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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문화류씨(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문화류씨)

 

 

본관(本貫): 문화(文化)

시조(始祖): 류차달(柳車達)

유래(由來):

 

류씨(柳氏)는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후예(後裔)로 전하며, 후손 신갑(辛甲)이 기자조선(箕子朝鮮) 때 요수(遼水)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평양(平壤)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서 은거(隱居) 하면서 <일토(一土)>를 따서 왕씨(王氏)로 변성하여 이름을 조명(祖明)이라 고치고 단군왕조(檀君王朝)에서 치민장(治民長)이 되어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25세손 수긍(受兢)은 기자조선 말엽에 사사(士師)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의관법도(儀官法道)를 제정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 평양을 버리고 남천하여 마한(馬韓)에 은둔하였는데, 당시 <일토초가자왕(一土草家者王)>이라는 동요가 나라 안에 떠돌자 이를 두려워한 기준이 일토산 아래에 살던 왕씨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수긍(受兢)34세손 왕몽(王蒙)이 아들 8형제 중 일곱째 아들 임을 데리고 지리산(智異山)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성()을 세번 변성하여야 후손들이 크게 번성한다고 계시(啓示)하자 왕()자 의 변형인 전(), ()으로 고쳤다가 다시 차()로 바꾸고 자기 이름을 무일(無一), 아들 임은 신을(神乙)로 고쳤다.

 

그후 무일(無一)33세손 승색(承穡)이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 좌상(左相)으로 국정(國政)을 다스리다가 809(헌강왕 1) 병부령(兵部令)으로 있던 왕의 숙부(叔父) 언승(彦昇)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헌강왕(憲康王)이 되므로 전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헌강왕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자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묵방동에 은신하고 조모님의 성()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로 고치고 이름을 색(), 아들은 숙()으로 고쳤다.

 

()6세손 해()가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할 때 사재(私財)를 털어 차() 1천 량을 제작, 군량과 함께 보급하여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우고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에 올랐으며, 태조 왕건은 <이차위달(以車爲達:차로써 목적을 달성)>의 뜻으로 )인 차씨(車氏)를 잇게하여 종적(宗籍)을 연안(延安)으로 하게 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에게는 류씨(柳氏)를 계승하고 본관(本貫)을 유주(儒州)로 하였으나 지명의 변천으로 유주가 문화(文化)로 개칭됨에 따라 문화(文化)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류공권(柳公權)

소감(少監) (:시조의 6세손)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 명종(明宗)때 정당문학(正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류관(柳寬)

1346(충목왕 2) 1433(세종 1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관(), 자는 몽사(夢思) · 경보(敬甫), 호는 하정(夏亭). 고려 명종 때 정당문학 ( 政堂文學 ) 공권(公權)7대손이며, 아버지는 삼사판관 안택(安澤)의 아들이다.

1371(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해 전리정랑(典理正郎) ·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고려 말기에 봉산군수 · 성균사예(成均司藝) · 사헌중승(司憲中丞)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이어 내사사인 ( 內史舍人 )으로 왕명에 의해 대학연의 大學衍義 를 진강(進講)하였다.

1397(태조 6) 좌산기상시 ( 左散騎常侍 ) · 대사성을 거쳐 다음 해 형조전서를 지냈다. 1401(태종 1) 대사헌으로서 상소해 불교를 적극 배척했고, 이어 간관을 탄핵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곧 다시 서용되어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무고를 받아서 문화에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1405년 전라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거쳐 형조판서로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를 겸했고, 1409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했으며, 이듬해 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그 뒤 참찬 · 찬성 등을 역임하고 1418(세종 즉위년) 다시 대제학으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이어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등을 거쳐 1421년 다시 대제학으로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다.

1423년 지춘추관사로 고려사 개수의 명을 받고,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 고려사 를 수교( 晩 校 : 다른 것과 비교해 교정함.)해 올렸다. 1425년 벼슬을 사직했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81세가 된 이듬해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

특히, 성품이 매우 청렴하고 청빈하였다. 한번은 장마로 집에 비가 줄줄 새자, 우산을 받쳐들고서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문화의 정계서원(程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하정집 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류계문(柳季聞)

1383(우왕 9)1445(세종 27).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숙행(叔行).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택(安澤)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관()이며, 어머니는 안씨(安氏)이다. 아버지 관이 원종공신 ( 原從功臣 )에 책봉된 이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훈구 가문(勳舊家門)의 후예이다.

1408(태종 8)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문한관(文翰官)을 역임했고, 이조정랑·의정부사인 등을 거쳐 1423(세종 5) 판사재감사 겸 지형조사(判司宰監事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이 때 도관정랑(都官正郎) 김유공(金有恭)과 함께 보충군(補充軍) 누락자를 심사하다 일 처리를 잘못해 일시 파면되었다.

