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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무안박씨)

 

 

본관(本貫): 무안(務安)

시조(始祖): 박진승(朴進昇)

유래(由來):

 

무안(務安)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임.

 

무안 박씨(務安朴氏)의 시조(始祖) 진승(進昇)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完山大君) 언화(彦華)의 5세손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무안(務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므로 후손들이 그에  살면서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무안(務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섬(朴暹)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공신. 1010년(현종 1)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로 있었는데, 거란병이 침입하여 청수강(淸水江 : 지금의 淸川江)에 이르자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므로 주민이 모두 흩어졌다.

다음해 안북(安北)으로부터 개경에 돌아와서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인 무안현으로 돌아가던 중, 거란의 침입으로 피난길에 오른 왕의 행차를 만나 나주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왕을 하직하고 무안으로 돌아갔다가 거란군사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서 왕을 알현하자, 사재경(司宰卿)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장작감 ( 將作監 )이 되었으며, 뒤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올랐다. 거란침입 때에 왕을 호종한 공로가 현저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동안 변함없는 절개로 사직을 안정시켰다 하여 1052년(문종 6) 각상(閣上)에 도형(圖形)되었다.

 

박문오(朴文晤)

섬의 6세손 문오(文晤)는 정승(政丞)에 올라, 가세(家勢)를 중흥시켰다.

 

박의장(朴毅長)

1555(명종 10)∼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사강(士剛). 할아버지는 증 공조참의 영기(榮基)이고, 아버지는 현감 세렴(世廉)이며, 어머니는 영양 남씨(英陽南氏)로 시준(時俊)의 딸이다. 김언기 ( 金彦璣 )의 문인이며, 경사(經史)에도 밝았다.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해 주부 ( 主簿 )가 되고, 1588년 진해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이 되었다. 이 때 소속군사를 이끌고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동래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각이 퇴각하자 그의 비겁함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같은 해 7월에 이각이 처형되고 박진 ( 朴晉 )이 병마절도사로 파견되자, 장기군수 이수일 ( 李守一 )과 함께 박진을 도와 적에게 빼앗긴 경주성의 탈환 작전에서 화차 ( 火車 )와 비격진천뢰 ( 飛擊震天雷 )를 사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4월에는 군사 300여 명을 거느리고 대구 파잠(巴岑)에서 왜적 2,000여 명과 맞서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5월에도 울산군수 김태허 ( 金太虛 )와 함께 울산의 적을 쳐서 50여 명을 베는 등 크게 이겼다. 그러한 공으로 당상관으로 특진되면서 경주부윤이 되었다.

7월에는 초산군(剿山郡)의 적을 쳐서 남문에서 전멸시켰다. 8월에는 왜병이 안강 ( 安康 )에 주둔한 명나라의 군사를 급습해 200명을 죽이자 병사 고언백 ( 高彦伯 )과 함께 적을 추격해 무찔렀다.

1594년 2월 양산의 적을 무찔렀고, 3월에는 임랑포(林浪浦)의 적이 언양현에 진입해 노략질하자 이를 급습해 무찔렀다. 이 때 적에게 잡혀 있던 백성 370명을 구해냈으며 우마 32필도 노획하였다. 5월에는 기장 ( 機張 )에서, 7월에는 경주에서 많은 왜병을 베었다.

1595년에 그 공으로 가선대부 ( 嘉善大夫 )로 품계가 오르고, 1597년 영천과 안강의 적을 무찔렀다. 이 때 1,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명군 5만 명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적군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치자 창고에 있던 곡식 400여 석을 거두었다.

1598년 박도산(薄島山)의 적을 쳐서 전승을 올려, 가의대부 ( 嘉義大夫 )로 품계가 오르고 말이 하사되었다. 1599년 성주목사 겸 방어사, 1600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601년 인동부사(仁同府使)를 두루 지내다가, 1602년 다시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公洪道水使)를 거쳐 경상수사가 되었다.

다섯 차례의 병사를 지내는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영해의 정충사(貞忠祠)와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되었다.

 

박홍장(朴弘長)

1558(명종 13) ∼ 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사임(士任). 증 사복사정 지몽(之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공조참의 영기(榮基)이고, 아버지는 현감 세렴(世廉)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병사 ( 兵使 ) 의장(毅長)의 아우이다.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한 뒤 아이만호(阿耳萬戶)가 되었고, 그 뒤 선전관 · 제주판관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조방장(助防將)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 1596년(선조 29) 대구부사(大丘府使)로 있을 때 유성룡 ( 柳成龍 )의 추천으로 통신사의 부사가 되어 정사 황신 ( 黃愼 )과 더불어 강화의 중책을 띠고 일본에 갔다.

도요토미( 淵 臣秀吉)가 조선사절을 멸시, 국서에 답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굴함이 없이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돌아온 뒤 가자(加資 : 품계가 오름)되었다. 그해 순천부사를 거쳐 상주목사 재임 중에 죽었다. 사후에 형 의장과 함께 영해 ( 寧海 )의 구봉정사(九峰精舍)에 제향되었다.

