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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박:상주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상산:상주박씨)

 

 

본관(本貫): 商山(상산):상주(尙州)

시조(始祖): 박언창(朴彦昌)

유래(由來):

 

商山(상산):상주(尙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서쪽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이다.

 

상주 박씨(尙州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인  언창(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

당시 사벌주(沙伐州)는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의 각축장(角逐場)으로 화(化)하여 경명왕은 둘째  아들인 언창을 사벌방어장(沙伐防禦將)으로 삼아 사벌주의 수호(守護)를  명(命)하자, 그는 직접 군대(軍隊)를 이끌고 견훤(甄萱)을 격퇴시킨 후 지금의 사벌동(沙伐洞)과 흔국촌(欣國村)에  방위본영(防衛本營)을 두고 병풍산성(屛風山城)·이부곡산성(吏部谷山城)·자산산성(子山山城:  일명 자양산성)  등을  축조(築造), 제반군비(諸般軍備)를 강화하여 내침하는 적과 대항하였으나, 고려가 문희(聞喜: 문경)와 고창(古昌: 안동)을, 후백제  견훤은 대야(大耶: 합천)·영천(靈川:  고령)·고울(영천)·일선(一善: 선산)을 점거함으로써 신라의 국세(國勢)는  급전쇠약해져 낙동강(洛東江) 동쪽으로 축소되었다.

그에 따라  사벌주는 본국(本國)과의  교통(交通)이 두절되고 고립상태에  빠짐으로써 언창은 918년(경명왕 2) 자립으로 사벌국(沙伐國)을 세워  국도(國都)를 사벌동(沙伐洞)과 흔국촌(欣國村)에 정(定)하고 성루(城壘:  사벌왕성) 및  궁전(宮殿)을 축건하여  둔진산(屯陣山)을 군사(軍士)의  주둔지로 수비의 완벽을 기했다. 이때  견훤과 그의 아버지인 아자개(阿慈介)가 부단히  내침함에 대하여 사벌왕은 10여년  간 항거(抗拒)하였으나  927년(경순왕 3) 9월  낙동강을 도하(渡河)하여  급습해 온 견훤 군사를 맞아 싸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항전(抗戰) 13년, 재위 11년만에  패망(敗亡)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욱(朴昱)

사벌왕 언창(彦昌)의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예부상서(禮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박원작(朴元綽)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문신. 1032년(덕종 1) 상사봉어(尙舍奉御)로 있으면서 왕에게 혁거(革車 : 兵車)·수질노(繡質弩)·뇌등석포(雷謄石砲)를 제작할 것과 팔우노(八牛弩)·이십사반병기(二十四般兵器)를 변방의 성에 설치할 것을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1040년(정종 6) 서면병마도감사(西面兵馬都監使)로 재임하면서 수질구궁노 ( 繡質九弓弩 )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었는데, 지극히 신통하고 교묘하다고 하여 상을 받고 그 무기는 동서변진(東西邊鎭)에 설치되었다. 이밖에도 천균노(千鈞弩)를 제작하기도 하여 병기제작에 공적이 많았다.

 

박성걸(朴成傑)

원작의 아들 성걸(成傑)은 문종(文宗)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박번(朴蕃)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번(蕃: 시중 성걸의 아들)과 정국호사공신(靖國護社功臣)에 추봉(追封)된 회절(懷節)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박순충(朴純沖)

회절의 아들 순충(純沖)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박견(朴甄)

덕천창부사(德泉倉副使)를 역임.

 

박건

첨의정승(僉議政丞) 원정(元挺)의 아들 전은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전법총랑(典法摠郞)에 올랐다.

 

박여

건의 아우 여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박안신(朴安信)

1369(공민왕 18) ∼ 1447(세종 2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안신(安信), 자는 백충(伯忠). 원정(元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천( 徙 )이고, 아버지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문로(文老)이며, 어머니는 박사덕(朴思德)의 딸이다.

1393년(태조 2) 생원이 되고 1399년(정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 ( 史官 )으로 등용, 1408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어 대사헌 맹사성 ( 孟思誠 )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 ( 趙大臨 )과 목인해(睦仁海)의 모반사건을 왕에게 알리지 않고 처리하다가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그가 옥중에서 “ 직분을 완수하지 못하여 죽음을 감수하나 임금님께서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말을 들을까 두렵도다. ” 라고 쓴 시가 태종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황희 ( 黃喜 ) · 하륜 ( 河崙 ) · 권근 ( 權近 ) · 성석린 ( 成石璘 ) 등의 무마로 유배에 그쳤다.

뒤에 집의 ( 執義 ) ·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역임하고, 1424년(세종 6)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도중에서 침입해온 해적을 위력으로 물리쳐서 무사히 귀환하게 되었다. 귀국 후 우사간에 임명되었고, 이어 공조 · 예조 · 병조의 참의, 병조 · 예조 · 형조 · 공조 · 이조의 참판을 거쳐 대사헌, 황해도 · 전라도 · 충청도 · 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39년 형조판서, 이듬해 우참찬, 1442년 공조판서로 나이가 많아 치사(致仕 : 벼슬길에서 물러남)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이조판서에 전직되어 1444년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박이창(朴以昌)

∼1451(문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할아버지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문로(文老)이며, 아버지는 대제학 안신(安臣)이다. 1417년(태종 17)에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한림원 ( 翰林院 )에 보직되었다. 1420년(세종 2) 세자시강원주서(世子侍講院注書)로서 사관 ( 史官 ) 안수사(安修巳)와 함께 의금부에서 국문 ( 鞫問 )을 받고 장(杖) 100대에 처하여졌다.

