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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남씨:의령남씨:고성남씨(南)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영양:의령:고성남씨)

 

 

본관(本貫):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시조(始祖): 남민(南敏)

유래(由來):

 

중국(中國)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인 김충(金忠)은 당()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신라 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日本)에 갔다가 귀로(歸路)에 태풍(颱風)을 만나서 신라(新羅)의 인근 지역인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죽도(慶北盈德郡丑山面丑山洞竹島)에 표착(漂着)하였다.

그는 신라에서 살기를 원하여 경덕왕(景德王)이 이러한 사실을 당천자(唐天子)에게 알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천자는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니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 후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 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후에 영의(英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로 인하여 우리나라 남씨(南氏)가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왔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남씨(南氏)의 본관(本貫)60여 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 되어 었으나 이는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후손들이전국(全國)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지명(地名)에 불과하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이다.

 

남씨(南氏)는 고려 중엽에 와서 시조(始祖)인 남민(南敏)의 후손 3형제가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갈라져서 맏형인 홍보(洪輔)가 선조(先祖)의 대()를 이어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세 계통으로 분관(分貫)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남숙손(南淑孫)

홍보의 손자 숙손(淑孫)이 고려 고종(高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걸쳐 검교예빈시경(檢校禮賓寺卿)을 지냈다.

 

남영번(南永蕃)

숙손의 현손(玄孫) 남영번(永蕃)은 신호위 보승중랑장을 역임하였다.

 

남사고(南師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학자 · 도사 ( 道士 ). 호는 격암(格庵). 역학 ( 易學 ) · 참위(讖緯) · 감여(堪輿) · 천문(天文) · 관상 ( 觀相 ) · 복서 ( 卜筮 )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한,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 煉 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자신의 생사문제까지 예언하였던 그는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남사고비결 南師古 煉 訣 남격암십승지론 南格庵十勝地論 정감록 鄭鑑錄 에 전한다.

전자에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가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을 말하는 등, 각종 재난을 예언하였다. 후자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 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 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 기술하였다.

죽은 뒤 1709(숙종 35)에 울진의 향사 ( 鄕祠 )에 배향되었으며, 편저에 선택기요 選擇紀要 가 있다.

 

남의록(南義祿)

임진왜란 때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경주(慶州)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됨.

 

남율(南慄)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움.

 

남노명(南老明)

거창 부사(居昌府使)

 

남제명(南濟明)

남종통기(南宗通記)를 저술.

 

남공수(南公壽)

계각촬요(溪刻撮要)의 저자(著者)

 

남구명(南九明)

1661(현종 2)1719(숙종 4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기서(箕瑞), 호는 우암(寓菴). 경상북도 영해 출신. 할아버지는 길()이며, 아버지는 종사랑 상주(尙周)이다.

168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10여년간 은거하다가 형 노명(老明)의 강력한 권유로 전적을 지내고, 1711년에 제주판관으로 부임, 흉년에 도민구제에 공을 세웠다.

뒤에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지내고, 다시 귀향하여 풍류를 즐기며 말년을 보냈다. 순천에 동비(銅碑)가 세워지고 제주의 죽림사(竹林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우암집이 있다.

 

의령(宜寧) 계통

 

남을번(南乙蕃)

고려조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던 을번은 조선개국 후에 입사(入仕)하여 익대보조찬화공신(翊戴補祚贊化功臣)으로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남재(南在)

1351(충정왕 3) 1419(세종 1).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초명은 겸(),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 할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천로(天老)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을번(乙蕃), 어머니는 최강(崔 碣 )의 딸이다. ()의 형이다.

1371(공민왕 20) 진사시에 제5등으로 합격했다. 아우 은과 함께 이성계 ( 李成桂 )의 세력에 가담해 고려 조정의 신진 사류로서 구 세력과 대립했다. 1389(공양왕 즉위년) 우사의(右司議)가 되었다.

1390년 판전교시사 겸 집의(判典校寺事兼執義)가 되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윤소종 ( 尹紹宗 )과 함께 비록 행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사직 ( 社稷 )의 대계(大計)를 의논하고 계책을 도왔다. 그 공으로 회군공신 ( 回軍功臣 )에 봉해지고, 곧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로서 양광도 ( 楊廣道 )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전지(田地) 170()과 노비 20구를 하사받았다. 1392년 중추원학사로 대사헌을 겸했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1393(태조 2) 주문사 ( 奏聞使 )가 되어 사이가 좋지 않던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해 명나라 태조로부터 3년에 한 차례씩 조공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공으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고, 다음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다. 이 해에 다시 진주사의 부사로 명에 다녀왔다. 1395년 아버지의 상을 당해 은거하니, 동생 은과 함께 기복 ( 起復 )되어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에 임용되고, 노비변정도감 ( 奴婢辨正都監 )의 판사를 맡았다.

1396년 예문관춘추관태학사(藝文館春秋館太學士)로서 도병마사가 되어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 김사형 ( 金士衡 )을 따라 이키도(壹岐島) · 대마도를 정벌했다. 1398년 정당문학 ( 政堂文學 )이 되어 하륜 ( 河崙 )과 함께 정안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태종이 즉위하자 세자의 서연관 ( 書筵官 )에 빈객 ( 賓客 )이 되었다.

1403(태종 3) 경상도도관찰사가 되어 시무를 조정에 보고하니 그대로 시행했고, 1404년 찬성사 ( 贊成事 )에 임명되었다. 1408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1414년 우의정 ·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제배(除拜)되고, 감춘추관사 ( 監春秋館事 )로서 과거를 관장해 권도(權蹈) · 성개(成 勘 ) 등을 시취 ( 試取 )했다.

또 하륜(河崙)과 함께 고려사 를 개수했다. 그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1415년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수문전대제학 겸 세자부(修文殿大提學兼世子傅)가 되었다. 1416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사면했다. 14191214일에 죽으니, 나라에서 조회(朝會)와 저자를 정지하고 부의를 내리고 세종이 직접 조문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 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장이 평정(平正)하고 아름다웠으며, 산술에 두루 통해 누구도 풀 수 없는 것을 풀어내었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남산(南算) ’ 이라고 불렀다. 조선 태조의 묘정(廟庭)에 추가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정유고 龜亭遺稿 가 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군보(君甫)의 증손 남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유명했다.

 

남은(南誾)

1354(공민왕 3) 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할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천로(天老)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을번(乙蕃), 어머니는 참의 최강(崔 碣 )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 재(), 아우는 우상절도사(右廂節度使) ()이다.

1374(공민왕 23) 성균시에 급제, 1380(우왕 6) 사직단직(社稷壇直)이 되고 이어서 삼척지군사(三陟知郡事)가 되어 왜구를 격퇴, 사복시정에 올랐다.

정도전 ( 鄭道傳 ) 등과 함께 조정의 신진 사류로서 이성계 ( 李成桂 ) 일파의 중심 인물이 되어 구 세력과 대립했으며,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1388(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종군했으며, 조인옥 ( 趙仁沃 ) 등과 이성계에게 회군할 것을 진언했고, 회군 뒤 이성계의 왕위 추대 계획에 참여했다.

1389(공양왕 1) 응양군상호군 겸 군부판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가 되고, 이듬해 밀직부사로 승진했다. 1391년 정몽주 ( 鄭夢周 )에 의해 조준 ( 趙浚 ) · 윤소종 ( 尹紹宗 ) · 조박 ( 趙璞 ) · 정도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다.

이듬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정도전 · 조준 · 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웠다.

조선 건국 뒤 판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고, 개국공신 1등에 책록,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졌으며, () 2백결과 노비 25구를 하사받았다.

1393(태조 2) 경상도에 파견되어 왜구를 방비하고 군적 ( 軍籍 )을 새로이 작성했으며, 지문하부사 ( 知門下府事 )가 되었다.

이듬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가 되어 새 도읍지인 한양의 종묘와 궁궐 터 등을 정했다. 1395년 부친상을 당했으나, 형인 재와 함께 기복 ( 起復 )되어 이듬해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사사(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었다.

이 때 정조사 ( 正朝使 )의 표문(表文)이 명나라 태조의 비위를 거슬려 사신 정총 ( 鄭摠 )이 살해되고 글의 초안자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압송하라는 압력이 가해 왔다. 이에 정도전과 은밀히 의논, 군량을 비축하고 진도(陣圖)를 작성하는 등 요동 정벌을 계획하기도 했다.

태조를 도와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극 간여했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 심효생 ( 沈孝生 ) 및 아우 지와 함께 살해당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1421(세종 3)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남을진(南乙珍)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충신.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풍저창부사( 淵 儲倉副使)를 지낸 익저(益 邈 )이며, 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를 지낸 천로(天路)이다. 1368(공민왕 17)에 현량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정몽주 ( 鄭夢周 ) · 길재 ( 吉再 )와 교유가 있었으며,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양주 ( 楊州 )의 사천현(沙川縣) 봉황산(鳳凰山)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에 봉하고 회유하였으나, ‘ 신하된 자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적성 ( 積城 )의 감악산 ( 紺嶽山 ) 석굴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죽은 뒤 그 석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 하였으며, 영조 때 사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을진의 후손

남포(南褒)

1489(성종 20) 1570(선조 3).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사미(士美), 호는 지지당(知止堂). 할아버지는 규()이고, 아버지는 곡산군수 치신(致信)이며, 어머니는 하비(河備)의 딸이다.영의정 곤()의 형이다. 1489(성종 20)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02(연산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공조낭관 · 홍문관직제학을 지내고, 1506년 중종반정 후에는 소격서령(昭格署令)을 지냈다. 그뒤 나라일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세상일에 뜻을 끊고, 청맹(靑盲)이라 핑계하여 벼슬하지 않고 적성 ( 積城 ) 감악산(紺岳山)에 가서 은둔하였다.

항상 떨어진 옷을 입고 산천을 두루 돌면서 스스로 창랑거사(滄浪居士) · 소요자(逍遙子)라고 일컫고, 가는 곳마다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없었다. 병으로 눕자 아들 정진(廷縉)이 임지인 곡산(谷山)으로부터 와서 모셨다.

그는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네가 여덟번 고을 벼슬을 제수받아 세번을 사양하고, 다섯번 나간 것은 부모가 있으므로 뜻을 굽힌 것이나, 우리 집에는 선대의 토지와 집이 있어 살아가기 충분할 것이니 내 죽은 뒤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말라. 그리고 묘갈 ( 墓碣 )에는 단지 공조(工曹)의 옛 직함만 쓸 것이고, 전한 ( 典翰 ) · 직제학(直提學)은 살아서도 취임하지 않았으니 쓰지 말라. ” 고 하였다.

뒤에 명종이 말하기를 () 직제학 남포는 물러나는 절개가 가상하고, 그 아들의 청백함은 옛사람이라도 넘지 못할 것이다. ” 하고 상을 내렸다. 권신 남곤의 아우였으나 권세에 물들지 않고 깨끗이 살아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남휘(南暉)

태종(太宗)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짐.

 

남지(南智)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지숙(智叔). 할아버지는 영의정 재()이고, 아버지는 병조의랑 경문(景文)이다. 음보로 감찰이 되어 부정·지평을 거쳐 의성군(宜城君)에 책봉되었다. 1428(세종 10) 집의, 이듬해 동부대언이 되었다.

1435년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음주자치통감 音註資治通鑑1질을 받아왔다. 1439년 대사헌·호조참판을 거쳐 경상도도관찰사로 나갔다. 이어 형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446년 소헌왕후 심씨가 폐비로 승하하자 자청하여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449년 판원사로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문종이 즉위하자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451(문종 1)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우의정 김종서 ( 金宗瑞 )와 함께 단종을 잘 보필해달라는 문종의 고명 ( 顧命 )을 받았으나 1452년 풍질(風疾)로 사직을 청하였다.

1453(단종 1) 영중추원사로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계유정난 때 사돈인 안평대군 ( 安平大君 )과 사위 우직(友直) 부자가 죽음을 당하였으나 병으로 화를 면하였다. 죽은 뒤 1489(성종 20) 손자 승지 흔()의 상소로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남이(南怡)

1441(세종 23) 1468(예종 즉위년). 조선 전기의 무신. 할아버지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고, 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 어머니는 정선공주(貞善公主 : 태종의 4)이다.

1457(세조 3)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했으며, 1466년 다시 발영시 ( 拔英試 )에 급제했다.

1467년 명을 받아 포천(抱川) · 영평 ( 永平 )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했고, 이시애 ( 李施愛 )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 ( 大將 )이 되어 구성군 준(龜城君浚) · 조석문 ( 曺錫文 ) · 허종 ( 許琮 ) · 강순 ( 康純 ) · 어유소 ( 魚有沼 ) 등과 토벌에 참가했으며, 군중에서 당상관에 초계(超階)되어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행호군이 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 ( 敵愾功臣 )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토벌하자 평안도선위사(平安道宣慰使) 윤필상 ( 尹弼商 )의 지휘 하에 우상대장(右廂大將)이 되어 주장(主將) 강순, 좌상대장(左廂大將) 어유소와 함께 만포(滿浦)로부터 파저강(波猪江)을 공격해 이만주(李滿住)를 참살했다.

이러한 공로로 이등군공(二等軍功)을 받았으며, 그 뒤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 (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했으며, 이어 병조판서에 발탁됐다.

그러나 그 해 신숙주 ( 申叔舟 ) · 한명회 ( 韓明澮 ) 등 원상 ( 院相 ) 세력에 의해 구성군 · 강순 등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 세력이 제거될 때 형조판서 강희맹 ( 姜希孟 )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한계희 ( 韓繼禧 )에게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는 마땅치 않다고 말한 것을, 한계희가 예종에게 아룀으로써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 ( 兼司僕將 )으로 밀려났다.

