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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청풍김씨)

 

본관(本貫): 청풍(淸風)

시조(始祖): 김대유(金大猷)

유래(由來):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後裔)인 대장군(大將軍) 김순웅(金順雄)12세손 김대유(金大猷)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청성(淸城 : 청풍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진 후 청풍(淸風)에 세거(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관향(貫鄕)을 청풍(淸風)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빼어난 명현(名賢)과 충신(忠臣)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지위를 지켰다.  

 

특히 청풍 김씨는  조선조에서 상신(相臣 :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별칭) 8,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예문관의  2품 벼슬) 3, 왕비(王妃) 2명이 나왔으며, 3대정승과 부자영상(父子領相)을 배출하여 청송 심씨(靑松沈氏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함께 명문(名門)으로 명성을 날렸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길통(金吉通)

1408(태종 8)1473(성종 4).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숙경(叔經), 호는 월천(月川). 직방(直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무(光茂)이고, 아버지는 증 좌찬성 효례(孝禮)이며, 어머니는 오은(吳隱)의 딸이다.

1429(세종 11) 생원이 되고, 143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의영고부사가 되었으며, 이어 감찰과 병조좌랑을 지내고, 1436년 진잠현감(鎭岑縣監)이 되었다. 1440년 우헌납이 되고 그 뒤 이조정랑·장령·사예를 거쳐, 1451(문종 1) 지승문원사가 되고 이듬해 판종부시사에 올랐다. 우사간대부를 거쳐 1454(단종 2)에 황주목사로 나갔으며, 첨지중추원사를 지내고 1458(세조 4) 전주부윤이 되었다. 1460년 대사헌을 지내고 황해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로 나갔으며 예조와 형조의 참판, 한성부좌윤을 거쳐 1469(예종 1)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종 즉위 후 지중추부사가 되고 한성부판윤 등 여러 내외직을 두루 지내고 호조판서에 올라, 1471년 좌리공신 ( 佐理功臣 ) 4등으로 월천군(月川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청백하여 항상 청빈하였고, 평생 동안 공도(公道)로써 관직생활을 지냈다. 저서로는 월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김순경(金順敬)

길통의 맏아들 순경(順敬)은 판사(判事)를 지냈다.

 

김순명(金順命)

1435(세종 17)1487(성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거이(居易). 광무(光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례(孝禮)이고, 아버지는 호조판서 길통(吉通)이며, 어머니는 이심지(李審之)의 딸이다. 1453(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6(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 정자 ( 正字 )가 되었다.

이어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성균관주부(成均館主簿호조좌랑·호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7년 이시애 ( 李施愛 )의 난에 도총사(都摠使) 구성군 준(龜城君浚)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에 책훈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명나라 사신의 청으로 자계(資階 : 품계)가 올라 당상관이 되었다.

1469(예종 1)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우부승지로 전임되었다가 1471년 성종 옹립의 공으로 좌리공신 4등에 책훈되고, 좌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다. 1475(성종 6)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77년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호조·예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479년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다.

1481년 의금부동지사로 있을 때 사형에 대한 오판으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내수사의 종인 두을언(豆乙彦)을 장살한 혐의로 파직되었다. 1484년 고신(告身 : 관직임명의 사령장)을 돌려받고 다시 청릉군에 봉해졌다. 글씨에 뛰어났다. 시호는 공양(恭襄).

 

김식(金湜)

1482(성종 13) 1520(중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 · 동천(東泉) 또는 정우당(淨友堂). 아버지는 생원 숙필(叔弼)이며,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目氏)이다.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열중해 1501(연산군 7)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뒤, 정치적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조광조 ( 趙光祖 ) · 박훈 ( 朴薰 ) 등과 함께 성균관과 이조판서 안당(安 揆 )의 천거로 종6품직인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에 서용되었다. 이어 형조좌랑 · 호조좌랑 · 지평 ( 持平 ) · 장령 ( 掌令 ) 등을 역임하였다.

15194월 조광조 · 김정 ( 金淨 )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현량과의 천거 명목에는 성품 · 기국 · 재능 · 학식 · 행실 · 행적 · 생활 태도 또는 현실 대응 의식 등의 일곱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급제자 28인 가운데 유일하게 7개 항목에서 모두 완벽하게 평가받았다.

