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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도씨(都)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성주도씨)

 

 

본관(本貫): 성주(星州)

시조(始祖): 도조(都祖): 도미(都彌)

유래(由來):

 

도씨(都氏)는 중국 여양(黎陽 : 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사람인 도계(都稽)가 한무제(漢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며, 우리나라 도씨(都氏)는 도계(都稽)의 후손 도조(都祖)가 성제(成帝 : 중국 전한 제11대 황제) 때 고구려(高句麗)에 건너와서,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인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왕권쟁탈을 벌일 때 크게 활약하여 유리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였으며,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공헌한 후 우리나라에 살게 되면서부터 문호(門戶)가 열렸다.

그러나 [전고대방(典故大方)][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때의 정승(政丞) 도미(都彌)를 도씨(都氏)의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이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가문의 중요 인물

 

도미(都彌)

생몰년 미상. 백제시대의 평민. 서울인 한성 부근의 벽촌 평민이었다. 그러나 의리를 알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 부덕이 있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개루왕이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무릇 부인의 덕은 정결이 제일이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 하니,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더라도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 ” 하였다.

이를 시험하기 위하여 개루왕이 도미를 머물러 있게 한 다음 왕의 근신 한 사람을 왕으로 속여 도미의 아내에게 보내어 도미와 내기하여 내가 이겨 너를 궁녀로 삼게 되었으니 너의 몸은 내것이다. ” 하니 도미의 아내가 교묘히 몸종을 단장시켜 속여 대신 모시게 하였다.

뒤에 속은 사실을 안 개루왕은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 두 눈알을 빼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작은 배에 태워 띄워보냈다. 한편, 도미의 아내는 궁중을 탈출하여 강가에서 통곡하니 빈 배 한척이 오기에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을 만나 천신만고 끝에 고구려 땅에 이르러 그곳에 살게 되었다.

 

도진(都陳)

고려 창업에 공훈을 세웠던 도진(都陳)이 정승(政丞)의 벼슬에 올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성주(星州)에 세거(世居)하여 후손들이 성주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도순(都順)

그러나 [성주도씨족보(星州都氏族譜)]에 의하면 고려 원종(元宗)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낸 도순(都順)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전서공파(典書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중랑장공파(中郞 將公派), 시승공파(侍丞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시중공파(市中公派), 봉차령공파(奉車令公派)등 크게 7파로 갈라져서 세계 (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도충박(都忠朴)

일세조(一世祖) ()의 아들 충박(忠朴)이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

 

도유도(都有道)

공조전서(工曹典書)

 

도유덕(道有德)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짐.

 

도홍정(都洪正)

()의 현손(玄孫)인 홍정(洪正)은 고려 말에 도씨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人物)로서,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되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진 효안(孝安)의 세째 아들로 출생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 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오르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도길부(都吉敷)

1388(우왕 41). 고려 후기의 문신. 성산군(星山君) 유덕(有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판관을 지낸 효안(孝安)의 손자로, 부원군 홍정(洪正)의 아들이며, 찬성사를 지낸 응()의 아버지이다.

1380(우왕 6) 왜구가 경산부(京山府)에 침입하여왔을 때 원수가 되어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였던 이성계 ( 李成桂 )의 지휘를 받아 이를 토벌하였다.

1382년 한양천도 때, 이인임 ( 李仁任 임견미 ( 林堅味 염흥방 ( 廉興邦 ) 등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였는데, 지나는 곳마다 온갖 패행을 일삼았다 한다. 그러나 권신 이인임의 인척인 까닭으로 중용되어 대언 ( 代言 )이 되었으며, 이듬해 제조정방(提調政房)이 되었다.

1384년 우왕이 총애하던 봉가이(鳳加伊)를 간통하였다는 참소로 인하여 서북면도체찰사로 좌천되었다. 1388년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으나 이인임·임견미 일파의 숙청 때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가산은 몰수당하였다.

 

도응도(都膺道)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중심인물인 응()은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냈으나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 (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후 어릴적 친구인 그에게 옛 정을 못 잊어 다섯 차례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고려의 산하임을 고집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太祖)는 청송당(靑松堂)이란 호()를 내려 치하했고, 운천서원(雲川書院)과 경양사(景良祠)에 제향되었다.

