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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풍산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풍산김씨)

 

 

본관(本貫): 풍산(豊山)

시조(始祖): 김문적(金文迪)

유래(由來):

 

풍산 김씨(豊山金氏)의 시조(始祖)  김문적(金文迪)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11세손으로, 풍산현(豊山縣)에 살면서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여  나라에 공을 세우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판사사(判司使 : 밀직사의 종 2품 으뜸 벼슬) 올라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기일세(起一世)하여 관향(貫鄕)을 풍산(豊山)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양진(金楊震)

1467(세조 13)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堂). 할아버지는 종석(從石)이고, 아버지는 진산군수 휘손(徽孫)이며, 어머니는 민효열(閔孝悅)의 딸이다. 7세에 문장을 잘 지어 서거정 ( 徐居正 )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장성하면서 정효항 ( 鄭孝恒 )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1489(성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7(연산군 3) 별시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에 임명되었다. 1503년 부수찬 ( 副修撰 )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호 추존(廟號追尊)을 적극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예천에 정배되었다. 1506년의 중종반정 후 귀양에서 돌아와 형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 이어서 헌납 ( 獻納 집의 ( 執義 )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면서 당시 폐단이 큰 고리대금의 개선을 도모하였다.

1513(중종 8) 역학에 밝아 김안국 ( 金安國 이행 ( 李荇 ) 등과 더불어 사유(師儒)로 뽑혔으며, 1517년 남곤 ( 南袞 )의 추천으로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천거과(薦擧科)의 불편을 말했다가 사림의 탄핵을 받아 영해부사로 전출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남곤 등이 정권을 장악하자, 형조참의로 발탁되었다가 바로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마침 도내에서 그의 사위 김윤종(金胤宗)이 죄를 범하고 도주해 체포의 문제가 있었으나 무난히 임기를 마쳤다. 이어서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친 다음 이조·예조의 참의를 각기 역임하였다.

이 때에 김안로 ( 金安老 )의 아들 희()가 중종의 부마로서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호화 저택을 짓는 공사를 벌이자, 이를 탄핵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황해도관찰사로 전출되었다. 그 뒤 잠시 공조참판과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한직(閑職)에 머물렀다. 1535년 왕이 송도에 행차했을 때, 유도재상(留都宰相)으로 숙위 ( 宿衛 )에 임하다가 죽었다.

성품이 파당과 꾸밈을 싫어했고, 음주를 즐기며 학문에 밝아 이행· 정희량 ( 鄭希良 권달수(權達手) 등과 교유가 깊었다. 학문은 특히 역학·음양 및 복서 ( 卜筮 )에 통달하였다. 중종 때 청백리에 뽑혔고, 안동의 물계서원 ( 勿溪書院 )에 제향되었다.

 

김진(金鎭)

통훈대부(通訓大夫) 순정(順貞)의 아들 진()1549(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수찬(修撰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치고, 1품의 관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지냈다.

 

김대현(金大賢)

1553(명종 8) 1602(선조 3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지(希之), 호는 유연당(悠然堂). 영주 출신. 할아버지는 정자 의정(義貞)이고, 아버지는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 ()이다. 어머니는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권일(權鎰)의 딸이다.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며, 158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덕형 ( 李德馨 )과 김륵(金 耐 )의 추천으로 1595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이 되고 뒤이어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이 되었다.

이 때 명나라 장수 형개(邢 坎 )의 접대낭청(接待郎廳)에 선발되었으며, 곧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승진되었으나 물러나 영주에서 이산원(伊山院) 원장에 피선되었다.

1601년에 산음현감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향병을 모아 안집사(按集使) 김륵의 휘하에 들어가서 민심수습에 공헌하고 난이 끝난 뒤에는 기민구제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황 ( 李滉 )을 해동공자로 부를 만큼 존숭하였으며, 이로써 그의 학문과 사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도잠(陶潛)을 매우 좋아해 스스로 당호를 유연당 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유연당선생문집 42책이 있다.

 

김수현(金壽賢)

1565(명종 20) 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정수(廷 馬 ), 호는 둔곡(遁谷). 공조참판 양진(楊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정(順貞)이고, 아버지는 장령 진()이며, 어머니는 정세신(鄭世臣)의 딸이다.

