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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해풍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해풍김씨)

 

 

본관(本貫): 해풍(海豊)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

유래(由來):

 

해풍 김씨(海豊金氏)는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이 고려조에서 예부 상서(禮部尙書)와 병부 전서(兵部典書)를 지내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해풍(海豊)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수종(金壽宗)

대사헌(大司憲) ()의 맏아들  수종(壽宗)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길주 목사(吉州牧使) 겸 길주진관 병마첨절제사(吉州鎭管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이었다.  

 

김시창(金始昌)

1472(성종 3) 1558(명종 13). 조선 중기의 효자. 자는 정양(廷揚), 호는 남정(嵐亭). 할아버지는 사직 ( 司直 ) 효신(孝信)이고, 아버지는 의( )이며, 어머니는 하산조씨(夏山曺氏)로 승중 ( 承重 )의 딸이다. 일찍이 김종직 ( 金宗直 )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금산(金山)에 거주하면서 가례 家禮 에 의한 상례 ( 喪禮 )를 철저히 준행하는 한편, 효행이 뛰어나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로 인해 1518(중종 13)에는 유학 ( 幼學 )으로 경상도관찰사 김안국 ( 金安國 )에 의해 현량과 ( 賢良科 )에 피천(被薦)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거상(居喪)의 예를 다하였음이 조정에 알려져 금산에 정려 ( 旌閭 )가 세워졌다. 그의 효절(孝節)삼강록 에 수록되었으며, 죽은 뒤 참봉에 추증됨과 아울러 황간 ( 黃澗 )의 모현서원(慕賢書院)과 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효는 효절(孝節)이다.

 

김영(金煐)

()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금위대장(禁衛大將 : 금위영의 종 2품 무관직 으뜸벼슬)에 올랐다.

 

김상진(金相進)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때의 문신(文臣)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상진(相進)은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건(金鍵)

() 철종(哲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868(고종 5)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라 어영대장(御營大將 : 어영청의 종 2품 으뜸벼슬)을 겸임하였다.

 

김연방(金然昉)

한말(韓末)에 연방(然昉)이 왜적(倭賊)에 항거하여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충절(忠節)의 무신(武臣) 집안인 해풍 김씨를 더욱 빛냈다.

 

 

 

金樂在(김낙재)의 효행.

 

 

맞절로 이룬 백원문

 

현대의 사람들은 스무 살만 되어도 자기의 주장대로 행동하기를 원한다.

나이가 많은 부모님의 생각은 낡았다고 판단하고 자기의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부모님과 뜻이 맞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부모님에게 묻 기조차 하지 않는 일이 많다.

그런데 김 낙재는 부모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부모님과 의견을 다르게 할 때는 자기의 뜻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고 그래도 부모님이 동의를 하지 않으면 자기의 뜻을 버릴 줄 알았다.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까지 해서 자기의 뜻을 세우는 일은 불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 낙재는 1855(철종 6) 의성군 사곡면 음지동에서 태어났다. 음지동은 사곡 면사무소가 있는 양지동과 맞보고 있는 마을로, 서편 그늘진 곳에 있다고 해서 음지동이라고 일컫는 것 같다.

김 낙재의 아버지는 이조 때 통정대부라는 벼슬을 했다. 노후에 고향에 와 있을 때 집안이 많이 어려워졌다. 김 낙재는 낮에는 밭에 나가서 일하고 밤에는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그것을 구하기에 힘썼고,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애써서 집 안에서 만들어서 대접했다. 그것은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이라야 맛이 있고 영양가가 있어 아버지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었지만 어떤 때는 한 해의 양식이 부족할 때도 있었다. 김 낙재는 가을에 추수를 하면 봉지를 만들어서 그 중 잘 익고 결실이 잘 된 것을 가려서 봉지 안에 따로 보관했다. 다른 식구는 먹지 못하게 하고 아버지에게 만 드리기 위해서였다.

 

어느 해 흉년이 들었다. 김 낙재는 그날그날의 식량에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는 볼일이 있어서 출타를 하게 되었다. 옛 사람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밖에 나가자는 일은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박을 삼가는 데도 그 날은 어떤 일로 하는 수 없이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밤사이에 김 낙재는 아버지 생각을 했다. 식량도 걱정이 되었다. 이튿날 돌아오자 바쁘게 아내에게 물었다.

 

양식은 이웃집에서 꾸어 왔지만 반찬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닭을 잡았 읍니다.”

