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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노씨:광주노씨(盧)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광산:광주노씨)

 

 

본관(本貫): 광산(光山)

시조(始祖): 노해(盧垓)

유래(由來):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의 아들 9형제 중 맏아들 노 해(盧垓)가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아버지와 함께 동래(東來)하여 신라(新羅)에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광산(光山)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광산백(光山伯) ()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때 정승(政丞)을 지내고 광주군(光州君)에 봉해진 만()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系統)과 대호군(大護軍) ()를 일세조로 계대(繼代)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노숭(盧嵩)

1337(충숙왕 복위 6)1414(태종 1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숭(),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할아버지는 대호군 단()이고, 아버지는 감찰지평(監察持平) 준경(俊卿)이며, 어머니는 비순위별장(備巡衛別將) 이천로(李天老)의 딸이다.

1357(공민왕 6)에 진사가 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 正言 지신사 ( 知申事 대사헌·지밀직(知密直)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우왕 때는 왕에게 놀기 좋아하는 것을 여러 차례 간언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다.

1389(공양왕 1)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용안(龍安 지금의 益山)과 영산(榮山 지금의 나주시)에 각각 득성창(得成倉)과 영산창 ( 榮山倉 )을 세웠다. 그리고 성을 쌓아 조운을 편리하게 하고, 왜구로부터의 피해를 막았다. 또한 조세를 3년 동안 면제시켜주도록 조정에 건의했으며, 의창 ( 義倉 )이 없는 주군(州郡)에 이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정진개국원종공신녹권 鄭津開國原從功臣錄券에 의하면, 조선 개국 후 한양윤(漢陽尹)으로서 개국원종공신에 추가로 녹훈되었고 공신전 30결을 받았다. 1395(태조 4) 개성유후(開城留後)를 거쳐 1397년에는 경기좌도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경기 땅에 고관들의 별장이 많았는데, 차역(差役)을 고르게 하고 청탁을 하지 않는 청렴함을 보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삼사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발탁되었으나 노모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다음해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기복 ( 起復 )되었고, 그 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거쳐 1414년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에 이르렀다. 죽을 때 아들들에게 불사(佛事)를 쓰지 말도록 유언했으며,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 상주의 옥연사(玉淵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경평(敬平)이다.

 

노준공(盧俊恭)

대제학(大提學) 유간(有幹)의 손자 준공(俊恭)은 고려 말 단상제(短喪制)가 성행하던 때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3년상을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정려(旌閭)를 하사(下賜) 받았다.

 

노수신(盧守愼)

1515(중종 10) 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 遼 齋) · 이재(伊齋) · 암실(暗室) · 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숭()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이다. 1531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 ( 李延慶 )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154127세 때 이언적 ( 李彦迪 )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전적 ( 典籍 ) · 수찬 ( 修撰 )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 咬 )를 탄핵해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 ( 小尹 ) 윤원형 ( 尹元衡 )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이황 ( 李滉 ) · 김인후 ( 金麟厚 )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 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 : 정교하고 명확함.)해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 : 전하여 외워옴)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 大學章句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 ( 校理 )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 · 부제학 · 대사헌 · 이조판서 ·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 ( 臺諫 )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시 · · 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 · 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 ( 陽明學 )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승려인 휴정 ( 休靜 ) · 선수 ( 善修 )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 ( 玉堂 )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 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곤지기 困知記 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해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해,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해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한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해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 ( 國喪 ) 때와 같이 했는데, 그 뒤 직제학 정철 ( 鄭澈 )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 ( 申點 )이 주청해 담제( 詭 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의 팔봉서원 ( 八峰書院 ), 상주의 도남서원 ( 道南書院 ) · 봉산서원 ( 鳳山書院 ),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 ( 花巖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노흠(盧欽)

1527(중종 22)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공신(公愼), 호는 입재(立齋만세(晩歲죽천(竹泉). 삼가(三嘉 :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출생. 아버지는 수민(秀民)이며, 어머니는 일직손씨(一直孫氏)로 생원 세기(世紀)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4(명종 19) 생원시에 합격, 참봉· 봉사 ( 奉事 )가 되었으나 낙향하여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공로로 별제 ( 別提 찰방 ( 察訪 )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시와 글씨에 능하였다. 삼가의 고암서원(古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입재고광주노씨세고중에 수록되어 전한다.

