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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순천박씨)

 

 

본관(本貫): 순천(順天)

시조(始祖): 박영규(朴英規)

유래(由來):

 

순천(順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임.

 

순천 박씨(順天朴氏)의 시조(始祖)  영규(英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아들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사위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創業)에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좌승(左丞)에 올라 승주군(昇州君)에 봉해졌으며, 후손 난봉(蘭鳳)은 평양(平陽: 순천의 옛 지명)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영규(英規)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순천(順天)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으나,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숙정(淑貞)을  일세조(一世組)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원룡(朴元龍)

원룡(元龍)은 시랑(侍郞)을 역임.

 

박원상(朴元象)

원상(元象)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박석명(朴錫命)

1370(공민왕 19) ∼ 1406(태종 6).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이헌( 蓬 軒). 할아버지는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천상(天祥)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가흥(可興)이다.

1385년(우왕 11) 승보시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여 1390년(공양왕 2) 우부대언 ( 右副代言 ) · 병조판서를 지냈다. 1392년(태조 즉위년) 조선이 건국되자,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 : 공양왕의 아우)의 사위였던 관계로 7년간 은거하였다.

1399년(정종 1) 고려의 구신들이 등용되자 좌산기상시 ( 左散騎常侍 )로 기용되고 안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하자 그 교서를 가져가서 태종을 옹립하였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3등이 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뒤, 지신사 ( 知申事 )를 거쳐 1405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듬해 함경도선위사 · 전라도도체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젊었을 때 정종과 같이 이불을 덮고 자는데 꿈에 누런 용이 옆에 있으므로 돌아다보니 태종이었다. 그때부터 기이하게 여겨 서로 친구로 더욱 두텁게 지냈다. 태종이 임금이 되면서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지의정부사 · 판육조사(判六曹事)에 올랐다. 평소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깊었는데, 특히 태종에게 황희 ( 黃喜 )를 승지로 천거한 것이 유명하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박중선(朴仲善)

석명의 손자가 세조(世祖)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했던 중선(仲善)이다.

 

박중림(朴仲林)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한석당(閑碩堂). 숙정(淑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상(元象)이고, 아버지는 목사 ( 牧使 ) 안생(安生)이며, 어머니는 김휴(金休)의 딸이다. 아들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팽년(彭年)이다.

1417년(태종 17) 생원시에,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장원, 142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 1428년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그 뒤 사간 · 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42년 전라도관찰사, 1451년(문종 1) 경기도관찰사 등 외직으로 나갔다가 1452년(단종 즉위년) 내직으로 돌아와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 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이 되었다. 이어서 청렴하고 강직한 성격이 널리 알려져 당시 정승인 황보 인(皇甫仁) · 김종서 ( 金宗瑞 ) · 정분(鄭芬) 등의 추천으로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인 1453년 예문관대제학 · 공조판서 겸 집현전제학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과 형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국법 집행이 엄정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크게 통분해 벼슬을 내놓겠다는 뜻을 밝히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그에게 이조판서를 주어 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세조는 노해 그를 한직인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세조 찬위(簒位 : 왕위 자리를 빼앗음.)에 크게 통한을 품어오던 그는 아들 팽년과 그의 가르침을 받은 성삼문 ( 成三問 ) · 하위지 ( 河緯地 )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은밀히 추진하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김질(金 銷 )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가자 그도 사육신과 함께 잡혀 그 달 8일에 모두 군기감 ( 軍器監 )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고 아들 인년(引年) · 기년(耆年) · 대년(大年) 등도 처형되었다.

그 뒤 1739년(영조 15) 신원(伸寃)되어 옛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84년(정조 8) 예조판서 엄숙 ( 嚴璹 )의 상소에 따라 벼슬을 높여 좌찬성 ( 左贊成 )에 증직되었다. 1791년 단종 충신으로 뽑혀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등재되었다.

