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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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성김씨)
본관(本貫): 의성(義城)
시조(始祖): 김석(金錫)
유래(由來):
신라의 왕족(王族)인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 김석(金 錫)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외손(外孫)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義城)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개국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 김씨는 8세손 공우(公瑀)의 아들대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長子)인 용비(龍庇)가 태자 첨사(太子詹事 : 동궁에 속한 종 3품 벼슬)를 지냈고,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신라(新羅) 박(朴)·석(昔)·김씨(金氏) 오십육왕중(五十六王中) 김씨(金氏) 삼십팔왕(三十八王)의 시조(始祖)인 김알지(金閼智)의 이십팔세손(二十八世孫)이며 신라말왕(新羅末王)인 경순왕(敬順王)의 자(子) 구남(九男) 이녀 중(二女 中) 장자(長子)는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입개골산(入皆骨山)(금강산(金剛山))하여 무후(無後)하고 남은 팔자(八子)는 각지역(各地域)에 군(君)으로 봉(封)하게 되어 비로소 관향(貫鄕)의 시초(始初)가 되었으며 사자(四子) 석(錫)은 의성군(義城君)으로 봉(封)받아 의성김씨(義城金氏)로 관조(貫祖)가 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위시하여 9세손(世孫)에 3형제중(兄弟中) 용주(龍珠)는 개성군(開城君)에 봉(封)하여 개성김씨로 분관(分貫)되고, 11세손(世孫)인 패지(狽芝)는 고령군(高靈君)에 봉(封)하여 고령김씨로 분관(分貫)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훤(金暄)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낸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暄)을 들 수 있다.
김광부(金光富)
우왕(禑王)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광부(光富)가 유명했다.
김거두(金居斗)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발문(跋文)을 적은 거두(居斗).
김거익(金居翼)
정당문학(政堂文學) 거익(居翼)
김춘(金椿)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
김옥(金玉)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김연(金衍)
평장사(平章事)
김현주(金玄柱)
조선조에서는 옥(玉)의 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
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찬제와 사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종 2품 으뜸 벼슬)에 이르렀다.
김영렬(金英烈)
영렬(英烈)은 태종(太宗) 때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佐命功臣)에 올랐다.
김효손(金孝孫)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世宗)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형조 및 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종 2품 으뜸 벼슬)을 역임했다.
김을방(金乙邦)
을방(乙邦)은 고려 문신(文臣)으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隱居)하였는데, 조선조에서 수차에 걸쳐 벼슬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을 둔번리(遁煩里)라 불렀다고 한다.
김흠조(金欽祖)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흠조(欽祖)는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검열(檢閱)을 거쳐 단양(丹陽)·제주(濟州)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한 후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다.
김윤석(金潤石)
윤석(潤石)은 중종(中宗) 때 등과(登科)하여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김세우(金世瑀)
군수(郡守)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 ∼ 1543(중종 38). 조선시대 문신 · 학자.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璉)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 ( 趙光祖 ) · 기준 ( 奇遵 ) 등과 함께 김굉필 ( 金宏弼 )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 ( 至治主義 )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 承文院 )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 · 부수찬 ·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 · 장령 · 예조참의 · 대사간 ·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 소학 ≫ 을 권하고, ≪ 농서언해 農書諺解 ≫ · ≪ 잠서언해 蠶書諺解 ≫ · ≪ 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 ≫ · ≪ 여씨향약언해 呂氏鄕約諺解 ≫ · ≪ 정속언해 正俗諺解 ≫ 등의 언해서와 ≪ 벽온방 陽 瘟方 ≫ · ≪ 창진방 瘡疹方 ≫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 · 대사헌 · 병조판서 · 좌참찬 · 대제학 · 찬성 · 판중추부사 ·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 · 역법 · 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 〔 水苔 〕 와 닥 〔 楮 〕 을 화합시켜 태지(苔紙 : 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 ( 沂川書院 )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 ( 氷溪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 모재집 ≫ · ≪ 모재가훈 慕齋家訓 ≫ · ≪ 동몽선습 童蒙先習 ≫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 이륜행실도언해 ≫ · ≪ 성리대전언해 性理大全諺解 ≫ · ≪ 농서언해 ≫ · ≪ 잠서언해 ≫ · ≪ 여씨향약언해 ≫ · ≪ 정속언해 ≫ · ≪ 벽온방 ≫ · ≪ 창진방 ≫ 등이 있다.
김정국(金正國)
1485(성종 16) ∼ 1541(중종 36).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 은휴(恩休). 아버지는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연(璉)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군수 지(芝)의 딸이며, 안국(安國)의 동생이다. 김굉필 ( 金宏弼 )의 문인이다.
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형(趙有亨)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년(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하였으며, 이조정랑 · 사간 · 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 다음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수십조에 달하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책을 건의,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그뒤 병조참의 ·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 · 병조 ·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성리학과 역사 · 의학 등에 밝았다. 문인으로는 정지운 ( 鄭之雲 )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 ( 長湍 )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 ( 鰲山書院 ),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 사재집 ≫ 을 비롯하여, ≪ 성리대전절요 性理大全節要 ≫ · ≪ 역대수수승통지도 歷代授受承統之圖 ≫ · ≪ 촌가구급방 村家救急方 ≫ · ≪ 기묘당적 己卯黨籍 ≫ · ≪ 사재척언 思齋 燧 言 ≫ · ≪ 경민편 警民篇 ≫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김극일(金克一)
1522년(중종 17) ∼ 1585년(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경상도 안동 출신. 증 통례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병절교위 세경(世卿)의 딸이다.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커서는 아우 명일(明一) · 성일(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의부위 · 사용을 거쳐, 1551년에 승문원정자 · 저작 · 박사가 되었다. 1553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얼마 뒤 형조좌랑 ·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을 역임하였다.
1556년 청홍도도사(淸洪道都事)를 거쳐, 1558년 성균관직강 · 형조정랑 · 예조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경상도도사를 거쳐, 1560년에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얼마 뒤 군기시첨정과 평해군수를 역임하였다.
1566년에는 사재감첨정을 거쳐 다시 예천군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569년(선조 2) 성균관사성과 사도시정(司 歸 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성주목사 시절 ≪ 계몽익전 啓蒙翼傳 ≫ 을 간행해 스승 이황으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1575년 밀양부사에 임명되고, 1582년 내자시정, 이듬해에는 사헌부장령을 겸하였다.
그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고,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문장은 고결하고 창고(蒼古)해 한 글자도 진부한 말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시에 뛰어나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시는 매우 정교했고 사실을 인용함에 비유함이 간절하였다.
그리고 시상은 깨끗하고 세련미가 있었다고 전한다. 저서로는 ≪ 약봉일고 藥峰逸稿 ≫ 가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 ( 泗濱書院 )에 배향되었다.
김수일(金守一)
둘째 수일(守一)은 찰방(察訪)
김명일(金明一)
명일(明一)은 효행(孝行)이 지극한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김성일(金誠一)
1538(중종 33) ∼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동 출신. 아버지는 진(璡),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 ≪ 서경 ≫ · ≪ 역학계몽 易學啓蒙 ≫ · ≪ 심경 ≫ · ≪ 대학의의 大學疑義 ≫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 검열 · 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했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 · 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 ( 正言 )이 되었고,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 · 경연검토관 ·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친 후 정언의 신분으로 변장(邊將)에게 초피덧저고리 〔 貂 汨 〕 를 받은 우의정 노수신 ( 盧守愼 )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 ·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 ( 宗系辨誣 )를 위해 노력했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 · 검상 ·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 · 삼수 · 길주 · 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 · 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 ( 宣傳官 )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 ( 尹仁涵 )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해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 · 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 ( 金宏弼 ) · 정여창 ( 鄭汝昌 ) · 조광조 ( 趙光祖 ) · 이언적 ( 李彦迪 ) · 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 ( 社稷壇 )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 , 이황의 ≪ 자성록 自省錄 ≫ · ≪ 퇴계집 ≫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 · 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 · 예빈시정 ·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 ” 이라는 정사 ( 正使 ) 황윤길 ( 黃允吉 )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 ( 柳成龍 ) 등의 변호로 직산 ( 稷山 )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그는 의병장 곽재우 ( 郭再祐 )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 · 산음 ( 山陰 ) · 단성 · 삼가 ( 三嘉 ) · 거창 · 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 ( 召募官 )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 ·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 ( 金時敏 )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게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 ( 東人 )에 가담, 1590년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 ( 崔永慶 )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 ( 西人 )의 영수 정철 ( 鄭澈 )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 · 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 · 김우옹(金宇 裵 ) 등과 입장을 같이해 남인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 그는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해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 이현일 ( 李玄逸 )- 이재 ( 李栽 )- 이상정 ( 李象靖 )으로 전해졌다.
또한 예학 ( 禮學 )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 가례 家禮 ≫ 에 따라 행했으며, ≪ 두씨통전 杜氏通典 ≫ · ≪ 구씨의절 丘氏儀節 ≫ · ≪ 향교예집 鄕校禮輯 ≫ 등을 참고해 ≪ 상례고증 喪禮考證 ≫ 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 ( 虎溪書院 ) · 사빈서원 ( 泗濱書院 ),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 ( 氷溪書院 ),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 ( 景賢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김복일(金復一)
1541(중종 36)∼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생원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세경(世卿)의 딸이다.
병마절도사 성일(誠一)의 아우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 ( 學諭 )· 전적 ( 典籍 )을 역임하고, 형조·호조·공조의 낭관을 지냈다. 그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학한 관리들을 숙청하였다.
1587년 울산군수에 이어 창원부사가 되어 폐단이 심한 그곳을 잘 다스렸다. 이어 경주교수(慶州敎授)가 되어 학생들을 경학으로써 인도하여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성균관의 사예 ( 司藝 )·사성 및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안동의 사빈서원 ( 泗濱書院 )에 제향되었다.
김우옹
삼척 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아들 우옹이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역임했다.
김우굉(金宇宏)
우굉(宇宏)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다.
김여건(金汝鍵)
숙종(肅宗) 때의 수찬(修撰)
김방걸(金邦杰)
대사헌(大司憲)
김영수(金永銖)
한말(韓末)에 와서는 영수(永銖)가 장기 군수 겸 경주 병마절제사(慶州兵馬節制使)에 재임시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김진형(金鎭衡)
철종(哲宗) 때 [북천가(北遷歌)]를 지어 국문학(國文學) 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김.
김굉
예조 참판(禮曹參判) 굉이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김흥락(金興洛)
영남유림(嶺南儒林)의 거두(巨頭) 흥락(興洛)은 수차에 걸쳐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진력하여 [서산집(西山集)]을 집필하였다.
김하락(金河洛)
하락(河洛)은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무공(武功)을 세움.
김원식(金元植)
1888(고종 25)∼.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9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에 가입하였다. 1921년 서로군정서 독판 ( 督辦 ) 이상룡 ( 李相龍 )의 지시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전국 유지들과 연락,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1922년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 碧昌義勇隊 )· 광복군총영 ( 光復軍總營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보합단 ( 普合團 )· 광한단 ( 光韓團 ) 등 각 군단 대표들이 모여 대한통의부 ( 大韓統義府 )로 통합하는데 협력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동북면군사연락위원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상주하면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난징(南京) 등지로 유학시켰다.
1924년 이후 정의부 ( 正義府 )에 투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1927년에는 민족 단결과 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농민호조사 ( 農民互助社 )의 설립에 앞장섰다. 1928년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 당시 정의부 대표로 활약하였으나, 뜻이 좌절되자 혁신의회 ( 革新議會 )를 조직,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상해로 가서 당시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던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어 곧 상해한인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가서 1933년 한국독립당군(韓國獨立黨軍) 대표로 한국혁명당 ( 韓國革命黨 ) 대표 윤기섭 ( 尹琦燮 ) 등과 난징에서 회합하여 신한독립당 ( 新韓獨立黨 )을 결성, 활동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동삼(金東三)
1878(고종 15) ∼ 1937. 독립운동가. 본관은 의성(義城). 원명은 긍식(肯植), 호는 일송(一松).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 ( 柳寅植 ) · 김후병(金厚秉) 등과 젊은 일꾼의 양성을 위해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 서울 양기탁 ( 梁起鐸 )의 집에서 신민회 ( 新民會 )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하였다.
1910년 국권 침탈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通化縣三源堡)에서 이상룡 ( 李相龍 ) · 이시영 ( 李始榮 ) · 이동녕 ( 李東寧 ) · 윤기섭 ( 尹琦燮 ) · 김창환 ( 金昌煥 ) 등과 함께 경학사 ( 耕學社 )를 조직하여 재만 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 ( 新興講習所 )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1913년 경학사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여준 ( 呂準 ) · 이탁(李 餓 ) 등과 남만주의 동포 자치기관으로 부민단 ( 扶民團 )을 조직하여, 민생 교육과 군사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같은 해에 이탁 · 김창환 등과 유하현(柳河縣)의 밀림지대에 백서농장 ( 白西農莊 )을 개설하였다.
1919년 4월 이상룡 · 이탁 등 남만주 각지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을 확대, 개편하여 한족회 ( 韓族會 )를 발족시켰으며, 서무 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한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1920년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소속 부대를 안도현(安圖縣) 밀림 속으로 옮겨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1월 일제의 대병력이 간도를 침략하여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討伐)이란 명목으로 서북간도 전역에 걸쳐 한인들을 무참히 학살을 자행하던 당시, 북로군정서군 및 홍범도 ( 洪範圖 )의 군과 합세하여 밀산(密山) 및 러시아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희생을 줄였다.
1922년 연해주(沿海州) 각지 등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던 끝에,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23년 북경(北京)에서 열린 국민대표대회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고 의장으로 선임되어 회의를 이끌었다. 이때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갈려 대립을 보이자 이를 조정하여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다.
1925년 정의부 ( 正義府 )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 위원에 취임하여 화순(樺旬) · 유하(柳河) 등지를 돌며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일본 경찰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1926년에는 두 차례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8년 길림(吉林)에서 정의부 대표로 김좌진 ( 金佐鎭 ) · 지청천 · 현정경 ( 玄正卿 ) · 이규동(李奎東) 등과 두 차례나 만나 신민부 ( 新民府 ) · 참의부(參議府) 등과 삼부통합회의(三府統合會議)를 진행하였다.
그 해 12월 혁신의회 ( 革新議會 ) 의장,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 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내적인 모순점인 계파간의 갈등을 없애고 유일당을 결성하는데 주력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 정인호(鄭寅浩) 집에 투숙 중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 ” 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창숙(金昌淑)
1879(고종 16) ∼ 1962. 유학자 · 독립운동가 · 정치인.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 일제의 감시 아래 한때는 우(愚)로 개명하였고, 일제의 고문으로 다친 뒤에는 벽옹( 焞 翁)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 호림(頀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곽종석 ( 郭鍾錫 ) · 이승희 ( 李承熙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해 〈 청참오적소 請斬五賊疏 〉 를 올리고 이완용 ( 李完用 )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할 때는 동지를 규합해 중추원에 그들을 토역(討逆)하는 글을 보내는 한편,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해 계급타파를 부르짖고,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1909년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 신교육을 시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해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 제1차유림단사건 ’ 이다.
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조차(租借) 개간해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해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 제2차유림단사건 ’ 을 일으켰다.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내부의 파쟁조정에도 힘썼다. 자신의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손문(孫文)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의 인사들과 교류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독립후원회와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를 결성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써 능월(凌越) · 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영어 · 중국어 강습을 받도록 주선하였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 ( 申采浩 )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 천고 天鼓 ≫ 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 ( 朴殷植 ) 등과 협력해 ≪ 사민일보 四民日報 ≫ 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그 뒤 14년의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중투쟁과 일본경찰의 고문에 의한 두 다리 마비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해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 ( 儒道會總本部 )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 紐 會)의 토지재산을 기부받고 명륜전문학교 ( 明倫專門學校 )를 병합해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정치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 金九 )와 함께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승만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6 · 25 이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된 적이 있고, 1952년 부산의 정치파동 때에는 이시영 ( 李始榮 ) · 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해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끝끝내 이승만정권과 투쟁하였다.
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해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에 죽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 심산만초 心山 亶 草 ≫ 와 ≪ 벽옹만초 焞 翁 亶 草 ≫ , 자서전인 ≪ 벽옹칠십삼년회상기 焞 翁七十三年回想記 ≫ 등의 초고(草稿)를 김황 ( 金榥 )이 편집해 1973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 심산유고 心山遺稿 ≫ 로 간행하였다.
김황(金榥)
1896 ∼ 1978. 유학자. 일명 우림(佑林), 자는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 명신 우옹(宇 裵 )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도산서원 ( 陶山書院 ) 원장을 지낸 극영(克永)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구택(龜澤)의 딸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어촌리에서 태어났다.
5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이미 신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09년에는 의령남씨(宜寧南氏)와 결혼했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의 황매산 ( 黃梅山 ) 서쪽 만암(晩巖)이라는 깊은 산골로 이사해 세상을 등지고 독서에만 전심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 ( 郭鍾錫 )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더욱 문명을 떨치게 되었고, 그 학통을 계승하기에 이르렀다.
1919년에는 스승의 명으로 곽윤(郭奫 : 곽종석의 조카)과 함께 상경해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했고, 여기서 김창숙 ( 金昌淑 )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거창에 내려와서도 스승의 명을 받들어 진주 · 산청 · 삼가 등지의 유림을 순방하면서 장서의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뒤, 왜경에 발각되어 제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이 일어나 옥고를 치렀다.
오래지 않아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스승의 상을 당했고, 이때 24세의 젊은 나이로 상례 ( 喪禮 )의 중책을 능히 완수하였다.
1926년에는 여러 동문과 더불어 서울에서 ≪ 면우집 潭 宇集 ≫ 을 간행하였다. 계속 상해에 망명중이던 김창숙이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김황은 김창숙의 은신처로 몰래 연락하면서 ≪ 면우집 ≫ 간행소에서 유림조직을 이용해 모금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김창숙이 가지고 간 거액의 자금이 뒤에 나석주 ( 羅錫疇 )의 동양척식주식회사투폭(東洋拓殖株式會社投爆) 등 독립운동에 사용되었음이 알려져 제2차유림단사건이 일어나자 9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28년에는 만암을 떠나 산청군 신등면 내당촌으로 이사해 강학(講學)을 시작했는데, 약 50년 동안 1천여 명의 문도(門徒)를 길러냈다. 광복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이 방학기에 몰려들어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유림의 중심지로 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 말에 창씨령(創氏令)이 내려지자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자신이 끝내 보발(保髮)해 전통유림의 모습을 고수했음은 물론이고, 자녀들도 식민지 교육기관에는 보내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압력은 물론, 일체의 비리와 무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학 ( 道學 )의 정통을 지키면서 만년에 이르도록 이를 널리 성심껏 후인들에게 전수하는 데 진력했으며, 현대의 신지식층에게까지 이어지게 해,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결시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구실을 하였다. 1978년 12월에 죽자, 많은 조객이 운집해 유월장 ( 踰月葬 )으로 장사지냈다.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학문을 두루두루 섬세하게 섭렵해 한주학파의 ‘ 심즉리설(心卽理說) ’ 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 근서천군전후 謹書天君傳後 〉 · 〈 동유심학약도 東儒心學略圖 〉 등에서는 심설(心說)을 중심으로 독특한 성리학계보도(性理學系譜圖)를 만들어 이황 ( 李滉 )-김우옹- 이진상 ( 李震相 )-곽종석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심즉리설의 학통을 지켰다.
