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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반남박씨)

 

 

본관(本貫): 반남(潘南)

시조(始祖): 박응주(朴應珠)

유래(由來):

 

반남(潘南)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군(羅州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이다.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신라 왕족(王族)의 후예(後裔)로 고려조에서 반남호장(潘南戶長)을 역임한 박응주(朴應珠)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으며, 6세손 은이 조선 태종(太宗)때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同德佐命功臣)에 올라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된 연유로 해서  누대(累代)에 세거(世居)해 온 반남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상진(尙眞: 판서를 역임)·상경(尙 : 사은직장을 역임)·천두(天斗: 여의 아들)·상질(尙質: 생원 계의 아들)의 아들 대(代)에서 참판공파(參判公派: 예조 참판 규)·세양공파(世襄公派: 금천군강)·경주공파(慶州公派: 경주부윤 훤)·지후공파(祗侯公派: 예문지후 인)·교위공파(校尉公派:  창신 교위 귀근)·감찰공파(監察公派: 감찰 여해)·군사공파(郡事公派: 군사 진창)·정자공파(正字公派: 교서정자 충)·사정공파(司正公派: 영사정 문부)·동정공파(同正公派: 영동정 상질)·직장공파(直長公派: 직장  송생) 등 11개 파(派)로 크게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지파(支派)로 나누어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상충(朴尙衷)

11332(충숙왕 복위 1)∼1375(우왕 1).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성부(誠夫). 밀직부사 수(秀)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이 때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祀典 : 제사의 禮典)을 썼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다.

이 때 김구용 ( 金九容 )· 정몽주 ( 鄭夢周 )·박의중(朴宜中)· 이숭인 ( 李崇仁 )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는데, 이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복을 입으려 하였으나 사대부들이 부모상에 100일만 복을 입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1375년 이인임 ( 李仁任 )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 ( 林樸 )· 정도전 ( 鄭道傳 )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 해 간관 이첨 ( 李詹 )· 전백영 ( 全伯英 )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전녹생 ( 田祿生 )·정몽주·김구용·이숭인· 염흥방 ( 廉興邦 ) 등과 함께 귀양가던 도중 별세하였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성명학(星命學)에도 통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고 항상 삼갔으며 불의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박은

1370(공민왕 19)∼1422(세종 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앙지(仰之), 호는 조은(釣隱). 할아버지는 수(秀)이고, 아버지는 고려 말의 학자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상충(尙衷)이며, 어머니는 이곡 ( 李穀 )의 딸이다.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사위이며, 어효첨 ( 魚孝瞻 )의 장인이다.

문음 ( 門蔭 )으로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를 받은 뒤, 1385년(우왕 11) 문과에 2위로 급제해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후덕부승(厚德府丞)을 거쳐 1391년(공양왕 3)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듬해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뒤에도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었고, 고과(考課)에 정최(政最)의 성적을 받아 좌보궐 ( 左補闕 )에 임용되었다. 1394년(태조 3)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있을 때 태조의 다섯 째 아들 방원(芳遠)에게 충성할 것을 약속하였다.

1397년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이듬해 발생한 무인정사 ( 戊寅靖社 ), 즉 제1차 왕자의 난 때 지춘주사(知春州事)로서 방원의 집권을 위해 지방 군사를 동원하였다. 이어 사헌중승(司憲中丞)·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있을 때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역시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방원이 왕세자가 된 1400년에는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으로 그를 보필하였다. 좌산기상시 ( 左散騎常侍 )에 오른 뒤 1401년 태종의 즉위 후 중용되어 형조·호조·병조·이조의 4조 전서(典書)를 두루 역임하고, 좌명공신 ( 佐命功臣 )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 : 뒤에 潘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강원도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한성부윤·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을 역임하고, 1406년(태종 6)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제주도의 동불(銅佛)을 구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예의로 잘 접대해 칭송을 받았다.

이듬해 진향사 ( 進香使 )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참지의정부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이어 형조판서에 옮겼다가 1409년에는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으로 평양성 축성을 마쳤다.

1412년에는 관향인 반남이 나주에 속하자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되었으며, 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어 옥무(獄務)에서 신장(訊杖)의 사용 횟수를 1차 30인으로 정해 합리적인 형정 제도를 시행하였다. 1414년 이조판서 때에는 고공(考功)의 행정 제도를 개선하였다.

1416년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어 소년입각(少年入閣)의 예에 들었으며, 이어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의정 겸 판이조사에 올랐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될 무렵부터 심온 ( 沈溫 )과 대립해, 1418년(세종 즉위년) 심온의 옥사 때에는 심온의 반대 입장에서 관여했다는 세평을 듣고 있다.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이듬해에 죽었다.

문과 초시에서 강경 ( 講經 )을 채택하도록 강력히 주장해 시행하도록 했으니, 초시에 제술(製述)을 주장하는 권근 ( 權近 )· 변계량 ( 卞季良 )과는 학통이 다르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박규(朴葵)

∼ 1437(세종 19).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좌의정 은( 賻 )이며, 어머니는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25년(세종 7) 판통례원사(判通禮院事)가 되었다.

형조 · 이조의 참의를 지낸 뒤, 1429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승진되고 예조 · 호조 · 형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433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재직중 야인(野人)들의 약탈을 막지 못하여 함열 ( 咸悅 )로 유배되었다가 곧 방환되어 영남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로는 그에 대한 사적을 상고할 수 없다.

 

박강(朴薑)

∼ 1460(세조 6).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좌의정 은( 賻 )이며 어머니는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딸이다.

성질이 정교(精巧)하고 기능(技能)이 많아서 1444년(세종 26) 대호군 ( 大護軍 )을 거쳐 이듬해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임명되어 항시 이 직무를 맡고 있었다.

1449년 공조참의와 이조참의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 황해도도절제사가 되고, 이듬해 황해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중추원부사가 되고 1455년(세조 1)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하는 일에 협력, 그 공으로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에 책정되고 금천군(錦川君)에 봉하여졌다. 1457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듬해 황해도도순찰사가 되었다. 시호는 세양(世襄)이다.

 

박숭질(朴崇質)

∼ 1507(중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가(仲嘉) · 중소(仲素). 할아버지는 우의정 은( 賻 )이고, 아버지는 부윤 ( 府尹 ) 훤(萱)이며, 어머니는 구강(具綱)의 딸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고, 내외직을 거쳐 1490년(성종 21)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3년에는 형조판서로 정조사 ( 正朝使 )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사퇴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02년(연산군 8) 삼도입거도순찰사(三道入居都巡察使)가 되었고 1504년 우의정, 2년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 당시는 연산군의 폭정이 절정에 달하여 벼슬을 버리고자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석달 동안 등청하지 않다가 추국(推鞫 : 의금부에서 임금의 명에 의하여 심문을 함)을 받은 뒤 면직되었다. 중종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1507년(중종 2)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박용(朴墉)

1468(세조 14)∼1524(중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호(壕). 자는 중보(仲保). 아버지는 군기시정(軍器寺正) 치(緇)이며, 어머니는 영춘현감(永春縣監) 성효원(成孝源)의 딸이다. 인종의 장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 여러 차례 대과 ( 大科 )에 실패하여 음보(蔭補)로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를 거쳐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역임하고 홍주판관(洪州判官)으로 나아갔다가 과만(瓜滿 : 임기만료)이 되자 군기시판관(軍器侍判官)이 되어 다시 중앙으로 들어왔다.

그 뒤 내직으로는 충익부도사(忠翊府都事)·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주부 ( 主簿 )·사축(司畜)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울진현령·은율현감을 지냈다. 1524년 딸이 세자빈(世子嬪 : 뒤에 仁宗의 妃)에 책봉되자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이 되고, 곧 돈녕부부정(敦寧府副正)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특진되었다.

죽은 뒤 우의정 겸 춘추관사(右議政兼春秋館事)에 추증되고,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가증(加贈 : 추증이 더하여짐)되었다. 평소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였다.

 

박소(朴紹)

1493(성종 24) ∼ 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병문(秉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굉필 ( 金宏弼 )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때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 ( 朴英 )을 찾아가 학문에 힘쓴 결과 식견이 더욱 넓어져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 향공 ( 鄕貢 )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 : 강의나 강론하는 자리)에 나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해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 ( 趙光祖 )는 “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다.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 ” 라고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부수찬 ( 副修撰 )이 되었으며 그 뒤 정언 ( 正言 ) · 지평 ( 持平 ) · 사인 ( 舍人 ) · 필선 ( 弼善 )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사간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안로 ( 金安老 ) 등의 훈구파를 전한 ( 典翰 ) 조종경 ( 趙宗敬 )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허항 ( 許沆 )이 김안로에게 고해 도리어 사성 ( 司成 )에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번 탄핵해 그들의 미움을 사서 1530년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 ( 潘溪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박응천(朴應川)

∼1581(선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혼중(渾仲). 임종(林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고, 아버지는 사간 소(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사부(士俯)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 성균시에 합격하여 왕자사부 ( 王子師傅 )가 되고, 이어서 태인현감(泰仁縣監)·호조정랑을 거쳐 봉산군수(鳳山郡守)가 되었다.

군수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여 당시 도적떼인 임꺽정(林巨正)의 무리까지도 꺼릴 정도로 군민을 잘 보살폈다. 대구·이천·수원 등지의 부사 ( 府使 )와 광주 ( 廣州 )· 양주 ( 楊州 )의 목사를 거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사재감정(司宰監正)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대구부사로 있을 때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 ( 朴彭年 )의 후손 충후(忠後)가 대구에서 천역 ( 賤役 )을 하는 것을 노비문적에서 빼내어 천역을 면하게 하였다. 아우 응순 ( 應順 )의 딸이 선조의 비(妃)가 되자 그녀에게 초기의 정치에 선조를 도와 덕으로 정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가세가 몰락되었으나,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일으켰고 덕을 택하고 은혜갚기에 전념하였다. 관직에 나아가 탐욕하지 않았고 명예를 얻으려고 힘쓰지 않았다.

 

박응순(朴應順)

1526(중종 21)∼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건중(健仲). 임종(林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고, 아버지는 사간 소(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사부(士俯)의 딸이다. 딸이 선조비 의인왕후 ( 懿仁王后 )이다.

고려 말 명문의 후예이다. 아우 응남(應男)과 같이 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서 배웠다. 155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다음해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었고, 1559년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으나 위법사건에 관련되어 면직되었다.그 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양모상(養母喪)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565년 다시 기용되어 돈녕부주부·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를 거쳐 용인현령이 되었다. 1569년 딸이 왕실과 정혼되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승진되고, 11월에 중전에 오르자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영돈녕부사 ( 領敦寧府事 )가 되었으며, 그 뒤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하였다.

평소 검소한 생활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정치에 일체 간여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국구(國舅)가 살아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고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의(靖懿)이다.

 

박응남(朴應男)

1527(중종 22) ∼ 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유중(柔仲), 호는 남일(南逸) 또는 퇴암(退庵). 임종(林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년(兆年)이고, 아버지는 사간 소(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사부(士俯)의 딸이다.