이 때 그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 ( 彗星 )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 ” 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 ( 柳子光 )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함으로써 국문 끝에 능지처사당했다.

그 뒤 1818(순조 18) 우의정 남공철 ( 南公轍 )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어릴 때 권람 ( 權擥 )의 딸이 귀신의 작난으로 죽게된 것을 남이가 귀신을 물리치고 살려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는 일화가 있다.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 ( 忠愍祠 )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 ( 忠武 )이다.

 

남섭원(南燮元)

()의 증손으로 성종(成宗)의 부마(駙馬)였던 섭원(燮元 : 성종의 딸 취정옹주와 혼인하여 선천위에 봉해짐)과 치원(致元 : 성종의 딸 경순옹주와 혼인하여 선성위에 봉해짐)이 유명했다.

 

남언경(南彦經)

목사(牧使) 치욱의 아들 언경(彦經)은 서경덕(徐慶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한 수(韓 脩)와 더불어 조선조(朝鮮朝) 경학(經學)의 쌍벽으로 일컬어졌으며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거쳐 양근(楊根) 영천동(靈川洞)으로 돌아와 67세로 세상을 마쳤다.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 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 행우(杏雨) · 최락당(最樂堂) · 벽사(碧沙). 영의정 재()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이고, 아버지는 생원 전( )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며, 김굉필 ( 金宏弼 ) · 정여창 ( 鄭汝昌 )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 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한다. 주계정(朱溪正) · 이심원(李深源) · 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활동 상황

1478(성종 9) 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 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 ( 山林 )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식이 높은 선비)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 ( 內需司 )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 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 ( 顯德王后 )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 ( 勳舊派 )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 ( 任士洪 ), 영의정 정창손 ( 鄭昌孫 ) 등이 그를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 ( 金時習 )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하였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 ( 靖難功臣 )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영희(辛永禧) · 홍유손 ( 洪裕孫 )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 ” 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 ( 朴彭年 ) · 성삼문 ( 成三問 ) · 하위지 ( 河緯地 ) · 이개 ( 李塏 ) · 유성원 ( 柳誠源 ) · 유응부 ( 兪應孚 )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 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 을 세상에 펴냈다.

문집 간행 경위

그가 죽은 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 ( 尹弼商 )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간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중종 6) 참찬관 ( 參贊官 ) 이세인 ( 李世仁 )의 건의로 성현 ( 成俔 ) · 유효인(兪孝仁) · 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 ( 元昊 ) · 이맹전 ( 李孟專 ) · 김시습 · 조려 ( 趙旅 ) · 성담수 ( 成聃壽 )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 ( 汭陽書院 ), 함안의 서산서원 ( 西山書院 ), 영월의 창절사 ( 彰節祠 ), 의령의 향사 ( 鄕祠 )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 · 추강냉화 秋江冷話 · 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 · 귀신론 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남이웅(南以雄)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름.

 

남이흥(南以興)

인조조에서 대사헌(大司憲)과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이흥(以興)이 뛰어났다.

 

남이성(南二星)

숙종조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남용익(南龍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던 용익(龍翼)은 약천(藥泉) 구만(九萬)과 함께 조선말에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1

 

남구만(南九萬)

1629(인조 7) 1711(숙종 3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 ( 美齋 ). 개국공신 재()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식( )이고,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 어머니는 권박(權 黴 )의 딸이다.

송준길 ( 宋浚吉 )의 문하에서 수학, 1651(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가주서 · 전적 · 사서 · 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659년 홍문록에 오르고 곧 교리에 임명되었다.

1660(현종 1) 이조정랑에 제수됐고, 이어 집의 · 응교 · 사인 · 승지 · 대사간 · 이조참의 · 대사성을 거쳐, 1668년 안변부사 ·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662년 영남에 어사로 나가 진휼 사업을 벌였다. 1674년 함경도관찰사로서 유학 ( 儒學 )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했다.

숙종 초 대사성 · 형조판서를 거쳐 1679(숙종 5) 좌윤이 되었으며, 같은해 윤휴(尹 頊 ) · 허견(許堅)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남해 ( 南海 )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 ( 庚申大黜陟 )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 · 부제학 · 대사간 등을 역임했으며, 1680년과 1683년 두 차례 대제학에 올랐다. 병조판서가 되어 폐한 사군 ( 四郡 )의 재 설치를 주장해 무창 ( 茂昌 ) ·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軍政)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1684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즈음 송시열 ( 宋時烈 )의 훈척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해 소론 ( 少論 )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 ( 甲戌獄事 )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에 대해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 ( 金春澤 ) · 한중혁 ( 韓重爀 )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 낙향했다. 그 뒤 부처(付處) · 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서용되었으나,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당시 정치 운영의 중심 인물로서 정치 · 경제 · 형정 · 군정 · 인재 등용 · 의례 ( 儀禮 )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폈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 뛰어나 책문(冊文) · 반교문(頒敎文) · 묘지명 등을 많이 썼다. 또한,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많이 남기고 있다.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청구영언 에 전한다.

숙종 묘정(廟庭)에 배향,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鐘山書院), 무산(茂山)의 향사 ( 鄕祠 )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천집 · 주역참동계주 周易參同契註 가 전한다. 글씨는 좌상남지비 左相南智碑 · 찬성장현광비 贊成張顯光碑 , 개심사 ( 開心寺 ) · 양화루(兩花樓) · 영송루(迎送樓)의 액자를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남유용(南有容)

대제학 용익의 증손 유용(有容)은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과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1764(영조 40) 우빈객(右賓客)이 되어 치사(致仕)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남공철(南公轍)

유용의 아들 공철(公轍)은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당세의 명문장가로 손꼽혔다.

 

고성(固城) 계통

 

남도정(南途庭)

고려에서 은청광록대부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도정(途庭 : 광보의 증손)7 세손 금()이 뛰어났다.

 

남금

예조 판서(禮曹判書) ()의 아들로 태어난 금은 조선조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수문(南秀文)

금의 아들 5형제 중 넷째 수문(秀文)은 세종 때 최초로 호당(湖堂)에 뽑힌 인물이다.

 

남세주(南世周)

금의 손자 세주(世周)는 연산군의 황음(荒淫 : 함부로 음 탕한 짓을 함)을 직간(直諫)하다가 화()를 입었다.

 

남추

계신(繼身)의 아들 추는 중종(中宗) 때 장원급제하여 글재주로 명성이 높았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삼계(森溪)로 물러가 시작(詩作)으로 일생을 마쳤다.

 

남수일(南守一)

임진왜란 창의(倡義)하여 선무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명지관 남사고의 실수.
남사고는 효성이 지극하고 욕심 또한 많아서 죽은 아버지를 제대로 묻기 위해 수십 개의 묘 터에 이장을 거듭하였다. 그가 이장한 곳은 하나같이 명당이어서 남사고가 묘를 파갔다 하면 곧 누군가 그 곳에 묘를 이장해서 자손이 번창 하고 재물이 늘었다. 남사고는 마침내 상운면 가곡리 뒷산의 묘터를 발견하여 이장을 하고 있는데, 한 승려가 나타나 “ 남사고야 남사고야, 좋은 묘터 다 버리고 이 곳 찾아 묘를 쓰니 가엽구나! 가엾구나. ” 하고 사라졌다.

과연 묘를 쓴 남사고는 산을 내려오다가 두 다리가 부러져 즉사하고 말았다. 그는 멀리 보이는 메밀밭을 강물로 오인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사고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묘 앞에 그의 비각을 세워주었다.

 

 

南健(남건)선생의 일화

천재 신동

어릴 때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5살 때 이미 시를 지었다.
어느 날 백부가 「무지개를 보며 시를 지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꿇어 앉아
「운자를 무슨 자로 할까요?」
「뚫은 관자(貫)와 걸괘자(掛)자로 하라.」
이에 곧 시를 지어 바치니

靑紅貫日月(청홍관일월)
東南掛長弓(동남괘장궁)
        푸르고 붉은 무지개가 해와 달을 뚫어
        동녘과 남녘에 긴 활을 걸어놓은 형상이로구나.

그 시를 본 백부는 어린 조카의 기상이 웅장하고 재동(才童)임을 기특하여 매우 귀여워 하였다고 한다.
                                      <출전: 내고장 전초가꾸기-영양군>

 

 

南奎元(남규원) 선생의 일화.

고개를 홀로 밤에 넘어 약을 지은 효성

12살 소년시절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 걱정하던 어느 날 밤중에 ,靑杞(청기) 솔밭에 머물러 있는 유면한 한의원을 찾아 12살인 소년이 홀로 밤에 집을 나섰다.
워낙 가난했던 집안이라 어른을 품꾼으로 보낼 형편이 못되는 처지였지만, 어머니는 기특하기는 하나 될 말이 아니라 말릴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어찌 지체 하겠습니까? 늦어도 새벽까지는 꼭 약을 지어가지고 돌아오겠으니 염려 하지맙십시요.」
어머니는 어처구니없어서
「이 철없는 것아 호랑이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태산준령을 이 한밤중에 어린 네가 어떻게 혼자 넣어 간 단말이냐? 」하고 타일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하고 발을 굴리면서 집안에 남은 葉錢(엽전) 꾸러미를 다 털어 허리에 감아 매고 집신에 들메끈을 매고 막대기 하나를 단단히 잡아 쥐고 ,붙잡고 말리는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치며 삽짝을 나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음력 스무날 이지러진 달빛이 희끄므리 비취는 것을 등불 삼아 험한 산길을 걸을 때대 멀리 가까이서 짐승의 우는 소리에,멧부리가 우르릉 울리니 머리털이 쭛삣 치솟고 등골이 서늘했지만, 소년은 위독하신 아버지의 약을 지으러 이 밤증에 험한 산을 넘는데 아무리 짐승치기로서니 감히 덤벼들 가보냐? 만약 호랑이든 늑대든 여우든 덤기만 해봐라 이 막대기로 치며 목숨걸고 싸우리라.

 

혹시 강도가 튀어나와 돈을 빼앗는다면 이 막대기로 골통을 패려 눕히며 이 돈은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는 약값 외로는 쓸 수 없다고 호통 치리라. 이렇게 마음을 다져 먹으니 짐승들의 우짖는 소리가 들려도 효성이 지극한 소년에게는 조금도 무서움이 없이 오히려 용감 담대한 마음만 싹텃다,
범이 넘나다든다고 「범넘이 」라 이름 하는 검성골 재를 넘어, 솔발이 동리에 들어 섰다.
의원이 어느 집에 유숙하는지 알 길 없으나, 워낙 영리한 소년이라 제빨리 가늠하여 어느 집 사립문을 흔들고 소년의 음성 같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로 깊이 잠든 사람들을  깨워서 통사정하고, 의원을 깨워 아버지의 병 증세를 설명하며 애원하니 의원뿐 아니라 잠에서 깬 사람마다 뉘라서 놀라지 않으며 감동하지 않았으랴. 억척같은 壯丁(장정)이라도 한밤중에 혼자 넘어오기 어려운 태산준령! 人家(인가)란 한집도 없는 15리 길을 이 어린 소년이‥‥‥
지어주는 약첩을 들고 의원에게
「고맙습니다」
절을 드려 인사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단잠을 깨우고 폐를 끼쳐 미안합니다.」하고 몸을 돌려, 갔던 길과는 달리, 솥발이에서 “댓두들”을 거쳐 “청기동” 마을앞 들길을 지나 “청기재”를 넘어가는 것이었다. 재 이름은 행곡령(行哭嶺), 워낙 험준하고 고개 넘는 길이 굽이굽이 염소 창자 모양으로 꼬부랑 꼬부랑하여 울며 넘어 다닌다는 행곡령 고갯길을 넘는데, 뒷곁에서 불줄기가 비치편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돌아보니 큰 범 한마리가 뒤 따라 오는 것이었다. 등골이 오싹했으나 소년은 이내 마음을 편안히 가눌 수가 있었다. 범은 산중영물이라 함부로 의로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을 생각하고 겁 없이 앞만 보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기다란 “파싯골”  길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에, 먼 마을에서 첫닭 우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뒤따라오던 범은 소년의 어기찬 효성에 감복한듯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이  감동하고 범이 감동한 어린 호자가 가져온 약을 다려 마신 아버지의 병이 말끔히 나았음은  당연하다.
                                      <출전: 내고장 전초가꾸기-영양군>

 

南怡(남이) 장군의 일화.

 

1)

산적을 몰아낸 남이 장군의 용맹

근세조선 초기인 세조 때 아룡(阿龍)과 자룡(子龍)이라는 둔 형제가 살았다. 이들 두 형제는 큰 도둑떼의 두목으로 영양(英陽) 고을을 주름잡으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고을 원은 군사를 보내어 이들 형제를 잡으려고 했으나 워낙 재주가 뛰어나서 잡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근사가 상하여 돌아오곤 했다. 그러자 아롱 형제는 더욱 기세가 올라 나라를 뒤엎고 자기들이 왕이 되겠다는 욕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니 백성들은 항상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남이 장군을 아롱형제 토벌대장으로 하여 영양 고을에 근사를 보냈다.
아룡 형제는 겁을 먹기는 고사하고 이제야 자기네들 뜻대로 나라를 뒤엎을 때가 왔노라고 하며 좋아서 야단법석을 부렸다.
남이 장군 군사가 입암면 신사동에 다다랐을 때
「남이 들어라! 천하제일의 대장 아룡 장군 앞에 와서 항복을 하라. 그러면 나라를 빼앗은 뒤에 높은 벼슬을 시켜주마」 하고 아롱이 외치자 남이 장근은 껄껄 웃으면서
「요망한 소리 작작하고 아룡과 자룡은 내 앞에 무릎을 끊고 목을 바쳐라. 너희 형제가 나쁜 마음을 품고 나라에 불충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만든 죄 죽어 마땅할 것이다.」하고 던 큰 소리로 말했다.

