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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류씨(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전주류씨)

 

 

본관(本貫): 전주(全州)

시조(始祖): 류습(柳濕)

유래(由來):

 

전주 류씨(全州柳氏)는 문화 류씨(文化柳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9세손 상장군(上將軍) ()의 여섯 째 아들 양자()의 증손(曾孫) ()이 고려(高麗)말에 전주(全州)로 이거(移居)하여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고 완산백(完山伯)에 추봉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류극서(柳克恕)

일세조 습의 아들 5형제중 둘째 극서(克恕)가 고려조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중현대부(中顯大夫)로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 提學)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류의손(柳義孫)

1398(태조 7)1450(세종 3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효숙(孝叔), 호는 회헌(檜軒) 또는 농암(聾巖).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극서(克恕)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빈()이며, 어머니는 윤방익(尹邦益)의 딸이다.

1419(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6(세종 8)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을 거쳐, 감찰·수찬을 역임하였다. 1436년에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곧 직제학에 올랐다.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그는 학문에만 능할 뿐, 과단성이 결여되어 사무처리는 좌부승지인 황수신 ( 黃守身 )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하였다.

1447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에 동반직(東班職)에 있던 우부승지 김유양(金有讓)의 아들을 잘못 서반직(西班職)에 옮겨놓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함으로써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이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병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회헌일고가 있다.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서 문장(文章)이 뛰어나 남수문(南秀文), 권채(權埰)와 더불어 <집현전 삼선생(集賢殿三先生)> 으로 일컬어졌던 의손(義孫)은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전주(全州) 황방산(黃方山)으로 내려가 시문(詩文)으로 생을 마쳤다.

 

류신손(柳信孫)

의손의 아우 신손(信孫)은 참판(參判)을 지냈다.

 

류말손(柳末孫)

말손(末孫)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집의(執義)를 역임했다.

 

류숭조(柳崇祖)

1452(문종 2)1513(중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 이조판서 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손(敬孫)이고, 아버지는 서령 지성(之盛)이며, 어머니는 권득(權得)의 딸이다.

세조 때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1489(성종 2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발탁되고 사유록(師儒錄)에 들었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내면서 정부 관원들의 기강 확립과 국왕에 대한 간쟁에 힘썼다.

1504(연산군 10) 국왕의 어지러운 정치를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원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고, 이와 함께 네 자급(資級)을 뛰어 판결사에 등용되었고, 공조참의로 옮겨져 삼공 ( 三公 )들의 주청으로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이어 성균관대서성·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성리학의 학통을 새롭게 젊은 문신들에게 전수했고,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장(師長)의 자리를 그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는 삼공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재임되었다.

18년 동안의 벼슬길을 거의 성균관에서 보내면서 조광조 ( 趙光祖 ) 등 신진 유림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성리학의 학풍을 크게 북돋우었다. 서경·역경·예기에 밝았고, 특히 천문·역상(曆象)에 통달해 자신이 손수 혼천의를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남긴 칠서언해는 언해의 효시로 후학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다.

또한 벼슬길에서 보인 강직함과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언간의 올바른 정신은 후학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진일재문집4, 대학잠 大學箴1권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류헌(柳軒)

1462(세조 8) 1506(중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여(子輿), 호는 낙봉(駱峯). 형조참판 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말손(末孫)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수장(秀 使 )이며, 어머니는 조효생(趙孝生)의 딸이다. 영의정 영경(永慶)의 증조부이다.

1486(성종 17)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48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연산군 초년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기휘(忌諱)에 크게 저촉되어 외직으로 나아가 충청수사가 되었으나, 1504(연산군 10) 중앙으로 돌아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이 때 신수영 ( 愼守英 )이 무함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소()를 올려 임사홍 ( 任士洪 ) · 유자광 ( 柳子光 )의 음모와 이극균 ( 李克均 )이 죄도 없이 살해당한 사실을 논하였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며, 동료사간 강숙돌(姜叔突)도 이를 간하다가 또한 귀양가게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뒤에 방환(放還)되어 돌아오다가 왜구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도량과 기국(器局)이 있어 삼사를 두루 역임하면서 굴하지 않았다.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되었다.

 

류세린(柳世麟)

헌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 사화(己卯士禍) 때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 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말손(末孫)의 세 째 아들로 중부(仲父)의 의손(義孫)에게 출계(出系)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했다.

 

류윤덕(柳潤德)

세린의 손자 윤덕(潤德)이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류영길(柳永吉)

정유재란 때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활약했던 영길(永吉:대사간 헌의 증손)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류영경(柳永慶)

1550(명종 5)1608(광해군 즉위년). 조선 중기의 상신(相臣).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린(世麟)이고, 아버지는 참봉 의()이며, 어머니는 노첨(盧僉)의 딸이다. 예조참판 영길(永吉)의 동생이다.

1572(선조 5)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보였고, 1593년 황해도순찰사가 되어 해주에서 왜적을 맞아 60여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행재소 ( 行在所 )에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159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가족을 먼저 피란시켰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참판에 서용되었다. 당론이 일어날 때에는 유성룡 (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했으며,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이발 ( 李潑 )과 함께 북인에 가담하였다.

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남이공 ( 南以恭 김신국 ( 金藎國 ) 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 ( 洪汝諄 )을 탄핵하면서 대북·소북으로 갈리자, 유희분 ( 柳希奮 ) 등과 함께 남이공의 당이 되어 영수가 되었다.

이 때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그런데 대북파의 기자헌 ( 奇自獻 정인홍 ( 鄭仁弘 ) 등과 심한 마찰을 빚었고 뒤이어 세자 문제로 더욱 분란을 일으켰다.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진 뒤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윤승훈 ( 尹承勳 )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1606년 선조 즉위 40주년 행사를 앞당겨 하례(賀禮)하고 증광시 ( 增廣試 )까지 실시해 즉위 때와 같이 경축하게 하는 등 왕의 총애를 굳히려 하였다. 오랫동안 집권해 권력이 증대되고 그에게 뇌물 공여도 횡행하였다.

그 뒤 같은 소북파인 남이공과 불화해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했으며, 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을 광해군에 대신해 옹립하려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이이첨 ( 李爾瞻 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류복립(柳復立)

1558(명종 13)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군서(君瑞), 호는 묵계(墨溪). 할아버지는 부제학 ( 副提學 ) 윤덕(潤德)이다. 음직으로 종부시주부를 지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외삼촌인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 ( 金誠一 ) 휘하에서 진주성 ( 晉州城 )을 공격해온 왜적을 격퇴, 이듬해 김성일이 병사하면서 성을 사수하라는 유언에 따라 창의사 김천일 ( 金千鎰 ), 복수장(復讐將) 고종후 ( 高從厚 ), 병마절도사 황진 ( 黃進 ) 등과 힘을 합쳐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당하자 김천일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뒤에 충신정문이 세워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8(정조 22) 경상도 유림 김완찬(金宛燦) 등이 창렬사 ( 彰烈祠 )에 추향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사원에 추향하는 것은 국초 이래로 금한 일이라 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유태환(柳台煥)이 편찬한 묵계실기가 장서각도서에 있다.

 

류심

인조(仁祖) 때 전창위(全昌慰)에 습봉된 심은 송설체 (松雪體)로 유명했다.

 

류경창(柳慶昌)

()의 맏아들 경창(慶昌)은 인조(仁祖) 때 등과(登科)하여 홍문 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현종(顯宗)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사간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류정원(柳正源)

1703(숙종 29)1761(영조 3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안동 출신. 아버지는 석구(錫龜)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천린(天麟)의 딸이다. 1729(영조 5) 생원시를 거쳐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49년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어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으나 대간직을 거치지 않았다는 지평 서해조 ( 徐海朝 )의 비판을 받아 이름이 삭제되었다.

17513월 안동에 귀향해 윤광소 ( 尹光紹 )와 함께 향음주례 ( 鄕飮酒禮 )를 실시하고,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회강(會講)하였다. 1752년 정우량 ( 鄭羽良 )의 천거로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고, 그 뒤 수찬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3년 다시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754년 필선이 되었고, 이 때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보도에 능력을 발휘해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같은 해 수찬·사간을 거쳐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통천군수로 나가서는 백성의 진휼에 힘썼다.

1756년 원인손 ( 元仁孫 )과 채제공 ( 蔡濟恭 )의 추천으로 부교리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뒤 왕의 특명으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758년 춘천현감에 부임하였다. 1760년 형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판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간·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젊어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했고, 천문(天文지지(地志음양(陰陽) 등을 비롯해 병률(兵律도가(道家)에 깊이 침잠했으나, 유학의 본지는 사서삼경에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깊이 탐구하였다.

경학에 능하고 여러 학자들의 주석에도 밝아 으뜸가는 경연관으로 영조와 여러 신하들의 신임을 받았다. 문집으로 삼산문집, 저서로 역해참고 易解參攷·하락지요 河洛持要가 있다.

 

류의양(柳義養)

의양(義養)은 정조조(正祖朝)에서 춘관지(春官志)와 영희전지(永禧殿誌) 를 편찬하고 승지(承旨)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수찬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류의(柳誼)

정조조에서 홍주 목 사(洪州牧使)로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의()는 대사헌에 이르렀다.

 

류준근(柳濬根)

한말(韓末)에 홍산(鴻山)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고 3·1운동 때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류인식(柳寅植)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

 

1985년 인구조사 결과 남한(南韓)에 총 11,365가구, 47,383명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柳克恕(류극서)

 

 柳克恕(류극서)  全州人 寶文閣直提學
  完山伯 濕의 子. 祿轉面 竹松里 虎巖

전설에 의하면 공이 돌아가시자 아들이 묘지를 차던 중,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호랑이 입에 비녀가 꽂혀 있기에 그것을 빼어 주었더니 상주를 등에 업고 이곳에 묘지를 정지해 주었다 하여 묘 뒤에 큰 바위를 지금도 범바위라 한다.
그러나 전주 류씨 사적에는 공의 묘소를 실전하였는데 7대손 禮賓寺正(예빈시정) 復起(복기)와 8대손 사경감사 永詢(영순)이 柳殯(유빈)이라는 동명을 따라 찾게 되었다고 한다.  곧 공의 墓下(묘하)에서 차자 영흥도호부사 濱(빈)이 장사 후 시묘 사리를 하였다 하는 동명이 공의 묘아래 서남쪽에 있어서 였다 한다.

공의 묘도 고려 말의 하방상원형 분묘인데 묘 앞에 비석과 長明燈(장명등)이 설치되어 있다. 墳塋(분영)의 사방을 큰 돌로 돌리고 床石(상석) 및 石人(석인: 문인상)을 설치하였는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후 부인 수원 이씨 분도 공의 階下(계하) 10여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똑 같은 형식이다.
묘아래 선조 39년 병오(1606)에 8대손 永詢(영순)이 찬한 비거 서 있고 20여칸의 齋舍(재사)도 있다.
그리고 공의 次子(차자) 濱(빈)의 묘소는 영주군 문수면 鐘陵里(종능리)에 있다. 공은 고려 우왕 8년 임술(1382)에 태종과 同榜(동방)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보현감, 경주부윤, 영흥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사후에 태종이 장례하고 鐘陵(종릉)이라 명명하게 하였다 하는데 묘의 형식이 장대석으로 墓傍(묘방)을 돌리고 그 위에 八方(팔방)으로 다시 긴 돌로 돌려서 마치왕릉을 방불케 하고 있어 흥미롭다.


