선산에 나타났는 소식을 전해들자마자 복수심에 불타던 문랑이 나가려 하자 할머나와 계모가 붙들고

 

어찌 죽을 곳을 찾아간단 말이냐 ! ”

하며 한사코 닫래었으나 더 말릴 새도 없이 문랑은 칼을 품고 박 경여에게 로 돌진해 가자, 종들이 뒤를 따랐다.

미처 박경여에게 접근도 하기 전에 벌 때 같은 군졸들이 문랑을 에워싸 무자비하게 창과 몽둥이로 문랑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문랑이 뒷얼을 부탁한다며 숨을 거두자 주인의 비참한 죽음을 본 종 동달과 시야도 달려들자 이들 또한 그 옆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날이 바로 1712(숙종 38) 음력 55일 단오였고, 문랑의 나이 19세였다.

 

 

 

이 사실은 5, 6 일이 지나서야 관청에 알려져 검사관이 나왔는데 본관인 성주에서가 아니라 인근 검산 군수였다. 그려나, 7 일이나 된 시체가 한여름인데도 조끔도 변함이 없고, 그 때가지 선혈이 나와 보는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검시 결과 왼쪽 옆구리에 깊은 칼자국이 둘, 매맞은 흔척이 세 군데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살인 사건은 박경여의 위세에 눌려, 박문랑은 타살 되지 않았다는 허위 보고를 상부에 올리기 까지 했다.

이렇게 아버지와 언니를 잃고 마음의 칸을 칼고 있덴 효랑은,

내 무슨 낯으로 밝은 해를 바로 보랴? ”

하며, 나이 17 세에 늙으신 할머니와 계모의 간절한 만류를 뿌라치고 상경 하여, 남복으로 변장을 하고 대궐에 나가 쟁을 울렸다.

그르나, 여자라는 것이 발각되 즉시 하옥되고 말았다.

 

철천의 한을 품은 효랑이 감옥에 갇히자 당시 전옥봉사로 있던 권윤경이 란 사람이 효랑의 효성에 김동하여 옥중에서도 가장 온순한 여죄수를 시켜 효랑을 극진히 보호하게 했다 한다.

 

얼마 뒤에 특별한 배려로 방면되었지만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효랑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길거리를 오가며 지나는 고관 행차에도 을 울렸지만 가까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려하여 쟁을 울리는 처녀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임금님을 제외하고는........

 

그 후 17121224일의 2차 격갱소에서 경상 감영의 허위보고로 효랑에게는 더욱 불리하게만 되어 버렸다. 그르나, 물러설 줄 모르는 효랑은, 이에 형조에 직접 억울한 사연을 알리는 글을 내어 한 반만 더 어사를 내려 보내 흑백을 가려주길 간청하였다.

 

이 원청소가 너무 간절하고 뜻이 굳어 보여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형조를 울린 원청소가 임금(숙종)에게 보고되어 어사를 내려 보내는 어명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안무사(지방의 백성을 위로, 안정시키는 관리)가 결정되자, 그 집을 베날 듯 드나들며 하루 속히 가 달라 고 애걸을 했으나 늑장만 피우던 무렵

 

서울에서 결말을 보기 전엔 생사를 가리지 않을 것이니.....하고 효랑도 버티면서 고향 할머니에게 펀지를 보냈다 한다.

 

이 옥사가 풀리지 않으면 언니를 따라 죽어 아버지 곁으로 갈 각오이오니……

 

라고, 써 보내어 고향에서는 假葬(가장)한 채 장례일을 넘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드디어 1913426일 문랑이 죽은 지 11 개월 20여 일이 지난 때에 효 랑의 하늘에 닿은 효성에 못이겨 안무사가 직접 사실 조사를 나온 것이다.

 

타살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으로 삼을 것이냐?”

 

이렇게 욱박지르던 안무사 앞에 여종 섬레가 증인으로 서게 되어 그 당시 의 일을 소상이 아뢰니 당시의 검사관과 관비를 불러 대질서 켰다.

 

섬례는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개관하여 검사 결과 옷만 상했을 뿐 악취조차 없이 그 당시 그대로였다 한다. 안무사는 즉 석에서 시장 문서를 재작하여 한 벨은 효랑에게 주었다 한다.

 

효랑의 지성과 목숨을 걸고 증언에 나선 섬례의 지극한 정성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갈구하띤 복수가 이루어졌을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르나, 극악한 박경여의 농간이 임금에게 사실에로 전해지지 않아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효랑은 세 번째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이 사건의 전말은 경향 각지에 퍼져 안동 도산 서원 유생들이 궐기한 連書通文에는 당시 연서한 선비만도 만여 명에 달랬다 한다.

 

파란 많던 효랑의 지성은 드디에 빚을 보았다. 재조사한 어사에 의해 박 경여의 죄상은 만천하에 공개 되어 처리되었다.

 

10 년 뒤인 1724(경종 4) 4월에 문랑에게는 정려, 효랑에게는 복호 80 결을 내렸다.

문랑의 정려문을 세울 때, 관에서 보조하라는 간곡한 경종 임금의 하명까지 있었다 한다.

 

효랑의 정려도 시가 쪽 유생들의 上疏(상소)로 내려 졌으며 영조는 이 두 자매에게 문랑(文娘), 효랑(孝娘)이란 시명과 함께 어제 정려 명까지 내렸다.

어제 정려명은 아래와 같다.

 

문헌공의 자손, 매 맞아 죽은 넋

남은 원한을 어느 곳에 가 호소하랴.

아내는 정숙하고, 딸은 효도하며, 종은 충절을 다하니

만고에 강상을 밝힘에 제일가는 가문이 로다. ’

 

만고 효녀 자매의 정려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오늘을 사는우리 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출전<내 고장 우려 향토, 孝烈行誌(효열행지)>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8

相(상)

41

鎬(호)

44

炳(병)

39

烈(열)

42

洪(홍)

45

圭(규)

40

在(재)

43

洙(수)

46

鎔(용)

 

1985년 경제기획부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10,864가구, 45,0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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