다음해 재기용되어,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서 대호군 지함(池含)과 함께 야인 추장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회유하기 위해 동북면에 파견되었다. 많은 시련을 견디어내면서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해 조선 측의 제의를 관철시켰고, 이 해 다시 아목하(阿木河)에 같은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이어 사간원우사간이 되었으나, 문화현령 왕효건(王孝乾)을 통해 백성들의 공물 ( 貢物 )을 수탈하다가 일시 파면되었다. 곧 우의정이었던 아버지의 후원으로 좌사간에 다시 임용되었다. 이후 급격한 승진을 거듭해 1426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가 곧 소환되어 이조참의·형조참판 등을 거쳐 1430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대간 ( 臺諫 )의 관원과 함께 뇌물을 받고 장리(贓吏)인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태석균(太石鈞)의 고신 ( 告身 )에 서명했는데, 이 때문에 의금부의 치죄를 받고 직첩을 박탈당하였다. 2년 뒤 아버지의 간곡한 소청에 의해 다시 서용되었고, 이어서 강원도도관찰사·한성부윤 등을 거쳐 1437년 정조사 ( 正朝使 )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다시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을 때, 강원도도관찰사 재직시의 비행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440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장기간에 걸쳐 외직에 있었다는 점을 이유로 이를 사피(辭避 : 사양하면서 회피함.)하다 왕의 노여움을 크게 사 의금부에 하옥당하였다.

그 뒤 인수부윤(仁壽府尹호조참판·판한성부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43년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고, 2년 후 왕의 행궁(行宮)에 문안가다가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 길에서 갑자기 죽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고 하며, 글씨를 잘 써서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안지 ( 安止 최흥효(崔興孝) 등과 함께 금자법화경 金字法華經을 쓰기도 하였다.

, 대간으로 있을 때에는 불교의 폐해와 개선, 주자가례의 보급, 염리(廉吏)의 등용과 장리의 제거를 통한 민폐 제거, 공법 개정(貢法改正) 등을 주장해 당시 사회의 병폐를 많이 개선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상위직으로 진출하면서 일에 성실함이 없었고, 뇌물을 받고 불법을 저질러 자주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안숙(安肅)이다.

 

류권

계문의 아들 권은 참판(參判)을 지내다.

 

류담년(柳聃年)

계문의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中宗) 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류상운(柳尙運)

부자정승(父子政丞)으로 유명한 상운(尙運)은 좌랑(佐郞) 성오의 아들로 숙종 때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류봉휘(柳鳳輝)

봉휘(鳳輝)는 영조(英祖) <소론사대신(小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좌의정에 이르렀다.

 

류경(柳璥)

1211(희종 7) 1289(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천년(天年) 또는 장지(藏之). 정당문학(正堂文學) 공권(公權)의 손자이다. 과거에 급제해 고종 때 대사성 ( 大司成 )에 이르렀다. 유천우 ( 兪千遇 )와 함께 오랫동안 정방 ( 政房 )에 있으면서 특히 최항 ( 崔沆 )의 신임을 받았다.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崔 洑 )가 뒤를 이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행패를 부려 민심을 잃게 되자, 1258(고종 45) 별장 김준 ( 金俊 ) 등과 모의해 최의를 죽이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을 타도한 공으로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이 되어 우부승선 ( 右副承宣 )을 겸임하고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에 봉해졌다. 그의 고을 유주(儒州 : 황해도 文化)는 감무현(監務縣)에서 영현(令縣)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부터 정방을 편전(便殿)에 두고 전주(銓注 : 인물 등용과 배치 업무)를 장악해 국가의 기무(機務)를 결재하였다. 그 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고, 1259년 고종이 그의 집에서 병사하였다.

1262(원종 3)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 (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고, 이듬해 수태부 참지정사 태자태보(守太傅參知政事太子太保)를 거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269년 대사성 김구 ( 金坵 ) 등에게 임연 ( 林衍 )이 김준을 죽이고 공신이 된 사실을 비난했다가 이를 엿들은 환관 김경 ( 金鏡 )의 고발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는데, 얼마 뒤 강화로 이배되었다.