아롱과 자롱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정히 그렇면 할 수 없지. 남이 너도 이것으로 끌장이다.」하며 하늘로 뛰어 오르자 남이 장근은
「한 놈 씩 덤비는 건 귀찮으니 두 놈 한꺼번에 덤벼라」 하며 아룡과 자롱의 뒤를 쫓았다. 양쪽 군사는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손에 땀을 쥐며  정신없이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간간히 외치는 기합 소리와 칼과 칼이 맞부딪혀 일어나는 불꽃 밖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한참 만에
「칼 받아라!」하는 남이장군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아롱의 목이 땅에 떨어지고 이어 몸체도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 모습을 본 자룡은 겁을 집어먹고 연당(蓮塘)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으나 남이 장군은 곧 뒤따라가 자룡의 목도 영락없이 베어버리고 말았다.
남이 장군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큰 소리로 웃으면서 선바위 앞 절벽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놓고 땅에 내려섰다.
이것을 본 아룡의 졸개들은 혼이 나서 남이장군 앞에 무릎을 꿇어 항복을 했다.
이리하여 영양고을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출전: 내고장 전초가꾸기-영양군>

2)

여자의 원혼
남이가 소년시절,  보리방아를 찧는 이뿐 여자를 젊은 혈기로 겁탈하려다 실패하자 소문이 날까 두려워 그만 그 여자를 죽인 일이 있었다.

그 뒤에 남이가 “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리오. ” 라는 내용의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렸는데, 이상하게도 평(平)자가 득(得)자로 바뀌어서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되었다.
平(평)자가 得(득)자로 바뀐 조화는 남이에게 억울하게 죽은 여자의 원혼이 복수를 하기 위한 소행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3)

권람(權擥)의 딸을 구한 남이

남이가 어렸을 때 길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위에 분을 바른 요상한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남이는 그 뒤를 따라갔더니 여자 종은 권람(權擥)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뒤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주인집 낭자가 갑자기 죽었습니다.」고 하므로,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르지...」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허락해 주었다.
남이가 들어가니 상자를 갖고 있는 여자 귀신이 낭자의 가슴을 타고 앉았다가, 남이를 보자 겁을 먹고 곧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낭자가 숨을 쉬며 다시 살아 나 일어나 앉았다.

온집안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남이가 나오니 낭자는 다시 죽었다가 남이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자 남이는 자기가 본 바를 다 이야기하고, 다시는 귀신이 범접 못하게 약으로 치료하였다.
이 일로 남이는 권람의 사위가 되었다고 한다.

 

4)

칼로 새긴 남이장군의 얼굴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선바위 맞은편에 20m 높이 절벽에 사람의 얼굴상이 새겨져 있다.
이는 세조 때 남이 장군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阿龍(아룡)과 子龍(자룡)과 남이포에서 싸우게 되었다.

아룡이 별안간 몸을 날려 공중으로 치솟으므로 남이 장군도 몸을 날려 공중에서 격전을 벌려 아룡을 죽이고 검무를 추며 내려오면서 칼끝으로 절벽에 자신의 상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출전:  영양군지>

 

 

南石義(남석의)선생의 일화

 

南石義(남석의)의 효행             

남석의는 방년 16세에, 15세인 청주정씨 鄭載英(정재영)과 정혼을 했다.
아직 新行(신행) 전인 어느 날 밤에 뜻밖에 시댁으로부터 시숙이 와서 전달하기를, 시모 권씨(權氏)가 지병으로 위중하더니 근래에 와서 더욱 악화 되어 백약이 무효하고 죽을 직전인데, 오직 소망이 신행전인 세 사람을 잠간이라도 만나보고 죽는 것이 원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남석이는 부모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즉시 시숙과 함께 산골짜기 좁고 험한 밤길을 10리를 걸어 양평동(良坪洞) 시댁으로 갔는데 갈 때에, 겨울바람이 세차게 붙어 휘날리는 치맛자락을 감싸 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댁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경인데 , 이미 절명(絶命)한지 두 시간 가량이나 된다는 시모 권씨(權氏) 시체에 흰 홑이불이 덮여있고, 방안에는 곡성이 낭자하였다.

그 경황없는 때에 무엇의 장난인지 방문에 흙을 끼얹는 소리가 나므로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두 눈에 화경 같은 불을 켠 호랑이가 뜰에 도사리고 앉아 있지 않은가? 모두들 크게 놀라고 그 중에는  흉조(凶兆)라고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범이 밤길 걷는 새댁 뒤를 밟아서 온 것이리라고들 했다.

방안에서는 시댁 사람들이 시신(屍身)을 덮은 홑이불을 치켜들고 처음 온 새 며느리에게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이니, 돌처럼 싸느란 얼굴! 이미 입 언저리에 붉은 물 이 흘러 있었다. 이 처절(悽絶)한 상황을 목격(目擊)한 어린 며느리의 머리에 영감(靈感)처럼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 민첩(敏捷)하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곧 부엌으로 들어가서 왼쪽손 무명지를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사정없이 내리치니 망창 끊기는 것을 오른편 손으로 굳게 감싸 쥐고 방안으로 달려 들어오니 ,모두들 놀라며 감동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고들 절망이었다.

다못 그 놀라운 효성이 가상(嘉祥)하여 시체의 입을 벌리고 그 피를 방울방울 드리웠을 따름이었다. 피가 목안으로 흘러 넘어 갔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효성이 벽차 단지(斷指)한 새댁은 범을 보고도 놀라는 기 색이 전혀 없었다.
생혈(生血)을 마신 후에도 아무런 반응치 없다고 단념했는데, 이윽고 시체에서 가늘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리고 감긴 눈이 스르르 뜨이는 것이 아닌가? 효성어린 생혈이 시어머니의 심장과 맥을 소통 했음인가, 기사회생(起死回生)이었다 .

그 집안에 모였더 이들의 이 기적적인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은 무어라 형언하랴.
범은 어느 사이엔지 가버리고 없으니, 효수(孝獸)라고도 하며 산군(山君)이라 일컫는 영특한 짐승인 범이 여사의 효심에 감동되었으리라.
효부의 수혈로 소생된 신모는 나이 42세였는데 ,그 후 11년간 함께 생활하는 동안에 시어머니는 막내아들 까지 낳기도 했다.

효부의 뼈까지 끊긴 손가락은 송진(松津)을 바르고 나무껍질로 싸 매였더니  며칠이 지난 후 상처는 흔적도 없이 완전히 나았다.
이 사실을 아는 이 마다 그 어린 마음에서 우러난 지극한 효성으로 끊긴 손이 탈나지 않고 쉽게 고이 나았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출전: 내고장 전초가꾸기-영양군>

 

 

 

 

南石羲(남석희)의 효행.

 

어머님, 제가 왔어요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이 무릎에 달라붙어도 거추장스러운 줄을 몰랐다.

오르막은 그래도 더듬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으나, 내리막 산비탈에서는 땅의 울퉁불퉁한 곳을 분간할 수 없어 수없이 넘어졌지만 아픈 줄도 몰랐 다. 친정을 떠나 시숙의 뒤를 밟으며 밤길을 걸은 지 이미 시간 반, 겨울 밤 은 깊어만 갔다.

1900년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면 전곡동에서 남 조휘(南朝煇)3 4 녀 중 맏딸로 태어난 남 석희(南石羲) 여사는 꽃다운 나이 16 세에 영양군 영양면 양평동 정 재영(鄭載英)과 혼인하였으나 아직도 신행 전이었다. 그 때, 신랑의 나이는 열 다섯 살, 여사보다 한 살 아래였다.

시어머니인 권씨가 숙환에 시달리고 있는 줄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 병 환이 갑자기 악화되어 위험한 고비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시숙으로부터 연락 받은 것은 저녁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순간이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세며느리의 얼굴을 한번 보고 죽는 것이라 전해 듣고는 그 길로 시숙을 따라 친정을 떠났던 것이다.

싸릿문을 들어서면서 여사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 호흡을 조절하면서 옷매무새를 고쳐 잡았다.

시숙이 방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어머니, 제수씨가 왔어요.”

그 바람에 웃목에 놓여 있던 호롱불이 깜박거리고, 흐르던 고요가 깨어지더니 환자를 둘러싸고 있던 집안 사람들의 눈길은 여사에게로 모여졌다.

여사는 조용히 시어머니의 머리맡에 앉아 손을 들어 주검과 다름없는 시어머니의 이마를 짚었다. 싸늘한 촉감이 손에서 가슴에 흘러 들었다.

어머님, 제가 왔어요, 둘째 며느리입니다.”

제가 밤길을 걸어 어머님을 뵈러 왔어요, 어머님, 눈을 뜨셔요.”

“.....”

권씨는 눈을 뜨지 못했다. 16 세 아름다운 신부의 옥을 굴리는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님, 둘째 며느리가 왔어요, 눈을 뜨셔서 하고 싶은 이야기 모조리 다하셔요.”

여사의 남편 정 재영도 어머니의 팔을 흔들면서 울부짖었으나 눈을 뜨기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사는 밖으로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놓인 도마를 찾아 고정시키고 칼을 들었다. 그리고 왼손 무명지를 도마 위에 올리고 어금니를 물고 칼로 내리찍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방으로 달려가 시어머니의 입에다 넣었다. 피가 권씨의 입에 흥건히 고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권씨는 그것을 꿀꺽 삼켰다.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도, 돌아앉아 훌쩍거리던 딸들도, 모두 놀라서 숨을 죽였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이윽고 권씨가 눈을 떴다.

아가 네가 왔구나, 무척 보고 싶었단다. ”

네 어머님, 제가 어머님을 뵈러 밤길을 걸어 왔어요, 정신차리셔요.”

참 잘 왔다. 꿈에 한 선녀가 호랑이를 타고 우리 집으로 오더니 네가 올 꿈이었구나.”

. 어머님 저예요, 정신을 차리셔요.”

그래, 아가 손이나 좀 만져 보자.”

여사는 오른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곱니 ? 꿈에 본 그 선녀의 손과 꼭 같구나.”

지켜보는 집안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상봉에 취해 눈물을 흘렸다.

아가, 네 치마의 꽃은 무슨 꽃이니 ? ”

권씨의 말에 모두들 남 여사의 치마를 보았다. 왼손을 움켜쥐었으나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치맛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제야 황급히 치료가 시작되었다. 송진을 따오고, 나무 껍질을 벗겨 오고 한동안 법석을 떨고 난 후 여사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목을 길게 빼고 늠름하게 앉아 있지 않는가 !

누군가가 소리 쳤다,

산신령이다.”

제를 올려야 한다.”

그래, 제를 올려야 한다.”

여사가 마당으로 내려가 네 번 절하니 주위 사람들도 모두 나와서 함께 절을 했다. !

호랑이는 꼬리를 흔들면서 마당을 한 바퀴 돌더니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목숨이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시어머니 권씨는 그 때 나이 마혼 두 살이었다. 며느리 잘 만난 덕택으로 그 후 11 년이나 더 살게 되었다고 하니 이는 오로지 남 여사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하게 하여 그 명을 연장시켜 주었기 때문이리라.

오랫동안 함께 살아 정을 나눈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드물 텐데, 하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첫 대면의 고부 관계에서 어찌 이런 위대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여사는 1963년 음력 10월에 별세하니 누린 나이 63 세였다. ‘정씨 부효행 록이라는 행장이 전하는데 여기 그 일부를 옮긴다.

드높은 새색시 덕행을 온 고장 사람들이 흠모하느니

어린 효성은 진실로 하늘 같은 마음이어라.

흐트러진 세상에 옛 도덕 찾기 어렵더니

우리만이 가진 윤리의 끈을 이제야 보았네.

백 년이 지나도록 꽃다운 그 이름은 역사 위에 전하고

그 여운 한 가문의 화기로운 거문고 피리.

부엌에 가 손가락을 끊은 효성이 우연이 아니었으니

호랑이 밟고 간 빈 뜰에 밤 또한 깊어라.

 

출전영양군 영양중학교 김 교사

참고 문헌 靑州鄭氏婦孝行錄, 英陽郡誌

 

 

 

 

 

南怡(남이) 장군의 탄생 설화.

 

장호원 백족산(白足山)에 굴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굴이 있다. 근처에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남이장군이 그 절을 망하게 한 괴수(怪獸) 지네의 정기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다.

 

옛날 이 절에는 수십 명의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밤이면  꼭 한사람씩 승려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러한 일이 거듭되자 승려들은 걱정 끝에 한 사람씩 이 절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데, 마침내 믿음이 깊은 스님 하나만 남게 되었다.

이 스님은 모두를  부처가 극락세계로 데려 갔을 것으로 믿고, 그 자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하여 마을의 친구인 글방선생을 찾아갔다.

 친구인 글방선생은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권유하지만, 스님이 듣지 않으므로 무명 옷 한 벌을 내어 주면서

" 내가 자네에게 마지막 바라는 청이니 이 옷을 입고 가게나. 냄새가 나더라도 절대  벗지 말고 입고 있어야 하네. "

이튿날 글방선생은 친구의 안위가 궁금하여 절에 올라가 보니 절에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찾아보니 굴바위 앞에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나자빠져 있고, 그 목에는 자신이 친구에게 건내 준 무명옷 자락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옷에 칠하여 둔 독한 담뱃진 때문에 스님을 삼킨 지네도 죽었던 것이다.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니 백족산 허리 부근에 오색영롱한 구름이 감돌더니 구름에서 나온 상서로운 기운이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개미실(충북 음성군 감곡면) 남씨 집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달부터 남씨 문중에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자라니 그가  바로 南怡(남이)장군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남이장군은 지네의 정기를 타고나서 매우 영특하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한국참풍수지리학회에서 인용>

 

 


 

南怡(남이) 장군의 일화.