1426년 전라도에 감찰로 파견되어 조희정(趙希鼎)·양맹지(梁孟智)·이신(李伸)·문헌(文獻) 등이 재물을 감춘 것을 탄핵하였다. 1430년 4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1434년 내자소윤(內資少尹)으로서 경기·황해도에 파견되어 진휼(賑恤 : 가뭄이나 재해시의 구제)의 상황을 살폈다. 1443년 우부승지, 1445년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447년 인수부윤(仁壽府尹)·공조참판·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0년 호조참판·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중추원부사에서 형조참판이 되어 평안도를 좌우로 나누어 각기 도절제사를 보내고, 강계와 삭주(朔州)에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물을 보내기를 청하였다. 같은 해 경창부윤(慶昌府尹)·평안도감사가 되었고, 9월에는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갈 때 먼 길에 대비, 많은 양곡을 가져간 것이 죄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붙잡히자 국법을 어긴 것을 뉘우치고 자결하였다.

 

박세훈(朴世勳)

1488(성종 19) ∼ 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훈지(勳之), 호는 송촌(松村). 아버지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화(士華)이며, 어머니는 현감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 주동의 효아(鑄洞孝兒) ’ 라는 칭송을 받았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부모를 정성껏 받들어 봉양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아버지가 죽자, 남양 ( 南陽 )에 있는 무덤 밑에 초막을 짓고 시묘 ( 侍墓 )를 하면서 3년 동안 죽만 먹고 애통하게 지내니 고을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을 하였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해서 사마시 ( 司馬試 )에 합격을 하고는 그대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19년(중종 14)에 그의 문명이 널리 알려지자 조광조 ( 趙光祖 ) 등이 별과(別科)에 천거하였는데,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조정에서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에 임용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박세희(朴世熹)

1491(성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 안의 ( 安義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미창(美昌)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화(士華)이며,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515년에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였으며, 같은 해에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1517년에 정언에 임명된 후 이조좌랑·충청도도사·장령·홍문관응교를 역임하고, 1519년에 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 趙光祖 )의 일파로 몰려 처음에는 상주로 유배되었으나 다시 강계에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젊어서부터 조광조와 종유(從遊)하였으며, 김식 ( 金湜 )· 김정 ( 金淨 )· 김구 ( 金絿 ) 등과 늘 교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박세후(朴世煦)

세후(世煦)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우고 중종(中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양현감(光陽縣監)과  공조정랑(工曹正郞)

을 거쳐 명종(明宗)때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 수군 절도사를 지냈다.

 

박양생(朴良生)

예의판서(禮儀判書) 돈(惇: 상산부원군 여의 손자)의 아들  양생(良生)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박광우(朴光佑)

1495(연산군 1) ∼ 1545(명종 즉위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 語 齋) · 잠소당(潛昭堂) · 소당(昭當). 할아버지는 정(正) 정지(貞地)이고, 아버지는 생원 인(璘)이며, 어머니는 장유성 ( 張有誠 )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형 광좌(光佐)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상처를 입고 옷을 찢어서 머리를 싸매고 정부외랑(政府外廊)에 앉아서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 ( 李澯 )과 첨지 김로(金魯)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이 신원소를 불러 쓰게 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용솟음치듯 함으로써 그의 절의와 문장을 나타내었다.

1525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36년 재령군수로서 문장에 능하여 원접사 ( 遠接使 )를 수행하였고, 1545년 사간이 되었으나 을사사화로 하옥, 이어 동선역(洞仙驛)으로 유배되던 중 장독으로 인하여 돈화문 밖에서 죽었다.

1547년 가산이 몰수되고, 1570년 신원되었다. 그는 일찍이 조광조 ( 趙光祖 )와 교분이 있었으며, 뒤에는 이언적 ( 李彦迪 )과 같이 화를 당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절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송천서원 ( 松泉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절 ( 貞節 )이다.

 

박수(朴受)

광우의 아들 3형제 중 척암 김근공(金謹恭)의 제자였던 맏아들 수(受)가  주역(周易)에 능통하여 학명(學名)이 높았다.

 

박의(朴宜)

의(宜)는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역임.

 

박은생(朴殷生)

부사(府使)를 지냄.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64

宗(종)

70

演(연)

76

東(동)

65

永(영)

71

根(근)

77

熙(희)

66

穆(목)

72

炯(형)

78

培(배)

67

烈(열)

73

垠(은)

79

鎬(호)

68

在(재)

74

鎭(진)

80

 

69

鉉(현)

75

洙(수)

81

 

 

 1985년 인구조사 결과 상주·상산박씨(尙州·商山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5,497가구, 23,6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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