1270년 삼별초 ( 三別抄 )가 봉기했을 때 강화도에서 탈출해 돌아와, 삼별초와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던 왕이 크게 기뻐하며 후대하고 평장사 판병부사(平章事判兵部事)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파직되어 애도(哀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276(충렬왕 2) 첨의시랑 찬성사 감수국사 판판도사사(僉議侍郎贊成事監修國史判版圖司事)가 되었는데, 이 때 두 번이나 무고를 당했던 김방경 ( 金方慶 )을 구하였다. 1278년 찬성사 판전리사사(贊成事判典理司事)에 올라 은퇴할 것을 청해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말과 웃음이 흡족하고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나 원부(元傅) · 허공 ( 許珙 ) 등이 모두 그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다. 다만 재물을 많이 모아 한때 삼한 ( 三韓 )의 거부로 불리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문장에 뛰어나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등 4대의 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도합 4회에 걸쳐 지공거 ( 知貢擧 )를 역임하였다. 이존비 ( 李尊庇 ) · 안향 ( 安珦 ) · 안전(安 駟 ) · 이혼 ( 李混 ) 등이 모두 문생 ( 門生 )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류돈(柳墩)

경의 손자 돈()은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령군(始寧君)에 봉해졌다.

 

류만수(柳曼洙)

만수(曼洙)는 위화도 회군 때 공을 세우고 일등공신으로 찬성사에 올랐으나 제1차 왕자(王子)의 난 때 방원(芳遠)에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화를 당했다.

 

류정현(柳廷顯)

1355(공민왕 4)1426(세종 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여명(汝明), 호는 월정(月亭). 중찬 ( 中贊 ) ()4대손이며, 아버지는 문화군(文化君) ()이다.

고려 말에 음보로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전라도안렴사· 장령 ( 掌令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집의·좌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394(태조 3)에 상주목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병조전서(兵曹典書완산부윤을 지내고, 1404(태종 4)에 전라도관찰사·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1409년에 판한성부사를 거쳐 1410년에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예조판서·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평양부윤·대사헌·이조판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병조판서·찬성사 등 요직을 거친 뒤 1416년에는 좌의정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419(세종 1)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는 삼군도통사에 임명되었고, 1424년에는 영돈녕부사 겸 판호조사(領敦寧府事兼判戶曹事)를 지낸 뒤 1426년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이로부터 4일 만에 죽었다.

그는 순탄한 관직생활을 보낸 인물이었다. 성품은 무척 과단성이 있고 또한 검소, 근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이치를 따지고, 옳은 일을 주장할 때에는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세자위를 폐할 때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나, 그는 먼저 현명한 이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에서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류자미(柳自湄)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원지(元之), 호는 서산(西山). 만수(曼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지(原之)이고, 아버지는 현감 함( )이며, 어머니는 최렴 ( 崔濂 )의 딸이다. 1451(문종 1)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감찰 ( 監察 )을 지냈다.

1455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수(禪受)하자 공문(空門)으로 들어가 처음에는 수양(首陽)의 신광사 ( 神光寺 )에 있다가 만년에는 서산(西山)으로 옮겼으며, 상왕에 대한 절의를 지켜 일생을 은거하였다.

1456(세조 2)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그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 ( 成三問 )의 딸을 데려다 숨겨 길러 며느리로 삼았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다. 유작으로 지곡송학도 芝谷松鶴圖 (간송미술관 소장) 한 점이 전하고 있다.

1493(성종 24)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원체화풍(院體 怜 風)에 토대를 둔 조선 초기 화조화의 특성을 보이면서, 변각적인 구도와 차륜엽법(車輪葉法)의 소나무 묘사 등에서 남송대(南宋代) 마하파(馬夏派)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 양산(梁山)의 구산사(龜山祠)에 제향되었다.

 

류성원(柳誠源)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瑯 跏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이고, 아버지는 사인 사근(士根)이며, 어머니는 윤임(尹臨)의 딸이다.

1444(세종 2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집현전저작랑으로 당시의 의학 총서(醫學叢書)의방유취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6년 박사로 승진했고, 144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춘추관 사관 ( 史官 )의 자격으로 고려사 의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1450(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 ( 書筵 )을 열어 사() · ()의 상견례를 행할 적에 좌사경(左司經)으로 선발되어,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2년 김종서 ( 金宗瑞 ) · 정인지 ( 鄭麟趾 ) 등에게 명해 고려사 를 개찬할 때 여러 사람이 과별로 분담해 찬술하자, 최항 ( 崔恒 ) · 박팽년 ( 朴彭年 ) · 신숙주 ( 申叔舟 ) 등과 함께 열전을 담당하였다. 이 해 3월에는 춘추관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 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 1453(단종 1) 지평 ( 持平 )이 되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갔을 때 수종한 사람을 가자하고 세종 때 역대병요 歷代兵要 와 병서의 찬정(撰定)에 참여한 사람의 가자를 계청(啓請)한 것은, 조신이 종친에게 아부하고 종친이 사은(私恩)을 파는 일이므로 명령을 모두 회수하기를 청해 관철시켰다.