墓下碑
재사의 뒤편 묘소로 오르는 길목에 세워져 있다. 전면대자는 ‘有明高麗中正大夫寶文閣直提學完山柳公墓下碑’라 새기고 있다. 비문의 전면 대자의 첫 글자를 ‘유명(有明)’이라 쓴 것은 이 비석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의리로 여기는 시기에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비를 세운 시기는 만력 병오년(1606)의 일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前面大字】有明高麗中正大夫寶文閣直提學完山柳公墓下碑

【碑 文】
公姓柳諱克恕系出全州麗朝登科官至寶文閣直提學祖諱橒成均生員 考諱濕贈司憲府掌令 妣全州崔氏封三韓國大夫人 有五男一女 五男俱捷文科 女適大提學沈孝生 以此特贈 公乃五男之一也 公娶晋州河氏爲配 贈領議政晋陽府院君允潾之女 文忠公浩亭先生崙之姉也 生二男 長汀僉知 次濱文科永興府使 贈叅判 僉知生二男 長孝池 縣監 次孝川文科承文正字孝池六代孫 振門新門再榮再茂 居星州 孝川六代孫震楨震樑 居陜川 叅判生四男長敬孫中部令贈吏議 次義孫叅判以文雅鳴世 次信孫叅判 次末孫執義贈叅判 叅議生二男 長孟沂淸白吏 郡守 次之盛 贈叅判 郡守生二男 長場次坦 場四代孫潭文科正郞 坦曾孫華 居榮川 叅判子崇祖興祖 崇祖文科官至大司成學窮性理取重儒林 子應台 應台曾孫 仁榮 興祖子應賢應賢曾孫仁植 俱居安東 執義生三男 長季潘叅判 次季漳僉知中樞府事 次季潼贈承旨 參判子軫縣監 縣監曾孫肇生武科叅扈聖功臣 僉知子軒 大司諫 贈吏曹判書 判書生四男長世鵬典簿 次世麟吏曹叅判贈左贊成 次世龜 典籤贈吏曹判書 次世鳳司果 典簿子寧判官宇司果 判官子永範今爲直長 司果子永孚文科正郞 贊成生三男長信文科佐郞次儀叅奉贈領議政 次脩叅奉 議政生三男 永吉叅判以詩文鳴世 永慶今爲領議政全陽府院君 永賀直長 叅奉子永孝今爲監役 叅判子惺今爲文學恒水運判官 領議政子悅今爲通津縣監  王子師傳 悌松禾縣監 通津子 廷亮尙貞徽翁主爲全昌尉 判書生四男 長堪舍人贈吏曹參判 乙巳正直不撓 坐謫十八年 讀易不輟均縣令 塤判書 埏府使贈左贊成 舍人子永健府使 永立叅判 永起今爲麻田郡守 叅判子穡今爲副修撰縣令子永成 今爲淸風郡守 贊成子永謙禁府經歷 永謹今爲司諫 永詢今爲慶尙道觀察使 承旨有子軾輳 軾府使贈叅判 叅判子潤德文科參判 次潤善 潤善孫復起居安東有五子輳子潤門 潤門孫止信武科府使 其餘內外子孫蕃衍 不可殫記 嗚呼 我先祖積德燾後 奕世冠冕 愈久愈盛 以至今日猗歟休哉 公墓在禮安縣西龍頭山之麓 神道古無麗牲 世代綿遠 香火久絶 七代孫永詢 忝按本道 拜奠墓下 不勝感璥 乃問之古老 皆曰永興公嘗居廬于墓側 至今樵牧 稱以柳濱洞 洞之西北有一刹 相傳柳墓齋舍云 揭板于壁 以表遺蹟 且定守墓人 以禁樵火 竪之短碣 略記顚末于陰 以示來世 庶傳之永久云爾
萬曆三十四年丙午月日立
八代孫嘉善大夫行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永詢謹撰

<해>
유명고려중정대부보문각직제학완산유공묘하비
공의 성은 류(柳)씨요 이름은 극서(克恕)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운(橒)은 성균관 생원이다. 아버지 습(濕)은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고 어머니는 전주 최씨로 삼한국대부인에 추봉되었으며, 5남 1녀를 두었다. 5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딸은 대제학 심효생에게 출가하였다. 5남 1녀의 등과로 특별히 추증되었는데 공은 이 5남 중의 둘째 분이다. 공은 진주하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영의정에 추증된 진양부원군 하윤린(河允潾)의 딸이며, 문충공 호정선생 하륜(河崙)의 누이인데 형제를 두었다. 큰아들 정(汀)은 첨지이고 작은아들 빈(濱)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부사를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첨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효지(孝池)는 현감이고 다음 효천(孝川)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정자(正字)를 지내고 효지의 육대손 진문, 신문, 재영, 재무는 성주에 살고 효천의 6대손 진정과 진량은 합천에 산다.
참판은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경손은 중부령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다음 의손은 참판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다음 신손은 참판이고 막내 말손은 집의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의는 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맹기는 청백리 군수이며, 막내 지성은 참판에 추증되었다. 군수는 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장이고 막내는 탄이다. 장의 4대손 담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내고 탄의 증손 화는 영천에 산다. 참판의 아들로는 숭조와 흥조가 있다. 숭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유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아들은 응태이고 응태의 증손은 인영이다. 흥조의 아들은 응현이고 응현의 증손은 인식인데 모두 안동에 산다.
집의는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계번은 참판이요 다음 계장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막내 계동은 승지로 추증되었다. 참판의 아들 진은 현감이고 현감의 증손 조생은 무과에 급제하여 호성공신이며, 첨지의 아들 헌은 대사간으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는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세붕은 전부이고 다음 세린은 이조참판으로서 좌찬성에 추증되고 다음 세구는 전첨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막내 세봉은 사과를 지냈다. 전부의 아들 영은 판관이요 우(宇)는 사과이다.
판관의 아들 영범은 지금 직장을 하고 사과의 아들 영부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이 되었다. 찬성은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신(信)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이며, 다음 의(儀)는 참봉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막내 수(脩)는 참봉이다. 영의정은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영길은 참판으로서 시문(詩文)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영경은 지금 영의정으로서 전양부원군이며, 막내 영하는 직장이다. 참봉의 아들 영효는 지금 감역관을 하고 참판의 아들 성은 지금 문학(文學)이며, 항은 수운판관이다. 영의정의 아들 열(悅)은 지금 통진현감이고 업()은 왕자의 스승이며, 제(悌)는 송화현감이다. 통진현감의 아들 정량(廷亮)은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전창위(全昌尉)가 되었다. 판서는 4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감(堪)은 사인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성품이 바르고 곧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을사사화 때 남의 죄에 걸려들어 18년간 귀양을 가서도 주역공부를 그치지 않았고 다음 균(均)은 현령이며, 훈(塤)은 판서이고 연(埏)은 부사로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사인의 아들 영건(永健)은 부사이고 영립(永立)은 참판이며, 영기(永起)는 현재 마전군수를 하고 있다. 참판의 아들 색(穡)은 지금 부수찬을 하고 현령의 아들 영성(永成)은 지금 청풍군수이다. 찬성의 아들 영겸(永謙)은 의금부의 경력이고 영근(永謹)은 현재 사간이며, 영순(永詢)은 지금 경상도 관찰사를 하고 있다. 승지의 아들은 식(軾)과 주(輳)인데 식은 부사로서 참판에 추증되고 참판의 아들 윤덕(潤德)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고 다음은 윤선(潤善)이다. 윤선의 손자 복기(復起)는 안동에 사는데 다섯 아들을 두었다. 주(輳)의 아들은 윤문(潤門)이며, 윤문의 손자 지신(止信)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이다.
그 밖에 내외 자손이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아! 우리 선조가 덕을 쌓고 두루 비추어 대대로 벼슬아치가 끊이지 않고 그 번성함이 오늘 날에 이르러 더하니 아! 거룩하도다. 공의 묘는 예안현 서쪽 용두산(경북 안동군 녹전면 죽송리) 기슭에 있는데 신도비는 오래되어 빛을 바래고 오래동안 향화가 끊어졌다. 8세손 영순이 본도의 관찰사로 와서 성묘하고 비통한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옛 노인에게 물으니 모두가 말하기를 영흥공(빈)이 묘 옆에 초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지금은 나무꾼과 목동들이 류빈골이라 부른다고 하고 마을 서북쪽에 절 하나가 있는데 류묘(柳墓)의 재사(齋舍)라 전하니 벽에 현판을 걸어 유적을 표시하고 또 묘직이를 정하여 나무꾼의 불작란을 막고 작은 비를 세워 그 전말을 기록하고 후손에게 보이니 오래도록 전하기를 바란다.

    선조39(1606)년 월 일 세우다.
    9세손 가선대부행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영순(永詢)이 삼가 짓다.

 

 

 

 

柳致明(유치명) 墓碣銘(묘갈명)

 

 

 

柳致明(유치명) 字 誠伯. 號 定齋.

1777(정조 1) 1861(철종 12). 全州人.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아버지는 진사 회문(晦文)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이상정 ( 李象靖 )의 외증손으로 외가인 안동의 소호(蘇湖)에서 출생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 · 유범휴(柳範休) · 정종로 ( 鄭宗魯 ) · 이우 ( 李瑀 )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순조 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 · 성균관 전적 ·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 · 세자 시강원 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 장시도사(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 교리에 발탁된 뒤, 1835(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초산 부사 · 공조 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이 되었다. 1853(철종 4)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한성 좌윤 ·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다. 이어 지도 ( 智島 )에 안치되었다가 그 해에 석방되었다. 1856년 가의대부 ( 嘉義大夫 )의 품계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다음 해에 85세로 죽었다. 초산 부사로 있을 때에는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 ( 還穀 ) · 전결(田結)에 따른 시폐(時弊)를 교정하는 등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아 그곳 사민(士民)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짓기도 하였다.

그는 경학(經學) · 성리학 · 예학 ( 禮學 )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自發的動靜)에 의해 기()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이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나오며, 이가 우주의 무체적인 실재(實在)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황 ( 李滉 ) ­ 김성일 ( 金誠一 ) ­ 장흥효(張興孝) ­ 이현일 ( 李玄逸 ) ­ 이재 ( 李栽 ) ­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아 이진상 ( 李震相 ) · 류종교(柳宗喬) · 이돈우(李敦禹) · 권영하(權泳夏) · 이석영(李錫永) · 김흥락 ( 金興洛 )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墓碣銘

墓碣銘 幷序[韓耆東]