이는 당시 사림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고, 또 중앙에 이미 진출해 있던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에 버금갈만한 인물로 평가되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는 급제자 발표 닷 새 만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고, 며칠 뒤에는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올랐다. 그것은 현량과 실시로부터 겨우 보름 사이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조판서 신상(申 裂 )과 우의정 안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해 대사성에 추천했으나 중종은 이들의 주청을 물리치고 홍문관부제학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상과 안당의 거듭된 상계(上啓)로 마침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그 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영의정 정광필 ( 鄭光弼 ) 등의 비호로 선산 ( 善山 )에 유배되었다.

뒤따라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거창에 숨었다가 해는 기울어 하늘은 어둑한데 텅빈 산사위에 구름이 떠가네 군신간의 천년의 의리는 어느 외로운 무덤에 있는가 日暮天含黑 山空寺入雲 君臣千載義 何處有孤墳 라는 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기묘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그의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복관되었으며, 그 뒤 선조 때에 이조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 당시 사림의 영수로 숭앙된 조광조와 학문적 · 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연결을 바탕으로 훈구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으며,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정치를 폈다. 그 내용으로는 미신 타파, 향약 실시, 정국공신 ( 靖國功臣 )의 위훈 삭제(僞勳削除) 등을 들 수 있다.

문인으로는 신명인 ( 申命仁 ) · 오희안(吳希顔) · 목세칭(睦世秤) · 김윤종(金胤宗) · 조경(趙瓊) · 홍순복(洪舜福) · 윤광일(尹光溢) · 이세명(李世銘) · 신영 ( 申瑛 ) · 김덕수(金德秀) 등이 있다. 양근 ( 楊根 )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거창의 완계서원 ( 浣溪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김권(金權)

()의 손자(孫子) ()은 선조(宣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김신국(金藎國)

1572(선조 5) 1657(효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진(景進), 호는 후추(後 猜 ). 할아버지는 사원(士元)이고, 아버지는 현감 급()이며, 어머니는 임보신 ( 任輔臣 )의 딸이다.

1591(선조 24) 생원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에서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분전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그 공으로 참봉이 되었다.

159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도원수 권율 ( 權慄 )의 종사관으로 공문서의 일을 관장하였다. 그 뒤 춘추관의 사관(史官)이 되어 전란으로 소실된 일록(日錄)을 보충하기 위해 사료의 수집을 간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군기선유관(軍機宣諭官)으로 엄정하게 군공을 논정하였다. 그 뒤 정언 (正言)을 거쳐 1599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어사로서 관서지방을 순무하였다.

북인 ( 北人 )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지자 소북의 영수로 대북과 대립하다가 관직이 삭탈되어 충주에 은거하고, 선현의 언행사적(言行事績)을 적은 경현록 景賢錄 을 편찬하였다.

1608년 보덕 ( 輔德 )으로 기용되고, 광해군 때 사간을 지냈다. 1613(광해군 5) 임해군 ( 臨海君 )의 옥사에 관한 공으로 익사공신 ( 翼社功臣 )이 되고 청릉군(淸陵君)에 봉해졌으며, 평안도관찰사 · 우참찬 · 호조판서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의 훈작(勳爵 : 공훈으로 얻은 관작)을 삭탈당했으나 그 뒤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 이 때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에 대비해 평양성의 수축과 군량의 비축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에 연좌되어 국문 ( 鞫問 )까지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무사하였다.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는 호조판서로 이정구 ( 李廷龜 )와 함께 금나라의 사신과 화약을 맺었다. 공조 · 형조의 판서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세자시강원의 이사 ( 貳師 )가 되어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 ( 昭顯世子 )를 배종해 심양(瀋陽)에 갔다가 1640년에 귀국해 기로소에 들어갔다. 1646년에는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가 되었다.

 

김시국(金蓍國)

1577(선조 10)1655(효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징(景徵), 호는 동촌(東村). 여명(汝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사원(士元)이고, 아버지는 현감 급()이며, 어머니는 임보신 ( 任輔臣 )의 딸이다. ()에게 입양되었다.