 

권람에게 시집보낼 딸이 있어 사윗감을 골랐다. 그때 (남이)의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權擥(권남)이 남이의 사주를 보았다. 이때 쟁이가 불길한 말을 했다.

사람은 반드시 젊은 나이에 요절할 것이오.” 이번에는 딸의 사주를 물어보았다.

이 처녀도 수명이 매우 짧고 지식은 없으나, 복만 누리고 화는 입지 않을 것이오.”

마침내 權擥(권남)은 남이를 사위로 맞이했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한 후 임금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28세에 병조 판서에 올라 주위의 시기와 질투를 샀고, 그 결과 죽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때 한양의 백성들 사이에 이런 말이 전해졌다.

南怡(남이)가 소년 시절에 거리에서 때였다. 한 아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 가지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보자기 위에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남이의 눈에는 귀신이 보였다. 남이는 여자 귀신을 따리갔다.

종은 한 재상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그 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南怡(남이)가 그 연유를 물었다.

주인집 직은 딸이 금방 죽었소이다.” 하인의 대답이었다.

내가 죽은 냥자을 보면 살릴 수 있다. 곧장 주인에게 일러라!” 주인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南怡(남이)에게 죽은 낭자를 보여 주었다.

 

남이의 눈에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낭자의 가슴 위에 앉아 있었다.

귀신이 남이를 보고 달아니 버렸다. 그러자 낭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냥자의 방을 나왔다.

이때 낭자는 다시 죽어 나자빠졌다.

남이가 방으로 들어가면 낭자는 살아나는 것이었다.

 

남이가 물었다

아까 어린 종이 가져온 사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소?’

홍시가 들어 있었는데 아이가 그걸 먹고 숨이 막혀 쓰러졌다

남이는 자기가 목격한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을 자세히 설명하고 귀신을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하여 그 처녀는 살아났다.

이 낭자가 뒤에 남이의 이내가 되는 권람의 셋째 딸이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南怡(남이) 장군의 일화.

 

28에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은 南怡(남이)는 태종의 외손자였다. 그는 용맹이 매우 뛰어나고 포부기 커서 항상 시기가 따랐다. 심지어 남이가 그의 어머니와 정을 통했다는 밀고가 들어와 옥에 갇히기도 했다.

일찍이 그가 남긴 시 한수는 사나이의 기상을 노래 한 것 풀이였으나, 결국 자신을 얽어매는 마수가 되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 南怡(남이)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 백두산 돌이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겠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 뒷날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이 시에서 南怡(남이)를 모함한 유지광은  ‘미평국(未平國)’이란 글귀를 미득국(未得國)’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나라를 태평하하게 하지 못하면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 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처형(誅殺)되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조선 중기의 기인 남사고(南師古)가 역리(易理의 법칙)를 근거로 운수를 미리 헤아려서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예언한 참서(讖書). 일명 남사고예언서또는 격암유록(格庵遺錄)’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자손들이 말세에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예시한 것으로 천기(天機하늘의 기밀)에 관한 책이라 하여 간행되지 아니하고 비밀리에 자손들의 손에 보관되어 왔다. 8·15광복 후에 남사고가 예언한 말세가 이르렀다고 생각한 자손들이 세상에 공개했으므로 일부는 필사로, 일부는 연활자 본으로 간행되어 전한다.

 

이 책은 처음에 저자에 대한 간략한 약력을 소개하고 있고 예언서(豫言書세론시(世論視계룡론(鷄龍論) 등 논 18, 궁을가(弓乙歌은비가(隱祕歌) 등 가사 30, 출장론(出將論승지론(勝地論) 등 논 10, 말초가(末初歌말중가(末中歌) 등 가사 3편이 있어 논과 가사가 순서 없이 혼잡되어 있다. 가사는 국한문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용 중 특이한 것은 미래의 시기나 사건의 중요성 등을 은어나 파자(破字속어·변칙어 등을 사용하여 보는 사람들이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도록 기록한 점이다.

 

말운론에서는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된다는 것과 6·25전쟁이 일어나서 인민이 죄 없이 살생됨을 지적하였고, 사람들이 본심을 잃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부정을 자행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것은 인류의 멸망이 가까워졌음을 예시하는 것이니 뜻이 있는 사람들은 선행을 해서 생명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였다.

 

은비가에서는 정감록에서 암시한 양백(兩白삼풍(三豐소두무족(小頭無足궁을(弓乙십승(十勝) 등 이해할 수 없는 어구에 대하여 해석하고, 앞으로 불교가 극성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수도와 수심에 전념하고 속세와의 이해관계를 단절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격암가사에서는 예의와 민족을 모르고 날뛰는 무도덕주의를 비평하고, 미래에 남북이 통합된다는 설과 해인(海印)의 조화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동양에서는 제일가는 강대국이 될 것임을 역설하였다.

 

같은 내용으로 성운론 聖運論·말초가등이 있고, 이 책과는 별도로 남사고비결이라는 명목으로 정감록에 수록된 예언서와 남경암산수십승보길지지 南敬庵山水十勝保吉之地등의 비록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남사고는 향시엔 몇번 합격하였으나 과거에는 빈번히 낙방하였으며 59세 때 열한 번째로 과거 준비하는 그에게 제자가 여쭈었다.

 

"선생님의 운명은 선생님이 더 잘 아실 터인데 어떻습니까?"

"이번 과거에도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고생을 하십니까?"

"내가 운명을 거슬리면서 과거를 보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그것은 운명을 풍뎅이삼아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기 위함이다."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든지 그것은 운명 자체의 문제이고 인간은 최선을 다한 후 주어진 운명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그의 죽기 2년 전에야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효도가 지극하고 청렴한 사람에게 주는 제도인 孝廉(효렴)에 의해서 였다.

 

선조 4(1571) 향년 63세로 세상을 마감했다.

그의 아들 대에서 후손이 끊기고 말았으니 결국 노승이 말한, 천기를 누설한 응보를 받은 셈이라고나 할까.

                                                   <출처 : 초아님 블로그>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격암 선생은 지리 술에 통달했지만, 부친이 명당자리와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후손이 끊어지는 줄 알면서도 더 이상 이장을 하지 않고 하늘의 順理(순리)에 따랐다.

과연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묘비는 묘 앞에서 볼 때 우측에 세워져 있는데, 선생의 묘비는 좌측에 있는 것도 특이하며, 묘 뒤편에는 한 그루 고송이 선생이 묘소를 지켜주듯 수문송 처럼 자리하고 있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전설에 따르면 소년 남사고는 절집에서 한 노승을 만났는데 스님은 소년이 남다른 인물이 될 줄 미리 내다보고 세 권의 비결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중 '天編(천편)'은 별자리의 운행과 그 운세 등

천문에 관한 모든 사항을 항목별로 적어 놓은 것이며,

'地編(지편)'은 산천의 지세와 명당 등 풍수를 자세히 논한 것이었으며,

마지막 '人編(인편)'은 사람 얼굴을 한번만 쳐다봐도

그 명운을 알아맞히는 방법을 기록한 비밀스러운 책이었다. 한다.

 

노승은 이 책들을 건네주며 아무쪼록 덕을 쌓는 것이 최우선임이며, 그리고 책에 적힌 天機(천기)를 사사로이 누설치 말라는 신신당부하였다.

 

그 뒤 노승은 남사고의 공부를 점검하러 집으로 갔다.

당연히 1권인 '天編(천편)'부터 차례로 공부하고 있으리라 짐작했으나 남사고는 '人編(인편)'에 실린 각종 비술에 빠져 '天編(천편)'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노승은 남사고가 비결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쓸까 염려한 나머지 남사고의 집에 불을 질러 책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불영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다.

 

졸지에 비결을 빼앗긴 남사고는 새 각오로 삼천리강산을 두루 유람했다.

그리하여 비로소 지리 공부의 요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한다.

 

그는 명당을 얻더라도 결국 덕을 많이 쌓는 사람만 그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쳤다.

의미심장한 전설이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어느 날 울진 향교에 갑자기 참새 떼가 날아들자 사람들이 남사고에게 무슨 징조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잠시 후에 쇠갓을 쓴 여자가 들어올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조금 뒤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문 밖에서 밥을 짓던 향교의 여종이 솥뚜껑을 덮어쓰고 뛰어 들어와 자리한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남사고는 근남면 구산리 바깥잘미에 있는 달팽이집 같은 초가집에 살았지만 술을 즐기며 성품이 고결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과 후손이 없을 것까지 예언하며 맞혔던 남사고는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예언한 참서인 격암유록에서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될 것과 한국전쟁을 예언했는데, 그의 죽음 이후 문집마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역학과 천문을 비롯하여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던 학자다. 권세와 돈으로 치르던 당시의 과거에서 여러 차례 떨어진 뒤에 벼슬을 하겠다는 꿈을 접고 천문지리와 복술(卜術)을 깊이 연구하여 예언이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다.

 

63세에 죽기까지 숱한 예언과 일화를 남겨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전설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로 꼽힌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남사고가 말하길,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에서 조선을 침범하리라 했는데, 그의 예언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연려실기술에도 남사고의 예언이 틀림없이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사고가 소백산을 보고 허리 위로는 돌이 없고, 멀리서 보면 웅대하면서도 살기가 없고, 떠가는 구름과 같고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형상임을 들어 많은 사람을 살려줄 산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이 옳았는지 임진왜란 초에 왜적이 잠깐 새재를 넘기는 했지만 소백산 기슭인 풍기와 영주 일대는 온전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는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재난이 많이 일어날 것으로 예언하였다.

그는 정감록중의 길지인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예언했으며, 또 당쟁이 일어나기 전 명종 말기에는 서울의 지세와 연관 지어 당쟁을 무서운 병에 비유하여 예견하기도 하였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남사고가 선친의 묘를 두 번씩 옮겼어도 오히려 길지를 얻지 못해서 세 번째로 대현산(大峴山)으로 옮겼다. 장사를 모두 마치고 골짜기를 나와서 그곳을 바라보고 저 산은 반드시 후사가 끊어지고 말 것이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하고 대성 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과연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다.

 

격암 선생은 지리 술에 통달했지만, 부친이 명당자리와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후손이 끊어지는 줄 알면서도 더 이상 이장을 하지 않고 하늘의 순리(順理)에 따랐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남사고가 자기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기 위하여 명당을 구해서 장사를 지낸 뒤에 그 묏자리를 보니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묏자리를 여러 번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한 묘터를 얻게 되었는데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는 용이 날아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비룡상천(飛龍上天)의 형국(形局)이었다.

 

남사고는 너무 좋아 그의 아버지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다. 장사를 지내며 흙을 퍼다가 봉분을 쌓았다. 이때의 일을 거들던 한 일꾼이 노래를 불렀다.

 

"구천십장(九遷十葬) 남사고야"

비룡상천(飛龍上天) 생각마라

"사사괘지혈(死巳掛枝穴)을 왜 모르느냐?"

 

-"아홉 번을 옮기고 열 번 장사 지내는 남사고야!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만 생각하지 마라.

말라 죽은 뱀이 나뭇가지에 걸린 형국을 왜 모르느냐?"-

 

남사고가 듣고서 놀랍고 이상하여 산 형세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과연 죽은 내룡(來龍)이었다.

급히 그 일꾼을 따라 나섰지만 갑자기 보이지 않고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당이란 제각기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어서 억지로 차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제야 남사고는 탄식하고, 겨우 피해가 없는 정도의 묘터를 가려 다시 옮겨 장사지냈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그는 유년(幼年) 시절에 책읽기를 좋아하고 평소 기거동작(起居動作)은 말하는 것이나 웃는 것이 간결하면서도 온후하고 의젓하여학문이나 재물 등을 구차하게 얻는 것을 원치 않고 삼가는 면이 많았으며 절제된 자세를 견지하여 처음부터 큰 뜻을 세운 대인(大人)의 기상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평해인(平海人) 황응청(黃應淸)과 함께 길을 가다가 붉은 띠로 장식 된 패도(佩刀)를 보고서도 그냥 지나친 일화를 남긴 것이나, 평소 소학(小學)을 옆에다 두고 읽으면서 도학자로서의 풍모(風貌)를 유지하는 지침서로 삼은 것은 대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술을 즐기는 그를 위해 부인이 술을 담아 놓으면그것이 채 익기도 전에 표주박을 띄워 자작(自酌)하고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서 술동이가 바닥이 보인 뒤에야 끝을 내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즐기려는 것을 자신의 낙천적인 성격 탓으로 돌리며 오히려 분방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답답해했다.

 

그런 연유(緣由)로 그의 가세가 기울어 설두(雪竇)에서 남수산(嵐峀山) 밑으로 옮겨가 살 때도달팽이집 같은 작은 집에서 돗자리 조각을 달아 문으로 사용하는 등 비바람도 제대로 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집 앞에 몇 층계의 화단을 만들고 화초들을 여기 저기 심어 두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면 시를 지어 읊조리곤 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며 즐기는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

 

 

南師古(남사고) 선생의 일화. 영양

 

그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났으며, 평생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다.

역학(易學풍수(風水천문(天文복서(卜筮관상(觀相)의 비결에 도통하여 예언이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풍수학(風水學)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75(선조8)의 동서분당(東西分黨), 1592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 등을 명종 말기에 벌써 알아맞혔다고 한다. 그에 앞서 1564(명종19)에 내년에는 태산(泰山)을 봉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듬해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별세하여 태릉(泰陵)에 장사지냈다.

 

 

南孝溫(남효온)의 육신전

 

死六臣(사육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것은 生六臣(생육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이 자신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세조에게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6인의 신하를 생육신이라고 한다.

金時習(김시습) · 元昊(원호) · 李孟專(이맹전) · 조려 · 성담수 · 南孝溫(남효온) 바로 그들이다.

