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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울산김씨)

 

본관(本貫): 울산(蔚山)

시조(始祖): 김덕지(金德摯)

유래(由來):

 

울산 김씨(蔚山金氏)의 시조(始祖)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별자(別子)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935(신라 경순왕 9) 10월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양위(讓位)하려 하자 형인 일(: 마의태자)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를 버리고 형과  함께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갔다고  하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울산김씨족보(蔚山金氏族譜)]에는 그가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덕지(德摯)14세손 환() 고려조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학성군 (鶴城君)에 봉해지고 충숙왕(忠肅王) 때 문숙(文肅)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 받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 울산(蔚山)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 인물

 

김계흥(金季興)

()의 아들 계흥(季興)이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음.

 

김온(金穩)

환의 증손(曾孫) ()1387(우왕  1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돌아와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며, 1395(태조 4) 회군원종공신(回軍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거쳐 1400(정종  2)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김인후(金麟厚)

1510(중종 5)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전라남도 장성 출신. 아버지는 참봉 영()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살 때 김안국 ( 金安國 )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입학, 이황 ( 李滉 )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 ( 湖堂 )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해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당시 이항 ( 李恒 )과 기대승 ( 奇大升 ) 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해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해,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노수신 ( 盧守愼 )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였다.

,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해,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또한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 ( 鄭澈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 ( 吳健 ) 등이 있다.

그는 1796(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 ( 筆巖書院 ), 옥과의 영귀서원 ( 詠歸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 西銘事天圖·백련초해 百聯抄解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신남(金信男)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킨 신남(信男)은 운봉(雲峰)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김천록(金天祿)

천록(天祿)은 용맹(勇猛)과 지략(智略)이 출중(出衆)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여주 판관으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광양군(光陽郡) 옥곡(玉谷)에 정려가  세워졌다.

 

김종진(金宗辰)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 역임.

 

김우휴(金羽休)

승지(承旨)

 

김경휴(金敬休)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김봉우(金鳳祐)

군수(郡守)

 

김진우(金鎭祐)

교리(校理)

 

김동수(金東洙)

시독(侍讀)는 이름을  날렸다.

 

김대수(金大洙)

한말(韓末)에 중추원(中樞院)의 의관(議官)

 

김기중(金祺中)

군수(郡守)

 

김병로(金炳魯)

1887(고종 24)1964. 법조인·정치가. 호는 가인(街人). 전라북도 순창 출신. 아버지는 사간원정언 상희(相熹)이고, 어머니는 장흥 고씨이다.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 ( 田愚 )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강습소)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에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 ( 龍湫寺 )를 찾아온 최익현 ( 崔益鉉 )의 열변에 감화, 1906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그 해 창평 ( 昌平 )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중에 잡지 학지광 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변론하였으며,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 ( 許憲 김용무(金用茂김태영(金泰榮)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그가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학생사건, 6·10만세운동, 정의부·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 ( 李商在 )의 뒤를 이어 신간회 ( 新幹會 )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정년퇴임 뒤에도 재야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대표, 1963년 민정당 ( 民政黨 )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그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 尹潽善 허정 ( 許政 )과 함께 야당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대법원장 재임 93개월 동안 그는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사법권독립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던가는 이에 대한 견해차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승만(李承晩)과의 마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6·25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세태의 변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곧은 절개는 후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19641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회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으며,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김성수(金性洙)

18911955. 교육가·언론인·정치가. 호는 인촌(仁村). 전라북도 고창 출신. 호남의 거부였던 경중(暻中)의 넷째 아들로, 3세에 큰아버지인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고, 13세에 고광석(高光錫)과 혼인하였다.

1906년 전라남도 창평에서 송진우 ( 宋鎭禹 )와 함께 영어공부를 하였고, 1908(18)에 군산의 금호학교(錦湖學校)에 다녔다. 같은 해 10월 새 학문을 배우겠다고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 1914년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내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교육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19154월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19173월에 교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경성직뉴주식회사 ( 京城織紐株式會社 )를 맡아 경영하였다.

19191월부터 송진우· 현상윤 ( 玄相允 )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서, 그 뜻이 3·1독립운동으로 결실되었다.

같은 해 10, 민족의 산업을 일으키는 바탕으로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를 세웠고, 19204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1922년에는 물산장려운동 ( 物産奬勵運動 )을 폈고, 1923년에 민립대학설립운동 ( 民立大學設立運動 )을 펴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썼다. 1929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을 설립했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문물과 교육실태를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듬해인 19323월에는 어려운 형편에 있던 보성전문학교 ( 普成專門學校 )를 맡아 경영하여 교장이 되었다.

194510월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461월에는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을 다시 맡았으며, 같은 달에 송진우의 뒤를 이어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당수)가 되었다.

