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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金)

청남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청도김씨)

 

본관(本貫): 청도(淸道)

시조(始祖): 김지대(金之岱)

유래(由來):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시조(始祖) 김지대(金之岱)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8세 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高宗)과 원종대(元宗代)의 명신(明臣)으로 1217(고종 4) 변방에 거란이 침입하자 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시를 남기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주 사록(全州司錄)을 거쳐 보문각 교감(寶文閣校勘)에 제수되었으며 전라도 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비서소감(秘書少監지공거(知貢擧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하였다.

1258(고종 45) 북변에 침입한 몽고군(蒙古軍)을 격퇴하고 민심을 잘 다스려 서북 40여 성()을 안정(安定)시킨 공훈으로 오산(鰲山 : 청도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원종(元宗)이 즉위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중서시랑평장사 (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도(淸道)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그곳에 살면서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명문(名門)으로 명성을 떨쳤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선장(金善莊)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1340(충혜왕 복위 1) 충혜왕의 실정을 계기로 조적(曺 使 )의 난이 일어난 뒤 왕이 원나라에 불려갈 때, 대호군 ( 大護軍 )으로서 호종한 공으로 1342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후손들까지 은전을 받았고, 그해에 신궁건축의 감독관이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왕이 원나라의 사신 대경(大卿) · 타적(朶赤) 등에게 구타당하고 압송되자 시종하는 무리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응양군 ( 鷹揚軍 )으로서 창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끝까지 호송하였다.

나라에서도 충혜왕을 미워하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에게 잡혀 투옥되었으나, 그 뒤 귀국하여 1343년에 원나라로부터 충혜왕을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출신지인 청도군의 지군사(知郡事)가 되었다.

 

김한귀(金漢貴)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관. 아버지는 인수(仁秀)이다. 1362(공민왕 11) 총병관(摠兵官) 정세운 ( 鄭世雲 )이 홍건적을 물리쳤을 때, 이 사실을 알려와 황금 25냥과 비단 2필이 하사되었다.

홍건적이 다시 공격해온다는 보고가 있고, 또 원나라에서 군사를 내어 협공하자는 청이 있자, 동경도병마사(東京道兵馬使)로 임명되어 출정하였으나, 곧 적이 무너졌다는 보고가 들어와 출정을 중지하였다.

1363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갔다가 돌아와,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66년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되자 그의 본관인 청도군의 지방관을 감무 ( 監務 )에서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김한룡(金漢龍)

1363(공민왕 12). 고려 후기의 문신. 1330(충혜왕 즉위년)에 지인방 ( 知印房 )이 설치되자 전첨 ( 典籤 )으로 삼사우윤 윤지현 ( 尹之賢 ), 기거주 ( 起居注 ) 이담 ( 李湛 ) 등과 함께 그 임무를 맡았다. 1361년에 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할 때 호종하였다.

1363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흥왕사 ( 興王寺 ) 행궁(行宮) , 찬성사 김용 ( 金鏞 )의 침범으로 환자(宦者) 안도치(安都赤), 첨의평리(僉議評理) 왕자(王梓) 등과 함께 피살당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호종공신 ( 扈從功臣 ) 2등에 추봉되었다.

 

김점(金漸)

조선조 세종(世宗) 때 형조(刑曹)와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

 

김차산(金次山)

세조(世祖) 때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능주(綾州)의 천태산(天台山)에 은거(隱居)한 차산(次山)이 유명했다.

 

김난상(金鸞祥)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난상(鸞祥)은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조(宣祖) 때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김봉상(金鳳祥)

난상의 형 봉상(鳳祥 : 참봉을 역임)과 아우 귀상(龜祥)은 어릴 때부터 평생을 한집에 살며 같은 밥상에 밥을 먹고, 옷을 해 입어도 함께 해 입어 후일 선비들간에 우애를 논할 때 <··>란 용어가 생기기까지 하였다.

 

김희방(金希邦), 김몽룡(金夢龍)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임란공신에 책록된 몽룡(夢龍)과 희방(希邦)이 이름났다.

 

김응하(金應夏)

순조(純祖) 때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유명한 응하(應夏)는 문하(門下)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실학자 겸 지리학자. 일명 정호(正壅 ). 자는 백원(伯元) · 백온(伯溫) · 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당대의 실학자 최한기 ( 崔漢綺 )와 친교가 깊었고, 대동여지도 의 재간(再刊)대동지지 의 내용이 모두 1864(고종 1)인 것으로 보아 1800년경에서 1864년경까지 살았으며, 순조 · 헌종 · 철종대에 걸친 사람으로 추정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며, 서울에 와서는 남대문 밖 만리재 萬里峴 에 살았다고도 하고, 공덕리(孔德里)에 살았다고도 한다. 불우한 생활 속에서 오직 지도제작과 지지편찬(地志編纂)에 온 정성을 다했다. 한편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지도 판각을 도왔다고 한다.

