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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연안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연안김씨)

 

본관(本貫): 연안(延安)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유래(由來):

 

연안 김씨(延安金氏)의 시조는 고려 명종(明宗) 때 사문박사(四門博士 : 국자감 안에 두었던 교육기간의  8품 벼슬)를 지낸 김섬한(金暹漢)이다.  문헌(文獻) 의하면 신라에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두 왕자가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형은 북빈경(北濱京 : 지금의  강릉), 아우는 시염성(연안의 옛 지명)으로 유배되었는데, 아우의 후손이 바로  김섬한(金暹漢)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선조(先祖)의 유배지인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면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일컬어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도(金濤)

1379(우왕 5).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장원(長源). 1370(공민왕 19) 8월 박실(朴實유백유 ( 柳伯濡 ) 등과 함께 향공으로 뽑혀 정조사 ( 正朝使 ) 권균(權鈞)을 따라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 제과(制科)에 급제해 동창부(東昌府) 구현(丘縣)의 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국어에 서투르고 고향에 노친이 있음을 이유로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가 귀국하자 공민왕은 그를 예로 맞이하고 우사간 예문관응교(右司諫藝文館應敎)에 임명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올랐다.

우왕이 즉위하자 문하사인 ( 門下舍人 )으로서 좌사의(左舍議) 유순(柳珣), 기거사인 ( 起居舍人 ) 박상진(朴尙眞),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안종원 ( 安宗源 ) 등과 함께 환관의 정치간여를 금지하는 내용의 글을 도당 ( 都堂 )에 올렸다.

또한 좌사의 안종원, 보궐 ( 補闕 ) 임효선(林孝先), 정언 ( 正言 ) 노숭 ( 盧嵩 ) 등과 함께 왕에게 김흥경 ( 金興慶 )과 그 일당인 왕백 ( 王伯 안소 ( 安沼 정귀수(鄭貴壽) 등을 내쫓고 유신(維新)의 정교(政敎)를 펼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김흥경이 언양 ( 彦陽 )으로 귀양을 갔으며, 그의 집이 몰수당하였다.

1376(우왕 2) 12월에 좌부대언 ( 左副代言 )에 오르고, 이듬 해 3월에는 지신사 ( 知申事 )로서 국자감시관(國子監試官)이 되어 정전(鄭悛) 99인을 뽑았으며, 곧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찬성사 홍중선(洪仲善)과 어울려 반대세력을 비판해 권신 이인임 ( 李仁任 )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1379년 그의 가노(家奴)가 연경궁 ( 延慶宮 ) 옛터의 돌을 훔친 일로 이인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환관 이득분 ( 李得芬 )의 도움으로 화는 면했으나, 같은 해 7월에 양백연 ( 楊伯淵 )의 옥사에 연루되어 효수당하였다.

 

 

김자지(金自知)

1367(공민왕 16) 1435(세종 1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원명(元明), 호는 일계(逸溪). 밀직제학(密直提學) ()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1404(태종 4) 집의가 되고, 1408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1418년 호조참판, 이듬해에 형조참판이 되고, 다시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 · 원주목사가 되고, 1423(세종 5)에는 평안도관찰사, 1428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마침 동지총제(同知摠制) 성개(成 勘 )의 노비에 대한 오결사건(誤決事件)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형조의 기구확대를 둘러싸고 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파직당하였다.

만년에는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가 되었다가 143468세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이 뛰어나 음양(陰陽) · 복서 ( 卜筮 ) · 천문 · 지리 · 의약 · 음률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 배불론자(排佛論者)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상()주자가례 에서 따르도록 여러 아들에게 유언할 정도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김여지(金汝知)

1370(공민왕 19) 1425(세종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사행(士行). 아버지는 고려 밀직제학(密直提學) ()이다.

1389(창왕 1)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제수되었으나, 곧 언사(言事)로 전라도에 유배되었다. 1390(공양왕 2)에 풀려나 우정언 ( 右正言 )이 되고 정도전 ( 鄭道傳 )을 탄핵하다가 파면되었으며, 뒤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1392(태조 1) 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으로 재직할 때, 함창군으로 유배 온 좌주 ( 座主 ) 이종학(李種學)을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손흥종(孫興宗)이 해치려는 것을 구하였다. 곧 소환되어 간관 ( 諫官 )으로 근무하던 중 정도전이 공양왕 2년에 나를 탄핵한 성랑(省郎)은 모두 파직되었는데 오직 김여지만이 관직에 있다. ” 고 한 말을 듣고 사직하였다.