8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와서 유조인(柳祖 婦 )에게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 · 이중호 ( 李仲虎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육조의 참의 ·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국정을 전단하던 이량 ( 李樑 )의 죄를 탄핵하다가 귀양갔으나 왕이 특별히 용서하여 풀려났다. 명종이 임종할 때 좌승지로 금중(禁中)에서 숙직하다 영의정 이준경 ( 李浚慶 )과 함께 고명을 받아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공을 세웠다.

심의겸 ( 沈義謙 )과 친교가 두터워 조카딸(應順의 딸)을 선조비로 책봉하도록 하였으며, 궁중의 복색을 화사하고 선명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이(李珥)는 ≪ 석담일기 石潭日記 ≫ 에서 “ 고지식하며 말을 과감히 하고 겉으로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 ” 고 평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사헌 재임중 기탄 없는 논박을 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왕비의 숙부였으므로 왕의 총애를 받으니 사림 ( 士林 )의 큰 힘이 되었고, 그가 죽자 사류(士類)들이 애석하게 여겼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박동현(朴東賢)

1544(중종 39)∼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학기(學起), 호는 활당(活塘).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이며, 어머니는 김희려(金希呂)의 딸이다.

타고난 천품이 특이하고 행실이 매우 바르며,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했기 때문에 향리에서 모두 감탄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시작해, 그 뒤 의금부도사·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석성현감(石城縣監) 등을 지냈다. 1588년(선조 21)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언 ( 正言 )· 지제교 ( 知製敎 )· 수찬 ( 修撰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59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 ( 黃允吉 )· 김성일 ( 金誠一 ) 등이 일본의 국서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 중 일본이 중국을 정벌하겠으니 조선의 길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중국에 알리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 때 수찬으로 경연 ( 經筵 )에 입시한 그가 중국과 우리 나라의 국교 관계를 생각해 알리는 것이 옳다고 건의해 분분하던 논의가 알리는 쪽으로 결정났다.

또, 국왕이 경연에 자주 참여할 것과 언로를 넓힐 것을 주청해 경연은 물론, 그동안 폐지되어왔던 상참 ( 常參 )·윤대(輪對)·소대(召對) 등의 군신간의 모임을 자주 열게 하니, 임금과 신하간의 대화가 잘 통해 조정의 일이 잘 풀려나갔다.

이듬 해 임진왜란이 발발해 왕과 정부 일행이 의주까지 피난하는 중에도 시종 일행을 수행하였다. 그러면서 온갖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문란한 규율을 바로잡고 시의(時宜)에 맞는 진언(進言)을 해 모든 일을 바로잡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593년 환도 뒤에도 계속 교리·헌납·지평·사간·응교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국정을 바로잡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이(李珥)· 성혼 ( 成渾 )을 사사해 자주 찾아가 배우고, 김장생 ( 金長生 )과 친교가 두터웠다.

 

박동선(朴東善)

1562(명종 17)∼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이며, 어머니는 사옹원참봉 김희려(金希呂)의 딸이다. 아들이 금주군(錦州君) 정(炡)이다.

1589년(선조 22) 28세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 해 증광 별시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남포현감으로 이몽학 ( 李夢鶴 )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논공행상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제외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현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켰다. 그 뒤 성균관전적·직강·예조좌랑·병조좌랑·사복시정 등을 차례로 지내고, 경기도사·수안군수에 이어 인천·부평·남양 등의 부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그를 대사간에 임명하자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못마땅히 여겨 사양했지만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 해인 1624년(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 때 병조참의로서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피난갔다.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와 가선대부로 대사헌이 되었고, 이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로 갔으며, 형조판서·좌참찬·우참찬·지돈녕부사·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지의금부사·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늙고 병든 몸으로 왕손을 호종하고 강화·교동·호서 등지로 피난했다가 난이 끝난 뒤 한성에 돌아와 좌참찬이 되었다. 저서에 ≪서포기문 西浦記聞≫이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박동열(朴東悅)

1564(명종 19)∼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열지(悅之), 호는 남곽(南郭)·봉촌(鳳村).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응복(應福)이며, 어머니는 증 좌승지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다. 동생이 동량(東亮)이다.

다섯살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었으며 1594년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이어 정언·병조좌랑·사서 등을 지냈다. 1601년 홍문관의 수찬·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그 해 가을 원접사 ( 遠接使 )의 종사관 ( 從事官 )이 되어 의주 ( 義州 )에 다녀왔다.

1603년 검상 ( 檢詳 )· 사인 ( 舍人 )을 거쳐 사성 ( 司成 )·상례 (相禮)·통례(通禮)를 역임하였다. 뒤에 황주목사로 나가 부역 ( 賦役 )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으며, 어사(御使)의 추천으로 옷감을 하사받았다. 1606년 예조참의·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우부승지에 올랐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충주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 해 정인홍 ( 鄭仁弘 )이 이황 ( 李滉 )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소를 올리자, 이에 분격한 유생들이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을 듣고 광해군이 크게 노해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진해 나주목사로 나갔다. 나주는 원래 다스리기 어려운 고장이었으나, 그는 유풍(儒風)으로 잘 다스렸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다 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마침 중풍으로 석방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했고,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및 국조의 고사에 두루 통하였다. 만년에 송추(松楸)에 폐거(廢居)할 때 이항복 ( 李恒福 )과 자주 내왕하였다. 저서에 ≪봉촌집≫이 있다.

 

박동망(朴東望)

1566(명종 21)∼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진(子眞).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응복(應福)이며, 어머니는 증 좌승지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다. 유조인 ( 柳祖認 )의 문인이다.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지평이 되었다. 이어 평산부사·신천군수·강화부사 등을 지냈다.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이덕형 ( 李德馨 )· 이항복 ( 李恒福 )의 추천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길주목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뒤에 영흥부사로 전임하였다. 1615년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가던 중 안주 ( 安州 )의 공관(公館)에서 죽었다.

 

박동량(朴東亮)

1569(선조 2) ∼ 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 · 오창(梧窓) · 봉주(鳳洲).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소(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응복(應福)이며, 어머니는 선산 임씨(善山林氏)로 구령(九齡)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 이듬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 · 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해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서 시중해 대중 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했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 해 동부승지 · 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 ( 冬至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 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해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 · 경기도관찰사 ·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 ( 韓應寅 ) · 유영경 ( 柳永慶 ) · 서성(徐 賂 ) · 신흠 ( 申欽 ) · 허성 ( 許筬 ) · 한준겸 ( 韓浚謙 )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 7신의 한 사람으로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 추관(推官)으로 있을 때, 김직재 무옥사건(金直哉誣獄事件)이 일어나자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 뒤 자주 탄핵을 당해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 해 계축옥사 때 모반 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해 극형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반역 관계는 극구부인하면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 : 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릉 저주 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 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 4년 뒤 다시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뒤에 아들 미( 掉 )와 의( 憤 )의 상언 ( 上言 )으로 복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상용 ( 金尙容 ) · 상헌(尙憲) 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 기재사초 ≫ · ≪ 기재잡기 寄齋雜記 ≫ · ≪ 방일유고 放逸遺稿 ≫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박엽(朴燁)

1570(선조 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숙야(叔夜), 호는 약창(葯窓). 증 영의정 소(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천(應川)이고, 아버지는 참봉 ( 參奉 ) 동호(東豪)이며, 어머니는 이주국(李柱國)의 딸이다.

1597년(선조 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1년 정언 ( 正言 )이 되고, 이어 병조정랑· 직강 ( 直講 )을 역임하고 해남현감 등을 지냈다.

그 뒤 광해군 때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광해군의 뜻에 따라 성지(城池)를 수축해 북변의 방비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 규율을 확립하고 여진족의 동정을 잘 살펴 국방을 튼튼히 해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

당시의 권신 이이첨 ( 李爾瞻 )을 모욕하고도 무사하리만큼 명망이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아래에서 심하(深河)의 역(役)에 협력하고,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그를 두려워하는 훈신들에 의해 학정의 죄로 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응천일록 凝川日錄≫에는 1613년(광해군 5)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형장(刑杖)을 남용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작상(爵賞 : 관작이나 포상)을 받으려 했다고 한다. 또한 사사로이 부(府)의 여자종을 범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마음대로 했다고 기록되었다.

≪속잡록 續雜錄≫에는 같은 해 겨울 호조판서 황신 ( 黃愼 )의 계청(啓請)에 의해 양전(量田 : 토지 측량)의 관서를 설치하고 8도의 좌우균전사(左右均田使)를 정했는데, 그가 호남우도의 균전사가 되어 혹독한 형벌을 적용해 폐해가 컸다고 되어 있다.

또한 평안감사 재임 때에는 음탕하고 포학하며 방자해 거리낌이 없어 새로 익랑(翼廊) 70여 칸을 지어 연달아 장방을 만들고 도내 명창 100여 명을 모아 날마다 함께 거처하며 주야로 오락과 음탕을 일삼았으며, 수를 배로 늘려 결미(結米)를 독촉해 이행하지 않으면 참혹한 형을 가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처형을 당하자 군중이 모여들어 관을 부수고 시체를 끌어내어 마디마디 끊었다고 한다.

 

박환(朴煥)

1584(선조 17)∼1671(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여술(汝述), 자호(自號)는 수우(守愚). 아버지는 참봉 동민(東民)이며, 어머니는 사평 ( 司評 ) 이눌(李訥)의 딸이다.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둘째 고모와 숙부 밑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김장생 ( 金長生 )으로부터 학문의 기초를 배웠으며, 뒤에는 김현성 ( 金玄成 )에게 사사(師事 : 스승으로 모심)하였다. 정치가 어지러웠던 광해군 때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그 뒤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6품직에 특제(特除)되어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인제현감을 지냈다.

정묘호란 이후 군자감 ( 軍資監 )· 장흥고 ( 長興庫 )의 주부 ( 主簿 )를 거쳐 지평현감(砥平縣監)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현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수성군(守城軍)과 합류하였다. 그 뒤 금구 ( 金溝 )· 양천 ( 陽川 )·단양(丹陽)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고, 166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에 이르렀다.

 

박병(朴炳)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치적(治績)을 올렸다.

 

박미

1592(선조 25) ∼ 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아버지는 참찬 동량(東亮)이며, 장인이 선조이다. 이항복 ( 李恒福 )의 문인이다.

1603년(선조 36)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 1605년 친공신적장자(親功臣嫡長子)의 자격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아 숭덕대부 ( 崇德大夫 )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 ( 金悌男 )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庭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 濫 )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뒤 1625년(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 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가자(加資)되었으며,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에 서용되었다.

1638년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능하였고, 특히 서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법은 중국의 오흥 ( 吳興 )을 따랐다.

지금까지 참판 박이서비(朴 紛 敍碑), 영흥부사 이수준갈(李壽俊碣) 등의 유필이 남아 있다. 장유 ( 張維 ) · 정홍명 ( 鄭弘溟 )과 교유하였다. 조카 세채(世采)가 행장을 짓고, 송시열 ( 宋時烈 )이 비명을 지었다.

