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金(통천:통주김씨)
본관(本貫): 통천(通川)
시조(始祖): 김교(金較)
유래(由來):
통천 김씨(通川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태자(太子) 김 일(金 鎰 : 마의태자)의 후손 김교(金較)가 고려 광종(光宗 : 제 4대 왕) 때 나라에 공을 세워 통천군(通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통천(通川)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인물
김욱(金昱)
시조(始祖) 교(較)의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김위(金渭)
교의 증손(曾孫) 위(渭)는 정난공신(靖亂功臣)으로 태사시중(太師侍中)에 올랐다.
김원상(金元祥)
∼ 1339(충숙왕 복위 8). 고려 후기의 문신.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 ·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비서윤( 煉 書尹) ·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 · 지신사 ( 知申事 ) 등을 거쳐 좌승지가 되었으나 왕을 황음(荒淫)하게 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다시 지신사 ·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09년(충선왕 1) 검교평리(檢校評理)가 되었다가 회주목사(懷州牧使)로 좌천되었다.
1320년(충숙왕 7) 삼사사(三司使) · 정당문학 ( 政堂文學 )에 오르고, 1322년 심왕 고(瀋王暠)의 왕위 찬탈 음모를 도운 죄로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곧 풀려난 뒤 판삼사사에 이르러 죽었다.
김수자(金守雌)
원상의 아들 수자(守雌)는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예주방어사(禮州防禦使)를 역임하며 가통(家統)을 이어 충성(忠誠)을 다했다.
김빙(金憑)
1549(명종 4)∼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중(敬中). 아버지는 익한(翼漢)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을 지낸 뒤, 1589년 정여립 ( 鄭汝立 )이 모반에 실패하자 자결하였는데 그 이듬해 정여립을 추형(追刑)할 때 형조좌랑으로서 추국관(推鞫官)이 되었다. 그러나 추국을 하다가 지병으로 눈물이 흘렀는데, 적대관계에 있던 백유함 ( 白惟咸 )이 역적을 동정하여 운다고 무고하여 곤장을 맞고 죽었다.
<한민족대성보>에서 인용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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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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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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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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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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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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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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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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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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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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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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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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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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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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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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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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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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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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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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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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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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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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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통천 김씨
(通川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040가구, 4,1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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