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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진원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진원박씨)

 

 

본관(本貫): 진원(珍原)

시조(始祖): 박진문(朴進文)

유래(由來):

 

진원(珍原)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장성군(長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이다.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후손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전(傳)하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42세손으로 알려진 박진문(朴進文)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진원박씨대동보(珍原朴氏大同譜)에 의하면 시조 진문(進文)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고, 그의 현손(玄孫) 첨(瞻)은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純沖論道同德佐命功臣)臣)·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춘추관사(春秋館事) 등을 역임한 후 익양백(益陽伯: 지금의 경북  영천)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진문(進文)을 시조로  받들고, 진원(珍原)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희중(朴熙中)

 1364(공민왕 13) ∼ 1446(세종 2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원 ( 珍原 ). 초명은 희종 ( 熙宗 ).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첨(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서(洪瑞)이고, 아버지는 현감 ( 縣監 ) 온(溫)이며, 어머니는 전의(田 潽 )의 딸이다.

생원으로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406년 군자감승(軍資監丞)으로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을 수임, 이어 세자부 ( 世子傅 ) · 좌정자(左正字), 이듬해 이조정랑이 되고 왕으로부터 사명(賜名 : 이름을 받음)의 은전을 입었다.

1410년 점마별감(點馬別監)에 차정되어 헌마(獻馬)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1414년 하륜 ( 河崙 )이 발의한 통진고양포(通津高楊浦) 제방수축에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서 참여하였으나 폐단이 일어 일시 파직되었다가 곧 복관되었다. 1415년 전라도경차관으로 관찰사 박습(朴習) 등과 김제 벽골제 ( 碧骨堤 )를 수축하였다.

1416년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 · 예문관지제교(藝文館知製敎) · 겸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의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하였으며 1421년(세종 3)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다. 1422년 회례사(回禮使)로 금구(禁寇) · 포로쇄환의 실효를 거두었으며 이 공으로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올랐다.

1426년 남원부사 재직시 결장(決杖)되고 파직당하였다. ≪ 해동필원 海東筆苑 ≫ 에 이름이 오른 명필로, 하륜의 아버지 윤린(允潾)의 신도비를 쓰고 음기(蔭記 : 비의 뒷면에 기록되는 글)를 짓기도 하였다.

 

박광전(朴光前)

1526(중종 21) ∼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진원 ( 珍原 ).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 할아버지는 선교랑 간( 駕 )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의(而誼)이며, 어머니는 습득 최명기(崔命夔)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6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유희춘 ( 柳希春 )이 감사 ( 監司 )였을 때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고, 다시 헌릉참봉(獻陵參奉)으로 옮겼으나 곧 그만두었다. 1581년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함열 ( 咸悅 ) · 회덕 ( 懷德 ) 현감을 역임하였으나 상관의 뜻을 거슬려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계영 ( 任啓英 ) · 김익복(金益福) · 문위세(文緯世) 등과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병 700여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 ( 安邦俊 )을 종사 ( 從事 )로 삼고 장자인 근효(根孝)를 참모로 삼았으나,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이 호남을 침범하자, 전 판관 ( 判官 ) 송홍렬(宋弘烈), 생원 박사길(朴士吉)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었다.

동복 ( 同福 )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보성 용산서원 ( 龍山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박근효(朴根孝)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 ( 義兵 ). 본관은 진원 ( 珍原 ). 자는 입지(立之), 호는 만포(晩圃). 아버지는 왕자사부 ( 王子師傅 ) 광전(光前)이다. 동생이 근제(根悌)이다. 성혼 ( 成渾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학문에 힘쓰던 중,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근제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대왜항전에 앞장섰다. 전라우도 의병장 최경회 ( 崔慶會 ) 등과 함께 금산·무주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군세(軍勢)를 크게 떨쳤다.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장수현감(長水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전란이 끝난 뒤 문헌이 불타고 흩어져 없어졌음을 개탄하며 동지들과 힘을 모아 서적을 발간하는 등 문교 진흥에 힘썼다. 집의 ( 執義 )에 추증되었다

 

박원효(朴元孝)

현감(縣監) 한충(漢忠)의 아들로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을 역임.

 

박응삼(朴應參)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무명(武名)을 떨쳐 의절(義節)의 전통(傳統)을 살렸다. 

 

박응호(朴應虎)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무명(武名)을 떨쳐 의절(義節)의 전통(傳統)을 살렸다. 

 

박광현(朴光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무명(武名)을 떨쳐 의절(義節)의 전통(傳統)을 살렸다. 

 

박춘수(朴春秀)

1590(선조 23)∼1641(인조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원 ( 珍原 ). 자는 언실(言實), 호는 아수당(我誰堂).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근효(根孝)이다. 김수항 ( 金壽恒 )의 문인이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을 거쳐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장생 ( 金長生 )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안방준 ( 安邦俊 )을 의병장으로 하고, 자신은 종사관 ( 從事官 )이 되어 전주에까지 이르렀다가 곧 화약(和約)이 성립되자 그만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아우 춘장 ( 春長 ), 아들 진형(震亨) 등과 함께 300여명을 모집하여 보성(寶城)에서 청주에까지 이르렀으나, 강화(講和)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군량(軍糧)을 모두 완영(完營 : 全羅監營의 별칭)에 반품하였다.

그 뒤로는 죽을 때까지 후진양성에만 힘썼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충효스러우며 할아버지 때부터 창의활동(倡義活動)을 하여 칠현(七賢)이 한 집안에서 나왔다. 좌승지 겸 참찬관에 추증되었다.

 

박춘장(朴春長)

1595(선조 28)∼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원 ( 珍原 ), 자는 언승(彦承), 호는 동계(東溪). 아버지는 임진란 때 군공(軍功)으로 현감에 제수된 근효(根孝)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부교위(副校尉) 유겸(惟謙)의 딸이다.