호조판서 신국(藎國)의 아우이다. 1613(광해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615년에는 주서 ( 注書 )에 올랐다. 1618년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직강 ( 直講 수찬 ( 修撰 부교리 ( 副校理 이조좌랑· 정언 ( 正言 )을 지냈다.

1621년 전라도선유어사(全羅道宣諭御史)가 되었으나 근무가 태만하고 직무에 실책이 많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25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이듬해 우승지·참찬관에 올랐다.

1630(인조 8)에는 도승지로 승진하였으며, 1632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40년에 대사성이 되고 이어 참판·대사간을 지냈으며, 1646년 제학 ( 提學 )에 올랐다.

그뒤 대사성이 되었고 1649(효종 즉위년) 판의금부사를 지낸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형의 후광으로 정계에 진출하였으나 큰 공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김육(金堉)

1580(선조 13) 1658(효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 실학자.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 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식()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비( )이고, 아버지는 참봉 흥우(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1605(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 金宏弼 · 鄭汝昌 · 趙光祖 · 李彦迪 · 李滉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이 때부터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하였다.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10월에 정언 ( 正言 )에 임명되었으며, 1633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온 뒤 예조참의 · 우부승지 ·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38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 : 무자위 · 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 救荒撮要 벽온방 陽 瘟方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형조참의 겸 대사성 · 대제학 · 대사간 · 병조참의 · 한성부우윤 · 도승지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 · 병조참판 · 이조참판 겸 비변사유사제조(備邊司有司提調) · 형조판서 겸 선혜청제조 · 우참찬 · 대사헌 · 예조판서 · 도총부도총관 · 개성부유수 등의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1643년과 1645)나 더 다녀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 · 유통, 수레의 제조 · 보급 및 시헌력 ( 時憲曆 )의 제정 · 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 類苑叢寶 · 황명기략 皇明紀略 · 종덕신편 種德新編 · 송도지 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1649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 ( 金集 )과의 불화로 이듬 해 1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 ( 進香使 )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하였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원임(原任) 정태화 ( 鄭太和 )가 영의정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으로 지내면서도 대동법 시행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한편, 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 을 저술하고 인조실록 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1654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 을 구상하고, 이를 1657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 ( 徐必遠 )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저술로는 그의 시 · 문을 모은 잠곡유고 潛谷遺稿 (1110) · 잠곡별고 潛谷別稿 · 잠곡유고보유 潛谷遺稿補遺 · 잠곡속고 潛谷續稿 가 전한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 天聖日錄 · 청풍세고 淸風世稿 · 조천일기 朝天日記 · 기묘록 己卯錄 · 잠곡필담 潛谷筆談 · 당삼대가시집 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 자네집에 술닉거든 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 는 우리 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된다. 그리고 구황촬요 · 벽온방 · 종덕신편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서, 그의 위민적(爲民的) 생애의 단면을 보이는 저술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와 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업은 그의 자손 대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 나라 주자 ( 鑄字 )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무덤은 경기도 양주 금촌리에 있다. 양근 ( 楊根 ) 미원서원 ( 迷源書院 )과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 ( 崧陽書院 ) 등에 배향되고, 1704(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홀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좌명(金佐明)

()의 아들 좌명(佐明)은 인조(仁祖)  대사헌(大司憲대사간·대사성·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내고, 현종(顯宗) 초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라 아버지 육()이 생전에  호남지방에 실시케 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애로가 있음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펴기 위해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로 임명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662(현종 3) 공조(工曹) 및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같은 해 병조 판서(兵曹判

) 겸 수어사(守禦使)가 되어 병기·군량을 충실히 관리하고  군사훈련을 엄격히 실시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고, 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 추증되었다.

우명(佑明)은 자기 딸을 세자(世子)의 빈()으로 맞아들인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실 세력을  배경으로 서인(西人)인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여 당시 치열했던 당쟁에 깊숙이  간여하면서 크게 세력을 떨쳤다.