그는 성리학적 논변에서 심즉리설의 개념을 분석하고 논증함으로써 논리적 치밀성을 바탕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도학의 가치규범에서 물리적 내지 실리적 가치가 우위를 차지한 시대에 살면서, 20세기의 우리 사회가 겪은 사상사적 급류 속에서 심(心)이 공리(功利)에 미혹해 심의 본체가 지닌 근원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의리(義理)의 상실을 경고하며, 도덕적 주체성을 자각시키고 정립하기 위해 이를 실천적으로 추구해 도학의 정통성을 굳건히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저서로는 사서삼경 등 역대 경학(經學)에 대한 ≪ 쇄기 徒 記 ≫ · ≪ 효경장구 孝經章句 ≫ , 예학 ( 禮學 )에 관한 ≪ 사례수용 四禮受用 ≫ , 역사에 관한 ≪ 동사략 東史略 ≫ · ≪ 역년도첩록 歷年圖捷錄 ≫ · ≪ 독립제강 獨立提綱 ≫ · ≪ 환영대조 渶 瀛對照 ≫ (연표)와 방대한 시문집인 ≪ 익붕당총초 益朋堂叢 崇 ≫ , 그리고 ≪ 일기 日記 ≫ 등이 남아 있다.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鶴峯(학봉)선생의 일화.
鶴峯(학봉)선생의 性品(성품)
선생님은 한마디로 말하여 대쪽 같은 성품과 곧은 절개를 끝까지 고수하셨던 고귀한 분이다.
한번은 宣祖(선조)임금이 經筵(경연)에서[卿等(경등)은 나를 옛날 제왕에 비교하면 어떤 임금에 견주겠는가?]하니 모두 堯舜(요순)같으신 성군이십니다, 라고 임금님이 듣기 좋은 말만 하였다. 그런데 鶴峯(학봉)께서는 [殿下(전하)는 堯舜(요순)도 될 수 있고 桀紂(걸주) 같은 폭군도 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얼굴을 붉히고는 [堯舜(요순)과 桀紂(걸주)가 이와 같이 같은 班(반)인가?] 하므로 公은 대답하기를[생각을 깊이 하면 賢人(현인)이 되고 생각이 그르치면 미친 사람이 될 수도 있다(剋念作聖,罔念作狂)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天資(천자)가 高明(고명)하여 堯舜(요순)되기 어렵지 않으나, 다만 스스로 어질게만 여기고 諫(간)하는 말씀을 반대하니 諫(간)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 桀紂(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닙니까?]라고 한즉 임금은 낯빛이 변해지면서 자세를 고치었고 經筵(경연)이 모두 벌벌 떨었다고 한다.
또 先生이 42세 때인 선조 12년 6월에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이 되었는데, 河源君(하원군)의 宗親(종친)이 있어 임금의 사랑만 믿고 범법을 자행하므로, 그 종을 잡아 묶어놓고 엄하게 국문하니 그 말을 듣는 이가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公(공)은 동요의 빛이 없었다.
임금이 싫어하는 顔色(안색)도 관계치 않고 直諫(직간)으로 탄핵을 하니 사람들은 [殿上虎(전상호)] 곧 [대궐 안의 호랑이]라는 別號(별호)가 붙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鶴峰(학봉)은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한 진실한 길이면 자신의 안위를 무시하고 直諫(직간)을 서슴지 않다고 한다. 진실로 자랑스러운 안동의 名儒(명유)이다.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학봉선생 종택.
金安國(김안국)의 일화.
조선시대에 유명한 제상 김안국은 어릴 때 부터 남달은 재주가 있어 6세 때 이미 다른 사람의 시를 보고 다음과 같이 그 시를 고쳐 더 문장을 아름답게 하는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고 한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불밭에는 새벽별 떨어지고
쇠북소리는 늙은 용의 읊조리는 소리와 같다
(烽火晨星落, 鐘聲老龍吟). ” 라는 시를 듣고,
봉화는 천리의 믿음이요,
쇠북소리엔 일만 사람이 행한다
(烽火千里信, 鐘聲萬人行). ” 라고 고쳐 지어 일찍이 시재를 인정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金烋(김휴)의 일화.
매화연을 상으로 얻은 金烋(김휴).
1)
金烋(김휴)공이 외조부로부터 상으로 받은 매화연은, 이조 宣祖(선조) 때 승지 김백암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신종황제로부터 기념품으로 하사 받았는 귀한 벼루라고 한다.
김백암의 외손되는 敬窩(경와) 金烋(김휴)공이 어릴 때 외가에 놀러갔다가 그 벼루를 보고 탐이 났다.
그래서 외조부에게 그 벼루를 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김백암이 이르기를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양명하고 그 대가로 어렵게 얻은 것인데 너는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그냥 얻으려 하느냐? 친손이나 외손이나 간에 먼저 과거에 급제 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김휴공은 그로부터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14세에 초시에 급제 했다.
과거 급제의 소식을 듣고 그는 집에도 들리지 않고 바로 외조부 댁을 찾아가서 외조부에게 벼루를 달고 졸라서 얻었다고 한다.
이 벼루는 中國(중국) 黃河(황하) 유역에서 생산되는 단애석으로 만든 것인데 세로 34cm 가로 22cm의 장방형 에 매화, 대, 구름, 해, 산, 사슴 등이 교묘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케 하는 훌륭한 명품이라고 한다
2)
금강산에서 얻은 연하침.
운천 선생의 셋째 아드님 경제공의 자제이신 敬窩(경와)金烋(김휴) 선생이 금강산 유람을 갔을 때 일이다.
어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만폭동 청룡담을 찾아 갔다.
청룡담 못 위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기에 하도 이상하여 하인을 시켜 못 속을 수색케 했더니 나무뿌리 같기도 하고 돌덩이 같기도 한 이상한 물건을 건져왔다.
그것은 보통 나무보다 훨씬 무거웠다. 나무뿌리가 물속에서 천년을 묵으면 침향이라는 만병통치의 한약 약제가 되고 또다시 더 오랜 세월을 거치면 침석이 된다고 하는데 혹시나 그것이 침석이 아닐까 생각하고 집에 갖고 와서 보물로 보관하고 왔었다.
그런데 한 백여 년 전에 한 종손이 자기 눈으로 그 침석을 물에 넣으면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직접 보기위하여 지금의 백운정 정자 아래 냇물 속에 담가두었다가 그만 급한 물살에 이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아무리 찾아도 결국 찾지 못해 아주 잃었다고 단념하였는데, 그 이듬해 여름에 어떤 등짐장수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자기는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는데 일전 어느 강변을 지나가다 보니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인 데 물위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더라고 마을사람들에게 신기한 듯 자기가 본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종손은 등짐장수를 앞세우고 그 곳으로 달려가 수색하여 겨우 연하침을 찾았다고 한다.
잃은 지 1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었다.
그 연하침은 지금도 의성김씨 종가에 소중히 소장되고 있다고 한다.
金誠一(김성일)의 일화.
아픈 매.
선생이 10살 경 잘못을 저질러 아버지께 벌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냉큼 매를 꺾어 오라고 하셨다.
선생께서는 굵고 매우 아파보이는 큰 매를 만들어 대령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매는 너무 크고 아파 보이는데 가늘고 작은 매를 만들어 갈 것이지.....」하니
「매는 아프지 않으면 징계가 되지 않아요.」라고 했다 한다.
한번은 형의 임지인 홍원(洪原)에 다니러 간 일이 있었는데 관아에 불이 났다.
선생은 모든 귀중품을 다 놓아두고 오직 책 상자와 어머니 위패만 모시고 불을 피해 달려갔다고 한다.
공부를 하러 도산까지 60리 길을 매일 걸어서 퇴계(退溪)선생께 글을 배우러 왕복했는데, 가고 오는 도중에도 글귀를 열심히 외우고 잠시도 쉬지 않으니 선생께서 「아직 학봉(鶴峰)에게 비길 만 한 사람은 못 봤다.」라고 하셨다 한다.
金錫(김석)의 일화.
玉箸(옥저)를 물러 받은 敬順王(경순왕)의 넷째 아들.
新羅(신라) 敬順王(경순왕)이 玉工(옥공)에게 명하여 청색으로 된 한 쌍의 玉箸(옥저)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黃色(황색)의 것은 지금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靑色(청색)의 옥저는 경순와의 넷째 아드님 錫(석)(의성김씨 시조)에게 물려주었다.
그래서 그 옥저는 대대로 의성김씨 종가에서 보물로 소중히 보관하여 왔다.그런 데 경주박물관에 소장중인 황색 옥저가 수 백 년 전에 자연이 네 동강으로 갈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金氏(김씨) 宗宅(종택)에서도 보관하고 있는 청색 옥저를 꺼내 보았더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경주박물관의 옥저와 똑같이 네 동강으로 부러져 있었다 한다.
참 신기하고도 괴이한 일이었다.
그래도 부러진 옥저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데, 약 백 년 전에 영해부사 김희주 공이 옥저의 궤 뚜껑 안에 [천년 유물이 네 동강이 난 것은 한스러우나 자손들은 길이 잘 보존하라.]고 적어 두어 더욱 유물로서 귀하게 되었다 한다.
金致中(김치중)
한 집에서 忠孝烈(충효열)을 다 이룬 金致中家(김치중가)
김치중은 본관이 義城(의성)으로 松隱(송은) 金光粹(김광수)의 외증손이고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의 이종질 이자 문인이다.
그는 풍산현 회곡리에 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띠라 아버지의 외가가 있는 의성 사촌리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아우와 종제인 치홍, 치강, 치공 및 숙부 응주 등과 함께 천연 요새인 의성 사촌의 건마산에 진을 치고 왜적에게 항전하였다.
일찍이 그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만일 위태로운 고비를 당하여 급박한 경우에 부닥치게 되면 바위벽에 몸을 던져 함께 죽자고 했다.
이윽고 왜적과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아우 등 친족들과 많은 병사가 차례로 전사했다. 치중도 큰 소리로 적을 꾸짖고 호국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스스로 수백 척 절벽을 뛰어내려 장렬하게 순국했다.
그러자 부인 신씨도 뒤따라 뛰어내렸다. 그리고 같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던 사촌 동생들도 뛰어내렸다. 여종 복분이 주인의 아기를 업은 채로 뒤따라 뛰어내렸으나 치중 부부의 시신 위에 떨어져 아기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치중의 義(의) 인 신씨의 烈(열) 종 복분이 주인에 대한 忠(충)을 합하여 후인들은 한 집안에서 三綱(삼강)을 다 이루었음을 추앙하고 칭송했다.
그 후 나리에서 정려를 내리고 判決事(판결사) 鄭士信(정사신)이 銘(명)을 지어 비를 세웠다.
그 후 오래되어 비문이 풍상에 낡아져서 1903년에 改碣(개갈)하여 다시 세웠다.
경술국치 후 일제 관헌들이 이 비석을 땅에 묻어 버렸는데 광복 후 1956년 세 번째로 새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중수하니 이것이 지금 서 있는 義烈閣(의열각)이다. 의열각은 의성 사촌 마을에 있으며 치중의 후손도 이 마을에 살고 있다.
金洊(김천) 공의 묘비명
金洊(김천) 恭愍王 11년 壬寅(1362)~? 義城人 工曹典書 居斗의 子
공의 묘는 와룡면 중가구리 세곡에 있다. 인근 주민들은 「돌성 뫼」라 하고 있는데 이는 공의 묘가 하방상원식으로 봉분이 되어 있고, 분묘의 주위를 돌로 담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 같다.
공은 아버지 공조전서 居斗(거두)와 함께 고려가 망할 때 개경에서 안동부 동편 방적리로 이사하고 정착하었으며 進禮島都萬戶(진례도도만호)는 고려조 벼슬이다.
묘 엎에 短碑(단비)는 숭정후 3 병술(영조 41: 1766)에 세웠으며 형태는 고려 말의 묘표의 표준이라 생각된다.
陰記(음기)가 있으나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공의 묘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묘인 栢竹堂(백죽당) 배상지, 상주 목사 권집경, 직제학 柳克恕(류극서)공의 묘와 동일한 형식이다.
金公諱洊之墓
【墓表文】
碑面 高麗都萬戶金公諱洊之墓
公諱洊姓金氏 新羅敬順王子義城君錫之后也 曾祖諱瑞芝 慶尙觀察使 祖諱台權文川府左尹司 考諱居斗工曹典書 妣文化柳氏代言總之女 公生于 元大德壬寅 高麗末爲進禮 島都萬戶 見國運 將訖奉典書 南下卜居于安東府城東 名其洞曰邦適 蓋邦之革矣 我安適敀之意也 權陽村近嘗與公 洞里閈祭 公文有薇蕹忘飢廉頑立儒之語 卒歲未詳 墓在安東箭岩午向之原 娶典敎令 洪州李處謙之女 生二男 永壽司直 永命縣監 司直生二男 漢遇 漢重 縣監生四男 漢啓承文院事知 漢哲持平 漢碩 漢仝曾玄以下不盡錄 五世孫璡贈吏曹判書 有五男 克丙資寺正 守一察訪 明一生員 誠一副提學贈判書文忠公 復一司成府使 七世孫 涌參議贈參判迬郡守 贈參判墓道舊無顯刻 文忠之子洗馬潗 洗馬公之玄孫 皆有意而未畢今 諸孫合謀 且石謹取 譜系及流傳故事略識之 夫人墓在樊川艮坐原
英宗大王42年丙戌10月日 立石13代孫 相玉
始享柱國說14代孫龍普等掌其事
<해>
김공휘천의 묘
【묘표문】
(비면) 고려도만호김공휘천지묘
공의 휘는 洊(천)이고 성은 김 씨인데 신라경순왕의 아들 의성군 錫(석)의 후손이다.
증조의 휘는 瑞芝(서지)이고 경상관찰사를 지냈으며, 조부의 휘는 台權(태권)인데 문천부좌윤사을 지냈다. 아버지 휘는 居斗(거두)이고 공조전서를 역임했다. 모친은 문화 류씨 대언 總(총)의 딸이다.
공은 元(원) 대덕 임인년에 태어 났고, 고려말에 진례도도만호가 되었는데 국운이 다한 것을 보고, 부친인 전서공을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부성 동쪽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그 마을 이름을 邦適(방적)이라 했는데, 그 말은 대체로 “나라가 바꾸었다”라는 뜻이다.
우리 안동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양촌 권근공도 공과 함께 동래 문을 처음으로 여는 행사에 와서, 공은 문장에 능력도 있고 “고사리를 먹으며 허기를 잊은 완강한 선비”의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 하였다.
졸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묘는 안동부 전암 오향에 있으며, 전교령 홍주 이처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는데 永壽(영수)는 사직, 永命(영명)은 현감이었다.
사직공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漢遇(한우) 漢重(한중)이다. 현감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漢啓(한계)는 승문원사지, 漢哲(한철)은 지평, 漢碩(한석) 漢仝(한동)과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 할 수가 없다.
오세손 璡(진)은 증이조판서인데 아들 다섯이 있으며, 克丙(극병)은 자사정, 守一(수일)은 찰방, 明一(명일)은 생원, 誠一(성일)은 부제학 증판서문충공, 復一(부일)은 사성부사를 역임하였다. 칠세손인 涌(용)은 참의 증참판왕군수인데 참판공의 묘에 비석이 없음에 유감으로 생각하고 문충공의 자손 세마 潗(집)과 세마공의 현손들도 모두 같은 듯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지 못하였던바, 모두 뜻을 합하여, 이에 돌을 마련해 譜系(보계)와 流傳(유전)되는 고사를 정리하여 그 대략을 기록한다.
부인의 묘도 번천 간좌에 있다.
영종대왕 42년 병술10월일 입석 13대손 상옥
시향주국설 14대손 용보 등이 그 일을 관장하다.
金永命(김영명)의 묘갈명
金永命(김영명) 太祖 6年 戊寅(1398)~世祖
8年 癸未(1463) 66. 義城人. 工曹典書 居斗 孫
공은 안동지방에 정착하게 된 의성 김씨 공조전서 金居斗(김거두)공의 손자이며 진례도 도만호 洊(천)의 아들이다. 공의 묘는 원래 안동시 운안동(구 안기역 서 임피사 서 간산)에 있었는데 도시개발에 의하여 1991년 5월 13일 와룡면 중가구동 도만호 묘아래 이씨 부인 옆으로 이장하였다. 이장 시 발견된 황명 천순 계미(1463) 비석에는 전면에 큰 글씨로 「奉翊大夫新寧縣監兼 勸農判官 大丘兵馬團領判官 金永命之墓(봉익대부신녕현감겸 권농판관 대구병마단령판관 김영명지묘)」라고 각자가 되어 있고, 음기에는
「大夫聞韶人洪武戊寅生於豊山 己酉中司馬試歷陵直 監察縣監 癸未卒于 第先娶牧使廣州李之柔女 生一男一女 男通訓副知承文院事漢啓 先卒 中娶少監光州金務女 生一女 後娶景惠公權專女 生三男 男長漢哲餘皆幼 皇命天順7年癸未12月13日 立石
(대부문소인홍무무인생어풍산 기유중사마시역능직 감찰현감 癸未卒于 제 선취목사광주이지유여 생일남일녀 남통훈부지승문원사한계 선졸 중취소감광주김무여 생일녀 후취경혜공권전여 생삼남 남장한철여개유 皇命天順7年癸未12月13일 입석)이라고 刻字(각자) 되어 있다.
이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묘의 형식과 비문은 초기의 문묘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된다.
【墓表】
碑面 朝奉大夫行新寧縣監兼勸農判官大丘道兵馬團練判官金永命之墓
大夫聞韶人洪武戊寅生於豊山 己酉中司馬試歷陵直 監察縣監 癸未卒于 第先娶牧使廣州李之柔女 生一男一女 男通訓副知承文院事漢啓 先卒 中娶少監光州金務女 生一女 後娶景惠公權專女 生三男 男長漢哲餘皆幼
皇命天順7年癸未12月13日 立石
安東邑誌 見塚墓部
縣監金永命墓在安奇西林皮寺 艮山以 判尹權專 女壻繼葬于判尹公夫人墓下
<해>
【묘표】
비면 조봉대부행신녕현감겸권농판관대구도병마단련판관김영명지묘
대부인 문소인은 홍무 무인년 에 풍산에서 태어났다. 기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능직감찰현감을 역임하고, 계미년에 졸하였다.