사육신은 이미 죽었지만 살아남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 이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유포시켰기 때문에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南孝溫(남효온)은 성종에게 소릉소라는 상소문을 올려 세조에게 왕위를 빼 앗긴 단종 어머니의 산소인 소릉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뒤부터 벼슬을 단념하고 방랑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때로는 무악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며 신영희 홍유손 등과 죽림거사로 맺어 술과 시로울분을 달랬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입에 올려 말하기를 꺼리는 것속했던 成三問(성삼문) 6명의 신하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실을 육신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으려 했다.

 

그의 문인들은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다. 그러나 그는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멸시킬 수는 없다 하여 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펴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南奎元(남규원)선생의 효행.

 

행곡령에서 사귄 호랑이

 

남 규원(南奎元) 선생은 영의공의 후예로서 양정공의 17세 손이요, 남 순완 선생의 둘째 아들로 1856년 영양읍 서부동 옥골에서 태어났다. 자는 영소요, 호는 죽사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글 재주가 비범하고 기질이 영특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2 세 소년 시절의 일이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했던 어느 날 밤중에 청기면 솥말이(정족동)에 있는 유명한 한의원을 찾아 나섰다. 워낙 가난했던 집이라 품군을 사서 보낼 형편이 못 되었는 처지라 어머니는 기특하기는 하 나 어린 아들이 밤길 가는 일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위독한데 어찌 지체 하겠읍니까? 늦어도 새벽까지는 꼭 약을 지어 가지고 돌아오겠어요.”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 철없는 것아 호랑이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태산 준령을 이 한밤중에 어린 네가 어떻게 혼자 넘어간단 말이냐?”

하고 타일렀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하고, 발을 구르면서 엽전 꾸러미를 다 털어서 허리에 감고 미투리를 신고 막대기를 잡아 쥐고 말리는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치며 삽짝을 나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음력 스무날, 이지러진 달이 어슴푸레 비추는 것을 등불삼아 험한 산길을 걸을 때 짐승의 우는 소리에 멧부리도 울리니 머리털이 서고 등골이 오싹했지만 소년은 위독한 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이 밤중에 험한 산을 넘는데 아무리 짐승인들 감히 덤벼들 가보냐?

 

만일 짐승이 덤비기만 해 봐라 이 막대기로 목숨 걸고 싸우리라.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는 일 외에는 어두움도 무서움도 아랑곳없다. 짐승들의 우짖는 소리가 들렸어도 효성이 지극한 소년에게는 오히려 용감 담대한 마음이 싹텄다. 범이 넘어 다닌다는 범넘이라 이름하는 검정골 재를 넘어 솥말이 동리에 들어갔다.

 

의원의 집을 알 길이 없었으나 영리한 소년이라 재빨리 가늠하여 어느 집 사립문을 흔들고 소년의 음성 같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로 깊이 잠든 사람들 을 깨워 통사정하고 의원을 깨워서 아버지의 병 증세를 설명하며 애원하니 의원뿐 아니라 잠에서 깬 사람마다 뉘라서 놀라지 않으며 감동하지 않았으랴! 장정이라도 한밤중에 혼자 넘어오기 어려운 태산준령, 인가란 한 집도 없는 6km 길을 이 어린 소년이.... 지어주는 약첩을 들고 의원에게 큰절을 드려 인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잠을 깨워 미안 합니다고 작별 인사를 올리고 솥발이에서 댓두들을 거쳐 청기동 마을 앞 들길을 지나 청기재를 넘어갔다.

 

재 이름은 행곡령, 워낙 험준하고 넘는 고갯길이 굽이굽이 창자 모양으로 꼬부랑꼬부랑하여 울며 넘어 다닌다는 행곡령을 넘는데 뒤에서 불이 비치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돌아보니 큰 범 한 마리가 뒤따라 오는 것이었다. 범은 산중 영물이라 의로운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을 생각하고 겁 없이 앞만 보고 걸음을 재촉하여 기다란 팔싯골을 거의 다 빠져 나왔을 때 먼 마을에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 따라오던 범은 소년의 효성에 감복한 듯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이 감동하고 범이 감동한 어린 효자가 가져 온 약을 달여 마신 아버지

의 병이 나았음은 당연하다.

지금은 팔싯골에 새마을 집단 부락을 이루었으며 1969년에 행곡령을 무너 뜨리다시피 하여 청기면으로 넘어 다니는 찻길을 닦았지만 117여 년 전엔 새 바들과 검성골 재를 넘어 솥발이까지 그리고 돌아서 행곡령을 넘어오는데 솥발이 동리 외엔 무인지경인 태산준령 12km 길을 12 세 소년이 혼자 넘어 다녔으니 그 하늘에 사무치는 효성과 대담무쌍한 간담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죽사 선생은 작은 키였지만 정기와 담력이 충만해 보이는 체격에 명랑하고 위엄이 넘쳤다 한다. 시 잘 짓고 글 잘 하며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능란하여 별세한 후에도 그를 문예와 무예를 겸한 준걸한 분이라고 기리고 있다.

 

출전영양군 영양초등학교 김 교감

참고 문현 孝烈行誌, 英陽郡誌

 

 

 

南師古(남사고)의 九遷十葬(구천십장영양

 

민간에 구전되는 남사고 설화는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그중 가장 대표적인 유형이 구천십장(九遷十葬)한 남사고 이야기이다.

 

南師古(남사고)는 부친(혹은 모친)의 묘를 명당자리에 쓰기 위해 아홉 번이나 그 묘를 이장을 하였다.

풍수지리학의 대가인 南師古(남사고)선생은 산천을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비룡상천(飛龍上天)’ 형국의 명당자리를 얻어 부친의 묘를 썼다.

 

비룡상천(飛龍上天)혈이란 용이 득천을 해서 하늘로 날라 올라가는 명당 중에 명당을 말한다.

 

이장을 한 후 한창 봉분을 만들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남사고야 남사고야비룡상천(飛龍上天)이 웬 말이냐고사괘수(枯死掛樹아니더냐?” 하고는 사라졌다.

 

고사괘수(枯死掛樹)혈이란 나무가 말라 죽는 흉한 곳을 말한다.

 

남사고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피니묘 아래로 보였던 너른 바다가 실은 메밀밭이라 비룡상천 형국의 명당이 아닌 고사괘수 자리인 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결국 부친의 묘를 더는 옮기지 못하게 되었고남사고 또한 얼마 못가 죽고 말았다.

 

 

 

南用種(남용종)의 효행.

 

느티나무에 핀 효성의 꽃

 

조선의 운세가 다해 가던 1860년 경북 예천군 보문면 하읍실 마을의 가난 한 농부 영양 남씨 남 용종(南用種)과 경주 김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난 남 영필(南永弼)이란 사람은 뒷날 크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송천 남효자이다.

 

열여덟 살 소년 시절부터 남달리 부모의 뜻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하여 동네 어른들도 모두 칭찬하면서 장차 큰 효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자라나면서 아버지를 도와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살림을 도왔다.

그리고, 영필은 낮으로는 들에서 밭을 갈고 산에서 땔나무도 하고, 밤이면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면서 자식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리고, 30 리 밖에 있는 예천장날이면 장날마다 땔나무를 져다 팔아서 부모가 즐겨하는 신선한 과일, , 생선들을 사다가 부모를 드려서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했으며, 이웃 어른들을 초청하여 아버지와 함께 즐기도록 하였다. 또한 평소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가짐을 삼가하여 방종하는 일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는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마음이 우러나도록 일깨워 주었다.

 

남 영필이 살던 19세기는 현대처럼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때이므로 병이 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런 때에 그의 아버지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니 효자의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평소보다 더욱 정성된 마음으로 병구완을 하면서 병석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자 날마다 이웃 어른들을 모셔다가 아버지의 말벗이 되게 하여 위로하며, 또 밤이면 아버지 곁에서 재미나는 옛이야기나 세상 돌아가는 사정 이야기로 밤을 새우며 간호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난한 가정 형편에서도 부친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방방곡곡 이름난 의원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좋다고 하는 약은 무엇이든지 구해서 써 보았으나 부친의 병은 점점 더해만 갈 뿐이고 약을 쓴 보람이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 은 유명한 의원을 만나는 일과 하늘에 치성하는 길뿐이었다. 그리하여 낮이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의원을 찾아 약을 구하고 밤이면 뒤뜰에 칠성단을 쌓고 북두칠성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지성으로 빌었다. 이 때 맑은 우물물을 길어 몸을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정화수를 소반에 받쳐 놓고 무릎 꿇고 앉아 아버지 대신 차라리 나를 죽게 해 달라. ’ 고 빌었다.

 

기도를 시작한 지 99 일이 되던 그 해 겨울 눈이 쌓이고 추운 밤에 기도를 하다가 그만 지쳤는지 잠이 들었더니 풍체가 점잔하고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한 분이 나타나서

아비의 병이 위중하거늘 왜 너는 여기서 세상 모르고 코만 고느냐?”

고 꾸중을 하므로,

제발 아비를 살릴 방법을 알려 주시고, 부족한 제 정성을 나무라시어 내 목숨으로 아비를 대신하게 해 주십시오.”

하며, 그 노인에게 매달려 애원하였더니, 그 노인은 허허하고 웃으면서

네 아비의 병에 잘 듣는 약을 구하려거든 남쪽으로 가 봐라.”

하고는 사라졌다.

 

꿈을 깬 남영필은, 노인의 말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들리는 듯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마음에 날이 새기를 기다려 노인이 시키는 대 로 남쪽으로 길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

10 리쯤 갔을 때 길가의 큰 느티나무 아래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간밤의 꿈에 본 그 노인과 같다고 여겨져서 가까이 다가가 공손히 옆드려 큰절을 올리면서 인사하고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여 남쪽으로 약을 구하러 가는 길인데 또 만나게 되었으니 약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 다.

 

그러나 노인은 다만

나는 의원이 아니어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네. 약을 구하려 거든 의원을 찾아가야지.”

하고,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길래 효자는 백 번 절을 하고 손 모아 빌면서 제발 약을 구할 수 있는 방도를 일러 달라고 간청을 거듭하였다.

노인이 빙긋이 웃으며 물끄러미 영필을 바라보다가 허리춤에 찬 주머니의 끈을 풀더니 환약 세 알을 꺼내 주었다. 그러고는

이것도 약이 될지 모르겠네만 가지고 가서 한번 써 보게.” 했다.

환약을 받아 든 효자가 고맙다는 인사를 수없이 드리면서

어디 사시는 누구신지 알려 주시면 뒷날 은혜를 갚겠읍니다.”

하고, 머리를 드니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는 아무 흔적도 없고 노인은 온데간데도 없었으며 그 느티나무만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 환약을 먹고 난 아버지는 언제 병을 앓았더냐는 듯이 건강을 회복하여 여생을 잔병 없이 살았다고 한다.

 

남 영필은 이로부터 더욱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모시던 중 정유년 1079 세로 아버지가 돌아기시자 마을 뒷산에 무덤을 마련하고 무덤 곁을 떠남이 없이 슬퍼하면서 삼 년을 하루같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다가 삼년복을 벗은 뒤에도 달마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꼭 아버지 무덤을 찾아가서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646 세로 남 영필이 세상을 떠나니 이 고을 선비들이 모여서 효행 사실을 임금님께 아뢰어 정려를 받게 했다.

 

그 후 이 소문이 차차 널리 알려지게 되자 사람들이 깊이 감탄하면서

영필의 꿈에 나타난 느티나무 아래에 앉았던 그 노인은 영필의 효성에 감동한 학가산 신령님일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느티나무를 일러서 효성 나무라고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그 느티나무가 어디쯤에 있었는지 아무도 잘 모른다. 그리고, 효자가 살던 마을 앞에 1919년 이 고을 선비들이 정효각이란 집을 지어 주었고, 그 곁에 심은 느티나무가 말없이 무성히 자라서 영필의 효행을 말해 주고 있다.

 

출전예천군 은풍초등학교 남 교감

참고 문헌 醴泉邑誌, 孝烈行誌

참 고대구 매일 신문(1981. 7. 21.)

 

출전 <한민족대성보>

 

 

南義元(남의원)의 묘갈명

 

南義元(남의원) 肅宗卽位年 壬申(1452)~中宗 6年 辛未(1511) 60.

英陽人. 字 可宜. 會寧都護府使 佑良.

 

공의 묘는 현 안동시 이천동 제비원 동쪽 둔덕에 있다. 묘 앞에

通訓大夫行樂安郡守 諱 義元之 墓(통훈대부행낙안군수 휘 의원지 묘)라는 비석이 龜趺臺石(구부대석)위에 雲紋(운문) 碑頭(비두) 로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묘역의 계단도 큰 돌로 규모 있게 배열되어 잘 정돈이 되어 있다.

撰碣(찬갈) 에 의하면 공은 젊어서부터 웅지를 품고 말 타기와 칸 쓰기,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여 성종 17년 병오(1486)에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버슬을 거쳐 樂安(낙안)군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공의 부친 용양위부사직을 역임한 致恭(치공)의 묘도 같은 둔덕에 있는데 같은 형식의 비석이 서 있고, 조부 판회령부사 佑良(우량)은 세조 32(1450)奏問使(주문사)로 명나라에 가서 獻馬(헌마)수룰 감하게 하여 포상된 기록이 왕조실록에 있으며 만년에는 依依亭(의의정)을 짓고 자적하였다 한다.