 

노극홍(盧克弘)

1553(명종 8)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자는 의보(毅甫), 호는 옥촌(沃村). 창녕(昌寧)에서 출생. 아버지는 부정 ( 副正 ) ()이며,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증 판서(贈判書) 사중(思中)의 딸이다. 외삼촌인 정구 ( 鄭逑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에 침잠, 천인(天人성명 ( 性命 )을 깊이 궁구하였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의 엄격한 훈도로 자랐다.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했으며,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자제들을 이끌고 의병장 곽재우(郭再佑)의 휘하에 들어가 서기 ( 書記 참모(參謨) 등으로 활약, 왜적과 싸웠다.

그 후 정유재란 시에도 다시 화왕산성 ( 火旺山城 )에 들어가 방어하였는데, 곽재우가 상()을 당하여 귀향,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동지(同志)들과 합심하여 민심을 수습, 화왕산성을 끝까지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만년에는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학행으로 조정에서 벼슬이 주어졌으나 취임치 않다가 노인직으로 첨지중부사에 제수되었다. 창녕(昌寧)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

 

노극복(盧克復)

초명은 극복(克福). 자는 길보(吉甫), 호는 월화당(月華堂). 아버지는 생원 대성(大成)이다. 정경세 ( 鄭經世 )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재주가 뛰어나 7, 8세에 시를 짓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정온 ( 鄭蘊 심광세 ( 沈光世 임진무(林鎭懋) 등과 함께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고 토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고성(固城)으로 유배갈 때 당시 수찬으로 있던 심광세는 초계 ( 草溪 )에 있는 그를 군자유(君子儒)라고 소개하였는데, 그를 찾아본 인조는 학식의 해박함에 감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유일(遺逸)로 등용되어 곧 이조정랑에 올랐으나 벼슬보다 학문에 열중하기 위하여 사직,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7(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고성에서 창의(倡義), 조도사(調度使) 이준 ( 李埈 )을 도와 군량미 조달에 진력하였다. 그뒤 호소사(號召使) 정경세의 천거로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노준명(盧峻命)

수신(守愼)의 증손 준명(峻命)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종하여 홍원 목사(洪原牧使)를 역임했다.

 

노계원(盧啓元)

1695(숙종 21)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백춘(伯春), 호는 운음(芸陰). 경상도 예안 ( 禮安 )에서 출생하였다. 수신(守愼)5대 손이며, 이만부 ( 李萬敷 )의 문인이다.

1719(숙종 45) 사마시에 합격, 학행으로 조현명 ( 趙顯命 )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예학에 밝았으며, 대학장구견의 大學章句見疑·오행설 五行說·정성서의 定性書義·심의설 深衣說등의 저술이 있다. 상주의 옥연사(玉淵祠)에 제향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7,682가구, 72,3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盧守愼(노수신) 선생의 일화.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양재역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가 한 때 진도에 귀양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마음에 드는 처녀가 있으면 중매와 예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처 들어가 서로 쟁탈하는 약탈결혼 이였다.
그래서 선생은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해서 드디어 야만의 풍속을 없어지게 했다.

또한 선생은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백포립(白布笠:흰 색의 갓)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 때와 같이 했는데, 그 뒤 직제학 정철(鄭澈)도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담제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나라에서 제도화 시키게 되었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盧守愼(노수신)선생의 일화

귀양지에서 낚은 고기

 

경은 하루라도 내 곁을 떠날 수 없다.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와서 변함없이 나를 도운다면 이는 충과 효를 갖추는 일이다.”

노수신(盧守愼)이 어머님 병환으로 대사헌 벼슬을 사양했을 때 선조 임금님이 만류하신 말이다. 그만큼 왕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닌 분이었다. 그의 자()는 과회 (寡悔), 호는 소재 (蘇齋),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 홍(盧鴻)의 아들이다. 서기 1516(중종 10)에 태어나서 중종 38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선조 6년에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서기 1589(선조 23)에 작고하여 상주 도남 서원에 향사했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이 기(李芑)를 탄핵하여 이 기가 파직되었다. 명종 때 윤 원형이 이 기와 더불어 을사 사화를 일으켜 노 수신은 파직되었다. 가정 언각이라는 분의 벽서 사건으로 죄가 더해져서 순천에서부터 진도로 귀양살이를 옮기게 되었다. 진도에 가 보니 섬의 풍속이 본래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여자가 있으면 중매 없이 칼을 빼 들고 쟁탈하였다. 그가 예법으로써 깨우쳐서 비로소 혼인 예식이 있게 되었고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을사 사화에서 풀려나 복직 되었다. 1584(선 조 18)에 영의정이 되어 당쟁의 근원이 된 심 의겸, 김 효원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 보냈다.

