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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충주박씨)

 

 

본관(本貫): 충주(忠州)

시조(始祖): 박영(朴英)

유래(由來):

 

충주 박씨(忠州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기간:  917 ∼ 924)의 다섯재 아들인 사벌왕(沙筏王) 언창(彦昌)의 11세손 박영(朴英)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충주박씨세보(忠州朴氏世譜)에  의하면 중시조 영(英)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오른  원정(元挺)의 둘째 아들로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본관(本貫)을 충주(忠州)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영(英)의 아들 신(臣)이 고려 때  검교신호위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손자(孫子) 원숭(元崇)은 삼사우사(三思右使)를 역임하여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아들 득승(得升)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광리(朴光理)

고려말(高麗末)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의 전횡(專橫)을 탄핵했던 8세손 광리(光理)가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세 번이나 역임하고 청렴(淸廉)으로 명성을 떨쳤으다.

 

박진(朴秦)

광리의 아들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진해(鎭海)·직산(稷山) 감무(監務)를  지냈다.

 

박소(朴蘇)

은산군사(殷山郡事)를 역임하고 어지러운  정국(政局)을 피하여 충청도 덕진현(忠淸道德津縣: 지금의 대전시 가장동)으로 은거(隱居)하였다.

 

박효함

조선조(朝鮮朝)에서 청간재(聽澗齋) 효함이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에 이르렀다.

 

박상(朴祥)

1474(성종 5) ∼ 1530(중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광리(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천군수 소(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지흥(智興)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 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 초, 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아 전관 ( 銓官 )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사헌부가 대간 ( 臺諫 )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못하다고 논핵(論劾)하여 곧 종묘서영(宗廟署令) · 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 · 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 ( 金淨 )과 함께 상소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또 박원종 ( 朴元宗 )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평 ( 南平 )의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 장악첨정(掌樂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 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1519년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1521년 상주와 충주의 목사를 지내고, 만기가 되자 사도시부정(司 歸 寺副正)이 되었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 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로 좌천되었고,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성현 ( 成俔 ) · 신광한 ( 申光漢 ) · 황정욱 ( 黃廷彧 ) 등과 함께 서거정 ( 徐居正 )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또한 조광조 ( 趙光祖 )는 그의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 눌재집 ≫ 이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고,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박우(朴祐)

1476(성종 7)∼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광리(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소(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지흥(智興)이며, 어머니는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광주(光州) 출신.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10년(중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어 곧 전적 ( 典籍 )이 되었다. 그 해 흥덕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경연에서 고금 제왕들의 치란흥망(治亂興亡 : 선정과 악정 및 부흥과 망함)에 관한 이유를 설파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임했다가 다시 공조정랑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병조정랑· 장령 ( 掌令 )· 집의 ( 執義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직제학 ( 直提學 )·좌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스스로 검약을 지켜 지방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김안로 ( 金安老 )가 권세를 부리면서 바른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원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 때 권세가 허확(許確)이 전주부윤으로 내려왔으나 찾아가 인사하지 않았다. 허확과 그의 아들 항(沆) 등이 몇 번 초청하므로 마지못해 잠시 찾아보고 곧 돌아와 버렸다.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나주 옛집으로 내려가서 2년을 지냈다. 다시 도승지로 복직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그 때 허항이 전날의 감정으로 모함해 공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직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다시 병조참의로 복직되니, 허항이 또 모함을 해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교화해 왕이 옷감을 내려 포상하였다. 그로부터 해주 지방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뒤 대사성·병조참의·이조참의·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가 인종 때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명종 때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성품이 곧아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세도가인 김안로나 허확의 부자들로부터 심한 박대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박순(朴淳)