, 같은 해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47년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反託獨立鬪爭委員會)의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하였고, 19492월에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 ( 民主國民黨 )이 창당되자 그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15월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이 되었으나, 정부의 국회탄압사건에 항거하여 이듬해 5월 그자리에서 물러났다. 195310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병석에서 호헌세력(護憲勢力)의 단결을 호소하다가 1955218일 죽었다. 1955224일 국민장으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학병제, 징병제를 고무·찬양한 것 등 그의 과거 친일행적이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金麟厚(김인후) 선생의 일화.

김인후는 출사 후에 중종에게 집에 돌아기 부모를 봉양f하겠다는 상소를 올려 옥과현감을 제수 받았다. 김인후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었다. 그 이우는 인종의 죽음이 그에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인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인후는 울부짖으며 문을 닫고 을 핑계 삼아 세상을 등져 버렸다.

해마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때면 읽던 책을 치우고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인종의 제삿날이 오면 뒤 남묘산 속에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통곡하였다.

김인후는 인종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기도 했다.

 

명종이 즉위하자 金麟厚(김인후)에게 校理(교리)를 제수했다.

그는 두어 술을 싣고 서울로 출말했다. 마을의 주막을 만나면 울타리의 꽃을 상대로 술을 마셨다. 10일 동안 겨우 몇 리를 가다가 술이 떨어져 버렸다.

그는 병을 핑계 삼아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 인종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그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김인후는 150651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리 해 지나 그의 이웃에 사는 세억이란사람이 병으로 죽었다가, 하루 만에 다시 살아나 아들애게 말했다

내가 숨이 끊어질 어떤 사람에게 이끌러 관청으로 들어갔단다. 집이 굉장히 크고 이전과 나졸들이 많이 늘어서서 웅성거렸단. 내가 공손히 걸어올라가 보니 마루 위에 재상이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여기에 온내력을 묻더니 이런 말을 하더구나.

년에 수명이 다하는 기한이 아닌데 잘왔구나. 나는 이웃에 살던 金麟厚(김인후)이니라.’ 이러면서 종이에 글씨를 주었다.

세억은 이름이요, 지는 대년이다. 구름을 헤치고 멀리 외서 지미성을 불렀도다. 네가 77세가 되거든 다시와서 보기로 하되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함부로 이 말을 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그는 77세에 세상을 마쳤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金麟厚(김인후) 선생의 일화.

인종이 동궁 시절, 김인후는 시강원 設書(설서)가 되었다. 인종은 일찍 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금세 친해졌다. 김인후가 세상에 이름을 친 것은 성균관 과시에서 정원하면서부터다.

인종은 김인후가 숙직하는 방에 가서 강론을 히고 주지대전을 하사했다.

이때 김인후의 동료들은 몹시 부려했으나 한편으로는 시기했다.

 

인종은 동궁 시절 손수 그린 묵죽 한 폭을 김인후에게 주었다. 그가 시를 지어 화답했다. 인종이 묵죽을 내린 것은 정차 그를 크게 쓰려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명신 金安國(김안국)이 전라도 찰사가 되어 김인후를 만나보고 소우라 부르고, 참으로 3대 위의 인물이라고 그를 극찬했다.

이런 인연으로 김인후는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金麟厚(김인후) 선생의 일화.

 

하서 金麟厚(김인후)는재 厚之(후지)이며 호는 河西(하서)이다.

그는 전라도 장땅에서 살았고, 죽은 뒤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문정공이란 호를 받은 호님의 대학자였다.

김인후와 仁宗(인종)은 남다른 데가 있어 후세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다섯 때 글을 짓고 글씨를 써서 한때 신동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가 아홉 때 기묘 8현의 한 사람인 기준을 만났다. 기준은 김인후를 만나보고 이렇게 말했다.

뒷날 이 아이는 세자(인종)의 신하가 것이다.”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덕이 일찍부터 드러나 기준이 예언한 말이었다.

김인후는 문괴에 올라 호당(독서당의 별칭)에 들어갔다. 그때 그는 염병에 걸려 목숨이 몹시 위급했다. 사람들은 전염병이 겁이 나서 감히 돌보려 하지 않았다.

 

이때 柳希春(유희춘)이 관관으로 있었는데 그가 아까워 자기의 숙소에 두고 밤낮으로 정성껏 간호하여 살렸.

柳希春(유희춘)이 을사사화 때 화를 입고 북쪽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김인후가 찾아가 작별하면서 말했다.

그대가 곳으로 귀양을 떠나니 처자들이 의지할 곳이 없을 것이오, 그대의 어린 이들을 내가 사위로 삼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고맙네.”

유희춘의 아들 경령은 똑똑하지 못했고 나이가 김인후의 딸과 지 않았으나, 그는 약속을 지켜 딸과 훈인시켰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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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구조사결과남한(南韓)에 총 7,558가구, 31,8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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