1602(선조 35)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 ( 正言 ) · 사서 ( 司書 ) 등을 거쳐 문학 ( 文學 )에 재임 중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해 임진왜란으로 불탄 사고의 정비에 참여하였다. 그 뒤 헌납 ( 獻納 ) · 전적 ( 典籍 ) · 예조정랑 등을 지낸 뒤 홍원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

1610(광해군 2) 호분위부사직(虎賁衛副司直)으로 선조실록 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수찬 ( 修撰 )으로 유영경 ( 柳永慶 )을 탄핵하는 언론 활동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어 장령(掌令) · 검상 ( 檢詳 ) 등을 지낸 뒤 정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1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승지 ( 承旨 )가 되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우부승지 · 호조참의 등을 거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곧 대사헌으로 전직되었다가 의정부에서 이조판서 이귀 ( 李貴 )와 서로 언쟁을 벌인 일이 화근이 되어 이후 계속 대립하였다. 그 뒤 도승지 · 이조참판 · 대사간 · (사헌)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에 의해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당할 때 이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최명길 ( 崔鳴吉 ) 등 주화파의 주장으로 화의 국서가 작성될 때도 척화를 끝까지 내세웠으며, 인조와 조신들이 모두 항복할 때도 연로하다는 이유로 호종하지 않아 척화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1644년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 나이가 80세라고 해 자헌대부 ( 資憲大夫 )에 가자(加資)되고 우참찬에 올랐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김진(金鎭)

통훈대부(通訓大夫) 순정(順貞)의 아들 진()1549(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수찬(修撰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치고, 1품의 관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김봉조(金奉祖)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봉조(奉祖)1613(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감찰(監察지평(持平) 등을  거쳐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올랐다.

 

김영조(金榮祖)

1577(선조 10) 1648(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할아버지는 사의 ( 司議 ) ()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 대현 ( 大賢 )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김성일 ( 金誠一 )의 사위이다.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전적 ( 典籍 )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 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 ( 正言 ) · 지평 ( 持平 ) · 부수찬 ( 副修撰 ) · 장령 ( 掌令 ) · 대사헌 · 대사성 · 대사간 · 부제학 ( 副提學 ) ·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 ( 鄭曄 ), 대사간 이현영 ( 李顯英 ) 등과 함께 인성군 공(仁城君珙)이 이괄 ( 李适 )의 난에 간여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25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 내용이 경망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주장하고, “ 인성군 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했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해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 ” 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에는 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 ( 奏請使 ) 한인급 ( 韓仁及 )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받았다. 1642년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 ( 取才 ) 때 인사 부정의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하였다. 영천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 이 있다.

 

김경조(金慶祖)

병자호란(丙子胡亂)  절도사(節度使)로 종군(從軍).

 

김응윤(金應胤)

부사(府使)

 

김시필(金時弼)

현감(縣監)을 지난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순흠(金舜欽)

1840(헌종 6) 1910. 의병. 자는 치화(穉華), 호는 죽포(竹圃). 경상북도 안동 출신. 중관(重瓘)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문명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1894년 당시 경상감사 조병호 ( 趙秉鎬 )가 여러 차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거절했다.

1895년의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허위 ( 許蔿 ) · 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장들과 행동을 같이하기도 하였으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열중하며 10여년을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 討五賊文 을 지어 전국 유림에 살포하였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소식을 듣자 비분하여 경학원 ( 經學院 )의 강사를 거절하고, “ 일제의 치하에서 자란 곡식은 먹을 수 없다. ” 며 단식을 감행,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840(헌종 6) 1910. 의병. 자는 치화(穉華), 호는 죽포(竹圃). 경상북도 안동 출신. 중관(重瓘)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문명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1894년 당시 경상감사 조병호 ( 趙秉鎬 )가 여러 차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거절했다.

1895년의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허위 ( 許蔿 ) · 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장들과 행동을 같이하기도 하였으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열중하며 10여년을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 討五賊文 을 지어 전국 유림에 살포하였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소식을 듣자 비분하여 경학원 ( 經學院 )의 강사를 거절하고, “ 일제의 치하에서 자란 곡식은 먹을 수 없다. ” 며 단식을 감행,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지섭(金祉燮)

1885(고종 22)1928. 독립운동가. 호는 추강(秋岡). 경상북도 안동 출신.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일어를 자습해 21세 때에 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김원봉 ( 金元鳳 곽재기 ( 郭在驥 김시현(金始顯) 등과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였다.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상해·시베리아 등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22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하고자 1922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국내에서 파괴공작을 실행하고자 19233월에 폭탄 36개를 상해로부터 톈진(天津)으로 수송해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안동현(安東縣)에 중개소까지 설치하였다.