 

墓碑南義元墓

在府北燕飛院東洞酉向李弘準撰碣

公諱義元字可宐 英陽世家南君甫十代孫也 君甫生公若 公若生僃 僃生星老 星老生典書有孫 有孫生典書輝珠 輝珠生參判敏生 敏生生壯元佑良 位至嘉靖會寧府使 佑良生致恭 致恭娶 司醞直長金坤之女 生公 公將種也 自少多壯志 馳馬試劒射穿柳葉 旣長初職內禁衛 丙午科爲郡守任纘㮄下 授昌洲僉使尋拜三水郡後以 宣傳官 兼內乘又出爲 理山入而 以長興庫令 遷繕工僉正 丙寅秋 靖國有功原從一等 授通政朝廷例 啓還收出治礪山未幾島夷有變 移任樂安 公爲人剛毅正直 筮仕以後國耳 忘家西北有績中外有聲 遂靡鹽成疾 辭職歸家藥餌無力 嗚呼痛哉 公聚參判李拱之女 生五男三女 男曰漢淮渭溟汳 女曰裵綸權耆一未筓 銘曰 樂安公毅然 哀眞英雄 行己直處 事實身無失 仕盡心不廢任 人共欽天奪㤀 壽不長時所傷 燕院東震起 鬱蔥籠地不仁 埋善人短碣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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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南義元(남의원)

공의 묘는 안동부 북쪽 제비원 동쪽 마을 유향에 있고, 李弘準(이홍준)이 찬갈을 했다.

공의 휘는 義元(의원) 자는 可宐()이며 英陽(영양)의 명문가이다. 南君甫(남군보)19대조인데, 君甫(군보)公若(공약)을 낳았고, 공약은 ()를 낳았으며, ()星老(성로)럴 낳고 星老(성로)는 전서 有孫(유손)를 낳았다. 有孫(유손)典書 輝珠(휘주)를 낳고, 輝珠(휘주)는 참판 敏生(민생)을 낳고, 敏生(민생)은 징원급제한 佑良(우량)을 낳았는데 지위가 가정회령부사에 이르렀다. 佑良(우량)致恭(치공)을 낳았고, 致恭(치공)은 사온직장 金坤(김곤)으 딸에게 장가 들어 ()을 낳았느데 공은 장군깜이 없다. 어릴 때 붙어 큰 뜻을 품고, 말 타기, 칵 다루기, 버들 잎에 활 쏘기등을 하였으며, 장성해서 처음 직책이 내금위였다.

병오 년에 과거를 봐서 군수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창주첨사에 임명되었다. 심배삼수군 이후 선전관 겸 내승이 되었고, 외직에 나가 理山(이산)이 되었다가 다시 들어와 장흥고령 천선공첨정이 되었다.

병인년 가을 정국유공원종일등으로 책록되어 통정조정례가 되고, 다시 여산으로 가려하는데 섬나라 오랑캐의 변이 생겨 樂安(낙안)으로 임지가 변경되었다.

공의 사람됨은 굳고 정직하며, 처음 벼슬을 얻은 이후 나라 나라 일에 만 몰두하고 집안일을 잊었다.

서북쪽에서 소임을 다하던 중 질병으로 쓰러졌다는 말이 들렸는데, 사직을 하고 집에 돌아와 아무리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아아! 슬프도다. 공은 참판 李拱(이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53녀을 두었는데, 아들은 (), (), (), (), ()이고 딸은 裵綸(배륜), 權耆(권기)의 아내가 되었으며 한 딸은 아직 미혼이다.

()에 이르기를

 

낙안공은 의연 하여

아아! 참된 영웅이로다.

가는 곳 마다 바르게 처신하며

하는 일에 지나 침어 없었고

성과 열을 다해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었다네

사람들 모두 흠모하는 데

하늘이 목숨을 오래 두지

않고 인정 없이 뺏어 가니

제비원 동쪽에 가슴 아픈 곳

갑자기 땅을 파서 봉을 지우고

매정하게 착한 사람 묻으니

短碣(단갈)만 세롭네.

 

 

 

南八俊(남팔준)의 묘갈명

 

 

南八俊(남팔준) 端宗 1年 癸酉(1453)~中宗 24年 己丑(1529) 77.

字 士傑. 號 大田.

英陽南氏 修義校尉 義良

 

공은 성종 8(1477) 25세 때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나 科運(과운)이 없어 더 이상 영달하지 못하였으나, 공의 중씨 사직 八凱(팔개)와 일직면 안망촌에 이사하여 여생을 유유자적하게 하였다 한다. 슬하에 35녀를 두었으나 직계 후손은 미미하고 큰딸 사위인 교리 李福老(이복로: 협천인 호 쌍봉), 다섯 째 사위 지평 류공권(풍산인)도 처가를 따라 일직현 안망촌으로 이사를 하여 정착하였으며, 임종 때 유언대로 大田山(대전산) 북쪽 둔덕에 入葬(입장)한 공의 묘소에는 사림들이 공의 유산을 관리하여 매년 1018일에 묘제를 올리고 있다.

 

墓碑進士南八俊墓

在一直縣龜尾村北艮向 渴命公諱八俊 字士傑 寧海府 英陽縣人 祖參判敏生 考萬戶致英 母全州李氏府使知命女 享年七十七 娶光州金氏 生三男五女 性敏好學 年二十五中司馬試 遊 國學儕輩爭推有才無命 卜居大田山下 及時婚嫁以山水自娛 長女謫敎理李福老 次適別坐姜希彦 長男生員薰娶評事金克諧女 次女謫忠義衛李珣 次女謫李壕 次女謫成均學諭柳公權 次男熹娶生員盧濯女 末男鴻娶安閏宗女 嘉靖己丑葬于大田山因遺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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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진사 南八俊(남팔준)의 묘

일직현 구미촌 북쪽 艮向(간향)에 있는데. 묘갈명에 공의 휘는 八俊(팔준) 자는 士傑(사걸), 영해부 영양현 사람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부는 참판 敏生(민생)이며, 아버지는 만호 致英(치영)이고 모친은 전주 이씨 부사 知命(지명)의 딸이다. 향년 칠십칠세로 일생을 마쳤다.

광주 김씨에게 장가들어 35녀를 두었는데, 민첩한 성품에 학문을 좋아하여 2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학자들과 함께 서로 쟁론을 벌려 재주는 있었으나 科運(과운)이 없었다. 대전산 아래 자리 잡고 장가들어 신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였다.

장녀는 교리 李福老(이복로)의 처가 되었고, 다음은 별좌 姜希彦(강희언)에게 시집갔으며, 장남인 생원 ()은 평사 金克諧(김극해)의 딸을 안내로 맞았다. 차녀는 충의위 李珣(이순)의 처가 되고, 다음 딸은 李壕(이호)의 배필이 되고, 다음 달은 성균학유 柳公權(류공권)의 처가 되었다. 次男 熹()는 생원 盧濯(노탁)의 딸에게 장가가고, 막내아들 ()安閏宗(안윤종)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가정 기축 유온에 따라 대전산에 장사지냈다.

 

 


南富良(남부량) 墓碣銘(묘갈명)

 

南富良(남부량) 三陟府使公墓碣銘(삼척부사공묘갈명)
【前面大字】上護軍三陟府使南公之墓
       淑夫人成川金氏   祔
   
【碑 文】
府君諱富良字大有姓南氏英陽人英毅公諱敏后栢川公諱君甫八世孫高祖諱星老典兵判書曾祖諱有孫版圖判書祖諱暉珠文科討奇轍權謙逆有功擢拝中郎將典理判書考諱敏生仕於李朝官工曹參議 贈戶參妣宜寧郡夫人余氏父郎將諱文靖恭愍王壬子生幼而智略異凡人長登武科官至果毅將軍義興侍衛司上護軍三陟鎭兵馬僉節制使歷典會寧府使防禦鎭藩邊警安堵治蹟藹然居民相頌晚與權縣監忖權洪原輜創建安東鄉射堂以勵風氣題詩曰百年人事夢中回屈算光陰獨笑開盃酒往還知幾日強將衰老舞庭苔兄弟五人府君居長俱登名宦友愛篤至鄉邦稱之卒年日闕於譜墓在安東府西篤實山坐壬原配淑夫人成川金氏父上護軍諱瑄墓合封生三男一女男元貴司直亨貴副護軍貞貴錄事女裵孝終縣監元貴男敬身副使敬倫通禮亨貴男敬仁副使敬智修撰女權愼孫金仲義貞貴男敬彛通贊女申命昌郡守申公遂敬身男懿宗錄事仲宗季宗習讀女權哲從琴致咸縣令敬倫男孟命仲命參奉季命女宋洵敬仁男銓通訓鈞通訓欽生員銖上將錘進士鎬通訓女朴仲衡上將金以章忠順敬智男琛司果琮玖琳進士珣瑛生員女李碩勻權貴哲敬彛男軾敎授曾以下不盡錄嗚乎今距府君之世幾乎五百年之久矣第伏念當時居家細節宦業懿蹟必不止如此寥寥而譜乘曁諸家所載只此而己則今日所述亦只此而己雖然上以溯父祖以上世德之盛下以推孫曾以下蒙蔭之遠有如賁趾公之賢前後繼作以光家國府君仁德之厚忠孝之篤槩可想仰矣矣豈謂無徵而寥寥哉但竪碣一事先君子遯菴府君嘗與仁鎬相龍相弼氏夙夜憂惕者而今存歿不同矣旋伏念今日而又不能遂先父老之所志則來日之生生又可恃乎肆於頃年會奠之日幹事相璟相基炳德衋然相告期以克竣事役責光鎭備顯刻之文自惟僭妄則甚懽而固辭則亦不敢也銘曰 顯允府君公卿巨胄忠孝令緒文武兼才出則干城入則兮箕時際國初協贊王猷制節藩要朝野安堵是以遺昆蒙蔭永世賢哲鍾毓文章繼起籍蔚南林有光斯道噫此城谷寔公之竁垂五百祀尚闕石儀今修奉竪粗效誠微凡厥後生必敬必戒乃作銘辭以示窮宇 
壬寅 元月 中旬 後孫 光鎭 謹撰

 

 삼척부사공묘갈명
부군의 휘는 부량(富良) 자는 대유(大有) 성은 남씨(南氏)로 영양인(英陽人)이니 영의공(英毅公) 휘 민(敏)의 후예이고 백천공(栢川公) 휘 군보(君甫)의 7세손이다.
고조의 휘는 성로(星老)니 전병판서요, 증조의 휘는 유손(有孫)이니 판도판서요, 조의 휘는 휘주(暉珠)니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기철(奇轍)과 권겸(權謙)의 역모를 토벌한 공로로 중랑장에 발탁되어 전리판서를 역임하였다. 고의 휘는 민생(敏生)이니 조선조에 벼슬하여 공조참의로 호조참판이 증직되었다. 비는 의령군부인(宜寧郡夫人) 여씨(余氏)이니 부는 낭장인 휘 문정(文靖)이다.
공민왕 임자년에 태어나시니 어릴 때부터 지략이 보통사람보다 특이하였고、자라서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과의장군 의흥시위사 상호군 삼척진 병마첨절제사로 회령부사를 역임하면서 지방의 진을 방어하니 변방의 경계가 안전하게 됨으로 치적이 드러남에 거민들이 서로 칭송하였다.
만년에 권현감촌(權縣監忖)과 권홍원치(權洪原輜)와 함께 안동 향사당을 창건하여 풍속을 진작시켰으니 시에 이르기를 “백년의 인사가 꿈결같이 돌아와서 나이를 꼽아보니 웃음이 절로 나네. 술잔이 오고감이 몇 날인지 알았던고. 다가오는 늙어짐을 정태(庭苔)뽑고 늦춰보네.”라고 하였다.
다섯 형제 중에 부군께서 장남이었으며 함께 고관에 올랐고 우애가 돈독하니 온 향중이 칭찬하였다. 졸년일(卒年日)은 기록이 없다. 묘는 안동부 서쪽 독실 산의 임좌원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성천김씨(成川金氏)이니 부는 상호군인 휘 선(瑄)이요、묘는 합봉(合封)이다.
3남1녀를 낳으시니 아들 원귀(元貴)는 사직이요 형귀(亨貴)는 부호군이요 정귀(貞貴)는 녹사요 딸은 현감 배효종(裵孝終)에게 출가하였다. 원귀(元貴)의 아들 경신(敬身)은 부사요 경륜(敬倫)은 통례요, 형귀(亨貴)의 아들 경인(敬仁)은 부사요 경지(敬智)는 수찬이요 딸은 권신손(權愼孫), 김중의(金仲義)에게 출가했고, 정귀(貞貴)의 아들 경이(敬彛)는 통찬이요 딸은 군수 신명창(申命昌), 신공수(申公遂)에게 출가하였다. 경신(敬身)의 아들 의종(懿宗)은 녹사요, 중종(仲宗)이요, 계종(季宗)은 습독이요, 딸은 권철종(權哲從), 현령 금치함(琴致咸)에게 출가했다. 경륜(敬倫)의 아들은 맹명(孟命)이요 중명(仲命)은 참봉이요 계명(季命)이요, 딸은 송순(宋洵)에게 출가했다. 경인(敬仁)의 아들 전(銓)과 균(鈞)은 통훈(通訓)이요 흠(欽)은 생원이요 수(銖)는 상장이요 추(錘)는 진사요 호(鎬)는 통훈이고, 딸은 상장 박중형(朴仲衡), 충순 김이장(金以章)에게 출가했다. 경지(敬智)의 아들 침(琛)은 사과요, 종(琮), 구(玖)요, 림(琳)은 진사요, 순(珣)이요, 영(瑛)은 생원이고, 딸은 이석균(李碩勻), 권귀철(權貴哲)에게 출가 하였다. 경이(敬彛)의 아들 식(軾)은 교수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 한다.
오호라! 지금으로부터 부군 세대의 거리가 거의 오백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다만 생각해보건대 당시 집안의 내용과 관직의 공적들이 반드시 이같이 초초(草草)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보첩과 가승 및 모든 가문의 기록된 바가 이 같을 뿐이니 현재의 기술 또한 이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로는 부조이상 세덕의 성(盛)하였음을 밝힐 수 있었고 아래로는 자손들이 많은 음덕(蔭德) 입은 것을 알 수 있음은 비지공 같은 어진 이가 전후로 이어져서 가문과 나라를 빛냈으니 부군의 인덕의 두터움과 충효의 독실하였음을 대략 추상할 수 있으니 어찌 징빙이 없어서 초초하다 할 것인가? 다만 수갈에 대한 일은 선군자 둔암(遯菴) 부군께서 일찍이 인호(仁鎬) 상룡(相龍) 상필(相弼)씨와 함께 늘 걱정하던 일이었으나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늘날 또 다시 선부로 들의 뜻하였던 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다음에 태어나는 세대들인들 또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지난해 회전 날에 간사 상경(相璟) 상기(相基) 병덕(炳悳) 등이 감연히 이 일을 마무리하기로 서로 약속하고 광진(光鎭)에게 비문을 준비하라고 하니 스스로 생각건대 심히 참람하기는 하나 또한 고집스레 사양치 못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현윤(顯允)하신 부군께선 공경가(公卿家)의 주손이라 충효로 이어졌고 문무재주 겸하였네. 외직으론 간성(干城)이요 내직에는 궁기(弓箕)일세. 개국 때를 맞이하여 국책을 협찬했고 변방을 다스리니 조야가 편안하니 이로 인해 후손들이 음덕입기 오래였네. 현인철인 길러지고 문장들이 이어지니 무성한 남씨 숲이 이 도(道)에 빛이 됐네. 아! 이곳 성곡은 공이 묻힌 무덤일세. 오백년이 흘렀건만 아직까지 석의(石儀)없어 이제 겨우 비 세우니 작은 정성 표현되네. 모든 여러 후생들은 공경하고 경계하라. 이에 비명 저술하여 영원토록 보이노라.
임인 정월 중순에 후손 광진(光鎭)은 삼가 찬함. 