聖朝文明之運一似元豐淳煕之際陶山我考亭也博約相傳之統正嫡于湖上及湖上之傳而有定齋柳先生上下三百年之間大略歲數有適相符者天之眷佑斯道可謂至矣先生資稟純粹門路平正從容步履八十餘年以就夫高明廣大之域於乎懿哉其當日稱述之辭有曰形於作止者見其動容而中禮發於應接者見其辭修而誠立慈良惻怛而知其有廣愛之仁恬定安固而知其有處命之義達之可以尊主而庇民居之可以善世而惇俗有曰灑掃之充徐行之積而可以做堯舜處乎丘陵而有泰山北斗之尊伍於鱗介而有靈龜瑞龍之儀此數君子皆善觀而善言之者也先生易簀後四十餘年胤子止鎬收拾妙道精義之著於言者行於世越五百里命顯刻之辭於耆東自顧識膚言輕不敢當是寄而三世景仰義有不可辭者謹按先生諱致明字誠伯上祖完山伯諱濕至諱義孫號檜軒集賢名臣中世有諱復起號岐峯從舅鶴峯金先生學高祖諱觀鉉官刑曹參議以勤儉裕後曾祖諱通源祖諱星休生員考諱晦文進士連世儒業重於鄕邦妣韓山李氏校理埦女大山先生孫先生以正廟丁酉生于外氏第大山先生書賀骨相之異凡因錫名期擬之幼母夫人疾不離左右就曾叔祖東巖公長源學初上學頗遲鈍未久才思逸發十三丁母夫人憂每朝起涕淚漬枕丙辰東巖公下世先生痛失依歸請敎于損齋南公漢朝損齋湖門高足也先生一心服事南公與李俛齋秉運書曰吾黨有此子豈非相賀耶乙丑大闡先生於聲利泊如也特以重親期望黽勉俯就丙寅例補槐院甲戌陞六品階乙亥除典籍戊寅除正言是歲先公喪己卯遭王考憂先生荐居巨創勉自節抑戚易中禮甲申拜持平丙戌除正言丁亥除文學辛卯除湖南掌試都事絶干囑禁奔競遠近翕然稱公壬辰除校理承召入府上疏兼陳邑弊民隱連除修撰校理者四五甲午除獻納副校理兼文學趨肅時有冬雷之異先生疏陳遇災修省之方上下優批超授同副承旨先生以辭免之章反爲媒進之階懇辭而未蒙允以參贊官入侍晝講翌日差司饔院副提調自上命停經筵先生曰無故停筵不可不啓政院豈出納王命而已乎一日上疾大漸行廟社山川祈禱祝文以御諱署押而其辭曰聖候違豫先生曰國家百官備百物修而顚錯如此乎王世孫嗣位將因喪而冠行三加先生引周成王晉平公事以爲人君不冠卽位之證而議禮者不聽因呈病歸乙未赴山陵班次卽歸除右副承旨旋遞連除大司諫承旨己亥除楚山府使時兩西大饑先生至則捐萬餘金賑濟無一人顚壑之患凡入官廚而病於民者一切蠲罷擇士居業親設講座諄諄誨諭有丕變之效壬寅遞拜大司諫楚人生祠以享之連除承旨工曹參議己酉又除大司諫癸丑因大臣箚對陞嘉善除漢城左右尹同義禁副摠管兵曹參判先生竊附古人以言事君之義上三綱十目疏遞職不果上乙卯上疏請莊獻世子追崇義大司諫朴來萬首擧彈章有祥原竄配之命先生怡然就道俄而更以智島島置命下後數月晶山權公載大繼責于荏子島院啓臺章迭上不已鐵輪轟雷朝夕薤粉瘴炎蒸鑠居停湫陋而先生無幾微見於色日晨興盥櫛對案看書十一月特蒙宥還丙辰敍用進階嘉義丁巳門人等築室于雷巖先生扁以晩愚時攜學子逍遙自適嘗以吳中宗族値歉荒不能自濟倣朱子社倉設義庄庚申除同春秋辛酉九月寢疾以十月六日啓手足時大風震撼哲人之萎從古然矣明年壬戌葬于家東五里龜峀山戌坐之原士林相紼者九百餘人配一善金氏復久女平山申氏魯岳女俱無子取三從弟致儉子止鎬爲嗣今都正申氏生三女金在九金精壽金達銖監役孫男淵博進士女金魯憲金在九男大銖文銖金精壽男鎭澤金達銖嗣男建永參奉曾孫東蓍一幼先生以近道之資立志堅篤內而家庭之訓導旣早外而師友之講明又的熟之於日用事物之間斂然於低平易近之地讀書竆理明其理也待人接物循其則也容色必莊非作意也言語精詳非有擇也及其充養之久面背睟盎擧一世推之以宗師而斯道之統自有所歸矣葢其日見之行則事親盡志體之養未或有違閨門之內肅雍和悅不知貧窶之爲苦闕炊之夕懽笑滿室有過者諄諭之有志者奬詡之大同而未嘗流徇獨異而不設厓岸立朝五十年一意恬退未曾一日處可爲之地而亦隨位盡分論儀文而正直不撓陳大義而不避鼎鑊掌試而正士趨分憂而濟民命特施措之一端也其律之身心則規圓矩方其用也鑑空衡平其體也斂容端坐有如尸如塑氣象及事至物來隨遇曲當存之也不以係縛持之也不以强勉繩尺有度條緖粲然其爲學之方則以四子六經心近朱退之書爲反身體驗之資不務汎博而惟務簡要不求賸讀而惟求玩味不以己意驅率聖賢之言亦不以聖賢之言牽己從之融會得前人意趣而表出這般話以曉人故四方擔笈者無論識解之深淺各中幾會漸涵浸漬是其推己而裕於人暢支而發於業者矣所著有家禮輯解朱節彙要大學童子問太極圖解大山實紀及知舊門人往復疏章雜著凡五十餘卷於乎道之在天下古今一也今以先生之言與行求之古人宛是同一心法同一氣象豈可以末學謏識妄自摹擬哉只因其親炙者記實而略加點竄系之以銘銘曰

嶷嶷陶山大東閩洛嫡嫡授受羣哲繼作湖壁有畫先生降嶽良金溫玉秋月冰壺博約眞詮敬義單符動靜相涵內外昭融由粗入精處下愈崇洋洋天理坦我日用蓍龜山斗婦孺亦誦東山留像南海窺湘曷云展布任他行藏闡發微言以牖來學百世仰止龜山峻極後學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經筵事原任奎章閣待敎西原韓耆東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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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병서[韓耆東(한기동)]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조정에 文明(문명)의 운이 있어, 文明(문명)이 한결같이 풍요롭고 아름답게 빛나는 이때, 陶山(도산)은 나의 考亭(고정)이다.

博約(박약)을 대를 이어 전하는 계통에, 바른 嫡孫(적손)湖上(호상)으로 전해 가고, 그리고 湖上(호상)에서 전하는 곳에 定齋(정재) 柳先生(류선생)선생이 있다.

대략 세월이 상하 300년간이나 흘어도, 적손으로 들어맞는 자가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우고 돌보아, 이같이 ()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가히 말 할 수 있다.

선생의 資質(자질)은 완전하여 흠이 없고, 학문상의 행로는 바르고 공평하여 치우침이 없었다. 조용히 걸어온 80여년의 세월은 남자로서 高明(고명)하고 廣大(광대)한 영역을 이루어 아름답고 훌륭하였다.

그 당시 하신 말씀에 외형을 다듬는데 그치는 자는, 그 움직이는 몸가짐 가운데 ()를 찾아 볼 수 있고, 나아가 사물과 접촉하는 자는 말을 자제하여 ()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좋아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넓게 사랑하는 ()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고요하고 편안하고 단단한 곳에 ()를 지키는 소명이 있다.

가히 존경스러운 인군이 되어야 백성을 감싸 줄 수 있고, 좋은 세상을 더욱 허물없이 살도록 하여야 한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세상을 말끔히 하고, 천천히 덕을 쌓아만 가히 堯舜(요순) 시대와 같은 강산을 만들 수 있고, 그리 하면 泰山北斗(태산북두)같이 존귀한 사람이 물고기 비늘과 같이 많이 대오를 지어 나타날 것이다. 또한 신령스러운 거북과 상스러운 용과 같은 많은 수의 君子(군자)들이 세상에 나와 모두 ()을 보고 ()을 말 하게 될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40여년 뒤, 胤子(윤자) 止鎬(지호)가 선생 生前(생전)의 언행에서 분명히 들어난 妙道(묘도)精髓(정수)를 수습하여 500리 넘는 길을 달여 와, 비석에 顯刻(현각)할 글을 耆東(기동)에게 부탁을 하니, 자신을 돌아보아도 아는 것이 적고 말이 모자라 감히 맡을 수가 없는데, 3景仰(경앙)과의 의리가 있어 사양 할 수가 없었다.

 

삼가 선생의 휘자는 致明(치명), 자는 誠伯(성백)이며 上祖(상조)完山伯(완산백) 휘자 ()이며, 휘자 義孫(의손)에 이르러서 호가 檜軒(회헌)이고 집현전의 명신이시다.

中世(중세)에 휘자 復起(부기)라는 분이 있었는데 호는 岐峯(기봉)이고 鶴峯(학봉) ()선생의 從舅(종구)이시다.

고조부의 휘자는 觀鉉(관현)이고 관직은 刑曹參議(형조참의)였으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후사가 넉넉하였다.

증조부는 휘자가 通源(통원)이고, 조부의 휘자는 星休(성휴)인데 生員(생원)이었다.

부친의 휘자는 晦文(회문)으로 進士(진사)이며 대를 이어 儒學(유학)을 공부하여 鄕邦(향방)에서 높이 우러러 받들어졌다.

모친은 韓山李氏(한산이씨) 校理(교리) ()의 따님으로, 大山先生(대산선생)의 손녀였다.

선생은 正祖(정조) 정유, 외가댁에서 태어났는데, 大山先生(대산선생)骨相(골상)이 비범함을 보고, 장차 이름을 날릴 만 하다고 기대되어 글을 지어 축하 하였다.

어려서 모친이 병이 드니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曾叔祖(증숙조) 東巖公(동암공) 밑에서 학문을 시작하였는데, 처음 입학해서는 자못 느리고 둔했지만 미구에 재주와 생각이 뛰어나게 발달하였다.

13세에 모친께서 돌아가니 매일 아침 일어 날 때, 눈물이 베개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병진 년, 東巖公(동암공)이 세상을 하직하니 선생은 아픔과 실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가르침을 損齋(손재) 南漢朝(남한조) 공에게 청하였다.

損齋(손재)湖門高弟(고제)인데, 선샘은 일심으로 복종하고 따라 따라 배웠다.

南公(남공)李俛齋(이면재)공이 글을 써서 돌리며 말하기를 [우리 무리에 이 아이가 있으니, 어찌 서로 기뻐할 일이 아니랴.]하였다.

을축 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선생은 명예와 이익을 얻는 일에 사욕이 없었으나. 특히 부친은 많이 기대하고 바라니 더욱 열심히 공부에 힘썼다.

병인년, 槐院(괴원)에 보직을 받고, 갑술년에 6품 품계로 승진하였다.

을해년, 典籍(전적)을 제수, 무인년에 正言(정언)을 제수하였는데 이해에 先公(선공)이 죽었다.

기묘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선생은 여막을 지어 살면서 슬픈 중에도 예를 지키며 자신을 억제하기 힘썼다.

갑신년, 持平(지평)을 배수하고, 병술 년 正言(정언)이 제수되고, 정해년, 文學(문학)에 제수, 신묘년에 湖南掌試都事(호남장시도사)에 제수 되어, 일체의 청탁을 사절하고, 다툼질을 금하니 遠近(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공이 잘하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임진년 校理(교리)에 죄수 되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정부에 들어가 上疏(상소)와 겸해서 고을에 감추어진 民弊(민폐)을 말하였고, 연이어 修撰(수찬)校理(교리)로 너 다섯 번 제수되었다.

갑오년 獻納副校理(헌납부교리) 文學(문학)이 제수되어 일을 보고 있을 때, 겨울에 우레가 치는 이변이 있었다. 선생이 ()를 올려 말하기를 하늘의 재앙을 만났으니 君臣(군신)은 심신을 수양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하니 上下(상하)가 모두 수긍하고 그렇게 따랐다. 승진하여 同副承旨(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선생은 면직하는 글을 올리니, 승진한 직책을 더욱 열심히 하라시며 반송되어, 간절히 말을 하였으나 받아들려 지지 않았다.

參贊官(참찬관)으로 입시하여 낮에 강의를 하니 다음날, 司饔院(사옹원) 副提調(부제조)가 실수를 하여, 스스로 임금의 명이라 하며 經筵(경연)을 정지시켰다.

선생이 말하기를 아무 예고 없이 經筵(경연)을 정지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발전적이지도 아니하다. 政院(정원)은 어찌 王命(왕명)을 전달하는데 이렇게 한단 말인가.하였다.

하루는 상감의 병이 더 심해저서 종묘와 사직에서는 산천에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축문에 인군의 휘자를 서명날인 할 때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임금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다.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국가에 백관이 갖추어져 있어 만물을 다스리는데 앞뒤를 바꾸어 어그러뜨려서 이와 같이 되지 않었나.하였다.

王世孫(왕세손)嗣位(사위)에서, 상례를 하려 하는데 冠者(관자)가 고인의 명복을 빌랴고 할 때, 선생은 ()나라 成王(성왕) 晉平公(진평공)의 고사를 인용해서, 인군은 그 位置(위치)를 증명한다는 뜻으로 상례의 ()을 쓰지 않는다 하니, 儀禮(의례)를 주관하는 자들이 듣지 않아, 병이라 하고 돌아 왔다.

을미 년 山陵班次(산릉반차)에 부임하였으나 곧 골아 왔다. 右副承旨(우부승지)에 제수 되었으나 또 되돌아 왔다. 이어서 大司諫(대사간)에서 承旨(승지)에 제수 되었다.

기해년, 楚山府使(초산부사)로 제수되었는데, 그 때 비가 많이 와서 서쪽 지방에는 큰 饑饉(기근)이 일어 나, 선생은 만여 금의 돈을 들여 난민을 구제하게 되었는데, 한 사람도 산골의 고통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병이 등 백성들 모두가 관가 주방에 몰려 들어오니, 모두는 관리들이 그들을 물리쳐 없앴으나, 공운 선비를 택해 救恤(구휼)하는 일을 하게하고, 친히 講座(강좌)를 개설 하여, 고난을 이기는 법을 순순히 가르치니 , 큰 변고를 이겨내는데 효과가 있었다.