장릉(莊陵 : 단종의 능)의 충신단(忠臣壇) 정단(正壇)에 배향되고,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박팽년(朴彭年)

1417(태종 17)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 馬 ), 호는 취금헌(醉琴軒). 회덕 ( 懷德 ) 출신. 원상(元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생(安生)이고, 아버지는 중림(仲林)이며,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관직 활동〕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 ( 津寬寺 )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케 하던 휴가 제도)를 하였다.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 ( 申叔舟 ) · 최항 ( 崔恒 ) · 유성원 ( 柳誠源 ) · 이개 ( 李塏 ) · 하위지 ( 河緯地 )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이름높은 선비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 ·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 慶會樓 )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 ( 成三問 )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으며,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 兪應孚 ) · 김질(金 銷 )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 ( 昌德宮 )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 ( 雲劍 )으로 성승 ( 成勝 ) · 유응부 · 박쟁(朴 怨 )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해 뒷날 관가(觀稼 :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 〔 進賜 〕 라 하고 상감(上監 :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 그대가 나에게 이미 ‘ 신 ’ 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 고 하자, 그는 “ 나는 상왕(上王 :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 신 ’ 자를 쓴 일이 없다. ” 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 신 ’ 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 · 하위지 · 유성원 · 이개 · 김문기 ( 金文起 ) · 성승 · 박쟁 · 유응부 · 권자신 ( 權自愼 ) · 송석동(宋石同) · 윤영손(尹令孫) · 이휘 ( 李徽 )와 자신의 아버지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 · 순(珣) · 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 · 처 · 제수 ( 弟嫂 )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 : 도에 어긋나는 큰 역적)의 가족이라 해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사후 명예 회복〕 단종 복위 운동이 있을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 ( 南孝溫 )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것이 ≪ 추강집 秋江集 ≫ 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 뒤 1758년(영조 34) 다시 자헌대부 ( 資憲大夫 )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러나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 : 가문이 없어짐)이어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 ( 文集 )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 추강집 ≫ 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글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 집대성 ’ 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문집이 전하지 않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 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박원종(朴元宗)

1467(세조 13) ∼ 1510(중종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백윤(伯胤). 할아버지는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거소(去疎)이고, 아버지는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 중선(仲善)이며, 어머니는 행호군(行護軍) 허곤(許 渠 )의 딸이다.

공신 가문에서 태어나 음보(蔭補)로 호군(護軍)이 되고, 1486년 선전관 ( 宣傳官 )에 올랐다. 이 해 무과에 급제하면서 성종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492년 승정원동부승지로 발탁되자 사헌부에서 나이도 어린데다가 무과 출신에게 동반의 3품직을 제수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해 서경 ( 署經 )을 보류하자, 성종이 다시 공조참의로 발령하였다. 이에 대해 사헌부가 다시 반대하자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

그 뒤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우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재정의 긴축 문제 등 시무책(時務策 : 당시 해결해야할 긴급한 정책 과제)을 건의해 실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연산군 6)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동지중추부사 · 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502년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고 1506년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 ( 成希顔 ) · 유순정 ( 柳順汀 )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 靖國功臣 )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進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 ( 李顆 )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 定難功臣 ) 1등이 되고 이듬해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대간들의 탄핵이 지나치다라고 건의해 이를 견제했으며, 이우증(李友曾) · 조윤손 ( 曺潤孫 ) · 이순 ( 李珣 ) 등을 천거해 임용시키기도 하였다.

1509년 왜적이 제주도 공마선(貢馬船)을 약탈하자, 이를 문책하기 위해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 ( 敬差官 )을 파견하자고 건의하였다. 또한 전라도 조운선(漕運船) 40여 척이 파선, 침몰하자 해운을 폐기하고 육지 운송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영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무신 출신이었지만 문장을 즐겼고 서화를 좋아해 수집에 힘썼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박이장(朴而章)

1540(중종 35) ∼ 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필(叔弼), 호는 용담 ( 龍潭 ) · 도천(道川). 한하(漢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식(埴)이고, 아버지는 승지 양좌(良佐)이며, 어머니는 성산 배씨(星山裵氏)로 별좌 ( 別坐 ) 은(垠)의 딸이다.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23세에는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 ( 德山 )에 갔으며, 1572년(선조 5) 사마시의 향시 ( 鄕試 )에, 이듬해 사마시의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1574년 노수신 ( 盧守愼 )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한 때 영숭전참봉(永崇殿參奉)으로 나갔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6년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 교리 ( 校理 ) 등을 지내고 1591년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 ( 金誠一 )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 10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지제교 ( 知製敎 ) ·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다음 해 이조좌랑, 이어서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직하였다.