정도전이 실각한 뒤에 복직, 1402(태종 2) 우헌납 ( 右獻納 )으로 재직 중 언사로 원평(原平)에 안치되었다. 다시 소환되어 병조 · 이조의 정랑 ( 正郎 )을 역임하였다. 1403년 장령 ( 掌令 )으로 승진했으나, 언사로 순금사(巡禁司)에 수금되었다가 풀려나면서 지봉주사(知鳳州事)로 쫓겨났다. 이듬 해 예문관직제학(禮文館直提學), 집의 ( 執義 )로 옮겼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408년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 우대언 ( 右代言 ) · 좌대언을 거쳐 1410년 지신사 ( 知申事 )가 되었다. 1413년 지신사로 있을 때 고려 종실의 후손인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의 동정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이듬 해 예문관제학으로 복직되어 남재 ( 南在 ) 등과 문과 회시(文科會試)를 주관하고, 충정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416년 대사헌이 되었고, 양녕대군 ( 讓寧大君 )이 세자에서 폐위되기까지 세자좌빈객을 겸임하였다. 1417년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사직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공조판서 · 예조판서 ·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8(세종 즉위년) 형조판서로서 하정사 ( 賀正使 )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병으로 일시 사직, 1422년 예조판서로 복직되었다. 이듬 해 의정부참찬으로 발탁되었으나 병으로 다시 사직하였다. 성품이 충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태종 · 세종 성세의 일익이 되었다. 시호는 문익 (文翼)이다.

 

김치지(金致知)

치지(致知)는 예빈시윤을 지냈다.

 

김학지(金學知)

학지(學知)는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김원신(金元臣)

세조(世組)  원종공신(原從功臣) 책록된  원신(元臣)은 파주  현감(坡州縣監)과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역임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었다.

 

김우신(金友臣)

1424(세종 6) 1510(중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빙(待聘). 밀직제학(密直提學)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자지(自知)이고, 아버지는 해( )이며, 어머니는 참판 성개(成槪)의 딸이다. 1453(단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성종이 세자였을 때 왕자사부 ( 王子師傅 )로 발탁되어 무반으로 대우받았고, 1472(성종 2) 사옹원직장으로 출발하여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을 거쳐, 종부시주부가 되고, 1477년에는 해주판관이 되었다. 1479년 군기시주부를 거쳐, 이듬해 통진현령이 되었다.

그뒤 1486년 에는 단양군수 등을 지냈다. 이후 상호군 · 대호군 등을 번갈아 10여년 동안 역임하였다. 이어 성종의 배려로 문반이 되어 호조참의를 제수받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친 뒤 관직을 떠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호간 (胡簡)이다.

 

김심(金諶)

1445(세종 27) 1502(연산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량(君諒). 할아버지는 내자시유(內資寺尹) ( )이고, 아버지는 참의 우신(友臣)이며, 어머니는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이계충(李繼忠)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1468(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4(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9년에는 좌랑으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었으며, 관직에 있으면서는 법을 준수하여 권귀(權貴)에 굽히지 않았다. 1483년 사섬시첨정(司贍寺僉正)이 되었으며, 예조를 제외한 5조를 모두 역임한 뒤 1487년 사간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대책 ( 對策 )1등하여 모마장(毛馬粧) 1부를 하사받았다.

1490년 직제학 ( 直提學 )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문 ( 吏文 )을 제작한 공으로 활이 하사되었으며, 부제학이 되었다. 연산군이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위하여 효사묘(孝思廟)를 세우려고 하자, 여러 대관을 거느리고 그것을 반대하였다.

1496년 정조사 ( 正朝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부총관 ( 副摠管 )으로서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벼슬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그를 신임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흔

흔은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성종(成宗)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부교리(副校理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김전(金詮)

1489(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 장원으로 급제한  ()은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 했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고,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당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大司憲좌찬성(左贊成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520(중종 15)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 : 청렴결백한 벼슬아치)에 뽑혔다.  

 

김근사(金謹思)

부사(府使) ()의 아들 근사(謹思)는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

랐다.

 

김감(金勘)

()은 중종반정(中宗反正) 에 가담하여 정국이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김석철(金錫哲)

석철(錫哲)은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 장원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후 궤장을 하사(下賜)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안로(金安老)

 1481(성종 12) 1537(중종 3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숙( 蓬 叔), 호는 희락당(希樂堂) · 용천(龍泉) · 퇴재(退齋). 할아버지는 군수 우신(友臣)이고, 아버지는 참의 흔( )이며, 어머니는 윤지(尹 猩 )의 딸이다.