 

박의

1600(선조 33)∼1644(인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중련(仲漣), 호는 중봉(仲峰). 대사간 소(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응복(應福)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동량(東亮)이며, 어머니는 승지 민선(閔善)의 딸이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전적 ( 典籍 )· 직강 ( 直講 ), 병조좌랑 등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학문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으며 지제교 ( 知製敎 )를 겸하였다.뒤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교리 ( 校理 )를 거쳐, 1643년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

 

박유

광해군의 폭정을 시(詩)로  풍자했다.

 

박세채(朴世采)

1631(인조 9) ∼ 1695(숙종 21). 조선 후기의 학자 · 정치가.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 남계(南溪). 홍문관교리 의( 扮 )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흠 ( 申欽 )의 딸이다.

그의 가계 ( 家系 )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 ≪ 사변록 思辨錄 ≫ 을 저술한 박세당 ( 朴世堂 ) · 박태유 ( 朴泰維 ) · 박태보 ( 朴泰輔 )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혈족이다. 또한 송시열 ( 宋時烈 )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7세 때인 1638년(인조 16)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생활 2년 만에 과거공부마저도 포기하였다.

그는 원래 이이(李珥)의 ≪ 격몽요결 擊蒙要訣 ≫ 로써 학문을 출발했으며, 이이를 존경하였다. 그 무렵 이이 · 성혼 ( 成渾 )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 ( 柳稷 )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 ( 批答 )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으므로 이에 분개해 과시(科試)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 ( 金尙憲 )과 김집 ( 金集 )에게서 배웠는데, 그의 큰아버지 호(濠), 종부 미( 掉 )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 ( 金長生 )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5월에 마침내 효종이 승하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 ( 服喪問題 )가 크게 거론되게 되었다.

그는 3년 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 · 송준길 ( 宋浚吉 )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해 서인 측의 이론가로서 역할하였다.

그가 지은 ≪ 복제사의 服制私議 ≫ 는 남인 윤선도 ( 尹善道 ) · 윤휴(尹 頊 )의 3년 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다시 서한을 보내어 윤휴를 경책(警責)한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 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 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 때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 ( 楊根 ) · 지평 ( 砥平 ) · 원주 · 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다시 등용되던 1680년까지 6년 간은 도리어 학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 소학 ≫ · ≪ 근사록 ≫ · ≪ 대학 ≫ · ≪ 중용 ≫ 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 독서기 讀書記 ≫ 를 저술하였다.

또한 ≪ 춘추 ≫ 에 대한 정자(程子) · 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 추가한 ≪ 춘추보편 春秋補編 ≫ 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 심학지결 心學至訣 ≫ 등을 저술로 남겼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집권층의 변화에 따라 그는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 · 공조참판 ·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는 ≪ 황극탕평론 皇極蕩平論 ≫ 을 발표해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에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 · 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 ( 尹拯 )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계 학자들과 학적 교류와 활동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서 야인생활을 하였다. 이 때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학구적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 중에 윤증 · 정제두 ( 鄭齊斗 )를 비롯해 이른 바 소론계의 학자들과 서신 내왕이 많았으며, 양명학 ( 陽明學 )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히려는 저술 경향을 보인다.

≪ 양명학변 陽明學辨 ≫ · ≪ 천리양지설 天理良知說 ≫ 을 비롯하여 ≪ 이학통록보집 理學通錄補集 ≫ · ≪ 이락연원속록 伊洛淵源續錄 ≫ · ≪ 동유사우록 東儒師友錄 ≫ · ≪ 삼선생유서 三先生遺書 ≫ · ≪ 신수자경편 新修自敬編 ≫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에는 정계의 영수격인 송시열이 세상을 떠나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는 우의정 · 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 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그는 남구만 ( 南九萬 ) · 윤지완 ( 尹趾完 ) 등과 더불어 이이 · 성혼에 대한 문묘종사 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한 바 있다.

박세채는 위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다시 말하면, 중화적(中華的) 천하가 무너지고 이적(夷狄)의 국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 바 역천패리(逆天悖理 : 천명을 어기고 인륜에 어긋남.)의 위기 의식이 만연된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공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학구 생활은 당시의 시대 정신과 긴밀한 연관 속에 이룩된 측면을 볼 수 있다.

그의 학문은 이러한 17세기의 국내외의 상황과 관련하여 네 가지 특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蕩平論)이며,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는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나아가 배척하는 일, 넷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 ( 禮學 )을 일으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외정치 면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복명반청(復明反淸 : 청을 배격하고 명을 회복하는 것)의 거사를 알고, 이를 적극 지지해 존주대의라는 정책과 제를 제시했으며, 대내적으로는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깊이 깨닫고 “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 ” 고 우려해 그 나름의 탕평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존주대의의 정책 과제는 김상헌과 관련할 때 그의 스승에게서 전수된 대외관(對外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 의식 속에서 도통수호(道統守護)라는 학적 과제에 대한 간접적인 인과 관계성을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도통수호 의식은 그가 이미 ≪ 이학통록보집 ≫ 을 저술해 중국 유학의 학통을 밝혔고, 그와 아울러 방대한 ≪ 동유사우록 ≫ 을 써서 동방의 도학연원을 밝힌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의 공적은 수제자 김간(金幹)의 평과 같이 “ 계개(繼開)의 공과 찬술의 풍부함은 참으로 근대 유현(儒賢)에는 없다. ” 고 자랑할 만하다.

또한 그가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한 태도는 ≪ 양명학변 ≫ 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 고본대학 古本大學 ≫ · ≪ 대학문 大學問 ≫ · ≪ 치양지 致良知 ≫ · ≪ 주자만년정론 朱子晩年定論 ≫ 등 양명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양명에 대한 비판은 도통수호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설(陽明說)을 신봉함으로써 사우(師友) 사이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 의고결남계서 擬古訣南溪書 ≫ 를 써서 “ 양명의 심설을 바꿀 수 없다. ” 고 했고, 그 뒤 여러 사우간에 논변이 있었던 만큼 그들의 스승으로서 논변을 질정(質定)하는 뜻에서 이러한 저술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박세채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학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 예학의 대가 ’ 라고 칭할만하다. ≪ 남계선생예설 南溪先生禮說 ≫ · ≪ 육례의집 六禮疑輯 ≫ 등은 예의 구체적 실천 문제를 다룬 서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 절차까지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의 변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예학의 구현이라는 오륜적 근거를 밝히는 학적 과제가 된다. 여말선초의 사상적 전환기에 제기되었던 불교의 멸륜성(滅倫性)을 극복하고, 예에 의한 실천 방법으로서 오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 가례 家禮 ≫ 를 권장하고 ≪ 삼강행실도 ≫ · ≪ 국조의례 ≫ 등의 간행은 일종의 범국민적 규범 원리로서 예 의식을 광역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대비의 복(服)에 대해 기년복 · 삼년복을 주장하거나 또는 대공 ( 大功 ) · 기년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예송 ( 禮訟 )은 파당적 대립의 성격을 띠기도 했지만, 문제는 대립의 성격이 예에 대한 기본 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립적 성격은 분명히 예학의 구현이라는 유학의 기본 과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이며 예학적 전개라는 차원이 이해된다.

그의 예학적 전개는 ≪ 육례의집 ≫ · ≪ 변례질문 變禮質問 ≫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견해는 역시 문인 김간의 ≪ 동방예설 東方禮說 ≫ 에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제두의 글에서 고례(古禮)를 존중하고 간례(簡禮)를 강조하면서 이이 · 성혼과 더불어 박세채의 예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예설은 위의 학적 계통의 선상에서 정제두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표적 저술은 ≪ 범학전편 範學全編 ≫ · ≪ 시경요의 詩經要義 ≫ · ≪ 춘추보편 ≫ · ≪ 남계독서기 ≫ · ≪ 대학보유변 大學補遺辨 ≫ · ≪ 심경요해 心經要解 ≫ · ≪ 학법총설 學法總說 ≫ · ≪ 양명학변 ≫ · ≪ 남계수필록 南溪隨筆錄 ≫ · ≪ 심학지결 ≫ · ≪ 신수자경편 ≫ · ≪ 육례의집 ≫ · ≪ 삼례의 三禮儀 ≫ · ≪ 사례변절 四禮變節 ≫ · ≪ 가례요해 家禮要解 ≫ · ≪ 가례외편 家禮外編 ≫ · ≪ 남계예설 南溪禮說 ≫ · ≪ 남계시무만언봉사 南溪時務萬言封事 ≫ · ≪ 남계연중강계 南溪筵中講啓 ≫ · ≪ 남계기문 南溪記聞 ≫ · ≪ 동유사우록 ≫ · ≪ 주자대전습유 朱子大全拾遺 ≫ 등이 있는데, 단행본으로 유포되고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박세당(朴世堂)

1629(인조 7) ∼ 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 ·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 馬 ) · 서계초수(西溪樵 馬 ) · 서계(西溪). 응천(應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며, 어머니는 양주 윤씨(楊州尹氏)로 관찰사 안국(安國)의 딸이다.

〔관직 활동〕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 · 안동 · 청주 · 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 뒤 예조좌랑 · 병조좌랑 · 정언 · 병조정랑 · 지평 ·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 함경북도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 ( 書狀官 )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 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태유(泰維)와 둘째 아들 태보(泰輔)를 잃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집의 · 사간 ·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의 · 호조참판 · 공조판서 · 우참찬 · 대사헌 · 한성부판윤 · 예조판서 · 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에는 이경석 ( 李景奭 )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 ( 宋時烈 )을 낮게 평가했다 해서 노론 ( 老論 )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사상 형성의 배경〕 그의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 · 장년기의 관리 생활을 통한 개혁 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경험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 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던 시기인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 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 의식을 토대로 해서 학문과 경륜을 펼쳤던 것이다.

그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문의 근본 입장은 당시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 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 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해 사상적 자주 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에 비롯했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며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그와 윤휴(尹 頊 ) · 윤증 ( 尹拯 ) 등이었다.

이들은 주자학 비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었지만 학문 연구의 입장은 달라 대략 세 방향을 띠었다. 첫째는 고대의 유학, 특히 한(漢)나라 때의 유학을 빌어 통치 이념을 수정하려는 윤휴와 같은 남인 ( 南人 )계통의 학파이고, 둘째는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의 유학을 도입해 채용해보려는 최명길 ( 崔鳴吉 ) · 장유 ( 張維 ) 등 양명학파(陽明學派)이며, 셋째는 노장 사상을 도입해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박세당 계통이었다.

〔현실 인식과 개혁 의식〕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한 도가 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었다.

