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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김씨:선성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예안:선성김씨)

 

본관(本貫): 예안(禮安): 선성(宣城)

시조(始祖): 김상(金尙)

유래(由來):

 

예안(禮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 속해있는 지명으로 한 때 (宣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신라종성(新羅宗姓)의 후예인 예안 김씨(禮安金氏)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낸 김상(金尙) 시조(始祖)로 하고 보승낭장(保勝郎將) 김 로(金 輅)을 중시조(中始祖)로 계대(系代)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담(金淡)

1416(태종 16) 1464(세조 10). 조선 세종 때의 천문학자.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 할아버지는 고려 때 중랑장 로()이고, 아버지는 현감 소량(小良)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했으며, 1435(세종 17) 정시 ( 庭試 )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이순지(李純之)가 간의대 ( 簡儀臺 )에 나가 천문을 측후하다가 어머니 상을 당하자, 그 일을 대신 맡게 되었다. 1437년에는 집현전저작랑, 1439년에 집현전박사가 되었고, 그해 이순지와 더불어 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 을 고교윤정(考校潤正)해서 올렸다.

이 때 왕명으로 정흠지 ( 鄭欽之 ) · 정초 ( 鄭招 ) · 정인지 ( 鄭麟趾 ) 등이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대통력태양태음통궤 (大統曆太陽太陰通軌) 등에 대하여 그 계산법을 밝히고, 약간의 은괄( 霹 括 교정)을 가해서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 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규장각본인 칠정산내편 태양통궤 · 태음통궤 등이 모두 이순지와 김담의 편찬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칠정산내편 의 교정 · 편찬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25세 때에는 전료(殿僚)와 더불어 국어와 음의(音義)를 보정해서 올렸다.

28세 때에는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가 되었고, 이듬해에 정인지 · 이순지 · 박윤창(朴允昌)과 더불어 경기도 안산(安山)에서 양전 ( 量田 )을 시행할 때도 공이 컸다. 29세 때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제언종사관(堤堰從事官)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32세 때 승문원부교리로 있을 때, 명을 받아 전부구등지법 田賦九等之法 을 찬정하였다. 1448(세종 30)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이 되었고, 이듬해 친상을 당하였으나 계속 출사하여 역법과 측후의 일을 하였다.

1451(문종 1) 사헌부장령이 되어 불사(佛事)를 배척하는 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145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었고, 이어 충주목사로 나갔다. 1456(세조 2) 안동부사, 1458년 경주부윤, 1464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 · 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고, 정인지 · 정초 · 정흠지 · 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 ·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 · 칠정산외편 · 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 七政算外篇丁卯年交食假令 · 대통력일통궤 大統曆日通軌 · 태양통궤 太陽通軌 · 태음통궤 太陰通軌 · 교식통궤 交食通軌 · 오성통궤 五星通軌 · 사여전도통궤 四餘纏度通軌 · 중수대명력 重修大明曆 · 경오원력 庚午元曆 · 선덕십년월오성릉범 宣德十年月五星陵犯 등 많은 천문역서를 교정, 편찬하였다.

그가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관내에 도적이 많아 고을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그는 이 도적을 잘 다스렸으며, 장물의 증거를 발견하면 비록 그 양이 적더라도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광해군 때에 사림에서 향현사 ( 鄕賢祠 )와 문계서당(文溪書堂)을 지었는데, 뒤에 다시 구강서원 ( 龜江書院 )과 단계서원(丹溪書院)으로 옮겨 개명되었다가 흥선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김수손(金首孫)

1456(세조  2)에 급제한 수손(首孫)은 숙량(叔良)의 손자(孫子)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며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참여했다.

 

김늑은

()의 현손(玄孫) 늑은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 말을 잘하여 선조(宣祖) 때 직신(直臣)으로 유명했으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백성들을 휘유 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광해군(光海君) 생모(生母) 김씨(金氏)를 위해  궐내에 봉자전(奉慈殿)을 세우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당하자 영주(榮州)로 낙향하여 구학정(龜鶴貞)과 천운정(天雲亭)을 지어놓고 당대의 석학(碩學) 이수광· 한석봉(韓石峰) 등과  교유했다.