先娶(선취)는 목사인 광주 이씨 지유의 딸이며, 1남 1여를 낳았는데, 아들은 통훈부지승문원사를 지낸 漢啓(한계)인데 먼저 죽었다. 中娶(중취)는 소감 광주 김씨 務(무)의 딸로서 1녀를 낳았고, 後娶(후취)는 경혜공 權專(권전)의 딸인데, 3남은 낳았다. 장남은 漢哲(한철)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황명 천순 7년 계미 12월 13일 입석
안동읍지 塚墓部(총묘부)를 보면
「현감 金永命(김영명)의 묘는 안기도 西林皮(서림피) 옆 艮山(간산), 판윤 權專(권전)의 사위와 繼葬(계장)하였고 판윤공 부인 묘아래 있다.」라고 하였다.
金璡(김진) 墓碣銘(묘갈명)
金璡(김진) 燕山君 6年 庚申(1500)~ 宣祖 13年 庚辰(1580) 81.
字 瑩中. 號 靑溪. 義城人 承文院事 漢啓의 曾孫
공의 묘는 임하면 사의동 경출산(비학산)에 있다. 만력 48년(광해 12년, 1620) 대사성 愚伏(우복) 鄭經世(정경세) 찬의 묘전비가 서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마모되고 256년이 지난 고종 13년 병자(1876)에 다시 세운 비가 石人(석인)과 望柱(망주)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공의 묘 뒤에는 부인 驪興(여흥) 閔氏(민씨) 묘가 같은 언덕에 연분으로 있고 계하에는 둘 째 아들 龜峯공의 묘가 있으며 묘아래 마을에는 공의 6부자를 제향하는 泗濱書院(사빈서원)이 있다.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임하리로 이전하였다.
공은 안동지방에 정착한 의성 김씨 공조전서 居斗(거두)의 6대손은 공의 아들 5형제가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정진하여 나란히 小科(소과) 혹은 大科(대과)에 급제하여, 조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科臣(과신)이 계속 이어지니 의성 김씨 顯祖(현조)로 추앙하고 있다. 공의 眞影(진영)은 72세 때 제작되었는데 현재 종택에 보존되고 있다.
【墓碣銘】
贈資憲大夫吏曹判書金公墓碣銘 幷序
金之氏於義城者。爲東韓望族。高麗時有名龍庇。仕爲太子詹事。其子宜爲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子孫遂燀赫。凡歷五世。至公之曾祖副知承文院事諱漢啓。皆以鉅卿達官名于世。惟公之祖成均進士諱萬謹。考秉節校尉諱禮範。始隱不仕。公之妣曰。寧海申氏。郡守命昌女也。公諱璡。字瑩中。生而岐嶷。幼而知學。伯姑壻權公幹有家行。以孝悌敎人。公甫成童。卽往受業。旣冠。聘驪興閔氏。則閔氏之季父曰世貞。乃中廟朝賢良科及第己卯名儒也。公又從之游。得聞當世諸君子緖論。自是聞見日廣。藝業日進。遊太學入上舍。駸駸爲輩流所推許。尋棄擧子業。卜築于臨河縣之傅巖。以訓後生爲事。闢書堂一區。聚子弟及鄕之蒙士于其中。立科條程督之。提撕誘掖。備盡其方。積數十年不輟。學徒稍盛。絃誦聞一境。公之五子。三人取大科。二人升上庠。皆及公康健時爲公之榮。歲時省覲。鞾笏滿床。觀者嘖嘖歆歎。始公之生也。進士公奇愛之。小字以文會曰。是孫必能昌吾門。至是而果驗焉。公居家奉二親甚謹。省寒燠供滫瀡。務盡其歡。喪而致哀。廬墓三年。友弟妹篤至。分財產不置券。家庭無間言。撫育甥姪如己子。其貧不能嫁娶者。悉力資遣之。尤致誠於祭祀。齊之曰。飭內外無得譁。祭之日。肅敬將事。常曰。祭祀不謹則祖考不享。亦人家興替之所由也。可不謹乎。至於淫祀非鬼之事。則又憤疾之若浼己。巫覡不敢入其閭。縣之南山有祠。俗傳高麗廉興邦乃其神。巫覡輩倚以作妖。肆爲誣惑。公馳往數之曰。汝以前朝巨奸。死有餘罪。豈可容汝不靈之鬼以惑愿民乎。卽毀撤之。俗以稍定。嘗語諸子之仕者曰。事君之道。當以積誠見信爲先。然後犯顏而能入。又曰。人寧直道以死。不可枉道以生。汝等爲君子而死。則吾視猶生也。爲小人而生。則吾視猶死也。晩年。遊寧海之靑杞縣。愛其山廻水繞。有耕釣之樂。遂挈家而居之。課童僕力農桑以自給。每遇佳辰令節。黃鷄白酒。招山翁溪友。相與爲眞率。酒數行輒命射。先決拾呼耦。鶴髮童顏。昂然正立。發必破的。一座皆驚。以爲地仙焉。臨命。怡然謂子弟曰。吾年逾大耋。天餉我厚矣。復何求哉。公生于弘治庚申。歿以萬曆庚辰。得年八十一。葬于臨河縣東景出山震向之原。與閔氏爲前後封。閔氏故左議政霽之五代孫。秉節校尉世卿之女。得婦道甚。先公三十四年。年若干而終。公歿後十二年壬辰。公之男誠一爲慶尙右道節度使。推恩贈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閔氏貞夫人。公之祖若考皆有贈如式。又後十四年丙午。朝廷以誠一討賊有功。錄宣武原從勳一等。加贈公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嗚呼。公之榮於是而益顯矣。男長克一。內資寺正。以詩鳴。次守一。成均生員。自如道察訪。次明一。成均生員。早卒。次卽誠一。有德行有事業。後學稱爲鶴峯先生。季復一。昌原都護府使。女長適柳城。次適成均館直講李逢春。季適柳瀾。庶男衍一。庶女二。內外孫曾男女凡百餘人。公之孫參議涌。於經世爲執友。一日。以狀授經世而言曰。此吾叔父鶴峯公所狀吾王父之行也。諸父爲王父具麗牲石。請銘於西厓。諾而未成。諸父相繼淪沒。西厓又已下世。涌等旣悲且懼。思以累吾子以成諸父之志。幸卒圖之。余辭謝不獲。退而讀其狀則其末有曰。府君身居畎畝。名不顯於世。雖有隱德。人鮮知之。知不知雖無加損於府君。而人子顯親之心。自有所不能已者。若其溢美以取譏。則又諸孤之所大懼也。嗚呼。是足以傳信於百世矣。後生晩出。何敢贅辭。謹摭其大者如右。而系以銘。銘曰。
孰不愛子。患不能誨。亦或誨之。久則必懈。能誨能久。惟公能愛。不爲小仁。爲大仁害。匪亟匪徐。有秉無改。晧天不忘。俾食所漑。旣中旣才。亦騰其馤。公在高堂。庭鳴玉佩。封植之澤。逮玆未艾。維公有行。我最其槩。孰不可書。維此尤大。景出之麓。江源濊濊。我銘斯闕。以詔來昧。
<해>
【묘갈명】
증자헌대부리조판서 금공 묘갈명 병서
의성 김씨는 우리 동방에서 명망이 높은 씨족이며, 고려 때 유명한 龍庇(용비)는 太子詹事(태자첨사)로 종사했고, 그 아들 宜(의)는 銀靑光祿大夫(은청광녹대부) 尙書左僕射(상서좌복야)로 자손들이 빛나게 되었다.
모두 5세를 지나 공의 증조부에 이르러 副知承文院事(부지승문원사)가 되었다. 휘 漢啓(한계)는 큰 벼슬을 했고 이름을 세상에 날렸다.
오직 공의 조부는 成均(성균)진사인 휘 萬謹(만근)이고, 부친은 秉節校尉(병절교위)인 禮範(례범)인데 처음으로 음직으로서 출사하지 않았다.
공의 모친은 寧海申氏(녕해신씨)로 군수 命昌(명창)의 딸이다.
공의 휘는 璡(진)이고 자는 瑩中(형중)인데 영리하고 지혜롭게 태어나 어려서도 공부를 잘해서 고모부인 權幹有(권간유)의 집에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효성이 있고 우애가 있었다.
공이 자라 소년이 되어서 공부를 하러 갔다. 冠禮(관례)를 마치고 驪興閔氏(려흥민씨)를 찾아 갔는데, 곧 민씨의 季父(계부)가 世貞(세정)이며 그는 기묘년에 中廟朝賢良科(중묘조현량과)에 급제한 名儒(명유)였다. 공은 그을 따라 놀며 당대의 많은 군자와 그들의 생각과 주장을 들었다. 이로 붙어 견문이 날로 넓어져, 날로 학업이 진척되고 太學(태학)에서 놀며 進士(진사)가 되었다.
輩流(배류)를 위해 다 그만두고 자제를 위해 임하현 전암에 자리 잡고 후생을 위해 훈육하는 일을 하였다.
한쪽에 서당을 열고, 집안의 자제들과 마을의 선비들을 거기 받아 들었다. 科條(과조)를 만들어 공부를 독려하고, 기운을 내게 부추기며 모든 노력을 다해 수십 년이 되어도 그치지 아니하니 學徒(학도)는 점점 더 많아지고 시문을 암소하기에 몰두하였다.
공의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사람이 大科(대과)에 급제하고 두 사람이 위 학교에 진학하였다. 모두가 공이 건강 할 때 공의 영광이었다.
歲時(세시)를 살펴보니 신발과 笏(홀)이 온 마루에 가득하여 보는 이는 모두 크게 감탄을 하였는데 모두 공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진사는 공을 매우 사랑하여 어릴 때 文會(문회)에서 이르기를 「이 자손은 반드시 우리 문중을 창성하게 하리니 그 결과를 지켜보리다.」라 하였다. 공은 집에서 두 어버이에게 매우 공손하였으며, 추이를 살펴 따뜻하게 해드렸으며 음식을 잘 대접하며 힘써 기쁘게 모셨다.
喪(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장사를 지내고 廬幕(여막) 3년을 형제자매가 독실하게 치렀다.
재산을 나누는데도 문서를 남기지 않아도, 가정에 間言(간언)이 없었다. 생질과 조카를 친자식같이 교육 시키고 길렀으며, 가난해서 시집 장가를 못가는 자는 모두 비용을 물러 주었다.
더욱 제사에 성의를 다하며 모두에게 말하기를 「안팎이 시끄럽지 않게 경계하며 제삿날엔 엄숙하고 공경한 가운데 제사를 모셔야 한다.」하고 늘 말하기를 「제사를 공손하게 하지 않으면 祖考(조고)가 운감하지 아니하니, 또한 사람의 집안이 흥하고 망하는 원인이 여기 달려 있으니 공손 안 할 수 없지 않나. 음란하고 삿된 귀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며, 또한 괴로움과 질병으로 얼룩질 것이니, 무당과 박수는 감히 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였다.
縣(현)의 남쪽 산에 한 사당이 있어, 민간에게 말을 퍼트려 전하기를 고려의 廉興邦(렴흥방)이 그 모시는 신이라 한다. 그리하여 무당과 박수무당들이 서로 작당하여 요사한 일을 꾸미고 행하니, 공이 여러 차래 가서 말하기를 「그대는 前朝(전조)를 크게 농락하였으니, 죽어도 죄가 남는데, 얼굴을 들고 신령의 귀신으로 백성들을 또 미혹하는가. 즉시 헐어버리고 철수 하라.」하였다. 풍속을 정하고 이어서 모든 자제들과 일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인군을 섬기는 도는 마땅히 정성을 다해 신의를 보이는 것이 으뜸이고 그런 연후에 犯顏(범안)으로 능히 들어간다.」 또 말하기를 「사람은 도를 위해 기꺼이 죽고, 그릇된 도로 살아서는 아니 된다. 그대들은 군자로서 죽으면. 곧 그것이 내가 바로 사는 것이고, 소인으로 산다면 곧 나는 죽은 것으로 보느니라.」하였다.
만년에 寧海(녕해) 靑杞縣(청기현)에서 논 일이 있었는데, 그 산세에 감동되고 물이 흘러가는 것을 사랑해서 밭 갈고 낚시하는 즐거움으로, 드디어 집을 짓고 살게 되니, 아이들과 노비들에게 농사 짓고 뽕을 따서 자급자족하게 하였다.
좋은 계절과 명절을 만나면, 황계와 탁주로 山翁(산옹)과 溪友(계우)를 불러 술이 여러 차래 동면 문득 활쏘기를 명해서 먼저 나가 상대를 부르니 鶴髮(학발)에 童顏(동안)으로 의연히 바로 서서, 쏘면 반드시 과녁에 맞으니 좌석에 모드가 놀라서 바로 地仙(지선)이 아닌가, 했다.
임종에 태연히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여든을 넘었으니 하늘에 내게 후이 하였다.」라고 했다.
공은 弘治(홍치) 庚申(경신)년에 태어나 萬曆(만력) 庚辰(경진)에 몰하니 81세 까지 살았다.
장사를 臨河縣(임하현) 동쪽 景出山(경출산) 震向(진향) 둔덕에 지냈으며 閔氏(민씨)도 전후에 奉(봉)했다. 閔氏(민씨)는 고 좌의정 霽之(제지)의 5대손으로 秉節校尉(병절교위) 世卿(세경)의 딸이며, 婦道(부도)가 돈독했는데 공보다 앞서 34년 전 나이 어려서 생을 마쳤다.
공이 몰한 뒤 12년이 지난 壬辰(임진)년, 공의 아들 誠一(성일)이 慶尙右道節度使(경상우도절도사)가 되자 공은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가선대부리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로 증식되고 閔氏(민씨)는 貞夫人(정부인)이 되었다. 공의 조부와 부친도 모두 증직 되었다.
또 그 뒤 14년이 지난 병오년, 조정에서 誠一(성일)이 적을 토벌하는데 공이 있어 宣武原從勳一等(선무원종훈일등)에 녹훈되니, 공은 또 한 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자헌대부리조판서겸지의금부사)로 추가 증직 되었다.
오호! 공의 영화는 이와 같이 더욱 더 나타났다. 장남 克一(극일)은 詩鳴(시명)으로서 內資寺正(내자사정)이고, 다음 守一(수일)은 成均生員(성균생원)으로 道察訪(도찰방)에 올랐고, 다음은 明一(명일)인데 성균생원이지만 일찍 죽었고, 다음은 誠一(성일)로서 덕행으로 사업을 하였으니 후학들이 鶴峯先生(학봉선생)이라 일컬었다. 그 동생 復一(부일)은 昌原(창원) 都護府使(도호부사)였다. 장녀는 柳城(류성)에개 시집갔고, 다음 딸은 성균관직강 李逢春(이봉춘)이 처가 되었고, 그 동생은 柳瀾(류란)에게 갔다.
庶男(서남)은 衍一(연일), 庶女(서녀)는 둘인데, 내외 손증 남녀 모두 100여명이나 된다.
공의 손자 參議(참의) 涌(용)은 經世(경세)와 친구인데, 하루는 經世(경세)에게 문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숙부 鶴峯(학봉)공의 소장하던 문서인데 나의 조부에 행적이다.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당내친지와 할아버지의 행적을 모두 돌에 잘 새기려고 銘(명)을 西厓(서애)에게 청했는데 대답을 아직 듣지 못하였고, 또 諸父가 서로 이어서 몰하고, 西厓(서애)또한 세상을 하직하니 샘솟는 슬픔으로 비통할 뿐이데, 생각하니 우리 자식들에게 諸父(제부)의 뜻을 적어서 남기고자 한다. 그대는 못하겠다 사양하지 말기 바란다.」하였다.
물어나 그 문서를 읽어보니 그 끝에, 府君(부군)의 몸은 논두렁에 있었고,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지 아니했으며, 비록 隱德(은덕)이 있으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였다. 알고 모르고는 모두 부군을 損(손)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자식으로 孝心(효심)을 나타내고, 스스로 능하지 못한 자라 했으며 만약 그 아름다운 점을 취하면 나무라며, 또한 모든 외로움을 크게 두려워했다.
오호! 이는 족히 백세에 전할 만 하다. 후생은 늦게 나타나 감히 어찌 맡겠는가 만 삼가 그 대량을 다음과 같이 모아 명을 이어 갈까 한다.
명에 이르기를 。
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가.
병이 나서 가르칠 수 없어도
역시 혹 가르치는데
오래하면 반드시 개을리 되갰지만
능히 가르치고 능히 오래 도록
오로지 공은 능히 사랑으로 행해서
작은 仁(인)을 위하지 아니하고
크게 되기 위해 仁(인)을 해했네.
가장 빨리 가장 느리게
한번 잡은 것을 고치지 아니하고
밝은 하늘의 뜻 잊지 아니 하며
음식주고 깨끗이 감사고 길어
그 가운데 이미 재주 나타나
역시 그 향기 피어오르니
공은 高堂(고당)에 있으며
마당에는 玉佩(옥패)가 울리는데
녹봉의 심은 못엔
쑥이 이에 미치니 아니 하네
오직 공은 行(행)이 있어
나는 그 기계로
누구도 글을 쓸 수 없는데
오직 이 크고 큰
산록에서 나오는 경치
강의 원천은 깊고도 깊어
나는 이렇게 명을 하니
뒤에 오는 이에게 알리려 하네.
金克一(김극일) 墓碣銘(묘갈명)
金克一(김극일) 中宗 17年 壬午(1522)~ 宣祖 18年 乙酉(1585) 64.
字 伯純. 號 藥峯. 義城人 靑溪 璡의 長子.
공의 묘는 임하면 천전동 飛鯉谷(비리곡)에 있다. 5형제가 모두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덕행과 문학으로 이름을 널리 알려져서 향리에서 추중되었다.
공은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거쳐 오개주군을 다스려 명성이 높았고 내자시정이 되었다. 문장이 고고하고 준결하였으며 특히 시에 능하였다고 하는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구봉 守一(수일)의 차자 澈(철)이 양자가 되었으며 사빈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묘 앞에 종5대손 世鎬(세호) 撰碣(찬갈) 이 있으나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어 신미년(1991)에 왼편에 다시 세운 신비가 있다.
공의 묘에 큰 문석과 망주가 있고 그 옆에 둥근 석물이 있는데 그 용도를 알 수 없다. 특이한 형식이다.