그가 이러한 학문 경향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또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보위에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 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서 지방(海西地方)의 암행어사와 함경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한 뒤,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린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양반 지배 세력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경지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 안정책과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 ( 士大夫 )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는 요역( 法 役)과 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했고, 모든 정치 · 사회 제도가 문란하므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이 쇠퇴했으므로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국민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할, 사대부 양반이 2할, 평민이 2할인데, 사대부 양반은 8 ∼ 9할이 놀고 먹으니 이는 봉록(俸錄)만 받아먹는 나라의 커다란 좀 〔 亘 〕 이라고 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 대륙의 세력 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 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 추구에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고려말 정몽주 ( 鄭夢周 )와 자기의 선조 박상충 ( 朴尙衷 )에 관한 평가도 고려에 대한 충절보다는 원나라 · 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하려는 대외 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해 국제 사회에서의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 자존의 실리를 위한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했던 것이다.

〔사상과 학문적 특성〕 대내외 정책에 대한 개혁 의식을 가졌던 그는 관직을 버린 뒤 ≪ 논어 ≫ · ≪ 맹자 ≫ · ≪ 대학 ≫ · ≪ 중용 ≫ 등 사서와 ≪ 도덕경 道德經 ≫ 및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학문적 지향을 취하였다.

그는 육경(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심원(深遠)해 본 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孔孟)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 사변록 思辨錄 ≫ 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자유분방하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유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仁)에 대해, 공자가 말하는 ‘ 인 ’ 이란 인간과 동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 조화(自然調和)의 심정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 중심적인 사랑이며, 사람과 동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맹자의 인에 대하여도, 맹자의 차마 할 수 없는 심정인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서의 ‘ 인 ’ 이란 도살장과 부엌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일 뿐, 역시 살생을 배격하지 않는 잔인성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맹자가 ‘ 왕도(王道) ’ 란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했지만, 민심을 얻는 데만 뜻을 먼저 둔다면 이는 패자(覇者)의 행위이고 왕도는 아닐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가 제왕권체제(帝王權體制)를 강화하기 위해 설정한 모든 만물의 근원적 원인자(原因者)로서의 태극 ( 太極 )에 대한 이해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실적 차별이 이러한 현상에 앞선 원인자인 태극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해, 인간이 제왕권(帝王權)에 복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라고 보았다. 또 인간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인욕(人欲) 또는 인심(人心)으로서 악행(惡行)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태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감각적 욕구를 작용시키는 감성(感性)도 인간의 불가피한 기능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도심(道心) 못지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그는 도를 밝히는 것은 지식과 언어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으며, 백성들이 실질을 떠나서 허위의 비현실적인 가치관만을 배우게 되면 이는 다스리려 해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백성의 생활 가치를 신장시키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이단시되던 노장학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노장학도 본질면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 보탬이 되고 버릴 것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도가 사상이 차별 사상이 아니고 민중 중심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의 지배 욕구의 포기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 ≪ 도덕경 ≫ 의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무위(無爲)란 일하지 않는 불사(不事)가 아니라, 사사로운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무욕(無欲)의 정치 태도라고 보았다. 장자의 무위자연도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치자(治者)에게 과도한 지배 욕구를 버리고 백성들의 생활권을 신장시키는 데 힘쓸 것을 요청한 무욕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이었다.

〔교유 관계와 저작〕 그는 스스로 무욕을 실천하는 생애를 보냈지만 정치와 사회 현실에 전연 무관심하지 않고,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소론파(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그는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해 같은 반남 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박세채 ( 朴世采 ),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 ( 南九萬 ), 최석정 ( 崔錫鼎 )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 ( 李德壽 ), 함경감사 이탄 ( 李坦 ), 좌의정 조태억 ( 趙泰億 ) 등을 비롯한 수십 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그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 서계선생집 西溪先生集 ≫ 과 ≪ 대학 ≫ · ≪ 중용 ≫ · ≪ 논어 ≫ · ≪ 상서 ≫ · ≪ 시경 ≫ 등의 해설서인 ≪ 사변록 ≫ , 그리고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 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 ≫ 1책과 ≪ 남화경주해산보 南華經註解刪補 ≫ 6책이 전한다. 편저로는 농서(農書)인 ≪ 색경 穡經 ≫ 이 전한다.

 

박태보(朴泰輔)

1654(효종 5) ∼ 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할아버지는 참판 정(炡)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 세당(世堂)이며, 어머니는 현령 ( 縣令 )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당숙인 세후(世 譽 )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시관 ( 試官 )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에 홍문관의 부수찬 ( 副修撰 ) · 수찬 · 부교리 ( 副校理 ) ·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묘 승출(陞黜 : 위패를 새로이 모시거나 있던 위패를 출향시킴.)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 ( 李端夏 )를 질책한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 그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시작으로 부수찬 · 교리 · 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 ( 宋時烈 )과 윤선거 ( 尹宣擧 )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

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 ( 成渾 )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런데 그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가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 ( 仁顯王后 )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해 주동적으로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를 맺었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 ( 崔錫鼎 ) · 조지겸 ( 趙持謙 ) · 임영 ( 林泳 ) · 오도일 ( 吳道一 ) · 한태동 ( 韓泰東 )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해 여러 차례의 상소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했고,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을 세웠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 淵 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정재집 ≫ 14권, 편서로는 ≪ 주서국편 周書國編 ≫ ,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 · 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 · 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박태유(朴泰維)

1648(인조 26) ∼ 1696(숙종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사안(士安), 호는 백석 ( 白石 ). 동선(東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 세당(世堂)이며, 어머니는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평강현(平康縣) 관아 ( 官衙 )에서 태어났다.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1년(숙종 7)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되었다. 같은 해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 ( 檢閱 ) · 병조좌랑 등을 거쳐 경기도사를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호조 ( 戶曹 )에서 농사일을 조사할 때, 각 고을에서 일을 맡은 자들이 사실 조사를 꺼려 임의대로 한두 경우만 조사해 보고하였다. 이에 그는 “ 명령을 받고 앉아서 살피는 것은 옳지 않다. ” 하고 모두 조사해 부실한 보고를 한 수령 5, 6인을 파면시켰다.

조사가 끝난 뒤 각 고을의 농사 피해 보고가 사실과 다르고, 농사도 전년보다 잘 되지 않았으므로 세미(稅米)를 줄이도록 상소해 춘추세(春秋稅)의 각 반을 감면받았다.

그 해 겨울 지평 ( 持平 )에 임명되었을 때, 어영대장(御營大將) 김익훈 ( 金益勳 )이 역모를 밀고했으나 심문한 결과 무혐의로 드러났다. 그러자 지평(持平) 유득일(柳得一)과 함께 김익훈을 탄핵하였다.

이러한 탄핵이 임금을 거슬러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뒤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으나 낮은 직위에도 거리낌없이 남병사(南兵使) 이하를 모두 탄핵하였다. 감사의 잘못도 규탄해 감사가 스스로 사직하였다.

임금이 상관을 지나치게 규탄한다고 여겨 평안도찰방으로 이직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원래 건강하지 못한 데다가 고산(高山)의 기후도 맞지 않아 병이 악화되자, 1695년(숙종 21) 병으로 사직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글씨로는 철원의 김응하묘비(金應河墓碑) · 영상신경신비(領相申景愼碑) · 해백박동열비(海伯朴東說碑) · 길목박동망갈(吉牧朴東望碣) 등이 남아있다.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 ∼ 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 열상외사(洌上外史).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 필균(弼均)이고,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성장 과정〕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필균이 양육하였다. 1752년(영조 28) 전주 이씨(全州李氏) 보천(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 맹자 ≫ 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보천의 아우 양천(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 사기 史記 ≫ 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으며,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북학사상의 형성과 현실 개혁론〕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으며 이후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 ( 朴齊家 ) · 이서구 ( 李書九 ) · 서상수 ( 徐常修 ) · 유득공 ( 柳得恭 ) ·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 ( 洪大容 ) · 이덕무 ( 李德懋 ) · 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 ( 利用厚生 )에 대해 자주 토론했으며, 이 무렵 유득공 · 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 ( 洪國榮 )이 세도를 잡아 벽파 ( 僻派 )였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 ·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 열하일기 ≫ 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 과농소초 課農小抄 ≫ · ≪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 · ≪ 안설 按說 ≫ 등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 열하일기 ≫ 와 위의 책들은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특히 ≪ 열하일기 ≫ 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이 때는 명(明)에 대한 의리와 결부해 청(淸)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이 속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적 수용력이 부족했으나 당시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강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북학사상(北學思想)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인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개선책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역대 중국인들이 우리에게 갖는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도 서술하였다.

그는 서학 ( 西學 )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가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그가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 ( 朱子學 )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이 생각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창이었으나 과감한 개혁 의지의 한 표출로 나타났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을 집약한 것이 곧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正德)을 이루는 방법이다. 이는 정덕을 이룬 뒤에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방법과 비교할 때 발상의 일대전환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창하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요체이며 이를 위해 제시한 것들은 자기 주장의 완성을 위한 방도이다. 그 방도의 구체적 현상은 정치 · 경제 · 사회 · 군사 · 천문 · 지리 · 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나타났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는 토지개혁정책 · 화폐정책 · 중상정책(重商政策) 등을 제창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미래의 비전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문학 작품〕 그가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곧 당시 주조를 이루는 복고적 풍조에서 벗어나 문학이 갖는 현실과의 대립적 현상을 잘 조화시켜, 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수렴할 수 있는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의 사고가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이루며, 문학 작품의 매개체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고 당대에 맞는 문체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 표현되는 이 말은 시속문(時俗文)의 인정을 의미하며 그렇다고 문승질박한 비평소품(批評小品)을 찬양한 것은 아니다. 고법(古法)을 버리는 이유는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문학을 창조하는 데 있었기에 새롭기 위해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표현의 절제와 문장 조직 방법의 운용, 사실적인 표현 등은 그가 생각한 당대의 현실과 문학과의 관계를 연결짓는 방법들이었다. 이는 그의 문집 속에 수록된 당시 그와 교유했던 사람들의 문집서(文集序)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일련의 한문 단편(漢文短篇)들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초기에 쓴 9편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 혹은 민족 문학의 맥을 연결하는 것들로서 강한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다. 〈 양반전 〉 의 경우는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의 계급이 가지는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었다. 다음으로 북경을 여행한 이후에 쓴 두 편의 단편은 여행기 속에 포함된 것으로 역시 그의 실학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 중에서 〈 허생전 許生傳 〉 은 중상주의적 사상과 함께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와 함께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한 실례가 될 것이다.

〔저서〕 그의 저술은 모두 ≪ 연암집 燕巖集 ≫ 에 수록되었다. 그가 가진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서, 실제로 1900년 김만식(金晩植) 외 23인에 의해 서울에서 처음 공간된 그의 문집은 책을 초록한 형태였다. 그의 손자 박규수 ( 朴珪壽 )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문집 내용이 갖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그의 저술에서 특이한 점은 문집 대부분이 논설을 중심으로 한 문장이 대부분이며, 시는 각체를 합해 42수가 전부이다. 이 점에 대해 아들 종간(宗侃)은 〈 영대정잡영 映帶亭雜 半 〉 (권제4) 말미에 붙인 부기에서 유실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교유한 문인들의 문집 속에도 그가 많은 작품들을 지었다고 하고 있어, 이 역시 유실되었음을 증명하는 한 예일 것이다.