 

박인(朴璘)

현령(縣令) 인호(仁毫)의 아들 인(璘)은 임진왜란 때  왕(王)을 평양(平壤)에 호종하여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의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다.

 

박창하(朴昌夏)

1623(인조 1)∼1702(숙종 28).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하경(夏卿). 할아버지는 단양군수 응선(應善)이고, 아버지는 형조좌랑 규(贇)이며, 어머니는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조빈 ( 趙贇 )의 딸이다. 효도와 우애가 출중하였고, 사마시에 합격한 뒤 대과 준비를 하다가 그만두고 나이 70이 되어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 通政大夫 )의 관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동강(桐江)의 산수를 좋아하여 집을 짓고 여락당(余樂堂)이라 하였다. 시에 능해 고율시(古律詩) 500여편을 남겼다. 벼슬은 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고, 80세에 죽었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박징(朴澄)

창하의 아들 징(澄)은 숙종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박호(朴浩)

징의 아우 호(浩)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하여 예학(禮學)을 정립했다.

 

박백응(朴伯凝)

백응(伯凝)은 명종조에서 진원현감(珍原縣監)을 지내다가 낙향(落鄕)하여 부춘동(富春洞)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박도욱(朴道郁)

군수(郡守)를 역임.

 

박정걸(朴廷杰)

경행(敬行)과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걸(廷杰)이 유명했다.

 

박두성(朴斗星)

1888(고종 25)∼1963. 한글 점자 ( 點字 )의 창안자. 호는 송암(松庵). 경기도 강화 출신.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어의동보통학교(於義洞普通學校) 교사로 있다가 1913년 제생원 맹아부(濟生院盲啞部:서울盲學校의 전신) 교사로 취임하여, 이 때부터 맹인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일어 점자로만 교육을 해야 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오다가 1920년부터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였다. 1923년 1월 비밀리에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7년간의 연구를 거쳐, 1926년 이른바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 불리는 한글 점자를 완성하였다.

당시 일제의 검인정교과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한글 점자로 ≪조선어독본 朝鮮語讀本≫을 점자 출판하였으며, 이에 따라 맹인들에게도 민족의식이 더욱 고취되었다. 1935년 5월에 개최된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한글점자투표가 가능하게 되어 맹인들의 사회참여의 길이 확장되었다.

1931년부터 성경의 점자원판(點字原板) 제작에 착수하여 1941년에 점자로 된 ≪신약성서 新約聖書≫를 완성하였다. 1935년 제생원을 정년퇴직하고, 1936년 인천 영화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가 1939년에 사임하였다.

광복 후 제헌국회에서는 그가 창안한 한글점자투표를 승인받았으며, 1950년 6·25전쟁으로 신약 점자 아연판이 소실되자 다시 제작에 착수하여 1957년 ≪성경전서≫의 점역(點譯)을 완성하였다.

또한 감리교 신자로서 서울 정동교회 ( 貞洞敎會 )와 인천 내리교회(內里敎會)에 교적(敎籍)을 두고 맹인들을 전도하였다. 그가 마련한 교재용 점자자료는 70여 종에 달하며, 사재(私財)를 기울여 지방 각 처에 통신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장애자교육에 무관심했던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맹인들을 위해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한글 점자를 창안하여 특수교육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등 평생을 장애자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박술 효자의 효행.

 

울고 넘은 울령재

 

 

효자 박 술은 조선 말 광무 원년 315, 영해군 남면 복평리(지금의 영 덕군 축산면 도곡 2)에서 무안 박 수찬의 맏아들로 태어 났다.

몹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 술은 어릴 때부터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극진하였으며, 대여섯 살 때부터 마을에서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먹지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여 반드시 가져다 드렸다.

 

아홉 살 때의 여름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매 슬피 호곡하여 마을 사람 들의 눈시울을 적시었고, 삼년상이 지나기까지 아침저녁 상식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상례를 지키고 애모하는 것이 어른들과 같았다.

그 후 외로운 아버지를 도와 밥짓기 물긷기를 도맡아 하였으며, 방아찧는 일과 나무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집안일을 돕는 정성은 가엾고 불쌍하며 기특하여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의 동정과 칭찬을 받으며 살아갔다.

 

이 때는 왜병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강제로 합방한 때라, 각지에서 의병 이 일어나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이 곳 복평리에는 영남의 의병 대장 신 돌석 장군이 태어나 자란 곳이며, 의병진을 치고 왜적과 싸우던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어느 고장보다 항일 운동이 유명했던 곳이며, 그 유명했던 영해 3·1 의거와 함께 이 고장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술의 아버지 박 수찬도 신 돌석 장군의 의병진에 가담하여 의병 활동을 돕고 있었다.