 

도흥(都興)

봉차령(奉車令) 천우(千遇)의 아들 흥()은 공민왕(恭愍王) 때 무신(武臣)으로 왜구(倭寇)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상원수(上元帥)에 올랐고,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도형(都衡)

1480(성종 11) 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본관은 팔거(八 紺 ). 자는 국전(國銓), 호는 행정(杏亭).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以敬)이고, 아버지는 진사 맹녕(孟寧)이며, 어머니는 우자선(禹子善)의 딸이다.

성주에서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가법(家法)이 엄정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붕우의 사귐에 신의가 있었다.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출세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19(중종 14) 조광조 ( 趙光祖 ) 등이 사림정치를 주도하면서, 학행으로 현량과 ( 賢良科 )에 천거되어 삼등으로 급제한 뒤 전적 · 공조좌랑 · 형조좌랑 · 호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1월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직당하고 향리에 물러나 학문에 전심하였다.

 

도응유(都應兪)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자는 해보(諧甫), 호는 취애(翠崖). 아버지는 원량(元亮)이다. 정구 ( 鄭逑 )의 문인이다. 선조대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최영경 ( 崔永慶 )을 구호하고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1(광해군 3) 정인홍 ( 鄭仁弘 )이 이언적 ( 李彦迪 이황 ( 李滉 )을 배척하자 그 잘못을 반박하였고, 박이립(朴而立) 등이 정구를 모함하자 상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해명하였다.

1624(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1627년 정묘호란에는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정경세 ( 鄭經世 )를 도왔다. 주리파 ( 主理派 ) 성리학을 강조하여 경험적 세계의 현실문제·사회문제보다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시하였다. 오현예설 五賢禮說을 편찬하였다. 대구 병암서원 ( 屛巖書院 )에 봉향되었다.

 

도성유(都聖兪)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움.

 

도경유(都慶兪)

평양서윤(平壤庶尹)

 

도신수(都愼修)

신수(愼修)는 함흥 부사(咸興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대구(大邱)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도신징(都愼徵)

성리학(性理學)으로 유림(儒林)의 존망을 받았던 신징(愼徵)1674(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 : 효종의 비)가 별세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 : 인조 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많은 치적(治績)을 쌓았다.

 

도영성(都永成)

보성군수(寶城郡守)룰 지냄.

 

도석훈(都錫壎)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

 

도원결(都元結)

한성우윤(漢城右尹)

 

 

 

성주도씨 정렬각.

 

 

 

 

都衡(도형) 선생의 효행.

 

양진공의 편지

 

선생의 성은 도()씨요, 이름은 형()이고 호는 행정(杏亭)이다. 성종 경자에 경북 성주군 벽진면 운정동 은행정에서 진사 양진공 맹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행정의 집안은 대대로 예학을 숭상하는 선비 가문이었으며, 넉넉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학문을 충실히 닦았으며 의기 바르게 성장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골격이 준수하고 재주가 남달랐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그의 아버지 양진공은,

별로 가르침이 적어도 성취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은근히 자식의 앞날을 기대하였다.

 

공은 차차 장성하면서 큰 뜻이 있었으나, 어버이가 늙으심에 멀리 가지도 않았고, 더욱이 과거도 보러 가지 않으면서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공은 항상 어버이의 성미를 맞추어서 행함에 조심하였고, 어버이가 하고 싶은 일은 미리 알아 했다. 공의 아버지가 병이 깊이 들었을 때에 공은 옷을 벗지않고 시탕을 극진히 하였으며 매일 대변을 씹어 보고 아버지의 병의 차도를 알아내 어 처방을 하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매일 새벽에 얼어나 목욕을 하고 하늘에 아버지의 병이 낫기를 축수하니 공의 동생 운제 공도 자연 따라하였다. 이러한 정성의 덕택인지는 몰라도 병에 차도가 있어 완쾌하였으며, 이에 이웃과,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공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함이라 하였다.

 

공은 어버이 살아생전에는 이와 같이 예와 지성으로 섬겼고 돌아갔을 때 는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별도로 위패를 사당에 모시고 조석 상식을 평시와 같이 하고 배례한 뒤에야 조석을 먹었다. 또 매일 새벽과, 출입할 때에는 사당에 배례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무릎 꿇었던 자리가 한 자나 패어질 정도였다고 하니 공의 효성이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한번은 그의 아버지 양진 공의 유품 중에서 양진 공이 손수 쓴 편지를 보고 부모 생각이 간절하여 하루 종일 울고 난 뒤에 글을 지어 슬픔을 달랬다.

