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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해주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해주김씨)

 

 

본관(本貫): 해주(海州)

시조(始祖): 김사렴(金士廉): 김헌(金獻)

유래(由來):

 

해주김씨(海州金氏)는 동성동본(同性同本)이면서도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이를 계통별로 분류하면 첫째 계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말에 안렴사(按廉使)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했던 김사렴(金士廉)을 원조(元祖)

하고, 조선조에서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지낸  김문동(金文東)을 중조(中祖)로 하는 계통(系統)이다.

 

다른 한 계통(系統)은 조선 인조조(仁祖朝)에 김헌(金獻)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조할 때 직간(直諫)을 하다가 해주(海州)로 유배(流配)되어 그곳에 살았는데  그의 7세손 맹()이 평안도(平安道)로 이거(移居)하여 조상(祖上)의 세거지(世居地)인 해주(海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우한(金佑漢)

문동(文東) 아들 우한(佑漢)이 연산군(燕山君)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급제하여 대동찰방(大同察訪)을 지냈다.

 

김정(金鼎)

우한의 손자(孫子) ()은 중종(中宗) 때 등과(登科)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다.

 

김정두(金鼎斗)

정두(鼎斗)는 현감(縣監)을 역임.

 

김양호(金良浩)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세광(金世光)

()의 후손에서는 승의부위(承議副尉)에 오른 응()의 아들 세광(世光)이 선무랑(宣務郞)에 올음.

 

김만겸(金萬兼)

상호군(上護軍)

 

김계정(金啓晶)

도정(都正)

 

金基洙(김기수)선생의 일화.

 

김기수(金基洙)의 현몽으로 찾아 낸 석장승

 

주천면 호기리 마을 안에 석장승이 있어 지방 민속 문화 자료 제 1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석장승은 오랫동안 논에 깊숙이 묻혀 있던 것을 1850(철종1)에 발굴되어 햇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김기수는 남원 부 성내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백발노인이 법장(法杖 : 승려들의 지팡이)을 짚고 완연히 나타나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이거니와 오랫동안 땅속 깊이 파묻히어 햇빛을 보기가 소원이니 그대가 뜻이 있다면 주천면 호기리 느티나무 밑 논을 파 보면 내 몸이 나타날 것이니라.” 하고 사라 졌다.

 

이윽고 깨어나 생각하니 꿈이었다. 날이 밝자 김씨는 삽과 연장을 갖추어 2~3명 가동들을 앞세워 호기리 느티나무를 찾아가 그 밑의 논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묻힌 지는 몰라도 정확히 묻힌 곳을 모르니 우선은 대중만 잡고 파 볼 수밖에.

첫 번째 오른 쪽 모서리를 판 곳은 허탕이었다.

 

왼쪽 모서리를 파는 것도 허탕이었다.

김기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엇인지 논의 가장자리일 것이니 이대로 작업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고 단정, 다시 파기를 시작하였다.

세 번째 파는 곳은 느티나무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택하였다.

6척쯤 파 들어가니 무엇인가 땡! 하고 맞히는 것이 있다.

이윽고 파내어 보니 바위를 다듬어 만든 석상이었다.

 

석상의 키는 2.7m, 머리에 편립(扁笠 : 사투리로 폐랭이)를 썼다.

그들은 목도를 만들어 소중하게 이를 운반, 천변으로 나가 깨끗하게 씻어 내렸더니 눈, , , 귀가 한군데도 손상이 없었다.

짐작컨대 이 석상은 마을의 수호신인 듯 하므로 호기리 앞, 도로변에 안치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되었다.

 

1978년 지방 민속자료로 지정한 이래 새로이 정화 작업을 실시하였는데 고고학적 견지에서 감정한 결과 이씨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이 후로 김기수 후손들은 이 석상에 공을 들였음인지 김씨 문중은 대대로 부호가 끊이지 아니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씨들은 해마다 77석 이면 자손들이 모여 석상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데 이 제사를 길이길이 이어 가기 위해서는 기본 재원이 마련되어야 하므로 중종이 서둘러 석상답(石像畓) 2두락을 갖추어 놓기까지 하였다.

한편 다른 사람들도 이 석상에 기도를 정성껏 드리면 아이를 못 낳은 부인이 잉태를 하게 되는 등 영험이 있었다 하여 지금까지도 소원이 있어 이 석상을 찾는 부인들이 끊이지 아니한다.

 

                                                                          <남원군지 82. 9.> -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김문동 계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19

()

22

()

25

 

20

()

23

()

26

 

21

()

24

()

27

 

 

항렬(行列)

김맹 계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66

(),()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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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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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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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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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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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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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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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1985년 인구조사 결과 총 1,449가구, 6,2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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