1595년 이조정랑 ·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거쳐 1599년 사간원사간 ·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있을 때 홍여순 ( 洪汝諄 )을 탄핵하였다.

1601년 성균관전적(成均館正) ·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고 이듬해 사헌부집의 · 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弘文館直提學兼侍講院輔德) · 동부승지 · 참찬관을 역임하였다. 당시 그는 유영경 ( 柳永慶 )파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

1603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 · 이조참판 ·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 ( 鄭仁弘 )을 논계하였다. 이듬 해 대사간이 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 · 대사성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615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 그 뒤 성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경상도 초계 ( 草溪 )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했으며, 특히 시에 이름이 있었다. 저술로는 ≪ 용담집 ≫ · ≪ 정서절요 程書節要 ≫ · ≪ 육경여해 六經 起 海 ≫ 가 있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박광일(朴光一)

1655(효종 6)∼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 사헌부장령 상현(尙憲)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택고씨(長澤高氏)로 부민(傅敏)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천거로 내시교관 ( 內侍敎官 )·시강원자의(侍講院咨議)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권상하 ( 權尙夏 )· 정호 ( 鄭澔 ) 등과 교유하며 학문연구에 힘썼고, 왕명으로 경적(經籍)의 대전(大全)을 교증하였고, 또 주역고경을 교정하였다. 진천사(眞天祠)·남강사(南康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손재문집≫이 있고, 〈근사록차기 近思錄箚記〉·〈우암선생어록 尤庵先生語錄〉·〈나소변무록 羅疏辨誣錄〉·〈진호문답 晉湖問答〉·〈만덕수창록 晩德酬唱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박영서(朴永緖)

∼ 1624(인조 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성주(星州). 아버지는 이현(而絢)이다. 무과에 급제, 1620년(광해군 12) 옥구현감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 때 남이흥 ( 南以興 ) · 정충신 ( 鄭忠信 ) 등과 함께 반란군의 뒤를 따라 황해도 황주의 신교(新橋)에 이르러 이들과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이에 관군의 선봉장이었던 그는 단신으로 말을 몰아 적중에 돌입하여 이괄을 잡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말이 넘어져 포로가 되었다. 그는 이괄을 보고 “ 조정이 너를 부원군에 봉하고 부원수를 시켰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배반하였느냐. ” 고 꾸짖었다. 이괄과 한명련 ( 韓明璉 )이 그의 용기를 아껴 백방으로 회유하였으나 굴하지 않다가 살해되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박동명(朴東命)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시응(時應), 호는 매은당(梅隱堂). 아버지는 춘무(春茂)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조헌 ( 趙憲 )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공격하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여 언제나 선봉으로 나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전란이 평정된 뒤 선전관 ( 宣傳官 )을 거쳐, 태안군수·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형세가 위급해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죽었다.

나라에서 충용(忠勇)을 가상히 여겨 고향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게 하고, 공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박계창(朴繼昌)

선조의 특혜로 소격서참봉(昭格書參奉)에 등용됨.

 

박충후(朴忠後)

임란에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름.

 

박공구

효종(孝宗)의 스승.

 

박기정(朴基正)

정조(正祖)때 등과(登科)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내고 이의준(李義駿)·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하였음.

 

박민웅(朴敏雄)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功)을  세움.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0

鉉(현)

23

魯(노)

26

洙(수),淳(순)

源(원)

21

海(해)

24

圭(규)

27

相(상)

22

東(동)

25

鐘(종)

28

煥(환)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 박씨(順天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18,296가구, 75,8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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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문의 박.jpg 문의박씨(朴) 청남 14-08-27 3571
233 무안 박.jpg 무안박씨(朴) 청남 14-08-27 3159
232 면천 박.jpg 면천박씨(朴) 청남 14-08-27 2678
231 노성 박.jpg 노성박씨(朴) 청남 14-08-27 2438
230 나주 박.jpg 나주박씨(朴) 청남 14-08-27 2539
229 군위 박.jpg 군위박씨(朴) 청남 14-08-27 2669
228 구산 박.jpg 구산박씨(朴) 청남 14-08-27 3153
227 광주 박.jpg 광주박씨(朴) 청남 14-08-27 2265
226 고성 박.jpg 고성박씨(朴) 청남 14-08-27 3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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