1501(연산군 7) 진사가 되었고, 1506(중종 1)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 ( 典籍 )에 처음 임명된 뒤 수찬 ( 修撰 ) · 정언 ( 正言 ) · 부교리 ( 副校理 ) 등 청환직(淸宦職 :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내리는 관직)을 역임하였다.

1511년 유운 ( 柳雲 ) · 이항 ( 李沆 ) 등과 함께 사가독서 ( 賜暇讀書 )했고, 직제학 ( 直提學 ) · 부제학 · 대사간 등을 거쳤으며 일시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 趙光祖 ) 일파가 몰락한 뒤 발탁되어 이조판서에 올랐다.

아들 희()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중종의 부마(駙馬)가 되자, 이를 계기로 권력을 남용하다가 1524년 영의정 남곤 ( 南袞 ) · 심정 ( 沈貞 ), 대사간 이항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 ( 豊德 )에 유배되었다.

남곤이 죽자 1530년 유배 중이면서도 대사헌 김근사(金謹思)와 대사간 권예(權 畝 )를 움직여 심정의 탄핵에 성공하고, 이듬 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서용되어 도총관 ( 都摠管 ) · 예조판서 ·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를 거쳐 1534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1531년 다시 임용된 이후부터 동궁(東宮: 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해 허항 ( 許沆 ) · 채무택 ( 蔡無擇 ) · 황사우(黃士佑) 등과 함께 정적(政敵)이나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켰다.

정광필 ( 鄭光弼 ) · 이언적 ( 李彦迪 ) · 나세찬 ( 羅世纘 ) · 이행 ( 李荇 ) · 최명창 ( 崔命昌 ) · 박소 ( 朴紹 ) 등 많은 인물들이 이들에 의해 유배 또는 사사되었으며, 경빈 박씨(敬嬪朴氏)와 복성군 미(福城君嵋) 등 종친도 죽음을 당했다. 또한 왕실의 외척인 윤원로 ( 尹元老 ) · 윤원형 ( 尹元衡 )도 실각당하였다.

1537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 文定王后 )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인 ( 尹安仁 )과 대사헌 양연 ( 梁淵 )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사사되었다.

허항 · 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 · 희락당고 希樂堂稿 등이 있다.

 

김익

조선조(朝鮮朝) 정조(正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익과   그의 아들 재찬(載贊 : 순조  때 영의정을 역임), 유연(有淵 : 재찬의 손자로 고종   우의정을 역임)이뛰어났다.

 

김후, 김준

통덕랑(通德郞) 재혁(載奕)의 아들 후(순조  때 대사간에  이름)와 재칠(載七) 아들 준(정조 때 좌참찬.좌부승지를 지냄)은 정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

 

김위

순조(純祖)  때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날림.

 

 

金安老(김안로) 의 일화.

 

김안로(金安老)가 젊었을 때에 관동 지방에 노닐다가 어느날 밤 주막에서 꿈을 꾸었는데 귀신이 나타나서 시를 읊어 주었다. 우 임금 땅 산천 밖에 봄날은 무르녹고 순 임금 궁정의 새와 짐승 사이에선 음악이 연주되네. ” 그러고는 이것은 네가 벼슬길에 오를 글귀이다. ” 라고 말해 주었는데 꿈이 하도 이상해서 깨어난 뒤에 잊지 낳도록 종이에 곧 써 두었다.

그 이듬해 정시(庭試)를 치르러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시제로 내어서 시험하였다.

그 가운데  ‘ 봄날 이원제자(梨園弟子)들이 침향정(沈香亭) 가에 앉아서 한가로이 악보를 펼쳐 본다 라는 제목도 들어 있었는데 한()자로 압운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귀신이 읊어 준 글귀를 생각해 보았는데, 제목의 뜻과 아주 잘 들어맞았으므로, 꿈에서 배운 그대로 써서 내었다.

강목계(姜木溪)가 시험지를 채점하는 고관(考官)으로 있었는데, 그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장원으로 뽑았다.

 

그런데 정승 김안국(金安國)은 평소에 글을 잘 알아본다고 소문이 났는데, 마침 시관(試官)으로 끼어 있다가 김안로의 글을 보고 너무나 잘 지은 글이라 이 구절은 귀신이 지은 것이지, 사람이 지은 시가 아니다. ”라고 마하며 곧 김안로를 불러 물었더니, 김안로는 그가 격은 사실을 다 말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김안국의 식견에 탄복하였고, 김안로는 하늘이 준 운명이니 그대로 장원을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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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 김씨(延安金氏) 남한(南韓)에 총  16,689가구, 68,9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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