부모의 음성과 얼굴은 하늘에 박혀 뵈옵지 못하나 생시에 쓰신 손 흔적 은 한자나 되는 편지 종이 위에 남아 있도다. 유한한 글자 가운데 끝없는 눈물이라 아침부터 저녁 까지 울어도 미치지를 못 하겠구나.” 이와 같이 공의 효성은 지극하였다.

 

공은, 현풍에 있는 한훤당 김 굉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동생 균과 같이 찾아 갔다. 한 훤당은 공과 그의 아우에게 먼저 효를 행하고 그 남음이 있으면 학문을 하라고 가르쳤으며, 공도 그의 뜻에 유의하고 한훤당의 가르침 이야말로 학자가 날로 쓰는 공부에 가장 적절한 것이다 하고 더욱 소학을 익혀 그 글로써 몸에 모든 법도로 삼았다.

 

중종조에 현량과의 과거를 보일 때에 공은 급제하여 관계에 들게 되었으나 소인배의 참언으로 조 광조와 같이 파직을 당해 향리에 묻혀 제자들에게 도 의와 학문을 강의하였다. 그 후 몇 번 벼슬길에 다시 나섰으나 얼마 있지를 못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그러나 공은 임금과 간신배들을 원망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매일 북쪽으로 사배를 올리면서 임금과 나라 걱정을 하였다.

공의 이와 같은 행실을 눈여겨 관찰해 온 향토 석학 한강 정 구는

좌랑 도 공은 성주 고을에 선정을 베풀고, 정성스런 효도와 지극한 행실 은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

고 하면서 그의 충효에 대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후 나라에서는 공의 고향에 정려각을 지어 그의 뜻을 기리었으며, 후손들은 그 옆 자리에 신도비와 효경각을 세워 공의 가르침을 깨우치고 있다.

 

출전성주군 초전중학교 김 교사

참고 문헌 杏亭實紀, 杏亭先生實紀略譯

 

 

 

 

都始復(도시복)의 효행.

 

우박도 피해 간 땅

 

도 효자는 이름이 시복(始復)이고 가난한 농삿군 도 상진(都尙震)과 강릉 유씨 (江陵劉氏) 사이의 맏아들로 1817년 예천군 상리면 야목 마을에서 태어 났으며, 이 마을에는 지금도 도 효자가 살았던 집과 그의 효성에 관한 자취 들이 전설처럼 남아서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은 소백산맥 중에서 죽령 다음으로 높다는 저수재 바로 밑에 자리 잡은 두멧마을이므로 화전이 대부분이고 식량마저 자급자족 할 수 없어서 마을 뒷산에 올라가 숯을 굽거나 땔나무를 하여 60 리 밖에 있는 예천장에 까지 져다가 팔아서 생계를 이어 가는 것이 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 수단이었으니, 도 효자도 일찌기 책을 옆에 끼고 공부할 형편도 못 되었으며 본받을 만한 이웃도 없었고, 어릴 때부터 부모를 도와 나뭇짐을 져다가 예천장에 팔아야 했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겠는가 ! 그러나, 그는 천성이 어질고 착했으며, 나뭇짐을 지고 오가면서 듣고 보는 것이 그에게는 모두 배우는 것이 되었다.

 

부모가 혹 몸살이라도 앓게 되면 곁을 떠남이 없이 알뜰히 두루 살펴 온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식성을 살펴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여 밥상에 반찬이 없을 때가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서 쇠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므로 어머니께

쇠고기를 사다가 봉양하기 위해 예천장에 나가 숯을 팔았는데, 그 때도 몹쓸 도둑들이 있어서 도 효자의 숯 판 돈을 훔쳐 갔으므로 한숨을 쉬며 길거리 에 앉아 탄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복잡한 길거리에 주저앉은 도 효자 옆에 엽전꾸러미가 떨어져 있었다.