 

 

 

南修義(남수의) 修義校尉公墓碣銘幷序

(수의교위공묘갈명병서)

 

 

南修義(남수의) 修義校尉公墓碣銘幷序(수의교위공묘갈명병서)

 

前面大字朝鮮修義校尉南公之墓

宜人安東權氏祔

 

碑 文

我先祖考修義校尉府君先祖妣宜人安東權氏延釼之藏在於永嘉治南十里烽山東麓負申之原而閱五百載尙闕顯刻盖先世非未遑者爲有戒云然洎今桑海或移陵谷尤慮諸孫峻議伐石石旣具斗淵氏第次世系子孫爲按本責銘詩於炳斗以其年代邈而事行佚無所事於纂述則子孫之言庶無僣也遂銘之曰

惟吾南氏籍益陽始祖諱敏封英毅本姓金而初諱忠鳳陽府居唐朝仕按廉海外遇大颶禮州竹島船初艤因聞鑾輿播遷蜀西望埋節仍居此新羅景德優恩禮錫土改名姓又賜後世有諱倜與翼官爲尙書爲詹事中失代系不可攷由羅逮麗四百禩有諱君甫當中葉自號栢川官副使子曰公若官同正孫爲侍中諱則備生諱星老典版圖實爲府君高祖矣曾諱有孫祖暉珠討乎奇權巨慝起錄勳俱躋判書秩父爲典兵子典理世族東方領袖稱將相王室柱石恃考諱敏生官少尹痛泣身見亡麗社太祖龍興㭓鱗衆獨守罔僕歸田里朝有邊患選鈐畧爲民强起靖羣匪超陞工議竟不赴出處方見精擇義後乃推恩贈戶參蓋以五子皆登貴時有余氏宜寧貫世踵卿宰家聲懿保勝郞將文靖女封貞夫人是爲妣府君於次居三房義良其諱生己巳兩兄二弟俱大闡獨不樂仕承父志王嘉世蔭特宣科例授爲修義校尉旋遭恭懿禪遜日牢臥東岡安素履郞將權厚爲聘君太師幸其傳姓始夫人貞靜克嫓德從夫官沾宜人旨有子四人長致溫萬戶致英爲其次致明縣今末致晶號曰遠樂中進士八元八凱與八俊是爲萬戶之三子伯季進士仲司直司直之後最昌熾遠樂亦有三子男萬戶崇年承嫡祀恒年昌年亦有官校尉其仲敎授季曾玄以下華冑邈支分派別難勝記有或以勳宦風節記注煌煌耀靑史有或以問學行業俎豆苾苾永祝尸於乎龍漢經幾劫文獻無徵如宋杞表德卒年譜不傳學術行治尤莫揣惟是一生行藏義百世無疑質諸鬼且惟綿歷孫麗盛不有茂德天奚施四尺崇封尙睪如至今霜露修蠲饎猗歟由徃可證來極天斯石也不毁

後孫 炳斗 謹撰

 

수의교위공 묘갈명 병서

우리 선조고 수위교위부군과 선조비 의인 안동권씨의 영폄한 유택이 안동에서 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봉산의 동록 부신지원에 계시나 오백년이 경과한 현재까지 현각이 미비함은 선대들의 서둘지 않았음이 아니라 계금(戒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해가 능곡으로 변해지는 현세에 이르러 염려하는 후손들이 비를 세우기로 의논을 하고 비 돌을 준비한 후 두연(斗淵)씨가 대대로 이어지는 세계의 안본을 짜서 주면서 병두(炳斗)에게 명시를 지으라고 명하니 그 연대가 오래되고 사행이 유실되어 찬술할 수 없다면 자손들의 말일지라도 참람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명()하니

 

유오남씨(惟吾南氏)는 영양이 본관이라. 시조 휘는 민()이요, 영의(英毅)로 봉하였네. 본성은 김씨요, 초휘는 충()이라네. 봉양부에 사시었고 당조에 사환했네. 해외 안렴 나갔다가 구풍을 만났으니 신라땅 죽도에다 배머리를 정박하고 천자께서 서촉으로 파천했다 들으시고 서망절의 지키시며 이 땅에서 영주했네. 신라의 경덕왕이 특별한 예우로서 사성하고 개명하여 봉관석토하여 줬네. 후세 유휘(有諱) 척여익(倜與翼)이 성서첨사 역임했네. 중간에 실계하여 상고치 못한 연대 신라거쳐 고려까지 사백여년 동안일세. 중엽에 이르러서 군보(君甫)란 휘 있으니 백천(柏川)으로 자호하고 벼슬은 부사였네. 아들 이름 공약(公若)이요 관함은 동정이다. 손자는 시중으로 이름은 비()자였네. 휘 성노(星老)를 낳으시니 판도판서 역임하신 부군의 고조이시다. 증조 휘는 유손(有孫)이요, 조 휘는 휘주(暉珠)시니 기철권겸 역모쳐서 판서계에 승진하니 부형은 전병판서 자제는 전리판서 동방의 세족으로 제일 먼저 손꼽히고 왕실의 장상으로 주석지신 믿음일세. 고휘는 민생(敏生)이요, 관직은 소윤이나 고려 멸망하는 상황 몸소 겪음 통읍했네. 태조께서 용흥하니 인중이 기뻐하나 망복지절 홀로 지켜 전리로 돌아왔네. 나라에 변환이있어 전략가를 선발하니 백성위해 일어나서 비도를 정복하니 공의로 승진되나 끝내 부임 거절하니 의리를 정택하여 출처를 밝히셨네. 후세에 추은하니 호참으로 증직되니 자제들 오형제의 귀달에 의함이라. 의령관의 여씨문중 대대 명상 가문으로 보승랑장 문정따님 정부인이 비위시다. 부군께서 삼남으로 그 이름 의량(義良)이요 기사년에 출생했네. 양형이제 대천하니 부형의 뜻 따라서 벼슬길을 포기했네. 왕이 내린 세음으로 특별히 벼슬주니 수의교위 직품일세. 공의대왕 선손 때라. 동강에 운둔하여 소리를 지키셨네. 빙군이신 낭장권후(權厚) 태사행()이 그 시조라. 부인의 정정함이 비덕을 갖췄으니 부군따라 받은 직품 의인의 첩지더라. 아들이 4형제니 장남은 치온(致溫)이요 만호 치영(致英) 차남이라. 치명(致明)은 현령이요, 치정(致晶)4남이니 호는 원락(遠樂) 중진사라. 팔원(八元), 팔개(八凱), 팔준(八俊)함께 만호공의 세 자제로 백공 계공 진사이고 중공은 사직이니 사직의 후손들이 제일로 창성하고 원락공도 3자두니 만호 숭년(崇年) 승적사요, 항년(恒年) 창년(昌年) 벼슬하니 교위는 중공이요, 교수는 계공이라. 증현 이하 대 오래여 지분파별 다 못쓰나 그 중에 어떤이는 벼슬하고 공 세우고 절의로 명망얻어 청사에 빛을 냈고 또다른 어떤이는 문학과 행업으로 조두봉사 받고있네. ! 누차 겪은 병란으로 문헌의 무징함이 기송지사 방불하여 표덕과 생졸년이 보첩에 부전하니 학술과 행치들을 췌탁하지 못하겠네. 일생의 행적들이 이로 인해 불현하나 백세의 무의함은 신께서 담보하리. 대대로 이어지며 후손이 번성하니 무덕이 없었다면 천리 어찌 베풀겠나? 사척의 높은 봉분 예와 같이 우뚝하니 상로지절 견희지성 지금까지 이어졌네. ! 위대토다. 행적이 증래하니 이 세상 존재토록 이돌 또한 불훼하리.

 

후손 병두(炳斗) 삼가 지음.

 

 

 

 

南佑良(남우량) 判會寧都護府使公墓碣銘

(판회령도호부사공묘갈명)

 

南佑良(남우량) 判會寧都護府使公墓碣銘(판회령도호부사공묘갈명)

 

前面大字嘉靖大夫兵曹參議判會寧府使依依亭南公之墓

貞夫人安東金氏 祔

 

碑 文

此故嘉靖大夫兵曹參議判會寧都護府事南公之墓今五百餘年而後銘嗚呼其有時也歟公天姿英特容儀俊整十四歲遭先公憂執喪如成人及長身長八尺俊偉不常屹然爲當世之望於輿地勝覽可考也 英陵己亥別試取士公時年二十六登武壯元聲名藉甚 上召見深器之時賊犯庇仁又圍海州朝廷以李從茂爲大將柳廷顯爲都統大擧兵以禦之公以新恩奮然勇赴得大捷而還卽拜昆陽郡守有治績癸卯丁丙艱服闋以前功 際義州判官戊申 授訓鍊府使安邊府使庚戌 授典農尹辛亥拜穩城節制使加通訓通政自是歷敭中外殆無虛歲 上有大用之意 正統乙丑特拜兵曹參議遞爲工曹參議庚午 世宗昇遐行素三年壬申文宗賓天因山畢子弟泣諫進肉乃却之癸酉出爲慶尙道處置使未幾遞職戊寅判會寧都護府事瓜滿而歸公所在每有異政褒錫相繼民輒鑄銅爲碑癸未還家構亭於益友村扁以依依日以經史自娛性本嚴毅持身以禮治家有法且爲詩亦不致意曰 武人落一字何關然未嘗示諸人亦未嘗留其稿惟有鄕射堂題詠鄕人得之爲扁樑壁至今流傳謹按公諱佑良字天與號依依亭南氏本英陽大唐按廉使英毅公諱敏爲上祖後世有諱君甫仕高麗官至密直副事爲七世祖諱公若始居福州栖可村官衛尉丞同正爲六世祖諱備製述業及第判中書門下侍中爲五世祖諱星老典兵判書諱有孫版圖判書爲高曾祖也祖諱暉珠典理判書考諱敏生工曹參議後以公貴 贈嘉善大夫戶曹參判妣貞夫人宜寧余氏左右衛保勝郞將文靖女公以 洪武甲戊生卒成化壬辰十二月十六日享年七十九葬安東府北燕院烏伊洞負坎原配安東金氏上洛公方慶后通訓大夫平海郡守珥之女葬合堋生二男長致恭司直定靖難功元勳一人次致儉進勇校尉司直生一男義元通訓大夫樂安郡守校尉生四男三女男中倫中慮中淸中權女適柳澗金承祖鄭希殷郡守生五男三女男漢淮渭溟汴女適裵倫權耉金鶴孫曾玄以下繁不錄墓道舊有短碣無顯刻諸孫合謀改竪使溟鎭永佑時佑監其役石己礱佑龍具行畧一通使其子九韶及族弟榮佑跋涉百里責顯詩於忠鎬顧以耄淺筆萎辭不獲則敍之如右繼以銘曰

自新羅肇根基澤深長後蕃衍蔚爲巨家室代不絶襲冠冕掎歟公挺然生克紹前樹勳德揭揭乎其人物磊磊乎其志畧蚤歷敭有治績蒙 恩褒揭民思晚享福臥林泉收聲價聊自怡趾蟬赫述家傳襲遺謨閥敎子弟以義方忠孝全文學顯仰剰馥頌遺德綿五百年之久積善慶必有理宜其廕震乎後倬彼烏伊之原實惟巨人之宅負其坎合其封舊碑短闕顯刻諸雲仍合謀議改竪石來乞銘永千秋示無疆崇四尺懿厥名

從仕郞前 章陵參奉 眞城李忠鎬 謹撰

 