【墓碣銘】
通訓大夫內資寺正藥峯先生墓碣銘
藥峯金先生 諱克一 字伯純 聞韶人 贈 通訓大夫承政院左承旨 謙 經筵參贊 官 諱禮範之孫 贈 資憲大夫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靑溪先生 諱 璡之子也. 靑溪先生有碩德 重名以國子生員 隱而不仕 娶 驪興閔氏 相國 五代孫 諱 世卿之女 有子五人 有德行 文學 世謂之 金氏五龍 先生於倫次 爲長 幼英爽俊異 吐辭軏驚人 稱神童云 稍長 從陶山李先生學 卓然有成 李先生甚敬重之 二十五登上第 初 授校書正字 是年丁母夫人憂 服除選入槐院歷正字 著作博士 薦爲 起居郞 俄遷秋 曹員外 改司憲府監察 出爲洪原縣監 淸洪都事 入爲直講 刑禮曹正郞 爲軍器僉正 又出守 平海郡 八司宰監爲僉正 又出守醴泉郡 入成均館爲司成 轉 司導正 又出牧星州 知密陽府而 靑溪先生 固枉堂 食其祿 靑溪先生卒旣三年 除內資正 越 四年 年 六十四 萬曆 十三年正月七日終于家 某年某月某甲 從葬于 臨河縣北飛鯉谷酉向之原 先生以高才卓識 旣擩染庭敎 于 蚤遊大賢門下學裕於已 道適於用而 恬於聲利 拙於進取 惟以家貧親老 乞郡致養爲榮 若世之所謂 淸班選任者則 先生旣擠而與之矣 先生凡爲五邑長 所至必以興椑斯文 風勵後學 爲先務而 其居官莅民 忠厚公廉 治爲當世循良最 君子曰 宋有濂溪先生 安於州縣 樂行其道 今先生殆庶幾乎 先生所謂文章 高古峻潔無世俗氣 尢長於詩 得風雅有響 有遺稿 不幸而火餘 若干券行于世 淑人 遂安李氏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諱 葳之女 婦道甚修 配君子無違德 後先生十年而沒 享年六十五 附于先生墓 先生無男子 以弟龜峯先生諱守一之子 進士澈爲嗣 女子四人 適郡守鄭靖 縣監柳椅 生員李胤呂 進士張汝華 澈娶察訪金宗武女 生是榲號瓢隱 爲學者所宗有八子 曰邦烈生員 邦衡炁 邦杰 大司成 邦蔶 邦照 邦謙 七壻 權克中 金輝世佐郞 權克正生員 鄭自固 金宗沒 李兪吾 權斗經縣監 內外玄孫男女 凡數百人 先生歿後九十一年 當今上十一年乙丑 而鄕人倣董澤故事 立景山景德嗣 以祀 靑溪先生而 以先生五兄弟配焉 銘曰
靑溪庭前 克肖克嗣 先生之德 陶山門下 講焉劘焉 先生之學 棣華韚韚 日邁月征 亦孔之樂 奎運煌煌 大鳴以文 厥聲藹蔚 維彼世人 維工進取 維日怯怯 維我先生 維退而緩 維職之職 八耊枉堂 五城以養 孝思維則 其位則細 其爵則耊 其德則隆 倬彼景山 俎豆以亨 多士攸宗 顯考臨之 諸弟從之 不顯其光 曲城之北 龍鯉之原 萬歲之藏 刻詩子碑 以贊厥休 以示茫茫
從五代孫 具官 金世鎬謹撰
<해>
【묘갈명】
통훈대부 내자사정 약봉선생 묘갈명
약봉 김선생의 휘는 극일 자는 백순이며 문소 사람으로 증 통훈대부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과 휘 예범의 손자이고, 증 자헌대부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청계 선생 휘 진之의 아들이다. 청계선생은 큰 덕이 있고 나라 안에 이름이 알려진 생원이며,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살았다.
娶 여흥 민씨 상국의 5대손 휘 세경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식을 다섯두었는데 덕행이 있고, 문학에 능해 세상에서 「김씨 오룡」이라 일컬었다.
선생은 줄 째로서 자라감에 어릴 때 영특하며 다른 사람보다 뛰어 났고, 글 구절을 말 할 때 마다 사람들이 놀라며 신동이라 하였다
좀더 자라 도산 이선생을 라 공부를 했는데 재주가 뛰어나 이선생께서 매우 아끼고 존중했다.
25세에 과거에 등제되어 처음에 수교서정자가 되었는데, 그 해 모친이 돌아가셔 상을 입었는데, 탈상을 한 다음 또 선발되어 괴원역정자 저작박사가 되었고, 다시 천거되어 기거랑이 되었다가, 갑자기 가을에 조원외로 옮겨 가고 다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홍원현감 청홍도사가 되어 외직으로 갔다가, 들어와 직강 형예조정랑 군기첨정가 되었다.
또 나가 평해군을 지키고 팔사재감에서 첨정이 되었다. 또 나가 예천군을 지키고, 들어와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사도정으로 전보되었다가, 또 나가 성주목사가 되고 지밀양부가 되었다.
청계선생은 고향을 굳게 지켜 그 녹봉으로 살아갔다.
청계선생이 졸한 지 이미 3년이 되니, 내자정에서 제명되고, 이미 4년이 지나갔다. 나니 64세인 만력 13년 정월 7일 집에서 졸하니 모년 모월 모갑자에 임하현 북쪽 비리곡 유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선생은 재주가 있고 식견이 높으며, 가정교육을 장 받아 일찍이 매우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 문하에서 놀며 배워, 도로서 행하고 쓰며, 명리에 초연하고, 나아가는데 서두르지 아니하고, 오직 집이 가난해도 양친을 잘 모셨다. 군에서 구해서 잘 봉양했는데, 만일 세상에서 깨끗한 사람을 뽑는다고 말한다며 선생에 돌아 갈 것이다.
선생은 모두 다섯 읍의 장을 지냈는데 가는 곳 마다 반드시 다음과 같은 글을 내 걸었다. 즉 후학을 격려하고, 직무를 위선으로 하며, 백성을 위한 관원이 되고, 충직하고 공평하고 청렴하라 하여 당세에 가장 잘 다스려 나갔다.
군자 왈, 송나라에 염계선생이 있었는데 고을과 현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도를 행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하였다. 지금 선생이 거의 그와 비슷하다. 이른바 선생의 문장은, 세속을 초월해 고고하고 높고 깨끗해서 속된 기미가 없는데 특히 시에 능했다. 풍치가 있고 조촐한 맛이 풍겨나는데 유고 있었으나 불행이도 불에 타고 나머지 약간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숙인 수안이씨는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휘 위지의 딸이며, 부도를 잘 닦아서 군자의 배필로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선생보다 10년 뒤에 졸하였는데 향년 65세였고 선생의 묘 옆에 장사지냈다.
선생은 아들이 없어 동생인 구봉선생 휘 수일의 아들인 진사 철을 후사로 하였다. 딸 넷은 각각 군수 정정, 현감 류의, 생원 이윤여, 진사 장여화의 처가 되었다. 철은 찰방 김종무의 딸을 얻어, 시온 호 표은을 낳았다.
학자로서 뛰어난 8남이 있는데, 방열은 생원, 방형은 기, 방걸은 대사성, 방책, 방조, 방겸, 일곱 사위는 권극중, 좌랑 김휘세, 생원 권극정, 정자고, 김종몰, 이유오, 현감 권두경이고 내외 현손이 남녀 합하여 모두 백명이나 된다.
선생이 가신지 91년, 금상 왕조 11년 을축, 향인이 동택의 고사를 본떠서 경치 좋은 산에 경덕사를 지어, 청계선생을 제사지내고, 또 선생의 오형제와 배위를 제사지내고자 한다.
명에 이르기를
청계의 뜰 앞
끼치고 이어가는
선생의 덕
도산 문하에서
익히고 갈고 닦은
성생의 학문
밝고 밝게 꽃 피어
나달로 발전하고 나아가니
또 한 매우 즐겁도다.
학문이 빛나게 번성하여
글로서 크게 울리니
그 소리 아름다워
오직 세상 사람들아
재주는 적극 앞으로 나가고
오직 나날이 무성하니
오직 우리 선생
물러서 느긋하네!
오직 벼슬하고 또 벼슬 해
팔순에 고향 지켜
오성으로 봉양하니
효를 생각함 본받아
그 위치가 작으며
그 벼슬 한지 곧 오래고
그 덕은 곧 융성하니
저 아름다운 산
조두로서 제향하고
많은 선비 종사를 닦아
고위 임하셔 굽어 살피니
모든 자제 따르고
그 빛 아니 타나니
곡성의 북 쪽
용리 언덕에
만세토록 갈무리 하니
시 비에 각해
그침 없이 나타내어
아득 하도록 보이려 하네.
종오대손 구관 김세호 근찬
金㙆(김홍) 墓碣銘(묘갈명)
金㙆(김홍) 英祖 15年 己未(1739)~ 純祖 16年 丙子(1816) 78.
字 子野(자야). 號 龜窩(구와).
義城人 五友堂 近의 后.
공의 묘는 의성군 비안면 화신리에 있다.
풍수지리설로 길지를 점지하여서 안동 구미에서 그곳에 안장하였다. 묘 앞에는 定齋(정재) 柳致明(치명) 찬갈 진성 李範敎(이범교) 글씨의 비석이 있다.
공은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의 문인으로 정조 1년(1777)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문장은 상세정교하고 필법 또한 謹重(근중)하며 체재가 있어 한때 詞命(사명)과 題額(제액)이 많이 있다.
퇴계 賜祭(사제)와 大山(대산)선생 贈爵(증작)을 상소하여 윤허를 얻었다. 문집이 있다.
【墓碣銘】
禮曹參判龜窩先生金公墓碣銘 柳致明 撰
先生諱㙆。字子野。姓金氏。號龜窩。祖羅王子錫。食采義城。在麗有曰龍庇。襲封。享鎭民祠。至集賢修撰諱漢啓。端廟遜位。謝病不仕。五世諱近。進士。號五友堂。又三世至曾祖諱彥兼。贈司僕正。祖諱壽天。贈吏曹參議。考諱光憲。生員贈吏曹參判。妣英陽南氏。以老女。贈貞夫人。先生以元陵己未。生安東之龜尾。幼端秀不好弄。旣就傅。不煩程督。藻思日就。十六七。與等輩漁獵。大山李先生。適過見曰。盍歸而讀書。公大慚恧。歸中堂。危坐不移者數日。起則直趨。請學于先生。自是凡先生家居就靜。公未嘗不在講席。乙酉。赴省試不利。跡及家衖。聞先生秉拂廬江。旋徒步往從之。癸巳。中司馬。未幾遭內艱。丁酉。登第。旣擺去功令。益專意問學。辛丑。先生卒。自侍疾視斂。以至修整遺文。誠力俱到。甲辰。丁外艱。丁未。付典籍。甲寅。除平安都事。乙卯。拜持平。丁巳。拜正言。冬特授丹陽郡守。陛辭。上引見。命擧顔勉諭。至則捐俸救瘼。嚴束吏胥。廉簡爲治。戊午。應旨上疏。陳邑弊。末言出治行政之本。在人主一心。批曰。附及格言。不負予知。己未冬。上欲選文學之士。以輔養元子。於是大臣交口薦達。遂除持平。特命召之。庚申。拜侍講院文學。上諭元子曰。文學嶺人好。細詢文義。公益兢惕以圖報。移宗簿正。呈告南還。而上昇遐。秋。連除掌令。赴召。參因山。除司僕正。遷京畿都事。辛酉。陞獻納。壬戌。三除執義。選入弘文館。除校理。癸亥。屢除修撰校理副校理。上疏辭。仍陳先正大本之道。上優批納之。甲子。拜副修撰。上問行期於筵臣。旣登筵。屢賜召對。一日筵臣言著意敬時便是動。公引朱子敬貫動靜之旨以難之。兩不相下。語聲俱高。上俯視色笑。以公言爲是。是日登筵諸臣。退相語曰。某說敬。眞用工者也。遷校理。陞同副承旨。僚官皆曰。奉行文書。吾輩事也。出入啓沃。公職也。尋辭歸。秋。拜兵曹參知。出爲伊川府使。爲治如丹陽。選邑之秀者。講授警飭不倦。丙寅。子弼秉殞於衙。卽撤歸。因謝絶名塗。丁卯。除右副承旨。壬申。擢嘉善。除漢城右尹。乙亥。除禮曹參判。公旣老。不應命。乃附以言事君之義。上一綱六條疏。綱卽大本心法。目曰輔春官也。明正學也。立紀綱也。躳節儉也。愼賞罰也。恤民隱也。末復以崇正學。爲拒詖熄邪之本。請侑祭陶山。崇奬先師。疏入。令廟堂稟處。時公已疾病沈淹矣。丙子。愈㞃。一日遺戒子弟以讀書飭躳。終事母令夸大。命扶起。正席卧。怡然而逝。上遣弔祭。右相韓用龜。奏稱公所陳切實可採用。仍侑祭先正。貤爵先師。如其請。九月。葬比安縣北花庄山向卯原。享年七十八。配眞城李氏。宜茂女。碧珍李氏。必和女。俱贈貞夫人。男弼煕出,弼秉。女崔柱宅。前夫人出。男弼五。女鄭光柱。後夫人出。弼秉嗣子若洙。女李秀懋。弼五男敬洙。女鄭致準,趙性悳,柳珪永。弼煕二男。應洙,若洙出。女李彙八,柳致任。崔嗣子某。女某某。鄭子昌翼。女李庭老。若洙男道和。敬洙嗣子世和。應洙男義和。李嗣子敦羲。女金禎洛,姜某。鄭男女幼。李嗣子晩瀅。女李某,洪某,金某。柳男建鎬,廷鎬。女金秉模,李鍾夏。道和四男。世和一男。義和一男二女。幷幼。公儀觀修整。風致秀朗。約之繩墨之中。而濟以冲和之象。威儀可觀。言笑可樂。周旋進退。秩然有章。常自言。幼時。氣力劻勷。不知終作何等人物。幸保有今日。師門之力也。少而竆。甚至自給薪水。居鰥屢年。身操鼎臼。而自經傳外書。無不洞貫。執役而口誦。忘餐而心念。其勵志勤力如此。旣擢第。委命於天。束身於禮。竆則樂從賢師友遊。達則自有聖明之知。不曾出一手效扳援。以損其退讓恬雅之操。可謂賢矣。雖經涉疾苦。騰騫名塗。所値不一。而此志不懈。常向裏省檢。燕閒之居。整容對案。潛心玩養。鷄鳴而默誦所讀。以至觀化前數日。喉響皆濂洛格言也。篤於孝友。親病。稽顙北辰。或至露伏達曙。喪致哀。祭致敬。弟病癰。吮其血。居職。撤官守以赴救。御家。和溢門闌。處族。略其過而與其善。此其日可見者也。爲文精詳剴切。筆法謹重。有體裁。凡有詞命及題額。多以公爲歸。銘曰。
英英我公。穎悟天出。一言啓發。終身約率。坐危如癡。趨直如矢。將此身心。一聽罏錘。晨夕摳衣。有跂者隅。進受退習。窘慽不渝。庸底于成。庸底于達。兩朝紆眷。二品崇秩。論敬微言。正本嘉謨。不負所學。令聞亦孚。不自爲有。有儼衣紳。燕閒之居。儀軌可親。存心玩養。聖言在玆。疾病呻吟。此志不移。是曰學則。其終如始。師門有人。吾黨有恃。羡道有赫。屹彼穹碑。琢之懿蹟。後人之貽。
<해>
선생의 휘는 굉(㙆), 자는 자야(子野), 성은 김씨, 호는 귀와(龜窩)이다.
시조는 신라왕자 석(錫)이 의성을 식읍으로 받고, 고려에서는 용비(龍庇)가 봉토를 세습하여 진민사(鎭民祠)에 제향되었다. 집현전 수찬 휘 한계(漢啓)에 이르러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5대조 휘 근(近)은 진사이고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다.
또 3대에 증조 휘 언겸(彦兼)는 증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르렀다. 조부 휘 수천(壽天)은 증 이조참의이다. 부친 휘 광헌(光憲)은 생원으로 증 이조참판이다. 모친 영양남씨는 이로(以老)의 따님이고 증 정부인이다.
선생은 영조 기미년(1739)에 안동 귀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단정하고 수려하여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제사에는 제사 드리고 남은 음식이 아니면 먼저 입에 넣지 않았다.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가르치는 과정을 번거롭게 하지않고 문사(文思)가 날로 진보 하였다. 16~7세에 동무들과 내가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대산선생이 마침 지나다가 보고 「어찌 돌아가서 글을 읽지 않는가?」라고 하니, 공이 매우 부끄러워하고 돌아가 중당에 끓어 앉아 자리를 옮기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었다. 일어나서는 곧바로 달려가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이 집에 계실 때 한가하시면 공은 한 번도 강석에 나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을유년(1765)에 성시(省試)에 나가 합격하지 못하고 발걸음이 집앞 거리에 이르렀을 때 선생이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강석을 주관 한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걸어가서 강석에 따랐다.
계사년(177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유년(1777)에문과에 급제하고는 과거 공부를 떨쳐버리고 더욱 학문에 전념하였다.
신축년(1781)에 선생이 돌아가셨는데, 질병에 간호하고 대소렴을 살피는 일로부터 유문을 편수하여 정리하는 일에 이르기까 지정성과 노력이 모두 지극하였다.
갑진년(1784)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정미년(1787)에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갑인년(1794)에 평안도 도사에 제수되었다.
을묘년(1795)에 지평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797)에 정언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특별히 단양군수에 제수되었는데, 부임에 앞서 임금에게 나아가 하직할 때,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얼굴을 들라고 명하고 권면 하였다.
단양에 부임해서는 봉급을 덜어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아전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청렴하고 간결하게 다스렀다.
무오년(1798)에 임금의 명에 응하여 상소하여 고을의 폐단을 진달하고, 끝에는 훌륭한 다스림을 이루고 정사를 행하는 근본은 임금의 일심에 있음을 말하니, 비답에 「뒤에 붙인 바른 말은 내가 그대를 알아 줌을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기미년(1799) 겨울에 임금이 문학에 능한 선비를 선발하여 원자를 보양하고자 했는데, 이에 대신들이 서로 입을모아 공을 천거하니, 드디어 지평을 제수하고 특명으로 불렀다.
경신년(1800)에 시강원문학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이 원자에게 유시 하기를 「문학은 영남 사람이 자세하니 글뜻을 묻도록하라.」고하니, 공이 더욱 두려워하면서 보답하기를 도모하였다.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이직되어서는 사유를 고하는 소를 올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는데 임금이 승하하였다. 가을에 연이어 장령에 제수되어 부름기에 나아가 인산(因山)에 참여하고 사복시정에 제수되었다가 경기도 도사로 옮겼다.
신유년(1801)에 헌남으로 승진하였다.
임술년(1802)에 세 차례 집의에 제수되고,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교리에 제수되었다.
계해년(1803)에 여러차례 수친·교리·부교리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먼저 큰 근본을 바르게 해야하는 도리를 진달하니, 임금이 넉녁한 비답을 내리고 받아 들였다.
갑자년(1804)에 수찬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이 경연의 신하에게 공이 오는 기일을 묻고, 이미 경연 석상에 오르자 임금이 누차 불러 대하였다.