임인 년, 번갈아 大司諫(대사간)에 배수되니 楚人(초인)이 공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生前(생전)부터 사당을 지어 제향 하였다. 연이어 承旨(승지)에 제수되고 工曹參議(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기유 녀, 大司諫(대사간)에 제수 되었다.

癸丑(계축) , 대신의 상소문에 대답하였고, 嘉善(가선)으로 승진하여 城左右尹(성좌우윤)義禁副摠管(의금부총관)兵曹參判(병조참판)이 제수 되엇다.

선생은 고인이 말한 인군이 행할 바른 도리에 입각해서 三綱十目(삼강십목)()를 상감에게 올렸다. 그리고 직책을 사직 하였으나 상감이 허락하지 않았다.

을묘 년, 莊獻世子(장헌세자)追崇(추숭)하자는 뜻을 상소하였다. 大司諫(대사간) 朴來萬(박래만)를 탄핵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해서 祥原(상원)으로 유배하라는 명을 얻어 냈다.

선생은 태연하게 도리를 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시 智島(지도)로 가서 섬에 있으라는 명이 내렸다. 몇 달 뒤, 晶山(정산) 權載大(권재대)공이 뒤를 이어 荏子島(임자도)에 와서 啓狀(계장)의 글을 올렸으나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하였다.

거기네는 쇠 바퀴가 도는 듯한 우레 같은 소리가 울리고 조석으로 꽃가루가 날리며, 뜨거운 기운이 찌는 듯이 달구어, 머물러 살기에 좁고 답답하였으나 선생은 어굴 빛에 아무 증조도 보이지 않으며,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히 빗질하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았다.

11월에 특별히 용서되어 돌아 왔다. 丙辰(병진) , 죄가 있다고 면관 당하였다가 다시 기용되었는데 승진하여 嘉義(가의)가 되었다.

 

정사 년, 문인들이 雷巖(뇌암)에 집을 지으니, 선생이 晩愚(만우)라는 편액을 써서 걸었다. 그때 배우는 사람들을 모여 들어, 자연을 증기며 편안하게 즐기면서 지냈다. 가끔 가까운 곡에 사는 宗族(종족)이 흉년으로 어렵다는 말을 듣고, 혼자서는 구제할 수 없어, 朱子(주자)社倉(사창)을 본떠, 義庄(의장)을 만들었다.

경신 년, 同春秋(동춘추)에 제수되었다.

신유 년 9월에 병으로 누어, 106, 啓手足(계수족)하니, 그때 그때 별안간 큰 바람이 일고 뇌성이 천지를 진동하니 , 哲人(철인)의 임종에는 예부터 그러하였다.

다음 해인 임술 년, 집 동쪽 5리에 있는 龜峀山(구수산) 戌坐(술좌) 언덕에 장사 지내는데, 사림에서 서로 연관 되어 문상한 자만도 900여명이나 되었다.

배위는 一善金氏(일선금씨) 復久(부구)의 따님과, 平山申氏(평산신씨) 魯岳(노악)의 따님인데 두 분 모두 자식이 없어 三從弟(삼종제) 致儉(치검)의 아들 止鎬(지호)를 양자로 얻어 대를 이었다.

이제 都正(도정) 申氏(신씨)는 세 딸을 두었는데, 金在九(김재구)金精壽(김정수)감역인 金達銖(김달수)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는 淵博(연박)으로 진사이고, 손녀는 金魯憲(김로헌)의 배필이다. 金在九(금재구)의 아들은 大銖(대수)文銖(문수)이고, 金精壽(김정수)의 아들은 鎭澤(진택)이다. 金達銖(김달수)嗣男(사남) 建永(건영)은 참봉이다. 증손은 東蓍(동시)이고 하나는 아직 어리다.

선생은 ()를 가까이 하는 자질을 갖고, 뜻을 굳고 돈독하게 세워 안으로 가정에서는 이미 일찍부터 訓導(훈도)를 잘하였으며 밖에서는 師友(사우) 간의 講論(강론)을 밝게 적중하였다.

날마다 쓰는 일용품은 모두 늘 가까운 곳에서 쉽게 거두어 썼다.

독서와 窮理(궁리)에는 그 이치에 밝았다.

사람을 접대하고 사물에 접 하는 데는 그 원칙을 따랐다.

용모와 자태는 반드시 엄숙하였으며 마음을 써서 꾸미지 아니했다.

말은 정밀하고 자상하여 꾸며서 하지 아니했다.

오랜 充養(충양)으로 얼굴과 등 뒤가 밝고 맑으며 한 세대를 통 털어 宗師(종사)로 추앙 할만하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의 계통은 전승되어 자연스럽게 돌고 돌아 올 것이다.

대체로 날마다 행하는 것을 보면, 즉 부모를 모심에 극진하게 마음과 몸을 써서 봉양하고, 혹시라도 어김이 있으면, 내실에 들어가, 엄숙함을 누그러트려 마음이 하평하고 기쁘게 해들려, 가난의 고통을 잊고 모르게 하였다.

집안에서 불을 지피는 저녁, 기쁜 웃음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였고, 허물이 있는 자가 있으면 타일러 깨우쳐주었으며, 뜻을 세운 자는 권장하고 자랑하였다. 모든 가족이 다 같이, 자기 주만 하지 않게 하여, 누구도 홀로 고립되지 않게 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지 50, 오직 한결같이 지내다가 조용히 물러나니 그간 단 하로도 좋아하는 땅에 살지 못하였으며, 직위를 따라 분수를 다하였다.

문학을 논함에는 정직하고 어지러움이 없었고, 大義(대의)를 진술 할 때는 형벌을 두려워하지 아니했다.

試驗(시험)을 관장 할 때는 바르고 빠르게 일을 처리 하였다.

근심을 함께 나누어 백성을 구제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은 특별히 실시한 조치의 한 예이다.

신심을 다스리는 규칙은 둥글게도 모나게도 그 쓰임에 따라 했다.

몸을 거울에 비쳐보고 균형 있게 했고 용의를 단정하게 하여 앉아 尸童(시동)과 같은 기풍을 지녔다.

어디서 물건이 오면, 정당한 것이 아니면 받지 아니했다.

있는 것()을 속박하지 아니하고 갖는 것()을 마지못해 하지 않게 하였다.

度量衡(도량형)에는 법도가 있었고, 규칙성이 분명하고 조촐하였다.

학문을 하는 방향, 즉 넷 자식에게 六經(륙경)心經(심경)近思錄(근사록)朱子(주자)退溪(퇴계)의 책 등을 가르쳐, 자신의 몸을 되돌아보는 자료로 하였다.

汎博(범박)되게 하지 말고, 오직 간소하고 요령 있게 힘쓰며, 이것저것 많이만 읽어서 잡다하게 구하지 말고, 오직 詩文(시문) 등의 뜻을 잘 吟味(음미)해서 참 뜻을 음미하게 하였다.

자기의 뜻대로 하지 말고, 성인의 말을 따라서 지키며, 또한 성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게 되면 자기를 끌어 당겨 따르도록 하고 하였다.

앞에 간 사라들의 생각과 뜻을 모아서 종합하여, 전반적 사정을 고려해서, 깨달은 사람의 이야기를 나타내어 가르치니, 사방에서 책상을 매고 오는 자는 모두 견식이 깊고 얕음을 가리지 않고 받아주어. 각자가 모두 점점 배움이 잘 이루어녀 나갔다.

그렇게 하여 자기만 배우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많이 추천하니 支陽(지양)은 발전하는 악업의 장으로 떠올랐다.

저작한 책에 家禮輯解(가례집해)朱節彙要(주절휘요)大學童子問(대학동자문)太極圖解(태극도해)大山實紀(대산실기)知舊門人往復(지구문인왕부)疏章雜著(소장잡저) 등 모두 50여권이 있다.

오호! ()가 천하에 존재하는 것은 古今(고금)을 통해 다 같다.

지금 선생이 하신 말과 행한 행적을 古人(고인)의 범주에서 구하게 되니 바로 동일한 心法(심법)이고, 동일한 氣象(기상)이다.

어찌 가히 末學(말학)이 선생의 높은 뜻을 다 알 수 있겠는가만, 망연 되게 스스로 모방해서 햬아 릴 따름이다. 그리고 다만 그 존경하는 스승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인연으로 부끄럽게도 붓을 글을 쓰며, 이어서 ()을 한다.

 

명에 이르기를

높고 높은 도산의 학맥 嶷嶷陶山

동방의 조종인 낙강 학파 大東閩洛

적자로 적자로 주고 받아으니 嫡嫡授受

많은 철인 이어서 생겨 羣哲繼作

호상의 벽에는 초상화 많네. 湖壁有畫

선생은 산에서 내려와 先生降嶽

좋은 굼 순수한 옥 良金溫玉

가을 달 얼음 병 秋月冰壺

박약의 진수 밝히니 博約眞詮

경과 의는 다만 같은 것 敬義單符

동과 정 서로 잠기어 動靜相涵

안과 밖이 모두 밝아 內外昭融

거친데서 정미함에 드니 由粗入精

낮은데 살아도 높여져 處下愈崇

양양한 하늘의 이치 洋洋天理

다만 나의 일용이라 坦我日用

시초 구점으로 산을 골라 蓍龜山斗

아내와 유인 역시 노래하니 婦孺亦誦

동산에 형상 남이 있어 東山留像

남해를 엿보고 南海窺湘

어찌 넓게 펼쳤다 말하나 曷云展布

임지에 가서 잠기니 任他行藏

작은 말도 넓게 퍼져 闡發微言

담장 넘어 배우러 오니 以牖來學

백세를 우러러 그치리. 百世仰止

구산의 높이 솟아 있네. 龜山峻極

 

후학 가선대부공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원임

규장각대교西原(서원) 韓耆東(한기동) 근찬.

 

 

 

柳正源(류정원) 墓碣銘(묘갈명)

 

 

柳正源(류정원) 肅宗 29年 癸未(1703)~ 英祖 37 辛巳(1760) 59.

字 淳白. 號 三山. 全州人 岐峯 復起5代孫,

 

공은 새원시를 거켜 증관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易學(역학)에 밝아 易解參攷(역해참고) 10권과 河洛指要(하락지요) 1편을 저술하여 당시 문학하는 선비로서 肩臂(견비)할만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평이 있었다. 이 외에도 제자백가를 익혀 천문지리, 음양, 도학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공의 묘는 예안면 기사리 금적암 아래 간좌 곤향에 잇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떤 중이 이곳의 지세가 용두형의 명당임을 점지하고 춤을 추며 기뻐하니 소를 몰고 밭을 갈던 농부가 敢請(감청)하여 밭을 갈던 소를 잡아 참파제를 올리고 취득하였다는 것을 알고 正穴(정혈)에다 공을 모셨다 한다.

來龍(내용)의 중허리 부분에 용의 귀라는 묘한 형상의 바위가 있고, 용두에는 석불을 하지 못한다 하여 묘비를 산록에 있다.

묘가 정상에 있어 주위의 경관을 한 눈으로 볼 수 있고 특히 안동호가 앞에 있어 좋은 명당이라 여겨진다. 묘전비는 병조판서 겸 규장각제학 蔡濟恭(채제공) 찬이며 聞韶(문소) 金夏林(김하림)이 글씨를 썼다.

