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고흥류씨(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고흥류씨)

 

 

본관(本貫): 고흥(高興)

시조(始祖): 류영(柳英)

유래(由來):

 

고흥 류씨(高興柳氏)는 고려 개국 후 흥양지방의 호장(戶長)이었던 류영(柳英)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7세손 청신(淸臣:지추밀원사 승무의 아들)이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삼한삼중대광 도첨의정승(三韓三重大匡都僉議政丞)에 올라 고흥 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고흥(高興)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류장(柳莊)

예빈윤(禮賓尹) 천의 아들인 장()은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부모와 함께 천안(天安)으로 내려가 일찍이 할아버지 청신이 원()나라에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 온 호도(胡桃)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오늘날 호도는 천안의 명물(名物)이 되었다.

 

류탁

판밀직사(判密直司) 유기(有奇)의 아들로 고려 말에 기재(奇才)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탁은 <장생포곡(長生浦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류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준은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참찬 문하부사로 고흥백(高興柏)에 봉해졌으며 정종(定宗)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류습(柳濕)

()은 태종(太宗)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예(((이조(吏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했고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우군원수(右軍元帥)가 되어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웠다.

 

류충서(柳忠恕)

습의 증손 충서(忠恕)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 율(權慄)의 막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어, 대를 이어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류세웅(柳世雄)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구월산(九月山) ()을 토벌하여 형조판서(刑曹 判書)에 오른 세웅(世雄:효백의 아들)은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다.

 

류몽인(柳夢寅)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유명한 몽인(夢寅)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조선 중기의 설화문학(說話文學)의 대가(大家)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고 <상부사(孀婦詞)>라는 시()로 인하여 아들 약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류의신(柳義臣)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됨.

 

류춘필(柳春苾)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한마교(汗馬橋)에서 전사한 춘필(春苾)이 유명했다.

 

류경인(柳景仁),류성인(柳成仁),류극인(柳克仁)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로 일컬어졌던 경인(景仁성인(成仁극인(克仁)은 정유재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고종(高宗) 때 명정(命旌)되었다.

 

류숙(柳潚)

호당(湖堂)으로 이름났던 숙()과 활()은 부정(不正) 몽표(夢彪)의 아들로서, 형인 숙은 대사간(大司諫)과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영주군(瀛州君)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광해군(光海君)의 심복이었다는 죄목으로 청하(淸河)에 안치되었으며, 아우 활은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냈다.

 

류종흥(柳宗興)

숙의 증손 종흥(宗興)은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가 거론되자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회심소(回心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속으로 들어갔다.

 

류중교(柳重敎)

한말(韓末) 고종 때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류홍석(柳弘錫)

항일투쟁에 불구가 되었던 홍석(弘錫)이 유명.

 

류병우(柳秉禹)

병우(秉禹)는 하동(河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의 기관을 습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단식으로 옥사했다.

 

류중권(柳重權)

철종(哲宗) 때 가재(家財)를 털어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설립했던 중권(重權)3·1운동 때 관순(寬順)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아내와 함께 순절하였다.

 

류중화(柳重和)

중화(重和)는 의병대장(義兵大長)으로 80여 명의 동지들과 은진(恩津) 왕성골에서 왜병을 크게 섬멸하였다.

 

류영선(柳永善)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명성을 떨쳤다.

 

 

柳思訥(유사눌) 선생의 전설.

 

대제학 운구위해 닦은 섬피 뚝길

 

경서동 용두산(龍頭山) 명당자리에 세종 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류 사눌(柳思訥)의 산소가 있다.

류 사눌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숙부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계양산 서쪽 기슭에 있던 만일사(萬日寺) 에서 공부하여 마침내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그런데 세종22(1440) 류사눌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용두산에 다 산소를 쓰게 되었다. 류 사눌은 생전에 자기 산소 자리를 보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이 고장은 궁벽(窮僻)한 곳이라, 대제학을 지낸 귀인의 상여를 모시고 갈 만한 큰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의논한 끝에, 갯벌 깊은 곳에다 섬피를 깔고 그 위에다 흙을 져다 부어 새 길을 만들었다.

 

이 길이 바로 섬피 뚝길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곳 사람들은 서곳 간선 도로에서 들어가는 경서동 골프장 옆길을 섬피 뚝이라 부르고 있다.

                                                    <출전: 인천직할시지 1982년판>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7

()

33

(),()

39

(),()

28

(),()

34

(),()

40

(),()

29

(),()

35

(),()

41

(),()

30

(),()

36

(),()

42

(),()

31

(),()

37

(),()

43

 

32

(),()

38

(),()

44

 

 

1985년 인구조사 결과 남한에 총 15,296가구, 64,456명이 살고 있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고흥 류.jpg 고흥류씨(柳) 청남 14-08-26 5025
204 두릉 두.jpg 두릉두씨(杜) 청남 14-08-26 3453
203 진주동방씨(東方) 청남 14-08-26 2281
202 광천 동.jpg 광천동씨(董) 청남 14-08-26 3005
201 청주돈씨(敦) 청남 14-08-26 2049
200 목천돈씨(頓) 청남 14-08-26 2321
199 남원 독고.jpg 남원독고씨(獨孤) 청남 14-08-26 2523
198 고성도씨(道) 청남 14-08-26 1930
197 순천 도.jpg 순천도씨(陶) 청남 14-08-26 2554
196 성주 도.jpg 성주도씨(都) 청남 14-08-26 5061
195 밀양 대.jpg 밀양대씨(大) 청남 14-08-26 3084
194 밀양 당.jpg 밀양당씨(唐) 청남 14-08-26 2987
193 한산단씨(段) 청남 14-08-26 2037
192 강음 단.jpg 강음단씨(段) 청남 14-08-26 2323
191 영천뇌씨(賴) 청남 14-08-26 2146
190 교동뇌씨(雷)-2 청남 14-08-26 2293
189 교동뇌씨(雷)-1 청남 14-08-26 1816
188 개성 노.jpg 개성노씨(路) 청남 14-08-26 2025
187 함평 노.jpg 함평노씨:함풍노씨(魯) 청남 14-08-26 3711
186 밀양 노.jpg 밀양노씨(魯) 청남 14-08-26 2347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