 

1634(인조 12)1684(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강릉참봉 흥우(興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육()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좌명(佐明)이며, 어머니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部都摠管) 신익성 ( 申翊聖 )의 딸이다.

1657(효종 8) 진사가 되었으며, 1661(현종 2) 왕이 직접 성균관에 거둥해 실시한 시험에서 성적이 우수해 곧바로 전시 ( 殿試 )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이듬해 증광 문과에 장원, 전적 ( 典籍 )이 된 뒤 이조좌랑· 정언 ( 正言 지평 ( 持平 부교리 ( 副校理 수찬 ( 修撰 헌납 ( 獻納 교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674년 겸보덕 ( 兼輔德 )에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다.

당시 서인 중의 한당(漢黨)에 가담해 집권당이던 산당(山黨)에게 중용(重用)되지 못하였다. 그 뒤, 1674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 허적 ( 許積 ) 등과 결탁해 송시열 ( 宋時烈 김수항 ( 金壽恒 ) 등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守御使)에 이어 도승지로 특진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정권이 강화되자 이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서인들과 제휴해 송시열을 제거하려는 남인들의 책동을 꺾어, 이 때부터 송시열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680년 허적 등이 유악남용사건(油幄濫用事件 : 왕실에서 쓰는 장막을 사사로이 사용해 일어난 사건)으로 실각한 뒤 이조판서가 되어, 남인의 잔여 세력을 박멸하고자 허견(許堅)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여 이들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 ( 保社功臣 ) 1등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82년 우의정으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하였다. 이어 김익훈 ( 金益勳 )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전익대 ( 全翊戴 )를 사주해, 허새 ( 許璽 )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1683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했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반감을 사서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하는 원인의 하나를 제공하였다.

사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박탈당했다가 뒤에 복구되었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식암집·해동사부 海東辭賦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두명(金斗明)

병조 참의(兵曹參議)

 

김간(金幹)

우참찬(右參贊)

 

김석연(金錫衍)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구(金構)

관찰사 징()의 아들 구()6조의 판서(判書) 역임한 후 1703(숙종 29)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러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아우 유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김희로(金希魯)

우의정 구()의 아들 희로(希魯)는 영조(英祖) 때 공조(工曹) 및 호조(戶曹) 참판(參判)을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올랐다.

 

김재로(金在魯)

1682(숙종 8) 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극형(克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징()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구()이며, 어머니는 이몽석(李夢錫)의 딸이다.

관직 활동1702(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해 설서 ( 說書 ) · 검열 ( 檢閱 ) · 지평 ( 持平 ) · 수찬 ( 修撰 ) 등을 지냈다. 1716년 부수찬으로 선현(先賢)을 무고한 소론의 유봉휘 ( 柳鳳輝 ) · 정식(鄭 氓 )을 탄핵해 물러나게 하였다.

1718년 헌납 ( 獻納 ) · 동부승지 · 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 · 대사성 · 승지를 거쳤으며, 전라도균전사(全羅道均田使)로 양안(量案 : 토지 대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 승지 · 부제학 · 이조참의 등을 거쳐, 이듬 해 대사간 및 병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내고 개성유수가 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이듬 해 울산으로 귀양갔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듬 해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양사(兩司)와 더불어 소론의 유봉휘 · 이광좌 ( 李光佐 ) 5인을 죄주도록 청하고, 소론 김일경 ( 金一鏡 )의 무고 사실을 상소해 사형하게 하였다. 이어 이조참판 · 좌빈객 ( 左賓客 ) ·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 해인 1728년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목사로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를 겸해 난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당쟁을 조성한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지돈녕부사 겸 수어사(知敦寧府使兼守禦使)를 지내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직해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1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의 김창집 ( 金昌集 ) · 이이명(李 蓬 命)의 복관(復官 : 관직의 회복)을 상소해 이를 달성시켰다. 그 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737년에도 당파 싸움을 벌여 탕평책을 어긴 죄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이듬 해 판중추부사로 주청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새로 간행된 명사 明史 를 얻어왔다.

