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순창박씨)
본관(本貫): 순창(淳昌)
시조(始祖): 박제세(朴濟世)
유래(由來):
순창(淳昌)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쪽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임.
순창 박씨(淳昌朴氏)는 고려조에서 순창군(淳昌君)에 봉해진 박제세(朴濟世)의 후손으로 전해지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조선 때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을 역임한 두간(斗幹)을 일세조(一世組)로 계대(繼代)하고 선조(先祖)의 봉군지(封君地)인 순창(淳昌)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천복(朴天福)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냄.
박학례(朴鶴禮)
통정대부(通政大夫)
박구대(朴球大)
소위장군(昭威將軍) 의손(義孫: 두간의 손자)의 둘째 아들 구대(球大)는 판결사(判決事)를 역임.
박효겸(朴孝謙), 박지원(朴枝元)
첨정(僉正)을 지냄.
박창근(朴昌根)
군수(郡守)
박창술(朴昌述)
감찰(監察)
박창로(朴昌魯)
부사(府使)
박문규(朴文逵)
1805(순조 5)∼1888(고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제홍(霽鴻), 호는 운소자(雲巢子) 또는 천유자(天游子). 아버지는 유형(有馨)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한번 글을 읽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고, 장성한 뒤 채전(菜田)을 경영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큰 장대(莊臺)를 세우고 첩을 두며 친구들과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여 수년 만에 가산을 탕진하였다.
그러나 40세에 이르러 시 공부를 시작하여 고시 ( 古詩 ) 수만편을 외우고, 근체시 ( 近體詩 )에 능하였다. 그의 시는 청나라의 한림 ( 翰林 ) 동문환(董文煥)으로부터 극찬을 받아, 그의 문명이 청나라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1887년(고종 24) 개성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특명으로 병조참지에 등용되니, 이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이듬해 가선대부에 올랐다. 성격이 깨끗하고 허욕이 없었다.
후진에는 윤진우(尹鎭佑)·김재희(金載熙)·최중건(崔中建)·서창동(徐昌東)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운소산방시초 雲巢山房詩草≫·≪천유집고 天游集古≫가 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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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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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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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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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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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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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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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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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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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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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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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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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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淳(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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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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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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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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燦(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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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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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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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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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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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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採(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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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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炳(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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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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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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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창 박씨(淳昌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415가구, 1,7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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