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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김씨:원성김씨(金)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원주:원성김씨)

 

본관(本貫): 원주(原州): 원성(原城)

시조(始祖): 김거공(金巨公)

유래(由來):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갈려진 원주 김씨(原州金氏) 경순왕(敬順王)의 여덟 째 아들 일선군(一善君) 김 추(金 錘)8세손 김거공(金巨公)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시조(始祖) 거공(巨公)은 고려조에서  서리(胥吏)와 내시(內侍)를 거쳐  1142(인종 20) ()나라 동경(東京)을 다녀온 후 의종(毅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 2품 벼슬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원성백(原城伯)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원주지방(原州地方)에 세거(世居)하며 거공(巨公)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원주(原州)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연지(金連枝)

1396(태조 5)1471(성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간보(幹甫). 아버지는 중추원부사 을신(乙辛)이다. 1411(태종 11) 1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감찰·형조좌랑을 거쳐, 1428(세종 10)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郎)에 올랐으나, 형옥관리를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고신(告身 : 관리로 임명된 사람에게 주는 사령장)이 회수되고 귀양을 갔다.

그 뒤 관직에 복귀되어 지평 ( 持平 )을 지내고, 1442년 세종이 세자에게 정사를 대리시키고자 둔 첨사원(詹事院)의 동첨사(同詹事)가 되어 출납을 주관하여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조의 관원과 틈이 생겨 부평현령으로 좌천되었는데, 이 때 그가 극심한 흉년을 만난 백성을 잘 진휼한 공으로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발탁되고, 이어서 상호군 ( 上護軍 )에 올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하였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참의를 거쳐 1452(문종 2)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올라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참판·대사헌·한성부윤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로서 선정을 폈다.

그 뒤 대사헌·한성부윤을 재차 역임하고, 1467(세조 13)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성품이 단아하고 근실하여 공무에 충실하였으며, 언행을 함에 있어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시호는 대경(戴敬)이다.

 

김응남(金應南)

1546(명종 1) 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 충청도병마절도사 말손(末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안우 ( 安祐 )이고, 아버지는 형()이며, 어머니는 증 참판 김덕유(金德裕)의 딸이다.

156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8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 · 홍문관의 정자 ( 正字 )를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했으며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1583년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한 삼사의 송응개 ( 宋應漑 ) · 허봉(許 燈 ) · 박근원 ( 朴謹元 ) 등이 선조의 노여움으로 도리어 유배될 때 그들과 일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평소 이이를 존경했기 때문에 실제로 삼사의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임지에 도착하자 성심껏 기민을 구휼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며 민속을 바로잡았다. 그래서 뒤에 인조 때 김상헌 ( 金尙憲 )이 쓴 남정록 南程錄 이나 효종 때 이원진 ( 李元鎭 )이 쓴 탐라지 耽羅誌 에는 그 때의 치적을 칭송하는 글이 실려 있다.

2년 뒤 1585년 우승지로 기용되고 이어 대사헌 · 대사간 · 부제학 ·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갔다. 마침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국서를 받고 조선이 일본과 내통한다고 의심하는 자가 많았는데 이를 힘써 해명해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귀국 후 한성판윤이 되었고, 다음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왕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 ( 柳成龍 )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왕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항상 나라를 복구하는 급선무는 군사를 훈련하고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인심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안무사로서 영남 지방에 내려갔다가, 풍기 ( 豊基 )에서 병이 위독해져서 귀경 후 사직하고 이듬 해 죽었다.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김준룡(金俊龍)

1586(선조 19)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수부(秀夫). 할아버지는 전설사별좌(典設司別座) ()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두남(斗南)이며, 어머니는 도호부사 김희필(金希弼)의 딸이다.

1608(선조 41)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황해도·경상도·함경도의 병영에 근무하였다. 1617(광해군 9) 인동부사가 되었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1628년에는 황해병사가 되었으며, 북병사(北兵使)를 거쳐 1636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관할 군사를 이끌고 적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면서 곳곳에서 군사를 모아 병력을 보강하였다. 직산 ( 稷山 )을 경유, 용인의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를 이용, 이를 거점으로 포진하였다.

공경(孔耿)의 청나라 군대 수만이 공격해오자 필사적으로 싸워 청태조의 부마 백양고라(白羊高羅) 등 많은 적병을 사살하였으나, 우리의 병력 손실도 커서 그는 휘하의 기병 수백을 이끌고 수원에 도착, 다시 남하하여 재기를 계획하였다.

감사 이시방 ( 李時昉 )은 그의 전공을 시기하여 모함하였으나, 이성구 ( 李聖求 최명길 ( 崔鳴吉 )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되었다. 뒤에 어영중군(御營中軍김해부사·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김경문(金敬文)

준룡(俊龍)의 아들 경문(敬文)은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김덕원(金德遠)

눈룡의 손자(孫子) 덕원(德遠)은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폐비 민씨(民氏) 복위운동을 반대했다.

 

김몽양(金夢陽)

덕원(德遠)의 아들 몽양(夢陽)이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김몽서(金夢瑞)

목사(牧使)

 

김조윤(金曺潤), 김화제(金華濟)

군수(郡守)를 역임.

 

김우명(金遇明)

대사간(大司諫)

 

김봉년(金鳳年)

현감(縣監)

 

 

 

 

                            <한민족대성보>에서 표 인용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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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국에 총 2,192가구, 9,3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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