1740년 영의정에 올라 1758년 관직을 떠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영의정을 지냈고, 그 밖에도 영중추부사를 역임해 세도가 매우 컸다. 1741년 신유대훈(辛酉大訓)이라 하여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사르고 특사하도록 하고, 5인의 역안(逆案 : 반역 죄인들의 죄를 기록한 문서)을 그대로 두도록 주장한 박문수와 이종성 ( 李宗城 ) 등을 파직하게 하였다.

이후 소론은 관직이 추탈되는 반면 노론의 권력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임사화로 희생된 노론 4대신에게 시호를 내리고 홍계적 ( 洪啓迪 ) · 김운택(金雲澤) · 조성복 ( 趙聖復 ) · 이홍술 ( 李弘述 ) 등은 증직을 내렸다.

처세 및 저술 활동영조 초기에 탕평론을 주장했으나 결국 노론의 선봉에서 영수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한, 영의정 재임 기간 중 영춘추관사 ( 領春秋館事 )를 겸해 한천이혁절목(翰薦釐革節目) 10조와 과거의정절목(科擧議定節目) 8조를 제정하고 왕실의 상복제를 바로잡는 등 치밀하게 정사를 폈다.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거의 절반을 상신(相臣 : 의정부의 삼정승)으로 지냈다. 결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박식하며 예학에 깊었고, 상하가 신망하는 재상으로서의 풍모를 지녔다. 벼슬을 그만둔 뒤 집에 있으면서도 국사를 잊지 않았다.

영조는 숙종의 뜻에 따라 그를 기용해 아꼈으며, 손수 쓴 글을 내려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봉조하 ( 奉朝賀 )78세에 죽으니 영조는 그 집에 직접 조문하고 제문도 친히 지어 보냈다. 죽은 이듬 해 기사대신(耆社大臣)이 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천의소감언해 闡義昭鑑諺解 난여 爛餘 가 있다. 편저로는 예기보주 禮記補註 · 청풍김씨세보 · 좌씨집선속 左氏輯選續 · 금석록 金石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김치인(金致仁)

1716(숙종 42) 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동부승지 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구()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재로(在魯)이며, 어머니는 심징(沈 消 )의 딸이다.

1738(영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748(영조 24)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해 예문관전적(藝文館典籍)과 정언 ( 正言 )을 거쳐 문경어사(聞慶御史)로 나가 문경현감의 탐욕을 다스렸다. 이어 지평 ( 持平 )과 문학을 거쳐 1750년에는 호남어사로 활약하였다.

1752년 승지에 오르고, 이어 대사간 · 비변사부제조(備邊司副提調) · 대사성 · 부제학 ( 副提學 ) · 이조참판 · 개성유수 등을 지냈다. 1762년 이후 이조 · 호조 · 형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765년 우의정에 올라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 · 영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 1772년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로 직산현(稷山縣)으로 유배되었으나, 반년 만에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다시 서용되고,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어 고부 겸 승습주청사(告訃兼承襲奏請使)의 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다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봉조하가 되어 명의록 明義錄 편찬을 주관하고, 1785년에는 대전통편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영의정으로 기용되어 정조의 명으로 당쟁의 조정에 힘썼다.

성품이 치밀하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로, 나라의 전고(典故)에 정통해 이를 정사에 잘 활용하였다. 편저로 명의록 · 열성지장통기 列聖誌狀通記 가 있다. 시호는 헌숙(憲肅)이다.

 

김상로(金尙魯)

인물로는 1759(영조 35)  영의정에 오름.

 

김취로(金取魯)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익휴(金翊休), 김종정(金鐘正)

이조판서(吏曹判書)

 

김시묵(金時默)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상묵(金尙默)

대사간(大司諫)

 

김종수(金鐘秀)

정조(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으름.

 

김기후(金基厚), 김희화(金熙華)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약로(金若魯)

좌의정(左議政)

 

김동헌(金東獻), 김학성(金鶴城), 김만식(金晩植)

예조판서(禮曹判書)

 

김경선(金景善),김익문(金益文)

우참찬(右參贊)

 

김세호(金世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김원식(金元植)

형조판서(刑曹判書)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한민족대성보>에서 인용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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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남한(南韓) 20,189가구, 82,8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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