이 해 10월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 등 대신을 살해하고 스스로 영의정부사 · 이조판서 · 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해 정권을 잡은 뒤 백관들을 시켜 자기의 공을 옛날 주나라 주공(周公)에 비견해 임금에게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집현전에 명해 정난녹훈(靖難錄勳)의 교서 ( 敎書 )를 기초(起草)하도록 하자 집현전의 학사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집현전교리였던 유성원만이 혼자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해 기초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통곡했다고 한다. 11월 장령이 되어 정난공신 ( 靖難功臣 )의 책정이 공정하지 못함을 들어 개정을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454년 경복궁 안의 불당을 없앨 것을 소를 올려 주장했으며, 이 해 4월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었고 문종실록 의 찬술에 참여하였다.

이 해 2월 사헌부에서 자기들의 건의가 시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령을 사임하자 직집현전(直集賢殿)에 임명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 해 집의도 겸하게 되었다.

1456(세조 2) 성균관사예 김질(金 銷 )의 고변으로 성삼문 ( 成三問 ) · 박팽년 등 사육신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는데, 그도 이 모의에 참여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 · 박팽년 등이 차례로 잡혀와서 모진 고문을 당할 때, 그는 성균관에 있다가 여러 유생들에게서 이 일의 내용을 듣고 관대도 벗지 않고서 패도(佩刀)를 뽑아 자기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뒤에 남효온 ( 南孝溫 )이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해 단종복위사건의 주동 인물인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 을 지었다. 육신전 이 세상에 공포된 뒤 국가에서 육신의 절의를 공인, 1691(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시켰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의 창절사 ( 彰節祠 )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류순(柳洵)

1441(세종 23)1517(중종1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명 ( 希明 ), 호는 노포당(老圃堂). 상의중추원사(商議中椎院事) 원지(原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관 종()이고, 아버지는 세마 사공(思恭)이고, 어머니는 종성절제사 홍상직(洪尙直)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일찍이 금릉사 金陵詞를 지었는데, 의미가 장중하고 건실해 널리 회자되었다. 1459(세조 5) 사마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1462(세조 8)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1466년 문과 중시와 발영시 ( 拔英試 )에 각각 3등으로 급제, 이조정랑이 되었다.

1470(성종 1) 홍문관부제학으로 경연 시강관 ( 侍講官 )으로 활약했는데 특히 시문에 능해 성종의 총애가 돈독하였다. 1484(성종 15)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오랫동안 관기 확립에 힘쓰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1487년 천추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공조참판·병조참판을 두루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 뒤 개성부유수를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서 산역을 다스렸고, 1495(연산군 1) 형조판서로 옮겨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이조판서·도총관을 거쳐 1498(연산군 4)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 해에 성종실록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압록강 연안에 노략질을 일삼는 야인의 정벌 계획이 있자 신수근 ( 愼守勤 )과 함께 때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논해 중단시켰다.

그 뒤 좌참찬·호조판서를 역임했으며, 1502년에는 시문에 능한 10인에 선발되어 시수상(詩首相)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은 채,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0565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 해 박원종 ( 朴元宗 성희안 ( 成希顔 유순정 ( 柳順汀 ) 등이 중종반정을 단행하자, 수상으로서 정국공신 ( 靖國功臣 ) 2등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차 사임을 요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509년 도리어 연산조의 총신이었다는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극구 사양해 마침내 은퇴하였다.

1514(중종 9) 다시 영의정을 제수받아 국정을 총괄하다가 3년 뒤에 77세로 죽었다. 자학(字學)에 매우 정밀하고 의학·지리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류관(柳灌)

1484(성종 15) 1545(명종 즉위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菴). 상영(尙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 )이고, 아버지는 장령 ( 掌令 ) 정수(廷秀)이며, 어머니는 박윤손(朴潤孫)의 딸이다.