판회령도호부사공 묘갈명

이곳은 옛 가정대부 병조참의 판회령 도호부사 남공의 묘소이다. 5백여 년 후인 지금에야 명을 지으니 아! 때가 있어서인가? 공의 천자가 영특하고 용의가 준정하였으며 14세 때에 선공의 상을 당하여 집상하는 범절이 성인과 같으셨고 자라서는 신장이 8척이요, 준걸스럽고 우뚝함이 범상하지 아니하여 당세의 명망이 우뚝하였음은 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 기해년의 별시 때에 공의 나이 26세로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니 명성이 자심하니 세종께서 불러보시고 큰 인재로 인정하시었다. 이 때 적도들이 비인지방에 침범을 하고 또 해주를 포위하니 조정에서 이종무로 대장을 삼고 유정현을 도통수로 삼아 많은 병력으로 방어를 하니 공께서는 분연히 용부하여 크게 승리하고 돌아오니 바로 곤양군수로 임명하니 이곳에 선정한 공적을 남기셨다. 계묘년에 내간상을 당했다가 3년 상이 끝나니 지난날의 공로로 의주판관이 제수되었고 무신년에 훈련부사 안변부사가 제수되었고 경술년에는 전농윤이 제수되었고 신해년에는 온성절제사로 배()해지고 통훈 통정으로 승진하니 이때부터 중외의 요직을 역임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왕께서 크게 등용할 뜻이 있으셔서 정통 을축년에 특별히 병조참의로 배해졌다가 공조참의로 교체되었다. 경오년에 세종대왕이 승하하시니 3년 동안을 소식(素食)으로 지나셨고 임신년에 문종께서 또 돌아가시니 장례가 끝난 뒤에 자제들이 건강을 위하여 육류를 드실 것을 눈물을 흘리면서 간하니 모두 물리쳤다. 계유년에 경상도 처치사로 나갔다가 얼마 안되어 교체되었고 무인년에 판회령도호부사로 나갔다가 만기가 되어 돌아왔다. 공께서는 가는 곳 마다 선정을 베푸니 조정으로부터 포상이 이어졌고 백성들은 동()으로 비()를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계미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익우촌에 정자를 짓고 의의정이라 편액하고 매일같이 경사로 즐거움을 삼으셨다. 성품이 본래 엄의하여 몸가짐을 예로하고 다스림에 법도가 있으며 또 시를 짓는데 뜻을 두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무인이 한 글자 빠뜨리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하면서 일찍부터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아니 하였고 또한 글을 남기지 아니 하였으나 오직 향사당 제영시를 향인들이 얻어서 벽에 붙였던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삼가 상고하니 공의 휘는 우량, 자는 천여, 호는 의의정이니 남씨의 본은 영양이니 당나라의 안렴사 영의공 휘 민()이 시조이다. 후세의 휘 군보(君甫)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밀직부사에 이르렀으니 7세조이다. 휘 공약(公若)이 처음으로 안동 서가촌에 입향하여 벼슬이 위위승 동정이었으니 6세조이시다. 휘 비()는 제술업급제로 판중서문하시중이었으니 5세조이시다. 휘 성로(星老)는 전병판서요 휘 유손(有孫)은 판도판서니 고조와 증조이시다. 조 휘 휘주(暉珠)는 전리판서요 고 휘 민생(敏生)은 공조참의로 후에 공의 귀()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이 증직되었다. ()는 정부인 의령여씨니 좌우위보승랑장 문정(文靖)의 따님이다. 공이 홍무 갑술년에 출생하여 성화 임진년 1216일에 졸하시니 향년이 79세였다. 안동부 북쪽 연원 오이동 부감원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안동김씨 상락공 방경의 후손인 통훈대부 평해군수 이()의 따님이니 같은 곳에 안장하였다. 두 아들을 낳으니 장남인 치공(致恭)은 사직으로 정남공 원훈의 한 사람이요 차남은 치검(致儉)이니 진용교위이다. 사직의 외동아들인 의원은 통훈대부 낙안군수요 교위공이 43녀를 낳으니 남은 중륜(中倫)중려(中慮)중청(中淸)중권(中權)이요, 여는 유간(柳澗)김승조(金承祖)정희은(鄭希殷)에게 출가하였다. 군수가 53여를 낳으니 남은 한()()()()()이요, 여는 배윤(裴倫)권구(權耈)김학손(金鶴孫)에게 출가하였다. 증현손 이하는 번잡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묘도에 예로부터 단갈이 있었으나 비문이 없으므로 제손들이 개수하기로 뜻을 모으고 명진영우시우로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고 비석이 완성된 뒤에 우룡이 행략 한 통을 갖추어서 그의 아들 구소와 족제 영우로 백리 길을 발섭하여 충호에게 비문을 부탁함으로 늙고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와 같이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지으니 이르기를,

 

신라 때부터 뿌리가 내려졌으니 유택이 깊게 내려 번성하여서 울창하게 거대한 가문이 되어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도다. ! 공께서 우뚝하게 태어나서 선덕을 계승하고 공훈을 세웠도다. 우뚝하신 그 인물이요 풍부한 그 지략이도다. 일찍부터 여러 관직 역임하여 치적이 있으므로 은혜로운 포상도 받고 백성들의 존경도 받았도 다. 만년에 임천에 누어서 복록을 누리니 명성은 높아지고 마음은 편안했네. 전해지 는 가법을 빛나게 계술하고 유모를 답습하여 문벌을 빛을 냈네. 자제들을 의방으로 가르치니 충효는 온전하고 문학은 현달했네. 전해지는 향기로운 유덕을 읊조리니 5백 년의 오램이라. 적선하면 경사있음 이치 필히 있음이니 후손들이 받는 음덕 온당한 이치니라. 오이동의 우뚝한 저 무덤은 실로 거인의 유택이라. 같은 좌향에 합봉으로 모시었네. 작은 구비에 비문이 없으므로 모든 자손 뜻을 모아 비명받아 개수하니 천 추만세 무궁토록 우뚝한 사척비(四尺碑)에 그 이름 전해지네.

 

종사랑 전 장릉참봉 진성 이충호 근찬.

 

 

 

南天漢(남천한) 墓碣銘(묘갈명)

 

南天漢(남천한) 宣祖 40年 丁未(1607)~ 肅宗 12年 丙寅(1686) 80.

字 章宇. 號 孤巖. 英陽人 應元曾孫, 懶齋 隆達.

 

공은 인조 8년 경오(1630) 생원시에 합격하고 24년 병술(1646)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1669(기해)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慈懿大妃(자의대비)의 상복은 耆年(기년)설로 정하여졌다.(1차예송) 현종 15(1674) 효종비 仁宣王后(인선왕후)가 승하하니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2차예송) 또다시 거론될 때 공이 장령으로 기해년설로 1차예송을 논한 바를 기준으로 耆年說(기년설)로 정하게 되니 이는 복제에 대한 판단이 번복되었을 뿐 아니라 남인 득세의 계기를 마련하게 한 것이다.

공의 묘는 갈라산 갑좌에 있고 묘갈명은 拓巖(탁암) 金道和(김도화) 찬이다. 뒤에 향인이 봉암서원에 제향하였다.

 

墓誌銘

大司諫孤巖南公墓誌銘 幷序

永嘉之東 有山拔地 淸秀介然 有君子之容 所謂葛羅山也 故大司諫孤巖先生 南公歸葬于 此淸名直節 與玆山爭高吁 亦異哉按 公諱天漢字章于 孤巖其號也 姓南氏系出英陽 新羅英毅公敏 其始祖也 歷高麗至我朝 有聞人 高祖曰健參奉 曾祖曰應元贈司僕正 號許瀨亭 祖曰隆達 贈左承旨號懶齋 考諱磼贈參判 妣冶城宋氏 察訪福基女也 配安東權氏舍人宗善女 丹陽禹氏察訪弘鼎女 一男汝衡生員 二女李賁,金聖重生員 嗣男斗精 一女李萬容縣監 李男後榮郡守,後植, 金男龍欽斗 精子 龍範子亨龜 子始淳嗣子基榮其世適也 公生於萬曆丁未 姿相玉溫 才藝泉湧 庚午陞上庠 乙酉闡黃 甲寅戌選輔承文院 榮名甚年 除歲遷內則佐郞也 正言也 掌憲承宣也 大諫也 三曹參議也 外則金城也 居山也 淸風也 其治民之績則 在居山郵卒咸戴枉 淸道吏民 去思其格 君之道則 掌憲時極論 己亥誤禮至有告 廟之擧 又引宋朝服議 以正閔愼之 罪蓋其秉禮守經儻 然不挫 有千萬人 吾往之氣象百歲之下 有足以 想見者矣 惜乎其遺書 散佚 疏本亦斷爛而無全也 雖然義理之枉人心 殄滅佗不得 則先生之心與事 何患乎 不明哉 公之倣裔錫熙 甫以竁事來 謀議有不敢辭者 遂撮其大而爲之銘 銘曰 猗嗟先生 天賦挻特 玉雪其標 金矢其直 乃躡雲䢯 睿眷如渴 擢之淸要 任之承弼 堂堂禮論 嚴於斧鉞 朝陽鳳雛 殿陛鷹擊 一紙騰傳 灑然衰叔 國是遂定 人紀以植 身隨道晦 名與義哲 有石不磨 以竢千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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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대사간 고암 남공 묘지명 병서

 

永嘉(영가) 동쪽 특출한 땅에 한 산이 있는데, 깨끗하고 빼어나며 굳게 지켜 변함이 없는 것이 군자의 모습과 같은데, 그 산이 바로 葛羅山(갈라산)이다. 고 대사간 南公(남공) 孤巖先生(고암선생)을 매장한 바로 그 산인데, 그곳에 곧은 절개와 깨끗한 공의 이름이, 그 산과 높이를 겨루고 있으니, 아아! 역시 뛰어났구나!

공의 휘는 天漢(천한), 자는 章于(장우), 孤巖(고암)은 그의 호이다. 성은 南氏(남씨)英陽(영양) 出系(출계)이며, 신라 英毅公(영의공) ()이 그의 시조이다. 고려시대를 지나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고조부인 ()으로 참봉을 지냈다.

증조부는 應元(응원)이라 하고 증 사복정이며 호는 許瀨亭(허뢰정)이다. 조부는 隆達(융달)이라 하는데 증 좌승지고 호는 懶齋(나재)이다. 부친의 휘는 ()이며 증 참판이시다. 모친은 冶城宋氏(야성송씨) 찰방 福基(복기)의 딸이다.

배위는 安東權氏(안동권씨) 사인 宗善(종선)의 딸과, 丹陽禹氏(단양우씨) 찰방 弘鼎(홍정)의 딸로 두 분이다. 한 아들 汝衡(여형)은 생원이고 두 딸은 李賁(이분), 생원 金聖重(김성중)의 처가 되었다.

대를 이을 아들은 斗精(두정)이고, 딸은 현감 李萬容(이만용)의 처이고 그의 두 아들은 군수인 後榮(후영), 後植(후식)이고 딸은 金男龍(김남용)의 처이다.

斗精(두정)의 아들은 龍範(용범), 그 아들은 亨龜(형구), 그 아들은 始淳(시순)이고 嗣子(사자) 基榮(기영)이는 그 세대를 이은자이다.

공은 萬曆(만력) 정미 년에 태어났고 용모는 옥같이 깨끗하며, 재능과 기예가 샘솟았고, 경오 년에 학교에 들어갔고, 을유 년에 관례를 마치고, 갑인 년에 승문원에 뽑혀 들어가 이름을 드날리니, 내직으로 들어가 좌랑이 되었다.

정언이 되고, 장헌승선이 되고, 대간이 되고, 삼조참의가 되었다가, 외직으로 金城(금성), 居山(거산), 淸風(청풍) 등으고 갔는데, 백성을 다스림에 실적이 있었다. 居山(거산)에 있을 때는 역졸을 모두 잘 감복시켰고, 청도에서는 아전과 백성들이 떠난 뒤에도 그 치적을 잊지 않고 생각하였다.

임금이 취 할 도리에 대해, 장령 때 極論(극론)이 벌어졌는데, 기해년에 잘못된 ()를 지적하여, 종묘에서 바르게 거행하게 하였고, 또한 宋朝(송조)服制(복제)를 인용하여, 바르게 거행하였으며, 허물을 덮고 예를 바로잡아 나가니 반대하는 무리들이 천만 명이니 있어도 꺾이지 아니하고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가는 기상은 백년이 지난 뒤에도 보는 자로 하여금 흡족하게 한다.

 

아깝게됴 그 남긴 기록들이 흩어져 없어지고, 疏本(소본)도 역시 헐어 없어져 자료가 전여 없어졌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남아있는 義理(의리)는 다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니, 선생이 관여한 일은 마음에 있으니 어찌 근심하리요. 분명하지는 않으나, 공의 휴손인 ()熙甫(희보)가 와서 墓銘(묘명)이야기를 하며 의논하니 사양 할 수가 없어, 드디어 그 대의라도 ()으로 적으려 한다.

 

銘曰(명왈)

아아! 놀라운 선생 猗嗟先生

타고난 남자다운 기상 天賦挻特

백옥 같은 그 자태 玉雪其標

금 화살 같은 그 곧음 金矢其直

구름위에 우뚝 솟아 乃躡雲䢯

임금 목마른 듯 그리며 睿眷如渴

요직으로 뽑혀가서 擢之淸要

맡아서 도우고 받드니 任之承弼

당당하게 禮論(예론) 堂堂禮論

엄한 부설백의로 간언 嚴於斧鉞

아침빛에 봉황같이 朝陽鳳雛

궁전에 떨지는 송골매 殿陛鷹擊

한 장 종이 높이 전해 一紙騰傳

기세 꺾어 조용하니 灑然衰叔

나라는 바르게 되고 國是遂定

사람의 기강 서네. 人紀以植

몸소 도를 이룩하고 身隨道晦

이름은 의롭고 밝으니 名與義哲

돌이 달아 없어지지 말고 有石不磨

이에 천억 년을 남으리라. 以竢千億

 

 

 

 

 

 

 

항렬표(行列表)

영양관(英陽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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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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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관(宜寧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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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行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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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관(固城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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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行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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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씨는 남한에 총 53,011 가구, 222,246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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