일찍이 양친을 잃고 실심한 나머지 학문에 뜻을 두지 아니했다가 30세가 되어 배움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맏형 춘수(春秀)로부터 처음으로 수학하였고, 36세 때 은봉(隱峯) 안방준 ( 安邦俊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병자호란 때 안방준의 창의(倡義)에 참가하였으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이 때 감사 원두표 ( 元斗杓 )에게 올린 〈상감사원평군원공두표서 上監司原平君元公斗杓書〉의 글은 8조목으로 그의 우국충정을 담고 있다.

164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2년(효종 3) 시폐구제를 위한 5조목의 〈의상응지소 擬上應旨疏〉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만년에 고향 용산(龍山) 아래에 정사를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662년 대기근이 들자 민정을 실상대로 알리고 백성을 구제하는데 앞장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평소 존군토적(尊君討賊)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사상으로 일관된 생을 살았다. 대표적인 제자로 박진형(朴震亨)·박사헌(朴士憲) 등이 있으며 육현사(六賢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동계유고 東溪遺稿≫가 있다.

 

박춘호(朴春豪)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의병. 본관은 진원 ( 珍原 ). 자는 위원(偉元), 호는 해월당(海月堂). 아버지는 참봉 근제(根悌)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광해군 때는 찰방 ( 察訪 )에 제수된 바 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사촌형 춘수(春秀)와 함께 창의(倡義)를 하고 의병을 모집한 뒤, 안방준 ( 安邦俊 )의 지휘하에서 군량을 준비하고 여산 ( 礪山 )까지 이르렀으나 조정에서 강화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학문에 전력, 성리(性理)의 진리를 탐구하며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박정최(朴挺最)

정최(挺最)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였으며 금호집(琴湖集)을 저술.

 

박정영(朴挺榮)

인조 때 사천현감(泗川縣監)을 지냄.

 

박남현(朴南鉉)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가산(家産)을 털어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박용주(朴鎔柱)

학자(學者)로 명망이 높았다.

 

박우용(朴佑龍)

신학문(新學問)의 기수로 이름이 났다.

 

박문용(朴文鎔)

1882(고종 19)∼1929. 독립운동가. 일명 환(桓). 전라남도 보성 출신. 1913년 12월 8일 전라남도 보성군 격월면장으로 재직함을 이용하여 면내 공금 보관금 327원6전을 조선독립암살단의 군자금으로 제공함으로써 이 단체를 육성,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독립선언서 발표의 대한민국 대표 3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이 되어 전라도지역 책임자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고, 같은해 8월 톈진(天津)에서 불변단(不變團)을 조직하여 부단장 겸 의사부장(議事部長)의 직책을 맡아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상원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할 때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 침략의 수뇌부를 제거할 암살단을 조직하고 그 준비작업에 전념하였다.

전년인 1919년 7월 상해임시정부 수뇌 안창호 ( 安昌浩 )· 이동휘 ( 李東輝 )· 이동녕 ( 李東寧 )· 이시영 ( 李始榮 )과 회합, 조선독립군 사령부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권총을 입수하고 귀국하였다.

곧 결사대를 조직한 뒤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 사실이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1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뒤 본적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죽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朴元淳(박원순) 본관: 珍原(진원)

 

청계정 전설

 

진원면 산동 부락 앞을 지나노라면 아담한 정자 하나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조 선조조에 진원박씨 위남공의 후손이며 김하서 선생의 제자인 청계 박원순 선생이 세운 것이다. 선생은 학문과 도를 깊이 터득했으며 또한 도량이 크고 항상 대담한 용기를 갖고 바른 길을 걸은 분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라 정세는 부정한 것이 득세하는 때였으므로 기품이 곧은 선생이라 벼슬길을 저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산동 어귀에 정자를 지어 소일하니 이것이 바로 청계정이다.

 

선생은 손수 은행나무를 심고 앞에는 크나큰 방죽을 파 구곡수를 끌어들여 홍교를 놓고 화단엔 백일홍을 심어 정원을 만들어 하나의 별장을 이루었으며 거기에서 항상 벗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고향의 풍속을 바르게 하는데 힘썼다.

 

이러한 선생이 하세하자, 여기에 하나의 이변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선생이 하세하시자마자 그렇게 많이 핀 은행잎이 하나도 피지 않고 항상 샘솟는 듯 한 방죽의 물도 말라 버렸다. 이에 사람들의 호기심과 의혹 속에서 세월이 흘러 어느새 선생의 3년 상을 마쳤다.

그런데 그때부터 모든 것이 선생의 생존 때의 그대로 은행잎도 피고 방죽도 옛날로 돌아 왔다. 이것만 보아도 선생은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자연물을 몹시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의 기품이 곧고 청백했기 때문에 자연의 나무와 물까지도 그렇게 감화되지 않았는가 한다.

 

현재는 정자 안에 비바람 속에서도 노사선생과 관서 선생의 글이 담긴 현판이 빛을 내고 있는데 정자 앞 방죽은 이제 메워져 논이 되어 버렸다.

                                                                                      <출전: 장성군지>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50

生(생)

58

亨(형)

66

泰(태)

51

基(기)

59

萬(만)

67

柱(주)

52

原(원)

60

尙(상)

68

炯(형)

53

衍(연),衎(간)

衛(위)

61

德(덕)

69

在(재)

54

而(이)

62

亮(량)

70

鎔(용)

55

前(전)

63

源(원)

71

 

56

根(근)

64

重(중)

72

 

57

春(춘)

65

鉉(현)

73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마한(馬韓)에  총  4,679가구, 19,9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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