1507(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년 뒤에 정언 ( 正言 )이 되었고, 1513년에 지평 ( 持平 )으로 일시 경기도도사에 임명되어 진상 ( 進上 )의 전결분정(田結分定)에 따른 폐단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그 뒤 장령을 거쳐 15197월에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이 때 조광조 ( 趙光祖 )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대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1월에 기묘사화가 발생했을 때, 사헌부집의로서 조광조 일파가 득세할 때 심히 교만하고 방종했다고 비난하고, 현량과 ( 賢良科 )의 폐지와 그 급제자의 파방(罷榜)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광조 일파를 공격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 · 참찬관 · 강원도관찰사 · 대사간 · 이조참의 등을 거쳐 152512월에는 특별히 통정대부에 승진하면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 이어서 우부승지 · 병조참판 및 동지성균관사 ( 同知成均館事 )를 겸하고, 예조판서 · 우참찬 ·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재직 시에는 간신인 병조판서 이기(李 咬 )의 비행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후일 이기의 모함을 받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우찬성 · 좌찬성에 올랐고 154111월에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중원 ( 中原 )에서 오랑캐 恐 子 의 침입과 같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자 중신을 파견해 축성(築城) · 입거(入居) 문제의 처리와 사신 왕래에 따른 폐단 제거 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왕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 뒤 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 ( 尹元衡 ) · 이기 등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 ( 尹任 ) · 유인숙 ( 柳仁淑 ) 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았다.

처음에는 절도유배형(絶島流配刑)에 처해져 서천으로 귀양갔지만, 온양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1570(선조 3) 신원되었으며, 1577년 복작(復爵)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류양(柳亮)

그외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진봉된 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류희림(柳希霖)

선조 때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로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올라 문양군(文陽君) 에 봉해졌던 희림(希霖)이 유명.

 

류전

현감 예선(禮善)의 아들 전은 영의정에 올라 가문(家門)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류옥(柳沃)

중종 때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낸 옥()은 문무(文武) 겸비로 이름을 떨쳤다.

 

류형원(柳馨遠)

현종(顯宗) 때의 실학자(實學者)인 형원(馨遠)은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고한 기품의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류득공(柳得恭)

1748(영조 24)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혜보(惠甫) · 혜풍(惠風), 호는 영재( 那 齋) · 영암( 那 庵) · 고운당(古芸堂). 아버지는 춘()이다.

1774(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 · 포천 ·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경도잡지 京都雜志 · 영재집 那 齋集 · 고운당필기 古芸堂筆記 · 앙엽기 沒 葉記 · 사군지 四郡志 · 발해고 渤海考 · 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 등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 는 조선시대 시민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서적이며, 발해고 는 그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저서이다. 규장각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장된 우리 나라를 비롯한 중국 · 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가 많았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나온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오늘날의 학문 수준으로 보아 높이 평가할 수는 없으나, 서문에서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 ” 고 주장해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주체의식의 확립에 노력한 모습은 이십일도회고시 에서도 잘 보여준다.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4,000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의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에는 거듭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시는 청나라의 이조원(李調元) · 반정균(潘庭均)으로부터 재기종횡(才氣縱橫 : 재주와 기백이 활발함), 재정부유(才情富有 : 재주가 많음)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류기상(柳基常)

기상(基常)은 헌종(憲宗) 때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올라 무명 (武名)을 떨쳤다.

 

류상렬(柳相烈)

한말(韓末)에서는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서다가 서흥(瑞興)에서 사형(死刑)당하였다.

 

류동열(柳東說)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결성에 참여했던 동열(東說)1935년 중국 남경(南京)에서 김규식(金奎植), 신익희 (申翼熙)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문화류씨를 더욱 빛냈다.

 

 

柳約文(유약문) 선생의 일화

 

洪(홍) 감사 기를 꺾은 柳約文(유약문)의 기지.

경상도 안동 땅 임동면 수곡리 무실은 전주 류씨 일족의 집성촌이다. 수많은 학자와 선비들이 배출되어 소위 무실 류씨라는 별칭까지 생기게 된 대단한 가문이고 그 당시 위세(威勢)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그런데도 이를 얕잡아본 도백(道伯)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경상도 觀察使(관찰사) 洪樂彬(홍낙빈) 이란 분이다.
홍낙빈은 1779년 11월에 경상도 관찰사에 부임(赴任) 하여 1780년에 任期(임기)를 마쳤다. 함께 일한 都事(도사)는 林濟遠(임제원) 이었다.무실의 뒷산 큰(大)골[붙치등]에서 가는(小) 골로 가는 산언저리에 그들[홍씨] 조상의 무덤이 있어 1년에 한 번씩 시제를 지내기 위하여 마을 중심을 통과해 기양서당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마다 무실 류씨의 위세에 질려 조상을 옳게 모시지 못한 부끄러움은 고사하고 증오심만이 가득 했다. 때마침 홍씨 가운데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洪樂彬(홍낙빈)에게 사연을 알려 홍씨 가문의 위력을 보여 주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자 홍 감사는 무실 류씨의 콧대를 꺾어 주려고 岐陽書堂(기양서당)으로 擧動(거동)하여 글깨나 한다는 류씨의 노인들을 모조리 불러 놓고 자기의 威力(위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道伯(도백)의 힘이란 대단한 존재였다.
기양서당에 불려온 무실 류씨 노인네 모두는 겁에 질려 고개를 떨어뜨리고 홍 감사의 處分(처분)만 기다리는 판국이었다.