불과 120여 년 전의 일이면서도 그의 생애와 후손에 대해 이토록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은 그의 신분이 사대부 집안이 아닌 데다, 당시까지만 해도 실학에 대한 인식, 특히 지도 제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미약했던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특히, 개인의 지도 제작은 천기를 누설한다 하여 당시로서는 금기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김정호는 조선조의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한 학자이며,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만든 지도에서 좌표(座標)에 의거하여 구분한 대축척지도첩을 발달시켰다.

유재건 ( 劉在建 )이향견문록 里鄕見聞錄 에는 김정호가 어려서부터 여지학(輿地學), 즉 지리학에 열중하였으며 널리 제가(諸家)의 도지(圖志)를 비교 연구하여 1834(순조 34)청구선표도 靑邱線表圖 (일명 靑邱圖) 2책을 만들었고, 이어서 지구도 地球圖 를 만들었으며, 대동여지도 를 손수 판각하여 세상에 인포(印布)하였고, 동국여지고 東國輿地攷 , 대동지지 를 편집하였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규경 ( 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 안에 있는 만국경위지구도변증론 萬國經緯地球圖辨證論 에 의하면 위의 지구도 는 최한기가 중국 장정병(莊廷 潼 )지구도 탑본(榻本)1834년에 판각하였는데 그것을 새긴 사람은 김정호라고 기록하였다.

김정호는 지구도 를 판각한 1834년에 청구도 상하 2책을 만들었으며, 이어서 1861(철종 12)에는 혼자의 힘으로 대동여지도 22첩을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청구도 는 필사본이고, 대동여지도 22첩으로 된 목판본이다. 대동여지도 는 약 162천분의 1 축척으로 남북은 22(1120)으로 나누고, 다시 각 단을 66푼의 폭(180)으로 하여 횡절(橫折)하도록 하였으며 이합(離合)이 자유로운 절첩식(折疊式) 지도로서 10리마다 눈금을 찍어 거리 측정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지도였다.

내용은 산과 산맥, 하천의 이름과 형상, 그리고 관청 · 병영 · 성터 · 역참 ( 驛站 ) · 창고 · 목장 · 봉수 ( 烽燧 ) · 능묘 · 방리(坊里) · 고현(古縣) · 도로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이를 기초로 하여 자신이 제작한 청구도 를 참고 자료로 하여 이 지도를 제작하였으며, 동국지지 와도 관련이 깊다.

대동여지도 는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동양의 전통적인 도법을 이어받아 집대성한 것인데, 위치의 설정에 있어서 중강진 ( 中江鎭 ) 부근이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울릉도가 남쪽으로 내려온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지도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청구도 는 남북 100, 동서 70리를 1판으로 하였고, 대동여지도 는 남북 120, 동서 80리를 1판으로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청구도 에 비하면 산세와 하계망(河系網)이 훨씬 더 자세하고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전국을 한 장의 지도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다시 약 90만 분의 1 소축척전도인 대동여지전도 를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항간에 전하는 대동여지도 는 김정호가 30여 년간 전국 각지를 두루 답사하면서 실측에 의해 만든 것이다.

이를 위해 김정호는 백두산에 17여 회나 올라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교통 사정과 김정호 개인의 재정적인 형편으로 볼 때 전국을 모두 답사했을 것으로는 믿기 어렵고, 그때까지의 지도를 기초로 하여 보충,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지도에서 볼 수 없는 지형 표시법의 개발, 상세한 하계망의 기입 등은 물론, 행정구역 대신에 좌표에 의하여 일정한 규격으로 지표를 구분한 점 등은 당시의 지도학에서 한 걸음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흥선대원군 집정 때에 대동여지도 의 인본을 조정에 바쳤던 바 그 정밀하고 자세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나라의 기밀을 누설시킬 우려가 있다는 혐의로 판목을 압수, 소각하고, 그도 옥에 가두어 마침내 옥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구도 대동여지도 가 온전히 전해졌고, 목판도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와전된 것이다.