하루는 경연의 신하가 말하기를 [경(敬)에 뜻을 부치는 때가 문득 움직이는것이다.]라고 했는데, 공이 [敬(경)은 동정을 관통한다]는 주자의 뜻을 인용하여 논란하니, 두 사람의 주장이 서로 지지 않아 말 소리가 모두 높았다. 임금이 굽어보고 웃음을 지으며 공의 말을 옳다고 했는데, 이날 경연에 오른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 서로 말하기를 [모(某)가 경을 말한것은 참으로 공부를 한 사람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교리로 옮기고, 동부승지로 승진했는데, 동료 관원들이 모두 말하기를 [문서를 봉행하는 것은 우리들의 일이고 출입에 啓沃(계옥)을 맡는 것은 공의 직분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일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 왔다가 가을에 병조참지에 임명되고 외직으로 나가 이천(伊川)부사가 되어 다스림을 단양에서와 같이 하고 고을의 수재를 선발하여 가르치고 경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병인년(1806) 아들 弼秉(필병)이 관아에서 죽었는데 곧 벼슬을 거두고 돌아왔다가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807)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임신년(1812)에 가선대부에 발탁되고 한성부우윤에 제수되었다.
을해년(1815)에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이미 연로하여 명에 응하지 않고 조심스레임 금을 섬기는 의를 말하고 일강육조소(一綱六條疏)를 올렸는데, 한 강령은 대본심법(大本心法)이고 여섯 조목은 [동궁을 보필함(補春宮)]이고 [정학을밝힘(明正學)] [기강을 세움(立網紀)] [절약과 근검을 실천함(躬協儉)] [상과 벌을 신중히함(愼賞罰)] [백성의 근심을 구흘함(恤民隱)]이었다.
끝에는 다시 정학을 숭상하는 것으로 편벽됨을 물리치고 사벽함을 그치게 하는 근본을 삼을것을 말하였다. 또 도산서원에 제사를 드리고 대산선생을 숭상 장려 할 것을 청하였다. 소(疏)가 들어가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했는데, 이때에 공은 이미 질병이 깊었다.
병자년(1816)에 질병이 더욱 위독했는데, 하루는 자제에게 警戒(경계)를 남기기를 [글을 읽고 몸을 단속하는 것으로 모든 일에 임하고, 남을 따라 허황하게 과장함이 없도록 하라.]하고, 부축 하여 일으키게 하고는 자리를 바르게 하고 누워 고요히 돌아가셨다.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조문하고 치제하였다.
우의정 한용귀(韓用龜)가 주청하여 일컫기를, [공이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채용 할만 하다.]고하니, 이에 따라 퇴계선생에게 제사를 드리고 대산선생에게 증직을 내리기를 그 청대로 하였다.
9월에 비안현 북쪽 화장산 묘향 등성에 안장하니, 향년이78세이다.
부인은 진성이씨 의무(宜茂)의 따넘과 벽진이씨 필화(必和)의 따님인데 모두 증 정부인이다. 아들은 양자로 나간 필희(弼熙)·필병(弼秉))·필오(弼五)이고, 딸은 최주택(崔柱宅)·정광주(鄭光柱)에게 출가하였다.
필희의 아들은 응수(應洙)·약수(若洙)이다. 필병(弼秉)은 약수를 후사로 삼았다. 필오의 아들은 경수(敬洙)이다. 공은 의관이 훤칠하고 가지런하며 풍채가 때어나고 밝았다. 법도의 가운데서 요약하고 충화(沖和)한 기상으로 이루니 위의를 볼만하고 말하고 웃는것이 즐거우며 일상생활과 진퇴의 절도에 차례대로 조리가있었다. 항상 말하기를 [어린 시절에 기력이 다급하여 마침내 어떤사람이 될지 몰랐는데 다행히 오늘이 있는 것은 스승의 힘이었다.]라고 하였다.
소시에 곤궁함이 심하여 스스로 뗄나무를 하고 물을 긷기에 이르고, 홀아비로 지내는 여러해 동안 몸소 밥을 짓고 곡식을 이렀다. 그러면서도 경전(經傳) 외서(外書)로부터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일을 하면서 입으로 외우고, 먹기를 잊고서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뜻을 가다듬고 힘을 부지런히 함이 이와 같았다.
급제 하고나서는 명을 하늘에 맡기고 몸을 예법에 단속하여, 궁한즉 어진 스승과 벗을 따라 놀기를 좋아하고 영달 한즉 훌릉한 임금이 알아 줌이 있음을 믿어서, 일찍이 손을 내밀어서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것으로써 물러나 사양하고 고요히 처신 하는 지조를 손상하지 않았으니 어질다고 할만하다. 비록 질병과 고통을 겪고 명리의 길에 달려서 만난바가 한결같지 않았으나 학문에 대한 뜻이 해이하지 않아 오히려 내면으로 향하여 성찰하였다. 한가로이 지낼때는 모습을 가다듬고 책상을 대해서 잠심하여 완미·함양하여 닭이 울때 일어나 읽은 글을 묵송(黙誦)하기를 돌아가시기 며칠전 까지 했는데 목안의 소리가 모두 염락(溓洛)의격언이 었다.
효성과 우애에 돈독했는데, 어버이의 병에 북극성에 머리를 조아려 빌었는데 혹 새벽까지 밖에 엎드려있기도 하고 상례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공경을 다하였으며, 아우가 악창을 않았을 때는 그 피고름을 빨아 내기도 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벼슬을 그만 두고 가서 구호 하였다.
가정을 다스림에는 화평함이 문에 넘치고 일족에 처함에는 허물을 대략 묻어주고 선함을 다하였다. 이러한 일은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문장을 지음에 정밀하고 절실하며 필법은 근중(謹重)하고 체재(體裁)가 있었으니 무릇 사명(社名)과 제액(題額)이 있으면 대부분 공에게 돌아갔다. 다음에 명(銘)을 붙인다.
英英我公 아름다운 우리 공은
穎悟天出 영특함이 천품에서 나왔으니
一言啓發 일언으로 열어주자
終身約率 종신토록 따랐네
坐危如癡 곧게 앉음은 어리석은 듯하고
趨直如矢 곧게 달림은 화살인듯 하니
將此身心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一聽罏錘 한결같이 가르침을 들었네.
晨夕摳衣 아침 저녁으로 옷깃을 여미고
有跂者隅 발돋움 하기는 선생의 자리곁이 었으니
進受退習 나아가 배우고 물러나 익혀서
窘慽不渝 곤궁하고 어려운 가운데 변함이 없었네
庸底于成 이에 성공에 이르고
庸底于達 이에 영달에 이르니
兩朝紆眷 두 임금의 사랑 녁넉하고
二品崇秩 이품의 벼슬이 높았네
論敬微言 경을 논한 은미한 말은
正本嘉謨 근본이 바른 아름다운 법이니
不負所學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고
令聞亦孚 아름다운 명성이 또한 미더웠네
不自爲有 스스로가 지고 있다 하지 않으니
有儼衣紳 의관이 엄연하고
燕閒之居 한가로이 지낼 때는
儀軌可親 위의가 친 할 만하였네.
存心玩養 마음을 보존하여 완미하고 함양함은
聖言在玆 성인의 말이 이에 있으니
疾病呻吟 질병에 신음 하면서도
此志不移 이 뜻이 변하지 않았네
是曰學則 이것이 학문의 법칙이고
其終如始 그 마침이 처음과 같았으니
師門有人 스승의 문하에 사람이 있고
吾黨有恃 우리 무리에 믿을 것이 있네
羡道有赫 묘도에 빛남이 있으니
屹彼穹碑 저 높은 비가 우뚝한데
琢之懿蹟 아름다운 행적을 새겨서
後人之貽 후인에게 끼치네.
완산 류치명(柳致明)은 삼가 서술하다.
金聖鐸(김성탁) 墓碣銘(묘갈명)
金聖鐸(김성탁) 肅宗 10年 甲子(1684)~ 英祖 23年 丁卯(1747) 64.
字 振伯. 號 齋山. 義城人 瓢隱 是榲의 손자. 泰重의 子
공은 처음 종숙 適庵(적암) 金台重(김태중)공에게 수학하고 17세에 葛菴(갈암) 李玄逸(이현일)의 문하에서 사사하였다. 뛰어난 자품으로 견식이 精明(정명)하여 四書(사서)와 性理學(성리학)을 배우고 덕성을 함양하여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仕進(사진)에 듯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니 문장과 학문이 성숙하여 어사 朴文秀(박문수), 부사 朴師洙(박사수), 감사 趙顯命(조현명) 등과도 친교가 깊었다.
영조 4년 戊申之亂(무신지란)에 창의에 가담하였고 감사 趙顯命(조현명), 어사 李宗白(이종백) 등이 수차 천거하였으나 나가지 않다가 영조 11년 을묘(1735)에 문과에 급제하니 영조가 召見(소견)하여 御製詩(어제시)를 하사하고 특히 6품직을 주어 經筵(경연)에 입시케 하였다. 그러나 영조 13년(1737) 교리로서 先師(선사) 葛菴(갈암)을 구하는 상소가 화가 되어 제주도와 광양으로 11년간 유배된 뒤 영조 23년에 配所(배소)인 광양 용선암에서 사망하였다. 몰후 48년만인 정조 19년(1795)에 訟寃(송원) 되었으나 당시의 당쟁의 심각성을 입증하는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공의 아들 九思堂(구사당) 落行(낙행)이 返葬(반장)하여 처음에 부의 동쪽 梨峴(이현) 묘향에 장사하였다가 순조 경인(1830) 청송군 차천면 병부리로 이장하여 고종 병자(1876)에 묘 앞에 齋山金先生之墓(재산김선생지묘)라고 비를 세웠다. 묘 앞에 석인의 조각이 특이하다.
【墓碣銘】
英廟至聖神。凡治獄。人皆自以爲無寃。惟黨人逞其私。寸霧欲以障天。於是乎如霽山金公者。抱寃而歸。後十年。聖心稍悟。命全釋之。至今上乙卯。上洞察非其罪。賜之以職牒。所以矜愍之殊至。葢繼先王志也。君子曰。無憂者。其惟英廟乎。雖黨人。其如日月之明何哉。公諱聖鐸。字振伯。號霽山。在麗有太子詹事龍庇者。封義城君。金氏因以爲貫入。聖朝有諱璡。號靑溪。有五子。長克一。號藥峯。與弟龜峯守一,雲巖明一,鶴峯誠一,南嶽復一。俱遊退陶門。仍父子幷享泗濱景德祠。藥峯無子。以龜峯之子澈爲嗣。成均進士。是爲公高祖。曾祖諱是榲。號瓢隱。崇禎丙子以後。徵辟不起。英宗贈以司憲府執義。祖諱邦烈。成均生員。考諱泰重。妣順天金氏。府使允安之孫。處士如萬之女也。公年十七。從師于錦水之陽。講明四子,洛閩之書。知爲己而不屑爲人也。以家貧親老。不得已傍治擧子業。嘗赴增廣覆試。聞京師有痘忌。半道而歸。公親友時在京。爲公悶之。圖陳試於禮部。而以公時有從姪喪。措辭以重服。公曰。國法。非朞服則不許陳試。今以小功。爲朞年。是欺君也。爲書責親友。親友亦摧謝不已。乙巳。罹父艱。以太夫人在堂。雖承順爲心。飭家人。無敢近草木之滋。柴毁若不可支。密庵李公栽。屢貽書戒之。終三年不變。戊申。亂賊起嶺南下道。按撫使朴師洙。亟以書請公商議討賊方略。公立與柳慵窩升鉉,權江左萬及鄕中諸公。馳見按撫使。因赴倡義所。爲文諭四方。辭義嚴正慷慨。將指日赴鬬。俄而賊破捷報至。乃止。庚戌。嶺南按覈使吳公光運。委來訪。禮貌甚恭。及還朝。以公首薦曰。金玉其人。是年。除英陵參奉。一謝卽歸。壬子。豐原君趙公顯命。觀察嶺南。又首薦公。其薦牘曰。金聖鐸溫恭謙退。務自鞱晦。而文學之該博。識解之精明。當爲嶺士之翹楚。其年紀雖少。名譽已盛。而一番收用之後。更不撿擧。置之相忘之域。揆以搜剔明揚之道。已極慨然。自今勿循前套。不住撿用。使道臣守令。敦勸以起。時時召見。或講問經義。或詢訪治道。如明宣故事。則巖穴之士。易於承當。庶有旁招之美矣。秋。除靖陵參奉。一肅又歸。後數月。豐原君白上曰。頃者。金聖鐸爲肅命入京。謂有母病而去。如此之人。只授寢郞。豈激勸之道乎。癸丑。因本道監賑御使李宗白別薦。命付龍驤衛副司勇。當是時。公年五十矣。聲聞日盛。自韋布至公卿大夫。莫不願一見之。雖當路名宰。奉使踰嶺。無不躳造以致禮焉。冬。除司畜別提。命道臣勸駕。及詣闕肅命。亟賜引接。問曰。嶺南自先正以來。必有遺訓傳授者。勿辭以對。公辭謝訖。對以大學一部。自格致至治平。其要不出誠敬二字。上曰。先儒說敬字之義多矣。未知何說爲要。對曰。程子曰。主一無適。又曰。整齊嚴肅。謝上蔡以常惺惺言之。尹和靖以其心收斂。不容一物言之。先儒敬字之訓。有此數者。然主一無適。常惺惺不容一物。皆就心地上說。有難摸捉。若論其依據處。則整齊嚴肅。尤似親切矣。上又問政事之要。以孟子之省刑罰薄稅斂。孔子之君君臣臣父父子子。仰對焉。上皆稱善焉。後一日。上召見問曰。爾以痘忌。當歸矣。所欲陳者。陳之。對曰。平生所學。唯誠意正心四字。願聖上益加實踐焉。上又稱善。賜臘藥四種曰。此乃及於經幄之臣者也。又除司僕主簿。辭遞。乙卯春。除丹城縣監。又辭遞。四月。中慶科增廣鄕解。爲赴覆試入京師。上召禮圍主試者。敎曰。嶺南賢士。今當入試圍。果能不遺珠否。及坼號。公果捷矣。上卽除司饔主簿。俾濟旅次匱乏。放榜日。陞成均典籍。命戴花入侍。親賜御製詩一絶曰。昨日嶺南貢擧人。今辰頭上桂花新。豈徒於爾榮親喜。爲我金門文學臣。命前席次韻以進。當是時。榮光異渥。震耀一世。後數日。拜司憲府持平。命帶職歸覲。五月。陳辭疏。上下數千言。論時弊。勉聖學。字字剴切。上嘉納。不許遞。又上十條疏。下溫諭。仍命道臣勸駕。俄付副司直。丙辰。以司諫院正言。陳辭疏末。論朝廷黨論之沉痼。鄕曲士習之不正。生民饑困之狀。賦稅濫重之苦。因及慶尙道伯農時築城之弊。丁巳。移工曹佐郞兼知製敎。俄入瀛選。拜弘文館副修撰。卽移校理。時眷注日隆。若將朝暮大用。媢嫉之徒。傍伺陰囑。於是湖嶺儒生李海老,申等。旣蓄怒公前疏所云鄕曲不正等語。從以化身媚悅於當路。投疏構誣。辱及公師門。公疏辨曰。臣師李玄逸。至今名在罪籍者。以己巳秋應旨疏中一句語。而若以全疏本意觀之。實欲爲聖母致尊安之道。爲先大王盡處變之義也。己卯之賜環。辛巳之全釋。庚子之復官。雖或行或寢。而旣蒙天鑑之下燭。又有相臣之平反。則其本情之無他。於此。亦可見矣。况玄逸當己巳初。遠在鄕邑。其以司業被召。在於四月。行到廣州。爲坤聖陳疏。而見阻喉院不得呈徹。則其謂之主張凶論。不亦寃乎。臣知殿下於己巳之事。付之先天。而竊自痛以臣之故。辱及師門。不避猥越。冒犯忌諱焉。疏到政院。承旨柳儼。別作啓辭。索性謀陷。以爲驚動聖聽之計。偕公疏入徹睿覽。上命金吾逮捕公嶺外。及至栲掠以訊。氣息奄奄。執杖卒亦憐之。欲使公爲氣窒狀。葢罪人氣窒。則停刑例也。公終不肯焉。嗚呼。黨人之抉摘成案。陷公於死地者。不過先天二字。而先天者。久遠之義也。公之意。不過以爲己巳距今爲半百年矣。聖孝不匱。不欲聞伊時事云爾。何嘗有他意也哉。豐原君疏救公被罪削。久之。罪得解。又疏辨益力。於是乎有㫌義安置之命矣。縲紲凡五朔。慘毒備至。乃能出圜扉。夷然渡海。人皆歎異之。絶島無書冊。唯心經一部,韓碑文一冊隨來。與子樂行。日講討爲事焉。明年夏。命量移光陽縣。庚申冬。太夫人下世。用遺衣設位攀號。上聞之。特許歸葬。辛酉春。始奔哭安東舊第。虞祔畢。卽還配。及祥日。設饌以闋服。乙丑。以臺啓。移配康津縣薪智島。明年春。還配光陽。公哀毁以來。柴削轉甚。兼以水土瘴癘。病不可爲矣。以丁卯四月三十日。終于縣北龍仙庵。距其生肅宗甲子。享年六十四。前一日。作詩十絶。與子樂行。皆勉勵家學之意。仍謂樂行。吾因病裏看易。略有所理會。恨前程迫窄。不能究業也。疾革。使童子誦古書於前。無一言及於家事。以櫬從水路還。用十月。窆于府東梨峴卯向之原。公資質甚美。不假修爲。而持身之廉雅。範家之謹嚴。自然皆中度。在母夫人側。諧謔嬉戲。必要得歡心。與弟警鐸。相好如手足。挈來孤姪之居遠者。同室以居。撫愛如己出。處宗族。遇鄰里。恩意誠信。無不使人感恩懷德焉。公自幼少時。以古人自期。每語學者曰。初學之士。當以立志爲先。志之高下而所就之大小判焉。志之剛怯。而所業之進退係焉。同爲山也。而志於百仞則百仞。志於十仞則十仞。同行道也。而志於萬里則萬里。志於百里則百里。人之爲學。亦若是而已。以科業爲志者。科業而止耳。以文章爲志者。文章而止耳。若夫進而志於叔孫穆子所謂太上者。則其爲顔孟爲程朱。孰能禦之。夫志。我之志也。我欲立之。斯立而已矣。何與於人。何求於人乎哉。公與顧齋李公槾。相許爲道義之交。凡天人性命之原。訓詁名狀之義。肯綮疑晦。往復論難。往往有發前人之未發者。朞三百十九分度之七。先儒之說備矣。而猶有所未竟者。退溪先生通分納子之法。載之傳疑。而其逐段布籌。錯綜微妙。有難領會。公得一法。推明分析。作爲要訣。使學者。易於開悟。閏法。其詳已具於書傳集註,啓蒙小註。而初學每有紛糾難解之患。公論其大綱。而於氣朔分齊處。特爲詳釋。令見者易知。以至地志,卜筮,醫藥,兵律之類。無不究解。嘗以兼春秋。入侍。上顧諸臣曰。金聖鐸。於古事出處。應對無滯。雖幽經僻書亦然。果是經學之士也。公所著文凈寫爲八冊。後之覽者。亦可以知其爲仁義之言也歟。公配務安朴氏。武毅公毅長之後。通德郞震相之女。有二男。長卽九思堂樂行。以文學行誼。爲士林所宗。次霽行。女適李東英。樂行無子。以霽行子始全爲嗣。四女壻。張壽鶴,李宇弼,朴漢章,柳允文。霽行三男。長始翕。次卽始全。次始畬。三女壻。李鼎凝,李宇鳴,李憲錫。生員。李東英一男。萬運。文科正言。曾孫男女不盡錄。當宁乙卯。孫始全。伏輦路鳴寃。上嘗語濟恭曰。抉摘文字。非聖世事。予於金聖鐸。知其寃也。至是。特給弘文館校理職牒。以判付。諭始全若曰。渠祖行誼。厚被先朝恩數。渠父行誼。亦所藉稱。未及收用於生前。是爲欠事也。兩世華衮之褒。至及於泉臺幾十年之後。此千古罕有之恩。後孫與士林相與收淚請銘。銘惡得以已乎。銘曰。
君子知命。順受天而已。蒲輪玉署。斯受之矣。鰐海囚山。斯任之矣。聖經在手。陶山在邇。榮辱萬變。我心則一。死以爲寧。洛水幽咽。華誥載還。嗣聖之恩。公靈血泣。于彼九原。爲善勿怠。咨爾嶺人。公議之定。無待百年。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奎章閣檢校提學蔡濟恭。撰。
<해>
【묘갈명】
여러 왕조를 거쳐 영조에 이르러, 모두를 옥사로 다스리니 사람들은 다 같이 서로 원한을 사지 않으려하는데 오직 黨人(당인)들만은 그 사사로운 욕심이 과하였다. 작은 안개로 하늘을 가리려하니 바로 齋山(재산) 金公(금공)과 같은 자이다.