홍 감사 왈
“ 나는 일도의 王(왕)이니라. 너희들은 일개 백성으로 내말을 거역하면 경을 칠 것이다.” 이렇게 엄포를 쳤다.
결론은 우리 홍씨도 나와 같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으니 우리를 업신여기거나 우리의 가는 길에 방해를 하지 말도록 하자는데 있었다.
그 자리에는 柳約文(유약문) 龜峀(귀수)이란 진사(進士)가 있었는데 이분 또한 文章家(문장가)이므로 기발한 재치를 부렸다.

道伯(도백)이 <나는 일도의 왕이다>라고 하자, 곧 바로 階下(계하) 마당으로 내려가 엎드려 큰소리로
[ 殿下(전하),  이 어찐 일이 읊나이까? 당치도 않습니다. 어느 나라 임금이 신지요 ? 小人(소인)은 天無二日(천무이일: 하늘에 해가 둘이 님.) 이요 民無二君(민무이군: 백성에게는 인군이 둘이 아님.) 인줄로 압니다.] 라고 하였다.

이 소리를 가만히 듣던 도백은 그만 안색이 변하였다.
아차! 내가 말을 잘못 했구나. 王(왕)이라 했으니 조정에 임금께서 알면 영락없이 逆賊(역적)으로 몰려 九族(구족)이 滅(멸)하게 될 것이 뻔하였다.

體統(체통)이고 威嚴(위엄)이고 다 버리고 황급히 보선발로 뛰어내려 류 진사(귀수)앞에 가서 두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면서
[내가 잘못 했소! 없는 것으로 해 주시요.]하고 哀乞伏乞(애걸복걸) 사정 한 뒤 곧바로 행차를 돌려 총총 걸음으로 가고 말았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柳思訥(유사눌) 대제학 운구위해 닦은 섬피 뚝길

 

경서동 용두산(龍頭山) 명당자리에 세종 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류 사눌(柳思訥)의 산소가 있다.

류 사눌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숙부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계양산 서쪽 기슭에 있던 만일사(萬日寺) 에서 공부하여 마침내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그런데 세종22(1440) 류사눌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용두산에 다 산소를 쓰게 되었다. 류 사눌은 생전에 자기 산소 자리를 보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이 고장은 궁벽(窮僻)한 곳이라, 대제학을 지낸 귀인의 상여를 모시고 갈 만한 큰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의논한 끝에, 갯벌 깊은 곳에다 섬피를 깔고 그 위에다 흙을 져다 부어 새 길을 만들었다.

 

이 길이 바로 섬피 뚝길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곳 사람들은 이곳 간선 도로에서 들어가는 경서동 골프장 옆길을 섬피 뚝이라 부르고 있다.

<출전: 인천직할시지 1982년판>

 

 

 

 

 

 

 

 

柳彭老(유팽로)  선생의 일화

 

柳彭老(유팽로)의 충직한 말

옥과면 합강리와 종방마을 앞 내동으로 빠지는 삼거리 들 가운데 사방 6m, 높이 3m 가량의 큰 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柳彭老(유팽로)의 말 무덤으로, 사람들은 팽로말무덤이라고 부른다.

柳彭老(유팽로)가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그의 말이 유팽로의 머리를 물고 300리 길을 달려 그의 생가에 가지고 와서 고이 내려놓고, 그 뒤 9일간이나 여물을 마다하고 계속 울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말을 고이 묻어 주었다고 한다.

1554(명종 9)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호는 월파(月波). 개국공신 만수(曼殊)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우(孝友)하였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柳公信(유공신)호랑이를 잡은 효자.

고려 때의 이야기이다. 군위 지방에는 호환(虎患)이 속출해 그 피해가 극심 하자 조정에서는 호랑이를 잡으려 애를 썼으나 모두 헛일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 살던 柳公信(유공신)이라는 선비가 백성을 구하고자 호랑이를 잡으러 나섰다가 오히려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아들 누백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서서 산속을 헤매다가 잠든 호랑이를 발견하고 활을 쏘아 잡았다. 그 자리에 墓幕(묘막)을 짓고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를 위해 侍墓(시묘) 살이를 시작하였다. 하루는 누백의 꿈에 유공신이 나타나 시를 읊었는데, 누백은 아버지가 읊는 시를 기억하고 열심히 익혔다.