그 폭탄을 김시현·유석현(劉錫鉉황옥 ( 黃鈺 ) 등에게 서울로 가져오게 해 315일을 기해 조선총독부·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찰에 사전에 탐지되어 실패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판사였던 백윤화(白允和)에게 5만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배신당하고 동지 윤병구 ( 尹炳球 )마저 붙잡히고 말았다.

이 무렵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가 일어나 한국인 학살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1924년 초 일본 동경에서 소위 제국의회(帝國議會)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를 보복의 기회로 결심하고 동경에 가기로 하였다. 이듬 해 14일 동경으로 가던 중, 대판(大阪)에서 제국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획을 바꾸어 침략의 아성인 황성(皇城)에 투탄하기로 결정하고 15일 황성 정문에 접근하였다. 호위경관이 저지하자 폭탄 한 개를 던지고 재빨리 궁성 쪽으로 달려갔다. 호위경관들이 달려오므로 나머지 폭탄은 니주바시(二重橋) 한복판에 던지고 붙잡혔다.

19258월 동경공소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되어 있던 중, 1927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 해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종휴(金宗烋), 김의탁(金義倬)

한말(韓末)에 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로 유명한 종휴(宗烋순흠(舜欽지섭(祉燮의탁(義倬)  등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므로 가문을 더욱 빛냈다.

 

 

 

金舜欽(김순흠)

 

西山歌(서산가)를 옳은 金舜欽(김순흠)

 

김순흠은 1841년 풍산현 증수동(현재의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6세 때에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8세에는 스스로 詩文(시문)을 지을 정도였다. 12세에는 소학을 공부하여 충효야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 도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김순흠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외출을 했을 때에는 비록 늦은 밤이더라도 동구 밖까지 나가서 기다리다가, 아버지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으면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도 고개를 넘어 미중을 나가곤 하였다

김순흠은 29세 되던 해 모친상을 당하였다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있을 때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드리는가 하면, 약을 달여 자신이 먼저 맛을 보고 드렸다.

 

평소 술을 즐기셨던 어머니가 술을 드시려고 하면 몸에 해롭다는 생각에 간곡히 만류하면서 드리지 않았는데, 김순흠은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이것이 마음에 걸려 평생 술을 멀리하기도 하였다. 그 후 37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김순흠은 애통힘을 이기지 못하여 곡을 하는 도중에 수차례 정신을 잃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뒤 김순흠은 마음을 가디듬고 학문에 진력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아예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 1894년 당시 경상도 관찰사가 누차 벼슬자리에 천거하였지만 거절하였으며, 1896년 왜적의 침입이 점차 잦아지자 영남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는데, 이에 김순흠은 안동과 의성, 예천 등지의 의병 군영 상황을 살펴보고 나서 참여하려고 했으나 해체되는 바람에 뜻을 이 루지 못하였다. 이후 예천으로 이거하여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1905, 예순의 나이를 훌쩍 넘긴 김순흠은 을사조약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울분을 이기 지 못해 討五賊文(토오적문)]을 지어 유림들에게 배포하고 매일 통곡하였다. 그러고는 옛날 은나라의 충신 백이와 숙제의 노래를 거울삼아 西山歌(서산가)를 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결심을 마음속으로 다졌다. 다음은 西山歌(서산가)의 전문이다

 

용산에 올라가서                              彼蓉山兮

고사리나 캐어볼까|                                  採其薇矣

왜놈을 끌어들여 나라를 망치니     招倭滅國兮

그 죄를 분명히 알겠구나!                                       明知其非矣

옛 임금과 옛 현인을 잊을 수 없으니                           先王先哲不能忘矣

니는 뒤따라가리로다.                                           我可從歸矣

, 하늘이어                                                 吁嗟天矣

나라의 운이 끝나는가!                                運之衰矣

 

 

1907,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모든 외교권을 박탈했고, 같은 해 겨울부터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의 마을을 대상으로 세금을 수탈하러 다녔다.