원한을 품고 돌아오는데, 10년이 지난 뒤에야, 聖君(성군)의 마음이 점점 깨달아, 석방하라 명 하였다. 今上(금상)은 을묘년에 이르러서 그것을 죄가 아니라고 내다보고, 직책 까지 내리시니, 소이 가련하게 여기사 내리는 것이며, 대체로 선왕의 뜻을 이어 가려는 뜻이기도 하다.
군자가 말하기를 「근심이 없는 자, 그것은 오직 英祖(영조) 뿐이다. 비록 黨人(당인)이 일월과 같이 밝다고 한들 그것은 어째서인가?」하였다.
공의 휘는 聖鐸(성탁)이고 자는 振伯(진백)이며 호는 霽山(제산)이다. 고려시대에 太子詹事(태자첨사)인 龍庇(용비)라는 분이 있었는데 義城君(의성군)으로 책봉되니 金氏(김씨)는 그로 인해 義城(의성)을 貫鄕(관향)으로 하였다. 조선조에 휘 璡(진)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호는 靑溪(청계)이고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장남은 克(극)이고 호는 藥峯(약봉)이다, 그리고 동생 龜峯(구봉) 守一(수일),雲巖(운암) 明一(명일),鶴峯(학봉) 誠一(성일),南嶽(남악) 復一(부일)인데 모두 陶山(도산) 退溪(퇴계) 문하에 유학하였다. 그리하여 父子(부자)는 모두 泗濱(사빈) 景德祠(경덕사)에 배향되었다.
藥峯(약봉)은 자식이 없어 龜峯(구봉)의 아들 澈(철)을 嗣子(사자)로 삼았으며 성균관 진사인데,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 是榲(시온)으로 호는 瓢隱(표은)인데 崇禎(숭정) 병자년 이후 인군이 불러도 나가지 않아 英宗(영종)이 司憲府(사헌부) 執義(집의)로 증직시켰다. 조부의 휘는 邦烈(방렬)로 成均生員(성균생원)이다. 부친의 휘는 泰重(태중)이다.
모친은 順天金氏(순천금씨)이며 부사 允安(윤안)의 손자인 처사 如萬(여만)의 딸이다.
공의 나이 17세일 때 스승을 따라 錦水(금수) 남쪽으로 갔는데, 네 사람이 朱子(주자)의 책을 講明(강명)하여, 자신을 알고, 다른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쁜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정이 가난하여 老親(노친)을 봉양하기 위해 부득이 유학을 포기하게 되었다.
增廣覆試(증광복시)를 치러 가려는데, 경성에 천연두가 만영한다는 소문을 듣고, 도중에서 다시 돌아왔다. 그때 경성에 있던 공의 친구들은 공을 위해 걱정을 하여, 禮部(예부)에 시험을 치도록 계획 했는데, 마침 그때 공의 종질이 죽어서, 시험을 그만두고 服(복)을 입었다.
공이 말하기를 「국법에, 즉 朞服(기복)이 아니면, 시험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는데, 지금이 小功(소공)인데 이를 耆年(기년)이라 하는 것을 바로 인군을 속이는 것이다.」 하며 글을 써서 친구들을 책망하니 친구들도 사과하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을사년, 걱정 하던 중에 부친이 돌아가시고, 노모가 집에 살아 있으니, 비록 진심으로 모친의 명을 따라 집안사람을 가르치고 집안에 있어야 하지만, 집 가까이 가지 않아 집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사람문은 헐어 지탱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密庵(밀암) 李公(이공)이 꾸짖으며 여러 번 글을 써서 주의를 주었건만, 3년 동안 끝내 변하지 않았다.
무신년, 도적들이 영남 아래 도에서 난동을 일으키니, 안무사 朴師洙(박사수)는 급히 글을 써서 적을 토벌하는 방책을 상의하고자 공을 초청하였다. 공은 慵窩(용와) 柳升鉉(류승현), 江左(강좌) 權萬(권만)과 고을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달려가서 按撫使(안무사)를 만나고, 倡義(창의)하는 곳으로 가서, 정의를 엄정이 주장하고, 선비들이 의기가 넘치며 감격하도록 글을 써서 사방에 알리고, 날을 정하여 싸우로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적을 격파하고 이겼다는 소식이 들려와 이를 중지하였다.
경술년, 영남 안핵사 吳光運(오광운)공이, 부탁을 받고 찾아와, 매우 공손하고 예절 바르게 공을 만나보고, 조정으로 돌아가, 공을 가장 먼저 천거하며 「그는 金玉(금옥)과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해 英陵參奉(영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사임 하고 곳 돌아 왔다.
임자년。豐原君(풍원군) 趙顯命(조현명)이 영남을 관찰하고, 또 가장 먼저 공을 천거하였는데, 그 천거하는 글에 「聖鐸(성탁) 金溫(금온)은 공손하고 겸손해서 벼슬길에서 물러나, 힘써 자기를 감추려 하지만, 학문이 該博(해박)하고, 아는 바가 자세하고 밝으며, 당연 영남 선비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며 그 나이가 紀年(기년)이지만 그래도 젊고, 名譽(명예)는 이미 대단히 성하다.」하니 첫 번으로 수용한 뒤 다시 조사하지도 아니하고 거두어서, 서로 잊어버린 지경에 두었는데, 후에 다시 바르게 밝혀 찾아 내 벼슬길에 오르도록 했다.
이미 정계의 부패를 분개하며 이야기를 다하고, 지금부터는 전사는 쫓지 아니하고, 앞으로 계속해서 부정을 단속하고 바로 起用(기용)하게 하니, 사또는 신하로서의 명을 지켜, 힘써 권해서 새 풍조가 일어나게 하였다.
때때로 공을 불러서 만나 보며, 혹 강의를 하게하고 경서의 뜻을 물기도 하고, 혹 治道(치도)를 묻기도 하였다. 지나온 故事(고사)에도 밝았으며, 즉 속세를 떠나 깊은 산중에 은거하는 사람같이 쉽게 일을 잘 처리하고, 여러 사람을 두루 불러 그들엑 좋은 영향을 끼쳤다.
가을에 靖陵參奉(정릉참봉)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감사하고 또 돌아 왔다.
몇 달 뒤 豐原君(풍원군)이 상삼에게 「근래 사람 金聖鐸(김성탁)을 入京(입경)하라고 엄숙하게 명을 내려도, 모친의 병을 때문에 가야 된다고 하니 이런 사람에게, 다만 寢郞(침랑)을 제수하심이 어떠하리오. 이는 어찌 과격하게 권하는 것이라 하리오,」 하였다.
계축년, 본도를 살피고 구흘하기 위해 어사 李宗白(이종백)이을 別遷(별천)되어 龍驤衛副司勇(룡양위부사용)로 명을 받아서 오니, 그 당시 공의 나이 50이었고 명성을 날로 성하였다.
갓옷을 입고 公卿大夫(공경대부)를 찾아 가서, 한번 만나 보기를 원하니 비록 권력이 있는 유명한 제상이지만 몸소 나가 예로서 받들어 만났다.
겨울에 司畜別提(사축별제)를 제수 받고 또 道臣勸駕(도신권가)로 명이 내렸으며, 또한 대궐에 가서 임금의 명령에 사례하고자 임금 앞에 나아가 공손히 절을 하였다. 상감은 사랑을 주시며 응접하여 묻기를 「영남은 先賢(선현) 이후 반드시 遺訓(유훈)을 전수 받은 것이 있을 턴데 사양하지 말고 대답하라.」 하신다.
공은 사례하며 말하기를 大學(대학)의 일부로 대답하는데 「自格物致知(자격물치지) 至治國平天下(지치국평천하)이며 그 요점은 誠敬(성경) 두 글자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습니다.」하니. 상감이 또 「先儒(선유)가 말하는 敬字(경자)에는 뜻이 많아 잘 알지 못하니 어떻게 요약에서 말할 수 있나.」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정자 말에 “마음을 한 곳으로 기울여 잡념을 없이하라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장엄하고 숙연하게 정돈하여 용의를 가지런히 하고, 상감에게 감사하고, 점을 처서 항상 슬기로운 말을 하며 그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려 처신을 장중하게 하고, 한마디도 남의 험담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바로 先儒(선유)가 말한 敬字(경자)의 교훈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행하는 것이 바로 主一無適(주일무적)이고 常惺惺不容一物(상성성불용일물)인데, 모두가 心地(심지)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心地(심지)를 더듬어 찾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데 만약 그 근거로 하는 것을 논한다면 즉 整齊嚴肅(정제엄숙)라고 더욱 친절하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또 상감이 정사의 요결을 물으니, 맹자가 말한 형벌을 주리고 세금을 가볍게 하는 것을 말하고, 또한 공장가 말한 인군은 인군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우러러 보며 대답을 하였다. 상감은 모두를 듣고 좋다고 칭찬하였다.
하로 뒤, 상감은 또 불러 묻기를 「그대는 천년두가 싫어 그때 돌아갔다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을 해 봐라.」 하니, 대답기를 「평생 배운 바가 오직 誠意正心(성의정심)의 넉자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그 말을 더욱 실천을 하시기 바랍니다.」하니 상감은 좋다하며 칭찬하시고 臘藥(납약) 4종류를 하시며 「이것은 經筵(경연)을 하는 신하에게 내리는 약이다.」하시며, 또 司僕主簿(사복주부)로 제수하였는데, 벼슬을 내 놓고 물러났다. 을묘년 봄, 丹城縣監(단성현감)이 제수해지자 또 벼슬을 내 놓고 물러났다.
4월에 慶科(경과)增廣(증광) 鄕解(향해)에 합격하고 覆試(복시)를 보려고 경성에 들어가니, 상감이 예의를 주관하는 시험 주제관은 불러 말씀하시기를 「영남의 현명한 선비가 이번에 시험을 치러 올 것이니 감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숨은 賢者(현자)가 되지 않게 하라.」하였다.
그리하여 시험 후 호를 부르니 공은 과연 합격자 중에 있었다.
상감은 즉시 司饔主簿(사옹주부)를 제수하고 여관에 묵도록 조치를 취한 다음, 방을 발표하는 날, 成均典籍(성균전적)으로 승진시켜, 머리에 꽃을 꽂고 입시하라 명하시고, 친히 御製(어제) 絶句(절구)을 지어 이르기를 「영남의 사람을 천거 받으니, 오늘 머리위에 桂花(계화) 새롭구나. 어찌 그대 부모만의 기쁜 일인가, 우리 빛나는 조정의 학문하는 신하로다.」하며 앞자리에 오라 명하시고 詩(시)를 내리니, 그 당시, 그 영광은 더욱 두터워 시대를 뒤흔들었다.
몇 일 뒤,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을 배수 받고 직책을 띠고 돌아와 가족을 만나 보았다.
5월에 사임하는 소장을 올려. 상하에 걸쳐 수천 마디 말로, 그 당시의 폐단을 논하고, 성인이 가르친 학문 중 특히 유학(儒學)을 열심히 배울 것을 논하는데, 구절마다 적절하고 이치에 알맞아 상감은 기쁘게 거두어들이고 사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상하에 대한 十條疏(십조소)를 올려, 야래로 온화하게 깨우치도록 道臣(도신)에게 명하도록 권하였다.
갑자기 副司直(부사직)에 임명되었다. 병진년, 司諫院正言(사간원정언)으로서, 상소 끝에 말하기를, 조정이 고질적인 당론에 깊이 빠져 들어감을 논하고, 시골 벽촌의 부정한 선비들의 나쁜 습성을 논하였고, 민생의 굶주리고 괴로운 상항을 논하였으며, 세금을 일없이 무겁게 매기는 고통을 논하였고, 인하여 경상 감사가 농사철에 성을 쌓는 부역을 부과 하는 폐단을 논하였다.
공조좌랑겸지제교로 옮기고 갑자기 조정에 들어가 선발되어 홍문관부수찬을 배수하였으며, 또한 곳 교리로 옮겨갔다.
그때 날로 융성해가는 것을 시기하며 노려보던 무리들이, 밤낮으로 높이 기용되는 것을 시기하는 무리들에게 음해하도록 사주하니, 이에 영호남 유생가운데 李海老(리해로)라는 자 등이, 전에 공이 소에서 말한 鄕曲不正(향곡불정) 등의 말을 고깝게 생각하고 노여움을 품고 있다가, 태도를 바꾸어 중요한 지위에서 권력을 잡은 자에게 아첨하며, 무고하게 꾸며서 만든 소장을 올려, 공과 공의 師門(사문)을 욕하였다.
그러자 공이 소를 올려 변론하기를 「신의 스승인 李玄逸(이현일) 공은 지금 罪籍(죄적)에 이름이 있는 분으로, 기사년 가을부터 소 가운데 한 구절을 보시고 말씀하신 교지를 받들어 지금까지 지내 오고 있는데, 만약 신이 올린 전체 疏(소)의 본뜻을 본다면 실로 국모를 존경하고 편안하게 하려고 하는 도리이며, 돌아가신 先王(선왕)을 위한 義(의)를 다해 변화하는 세태에 대처하는 것을 논한 것이 옵니다.
기묘년에 사면되어 다시 돌아오고, 신사년에 전부 석방되어 경자년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혹은 행하기도 하고 혹 쉬기도 하였지만, 이미 天鑑(천감)이 下燭(하촉)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한 相臣(상신)의 그늘져 어두운 곳도 있지만 즉 인군을 위한 충성된 그 본심에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님이 여기에서도 역시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李玄逸(이현일)은 기사년 초에 鄕邑(향읍)에서 멀리 있었고, 從四品(종사품)으로 소집되어 4월에 廣州(광주)에 도착하여 坤聖(곤성)을 위하여 소장을 올렸으니, 그것을 보고 喉院(후원)은 부득이 그 소장으로 주장하는 바를 밝혔으나, 그 이르는 주장은 凶論(흉론)이라 하여 원통하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신은 전하가 기사년의 일을 先天(선천)에 일로 붙인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臣(신) 때문에 몰래 아파하심도 압니다. 욕이 사문에 미치고, 또한 함부로 달아나 피할 수 없으며, 죄를 범해 조상의 휘자를 더럽히지 않아야 하는 것도 또한 압니다.」하였다.
소장이 승정원에 도착하자 승지 柳儼(류엄)은 별도로 啓辭를 만들어 모함에 빠트리려고 한 것을 찾아서 올리니, 그것을 인금이 듣고 뜻밖의 일에 놀라 공도 함께 들어온 소를 철저히 살펴보고, 상감이 명하기는 金吾(금오)를 체포하라 하고, 공을 嶺外(령외)로 보내 형틀에서 심문을 하라 하니 공은 고문에 숨이 곧 끊어지려고 하여 형을 집행하는 사령도 가엽게 여겨서, 고을 氣窒(기질)한 상태로 하여 하였다. 대체로 죄인이 氣窒(기질)하면 형을 정지 하는 것이 예이기 때문이다. 공은 끝내 죄를 인정하지 아니했다.
오호! 黨人(당인)이 숨겨둔 것을 성안하여, 모함으로 공을 死地(사지)로 몰아넣는데, 불과 先天(선천)이라는 두 글자로 트집을 잡았다. 先天(선천)이라는 말은 크고 멀다는 뜻이다. 공이 말한 뜻은, 불과 己巳(기사)에서 거슬러 약 반백년을 말하는 것이고, 서군에게는 효행을 본받아 효자가 잇달아 나온다는 뜻인데, 그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때 말 한 것에 어찌 다른 듯이 있겠는가.
豐原君(풍원군)이 공을 구하고자 죄를 삭감하려는 소를 올려 오랜만에 죄가 풀리고, 또한 소를 올려 힘써 변호를 해 이에 旌義(정의)에 가두어 두라는 명이 내렸다. 감옥에 갇힌 지 모두 5개월 참혹한 杖毒(장독)이 퍼져도, 능히 문밖에 나갈수는 있어, 여사로 바다를 건너가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다고 놀랐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는 오직 心經(심경) 일부와 韓碑文(한비문) 한 책이 만 있었다.
아들 樂行(낙행)과 함께 지내며, 날마다 강의를 하고 시사에 대해 토론도 하였다. 다음해 여름, 멀리 귀양 보낸 공의 죄를 減等(감등)하여 가까운 光陽縣(광양현)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렸다.
경신 년 겨울, 노모가 세상을 하직하자, 남기신 옷가지로 빈소를 만들어 울음을 터트리니, 이를 상감이 듣고, 특별히 집으로 돌아가서 장사를 치르도록 허락을 하셨다. 신유년 봄, 비로소 안동 엣 집에 달려가 곡을 하였다. 虞祭(우제)와 祔祭(부제)를 모두 마치고 즉시 유배소로 돌아와 大喪(대상) 날이 되자, 떡을 진설하고 闋服(결복)하였다.
을축년, 臺啓(대계)가 내려, 배소를 康津縣(강진현) 薪智島(신지도)로 옮겼다. 다음 해 봄, 다시 光陽(광양) 배소로 돌아 왔다.
공은 모친의 상을 당해 몸이 몹시 양해진데다 풀독이 심해지고, 거기에다 풍토와 산중에 독기가 심해서 병은 낫지를 않아 결국 정묘 4월 30일, 현의 북쪽 龍仙庵(용선암)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태어난 숙종 갑자년에서부터 64년만이다.