 

어린 술도 아버지를 따라 신 돌석 장군 진에서 심부름을 하며 의병들의 하는 일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했다. 왜병의 잘못을 몹시 미워하는 영리하고 예사롭지 않은 어린이라고 어른들은 수근거렸다. 왜병이 찾아와서 의병들의 행방을 묻거나 정보를 알려고 꾀어도 절대로 말하지 않았고, 왜병이 돌아간 뒤에 의병진에 정보를 알려 주기도 하여 의병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무도한 왜병은 의병과 양민을 무차별로 잡아서 영해읍 감옥에 가둬 두고 모진 고문을 자행하였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왜병의 횡포는 날로 심해졌다. 따라서 의병과 민중의 반항도 차츰 더해 갔다. 이 곳 복평리에도 술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술은 아버지가 왜병에게 잡혀 가던 날 아침부터 밤까지 울부짖고 아버지를 놓아 주기를 애원했으며 , 영해읍 감옥까지 십여 리 길을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날라서 아버지를 봉양하였고, 식량이 떨어진 날이면 밥을 얻어서까지 아버지의 식사를 하루도 빠짐없이 갖다 드렸다. 식사를 가지고 갈 때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부등켜 안고 울곤 하여 감시하고 있던 왜병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왜병은 술의 아버지와 다른 의병들을 청송 형장으로 옮기게 되었고, 소문에 청송으로 옮겨가는 사람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하여 잡혀간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울부짖으며 원통해 하고 있었다.

 

술은 청송으로 끌려가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고 따라나섰다. 약하고 어린 몸으로 울며불며 험한 산길, 백여 리 먼 길을 가는 도중에, 무릎에 짚을 대고 꿇어앉아 아버지의 석방을 빌다가 왜병에게 발로 차이고 맞기도 했으나 조금도 겁내지 않고 애원했다.

 

험난한 울령재를 넘을 때 왜병 중대장은 술에게 계속 따라오면 이 골짜 기에서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술을 묶어 놓고 쏘려 해도 조금도 두려움 없이 나는 죽이더라도 아버지는 살려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끌려 가던 모든 사람들도 같이 울었다고 한다.

음식물을 주면 감추어 두었다가 그의 아버지께 드리는 등 청송에 이르기 까지 계속 애원하며 따라갔다.

왜병 중대장이 읍령에서 술의 효심을 시험하고자 왜병을 시켜 술을 큰 나 무 위에 매달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가니 술은 나무에 매달려서도 나는 비록 죽이더라도 우리 아버지만은 살려 달라.”고 했다. 그래서, 왜병 중대장도 어린 술의 효심에 감동되어 풀어 주고 그 아버지를 따라가게 했다.

 

청송에 당도하여 형장에서 술의 아버지를 총살하려고 총을 겨눌 때, 술은 아버지를 안고 나를 죽여 달라.”고 외치며 울었다.

술의 끈질긴 애원과 지극한 효심은 마침내 왜병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같이 고향인 복평리에 돌아온 술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서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것을 고하며 통곡하였다.

이 소문은 마침내 마을과 고을에 퍼지게 되어 복평마을 사람들은 술의 효 행사실을 영해 군수 경 광국 에게 알리고 효행의 정포(드러내어 포상하는 것)를 내려 달라고 진정했다. 뿐만 아니라, 영해군 남면과 영해 향중, 그리고 무안 박씨 문중에서도 술의 효행 사실을 영해 군수와 경상 관찰사에게 고하여 정포를 내려줄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영해 군수 경 광국도 관찰사에게 그와 같이 보고하여 술의 효행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광무 10년 병 오년 7월에 영해 군수 경 광국은 효자 박 술의 비를 복평리에 세우도록 하고 아울러 실기를 기록한 비문을 지어 내렸다. 그러나, 왜병의 침략과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효자문도 비문도 불에 타 없어져 한스럽다. 또한 진정을 받아들인 경상 관찰사도 술의 출천의 효행에 감복하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해 본보기가 되게 하고자 복평리를 효촌으로 마을 이름을 고쳐 부르게 전령을 내렸다. 그래서 복평리는 효촌으로 부르게 되었고 박 술의 효행은 이 고을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영해 선비들과 그의 자손들이 술의 효행 실기인 복평이 효촌으로 됨이라는 책을 엮어 널리 펴냈고 19811월 효촌 입구에 술의 효행을 새긴 기념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효촌에 샅고 있음을 자 랑으로 여기며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다.

 

출전영덕군 영해초등학교 이 교감

참고 문헌 福坪爲孝村, 충효교육자료집

참 고 眞城李炳斗撰碑文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0

載(재),廷(정)

24

容(용),楨(정)

28

植(식)

21

聖(성),賢(현)

25

奎(규),燮(섭)

29

燮(섭),炯(형)

22

仁(인),鉉(현)

26

鎭(진)

30

在(재)

23

敏(민),朱(주)

27

淳(순)

31

 

 

1985년 인구조사 결과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15,740가구, 64,6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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