저서로는 ≪ 열하일기 ≫ , 작품으로는 〈 허생전 〉 · 〈 민옹전 閔翁傳 〉 · 〈 광문자전 廣文者傳 〉 · 〈 양반전 〉 · 〈 김신선전 金神仙傳 〉 · 〈 역학대도전 易學大盜傳 〉 · 〈 봉산학자전 鳳山學者傳 〉 등이 있다. 1910년(순종 4)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박종경(朴宗慶)

순조(純祖)때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오름.

 

박종훈(朴宗薰)

1773(영조 49) ∼ 1841(헌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순가(舜可), 호는 두계(荳溪). 할아버지는 사득(師得)이고, 아버지는 군수 참원(參源)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우의정 사관(思觀)의 딸이다.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802년(순조 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 홍문관의 부교리 ( 副校理 ) · 응교 ( 應敎 ),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쳐 1807년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오르고, 승지 ·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809년 함경도감영 관하의 민가 1,798호가 화재를 당하자 승지로서 함흥부위유사(咸興府慰諭使)가 되어 피해민을 위유하고 돌아온 뒤, 대사성 ·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 경기관찰사 ·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대사헌,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 한성부좌윤 · 전라도관찰사 · 예문관제학 · 이조참판 · 우부빈객 ( 右副賓客 ) · 홍문관제학 · 우빈객 ( 右賓客 ) 등을 역임하였다.

1823년 진하정사(進賀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예문관 · 규장각 · 홍문관의 제학 및 육조의 판서와 한성부판윤 · 대사헌 · 우빈객 · 좌빈객 · 겸유선(兼諭善) · 광주목사 · 평안도관찰사 · 판의금부사 · 좌참찬 등을 거쳐 1834년 우의정에 올랐다.

같은 해 순조가 죽자 행장 ( 行狀 )을 지었고, 이어 고부정사 겸 주청사(告訃正使兼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7년 ≪ 순조실록 ≫ 의 편찬을 위한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고, 좌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에 풍양 조씨 세도의 압력으로 사직,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경서를 연구해 박학다문했고, 예악(禮樂) · 율령 · 산수에도 능통하였다. 또한 서도와 시문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 사례찬요 四禮纂要 ≫ , 편서로는 ≪ 반남박씨세보 潘南朴氏世譜 ≫ 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박회수(朴晦壽)

회수(晦壽)는 철종(哲宗)때 좌의정을 역임.

 

박기수(朴岐壽)

촤참찬을 거쳐 판돈령부사를 지냄.

 

박운수(朴雲壽)

1797(정조 21)∼1841(헌종 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경룡(景龍), 호는 덕은(德隱) 또는 죽계(竹溪). 서울 출신. 서흥부사(瑞興府使) 종여(宗輿)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규복(奎復)의 딸이다. 할아버지 윤원(胤源)에게 글을 배웠다.

1820년에 문과 ( 文科 )에 합격, 1822년에 사용 ( 司勇 )이 되었으며, 이듬해 태릉참봉(泰陵參奉)을 거쳐 사과 ( 司果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냈다. 이어서 사헌부감찰·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예산현감·문화현령(文化縣令) 등을 지냈다.

1829년 가평군수를 거쳐 1833년 거창부사·순흥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수령으로 있는 동안 실정(失政)을 많이 고쳐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순흥부사로 있을 때에 2만6000여석의 허위로 보고된 환곡 ( 還穀 )을 정리하여 부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글씨에 뛰어나 금석문자도 남아 있다. 저서로는 ≪덕은유고≫ 3권이 있다.

 

박호수(朴鎬壽)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박규수(朴珪壽)

1807(순조 7) ∼ 1877(고종 14). 조선 말기의 문신. 실학자 · 개화론자. 본관은 반남 ( 潘南 ). 초명은 규학(珪鶴), 초자(初字)는 환경(桓卿), 자는 환경( 瀛 卿) 또는 정경(鼎卿), 초호(初號)는 환재(桓齋), 호는 환재( 瀛 齋) 또는 환재거사( 瀛 齋居士). 서울 출신.

북학파 거두 지원(趾源)의 손자로, 현령 종채(宗采)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유영(柳詠)의 딸이다. 가세가 빈한해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 수학했고, 소년시절에는 진외당숙(陳外堂叔) 이정리 ( 李正履 ) · 이정관(李正觀)과, 외종조부 유화(柳 膚 ) 등에게서 훈도받았다.

15세경에는 이미 조종영 ( 趙鍾永 ) 등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을 만큼 학문적으로 성장하였다. 20세 무렵 효명세자 ( 孝明世子 )와 교유할 때는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어머니 · 아버지의 연이은 사별로 인한 상심으로 20년간 칩거(蟄居)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자와 호의 ‘ 환(桓) ’ 이라는 글자를 ‘ 환( 瀛 ) ’ 자로 바꾼 동기도 세자의 죽음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할아버지인 지원의 ≪ 연암집 燕巖集 ≫ 을 통해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다. 윤종의 ( 尹宗儀 ) · 남병철 ( 南秉哲 ) · 김영작(金永爵) 등 당대 일류 학자와의 학문적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문 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

1848년(헌종 14)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해 사간원 정언으로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그 해 병조정랑으로 옮겼다가 그 해 다시 용강현령에 부임하였다. 1850년(철종 1) 부안현감, 이듬해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1854년 동부승지가 되고, 그 해 경상좌도 암행어사로서 민정을 시찰하였다. 1858년 다시 곡산부사로서 외직에 보임되었다.

1861년 약 6개월간에 걸쳐 연행사절(燕行使節)의 부사(副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856년의 애로호 사건(Arrow號事件)이 일어나 영 · 프랑스 양군이 북경(北京) · 톈진(天津)을 점령하자 당시 청나라의 함풍제(咸豊帝)는 러허(熱河)에 피난하였다. 이 때 문안 사절로 간 그는 국제정세를 목격할 수 있었고, 심병성(沈秉成) 등 8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의 교유를 통해서도 견문을 넓혔다.

귀국하자 곧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62년 2월 진주민란 수습을 위한 안핵사(按 逆 使)에 임명되어 민란의 진상을 조사해 보고하였다. 이는 국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안핵사로서 맡은 임무를 수행한 후, 그 해 10월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864년(고종 1) 고종이 즉위하자 특별 가자(加資)되어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는 새로 즉위한 고종을 익종 ( 翼宗 )의 뒤로 승계하도록 한 조대비(趙大妃 : 익종의 비)가 지난 날 익종과 절친했던 그를 우대한 때문이다. 이어 사헌부대사헌 · 홍문관제학 · 이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곧 이어 지경연사(知經筵事) 겸 공조판서에 전임되었다. 이 무렵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이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을 때, 영건도감 ( 營建都監 )의 제조 ( 提調 )를 겸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 · 대사간을 거쳐 그 해 8월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에 제수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그 해 7월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이 발생하였다. 10월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다.

민중이 천주교를 좇는 것은 결국 당국이 이들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처벌보다 선도해야 한다고 주장, 그의 관내에서는 천주교 박해로 인한 희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았다. 이 밖에도 여러 선정을 베풀어 1869년 4월까지 만 3년 2개월 동안 평안도관찰사 직에 있었다.

1869년 4월 한성판윤에 임명되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 뒤 대제학 재임 중 1872년 진하사 ( 進賀使 )의 정사 ( 正使 )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 ( 吳慶錫 )을 대동, 두번째 중국에 다녀왔다.

제2차 중국사행을 통해 그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 개국 ( 開國 ) · 개화(開化)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 후 1873년 5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그 해 12월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이 무렵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실현되지 않자 1874년 9월에 사직하였다. 1875년 초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가 되어 국정의 제일선에서 물러나 한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그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자제들에게 ≪ 연암집 ≫ 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 그 가운데서 나타나게 되었다.

문호 개방을 위해 계속 진력하던 중, 1875년 9월 일본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수교를 강요해 오자 오경석 등과 함께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해 1876년 2월, 드디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그 해 1월 고희(古稀)를 넘겨 기사(耆社: 耆老所의 별칭.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여 놀던 곳)에 든 뒤 한직(閑職)인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다가 죽었다.

그의 실학파적 학문 경향은 가문이나 교유했던 인물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학풍은 문인 김윤식 ( 金允植 )이 지적한 바와 같이, “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 · 고고(考古) · 의기(儀器) · 잡복(雜服) 등의 일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 ( 實事求是 )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한 ” 실학파의 학풍이었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그가 사숙한 선배 중에는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 · 서유구(徐有 梏 ) 등이 있다. ‘ 실학 ’ 으로부터 ‘ 개화 ’ 에로의 그의 사상적 전환은 1860년대부터 1870년대에 걸쳐서 대외적 위기에 대응한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1861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서 청나라를 방문, 국제 정세를 목격하였다. 1862년 진주민란의 안핵사로서 현지에 파견되었다. 1866년에는 평안감사로서 대동강에 불법 침입한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격침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로부터 1871년의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양요(洋擾)에 관련되는 청나라에의 자문 ( 咨文 ) 및 미국측의 힐문(詰問)과 통상 요구에 대한 답장은 대부분 그가 기초하였다. 이러한 대외활동이 실학적인 경향으로부터 점차 개화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졌던 것이다.

요컨대 그의 개화 사상은 실학 사상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위에 외발적 요인이 작용해 촉발된 것으로, 일찍이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이용후생 ( 利用厚生 ) 바로 그것이었다.

1866년의 셔먼호 사건과 그것을 구실로 무력 개국을 시도한 1871년의 신미양요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을 “ 미국은 지구 상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공평하다고 일컬어지고, 난리의 배제와 분쟁의 해결을 잘하며, 또 6주(洲)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이 없다고 하니, 저쪽에서는 비록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먼저 수교 맺기를 힘써 굳은 맹약을 체결하면 고립되는 우환은 거의 면할 것이다. ” 고 이해하고 있다. 이는 당시 유학자들의 세계관과는 비교될 수 없는 진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현직자로서의 그는 주화(主和)는 곧 매국이라고 규정짓는 흥선대원군의 집정 하에서 개국론을 공식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었다. 셔먼호 사건에서처럼 무력에 호소하는 무법 행위를 단호히 격퇴한 것이라든지, 신미양요에 관한 미국에의 자문에서 “ 저쪽이 호의로써 오면 우리도 호의로써 응하고, 저쪽이 예(禮)로써 오면 나도 예로써 접대할 것이니, 곧 인정이 진실로 그런 것이며 나라의 통례이다. ” 라고 말한 것 등은 국가 시책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공적 입장에서였다.

문인 김윤식에 의하면, 여러 자문과 답장에 나타난 박규수의 주장은 “ 이치에 근거해 자세히 말하고 그 말을 완곡하게 굴려서 국가의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문호를 닫고 수호를 물리치는 등의 일은 선생의 뜻이 아니었고 부득이한 것이었다. ” 는 것이다.

그가 개국에의 확신을 깊이하고 공공연히 주장하게 된 시기는, 대체로 1872년 진하사의 정사로서 두번째 중국을 방문, 양무운동을 상세하게 목격하고, 특히 1871년 청나라의 사죄사로서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온 숭후(崇厚)의 형 숭실(崇實)을 만나 서양제국의 사정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던 때부터라고 생각된다.