죽기 하로 전에 시 十絶(십절)을 지어, 아들 樂行(낙행)에게 주었는데 모두가 부지런히 家學(가학)을 힘써 권장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樂行(낙행)에게 이르기를, 「내가 병이 들어 점을 처 보고, 대략 이치에 맞는 답을 얻었는데, 원통하게도 앞날이 얼마 남지 않는 같아 일을 더 오래 할 수 없을 같다.」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동자를 시켜 앞에서 古書(고서)를 읽게 하고, 한 마디도 家事(가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棺(관)은 水路(수로)를 이용해서 돌아오니, 열 달이나 걸렸는데, 안동부 동쪽 梨峴(이현) 묘향 언덕에 입관하였다.
공의 천성은 매우 아름다워 거짓 없이 학문을 닦아 몸가짐을 우아하고 청렴하게 하여, 家法(가법)을 謹嚴(근엄)으로 하니, 자여히 모두가 법도를 지켰다.
모친이 살아 계실 때는 옆에서 농지거리로 기쁘게 해드리고, 꼭 환심을 사게 하였다. 동생 警鐸(경탁)과는 서로 수족같이 좋아하고, 멀리 사는 외로운 조카들을 가까이 불러서 챙겨, 같은 방에 함께 살며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宗族(종족)을 마을에서 만나면, 어여삐 여기며 성실하게 대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에 대해 고맙게 여기고, 덕을 느끼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
공은 얼릴 때부터 스스로 古人(고인)의 덕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늘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은, 먼저 뜻을 세워야 하고, 세운 뜻의 높고 낮고가 바로 크게 이룩하나 작게 이루나 하는 것을 판가름 하게 된다. 뜻이 굳나 약하나가 하는 것이 진퇴와 큰 관계가 있으며, 마치 산에 오르는 것과 같이, 백 길을 오를 뜻을 갖고 있으며, 백 길을 오르게 되고, 열 길을 오를 뜻을 두면 열 길을 오르게 된다. 길을 가는 것과도 같다. 뜻을 만리에 두면 만리를 가게 되고, 뜻을 백리에 두면 백리를 가게 된다.
사람이 학문을 하기 위해서도 역시 이와 같다.
과거에 뜻을 둔자는, 과거 합격으로서 그치고, 문장에 뜻을 둔자는 문장을 잘하게 되면 거기서 그친다.
만약에 穆子(목자)의 叔孫(숙손), 소위 太上(태상)에 나가기로 뜻을 세우면, 즉 顔子(안자) 孟子(맹자) 같이 되고, 程子(정자) 朱子(주자)같이 되며, 능히 누가 막으랴 해도 막을 자가 없다.
대저 뜻이란 내가 세운 나의 뜻이다. 내가 뜻을 세우려면 이와 같이 크게 세워야 한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며, 어찌 다른 사람에게서 구한단 말인가] 하였다.
공은 顧齋(고재) 李槾(이만)공과 더불어, 서로 터놓고 道義(도의)로 사귀었다.
모든 하늘과 사람의 性命(성명)의 근본은, 경서 등 고문의 자구(字句)를 해석하므로 서 그 뜻을 찾아 알 수가 있다.
사물의 가장 긴요한 곳에 의문을 갖고, 반목해서 어려운 곳을 탐구하여 옛 사람도 도달 못한 경지에 도달하여, 319분 7도인 돌시 만에 先儒(선유)가 설한 것을 다 이해 해야 한다.
그리하여 미처 그 경지에 도달 못 한다면, 退溪先生(퇴계선생)은 納子(납자)의 법으로 나누어 통하게 하니, 이를 염두에 두고 의문을 갖고 그것을 뒤쫓아 한다.
산가지를 펼쳐 잘 살펴, 여러 가지 뒤 석인 像(상)의 미묘함을 분서하고 읽어서, 어려움이 있어도 깨달아하며, 그리하여 공은 한 가지 방법을 얻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분명하게 분석하여, 사물을 예견하는 중요한 비결을 만들어, 후학들에게 배우도록 하였고, 주역에서 깨닫게 하여 이루어진 閏法(윤법)은 이미 상세하게 書傳(서전) 集註(집주)에 있고 또 啓蒙(계몽) 小註(소주)에도 있다.
그러나 초학자는 매번 이해(利害)나 주장이 뒤얽혀서 복잡한 점이 많고 어지러운 것이 있어 난해하여 고통스러워했다. 공은 그 大綱(대강)을 논하여 그 결과 氣朔(기삭)이 같고 다른 곳에는, 특히 상세 한 주석을 하여 보는 자가 쉽도록 하여, 地志(지지),卜筮(복서),醫藥(의약),兵律(병률) 같은 것도 연구해서 해석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겸해서 春秋(춘추)를 늘 연구하여 입시하니, 상감이 많은 신하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金聖鐸(금성탁)이라는 자는 古事(고사)의 출처에 대해 막힘없이 대답하고, 비록 잘 알려져 있는 않는 경서나 별 가치가 없는 책에도 역시 잘 통하고 있으니, 과연 經學(경학)을 공부한 대단한 선비이다.」하였다.
공은 저술한 글을 깨끗하게 정서하여 8권으로 만들어 뒷사람이 보기 쉽게 하였으며, 거기에도 역시 仁義(인의)를 행하라는 말을 강조 한 것이 엿보인다.
공의 배위는 務安朴氏(무안박씨) 武毅公(무의공) 毅長(의장)의 후손이며 통덕랑 震相(진상)의 딸이다. 아들 둘이 있는데 장남은 九思堂(구사당) 樂行(악행)으로 文學(문학)으로 행세하였으며, 사림의 조종이었다.
차남은 霽行(제행)이다. 딸은 李東英(이동영)의 처가 되었고, 樂行(악행)은 자식이 없어 霽行(제행)의 아들 始全(시전)으로 대를 이었다. 네 딸 사위는 張壽鶴(장수학),李宇弼(이우필),朴漢章(박한장),柳允文(류윤문)이며, 霽行(제행)의 세 아들은 장남이 始翕(시흡)이고, 다음이 곳 始全(시전)이며, 그 다음이 始畬(시여)이다.
세 딸의 베필은 李鼎凝(이정응),李宇鳴(이우명),李憲錫(이헌석)이고, 생원 李東英(이동영)의 외아들은 萬運(만운)으로 文科문과에 급제하여 正言(정언)이었다. 그 외 중손 남녀는 다 기록 할 수가 없다.
을묘년 소자 始全(시전)이 큰길에 엎드려 원통하게 우니, 임금이 일찍이 蔡濟恭(채제공)에게 말하기를 「덕이 있는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일이 아닌 것에 관한 글은 삭제하라.」 하였다 한다. 蔡濟恭(채제공)은 「소신은 金聖鐸(금성탁)의 그 원통함을 압니다. 」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弘文館校理(홍문관교리) 직첩이 내려 임금이 決裁(결재)를 하고, 전모를 밝히며 말하기를 「조부는 왕조를 위해 옳은 일을 하였고, 先朝(선조)의 은혜를 두터이 입었다. 부친의 행위도 옳으나, 역시 결백함을 변명 하는 것이, 미치지 못해 생전에 그 뜻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바로 이것이 흠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 두 세대가 좋고 빛나는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에 지하에서 몇 십년 뒤에 봐도 천고에 드문 은총을 입게 될 것이다.」하였다.
후손과 사람은 함께 눈물을 닦고 명을 청하니, 어찌 명을 쓰기 그만 둘수가 있겠는가.
명에 이르기를
군자는 천명을 알고 君子知命
하늘의 뜻을 순순히 받아 들여 順受天而已
蒲輪(포륜)오 홍문관에 들어 蒲輪玉署
그와 같은 은총 받았다네. 斯受之矣
바다의 큰 악어 산속에 가쳐 鰐海囚山
운명 이렇게 맡겨지니 斯任之矣
성스러운 경서 손에 있고 聖經在手
陶山(도산)은 가까우나 陶山在邇
榮辱(영욕)은 만변하여도 榮辱萬變
내 마음은 오직 한결같아 我心則一
설서 죽어도 평안하네. 死以爲寧
落水(낙수)도 그윽히 우는데 洛水幽咽
꽃 이고 고하고 돌아오니 華誥載還
대를 이은 성상의 은혜 嗣聖之恩
공의 혼 피눈물로 우는데 公靈血泣
저 쪽 구천의 세상 서도 于彼九原
착한 일 하기 개을리 말게 爲善勿怠
그대 영남 사람 탄식하며 咨爾嶺人
공의로 정한 바 公議之定
백년을 기다리지 않았네. 無待百年
。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 겸 령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
관상감사,규장각검교제학 蔡濟恭(채제공) 찬。
金邦熙(김방희) 墓碣銘(묘갈명)
金邦熙(김방희) 仁祖 11年 癸酉(1633)~ 肅宗 40年 甲午(1714) 81.
字 士明. 義城人 瓢隱 是榲의 六子.
공의 묘는 임동면 상박곡에 있다. 철종 9년 무오(1858)에 건립한 蒼雪(창설) 權斗經(권두경) 찬, 족 후손 鎭坤(진곤) 글씨의 묘전비의 전면에는 「折衝將軍行龍釀衛副護軍(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이라고 각자 외어 있다. 비석의 현식이 후기의 屋蓋形(옥개형)으로 된 冠蓋形(관개형)으로 장중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공은 대사간 金邦杰(김방걸)의 아우로서 윤리를 존중하고 혀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壽職(수직)으로 副護軍(부호군)에 제수되었다.
【墓碣銘】
副護軍聞韶金公墓碣銘
徵士瓢隱先生金公有八男七女。第六郞曰護軍公。母豐山金氏。持平奉祖之女。繼母英陽南氏。處士振維之 女。公登大耋以卒。旣葬。妹壻永嘉權斗經卽碣而銘之曰。
金貫聞韶。譜始龍庇。典書居斗。于安東徙。粤至萬謹。居川前里。璡惟德人。五子齊美。司成克一。以姪澈嗣。實守一出。入承宗祀。生諱是榲。道尊節偉。龍卧一代。蹈海之士。寔擧七女。八丈夫子。公居第六。邦照其諱。字曰士明。生而失恃。鞠于王母。長有幹器。篤于倫理。勇于風義。因心卽孝。事南繼妣。一如所生。人不知異。妣發痘毒。兄弟拘忌。目睫不交。數月扶侍。躬手煑調。粥饘藥餌。嚴冬澡浴。膚革瘃起。南後省歎。特與一婢。奉祧追遠。墳庵建置。 治石冶金。揭阡表隧。昔所未遑。待公克遂。凡厥家門。吉凶大事。衆手仰成。繄公是倚。族兄豁翁。三世荐逝。孤幼僅餘。人所畏避。公任喪葬。若戚在己。南夫人弟。先壙移改。追體親心。董役終始。稀年致勤。觀者感喟。妹壻李君。父子偕死。輸灰造槨。曲致其意。悶其嗣絶。周旋後已。兄大諫公。殞于謫地。死喪孔懷。惟曁仲氏。爰謀湛樂。構堂迎致。累年同居。對案聯被。令節佳辰。酒羞燕喜。迨其考終。世念如寄。具爾凋零。枕席淚漬。大老流歸。周竆急匱。爰命孫欽。登門執贄。時呼筍輿。陟榭投寺。杯盤眞率。子姪娛萃。巋然魯殿。衆壞獨峙。吾家淑人。實公季妹。推其 友愛。眷我勤贄。壽爵緋玉。維歲癸巳。肆筵稱慶。公已示憊。顧我驩然。爲進巵匕。明年季冬。十九丁亥。乘化而歸。壽八十二。葬朴谷原。其坎酉趾。遷祔內室。慶州之李。父曰萬兼。曾祖校理。其名光胤。贈都承旨。名家之女。配體媲懿。繼子龜重。服勤養志。長孫聖欽。司馬兩試。景欽正欽。寔惟其次。公有一女。朴寅相內。生男廷煥。烻炫煓輩。孝子謁銘。知吾實記。後欲觀公。潛德在是。
金邦杰(김방걸) 墓碣銘(묘갈명)
金邦杰(김방걸) 仁祖 1年 癸亥(1623)~ 肅宗 21年 乙亥(1695) 73.
字 士興. 號 芝村. 義城人. 瓢隱 是榲의 三子
공은 숙종 210년(1693) 갑술옥사 때 복주현으로 유배되어 配所(배소)에서 졸하였다. 처음 임하현 남쪽 와룡산에 歸葬(귀장)하였다가 지례촌 아기산 남록에 이장하고 다시 영조 41년 을유(1765)에 금계산 미좌에 봉안하였다. 金井庵(금정암) 후록에 자리 잡은 공의 묘는 누가 보아도 명장이라 할 형국이다.
특히 묘 앞에 6척 墓表(묘표)는 정조 22년 무오(1798) 4월에 세웠는데 족손 교리 霽山(제산) 聖鐸(성탁)의 찬이며, 전면의 큰 글씨는 영의정 樊巖(번암) 蔡濟恭(채제공)이 썼고 陰記(음기)는 당시의 명필인 생원 義壽(의수)의 글씨다. 명문, 명필인 비 또한 당대의 으뜸이라 할 것이다. 명당에 名碑(명비)가 공의 명성을 더욱 높게 하고 후손의 효심이 공을 안민케 한다 할 수 있다.
공의 이력과 행적은 묘갈에 자세이 있다.
【遺虛碑銘】
芝村金先生鮮代名臣也 出身登朝 始在顯肅ニ宗之際 而聲獻所曁 威稱爲第一流 惟其 不枉道以趨時勢 故浮沈多年位止於諫談院國子之長 而旋復以直言 見忤黨論 竟彼黜適而卒世 繼士林屢營俎豆院詞 而亦被沮撓 不果就 至今垂三百年 公議常爲之慨恨漑 先生居安東之川前世莊 東北芝禮之峽 而曾有別業 以爲藏修之所 乃玆諸後孫 謀就其遺虛 堅建一碑 亦欲以泯其舊也 不肖榥竊以爲先生之道學風節 自足以振興百世 雨所見於 諸先賢之撰述者備矣 今日딘且以先生所遇黨禍一事 論之 夫天下事物 自有是非枉直而凡人所見 不無彼此同異之殊 各從其所見之同異 而曰是曰非 此其所以爲分黨也 要在斷之以理 而不容私意 回互於彼此之間 然後乃可以守其直而不陷於枉 所謂無偏無黨 蕩蕩平平者 於是足矣 吾邦自分黨以來 各尊所尊 而不容其所不尊者 已成痼習我先生之所偏被指目 蓋亦業以此然 請且以其平生處心行事 而言之 其始仕也 細節必謹不以少不安於心 而爲荀容之計 其出宰也 詞松處決一循公理 不以威勢之脅 而强低仰 其難進易退也 恩數還至 而介石之操 不竢終日 其自安於所遇也 禍機在前 而鐵輪之轉不動一髮 凡此皆其著在經歷 而洽於與誦者也 至以關涉黨論者言之 據事論理 光明直載 如四種議禮之誤 世室追諡之謬 自是人人之所易見者 初不問其黨分之彼此 而爲從違也 或而言之太嚴 有疑乎疾之已甚之亂然 剛柔緩急要之 亦各從其性爾 況君子有不言 言之必其可行 其視左右顯眄 爲半間不界之論者 爲何如也 雖於同黨之內 銓長之有欲見 而不屑往見者 首相之有欲延致 而厭其門熱者 由此觀之 先生固無爲黨之心也 特以時象-燮 執政用事者 皆自一偏之黨 故其於立異者 不核其實 一切加之觝斥而先生所不容 而與之爭辨者 反不免於淺之爲先生也 夫孰能知先生之實 非偏黨中一人者乎其亦暿矣 吾金出自義城 突葉相傳 不必累陳 贈太宰淸溪先生諱璡 於先生爲高祖 淸溪長子藥峯先生諱克一 藥峯嗣子大朴公諱激 大朴子瓢隱先生諱是搵 有八子 先生其第四也 先生諱邦杰宇 字士興 芝材者其所居而號之也 又別號無言齋 先生生於 仁祖癸亥 顯廟庚子登文科 選付承文院 歷察訪典籍監察禮曹佐郎 出爲沃溝縣監 以不廳方伯指使見罷 又以平安道都事 入爲禮兵曹正郎 疏陳時弊 拜正言不赴 左遷靈巖郡守 又拜獻納修撰 論已亥誤禮之案 又遷掌令司諫 見王后廢處之燮 卽棄官歸 繼而召拜宗正修撰應敎 而陞承旨 遷兵曹參議參知 禮曹參議 大司諫移拜大司成與大司諫相出入 又由大司諫遷拜兵書參議參知 時則肅朝甲戌也 朝著忽燮 黨論復作 南人多以宿怨得罪 而先生謫配湖南之同福 方其臨行 內至在謫 無幾徵辭色 明年乙亥首夏 病卒于配所 年壽七十三 用輤車歸葬于故山 後五年己卯 蒙赦典 還復官秩如初 此其平生履歷之大槪也 其行治之詳 有從孫霽山聖鐸所撰碣銘 及李訥隱光庭墓誌 李景玉簠行狀 柳定齋致明文集序 及仲兄幕浦邦衡行年記 並皆可考 文集四集早刊行于世 而年 方且搜出史藏 得若干券 將附刊爲別集又有芝山書堂 爲寓慕修倉之所云 先生有五子 世重載 重持 重遠 重聖 重持 重早夭未育 四公後孫式蕃 散布列邑 幾至數千 不肖榥先世 亦先生血屬 而出后者也日冑孫孫時潤與時鳳碩煥程煥 來謀別集之役 而仍見責以遺虛之碑文 余謂金石徵信 自當屬之秉弗公傳 非本孫之所得私也 固辭久之 而以門?論定已然不可終於回避也 及敢論略爲論述 要以發明前人之所未及之者 而旣復爲銘 以附之後
銘曰
進思盡忠 退思補過 古稱臣節 斷斷一介 物各有理雲 黑白較殊 辨之旣難 矧以誣 於惟先生 允稻乎是 究厥本原 正學有以 唯見之明 乃敢於言 堂堂論議 寧容阿徇 出處進退 始終夷險 一此以現 自反無歉 彼哉群起 謂黨爲偏 隨溷蹻廉 孰然不然 百歲在前 千世在後 公議之定 所期永久 洛川有源 芝山不鶱 尙俾行過 視此表鐫
先生去世ニ百八十ニ年乙卯肇秋下浣?出 後孫) 榥謹撰
<해>
【대사성 지촌옹 금공 묘갈명 병서】
지촌선생(芝村先生)은 조선시대에 명신(名臣)이다. 태어나서 등조(登朝)하시기는 현종(顯宗)때이고 숙종(肅宗)때에 명성이 가는 곳에서는 모두 제1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도(道)를 굽혀서 시세(時勢)에 따르지는 않으셨기 때문에 다년간 부침(浮沈)해서 관위(官位)는 사간원(司諫院) 국자감(國予監)의 장(長)이 되신데 불과하며, 직언(直言)으로 붕당에 거슬려 마침내유배되어서 세상을 마치었다. 그러자 림(士林)에서는 여러 번 존향(尊享)하는 사원(祠院)을 세우려 했으나 그것도 조해(阻害)되어 실현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삼백년이나 지나오니 공의(公議)는 항상 개탄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안동의 세가(世家)출신으로 川前(천전)의 동북에 있는 지례(知禮) 협곡에 살면서 일찍이 별업(別業)으로 수양하는 장소로 하였다. 이에 여러 후손들은 그의 遺虛(유허)에 碑(비)를 세워서 그 구적(舊蹟)이 민멸(泯滅)하지 안 토록 하려 하는 것이다.