 

도 효자는 그것을 주워 들고 이 돈을 잃은 사람도 나처럼 얼마나 애를 태울까.’하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저물도록 돈 임자가 나타나지 않자 장군들이 한결같이

그돈은 도효자가 잃은 것을 하늘이 갚아준 것이니, 쇠고기와 약을사라.” 하고, 권하므로 돈 임자가 나타나면 다른 날 갚아 주기로 하고 쇠고기를 사 서 지개뿔에 걸고 약을 지어 손에 들고 걸음을 재촉하였는데 갑자기 독수리

가 지게뿔에 달고 가는 쇠고기를 채 가지고 날아가 버렸다. 이제 해는 졌고, 다시 쇠고기를 살 돈도 없어 스스로 효성이 모자라서 오늘 같은 일이 생겼 다고 한탄하면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자니 마음은 급하고 걸음은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집까지 10 리쯤 남았을 때 큰 범이 나타나서(이 곳을 업은골 이라고 한다) 눈빛으로 길을 밝혀주어 집에 도착하니 그 아내가 마중하면서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묻기에 그 날 있었던 일을 말하니 그 아내가 웃으면 서 독수리가 우리 집 마당 위에 날아와서 쇠고기를 떨어뜨리고 가길래 그것 으로 부모님 저녁 반찬을 했다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업은골의 호랑이와 인연을 맺고 평생 동안 범의 도움을 받았다. 몇 해 뒤에 또 모친이 병이 나서 음력 5월의 무더운 날에 홍시를 먹고 싶 다고 하므로 종일토록 감나무 믿을 서성댔으나 감나무 잎만 무성하고 홍시 를 구할 길은 없어 힘없이 어두운 산길을 내려오는데 범이 길을 막고 타라 는 시늉을 하므로 도 효자는 범을 탔다.

범이 오랜 시간을 달리다가 어느 큰 집 앞에 내려놓으므로 살펴보니 이곳은 강원도 강릉 후곡의 김씨 집 대문 앞이었다.

 

마침 이 집에서는 기제사를 모시고 있었는데 젯상을 살펴보니 틀림없는 홍시가 차려져 있었다.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홍시 구하러 온 연유를 말하 니 그 주인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평소에 홍시를 즐겼으므로 항상 200 개를 땅 속에 묻어 두는데 평년에 꺼내 보면 성한 것이 너댓 개밖에 안 되었는데 금년에는 50여 개가 성하므로 이상히 여겼더니 이것은 오로지 도 효자의 효성이 지극했던 까닭입니다.”라고, 치하하며 홍시 20 개를 주므로 다시 범을 타고 그 밤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께 드렸다.

 

또 아버지가 병이 들어 한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다고 했다. 도 효자는 울면서 10 리 밖에 있는 우곡천을 오르내리며 애를 쓰니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와 그것으로 봉친할 수 있었고, 며칠 뒤 쇠고기가 떨어져서 예천장까지 쇠고기를 사러 가야겠다고 새벽에 숯짐을 지려는데 난데없이 노루 한 마리 가 마당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동짓날은 날씨가 참으로 추웠는데 효자의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수박을 먹어 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을 듣고 도 효자는 지난 여름에 거두어 둔 수박 덩굴을 뒤지면서 제발 수박을 찾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마 음 속으로 빌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90 리 떨어진 안동군 풍산면

저포동 앞들의 외밭에서 수박을 구했다.

 

1864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시묘살이를 하는데 마실 물을 구할 수 없어 걱정을 하니 무덤 가까운 바위 밑에서 샘물이 용솟음쳐 흘러 나오다가 3 년의 시묘가 끝나자 그 샘물도 말라 버렸다. 시묘를 하고 있을 때 호랑이도 3년을함께 밤마다 여막을 지켜 주었는데 하룻밤은 호랑이가 오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기다렸는데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가 보니 호랑이가 허방 다리에 빠졌으므로 구출해 주었었다.

 

그 뒤 1876년 가을에 이곳에는 서리가 일찍 내려 농작물에 피해가 많았으나 오직 효자의 화전은 온전했으므로 곡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그 이듬해 여름에 어느 과객이 오늘 오후에는 우박이 내리되 도효자의 논 밭에는 탈이 없을 것이라고 산신령들이 예언하더라고 하더니 과연 우박이 내렸으되 효자의 농토는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은 거듭되어 이웃 고을에까지 소문이 퍼져 도 효자의 행실은 온 나라 안이 모두 알게 되고 명심보감이라는 당시 어린이들의 학습서에까지도 실리게 되었으며, 1891년에 75 세로 세상을 떠나니 이웃을 비롯하여 예천 장터 사람까지도 하늘이 낸 효자를 잃었다고 슬퍼하였으며, 군 내의 모든 선비들과 고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유림 장으로 장사를 지내 주었다.

 

출전예천군 대창중고등학교 정 교감

참고 문헌 也溪實記, 孝烈行誌 . 孝子旌閭碑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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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 도씨(星州都氏)는 남한에 총 11,191가구, 46,5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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