 

김해

수손(首孫)의 증손(曾孫) 해가 임진왜란 때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아들 경원(慶遠)과 함께 싸움에서 순절하여 이름을 떨쳤다.

 

김약연(金若鍊)

영조(英祖) 때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약연(若鍊)은 뛰어난 문장(文章)으로 [두암집(斗庵集)]을 남겨 선비들의  학문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김태일(金兌一)

숙종(肅宗) 때의 사간(司諫)으로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했던 태일(兌一)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해일(海一)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金玏(김륵) 선생의 일화.


柏巖(백암) 金玏(김륵)(1540~1616)   선어대와 유관 인물.
선생의 본관은 예안이고 자는 希玉(희옥)이며 호는 柏巖(백암)이다. 시호는 敏節(민절)이고 영천 출생이다.
처음에 朴承任(박승임)·黃俊良(황준량)선생, 뒤에 퇴계 선생에게 배웠다.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예문관, 사간원 등 여러 직을 지내고, 1584년 영월군수, 1592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安集使(안집사)로 영남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고, 1593년 경상우도관찰사, 이어 대사헌이 되어 '시무 16조'를 상소하였다.
뒤에 충청도관찰사, 안동부사 등을 지내고, 1612년(광해군 4) 대사헌으로서 金直哉(김직재)의 誣獄(무옥)에 연루되어 강릉으로 유배되게 되었으나,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영천(현재 영주)의 구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백암문집이 있다
.

 

 

金宗傑(김종걸)선생의 효행.

 

십 년 기도를 드리는 외아들

 

김 종걸 (金宗傑 : 호는 황파(黃坡), 1628-1688.)은 지금의 경북 봉화군 봉화읍 황전리 690번지에서 통덕랑(通德郞) 김 해윤(金海潤)과 봉화 금씨(琴氏)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부유하고 유족한 가정의 외아들로 출생하였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귀여움과 부러움을 독차지하였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아홉 살에 벌써 소학 공부를 마쳤으며, 열 두 살에는 사서 삼경에 통달할 경지에 이르렀고, 글씨 또한 잘 썼으며, 같은 또래 어린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착한 어린이로 자라났다. 어릴 때 부터 웃어른을 공경하고 효성 또한 지극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촉망과 칭송을 받았으며, 행실이 착했음은 물론 재주도 매우 뛰어났다.

 

하늘이 내린 착한 종걸은, 과거에 등과하여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는 주위의 촉망을 받고 자라났지만 불행하게도 어머니 금씨가 병환에 눕게 되었다. 그는 어머님 병환을 고치기 위하여 아첨저녁 극진히 어머님을 모시고 지극한 정성을 다 쏟았지만 어머님의 병환은 차도가 없었고 병환은 1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어린 소년 종걸은 어머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어머님께서 수저를 드셔야만 자기도 음식을 먹고 어머님께서 약을 잡수셔야만 자리를 떴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나이 어린 소년이 어떻게 저와 같이 행동하며 극진히 어머님을 모실까? 하늘이 내리신 효자라고 입을 모았다. 이와 같은 일상 생활 속에서 그는 장차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청운의 꿈을 이루어야 하느냐, 아니면, 외아들로서 병환으로 신음하는 어머님을 돌보아야 하느냐로 고민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었다. 마침내 그는 과거 시험을 뒤로 미루고 병석에 누우신 어머님의 병구완에 전념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먼저 종걸 소년은 소태산(小太山 : 황전마을 동녘 소재) 산마루에 제단을 쌓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과 기후를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하늘 에 제사를 드리며, 어머님의 병환이 완쾌되기를 빌면서 지내기를 10여 년 간 계속한 결과, 마침내 어머님의 병환이 완쾌되기에 이르렀다.