 

墓碣銘

英廟當寶齡遲暮要儒臣講說以替衛武抑戒問大臣諸臣曰誰可任是責者咸曰柳正源邃於經學誦聖賢書如誦己語幷諸家註說亦無不貫穿時濟恭隨諸臣後亦惟曰當今經幄之需恐無出其右者他日上又問曰予欲選一代宿儒勸講春宮久其任俾責成效誰可者首相以五人對柳公居其一已而公以春坊官赴召入以承大朝顧問根據經旨天褒甚摯退以侍春宮講席剖說義理睿注日勤余於是竊喜公至自鄒魯鄕眞不負幼學壯行而又自幸言出於口得免爲欺聖明也嗚呼使公而久於世以英廟知臣之明晉用公何可量也而公遽歿矣以位也止緋玉以壽也止五十九此吾道之戹耶世運之衰耶後二十有餘年公之孫宗文袖公狀乞銘於余閱其狀其所辨難於英廟半是余前日與論於前席者余英廟舊臣涕蔌蔌霑紙掩抑而書曰公字淳伯自幼才性絶通敏十三學尙書至朞三百註乃曰願得寬三日課至三日而布籌無滯礙父奇之遂授以周易公專精硏究至忘寢食自是務泛博諸家自天文地志陰陽卜筮籌數以及兵律道家之類靡不染指後乃約之以三經四子曰儒業在是遂力賾潛繹蓋有人不及知而自以爲樂者己酉中生員乙卯擢第丁巳丁父憂旣免喪十年不調公不以爲意惟閉門課讀己巳陞典籍未幾除慈仁縣監至則蠲火稅移軍額除架山受糶减臬司徵皮觀察使或以久例持不許公去就爭得準而後已民有叔姪訟者公愀然曰雖若亦豈無彝性但爲物慾所蔽以至此耳置庭隅頗久兩人深自慙扣頭遂以所爭讓後從父兄弟爭水而鬨悔曰得無我矦聞之乎奉使檄享倭于萊州諸倭問譯舌曰貴國人物之盛可知以如此官員在下邑也壬申移拜司憲府持平尋遞前此公入瀛選時未經臺職而相臣鄭羽良知公爲大儒公擧之也有忌忮者彈之至是臺臣丁喜愼盛言公經學雅望請收還改正之令令曰自是拜弘文館修撰者三皆辭不起甲戌遷侍講院弼善始赴朝上卽召見曰聞爾多讀書宜勉力勸講春宮也公直春坊四十餘日儀貌肅恭講說明剴隨事進規必欲堯舜我儲君東宮傾心嘉納同僚亦歎息以爲眞講官嘗夜隨東宮侍大朝上問曰今日筵臣有言孔明擇醜婦以娶何如公對曰孔明非求醜實求賢也若以爲有意求醜恐推之太過然朱子言孔明擇婦正得醜女寡欲養心與有助焉此尤宜人主用力處程子上太后書請擇宮人德性淳厚者以輔少主其意深矣上穪善先是諸學士侍上論易經或以爲伏羲只畫八或以爲重畫亦羲畫論關雎篇或曰轉輾友樂是宮人自道或曰宮人說得文王事論夢中知覺則或曰有或曰無又或以知覺分體用言至是上一一擧以問公輒援引朱子說參己見以對上笑曰某也勝某也負有若以公爲聽訟而決之者然其見重如此上又曰爾何不膺玉署命也近予老無寐欲令儒臣說文義以聽未幾拜修撰司諫又特授校理時上並罷違牌諸臣職獨命不罷公日敦迫於是公進伏闕門外一日違召者凡十一夜二更命史官傳旨曰望七老君寒夜立以待廉隅雖曰可伸分義安在公自念義不可出不爲動四更命外補通川郡守後上語侍臣曰柳正源引義則過守確可尙也時乙亥大侵旣赴任措畫得數千斛穀每當分賑饋粥使坊里各揭旗進退竟日無喧譁失伍者繡衣使者以微服覘嗟歎以去一日大雪道不通船載米粟遵海巡閭里民往往僵臥不起忽扣門呼與米人無不感極流涕者丙子因應敎元仁孫及臣濟恭推薦公經術命內擬遂拜副校理民老少擁馬啼泣碑以銅以頌其德頃之上特命陞資仍拜同副承旨力辭遞戊寅除春川府使及陛辭上召見曰予欲以玉署銀臺使之今焉出外惜哉然漢時用人必經治民努力焉公嚴以奉法惠以敷政蠲蔘省徭民吏戶歌明年春棄歸庚辰除刑曹參議上書辭不許辛巳始拜命尋遷同副承旨上諭曰久不見矣除旨非偶勿遽歸也轉右副又移判決事受暇還連拜大司諫戶曹參議公病甚尋醫至安郊女家一日命淨埽房室倚衾而臥語及國家事憂歎良久曰吾不能絲毫報聖恩仍噓唏流涕已而逝九月三十日也卒之明日有兵曹參知除命旣斂以櫬還用明年正月葬于道藏洞坐丑原柳本全州人中世有掌令濕完山伯至義孫事我世宗選入集賢殿以文學著官至大冢宰五世至復起從叔舅金鶴峯先生學號岐峯贈左承旨於公爲六世曾祖諱益輝祖諱相時考諱錫龜俱以文行重於鄕母延安李氏天麟之女也公以幼失恃懷至痛及後出宰州縣又不及皇考在世時每埽塋域悲不自勝友姊妹事小母愛謹幷至門庭之閒和氣常融如也澹於財有富奴請贖公只取百金曰奴甚貧身致萬金是渠之福也吾豈可掠人之福奴感之且死屬其子納良田數頃卻之人有潛入田摘稻穗者家少輩執致于前公曰非渠也歲也旣收者歸以救飢後勿復爾也顧謂少輩曰禁之卽已不必使閭里知之其在州縣公明仁恕民有小過率多寬貸人或疑其雨露太勝公曰守令民牧愛之如子猶懼其不蔇况武怒而臨之彼將何所恃耶然尤無良爲民害者不根究痛治不止民愈久而愈不能忘莅慈仁也受一邑田簿置硯室中忽失之公知吏輩竊復出中草籠使計吏六七輩唱準布籌闔戶而坐用兩籌縱橫案上吏計畢白總數公曰爲總當幾何縮八十有奇何也令更籌果如公所言吏知其不可欺以所竊者還投籠中其聰明絶人如此公深於易裒集諸家易說參互考證附以己意爲易解參攷十卷又以爲韓氏意見諸圖猶有未備爲河洛指要一篇有請學者輒曰此非學者先務熟讀語孟平易文字後及易未晩也平生不喜著述閒有作李訥翁光庭亟穪爲當世罕倫云公配贈淑夫人宣城李氏曦之女生三男一女男震休明休日休壻李漢佑繼配淑夫人務安朴氏廷煥之女亦三男二女男敬休萬休弼休壻金汝源李象先震休子宗文星文灝文明休子鴻文懿文出后女適進士李宗周金洛運李光翰日休子道文敬休子皆幼女適權思啓金希鱗萬休子皆幼女適權思周弼休以灝文爲嗣銘曰

公有手錄講義一編編之維何一堂君臣英考聖神發難孔多公拜析理如癢得爬過刦茫茫人說盛時獨留斯世我髮爲絲泣最公蹟英考之思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兼兵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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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英祖(영조)의 나이가 점차 많아지자 강설을 하는 儒臣(유신)을 구하는데, 춘추시대 ()武公(무공)戒書(계서)를 만들어 자신을 경계한 내용의 것을 바꾸려고, 대신과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누구에게 이것을 매끼면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柳正源(류정원)이 경학에 깊어 성현의 말을 잘 외우는데 마치 자기 말과 같이 쉽게 하며, 아울러 제자백의 註說(주설)까지도 역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그때 蔡濟恭(채제공)도 여러 신하들 뒤에서 역시 생각하며 말하기를 지금 經筵(경연)을 하는 자를 구하는데, 그 자는 두려움 없이 나올 것입니다.하였다.

몇일 뒤 상감이 또 묻기를 「「나는 당대에 연로하고 명망 있는 학자를 선발하여, 春宮(춘궁)을 강의하도록 권하고자 하며, 오래도록 그에게 맡겨, 효과가 있게 하려하는데 누가 좋은 자인가.하니, 수상 5명이 대답하기를 柳公(류공)이 그 첫째 적임자입니다.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세자시강원 관리로 소집해서, 왕조의 고문을 계승하게 하니 경서의 요지와 근거를 잘 강설하여 나라의 표창을 많이 받았다.

물러나서는 춘궁을 모시고 강연을 하고, 義理(의리)를 분석해서 설하고 주의 깊게 날로 부지런히 하였다.

나는 이를 기쁘게 바라보는데, 공은 스스로 鄒魯之鄕(추로지향)과 같은 학문의 깊은 경지에 이르러, 어릴 때 배운 것을 장년에 와서 실행하려고 하며,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스스로 희망적인 말이 입에서 나와, 좋지 않는 일이나 책임을 회피해서 면하고자 한다거나, 지덕이 총명한 임금의 견식을 속이는 일이 없었다.

오호! 공으로 말미암아 오래도록 이 세상에서 영조는 신하의 현명함을 알고, 나아가 공을 등용해도 어찌 그의 능력을 다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공이 갑자기 죽으니, 그의 지위는 緋玉(비옥)에서 그치고, 수명은 59에서 그치니, 이와 같이 자신의 길이 재난을 만났고, 이 세상에서의 운수가 막힌 것이라네.

그 뒤 30여년, 공의 손자 宗文(종문) 소매에서 공의 書狀(서장)을 내놓고 내게 ()을 청하는데, 書狀(서장)을 보니, 말하고자 하는 바는 英祖朝(영조조)에 대해 태반도 언급하지 못했지만, 나는 전일 앞자리에서 합께 의논을 했던 사람이고, 또한 英祖朝(영조조)舊臣(구신)이니 눈물이 종이에 속속 떨어져 書狀(서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을 했다.

공의 자는 淳伯(순백)이고, 어릴 때 붙어 재주와 성품이 너무나 민첩해서, 13세에 尙書(상서)를 배우고, 돌시 만에 삼백의 ()를 익혔다.

그리고 말하기를 넉넉잡아 삼일이면 내가 바라는 것을 이를 수 있다.하고, 삼일이 되니 산가지를 다루는데 막힘이 없었다.

부친이 이상하게 여기고, 이에 周易(주역)을 주니, 공은 전력을 다해 침식도 잊고 정성들여 연구하였는데, 이때부터 제자백가의 광범한 지식까지 힘써 공부하여 天文(천문)地理書(지리서), 陰陽(음양), 卜筮(복서), 數理(수리) 등과 兵律(병률), 道家(도가) 까지도 광범위하게 공부하였으며, 손을 대지 아니하는 것이 없었다.

뒤에 三經(삼경)四聖人(사성인)의 글도 요약하고 나서, 말하기를 선비가 할 일이 여기 있다.하며, 더욱 힘써 깊이 궁구하였다. 그리하여 대체로 사람들인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아 스스로 기뻐하였다.

기유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을묘년에 관리로 발탁되고, 정사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상을 마치고 10년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아니했다. 공은 관직에 나갈 뜻이 없어, 문을 닫고 독서만 하였다. 기사년 典籍(전적)으로 승진하고 얼마 되지 않아 慈仁縣監(자인현감)이 제수 되어 부임하여 火稅(화세)를 밝히고, 軍額(군액)을 변경하였다.

다시 架山縣監(가산현감)으로 제수 받고 쌀을 내다파는 것을 주리고 안찰사에게 가죽을 요구하니, 관찰사는 오랜 관례로 그리 하는 것을 불허하였다.

공이 취임한 다음 평화롭게 다스려진 뒤에, 백성중에 叔姪(숙질)간에 소송을 재기한 자가 있어 공이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영구히 변치 않는 혈연의 정이 그대들에게 없나. 다만 물욕으로 양심이 가려 이지경이 되지 않았는가.하며, 마당 한 구석에 오래도록 놔두니 두 사람은 깊이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두드렸다. 그리고 드디어 쟁송을 양보하였다.

그 사건 뒤에 從父(종부) 형제간에 물 때문에 싸운 자가 있었는데 뉘우치며 말하기를, 사욕을 없애고 사또의 말을 들었다.라고 했다.

왜놈이 萊州(내주)에 들어와, 보낸 편지를 받고 만나 보니, 여러 왜적이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貴國(귀국)에는 인물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런 유능한 관원도 하찮은 이 작은 읍에 있구나.하였다.

임신년,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으로 옮겨 배수하고 전과 같이 찾아가니 공이 선발되어 아직도 臺職(대직)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相臣(상신)鄭羽良(정우량)공아 공이 大儒(대유)라는 것을 알고 공을 높이 천거하니 시기하고 헐뜻는 작들이 있어 규탄을 하였다.