1873년 12월, 우의정에 승진하던 무렵에 고종의 친정(親政)이 선포되었다.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을 대신해 민씨 일족이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대외관계에 있어 초점은 일본이 왕정복고를 통고해 온 서계문제(書契問題)였다.

그 서계는 종전의 서계 격식과 달리 조선 국왕에 대한 일본의 ‘ 황(皇) ’ · ‘ 칙(勅) ’ , 조선국에 대한 ‘ 대일본(大日本) ’ 등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수리하기를 거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 직함(職銜)을 가서(加書)한 것은 저네들 자신 그 나라의 정령(政令)이 일신되어 그 인군의 우상(優賞)을 입은 것을 과시한 것뿐이다. 소위 관작(官爵)을 승진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종래의 격식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힐책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일개 통역관의 견해라면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하필 조정 스스로가 이를 교계(較計)하려 하는가 가히 일소에 붙일 일이다. ” 라고 서계의 문구에 구애되지 말라고 하였다.

나아가 저들이 나라의 제도를 변경해 옛날같이 통호(通好)하려는 뜻을 표명하는 한, 대국적 견지에서 서계를 받아들일 것을 대원군에게 역설하였다.

1875년 5월 대원군에게 “ 만약 저들이 포성을 한 번 발(發)하기에 이르면 이후 비록 서계를 받고자 하여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왜양일편(倭洋一片)인 상황에서 일본과의 수호를 거부하는 것은 조선의 약점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력 행사의 구실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875년 6월 13일, 서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의 어전회의가 열렸을 때도 저들 일본의 인호(隣好)를 거부하면 반드시 한을 품어 불화를 낳을 단서가 될 것이므로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9월 25일 강화도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측의 패배는 그가 우려한 바대로 최악의 사태로 발전하였다. 1876년 2월의 강화도 담판은 승자 일본의 무력적 협박 하에 진전되었다. 1876년 2월 26일에 조인된 12개 조항의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는 이렇게 하여 체결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그의 개국론은, “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 ” 고 말한 바와 같이,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그의 의도와는 반대 방향으로 진전되어버렸던 것이다.

문인 김윤식은 박규수의 만년을 “ 나라 사정이 날로 그릇쳐지매 공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 ” 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 · 서유구 · 김매순(金邁淳) · 조종영 · 홍석주 ( 洪奭周 ) · 윤정현 ( 尹定鉉 )을 선배로서 사숙하였고, 문우로서 남병철 · 김영작 · 김상현(金尙鉉) · 신응조 ( 申應朝 ) · 윤종의 · 신석우 ( 申錫愚 ) 등과 주로 교유하였다.

그리고 김옥균 ( 金玉均 ) · 박영효 ( 朴泳孝 ) · 김윤식 · 유길준 ( 兪吉濬 ) 등은 그 문하에서 배출된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다. 박규수는 북학파와 개화파를 결절(結節)시킨 중심 인물었던 것이다.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 환재집 瀛 齋集 ≫ · ≪ 환재수계 瀛 齋繡啓 ≫ 가 있다. 편저로는 ≪ 거가잡복고 居家雜服攷 ≫ 가 있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박정양(朴定陽)

1841(헌종 7) ∼ 1904. 조선 말기의 대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제근(齊近)의 아들이다. 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879년 형조참판을 지냈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해 이용사당상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1882년 성균관대사성 · 이조참판 · 좌승지 등을 거쳐 1883년 이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 · 내무협판 ·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 사헌부대사헌 ·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 도승지 등을 지냈다.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압력으로 출발을 연기하였다가 그 해 말에 청나라의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Cleveland, S. G.)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계속된 청나라의 압력으로 1889년에 귀국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1892년 전환국관리(典 珤 局管理), 1894년 호조판서 · 교정청당상 ·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갑오경장으로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회의원이 되었다.

이 해 11월 제2차 김홍집내각(第二次金弘集內閣)의 학무대신이 되고, 1895년 김홍집내각이 붕괴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다. 왕궁호위병 교체문제로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일본의 협조로 유임되었다.

같은 해 7월 내각총리대신을 사임하고 제3차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총리대신서리와 궁내부대신서리를 겸임하였다. 이 해 9월 내각이 의정부로 개편되자 참정대신 ( 參政大臣 )이 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해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월 황국협회 ( 皇國協會 )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되자 다시 내부대신이 되었다. 조선 말기의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이상재 ( 李商在 ) 등 개화파 인사들을 지원하였다.

편저로는 ≪ 죽천고 竹泉稿 ≫ · ≪ 해상일기초 海上日記草 ≫ · ≪ 일본내무성급농상무성시찰서계 日本內務省及農商務省視察書啓 ≫ · ≪ 일본내무성시찰기 日本內務省視察記 ≫ · ≪ 일본농상무성시찰기 日本農商務省視察記 ≫ 가 있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박기양(朴箕陽)

1856(철종 7) ∼ 1932.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 潘南 ). 자는 범오(範五), 호는 석운(石雲) · 쌍오거사(雙梧居士). 태보(泰輔)의 후손으로, 제억(齊億)의 아들이며, 제만(齊萬)에게 입양되었다.

1888년(고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가주서 ( 假注書 )로 직명이 없었으므로 잠시 군직인 부사정 ( 副司正 )을 지냈다. 그 뒤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와 겸문학 ( 兼文學 )을 지냈다.

189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고, 이조참의가 되었다. 동학혁명으로 전국이 소란할 때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명령으로 함흥감영의 교속(校屬)들이 원산 상인들을 토색했다는 진술로 인해 다음 해에 면직되었다.

건양과 광무 연간에 궁내부특진관 · 참령으로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 의정부찬정 · 궁내부대신서리를 역임하였다. 장례원경으로 인천 벌목 작업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독립협회가 창립된 뒤 임원으로 추가 선출되기도 했지만 곧 탈퇴한 듯 하다. 1904년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部) 등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상소를 올려 강력히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박제순 ( 朴齊純 ) 등을 매국적으로 엄하게 처벌하고 조약은 파기할 것을 상소하였다. 또한, 심순택 ( 沈舜澤 )과 함께 입궐해 연명상소를 계속하자 고종은 5적들과 잘 지내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반대를 계속했으므로 강제로 궁궐에서 쫓겨났다.

다시 재상 이근명(李根命)을 종용해 관료들을 데리고 정청(庭請)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6차에 걸친 조약 반대상소와 반대권유로 인해 일본헌병대에 잡혀 48일간 구금되었다. 그 때 묵비권을 행사하며 7, 8일 동안이나 단식을 강행하자 일본인들은 의사를 불러 조처하도록 하였다. 석방 후 수원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1910년 규장각제학과 조선귀족령에 의한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8년 서화협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921년 경학원부제학(經學院副提學), 1925년 중추원참의가 되었다. 금(琴) · 기(棋) · 행서(行書) · 묵죽 ( 墨竹 )에 능했고, 여러 번 조선미술전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작품으로는 〈 석죽도 石竹圖 〉 가 있고, 저서로는 ≪ 석운일기 ≫ 와 ≪ 석운종환록 ≫ 이 있다.

 

박찬익(朴贊翊)

1884(고종 21) ∼ 1949. 독립운동가. 별명은 박정일( 洛 精一) · 박창익(朴昌益) · 박순( 洛 純). 호는 남파(南坡). 경기도 파주 출신.

1904년 관립상공학교(官立商工學校)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의를 여러 차례 하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하였다. 1907년에 조직한 신민회 ( 新民會 )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1908년 4월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 때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박승익(朴勝益) 등 10여 명과 함께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해 겨울 만주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이상설 ( 李相卨 ) · 백순 ( 白純 )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대종교 도사교(都司敎) 나철 ( 羅喆 )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파동(靑坡洞)에 한국인 학교를 설치하고 애국사상과 자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직을 맡아보면서 포교에도 힘썼다.

1915년 중국인 교육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 북간도를 떠나 길림(吉林)으로 피신했다가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신규식 ( 申圭植 )과 제휴하여 동제사 ( 同濟社 )를 창설하고 노령(露領)의 동지와 긴밀하게 연락하였다.

1918년 12월 조소앙 ( 趙素昻 ) · 김좌진 ( 金佐鎭 ) 등 39인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3 · 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동녕 ( 李東寧 ) · 이시영 ( 李始榮 ) · 조소앙 등 30여 인과 함께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 육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1919년 4월에 조직된 한성임시정부 ( 漢城臨時政府 )에 박은식 ( 朴殷植 ) · 신채호 ( 申采浩 ) 등과 같이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9년 8월 정의단(正義團)이 서일 ( 徐一 ) 중심으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편되었을 때 외교처장직을 겸임하여 이 단체를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켰다.

1921년 7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업무를 전담, 대중외교에 전념하였다. 당시 외무총장 신규식이 국무총리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외교업무를 대행했던 것이다.

그 해 8월에는 안창호 ( 安昌浩 )와 같이 재정적으로 궁핍해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 임시정부경제후원회 ’ 를 조직, 의연금 모금에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

다.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9개 국이 참가한 워싱턴 태평양회의가 열렸을 때,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의 간사로 선임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 해 11월 신규식이 중국 호법정부(護法政府)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공세를 펼 때 사위인 그가 부사 ( 副使 )로 활동하여 중국 호법정부 총통 손문(孫文)으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아냈다.

1922년 9월에 신규식이 죽자 동제사 이사장이 되어 한중합작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1932년 윤봉길 ( 尹奉吉 )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이동녕 · 김구 ( 金九 )를 도피시켰다.

1933년 5월 김구와 같이 난징중앙군관학교(南京中央軍官學校) 구내에서 장개석(蔣介石)과 면담하여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여 한국인 청년을 입교시켜 군간부의 양성에 기여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이전시키고 10월 국무위원이 되었다. 1945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승희(朴勝喜)

신극운동(新劇運動)의 선구자.

 

 

 

朴趾源(박지원)  선생의 전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 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가난하게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필균이 손자 박지원을 맡아 양육하였다.
그러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생일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기되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 ·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 열하일기 ≫ 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그가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그가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朴彭年(박팽년)  선생의 전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成三問)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으며,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함께 거사를 모의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하고 상감(上監)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 그대가 나에게 이미 ‘ 신 ’ 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 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 :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 신 ’ 자를 쓴 일이 없다.」” 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 신 ’ 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였다. 그는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 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군비를 정비한 朴師昌(박사창) 선생 일화,

 

박사창의 자는 겸숙(兼叔), 반남박씨로 숙종 13(1687)에 태어났다. 경종 1(1721) 진사에 합격하였고, 영조 6(1730)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영조 7(1731) 지평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丞旨)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15(1739) 8월 동래부사로 부임한 박사창은 임진왜란 후에도 여러번 왜인들의 작폐가 심한 것을 알고 먼저 왜인들보다 우수한 군비를 갖춰야 한다고 판단, 동래부의 군사시설을 정비하였다. 군기(軍器)로 흑각궁 750, 화약 15백근, 화살줄 12조 등 많은 무기를 새로 만들고 보완, 보수는 물론 군관청, 수첩청, 무사청, 이노작대(吏奴作隊) 등의 조직을 완비케 했다.

