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盧(만경노씨)
본관(本貫): 만경(萬頃)
시조(始祖): 노극청(盧克淸)
유래(由來):
만경 노씨(萬頃盧氏)는 평양백(平壤伯) 노판(盧坂)의 후손 극청(克淸)이 고려 명종조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만경군(萬頃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평양 노씨(平壤盧氏)에서 분적(分籍), 만경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극청(克淸)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노상귀(盧尙貴)
일세조 극청의 아들 상귀(尙貴)가 고려조에서 판관(判官)을 지냈다.
노근(盧謹)
동정(同正)
노혁(盧革)
7세손 혁(革)은 1401년(태종 1)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세종 때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노응환(盧應晥)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 자는 명원(明遠), 호는 수암(守庵). 아버지는 봉사 ( 奉事 ) 세득(世得)이다. 조헌 ( 趙憲 )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 조헌을 따라 의병에 자원하여 청주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어 금산싸움에서 용전하다가 조헌 및 칠백의사와 함께 전사하였다. 고향에 정문이 세워지고 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노씨(盧氏)의 3의사(三義士)로 불리고 있다.
노숙(盧潚)
숙(潚)은 이 괄(李 适)의 난(亂) 때 공주(公州)로 피난간 인조의 시중을 극진히 하여 난이 평정된 후 왕이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벼슬을 내리고 공신(功臣)에 책록(策錄)하려 하자 이를 극구 사양하므로 인조(仁祖)는 그의 고향을 <조왕동(助王洞)>이라 부르게 하였다.
노위(盧瑋)
숙의 아우 위(瑋)는 별제(別提)를 지냈다.
노찬(盧璨)
응호의 아들 찬(璨)은 좌랑(佐郞)을 역임.
노삼방(盧三邦)
현감(縣監)
노이점(盧以漸)
부사(府使)
노이척(盧以倜)
군수(郡守)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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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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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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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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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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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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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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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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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淳(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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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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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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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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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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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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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현),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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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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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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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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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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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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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원),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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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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錫(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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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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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수),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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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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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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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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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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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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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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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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燮(섭),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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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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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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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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彦(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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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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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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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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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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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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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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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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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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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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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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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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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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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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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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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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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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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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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炳(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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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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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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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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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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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구조사 결과 남한에 총 1,3600가구, 5,8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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