그는 또한 여지승람 의 착오를 정정하고 이를 더욱 보완하기 위해 청구도 대동여지도 의 자매편으로 전 3215책의 대동지지 를 완성하였다. 대동지지 역시 다년간의 현지답사와 고증을 통해 당시의 지지를 집대성한 거작이다. 청구도 의 내용과 대동지지 의 내용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 지도와 지지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대동지지 의 내용은 각종 지리지와 군현 읍지, 그리고 기타 내외 서적을 광범위하게 참고하고 있다. 그 밖에도 20권의 여도비지 輿圖備志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를 최성환(崔 梨 煥)과 함께 편술하여 조선 후기 지리지의 발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자료들은 당대의 석학으로 알려진 최한기를 통해서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위대한 작품인 청구도 · 대동여지도 · 대동지지 는 모두 영인되어 오늘날 널리 이용되고 있다.

 

김익동(金翊東)

1793(정조 17)1860(철종 11).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자익(子翼), 호는 직재(直齋). 아버지는 용()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로 시린(時麟)의 딸이다. 하양현(河陽縣)에서 출생하였으며, 유치명 ( 柳致明 )의 문인으로 1806(순조 6) 안동향시(安東鄕試)에 급제하였다.

1812년 홍경래 ( 洪景來 )의 난이 일어나자 모두 피난하기에 분주하였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여 1819년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이듬해에 정시 ( 庭試 )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과거를 단념하고, 노은정사(老隱精舍구연정 ( 龜淵亭 ) 등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한때 고을의 장학임무(奬學任務)를 수행하였는데, 소학의 가르침을 인재육성의 기본지침으로 삼고 풍속을 교화하는 방법으로 향약(鄕約)의 규정을 제시하였다. 한편, 배극소(裵克紹)와 함께 고금의 상제의(喪祭儀)를 채집하여 상제의집록 喪祭儀輯錄4책을 편집하였으며, 저서로는 직재문집6권이 있다.

 

김성민(金成敏)

성민(成敏)은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 피로 약을 대신하여 회생시켜서 효심을 기린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김태인(金泰麟), 김태현(金台絃), 김외득(金外得)

태인(泰麟태현(台絃외득(外得) 등은 일제에 항거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독립투쟁에 앞장서서 명문(名門) 청도 김씨(淸道金氏)를 더욱 빛냈다.

 

 

金之岱(김지대)의 전설.

 

점쟁이 딸

선생이 전라도 안찰사로 있을 때 진도의 흉악한 도적 만전(萬全)과 통지(通知)라는 자를 잡아 죽이던 그 무렵, 민간에 돌아다니는 도적 때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고 깨끗이 쓸어 나가던 때, 이따금 친히 감옥 속을 사찰해 나가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하루는 옥 속에 갇힌 죄수 중 어떤 여자가 선생을 보고아이고 사또님! 저를 모르십니까? 20여 년 전 사또께서 나이 젊으셨을 때 저의 아버지께서 저를 사또께 부탁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기억하십니까?하며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리고 다시저는 실상 억울한 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는데 그 여자의 얼굴을 잘 살펴보니 선생은 옛날 일이 생각이 났다.과연 20여 년 전 선생은 점을 잘 치는 이가 있다고 하여 여러 친구들과 거기로 놀러 갔던 일이 있었는데, 그 점치는 노인이 특히 선생을 많이 칭찬한 끝에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딸을 불러내어 뜰아래서 절을 시키며이분은 뒷날 귀인이 될 것이오. 너는 이분의 은혜를 입을 때가 있을 것이니 잘 보아 두었다가 잊지 말아라.하던 일이 있었다.

선생은 놀라며 그 여자를 향해! 네가 그 점치던 영감의 딸이더냐?하고 곧 사실을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 여자의 억울함을 밝혀졌다.

그래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金正浩(김정호)의 전설

1)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을 건너는 것이 나루요, 물이 건너지 못하는 산을 넘는 것이 고래이니라.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와 같은 뜻이다.

 

2)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든 김정호선생은 일생을 지도 만드는 것에만 집주하다보니 가정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부인이 행상으로 겨우 연명해 가다가 남편이 지도 만드려 출타한 사이에 외롭게 죽고 말았다.

 

한편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지도 판각을 도왔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는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동양의 전통적인 도법을 이어받아 집대성한 것인데, 위치의 설정에 있어서 中江鎭(중강진)부근이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울릉도가 남쪽으로 내려온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지도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이를 위해 김정호는 백두산에 17여 회나 올라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흥선대원군 집정 때에 대동여지도의 인본을 조정에 바쳤던 바 그 정밀하고 자세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나라의 기밀을 외국에 누설시킬 우려가 있다는 혐의로 애써 만든 판목을 압수, 소각하고, 김정호도 옥에 가두어 마침내 옥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영웅도 시대를 못만나면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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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5,596가구, 64,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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