3년 세월이 흘러 시묘가 끝난 뒤 누백이 應試(응시)한 과거의 科題(과제)가 바로 꿈에 아버지가 읊던 그 시의 한 구절이었다. 그리하여 누백은 장원급제해 높은 벼슬에 올라 毅宗(의종)의 측근에서 나라를 위해 忠誠(충성)하였다.

 

 

 

柳誠源(유성원) 선생의 일화.

柳誠源(유성원)은 성균관에 있었다. 사육신에 대한 세조의 친국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술마시며 이별하고 사당으로 올라갔다.

아내가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시당에서 내려오지 않아 사당으로 올라가 보았다. 유성원은 관대를 벗지 않고 반듯하게 누워서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목에 대고 나무 조각으로 칼자루를 쳐서 박았다. 아내는 남편이 죽은 까닭을 모르고 있디가 금부도사가 시체를 기져 간 뒤에야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일었다. 유성원의 시체는 형장에서 찢겨졌다.

 

유성원의 지는 태초이다. 세종 [宋史(송사)]가 조선에 없어 세종이 여러 차례 명나라에 청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柳義孫(유의손) 선생의 일화

 

1447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에 동반직(東班職)에 있던 우부승지 김유양(金有讓)의 아들을 잘못 서반직(西班職)에 옮겨놓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함으로써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이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병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회헌일고가 있다.

 

 

柳馨遠(유형원) 선생의 일화.

 

실학(實學)의 비조(鼻祖)로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근본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결국 백성들의 삶 속으로 뛰어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지성인이 있었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柳馨遠(유형원)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또는 둔옹(遁翁)이며, 아명(兒名)은 덕창(德彰)이다.

유형원의 아버지는 유몽인(柳夢寅)의 옥에 연루되어 유형원이 2세 때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형원은 키가 6척이나 되었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얼굴은 희고 눈에는 광채가 났으며 수염은 길어서 손아래까지 닿았고 태어날 때 등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박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형원은 문학· 병법· 천문· 지리· 음양· 점술· 음악· 의약· 산학· 한어 등 다방면에 걸쳐 두루 통달한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성장 배경에는 5세 때부터 글을 가르친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이 있었다. 이원진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 사건 당시에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이고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을 지낸 당대의 이름 높은 선비였다.

 

柳馨遠(유형원)15세 되던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가족들과 함께 원주(原州)로 피난 갔다가 지평을 거쳐 여주 백양동, 즉 지금의 능서면 백석리와 내양리 부근에 정착하니 이때가 22세였다. 유형원은 이후 10년간 여주에서 살게 되는데 23세에 할머니 상을 당하고 25세에 고모부 김세렴, 27세에 어머니 여주 이씨(驪州 李氏), 30세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탈상하면서 2차례에 걸쳐 성균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어전(御前) 시험에서 써낸 답안지가 격식에 어긋났다는 것이 낙방 이유였다. 실력에 비해 시험 운이 없었던 그가 뒤에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인해 진사시험에 응시하여 8등으로 합격하지만 벼슬길에서 뜻이 멀어진지 오래였다.

여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동화되어 순수해진 심성 위에 참된 지식을 쌓아 인격의 수양이 고매한 경지에 이른 그였기 때문이다. 32세 때부터 전라도 부안(扶安)에서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유형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한 상황과 그 이후 국민 생활이 도탄에 빠진 원인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체제에서 찾았다. 그는 양반 중심의 경국대전체제를 벗어나 양반만이 아닌 모든 신분의 사람이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자기의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균전제(均田制)로의 토지개혁,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부병제 실시, 조세 및 녹봉제의 정비, 과거제 폐지와 공거제 실시, 신분제 및 직업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유형원의 사상은 그가 여주에서 처음 쓰기 시작한 이래 18년의 각고 끝에 완성한 반계수록(磻溪隧錄)에 실려져 이 땅에 실학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 출전:여주군- 성씨와 인물: 유형원(柳馨遠, 1622~1673)>

 

 

柳馨遠(유형원) 선생이 일화.

 

실학사장은 17세기 후반 효종 현종 때의 학자인 반계 유형원에 이르그 폭이 더욱 넓어졌다. 그는 우의정 유관의 후손으로 태어난 바탕이 장대하여 체격이 크고 훌륭했다. 눈은 셋별처럼 빛났고, 다섯 살에 算術(산술)에 능통했고, 기억력이 매우 좋아서 책을 읽는 것이 몇 번 지나지 않더라도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그의 외삼촌인 감사 이원진은 세상 사람들이 태호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원진이 박학하여 유형원이 그를 따라 다니며 수업했다. 유형원은 아직 어린아이인데도 벌써 뛰어 난 그릇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유형원이 15세가 되던 해인 1636(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유형원은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갔다. 다음해에는 지금의 양평 땅인 지평 화곡리로 이사했다가 그 다음 해에 다시 여주 백양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23세 때에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27세 때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동안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 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31세 때에는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32세 되던 해 유형원은 남은 가족을 데리고 멀리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으로 이사를 갔다.

