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金(파평김씨)
본관(本貫): 파평(坡平)
시조(始祖): 김장수(金長壽)
유래(由來):
파평 김씨(坡平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전하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祥考)할 수 없다.
파평김씨신해보(坡平金氏辛亥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장수(金長壽)는 염주인(鹽州人)으로 일찍이 당나라 명신(明臣)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닦아 지식이 해박하고 경술(經術)이 뛰어났으며, 1361년(공민왕 10) 상호군(上護軍)으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 겸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올랐다.
1363년(공민왕 12) 중신(重臣) 김용(金鏞)이 공민왕(恭愍王)이 흥왕사(興王寺)에 있음을 기회로 왕을 시해(弑害)하려고 하자 상장군(上將軍)으로 이를 평정(平定)하려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난(亂)이 평정(平定)되자 왕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개성윤(開城尹)에 추증하였으며 파평군(坡平君)에 추봉(追封)한 후 시호(諡號)를 충간(忠簡)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게 되었다.
김인기(金仁奇)
장수(長壽)의 아들 인기(仁奇)가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됨을 시작으로 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김효신(金孝新)
장수(長壽)의 현손(玄孫) 효신(孝新)은 1453년(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나갔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김확
효신의 맏아들 확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울산(蔚山)에 유배, 중종(中宗) 때 풀려나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등용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선조(宣祖)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석(金錫)
효신의 차남 석(錫)은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을 지냈다.
<한민족대성보>에서 인용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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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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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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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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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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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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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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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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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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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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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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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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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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泳(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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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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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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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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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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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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模(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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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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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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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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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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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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燦(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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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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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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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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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구조사 결과파평 김씨(坡平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467가구, 2,1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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