 

또한 왜인들이 작폐를 제어하기 위해 연향대청, 초량객사, 동래부객사 등의 시설 일체도 갖추었다. 그리고 조정에 글을 올려 왜관내 왜인들이 함부로 관내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용두산 외곽 은산에 복병막 등 동서남북에 각 2개소씩 설치, 복병막을 세운 산을 지금도 복병산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박사창 부사는 1740년에 동래부지도 편찬하였다. 부산지방의 향 토사연구에 가장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서문에서 부사는 산천의 험이(險吏)와 군량, 과갑(戈甲), 기치(旗幟) 등까지 상세히 기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고 하였다. 영조 17(1741 정월에 퇴임해 갈 때까지 16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겼던 것이다.

 

 

朴趾源(박지원) 선생의 일화.

 

 18세기 후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43세 되던 1780(정조 4), 종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이 청나라 고종의 70세를 축하하는 사신단(使臣團) 일원으로 연경(燕京,북경)을 갈 때 따라갔다. 당시 사신단 일행은 중국인에게 박지원(朴趾源)을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그의 학문은 원숙한 경지에 있었다.

 

평생소원이던 중국 출장을 간 박지원(朴趾源).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그는 규정을 어기고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 중국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중국말을 못해 필담을 나눠야 하는 처지였으나 그의 기록정신은 투철했다.

이 부지런하고 꼼꼼한 실학자(實學者)는 보고 들은 것을 대강 흘리는 법이 없었다. 우연히 만난 중국인이 내놓은 음식 종류까지도, 그것이 10가지가 넘어도 일일이 거명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차려 들인 음식은 떡 두 쟁반, 삶은 거위 한 쟁반, 닭찜 세 마리, 돼지찜 한 마리, 신출 과일 두 쟁반, 양배알국 한 자배기, 임안 술 세 병, 계주 술 두 병, 잉어찜 한 마리, 백반 두 마리, 나물 두 쟁반에 값이 열두냥 이라고 한다.”    밥상 하나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구체적이니, 다른 것에는 오죽했겠는가.

 

지필묵을 지참하고, 거추장스런 도포 소맷자락을 걷어붙이고, 종이 위에 세필로 빠르게 적어 내려가는 민활한 선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것이야 말로 기자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이국적이거나 새로운 것, 조선과는 다른 것들을 찾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예리한 더듬이를 내밀었다

[출처] 출처;열하일기(熱河日記)’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그림 사랑|작성자 Sarah

 

 

 

朴趾源(박지원) 선생의 일화.

 

무엇이나 그저 지나가는 법이 없는 그러한 연암(燕巖)이 무심히 지나치리 없는 곳이 북경의 천주당(天主堂)이다. 사신(使臣)들이 묵는 옥하관에서 멀지 않은 천주당(天主堂)은 서양에서 전해준 첨단문화의 상징으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건립했다는 성당에는 벽과 천장에 성화(聖畵)가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서양 그림을 대했을 때 받은 감동을 그는 아주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신선하게 표현했다.<천장에 그려진 구름과 인물이 살아있는 듯 너무나 생생해 마치 내 가슴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것같았고 내가 숨긴 데를 꿰뚫어 맞힐까 봐부끄러워하였다.>

 라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인물화는 세밀했으나 평면적이었다. 이와 달리 서양화는 3차원적인 입체감이 특징이다. 실물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재현하려고 원근법과 음영법 이라는 기술을 구사하는 덕분이다.

그림 속 인물이 입체적인 특성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는 것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는 내가 숨긴 데를 맞힐까 봐 부끄러웠다.’고 적었다. 서양화 기법의 종교화를 처음 본 충격과 감동을 전하는데 이보다 더 멋진 문장이 있을까

[출처] 출처;열하일기(熱河日記)’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그림 사랑|작성자 Sarah

 

 

朴趾源(박지원) 선생의 일화.

 

박지원이 그때 본 성화(聖畵)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은 장면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그림에는 한 여자가 무릎에 대여섯 살 된 어린애를 앉혀두었다. 천장을 바라다 본 즉 수 없는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룽주룽 매달려 살결은 만지면 따뜻할 듯하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 쪘다.’라고 연암(燕巖)은 적고 있다  살결은 만지면 따뜻할 듯 하고.’ 등등 ....

이 대목에서 그림에서 체온을 느끼는 박지원(朴趾源)의 감수성과 그리고 그것을 미사여구가 아닌 따뜻하다는 아주 단순한 형용사 하나로 해결해버리는 대문장가의 명쾌함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박지원(朴趾源)은 당시 중국에서 약 2개월 동안 머물면서 보고 들었던 경험을 기행문 형식으로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열하일기(熱河日記)’.

책은 여행의 여정 구석구석을 기막힌 문장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그 현장감 있는 묘사가 마치 그 시절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출처] 출처;열하일기(熱河日記)’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그림 사랑|작성자 Sarah

 

 

 

 

朴趾源(박지원) 선생의 일화.

 

조선 후기 최고 문장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미술애호가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어보면 미술에 대한 박지원의 관심 영역의 깊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박지원(朴趾源)이 당대 화단의 흐름을 꿰뚫고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행 중 만난 청()나라 사람이 불쑥 조선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모은 화첩(畵帖)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각각의 그림을 그린 화가와 제목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박지원은 20점이 넘는 작품들을 보며 화가와 제목을 가르쳐주었는데, 그 목록이 열하일기 열상화보(洌上畵譜)에 아래와 같이 나와있다.

 

김식(金埴)의 한림와우도(寒林臥牛圖), 이경윤(李慶胤)의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 이정(李霆)의 녹죽도(綠竹圖)와 묵죽도(墨竹圖), 이징(李澄)의 노안도(蘆雁圖), 김명국(金明國)의 노선결기도, 윤두서(尹斗緖)의 연강효천도(烟江曉天圖), 임지사자도(臨紙寫字圖), 겸재 정선(鄭善)의 산수도(山水圖), 사시도(四時圖), 대은암도(大隱巖圖), 조영석의 부장임수도(扶杖臨水圖), 심사정(沈師正)의 금강도(金剛圖), 초충화조도(草蟲花鳥圖), 이인상(李麟祥)의 검선도(劍仙圖), 강세황(姜世晃)의 난죽도(蘭竹圖) 등이다.

 

그는 18세기를 풍미했던 문인 화가의 계보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화랑도 없었다. 그림 감상이라는 것은 미술을 애호하는 선비들이 몇몇 모여 소장하는 그림을 함께 보는 식이었다. 웬만큼 그림을 즐겨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줄줄 꿰지 못하였을 것이다.

 [출처] 출처;열하일기(熱河日記)’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그림 사랑|작성자 Sarah

 

 

 

朴趾源(박지원) 선생의 일화.

 

연암(燕巖)은 모두 7편의 제발(題跋)을 남겼는데, 이를 보더라도 연암의 서화완상(書畵玩賞)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제발(題跋)이란 그림에 써넣는 짤막한 시 형식의 글이다. 작가가 자신이 그림을 그린 배경, 동기 등을 보충하기 위해 직접 쓰기도 하지만, 감상자가 감상과 품평의 성격을 띤 글을 적기도 한다.

 

연암(燕巖)이 제발(題跋)을 남긴 그림은 제이당화, 천산엽기도발, 청명사하도발, 관재소장 청명상하도발, 일수재소장 청명상하도발, 담헌 소장 청명상하도발., 제우인국화시축 등 7편이다. 이 가운데 제발 4편을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 할애했다.

[출처] 출처;열하일기(熱河日記)’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그림 사랑|작성자 Sarah

 

 

 

朴世采(박세채) 선생의 일화.

 

현석동의 동명은 이곳 소동루에 살았던 박세채(朴世采)의 호에서 연유한다.

박세채(16311695)는 조선 중기 때의 대표적인 학자로 3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이며, 그의 가계는 고려 말의 명문세족 충신인 박상충(朴尙衷)의 후손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당쟁이 가장 치열하고 호란을 겪었던 격동기였으므로 그러한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18세 때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2년만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 학문을 배우고, 김장생(金長生)과는 사승(師繩)관계를 맺게 되었다. 1675년 박세채는 천거에 의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관직을 박탈당하고 6년 동안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은 박세채가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이 기간 중 독서기(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보편(春秋輔編)』『심학지결(心學支結)등을 지었다. 1680년에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 집의를 거쳐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박세채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기는 학구적 시기를 이루게 되었다. 양명학변(陽明學辨)』『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輔集)』『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 『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등을 저술하였다. 박세채의 입장을 정치적으로는 존주대의(尊周大義) 입장과 탕평론을 취하였고, 예학을 중시하였다. 그는 특히 파당적 대립에 대해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고 우려하며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크게 애도하며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였다. 박세채는 위의 저서 외에도 제의정본(祭儀政本)』『백록규해(白鹿規解)』『우계속집(牛溪續集)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와 문집70권을 남기고 있다. 그가 살았던 소동루는 현석동 77번지 강변도로 옆 언덕에 위치했다고 한다.

<다음: “에서 인용.>

 

 

 

朴䃞() 墓碣銘(묘갈명)

(贈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諱䃞墓碣銘

(증통정대부승정원좌부승지휘숙묘갈명)

 

朴䃞() 墓碣銘(贈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諱䃞墓碣銘(묘갈명(증통정대부승정원좌부승지휘숙묘갈명)

前面大字贈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行副司直 潘南朴公 䃞 之墓

淑夫人綾城具氏祔後

 

碑 文

公諱䃞 字支柱 其先羅州潘南縣人 考諱秉鈞 洪州判官 妣興陽柳氏 都染署丞 禎女 祖諱葵 禮曹參判 曾祖諱訔 左議政 錦川府院君 高祖諱尙衷 麗朝直提學

公以 正統甲子生 早失怙恃 授室于安東府具氏家 司勇益命女 自京移寓于府北佳邱里村 嘉靖丙戌卒 壽八十三 葬紙洞 坤坐原 蔭忠義衛司直 以孫 承任貴 贈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 配 贈淑夫人 生甲子 卒甲午 壽九十一 祔公墓後

三男 琛司直 璡嘉善 珩進士 贈參判 二女 朴文老 李旱雨 司直二男 承張忠義衛 紹張司直 嘉善四男 承權 承樞奮順 承枰 承栻 參判 七男 承文 訓導 承健 察訪 承侃 司成 承俊 進士 承仁 承任 大司諫 承倫 禦侮 曾孫聃壽 麟壽 皆司直 漉嘉善 澡進士 玄孫從龍判官 仲胤生員 貞胤通政 檜茂都事 樅茂進士 士龍嘉善 五代 琂進士 稶宣傳官 大亨奉事 烶參奉 燉進士 六代 忠基參奉 仁基新及第 外曾孫 司諫 權春蘭 縣監 李德弘 通禮權斗文 承旨金中淸 贈都承旨 高從厚 尤著於乎 公之歿垂 二百禩 潜光幽德 莫之考子孫之散處近邑者 數百餘人 豈非所謂積者厚而然歟