그때 臺臣(대신)鄭喜愼(정희신)이 공의 經學(경학)이 바르고 기대된다고 힘주어 말을 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청거해서 불러들여 다시 명을 내리니, 명하여 좋다. 지금부터 홍문관수찬을 배수한 자 셋은 모두 사양 못하고 기용되어야 한다.하였다.

갑술년에 侍講院弼善(시강원필선)으로 옮기고 비로소 조정에 가게 되었는데, 상감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듣기로 그대는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하였다. 마땅히 힘써 春宮(춘궁)에게 강의를 할지어다.하였다.

공은 곳 세자강원으로 가서 40여일동안 용모를 단정 엄숙하게하고 명확하고 알기 쉽게 강설을 하였며, 모든 일을 규정대로 따라 하며, 우리 태자의 마음이 堯舜(요순)같은 성군이 되기를 바라니, 동둥도 마음을 기울려 기쁘게 받아들이고 동료역시 진실로 좋은 명 강의에 감탄하였다.

가끔 밤에 東宮(동궁)을 모시고 大朝(대조)에도 가는데 어느 날 상감이 묻기를 오늘 經筵(경연)에서 신하가 말하기를 孔明(공명)은 못생긴 추한 부인을 택했다고 하는데 어쩨서인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공명은 못생긴 추한 여자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실재로 구한 것은 현명한 여자입니다. 만일 추한 여자를 구할 뜻이 있었다면, 아마도 생각건대 너무나 잘못일 것입니다. 그러나 朱子(주자)가 말한 孔明(공명)이 부인을 택하는데는 그를 바로 醜女(추녀)라 한 것은, 욕심이 적고 마음을 잘 닦아, 더불어 낭군을 잘 도와주는 분일 거십니다. 이는 더욱 人主(인주)에게 합당한 사람이며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程子(정자)太后(태후)에게 올린 글에 청하건 데 궁인을 택하는데 덕성이 淳厚(순후)한 자로 하라.” 하였는데 어린 임금을 보좌하는데 덕성이 깊은 궁인을 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그 뜻이 깊다고 생각합니다.하니 상감은 옳다고 하였다.

먼저 그렇게 여러 學士(학사)들이 상감을 기다려, 易經(역경)을 논하는데, 혹은 伏羲(복희)가 그린 八卦(팔괘) 그림으로, 혹은 역시 복희씨의 하도낙서 그림을 그려 설명하고, 詩經(시경)關雎篇(관저편)을 논하기도 하였다.

혹은 궁녀에 대해 말하기를 원만하게 벗을 좋아하며 사는 것이 궁녀의 나갈길.이라고도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궁인이 문왕을 설득했다는 고사는, 꿈속에서 말 하다가 깨달았다는 말과, 혹은 그럴 수 있다는 말과, 혹은 그럴 수 없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혹은 知覺(지각)이 분산되어 원리와 응용으로 말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상감은 일일이 예를 들어 물다가, 갑자기 공에게 朱子說(주자설)을 물었다. 공은 자신의 견해를 섞어 대답을 하니, 상감은 웃으며 모야는 이겼고, 모야는 졌다.하고 결론을 내려 주었다.

또한 상감은 송사를 듣고, 공과 같이 결정하는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이다. 하고 또 말을 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홍문관에 근무하하는 명을 받지 아니했는가? 근간에 내가 늙어 잠이 오지 않는데, 儒臣(유신)에게 글의 뜻을 설명시켜 듣고 싶다.하였다. 얼마 있다가 修撰司諫(수찬사간)을 배수하고 또한 특별히 校理(교리)를 배수 받았다.

그때 상감은 포고문을 위반한 여러 신하의 직책을 모두 파직하였는데

오직 공만은 홀로 파직 하지 말라 명을 내렸다. 공은 대궐 문밖에 나가 엎드려, 소집하는 영을 하루 어긴 자가 모두 11명인데, 二更(이경)이 되자, 史官(사관)에게 교지를 내려 명하기를 61살의 늙은 사람이, 추운 밤에 서서 기다리는 것은 무리니 중지하라.명했다.

품행이 바르고 절조(節操)가 굳은 품성의 공은 비록 그렇게 말을 해도 계속 서서 기다리며, 분수를 지켜 의()를 행하며 편안하게 지켰다. 공은 스스로 ()를 생각하며 대문 앞에서 나가지 아니하고 움직지 아니했다.

四更(사경)이 되자 외직인 通川郡守(통천군수)로 명이 내렸다. 뒤에 상감은 侍臣(시신)에게 말하기를 柳正源(류정원)은 의를 지키기가 너무 지나치지만 확실히 지키는 것은 가상한 일이다.라고 했다.

그때 을혜 년의 큰 변이 있어, 부임하고 나서 수천 석의 곡식을 얻어 처리를 하는데, 얼마동안 죽을 끓여 구휼하며, 마을에 각각 깃발을 걸면 그것을 보고 나오고, 물러가고 하라 하고 , 날마다 배식이 끝날 때 까지 떠들거나 길을 잃어버린 자를 없게 하였다. 繡衣(수의)의 사신이 하는 일을 微服(미복)으로 감시를 하여,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한식하며 돌아갔다. 하루는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혀 통행이 안 되어, 배로 쌀과 조를 실고 오는데, 바다가 마을을 순시하니, 백성들이 가다가 쓸어져 일어나지를 못하여 , 그런 집 문을 두들려 쌀을 주니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병자년 應敎(응교) 元仁孫(원인손)과 신 蔡濟恭(채제공)이 공을 經術(경술)로 추천한 때문에 內擬(내의)로 명을 받고, 副校理(부교리)를 배수하니, 백성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떠나는 말을 잡고 을었으며, ()으로 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 무렵 상감은 특명으로 자격을 승진 시켜, 同副承旨(동부승지)로 임명하니, 굳이 사양하고 물러났다.

무인년 春川府使(춘천부사)를 제수하여 陛辭하니, 상감이 만나 보시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홍문관 승정원에 근무하기를 원하는데 지금 외직으로 나가니 아깝구나. 그러나 ()나라 때 사람을 쓴 것 같이 반드시 백성을 잘 다스리도록 노력하기 바란다.하였다.

공은 엄히 법을 지켜 은혜로 정치를 하고 모든 것을 잘 살펴 勞役(노역)을 감소하니 백성과 관리들이 다 기뻐했다. 다음 해 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경진년에 刑曹參議(형조참의)에 제수되자 글을 올려 사직하니, 허락되지 않았다. 신사년에 비로소 명을 받아 同副承旨(동부승지)로 옮겨가니 상감이 불러 보시고 말하기를 오랫동안 못 보았구나.하였다. 뜻하지 않게 교지를 받고 갑자기 돌아오게 된 것이다.

우부승지로 전보되고 또 판결사로 옮겨진 다음, 휴가를 얻어 잠시 돌아 왔다가, 이어서 大司諫戶曹參議(대사간호조참의)를 배수하였으나 공은 병이 심해 의원을 찾아 安郊洞(언교동) 딸집에 가서, 하로는 방을 깨끗이 치우라고 명하고, 자리를 깔고 누어 國事(국사)에 대해 말을 하고, 오래도록 탄식하면서 내가 무능하여 털끝만금도 성은에 보답하지 못했다.하고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리며, 이미 졸하였다.

930일이었다. 졸한 다음 날 兵曹參知(병조참지)로 제수되었다는 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염을 하여 입관 뒤었다. 다음 해 정월 도장동 좌축원에 장사지냈다.

()씨는 본래 全州(전주) 사람이며, 중세에 장령인 ()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完山伯(완산백)이었고, 그 아래 義孫(의손)에 이르러 우리 世宗(세종)에게 벼슬하여, 선발되어 集賢殿(집현전)에 들어가 文學(문학)이 저명하므로, 관직이 大冢宰(대총재)에 이르렀다.

오세에 이르러 復起(부기)金鶴峯(김학봉선)선생의 從叔舅(종숙구) 인데 호가 岐峯(기봉)으로 左承旨(좌승지)로 증직된 분으로 바로 공의 6세조이다.

증조는 휘 益輝(익휘)이고 조부는 휘 相時(상시)이며 부친은 휘 錫龜()인데 모두가 학문과 행실이 구비되어 향리에서 존중받는 분들이었다.

모친은 延安李氏(연안이씨)天麟(천린)의 딸이다. 공이 어릴 때 돌아가셔 늘 아픔을 안고 살았고, 뒤에 벼슬길에 올라 고을로 나가니 부친 살아 있을 때 잘 봉양하지 못했다.

묘역을 청소 할 때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매들과는 우애 있게 지냈고, 작은 어머니를 받들어 사랑과 공경을 다해 문정에는 늘 하목하고 기쁜 소리가 들렸다.

재물에도 담박해, 재물이 생기면 노비를 불러 나누어 주고, 공은 다만 백량을 취하며 노비들은 매우 가난하다. 만금을 벌기 위해 몸을 바치고 있으니, 이렇게 번 것이 그들의 복이다. 내가 어찌 남의 복을 뺏을 수 있다.하였다.

노비들은 감동하고 이에 공이 죽자 공의 자식들에게 좋은 밭을 많이 바쳐서 보답을 하였다.

어떤 사람이 논에 몰래 들어와 벼 이삭을 훔친 자가 있어 집안에 젊은이가 잡아서 공 앞에 대려 오니 공이 말하기를 많지 않다. 세월이 그렇게 한 것이다. 이미 얻은 것을 갖고 가 굶주림을 구하도록 하라. 뒤로는 다시 하지 말라.하고 젊은이 들을 돌아보며이미 금지시켰으니 동내에 필요없이 알리지 말도록 하라.했다.

그 고을에는 공의 밝고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을 알아, 백성들의 허물도 적었고 솔선해서 너그러움을 베풀었다.

사람들이 혹 은혜를 크게 들어내는가 의심하니 공이 말하기를 수령이 백성을 달 다스리고 자식과 같이 사랑하며, 혜택이 고루 미치지 아니하는 가 두려워해야 한다. 또한 무력으로 노해서 백성을 대하면 그들이 장차 어찌 믿겠는가? 그리하여 더욱 백성을 좋게 하고, 해치는 일을 없게 하며 근본적으로 아프게 다스리는 일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해 주면 백성은 길이 잊지를 아니하고, 정치는 인자하고 어진데 다다르게 된다.하였다.

한 읍의 토지 장부를 받아 방안 벼루 가에 두었는데 갑자기 잃어버렸다. 공은 벼슬아치가 훔쳤다는 것을 알고 , 다시 바구니 속에서 초본을 꺼내서 계산을 해가며, 관리 6,7명이 소리를 내어 읽어가며 따져 보는데, 산가지를 펼쳐, 문을 닫고 앉게 한 다음, 두 산가지를 가로 세로로 책상 위에 놓고, 관리가 계산을 다 하게 한 다음 총수를 말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모두가 얼마나 되는가? 줄잡아 80이 좀 넘을 것이다. 어떤 냐?하고 다시 산가지로 계산을 해 보니 과연 공이 말한 대로 였다. 문서를 훔친 관리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훔친 문서를 몰래 그것을 몰래 다시 소쿠리 속에 던져 넣었다. 그 총명하기가 남을 뛰어 넘기 이와 같았다.

공은 주역에 대해 깊이 알고 諸家(제가)易說(역설)을 모아 서로 참고해서 고증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견을 붙여 넣어 易解參攷(역해참고) 10권을 만들고, 또한 韓氏意見(한씨의견)에 관한 그림도 그렸고, 그래도 미비한 것을 위해 河圖洛書要指(하도낙서요지) 한 편도 만들었는데, 그것을 청하는 학자가 있으면, 문득 말하기를 이것을 처음 배우는 자가 먼저 익히는 것이 아니다. 공맹의 평의한 글을 충분히 읽은 뒤에 주역을 다루어야 하고, 그래도 늦지 않다.하였다.

평생토록 저술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는데 한가로울 때면 그래도 몇권의 책을 지었다. 訥翁(눌옹) 李光庭(이광정)공이 말하기는 당대에 드문 사람이다.라고 했다.