불초 황(榥)이 가만히 생각하니 선생의 도학과 절의(節義)는 족히 백세(百世)를 진작(振作) 할 수가 있었다고 여러 선현(先賢)들이 이미 찬술(撰述) 한 데서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르나 지금 또 선생이 당하신 당화(黨禍)의 한 가지 만 더 논한다면 무릇 천하의 사물(事物)에는 반드시 시비곡직(是非曲直)이 있는 법인데, 법인(凡人)의 소견은 피차에 동이(同異)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각기(各其) 그의 보는 바데로 동이(同異)만을 주창해서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는 것이 분당(分黨)되는 소연(所然)인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일을 공리(公理)로 판단해서 사의(私意)를 가지지 아니하고 피차간에 통한 연후에 그 일의 직도(直道)를 지켜서 나가면, 왜곡에 빠지지 않을 것이니, 소위「무편무당(無偏無黨)하고 탕탕(蕩蕩) 평평(平平)하다」하게 되는 것이며 이에 서로 만족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분당(分黨)된 이후로 각기(各其) 그의 존숭(尊崇)하는 바만 주창해서 그의 부존(不尊)하는 바는 용인하지 않으니, 이런 폐습(弊習)이 고질화 되어 우리 선생이 유독 지목을 받게 되는, 대체로 이 때문인 것이다.
또한 평생에 처심(處心)하고 행사(行事)하시는 것으로 말하면, 그의 시임(始仕) 할 때는 소소한 절차도 반드시 삼가서 소절(小節)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여서 구차한 계교는 하지 않으셨고, 또 수령(守令)이 돼서는 송사(訟事)를 판결 할 때 공리(公理)에만 따라서, 권세의 위협(威脅) 때문에 굽히지 않으셨다.
그의 난진(難進)하고 역퇴(易退)함은 영광(榮光)된 일이 와도, 조심해서 의가 아니면 취하지 아니하였고, 일를 처리함에는 종일을 기다리지 않으셨고, 그에 경우대로 바로 해 나감은, 화기(禍機)가 앞에 있어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처리해 나가니, 이것들이 모두 그의 경력에 나타나서 여통에 제켰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논(黨論)에 관계 된 것을 말 한다면, 어떤 사건에 대해서 이세(理勢)틀 논하는 것이 광명(光明)하고 직절(直切)해서 사종의례(四種議禮)와 세실(世室) 추시(追諡)에 맞게 해야 하는데, 만일 오류 같은 것이 있으면 이는 사람마다 보기 쉬운 것이므로, 처음은 그의 분당(分黨)의 피차를 불문하고 따르고, 어길 때는 혹은 말을 엄격하게 하여 너무 심하게 질척해서 난동하는 혐의(嫌疑)가 생기면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으로 달랬다. 또한 각기 성질대로 따르셨는데 하물며 군자는 말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면 반드시 행하는 것일까, 그래서 양보가 없었다.
비록 같은 당색(黨色) 내에서, 전장(詮長)이 보자고 해도 가서 보는 것을 달갑지 않게 알고, 수상(首相)이 만나려 해도 그가 출입하는 것을 기를 싫어 한 그것으로 보아도 선생은 진실로 붕당(朋黨)을 만들 마음은 었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 시국이 일섭(一燮)해서 집권(執權)하고 용사(用事)하는 자가 모두 일편(一片)의 붕당(朋黨)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당자(異黨者)에게는, 그 내용도 보지 않고 모두다 배척(排斥)하니, 그것은 선생이 용인하지 않는 바인데, 더불어서 추종하는 자는 도리어 선생을 천박(淺薄)하다고 하니, 그 누가 선생이 실로 편당(偏黨) 중의 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을까.
이 또한 가탄(可歎)할 일이다.
우리 김성(金姓)은 의성(義城)에서 혁혁하게 전하여 왔음은 누누이 말 할 필요가 없고, 증 이조판서의 청계(淸溪) 휘 진(璡)은 선생에게 고조(高祖)시다. 청계(淸溪)의 장자(長子)인 약봉선생(藥峯先生)은 휘(諱)가 극일(克一)이고 그의 사자(嗣子)는 대박공(大朴公) 휘 격(激)이며, 대박공(大朴公)의 아들 표은(瓢隱)선생 휘 是搵(시온)은 8명의 아들을 두셨는데 그 사남(四男)이 선생이시다. 선생의 휘는 방걸(邦杰)이고 자(字)는 사흥(士興)이며 지촌(芝村)은 그의 사는 곳에 따라서 호로 한 것이며, 또한 별호(別號)를 무언재(無言齋)라고도 하였다.
공은 인조 원년 계해년(1633)에 출생하여 현종(顯宗) 경자(庚子)에 과거에 급제해서 승문원(承文院)으로 선보(選補)되어, 찰방(察訪), 곡적(典籍), 감찰(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郞)등을 역임하고 沃溝縣監(옥구현감)으로 나가서, 방백(方伯)의 지시대로만 안 따른다고 파면(罷免)되고, 또 평안도 도사(都事)로 갔다가 禮曹(예조), 兵曹(병조)의 정랑(正郎)으로 들어와서는 당시의 폐단(弊端)을 진술한 상소를 하였다.
그리고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赴任)을 않자, 영암군수로 좌천 되었다가 또 헌납(獻納), 수찬(修撰)으로 임명되됐다.
기해년, 효종대왕의 상례에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에 오례(誤禮)를 논증하셨다. 그리고 장령(掌令) 사간(司諫)으로 배임되었다. 그 후에 숙종비(肅宗妃) 민씨(閔氏)가 폐위됨을 보고는 바로 기관(棄官)하고 귀향(歸鄕)하였다가 소명(召命)을 받고 종정수찬(宗正修撰),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승지로 승진했다가 병조참의(兵曹參議), 참지(參知), 예조참의(禮曹參議) 대사간(大司諫), 등으로 천임(遷任)하셨다. 그래서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서 대사간(大司諫)으로 출입하시다가 병조참의(兵曹參議), 참지(參知)로 되었으니 그떼는 숙종(肅宗) 갑술(甲戌)년이 었다.
정국에 출입 붕당(朋黨)이 대두하여, 남인들은 노론을 숙원(宿怨)으로 삼고, 모두 득죄(得罪)하는데 선생은 호남의 동복(同福)으로 유배되어서, 출발 할 때 나, 적소(謫所)에 계실 때나 조금도 우색(憂色)은 없었던 것이다.
을해년(乙亥年) 초하(初夏) 때 적소(謫所)에서 병으로 서거(逝去)하시니 향년 73세였다.
영구차로 고산(故山)으로 반장(返葬)하고 5년 후인 기묘(己卯)에 은사(恩赦)를 받아서 관작(官爵)을 회복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에 이력(履歷)하신 대개(大槪)이다.
그 외 상세한 것은 종손(從孫)의 제산성탁(霽山聖鐸)의 所撰(소찬)하신 갈명(碣銘),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묘지(墓誌), 경옥(景玉) 이보(李簠)가 지은 행장(行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이 지은 서문(序文), 중형(仲兄) 막포(幕浦) 방형(邦街)이 편한 행년기(行年記) 등에서 가히 고징할 것이다.
문집은 4권이 이미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근년에 또한 실록에서 발취(拔取)하여 약간(若干) 권(券)을 만들어, 장차 간행하여 별집(別集)으로 하고 또한 지산서원(芝山書院)을 지어서 우모(寓慕)하는 회합의 장소로 하였다.
선생은 오자(五子)가 있으니 세중(世重),재중(載重),지중(持重),원중(遠重),성중(聖重)인데 지중(持重)은 조요(早夭)해서 무후(無後)하나 그 외 사공(四公)의 후손은 여러 군으로 퍼져있는 자가 거의 수천이나 되는데 불초 황(榥)도 선세에 또한 선생의 혈손(血孫)으로서 출계(出系)한 자다.
하루는 주손(主孫)인 시윤(時潤)이, 시봉(時鳳),석환(碩煥),정환(程煥)등과 같이 와서 별집(別集)의 간역(刊役)을 의논하는데, 인해서 유허비문을 부탁하기에 나는 「금석(金石)에 새길 신징(信徵)은 마땅이 대가(大家)에 위촉(委囑)해서 공전(公傳)해야지 본손(本孫)이 사사(私事)로이 해서는 안 된다.」해서 오래 고사(固辯)했으나 이미 문내(門內)에서 논정(論定)한 것이라고 하니 끝내 회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감히 대략(大略)을 논술(論述)하였으나 요는 전인(前人)이 미급(未及) 한 것을 발명(發明)한 것으로서 다시 명(銘)을 지어 뒤에 부(附)하는 바니
명에 말하되
진(進)함에는 진충(盡忠)하고
퇴(退)함에는 보과(補過)하사
옛적 말 한 신하 절개
단단(斷斷)하게 유일(唯一)하네.
만물은 모두 이(理) 있는데
혹백 서로 다른거니
분변(分辨)하기 어려운데 어찌 감히 속일손가.
이에 오직 선생께선 이(理)에서만
입각해서 그 본원을 구명하여
정학(正學)으로 하셨으니
보신 바가 오직 밝아
감히 말씀 하셨으니
당당하신 그 의논(議論)에
어찌 아부(阿附) 용납(容納) 할까.
출세(出處)하고 진퇴(進退) 하심
시종(始終)이 다 부침(浮沈))해도
평일(平一)하게 보시어서
반성 해서 결점 없네.
저들 여러 소인들은
편당(偏黨)이라 하였으나
탁(濁)한데도 염(鹽) 했음을
누가 감히 부정할까.
백세(百歲) 이미 지나갔고
천세(千世) 또한 뒤에 오니
공의(公議)로서 정한 것은
영원불변 한겁니다.
낙동강(洛東江)은 원류(源流)있고
지례산(芝禮山)은 날였는데
행인(行人)으로하여금
이 비석을 보게해요.
선생 거세 282년후 을묘 조추 하완(음력7월)출 후손 황(榥) 근찬
【大司成芝翁金公墓碣銘 幷序】
肅宗二十一年乙亥四月七日。大司成金公。卒于湖南同福縣配所。旣殮。諸孤奉柩。歸葬于臨河縣南卧龍山。後幾年某月某日。移窆于所居知禮村西阿岐山南麓某向之原。淑夫人東萊鄭氏祔焉。又其後幾年。諸孫百欽,德欽,龍欽,必欽及承祀曾孫光漢。以故陵署郞景玉李公簠所撰行狀。示公之從孫聖鐸。使爲顯刻之文。曰。公諱邦杰。字士興。義城人。義城之金。本出羅王子錫。錫封義城君。高麗時。太子詹事龍庇。亦封義城君。故子孫仍貫焉。由詹事歷十世至生員諱璡。以第四子文忠公誠一貴。贈吏曹判書。判書公五子。長諱克一。成均館司成。無子。以弟察訪諱守一之子諱澈爲後。成均進士。是爲公高祖,曾祖,祖。進士公有一子諱是榲。號瓢隱。崇禎丙子後。遯迹山林。除光陵參奉。不起。自稱崇禎處士。今上乙卯。特褒贈司憲府執義。是爲皇考。妣豐山金氏。持平奉祖之女。有淑德。以皇明天啓癸亥十二月二日生公。有文在手曰文。在足曰井。姿貌俊秀。目炯然如星。十一歲。遭內艱。哀慕如成人。十三。始入學。強記絶人。未一旬。讀論語一部。自是。文日就。業日廣。聲譽聞四方。顯宗元年庚子。中丙科及第。選補承文院正字。嘗持進奏文書。稟諸相。諸相見其辨對無滯礙。相顧稱歎。朝中名士。多願與之交。壬寅。出爲濟原察訪。乙巳。陞典籍。遷監察。轉禮曹佐郞。丙午。知沃溝縣。有吳,文兩。姓人大訟。公囚兩造。而文兄弟四人。各囚之。俾不得相謀。及供。四人辭各不同。公得其奸。論報上司。上司主先入右文。欲置吳重律。公堅執不肯從。於是移其訟金堤。金堤守歎其各囚四人。出意表。卽加嚴訊。文竟服罪。徒流。公論快之。又有尹某奴訟於官。某掌令也。奴擧其主官爵。欲以勢䝱公。公曰。吾但問事曲直。不問官爵。竟左之。尹銜之。誣以他事劾罷。己酉。丁瓢隱公憂。壬子。又遭繼妣南氏憂。乙卯。出佐關西慕。大臣有惜其文才者。請召入爲禮兵曹正郞。尋除司憲府持平。辭不赴。丙辰。拜司諫院正言。俄遷兵正。轉掌令。上書極論時政四弊。又以立聖志振頹綱。爲大本。言甚剴切。當路頗不悅。丁巳。出補靈巖郡守。陛辭。上引見。有奬勉語。公感激飭勵。治郡以淸淨廉潔。及罷歸。所載惟菊花一盆而已。己未。拜獻納。庚申。拜弘文館修撰。皆不赴。未幾。有搢紳之禍。公退處家食者。凡九年。己巳。復以修撰召還。首論己亥議禮人。尙刑章之失。於是。公論繼發。卒正王法。尋改掌令。轉司諫。時中宮降出。百官詣闕廷請。公適病不得與。旣而。聞上意已决不可回。歎曰。居諫職。不能救君上過擧。當去。遂棄官歸。除宗簿正。不赴。俄遷修撰。因辭疏。論言路未闢。公議未伸。仍勸上以虛懷納諫。上優批答之。冬。陞副應敎。應旨箚進九弊。辭益切。轉司諫。還應敎。尋陞同副承旨。轉兵曹參議,參知。改禮曹參議。不赴。而已拜大司諫。赴召。至中道遞歸。癸酉。拜大司成。不赴。冬。又拜大司諫。甲戌。遷兵議。旋移參知。夏。黨人復入。駭機焱發。人莫不失措。公晏然不少動。及遞歸數日。有命配同福。同福去家千里。公年已踰七十。人皆爲之愍然。公怡然就途。無幾微見言色。旣到。杜門謝賓客。雖地主。亦不許其數來見。惟日對王弇州文。題曰。南遷一友。湖中人語曰。謫居恬靜如此爺。古未有也。自疾比喪。旁近士子咸奔走致力。比反柩。追送至百里外。公天稟異常。風采燁如。自少服瓢隱公庭訓。立心行己。高潔簡素。不以世俗名利芬華。累其中。嘗曰。人生貴適意。豈可趢趚向風埃中。受人羈縶哉。筮仕三十餘年。進難退勇。未嘗終歲居官職。尤以附權貴爲恥。方許相積,尹公䥴當國柄用。時欲羅致公。將大用。公嫌其門庭熱閙。非公事。足跡不一及。故一時皆稱其恬退。雖京師諸公卿。亦莫不歎服。以爲非今世人。或以爲南中第一流云。平生不事家人生産。饘粥或不給。嘗値歲侵。親自剝松皮以救飢。僮僕有餓死者。未嘗以片牘有求於親知之爲州縣者。所居山水絶勝。閒退之日。常放懷自適。與山翁野老。同其樂。人不知其爲達官貴人也。以其所居。亦名芝村。故自號芝翁。初瓢隱公八子七女。公於次爲第六。事兄姊畜弟妹。友悌甚篤。伯兄上舍公。嘗患痢。公方耆艾。晝夜扶侍。如廁必隨往。終始不懈。平居樂易坦蕩。或與人諧笑。若無畛域。至其辨義利。定是非。確然自守。人莫能奪。族姪錦翁公。每歎公立脚處。不可及也。景玉公與公遊最久。知公最深。其爲狀。亦於公出處進退之際。尤亹亹焉。公始爲文章。橫放贍逸。晩乃斂約。爲精切簡當。論者以爲尤得章奏體。所製述甚多。避名不收錄。今有遺稿若干卷。藏于家。配鄭氏。府使彦宏子而武之女。吏曹參判栢巖金公玏之外孫。事舅姑。事君子。孝敬詳順。無違德。有五男一女。男長世重。進士。次載重,次某。早夭。次遠重,聖重。女壻朴命相。世重二男四女。男汝欽,尙欽。女爲朴世南,申坊,李徽中,金履瑞妻。載重三男。百欽,德欽,益欽。遠重三男三女。男堯欽,命欽,必欽。女適朴龍相。生員。李時晉,李升厚。武科。聖重一男三女。男龍欽。女適李道謙,柳志完,李汝雲。朴命相三男。廷燮,廷赫,廷。曾孫若而人。光漢百欽之子。而爲汝欽後者也。銘曰。
猗我曾祖。德邁朗陵。庭趨八龍。公配慈明。早攻文藝。聲譽藹蔚。擢科登仕。秀出班列。郞署禁密。晉道載闢。惟公恬退。避勢若㥘。權貴之門。衆趨我縮。辨說得黨。不徇不激。出補郡邑。彌著潔白。賢路中枳。屢載家食。晩際亨運。復入帷幄。有章討罪。公議乃晰。載振直聲。載紆恩眷。出納銀臺。遂長諫院。兵部國子。衆望攸屬。維時不幸。黨禍復作。白首擯斥。絶世于荒。小人之幸。君子之傷。惟其樹立。可傳百世。惟墓有石。刻文以揭。
항렬(行列)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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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洛),영(永)
호(浩),영(泳)
연(淵),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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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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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洙),원(源)
택(澤),태(泰)
순(淳),하(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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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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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溶),제(濟)
해(海),준(浚)
홍(洪)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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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模),병(秉)
동(東),식(植)
임(林),상(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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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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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權),목(穆)
근(根),래(來)
직(稷),영(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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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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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柄)정(楨)
화(和),수(秀)
빈(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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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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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煥),형(衡)
대(大),섭(燮)
창(昌),노(魯)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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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憲),엽(燁)
형(炯),훈(勳)
희(熙),덕(德)
덕(悳)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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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榮),병(炳)
엽(燁),문(文)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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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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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時),규(奎)
달(達),재(在)
성(聲),중(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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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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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圭),혁(赫)
규(珪),주(周)
재(裁),은(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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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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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建),배(培)
균(均),달(達)
중(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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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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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鐘),호(鎬)
용(鏞),수(銖)
선(善),희(熙)
현(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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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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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鍵),옥(鈺)
일(鎰),전(銓)
련(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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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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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구조사 남한(南韓)에 총 53,633가구, 219,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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