 

유형원은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끝내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는 20년간 사립문을 닫고 들어앉아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나날이 어려워지는 농촌 사회의 현실을 직접 지켜보면서 사회 개혁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대동법이 확대된 이후에도 농민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농민들의 어려움은 아무도 살펴 주지 않았다. 양반 지주들은 자신들이 내야 할 토지세를 소작농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에서는 새로운 세금을 자만들어 농민들에게 부과했기 때문에 농민의 생활은 실질적으로 아지지 못했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어떤 고을은 절반이 비었다.”고 보고될 정도였다. 농민들의 離農(이농)으로 많은 토지가 황폐화되었다. 조선 사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유형원은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대다수 농민들은 경작할 땅이 없기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고 유형원은 생각했다. 그리고 유형원은 세금을 조금 줄여 준다고 해결될 단계는 지났고, 토지 제도를 개혁해서 농민에게 토지가 골고루 돌아가게 하여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형원은 자신의 생각 을 오랜 세월에 걸쳐 반계수록26권에 담았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가장 핵심적인 저서로서, 그 동안 그가 겪은 농촌생활에서의 체험과 농촌경제의 안정책 등을 제시한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의 책으로서 그의 정책론이라 하겠다. 반계수록6부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1) 田制(전제: 토지제도)

2) 전제후록(재정 · 상공업 관계)

3) 교선지제(향약 · 교육 고시 관계)

4) 임관지제(관료제도의 운용관계)

5) 직관지제(정부기구 관계)

6) 녹제(관리들의 보수 관계)

7) 병제(군사제도의 운용관계)

8) 병제 후록(· 벙기 · 교통 통신 관계)

9) 속편의 의례 · 언어 · 기타

10) 보유 편의 군현제(지방제도관계)

등으로서 국가체제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농촌 문제의 근본이 토지에 있다고 본 균전론에는 가지의 특색이 있다. 유형원은 관리, 선비,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에게 차등 있게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줌으로써 자영농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영농을 바탕으로 하농병일치의 군사 제도, 다시 말해 兵制(부병제)의 실시를 강조했다.

또한 사농일치의 교육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신분제 직업 세습제의 개혁과 과거제 · 학제 · 관료제의 개선 등을 통해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을 주장하고 노비 세습제가 사리에 맞지 않은 것임을 비판했다.

 

이와 같이 유형원은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天德(천덕)王道(왕도)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 잡게 했으며, 李瀷(이익) · 安鼎福(안정복) · 丁若鏞(정약용) 등으로 이어져 실학이 집대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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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파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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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파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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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 문화류씨(文化柳氏)는 남한(南韓)에 총 63,885가구, 267,9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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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고령 박.jpg 고령박씨(朴) 청남 14-08-27 4358
224 경주 박.jpg 경주박씨(朴) 청남 14-08-27 3209
223 강릉 박.jpg 강릉박씨(朴) 청남 14-08-27 2745
222 여흥 민.jpg 여흥민씨(閔) 청남 14-08-26 3732
221 제령 미.jpg 재령미씨(米) 청남 14-08-26 2281
220 남평 문.jpg 남평문씨(文) 청남 14-08-26 3607
219 광령 묵.jpg 광령묵씨(墨) 청남 14-08-26 2593
218 사천 목.jpg 사천목씨(睦) 청남 14-08-26 2819
217 광주모씨(毛) 청남 14-08-26 2006
216 함평 모.jpg 함평모씨(牟) 청남 14-08-26 3426
215 서척 명.jpg 서촉명씨: 연안명씨(明) 청남 14-08-26 4003
214 신창 맹.jpg 신창맹씨(孟) 청남 14-08-26 4654
213 충주매씨(梅) 청남 14-08-26 2332
212 강화만씨(萬) 청남 14-08-26 2202
211 영평마씨: 열산마씨(麻) 청남 14-08-26 2505
210 목천 마.jpg 목천:장흥마씨(馬) 청남 14-08-26 4072
209 풍산 류.jpg 풍산류씨(柳) 청남 14-08-26 4846
208 진주 류.jpg 진주류씨(柳) 청남 14-08-26 3743
207 전주 류.jpg 전주류씨(柳) [1] 청남 14-08-26 5185
문화 류1.jpg 문화류씨(柳) [1] 청남 14-08-26 4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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