공의 배위는 증 숙부인 宣城李氏(선성이씨) 曦之(희지)의 딸이며 3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震休(진휴)明休(명휴)日休(일휴)이고 사위는 李漢佑(이한우)이다.

繼配(계배)는 숙부인 務安朴氏(무안박씨) 廷煥(정환)의 딸이며 역시 3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敬休(경휴)萬休(만휴)弼休(필휴)이고 사위는 金汝源(금여원)李象先(리상선)이다.

震休(진휴)의 아들은 宗文(종문)星文(성문)灝文(호문)이고, 明休(명휴)의 아들은 鴻文(홍문)출후한 懿文(의문)이고 딸은 진사 李宗周(이종주)金洛運(금락운)李光翰(이광한)의 짝이 되었다. 日休(일휴)의 아들은 道文(도문)이고 敬休(경휴)의 아들은 모두 어리다. 딸은 權思啓(권사계)金希鱗(금희린)의 배필이 되었다. 萬休(만휴)의 아들은 모두 어리다. 딸은 權思周(권사주)의 배필이 됭. 弼休(필휴)가 이어갈 글을 지어 달라하기에 명하여 이르기를

 

공에게 手記(수기)가 있으니 公有手錄

講義(강의)를 한 한편이다. 講義一編

어찌하여 펴냈던가. 編之維何

한 집안의 君臣(군신)을 위해 一堂君臣

영특하게 생각하고 정신 맑으라고 英考聖神

어려움이 심히 많았어도 發難孔多

공은 벼슬 배수하고 이치를 분석해서 公拜析理

가려운데 긁어 주듯 如癢得爬

아득히 허물없이 지내오니 過刦茫茫

젊을 때 사람들을 설득하여 人說盛時

홀로 이렇게 세상에 머물다가 獨留斯世

내 그 어언 백발이 되었다네. 我髮爲絲

울면서 공의 공적 돌아보며 泣最公蹟

아름답게 길이 기억하네. 英考之思

 

보국숭록대부판중추부사겸병조판서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홍문관제학 蔡濟恭(채제공) ()

 

 

 

柳升鉉(류승현) 墓碣銘(묘갈명)

 

柳升鉉(류승현) 肅宗 6年 庚申(1680)~ 英祖 22年 丙寅(1746) 67.

字 允卿. 號 慵卨. 全州人 復起

 

공의 묘는 임동면 마령리 지리실에 있다. 정조 경술 14(1790) 樊巖(번암) 蔡濟恭(채제공) 찬비의 雲紋蓋石(운문개석)는 상당히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묘 앞에 陽坡(양파) 參議(참의) 觀鉉(관현), 배위 선산김의 宗孫 생원 星休(성휴)의 묘도 있다.

공은 30세인 숙종 45(17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예조좌랑을 거쳐 정랑이 되어 잠시 귀향하고 있을 대인 영조 4년 무신(1728) 李麟佐(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공은 안둥의병으로 창의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임금이 弓矢(궁시)를 하사하여 표창하였으며, 종성부사, 함안군수, 공조참의,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慵卨集(용설집) 4권이 있으며 정조 무신년 倡義周甲(창의주갑)에는 이조참판으로 증직되고 자손녹용의 은전이 내려졌다. 공은 자태가 특출하고 견식이 탁월하여 시를 공부함에 사우간에 추중되었으며 난국 때는 대중을 포용하여 의연히 특출하니 大器(대기)로 촉망받았고 출사하여서 청렴한 성품이 기대도 되었으나 출세에 듯이 없어 귀향하여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墓碣銘

通政大夫工曹參議慵窩柳公墓碣銘

公諱升鉉字允卿自號慵窩柳本文化著姓中世移籍全州事我朝位冢宰以文學爲集賢名臣者曰義孫二世而弘文典翰贈參判者曰軾自京師而家嶺南者曰潤善又二世而號岐峯從叔舅金鶴峯先生學卒贈左承旨者曰復起於公五世也高祖友潛號陶軒曾祖橚副護軍祖振輝國子進士皇考奉時鄕里稱好義君子妣鵝洲申氏以徵之女公方幼父已知其器局欲成就之入山村課讀甚密公亦先意承志日孶孶劬業大有塲屋聲然見士習有不可意雖入塲卽棄歸焉肅宗己亥闡增廣文科未拆號公已首鄕路榜聲追及旅店伴宿者無不失驚倒公鼾睡如初人知其遠大器也辛丑調太學官癸卯陞典籍遷禮曹佐郞明年陞正郞一日忽棄官歸父老迎慰且曰今人仕京師卽效京師人言貌君猶有鄕野態公笑曰無才不能改也公一弟曰觀鉉未及成而皇考歿公愛之則慈父也敎之則嚴師也俾卒成立有無甘苦一與均雖使指耕垈無常主也以家務一畀之結茆瓢溪水石名其窩以慵吟諷適志殆欲忘世間得喪丙午除龍岡縣令旋因前令仍其職未及赴而遞英宗戊申凶孼謀射天煽及嶺以南安東大夫士以爲隴西耻擧義兵討之設軍門孔子廟前推公爲大將雪涕雲集者皆冠章甫儒生不知軍旅事公毅然麾召仰天以誓夜草檄辭氣忼慨人無不俯首讋慄肅然無一譁將建旗鼓鼓行聞官軍已滅賊湖嶺平公亦罷兵歸公質愨寬和待人絶無畦畛誠意盈缶人無賢不肖咸曰厚德長者平居但見其粥粥若無能臨事變忠憤直前不以死生攖其心大節之不可奪如此方其按壁壘也安撫使朴師洙入轅門歎曰師有律矣號召使趙公德隣亦曰墨紙褁頭裂裳被體爭赴王事不亦韙哉己酉除兵曹正郞移拜司憲府掌令遞授宗簿寺正尋陞通政資除鍾城府使及陛辭上召見曰當去年逆亂倡義誓衆非若歟眞所謂不識何狀慰諭甚摯賜弓矢以遣鍾之士相賀曰樂哉往年玉川趙公謫吾土常言南中有柳某賢士也今乃爲我侯耶未幾潼關民潛越淸國界覺觀察使啓罷地方官公不以旣罷而弛於政一境稱治明年夏代者至民大小擁道餞至有涕出而送者癸丑朝廷憂咸安邑事窳壞擇文臣負聲望者理之難其人銓部擧以公公爲治務在平恕節官用薄民稅未及二年閭里復於是移校宮去渫就高封植朴迂拙子墓復其有行義文學者數家聚邑子捐俸繼粟勸飭不倦邑俗朋家作仇日睢盱公盡誠和解無有讙呶于衖者民以爲不圖吾郡復見鄭文穆公儒化乙卯因稅船覆依例下之理吏言貨掌律者可得還任公訶曰有朝廷處置在竟罷還壬戌拜判决事居數月謝病歸除寧海府使寧與家鄕壤接姻黨交舊綴其中人有勸嚴閽絶賓客公曰何必乃爾度吾心力而爲之而已未三月倉吏憚公將發姦故不謹上供蔘公罷而吏則逸邑人無不憤惋公不以介意公前後莅郡律己嚴其自鍾城歸也單衾敝而不易一女新嫁粧奩無北物自咸安就理郡人用舊例賫錢四百緍追贐于家公悉還之貧約如舊人或稱歎則笑曰實無能且邑薄故耳乙丑拜工曹參議明年春除豐基郡守時大饑馳詣臬司商救民策還數日而病矣將加請糶卧呼草命書明日吏白令子弟代署公開目曰不可言訖而逝丙寅三月二十八日也糶狀後於赴上司惻甚給賑糶頗優民受賑者皆流涕曰此我侯遺惠也享年六十七以櫬歸用九月甲午葬于安東砧谷負庚之原遷淑夫人墓同封焉公初釋褐恨榮不及父母在世又以貧不能自盡親喪戒子弟終事無敢踰於親恤嫠姊撫孤甥事堂兄上舍公元鉉如嚴君公嘗欲移家靑松措置已凝上舍公泣而止公亦不忍離去密菴李公歎曰美哉兩君友于之篤也嘗與金霽山爲莫逆交及其罹世網親知惴慄無敢顧公獨夢思寤歎恤窮阨久而未已公所養平易寬醇至奉法請托無敢售爲禮部郞有同姓人中鄕解求陳試者公不許曰詐死親戚固不可况欲以是欺君耶在咸安將赴考試鄕書至則令子弟先去其別紙曰旣見而從其請我爲行私若故黜之彼爲見枉不如不見也郡有魚政丞墓國舅有龜之先也國舅遣族人書抵公欲以推墓田田入於民已同永業公謝不與國舅亦謝之公晩喜易以爲不讀此無以决嫌疑通事理爲詩文惟主平實當理不役意工拙有遺集藏于家配光州金氏縣監漢璧之女事舅姑承君子無違行勤女紅以資公遊學先公十六年而卒男不育取弟參議觀鉉子道源爲嗣一女適李世憲側室一男四女男演源婿權正恭趙相述金啓泰李達遠道源中司馬以文行稱三男四女男長範休雅飭爲士林重見任齋郞次洛休玄休四婿李之恂李宜秀金坤壽金聲振演源子儉休公族子大司諫正源讀書人也常曰慵窩公鎭物之量恬靜之操無愧古人吾輩謹守其轍庶得寡過及公歿素食終三月斯可以益知公實德之爲家庭觀感者深矣銘曰

時危則國耳忘身時平則斂之若無吾以盡吾分爾用不用何關於吾薄施塵糠爲龔爲黃斯可以了斯人耶不能不爲世道慨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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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통정대부 工曹參議 慵窩(용와) 柳公(류공) 묘갈명

공의 휘는 升鉉(승현) 자는 允卿(윤경), 自號(자호)慵窩(용와)이며

()씨로 본이 文化(문화)이다. 중세에 全州(전주)에서 이적하였다.

우리 조선에서 벼슬이 冢宰(총재)이고 문학으로 集賢殿(집현전) 名臣(명신)인 자가 義孫(의손)이며, 二世(이세)에 홍문전한이며 참판으로 증직된 자에 ()이 있었고, 경성에서 영남으로 이사를 온자에 潤善(윤선)이라는 자도 있었다. 二世(이세)에 호가 岐峯(기봉)이라는 자도 있다. 鶴峯(학봉) 金先生學(금선생학)의 종숙의 장인 자로 사후에 좌승지로 증직된 자가 復起(부기)인데 바로 공의 5세조이다.

 

高祖(고조)友潛(우잠)이고 호가 陶軒(도헌)이며, 증조부는 ()이며 부호군이고, 조부는 振輝(진휘)이고 국자진사였다.

부친은 奉時(봉시)이며 향리에서, 좋고 바른 군자라고 일컬었던 부이다.

모친은 鵝洲申氏(아주신씨)()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 이미 부친이 그 기량을 알고, 크게 성공을 시키고 져,

山村(산촌)에 들어 보내 독서를 매우 열심히 시키려 했다. 공도 역시 선친의 뜻을 받아들여 날마다 열심히 공부를 하여 사는 마을에 크게 이름이 났으나, 선비들이 보니 배움에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서 산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 왔다.

숙종 己亥(기해), 增廣文科(증광문과)가 열렸는데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지만 공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의 소식은 여관까지 전해 왔다. 함께 여관에 묵는 자들은 놀라지 않는다가 없는데 공은 코를 골며 자는 척하니 사람들은 그 그릇이 깊고 큼을 알았다.

신축 년에 太學官(태학관)이 되고 癸卯(계묘) 년에 典籍(전적)으로 승진하였으며 禮曹佐郞(례조좌랑)으로 옮겨갔다가, 다음 해 正郞(정랑)으로 승진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니, 노부가 위로하며 맞이하고, 또한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京城(경성)에서 벼슬을 하며, 곧 경성 사람들의 말투를 흉내 내는데 너는 아직도 고향의 말과 태도를 유지하고 있구나.하니 공은 웃으며 재주가 없어 그러지 못했습니다.하였다.

공의 한 동생이 觀鉉(관현)이라 하는데, 다 크지도 못했는데 부친이 돌아가니, 공이 자상한 아버지 같이 사랑을 하였고, 가르치기를 엄한 스승같이 하였다. 마침내 성인이 되니, 있고 없고, 달고 쓰고 간에 모두 한결같았으며, 비록 밭을 갈라 명해도 변함없이 잘하였다.