어머님의 병환이 치유된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하늘이 그의 효심과 투지를 시험이나 하려는 듯, 또 다시 그의 아버지께서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석에서 일어나신 어머니 금씨 부인은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여,

너의 아버지 병환은 내가 구완할 터이니, 너는 학문에 전념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어라.”

하고, 간곡하게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참다운 도리라고 느끼고, 이 일에 전념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가 26 세 되던 1653(효종 4) 9월 어느 날, 아버지 병환이 갑자기 위독하여지자 이미 마련된 재단에 제수를 차려 놓고 밤낮 7 일간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는데, 그의 효심을 갸륵하게 생각하심인지 혼연, 백발 노인이 나타나 정좌하고 말씀하시기를,

안동군 예안면에 가면 유명한 의원이 있는데, 그분을 찾아 약을 구하면 효험이 있을 것이다.”

하고 사라졌다. 김 종걸은 그 말씀을 듣고 지체하지 않고 예안의 의원을 찾 기 위하여 밤중에 출발하였다. 도중 용수재(龍首峴)란 높은 산을 넘고 있는 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뭇 짐승들을 쫓으며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여 무사히 의원 댁에 당도하도록 도왔다.

 

밤중에 의원을 찾으니, 의원도 그 말씀을 듣고 정성껏 약을 마련하여 주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함을 생각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길을 떠나 밤중에 갈길을 재촉하는데, 돌아오는 길에도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마을 입구까지 무사히 도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집에 도착하여 약을 정성껏 달여 아버지께 바치니, 아버지의 병환이 차도가 나고 마침내 아버지의 병환을 구하였다고 한다. 현재까지 그 제단이 있었던 산마루는 천지등이라 불려 전해 오고 있다.

 

나라에서 내린 음직蔭職:생원 진사 유학으로서 하는 벼슬의 총칭도 사 양하고, 향리에서 조용히 부모님을 봉양하고 있었다. 하늘도 감탄한 그분의 효성과 학행에 대한 선행이 널리 알려지자, 지방 사림에서 소상하게 그분의 선행을 나라에 아뢰니 효종으로부터 통정대부 훈련원 도정 (通政大夫訓練院都正)과 부호군(副護單)의 벼슬이 차례로 제수되었다. 그리나, 그는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지성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과거를 하지 않은 그는 여러 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나, 번번히 사양하고 당대의 사림 대표였던 창설제 권 두경(蒼雪齊 權斗經) 송월제 이 시선 (松月齊 李時善) 등과 수시로 사귀면서 지방 문예를 위하여 송대 (松臺)를 쌓고 정자陶巖亭를 지어 시회(詩會)를 열어 문예를 진흥하고 지방 향약(鄕約 )을 지켜서 이웃 간 서로 돕고, 착한 일하기를 권하며, 효행에 힘쓰게 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일으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688(숙종 14) 61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니 영남 사림에서 뜻을 모아 그의 효행과 학행을 소상히 적어 나라에 아뢰니 나라에서도 그 효심 학행을 가상히 생각하여 숙종 14년에 가선대부 이조 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의 증직(贈職 : 충신 효자 및 학행이 높은 사람에게 죽은 뒤에 관직과 품계를 추증함)이 추서(追叙)되고 사림에서는 봉산리사(鳳山里社 : 경북 봉화군 봉화읍 황천리 소재)를 세워 그분의 공덕을 추모하고 있다.

 

자기 육신의 고통을 돌보지 않고 오직 효행으로 일관한 김 종걸의 생애를 통해서 후세 사람들은 많은 감명을 받고 있으며, 귀감이 되고 있다. 문헌으 로는 황파집(黃坡集)이 전한다.

 

권 석호 : 봉화군 봉화여자중고등학교 교감

참고 문헌 黃坡集, 우리 故庄傳統, 奉化郡誌, 故庄鄕土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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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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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예안 김씨(禮安金氏) 남한(南韓)에 총 3,648가구, 14,6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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