1523(중종 18) ∼ 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은산군사(殷山郡事) 소(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 지흥(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 ( 右尹 ) 우(祐)이며, 어머니는 당악 김씨(棠岳金氏)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 ( 牧使 ) 상(祥)의 조카이다. 서경덕 ( 徐敬德 )의 문인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 교리 ( 校理 ),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 ( 林百齡 )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 ( 尹元衡 )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 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 승정원동부승지 ·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 ( 李鐸 )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 ·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 ( 永平 ) 백운산 ( 白雲山 )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 주역 ≫ 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중년에 이황 ( 李滉 )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 · 성혼 ( 成渾 )과 깊이 사귀어 ‘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 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 ( 奇大升 )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 ( 月井書院 ),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 ( 花谷書院 ), 영평(永平) 옥병서원 ( 玉屛書院 )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 사암집 ≫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희수(朴希壽)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덕로(德老), 호는 회헌(懷軒). 할아버지는 상(祥)이며, 아버지는 부사 민제(敏齊)이다. 1577년(선조 10)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박광옥 ( 朴光玉 )· 고경명 ( 高敬命 )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의 직을 받고 형조좌랑에 이르렀으며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박이룡(朴以龍)

이룡(以龍)은 능성현령(陵城縣令)으로 나갔다가 황간(黃澗)에서  창의(倡義)하여 전쟁에 공을 세웠다.

 

박지효(朴之孝)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함.

 

박사진(朴士振)

금산(錦山)에서 칠백의사(七百義士)와 순절함.

 

박사삼(朴事三)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이름을  떨쳤다.

 

박진영(朴震英)

진영(震英)은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박해(朴海)

함흥판관(咸興判官)을 거쳐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지냄.

 

박사원(朴思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명했다.

 

박유동

효종(孝宗) 때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천거되었다.

 

박금.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를 역임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박홍우(朴弘祐)

1646년(인조 24)  류탁(柳濯)의 모반을 공주진(公州鎭)에서 진압했던 홍우(弘祐)는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호조판서(戶曺判書)에 추증되었다.

 

박수문(朴守文)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수문(守文)은 방축(防築)을 쌓아 관개수리(灌漑水利)를 개선하여 향민(鄕民)의 복리(福利)에  공(功)이 컸다.

 

박세화(朴世華)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던  세화(世華)는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박경운(朴慶運), 박세원(朴世元), 박준번(朴俊蕃)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박동형(朴東亨)

동형(東亨)은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책록되고 충원군(忠原君)에 봉군됨.

 

박수근(朴守謹)

사로당(四老堂)을 지어 후진양성에 진력.

 

박주흠(朴周欽)

공조참판(工曺參判)

 

박제륜(朴濟輪)

문필(文筆)로 이름이 났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 박씨(忠州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5,608가구, 23,6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朴祥(박상) 선생의 일화.

 

朴訥齋(박눌재)와 고양이

 

朴祥(박상)은 연산군 때의 사람으로 광주출신이며 호는 눌재요 본관은 충주이다. 연산군이 총애하던 미희의 오라비인 김한이라는 자를 때려죽인 쾌남아이다.

 

김한은 나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제 누이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것을 기화로 여기어 전라도 일경을 제 천지와 같이 알고 제멋대로 날뛰고 지냈다. 모든 수령들은 물론 관찰사까지도 그 자의 비위를 거스르기만 하면 모가지가 달아나게 되었다.

 

그는 제집에다가 하루에 3백리씩 걸어 다니는 건각의 남종 셋을 두고 이자들로 하여금 서울에 왕래케 하였는데 제 비위에 맞지 않은 관리가 있으면 곧 서울에 보내어 파면시켰으므로 나주목사나 전라감사 같은 좋은 벼슬도 그를 꺼리어 원하는 자가 없었고 온다 할지라도 관리로서의 수명이 길지 못하였다.

 

눌재는 담력과 기백이 있는 쾌남아로서 이 김한을 처치해 버리려고 자원하여 나주 목사로 내려왔다.

그가 부임할 때 청원들은

첫째로 김한에게 부임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눌재는 듣지 않고 있으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전도를 걱정스러이 보고 있었다.

 

어느 날 눌재는 부하들에게 엄명하여 김한을 잡아다가 때려 죽였다.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는 김한이 목사 눌재에게 붙잡혔다는 보고를 듣고 대경실색 하면서 나주관아에 와서 보니 목사 눌재는 간 곳이 없고 다만 김한의 시체가 한 구석에 유기되어 있으며 목사의 책상위에는 눌재의 사표만이 놓여 있었다.

 

이 큰 사건이 생기자 김한의 집에서는 김한의 시체를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고 건각의 남종을 서울로 보내었다. 그리하여 사약이 내리게 되매 금부도사가 가지고 나주로 향하였다. 서울에 있는 눌재의 친척들은 눌재가 죽었을 것으로 믿고 시체나 찾아 가려고 나주로 내려왔다.