소식을 전해들은 김순흠은 통곡을 하면서 나는 왜놈의 백성은 될 수 없다. 나의 뜻은 이미 결정한 지 오래다. 이제 까지 그 결심을 실행치 않은 것은 선조 묘소에 加土(가토)를 이직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는 산나물과 고사리로만 끼니를 때우면서 지내다가, 이듬해 190893일 가토를 마치고 6일부터 絶食(절식)에 들어가서, 절식한지 23일째 되는 928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金楊震(김양진)

 

전라도 관찰사 金楊震(김양진)生祠堂(생사당)

監司(감사)守令(수령)의 어진 정사를 베풀면 임기를 마치고 떠나간 후에 그 고을 백성들이 그 공적을 못 잊어 그를 위해 祠堂(사당)을 세우고 제사하는데 이를 生祠堂(생사당)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조에 우리 고을 출신의 김양진이라는 분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어진 정치를 하였다. 해가 바뀌어 임기를 마치고 떠나오는데, 한참을 오다가 뒤를 돌아보니 망아지 한 마리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저 망아지는 누구의 것이냐?” 하고 아랫사람에게 물으니대감께서 전라에 부임할 때 타고 온 말이 전라감영에서 낳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전라도 땅에서 낳았으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전라도의 것이니 돌려보내라.” 하고 명령하였다.

망아지가 자꾸 따라오자 東門(동문) 앞 버드나무에 매어 놓고 왔다.

안 그래도 지난 1년간의 선정을 못 잊어 하던 전라도 백성들은 이 소문을 듣고 말을 매어놓았던 지리에

김양진 감사의 사당을 지어서 그 덕을 기렸다고 한다.

 

 

 

金楊震(김양진)공의 묘

 

金楊震(김양진) 世祖 12年 丁亥(1467)~ 中宗 30年 乙未(1525) 69

字 伯起, 號 虛白堂. 豊山人

 

풍산읍 경계를 지나 예천군 호명면 직산동 행길(大枝) 광석산에 풍산 김씨 선영이 있다. 진산군수 徽孫(휘손), 虛白堂(허백당) 楊震(양진), 潛庵(잠암) 義貞(의정), 悠然堂(유연당) 大賢(대현), 廣麓(광록) 延祖(연조), 洛崖(낙애) 斗欽(두흠)의 묘역이다. 묘 아래에는 재사(경북유형문화재 제173)와 신도 비각이 있다.

공의 묘 앞에는 음기가 없는 嘉善大夫工曹參判金公之墓(가선대부공조참판김공지묘)라는 短碑(단비)와 망주석 및 문인석이 있으며 湖陰(호음) 鄭士龍(정사룡) 찬의 東阜(동부) 李浚慶(이준경) 글씨의 신도비는 산록에 있다. 신도비는 璃首(이수)碑身이 한 돌로 되어 있으며, 그 높이가 9척이며 거대한 龜趺(귀부)위에 세워져 있었으나 오래 되어 자획이 마모되어 大枝(대지) 재사 앞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하나 더 있다.

 

풍산 김씨는 조선조에 문과급제다가 29면이며 특히 悠然堂(유연당)의 자제 8형제 중 5명이 급제한 명문이기에 묘역의 규모와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追尊(추존)에 반대하다가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 이후 부제학, 활해, 출청감사, 대사간, 공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중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신도비문은 선명하지 않아 전산화 불능>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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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구조사 결과 남한(南韓)에 총 2,755가구, 11,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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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그림1.jpg 희천김씨(金) 청남 14-08-26 2973
160 화개 김.jpg 화개김씨(金) 청남 14-08-26 2467
159 홍주 김.jpg 홍주김씨(金) 청남 14-08-26 2502
158 해풍 김.jpg 해풍김씨(金) 청남 14-08-26 3344
157 해평 김.jpg 해평김씨(金) 청남 14-08-26 3500
156 해주 김1.jpg 해주김씨(金) 청남 14-08-26 3910
155 해남 김.jpg 해남김씨:당악김씨(金) 청남 14-08-26 2840
154 함창 김.jpg 함창김씨:함녕김씨(金) 청남 14-08-26 5179
153 함박 김.jpg 함박김씨(金) 청남 14-08-26 2850
152 하음김씨.jpg 하음김씨(金) 청남 14-08-26 2420
151 풍천김.jpg 풍천김씨:영유김씨(金) 청남 14-08-26 2546
풍산김2.psd 풍산김씨(金) 청남 14-08-26 3676
149 풍기김.jpg 풍기김씨(金) 청남 14-08-26 2435
148 평양김.jpg 평양김씨(金) 청남 14-08-26 2348
147 평산김.jpg 평산김씨(金) 청남 14-08-26 2437
146 파평김.jpg 파평김씨(金) 청남 14-08-26 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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