崇禎紀元後百三十三年 庚子

玄孫 檜茂 撰

 

증통정대부승정원좌부승지 휘 숙 묘갈명

()의 휘()는 숙()이요 자()는 지주(支柱)이고 선조(先祖)는 나주(羅州) 반남현인(潘南縣人)이다. ()의 휘()는 병균(秉鈞)이며 홍주판관(洪州判官)이요 비()는 흥양류씨(興陽柳氏)이니 도염서승(都染署丞) ()의 딸이다. ()의 휘()는 규()이니 예조참판(禮曹參判)이요 증조(曾祖)의 휘()는 은()이니 좌의정(左議政)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상충(尙衷)이니 고려말(高麗末)에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은 세종 26(1444)년에 출생하여 조년(早年)에 부모(父母)을 여의고 한양(漢陽)에서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佳邱里)에 낙향(落鄕)하여 능성구씨가(綾城具氏家)에 장가드니 사용(司勇) 익명(益命)의 딸이다. 중종 21(1526)년에 졸()하니 향년(享年) 83세로서 덕동 곤좌(德洞 坤坐)에 장사를 지냈다. ()은 부사직(副司直)이었는데 손자인 승임(承任)의 귀현(貴顯)으로 인()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부인(夫人)은 사후(死後)에 숙인칭호(淑人稱呼)를 받은바 갑자(甲子 1444)년에 출생하여 갑오(甲午 1534)년에 졸하니 91세로서 공()의 묘후(墓後)에 부장()하였다.

슬하에 32녀 중 장자인 침()은 충의위(忠義衛) 어모장군(禦侮將軍) () 충좌위(忠佐衛) 사직(司直)이고, ()은 노직가선(老職嘉善)이며, ()은 성균 진사(成均 進士)로 증() 이조참판(吏曹參判)이고 사위는 박문노(朴文老), 이한우(李旱雨)이다. ()은 슬하(膝下)32녀가 있으니 아들은 충의위(忠義衛) 사직(司直) 승장(承張) 사직(司直) 소장(紹張) 문석(文石)이며, 사위는 이영(李英) 권세무(權世茂)이다. ()43녀가 있으니 아들은 승권(承權) 승추(承樞) 승평(承枰) 승식(承栻)이고, 사위는 문계종(文繼宗) 안노(安輅) 금응상(琴應商)이다. ()7남을 두었으니 승문(承文) 승건(承健) 승간(承侃) 승준(承俊) 승인(承仁) 승임(承任) 승륜(承倫)이다.

증손(曾孫) 담수(聃壽)는 충의위(忠義衛) 부사직(副司直)이고 인수(麟壽)는 부사직(副司直)이요. 녹은 노직가선대부(老職嘉善大夫)이며 조는 진사(進士). 현손(玄孫) 종용(從龍)은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이요. 중윤(仲胤)은 생원(生員)이며 정윤(貞胤)은 통정(通政)이고 회무(檜茂)는 도사(都事)이며 종무는 진사(進士). 사용(士龍)은 가선호군(嘉善護軍)이며 5대손(五代孫) 언은 진사(進士)이고 욱()은 선전관(宣傳官)이며 대형(大亨)은 봉사(奉事)요 정은 참봉(參奉)이며 돈()은 진사(進士)이다. 그리고 6대손 충기(忠基)는 참봉(參奉)이요 인기(仁基)는 신급제(新及第)이며 외증손(外曾孫)으로 사간(司諫)에 권춘란(權春蘭) 현감(縣監)에 이덕홍(李德弘) 통례(通禮)에 권두문(權斗文) 승지(承旨)에 김중청(金中淸) 증 도승지(贈 都承旨)에 고종후(高從厚)등이 더욱 드러났다.

()이 서거(逝去)하신지 200년에 공()의 숨은 덕행(德行)은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자손(子孫)들이 근읍(近邑)에 산재(散在)하여 수백 여인(餘人)에 이르니 어찌 후덕(厚德)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는가?

 

경자(庚子 1660)년 현손(玄孫) 회무(檜茂) 짓다.

 

 

 

朴秉鈞(박병균) 墓碣銘(묘갈명)

 

朴秉鈞(박병균) 墓碣銘(묘갈명)

 

洪州判官諱秉鈞墓碣銘(홍주판관휘병균묘갈명)

 

前面大字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行奉直郞洪州判官 潘南朴公 秉鈞之墓

配贈淑人興陽柳氏之祔

 

碑 文

吾朴氏世居羅之潘南有諱宜及第起家至直提學尙衷學行名節事具前史夫人李氏稼亭公穀女 子左議政訔佐 太宗策勳封錦川府院君夫人周氏判書彦邦女 子參判葵夫人邊氏判事顯女卽公考妣 公諱秉鈞字子平蔭仕轉至奉直郞司醞暑令通判洪州而卒

贈左通禮配興陽柳氏 贈淑人曾祖王麗名臣濯祖郎將㵛考都染署丞禎妣密陽朴氏上一子䃞副司直贈左副承旨三壻別坐金珸進士金進孝內禁吳益師內外孫曾共百數十餘人略記于後嗚呼公以顯閥國名家早踐流品言行施措必有可觀而莫之考嘗聞公夫婦一時夭逝孤幼無托京外伯叔分育而嫁娶之盖承旨居安東姉妹歸在坡忠全三州宜乎於公平生未及詳矣然其梗槪得之傳聞者必多今之存者蒙無授受生卒除拜亦皆泯焉慢先忘遠之罪斯極痛哉

公墓在高陽圓塘里實柳氏族山也雙墳面西流派散遠失於省護頹塌欲平承任謀欲改營牧畿始克就焉因樹石記其陰以示門裔於無窮云

孫琛禦侮璡嘉善老職珩進士 贈參判曾孫忠義承張訓導承文察訪承健正承侃進士承俊外曾孫進士金仁卿郡守金汴生員安輅外玄孫水使朴自芳博士金復慶學諭權春蘭正字權斗文

萬曆己卯 八月 日

曾孫 承任 撰

承倫 書

 

홍주판관 휘 병균 묘갈명

우리 박씨(朴氏)는 세대(世代)로 나주(羅州)의 반남(潘南)에 살아서 휘() ()께서 급제(及第)하시고 가문(家門)을 일으키시니 직제학(直提學) () 상충(尙衷)에 이르러서 학행(學行)과 절의(節義)가 역사(歷史)에 오르게 되었다.

부인(夫人) 이씨(李氏)는 가정공(稼亭公) ()의 여()로써 자()는 좌의정(左議政) () ()이니 태종(太宗)을 도와서 공신(功臣)이 되어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수봉(受封)하였으며 부인(夫人) 주씨(周氏)는 판서(判書) 언방(彦邦)의 여()이다. 그의 자()에 참판(參判) () ()는 부인(夫人)이 변씨(邊氏)니 판사(判事) ()의 여()인데 바로 공()의 고비(考妣)이시다.

()의 휘()는 병균(秉鈞)이요 자()는 자평(子平)이니 음사(蔭仕)로서 봉직랑(奉直郞) 사온서령으로 전임(轉任)되어 홍주판관(洪州判官)이 되었다가 졸()하시니 증 좌통례(贈左通禮)이고 배()는 흥양유씨(興陽柳氏) 증 숙인(贈淑人)인데 증조(曾祖)는 고려명신(高麗名臣) ()이고 조()는 낭장(郎將) 선이며 고()는 도염서승(都染署丞) ()이요 비는 밀양박씨(密陽 朴氏)이시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숙()이다. 공은 부사직(副司直)으로서 증 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이고 3()는 별좌(別坐) 김오 진사(進士) 김진효(金進孝) 내금(內禁) 오익사(吳益師)에게 출가를 하였다. 증손(曾孫)은 수 십 여명(數十餘名)에 이르는바 뒤에 현관(顯官)만 부기(附記)한다.

아아! ()은 현국(顯國)의 명가(名家)로서 조년(早年)에 관직(官職)을 지냈으니 언행(言行)에 반드시 가관(可觀) 할 바가 있을 것이나 상고(詳考)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찍이 듣건데 공()의 부부(夫婦)가 일시(一時)에 요서(夭逝)하시니 고애(孤哀)들은 무의무탁(無依無托)해서 서울 외 백숙(外伯叔)이 길러서 가취(嫁娶)시켰다 고 한다. 대개 좌부승지(左副承旨)는 안동(安東)에 살고 자매(姉妹)들은 출가(出嫁)해서 파주(坡州) 공주(公州) 전주(全州)에 살았다고 하니 공()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은 모르는 것이 당연(當然)하다. 그러나 그의 경개(梗槪)를 전문(傳聞)한 자()는 반드시 많을 것이나 지금(至今)에 있는 것은 아득히 수수(授受)한바가 없으니 생졸(生卒)이나 제배(除拜)한 년대(年代)도 또한 알 수가 없어 선조 사적(先祖史蹟)을 잊고 게을리 한 죄()는 자손으로서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의 묘()는 고양군 원당리에 있으니 실()은 류씨가(柳氏家)에서 장사(葬事)지냈다. 쌍분(雙墳)으로서 서향(西向)인데 자손들이 원지(遠地)에 산재(散在)해서 수호(守護)하지를 못하여 능이(陵夷)하게 되었음으로 나 승임(承任)이 묘()를 개축(改築)하고서 치석(治石)을 하고 음덕(陰德)을 기리는 문구(文句)를 새기어 무궁(無窮)토록 후손들에게 보이는 바이다.

()에 침()은 충의위(忠義衛) 어모장군(禦侮將軍) () 충좌위(忠佐衛) 사직(司直) ()은 노직가선(老職嘉善)이며 형()은 성균 진사(成均進士) ()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이다. 증손(曾孫)에 충의위(忠義衛) 사직(司直) 승장(承張), 사직(司直) 소장(紹張), 분순(奮順) 승추(承樞), 훈도(訓導) 승문(承文), 찰방(察訪) 승건(承健), 사성(司成) 승간(承侃), 진사(進士) 승준(承俊) 외 증손(外 曾孫)에는 진사(進士) 김인경(金仁卿), 군수(郡守) 김변, 생원(生員) 안로(安輅) 등이고 외 현손(外 玄孫)에는 수사(水使) 박자방(朴自芳), 박사(博士) 김복경(金復慶), 학유(學諭) 권춘란(權春蘭), 정자(正字) 권두문(權斗文) 등이다.

 

증손 승임(承任) 짓고 증손 승륜(承倫) 쓰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7

雨(우)

31

鐘(종)

35

圭(규)

28

天(천)

32

淳(순)

36

鎭(진)

29

春(춘)

33

榮(영)

37

洙(수)

30

憲(헌)

34

熙(희)

38

來(래)

 

 

 

 

1985년 인구조사 결과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28,395가구, 118,8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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