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金(함창:함녕김씨)
본관(本貫): 함창(咸昌)
시조(始祖): 김종제(金宗悌)
유래(由來):
함창 김씨(咸昌金氏)는 서기 41년 김해(金海)의 구지봉(龜旨峯)에서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함께 금합(金盒)에서 태어난 고령 가야왕(古寧伽倻王)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 후의 세계(世系)를 알 수 없어 덕원군(德原君) 김종제(金宗悌)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선산군(宣山君) 세순(世珣)과 검교소감(檢校少監) 내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지(金砥)
고려 때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냄.
김효안(金孝安)
이부상서(吏部尙書)
김효신(金孝信)
형부상서(刑部尙書)
김요(金饒)
찬성사(贊成事) 택(澤)의 아들 요(饒)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 명성을 떨쳤고,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함녕군(咸寧君)에 봉해짐으로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김이음(金爾音)
중서(重瑞)의 아들 이음(爾音)은 조선이 개국된 후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道觀察使)를 역임했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김융(金隆)
조선 선조(宣祖) 때 학문(學問)으로 이름을 떨쳤던 융(隆)은 일찍이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경서(經書)를 연구하여 산법(算法)과 천문(天文)에 일가를 이루었고, 임진왜란 때는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을 돌렸다.
김시빈
숙종(肅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시빈은 명천 군수(明川郡守)를 거쳐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나가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다가 순절하여 가문을 더욱 빛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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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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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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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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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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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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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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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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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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錫(석),夏(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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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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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재),中(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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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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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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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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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수),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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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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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흠),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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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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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영),烈(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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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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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동),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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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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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승),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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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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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원),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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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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容(용),俊(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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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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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 남한(南韓)에 총 5,589가구, 22,3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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