 

아버지 상을 당하였을 때 왕이 의원을 보내 위문하니 임금님께 글을 올려 사례 하고 군덕지계(君德之戒) 여섯 가지를 올렸다.

첫째, 토론보다 실학을 찾고

둘째, 잘못보다 근본을 세우고

세째, 권력 잡는 것보다 인심을 화합하는 데 힘쓰고

네째, 전례보다 옛 정신을 행하는 데 힘쓰고

다섯째, 아부보다 정직과 사랑함에 힘쓰고,

여섯째, 재능보다 국량과 지식을 중하게 여기는 것 등이었다.

 

아버지의 상중에 초종범절과 거상에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다달았다.

애통과 거친 음식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여 인재를 뽑아 쓸 것을 주장하고 이 이, 이 지함, 김 천일, 조 묵, 민 순, 이 산해, 허 봉, 류 몽학, 최 영경 등 많은 인재를 조정에 추천하여 쓰게 하니 실로 백성을 위하고 앞 일을 내다보는 덕과 재주를 갖춘 훌륭한 정치가라 하겠다. 그의 학문은 항상 바르게 하여 품행을 닦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이 몸을 닦은 후에 사물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질서로 삼았다. 가정에서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옷과 음식이 검소 하였으며, 몸가짐 하나하나에 법도를 지켰다.

1588(선조 22)에 정 여립이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옥사가 크게 일어났다.

 

내가 사람을 잘못 천거한 죄가 크다

하며 곧 대궐문 밖에 나가서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자처했다.

또 원래 천성 이 온후하여 모난 데가 없었다. 남이 자기를 해치고자 해도 한 번도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조헌이 세 번이나 상소를 하여 그를 비롯한 여러 선비들을 헐뜯으니 삼사(三司)에서 조헌을 죄를 주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반대하여 말하기를

조헌이 몹쓸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소한 것으로써 죄를 준다는 것은 착한 임금으로 할 바가 아니다. ”

하였다.

 

임금의 은총이 과분함을 송구하게 생각하고 관직이 오를 때마다 굳이 사양했으며 정승이 되는 날 안색이 변하고 근심이 가득했었다고 한다.

 

귀양가 있는 곳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함을 큰 죄로 생각하여 수 천릿길에 인편마다 손수 낚시로 잡은 고기를 부모님께 드시도록 보냈으며 부모님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가고자 하니 임금님이 그의 고향과 가까운 충청 감사로 임명한 적도 있었다.

 

그의 나이 67 세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시묘막의 거친 짚자리와 거친 음식(蔬食)에 몸이 상할까 걱정하신 임금님이 원칙은 아니지만 권도(權道)로 행하라 하고 쌀과 콩을 하사해 보내시 니 그는 상소하여 임금님 은혜에 감격하기도 하였다. 또한 평생에 벼슬길에 나아가 효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돌아가실 때

"선영(先塋) 곁 시묘하던 곳에 장사지내라. ”

하니 그 곳, 지금의 상주군 화서면 원천에 장사하였다.

수천 수의 시, , , 교서, 서문, 작은 비갈명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글이 있었으나 전란으로 많이 불타 없어지고 남은 글은 간추려 간행한 시 아홉 권과 문 여섯 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주자학에도 대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황은 그의 저술을 보고

동방에 공자의 도가 없어지지 않았다하며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설이 육 상산(陸象山) 왕 양명(王陽明)에 치우쳤다고 공격을 받을 만큼 되 기도 했다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휴정(休靜), 선수(善脩) 등 스님들과 깊이 사귀어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식(李植)은 도학자 중 선학(禪學)을 겸한 것은 노 수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노 수신은 인종, 명종, 선조 3 대에 걸친 대정치가로서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고 인재를 적극 발굴하여 쓴 안목 있는 선비었으며, 대문장가이며 학문에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대학자이며 또한 지극한 효자였었다.

그의 종택(宗宅)과 가묘(家廟)는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에 있으며 지금도 그 후손이 상주군 중화지역 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영정은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에 있는 오현 영각과 칠현 영각에 각각 보존되어 있는데 많이 허물어져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소재 노 수신과 같 은 훌륭한 재상이 그리 흔하지 않은데도 이 분의 영각 하나 변변히 유지 보수하지 못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봉산 서원에 향사하고 있다.

문 인채 : 상주군 교육청 장학사

참고 문헌 尙州의 얼 , 嶺南人物考 , 商山誌 , 孝烈行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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