아내는 아껴 기르고 있었던 닭을 잡은 일이 걱정이 되어서 남편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아버지를 위해 결단을 내린 아내의 지혜와 용기가 너무 고마왔다. 아내가 혼자의 생각으로 그토록 아버지의 반찬 걱정을 하리라고는 예측을 못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너무 감격하여 허리를 굽혀 공손히 아내에게 깊은 절을 했다.

 

이 광경을 본 아내는 남편의 동작에 감동하여 그냥 서 있지 않고 즉석에서 맞절을 했다. 맞절을 받은 남편은 더욱 마음이 움직여서 또 아내에게 절을 했다. 절은 오고 가고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 그냥 절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이웃집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하나 둘씩 모여든 이웃집 사람들도 효심의 표현에 감동되어 다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을 따뜻하게 하는 일에 신경을 썼다.

옷은 솜을 놓은 한복 겨울옷을 입었는데 옷을 갈아 입을 때는 지금처럼 내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많이 차갑다. 김 낙재는 아버지의 몸이 얼마나 차가울까를 염려해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자기가 먼저 입어서 옷을 따습게 했다고 한다.

 

김 낙재도 때로는 병을 앓았다. 그리고 걱정이 되는 일도 있었고, 화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괴로운 표정을 한 번도 아버지에게 보인 일이 없었다. 자기의 걱정하는 표정을 아버지가 보시면 무슨 일로 표정이 저럴까하고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아지면 사람은 누구나 집 안에 갇히게 된다. 몸 이 불편해서 외출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외출을 못 하면 사람들과의 접촉 이 적어지고 대화의 기회가 없어진다. 그러면 지루하고 답답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심정을 알아차린 김 낙재는 밖에 나가서 보고 들은 일을 빼놓지 않 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해 드렸다. 마을의 소식이며 누구와 만나서 무슨 이야 기를 했다는 등 아버지와의 대화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를 즐겁 게 해 드리는 일로 알았던 것이다.

 

김 낙재의 아버지는 인심이 후했다. 집안에 음식이 생기면 이웃집과 나누어 먹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아들은 제사 때 만든 음식을 이웃에 널리 나누었고 별식을 만들면 이웃에 나누기 위해서 처음부터 양을 많이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현대의 사람들은 남을 위한 마음에 인색하다. 농촌보다도 도시의 사람이 더욱 그렇다.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의 밀림 속에서 3 4 년을 이웃과 살면서도 서로 모르기도 하고 알면서도 인사를 하지 않으면서 지내기도 한다. 그러한 사이 인정은 메말라가고 사회는 각박해진다.

 

김 낙재의 효성은 주위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효성을 칭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를 본받기 위해서 직접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돕기 위해서 양 고기와 술을 구해서 아버지께 드리라고 가져 오기도 했다.

 

드디어 55 세에 이르렀을 때 그의 효성이 나라에까지 전해져 효자상이 내려졌다.

그는 19295674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 낙재는 갔지만 그의 효성은 의성 사곡 땅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효성이 되어 길이 남아 별 빛처럼 지금도 반짝거리고 있다.

 

김 낙재가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은 뜻을 모아 양지동 한길가에 백원문(百源門)을 세웠다. 양지동은 음지동과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둔 건너 마을이다. 백원문이란 백 가지의 근원이 효도에서 부터 비롯된다는 뜻으로 많은 사람에게 효도의 근본을 알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백원문은 긴긴 세월의 비바람에 부데껴 지금은 허물어져 없어졌다. 그러나, 당시에 함께 세웠다는 효자비는 지금도 남아 있다.

 

의성읍에서 삼심 리쯤 동쪽으로 가면 사곡면 소재지가 나온다. 이 곳이 바로 양지동인데 면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약 500m를 걸어가면 효자비가 있다.

한길 왼쪽편 일대가 산인데 한길에서 눈을 산쪽으로 돌리면 작은 언덕 위 에 아담히 효자비가 서 있다. 비바람 모진 풍상 속에서도 꿋꿋하게 서 있는 이 효자비는 한덩이의 차거운 돌 위에 새겨진 기록물에 불과하지만 그 돌에 는 참효도가 무엇인가를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비정한 현대인들에게 침묵 으로 이야기해 주는 높은 뜻이 담겨 있다.

 

출전의성군 사곡중학교 김 교감

참고 문헌얼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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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풍  김씨(海豊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988가구, 8,1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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