집안일을 하는데도 한결같이 남을 배려하였다. 띠풀을 엮어 石間水(석간수) 개울가에 움집을 만들어, 그 움집의 이름을 ()이라 하고 뜻에 맞는 풍월을 읊으며, 세간에서 얻은 ()의 슬픔을 거의 잊었다.

병오년, 龍岡縣令(용강현령)에 제수되었지만 전에 그 직책이 있었다고 되돌아오라 명이 내려 부임하기 전에 교체되었다.

英宗(영종) 무신년, 흉측한 서자들이 모의해서 왕을 치려하여 영남에서 선동 하니, 안동의 대부와 선비들이 隴西(농서)의 수치로 알고, 의병을 모야 이를 토벌하려, 공자묘 앞에서 軍門(군문)을 설치하는데, 공을 대장으로 삼았다. 그때 더러움을 씻으려 모인 자들은 모두 갓을 쓰고 글을 읽는 남자들인 유생으로 군대와 전쟁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했다.

공은 의연히 대장으로서 소집하여, 하늘에 맹세하고 밤에 격문을 초해서, 강계하고 분개하는 말을 하니, 그 격문을 보고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두려워하는 모양이 하나도 없어지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면서 행진하다가, 들어보니 관군이 이미 적을 영호남에서 토벌하여 평정했다 한다. 공 역시 병사를 흩어버리고 돌아왔다.

공의 성질은 삼가고 너그럽고 온화하여 사람을 대함에 경계를 두지 않았고 성의가 가득하며, 현명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구별이 없었었으니, 모두가 다 후덕한 長者(장자)라 하였다.

평소에는 다만 그것이 죽이면 죽으로 무능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태에 임하면 변해서 충성을 위해 분개해 곧바로 나가며, 생사를 가리지 않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절개는 이와 같이 그 마음속에 잃지 않고 마치 성벽같이 굳었다.

안무사 朴師洙(박사수)兵營(병영)으로 들어와 탄식하며 말하기를 군에는 군율이 있다. 趙德隣(조덕린)을 소집라라.또 말하기를 또한 검은 종이로 머리를 싸고 찢어진 옷을 입혀 제왕의 일로 소송을 하라. 바르지 아니하다.하였다.

기유년에 兵曹正郞(병조정랑)을 배수하고, 다시 사헌부장령을 임명받고 다시 宗簿寺正(종부사정)이 되어 通政資(통정자)로 승진한 다음 鍾城府使(종성부사)로 승진하였는데 승진을 사양하였다.

이에 상감이 불러 말하기를 작년에 반역의 난이 있을 때, 倡義(창의)하여 대중에게 맹서하기를 반역을 옳지 않는 일이다 하였는데 참으로 그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하며 위로 하고, 활과 화살을 손수 집어서 하사하였다.

영남의 尊師(존사)는 서로 축하하며 즐겁구나.하였다.

지나간 해에 玉川(옥천) 趙公(조공)이 우리 고장에 귀양을 와 항상 말하기를 남쪽에 柳某(류모)는 현명한 선비다, 라고 했는데, 지금은 나의 감시자가 되었다 했다.

얼마 오래지 않아 潼關(동관)에서 백성이 몰래 淸國(청국)의 국경을 넘어가려다 발각되자 관찰사는 지방장관을 파직시키니, 공은 뜻하지 않게 파직되어 정계에서 강등되어, 한 지경만 다스리게 되었다.

다음해 여름 교대 하는 자가 오자, 백석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길가에 나와 손을 쥐고 전별하는데, 송별하는 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보냈다.

계축년, 조정은 咸安邑(함안읍)에 잘못된 일이 생겨 걱정이 생겼는데, 명성과 인망이 있는 문신을 택하여 다스리게 하려 하였지만, 그런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銓部郞官(전부랑관)이 공을 추천하여 공이 평정을 지키며 관대하고 인자하게 다스리고, 官用(관용)을 절감하고, 백성의 세금을 가볍게 하니 2년에 채 되지 않아 村落(촌락)에 다시 校宮(교궁)을 옮겨 오고 이탈함이 그치고 높이 따르며, 朴迂拙(박우졸)공의 묘를 받들어 봉하고, 다시 의로운 행동을 하는 문학자 여러 집을 읍에 모아, 계속 오곡으로 급료를 주고, 태만하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읍의 풍속이 여러 집 들이 서로 원수같이 노려보았는데, 공이 모두 화해를 시켜, 마을에서 시끄럽게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없어지게 되었다.

백성들은 다시 내 군을 나쁘지 않게 하고, 다시 鄭文(정문) 穆公(목공) 처럼 儒道(유도)에 의해 교화되는 듯하였다.

을묘년, 國稅(국세)를 싫은 배가 뒤집히자, 법에 따라 다스리게 되니, 관리가 말하기를 화물을 관장한 자를 불러 드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공도 꾸짖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처치가 있을 것이나, 필경 방명해서 돌아오겠지.하였다. 임술 년, 판결사를 배수하고 몇 달을 있다가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 왔다.

 

겨울에 寧海府使(녕해부사)를 제수하니,

집이 있는 고장과 가까이 있어 편안하였지만, 그러나 姻黨(인당)과 오랜 친구들도 그 가운데 있어서, 문지기에 엄하게 명해서 면담을 거절하는 빈객도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하필 네가 내 心力(심력)을 헤아려, 가게 할 뿐이다.하였다.

석 달이 안 돼서,

倉吏(창리)가 공을 공사를 간사하게 하려하다고 탄핵을 하여서, 위로 바치는 인삼을 바치지 아니했다. 공은 파직되고 倉吏(창리)는 달아나니, 읍민은 분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개의치 않았다. 공은 전후의 일을 군에 가서 말을 하니, 그에게 법은 엄하여, 鍾城(종성)으로 유배되어 갔다.

단불 옷으로 바꾸어 입을 수도 없었고, 딸 하나를 새로 시집을 보내는데, 단장할 화장품과 예물도 없었다.

咸安(함안)에서 의금부에 나가 조사를 받으니, 고을 사람들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돈 사백 양을 혼사에 쓰라고 가져와, 집으로 보내오니 공은 모두를 다 돌렸다. 가난은 예와 다름없었고 사람들은 혹 웃으며 말하기를 실로 무능하구나. 또한 고을도 야박하구나.하였다.

을축 년 工曹參議(공조참의)를 배수하고 다음해 봄 豐基郡守(풍기군수)를 배수하였는데, 그때 큰 기근이 일어나 , 按察使(안찰사)에게 달려가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를 상의 하고 돌아 와 며칠 만에 병이 났다.

관의 쌀을 내다 팔기를 더욱 청하고, 누어서 명령서를 ()하였다.

다음 날 관리가 자제가 대신하라고 명하려하니, 공이 눈을 뜨고 아니된다.하였다. 말을 마치치자 졸하니 병인 328일이었다.

관곡을 풀어낸 뒤에 부고를 전하니 上司(상사)는 매우 슬퍼하며 빈민들에게 푸는 쌀을 넉넉하게 하라하니, 받는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이것은 공이 우리들에게 남기신 은혜다.하였다. 향년 67세였다.

入棺(입관)을 하고 9월 감오에 안동 침곡 부경 언덕에 장사 지냈다. 숙부인 묘도 옮겨 合葬(합장)하였다.

공이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은 한스럽게도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가난하여 자기 힘으로 親喪(친상)을 치룰 힘이 없어도,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끝내 일을 감히 친척에게 넘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혼자된 누이를 도우고 의탁 할 곳 없는 조카를 돌보며 사촌형인 진사 元鉉(원현)공을 친아버지 같이 따랐다. 공은 항상 靑松(청송)으로 이사하기를 원했는데, 이사할 준비를 다하고 이사를 하고자 하니, 진사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리므로 공 역시 거절 못해 떠나지 않았다. 密菴(밀암) 李公(리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참 아름다운 일이다. 두 사람의 우애가 돈독함이로다.하였다.

金霽山(김제산)과 막역한 친구로 가끔 함께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근심하기도 하였다. 친지는 돌보지 않는 다고 벌벌 떠는데, 공은 홀로 꿈속에서 읊으며 살아갔다. 궁하고 가엾은 사람을 구하기 이미 오래부터 했으며 아직 그치지 아니하고, 공은 平易(평이)하고 순일한 성품을 길러, 지극히 법을 지키고 받들어 청탁에는 감히 절대로 팔리는 일이 없었다.

禮部郞(예부랑)이 되었을 때, 같은 성인 사람 중에 鄕解(향해)를 합격하고 陳試(진시)를 요구 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친척이 죽었다고 속이는 것은 결코 아니 된다. 항차 이는 인군을 속이려 하는 것이 된다. 함안에 考試(고시)가 있으니 가서 시험을 봐라.하였다.

고향에서 편지가 왔는데, 즉 그 자제들이 먼저 떠나며 별지에 이르기를 이미 말하시는 뜻을 보았으니 그 말대로 따라 내 스스로 시험장에 행하려합니다. 당신이 고의로 물리치시니, 그대를 보아도 모르는 척 보지 않았는 듯 하리다.]하였다.

군에 魚政丞(어정승) 묘가 있는데 國舅(국구)有龜(유구)의 선조이다. 國舅(국구)의 친족들이 공에게 편지를 내 밀며 墓田(묘전)을 갖고자 밭을 백성들로부터 얻어 영원히 세습하는 位土(위토)로 하고자 한다 하였다. 공은 거절하며 주지 않았고, 國舅(국구)에게도 역시 거절하였다.

공은 만년에 周易(주역)을 좋아했고, 사리에 통하기 의심스럽고 거슬리는 것은 결제하지 아니했으며, 그런 것을 읽지도 아니했다.

詩文(시문)도 이치에 합당하고 平易(평이)하게 하였으며 실질적인 것을 생각했고 잔재주를 부려 꾸미지를 않았다. 遺集(유집)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배위는 光州金氏(광주금씨)로 현감 漢璧(한벽)의 딸이다. 시부모를 섬기기 君子(군자)를 모시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고, 부지런히 女工(여공)을 하여 공의 유학의 학비를 마련했는데, 공보다 16년이나 먼저 졸하였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동생인 참의 觀鉉(관현)의 아들 道源(도원)嗣子(사자)로 하였다. 딸이 한명인데 李世憲(이세헌)의 처가 되었고, 측실에서 14녀가 났는데 아들은 演源(연원)이고 사위는 權正恭(권정공)趙相述(조상술)金啓泰(금계태)李達遠(리달원)이다. 道源(도원)中司馬(중사마)로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났으며, 34녀가 있는데, 장남은 範休(범휴)로 단아하고 조심스러워 사림에서 높이 추앙받고 齋郞(재랑)의 소임을 맡고있다. 다음은 洛休(락휴)玄休(현휴)이고 네 사위는 李之恂(이지순)李宜秀(이의수)金坤壽(금곤수)金聲振(금성진)이다.

演源(연원)의 아들은 儉休(검휴)이다.

 

공의 동족의 아들로 大司諫(대사간) 正源(정원)은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항상 말하기를 慵窩公(용와공)은 사물을 헤아려 진압하고,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 古人(고인)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니, 우리들은 삼가 그 발자취를 지켜야 한다.하였는데 공이 ()하자, 3개월 동안이나 素食(소식)을 하였다. 이는 가히 공이 실로 가정을 위해 덕을 베풀었고, 공을 보는 자가 공의 덕을 더 잘 알고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명에 이르기를

시국이 위태로우면 나라를 걱정하며 내 몸도 잊고 時危則國耳忘身

시국이 평화로우면 숨어서 없는 듯이 하니 時平則斂之若無

자신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이같이 다하며 吾以盡吾分爾

쓰이고 쓰이지 안고가 내게 무슨 상관인가 用不用何關於吾

박하고 엷은 녹봉 薄施塵糠

공손을 다하고 굽혀서 서두름을 다하고 爲龔爲黃

이와 같이 이 사람이 해왔으니 斯可以了斯人耶

불가능한 것 하지 않는 세상일 분계 하노라. 不能不爲世道慨傷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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