 

눌재는 서울에 올라가 김한의 죄를 폭로하고 그를 죽인 것을 자백하려고 길을 떠나 갈재를 넘노라니 서울 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한군데는 샛길로서 고양이 한 마리가 그길로 가면서 야옹」「야옹소리로 따라오라는 눈치를 보였다.

 

눌재는 이상히 생각하고 그 길로 갔었는데 그동안 금부도사는 큰 길로 오게 되어 서로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약을 받지 않고 용산까지 올라갔을 때 중종반정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군관부제학으로 기용하려 하였으나 눌재는 인생의 영달이 그의 소원이 아니었으므로 일찍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인 광주에 돌아와 한운야학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었다. 지금도 충주 박씨들은 그 조상을 구해 준 고양이를 극진히 애호한다고 한다.

                                                                              <금성시지 82. 12. 15>

 

 

 

朴淳(박순) 선생의 일화.

 

조선 2대임금 정종(定宗)이 왕에 책봉됐다. 이방원(이방원)은 이복동생 방간(방간)이 조정 관료들의 신임을 얻자 그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 보낸 후 처형한다. 정종 2년의 일이다. 동생 방간이 방원의 손에 죽자 형인 임금 정종은 불안해한다. 왕비 또한 시동생 방원의 눈이 무섭다고 자주 말한다. 정종은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결심을 한다.

그해 11월 하륜(河崙)과 박은(朴訔)이 방원을 추대해 왕위에 오르는데 이분이 3대 태종이다.

반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방원이 형제를 죽인 것에 노여움을 품고 함흥으로 떠나 버린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문안을 올릴 문안사절을 함흥으로 파견하지만 사신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소위 함흥차사(咸興差使)’. 임금의 명으로 이성계를 문안하러 간 사신이 함흥에 한번가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문안사절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판중추부사 박순(朴淳)이 사절로 나선다.

박순은 사신의 수레를 타지 않고 망아지가 딸린 어미 말을 타고 간다. 함흥에 이르렀을 때 태조가 머무는 행재소 앞에 망아지를 메어 놓고 어미말만 타고 들어갔다.

 

문안사가 왔다는 말을 들은 태조가 장검을 들고 뛰어 나왔다. 문안사를 보니 자신도 잘 아는 늙은 신하 박순이 아닌가, 그때 밖에 메어 놓은 망아지가 슬피 운다.

저 말이 왜 우느냐태조가 묻는다.

박순은 엎드린 채로 대왕을 뵈러 들어오는데 망아지가 거추장스러워 밖에 메 놓았더니 어미가 그리워 우는 것입니다.” 갑자기 태조의 표정이 바뀐다.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혼란스럽게 휘젓고 있었다. 이일이 있은 후 박순은 행재소에서 묵게 된다.

 

하루는 태조와 바둑을 두고 있는데 천정에서 어미 쥐 한마리가 떨었다. 보니 입에는 새끼를 물고 있었다. 어미는 떨어질 때 다친 부상으로 곧 죽었으나 그때까지도 새끼를 놓지 않고 있었다.

박순은 이때다 싶어 바둑판을 옆으로 밀고 엎드려 울면서 간한다.미물도 저렇거늘 전하께서는 어찌 아들을 버리고 떨어져 사실 수 있습니까이 말을 들은 태조가 서울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힌다.

 

박순은 임무를 완수하고 한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태조를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다른 문안사절은 모두 죽였는데 왜 박순 만 돌려보내십니까.”하고 간하자 태조는 일리가 있다고 말하고 어검(御劒)을 내려주면서 만약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으면 그냥 돌아오고 건너지 못했다면 베어라고 명했다.

 

태조는 박순이 시간상으로 용흥강을 건넜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순은 가는 도중 배탈이나 상당시간 지체됐다. 박순이 막 배에 오르려는 순간 자객들이 도착했다. 자객들이 아무 말 없이 칼을 내려치니 박순의 몸 절반은 배에 있고 나머지는 물에 떨어졌다.

태조가 이 소리를 듣고 좋은 친구를 죽였구나. 면서 슬피 통곡했다고 한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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