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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진주형씨(邢)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진주형씨)

 

 

본관(本貫): 진주(晉州)

시조(始祖): 형웅

유래(由來):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으로 전()한다.

(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가문의 중요 인물

 

형방(邢昉)

13세손 방()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형공미(邢公美)

()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시호(諡號)는 충선(忠宣),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상서(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1280(충렬왕 6) 12월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 수군(水軍)을 이끌고 일기도(壹岐島)에 원정(遠征)하여 왜군(倭軍)을 대파(大破), 그 공()으로 공신(功臣)이 되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16:형공미(邢公美) 중시조(中始祖) 3(孫子)

()는 충선공(忠宣公)이다. 작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내고, 1280(충렬왕 6)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일본 일기도에서 왜군(倭軍)을 정벌(征伐) 하는데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智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 졌으므로, 후손들은 방()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晉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시호(諡號)가 충선(忠宣)이고, 고려 고종(高宗) 신축년(辛丑年)에 사마(司馬)였고, 원종 8(서기1267)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처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1280(충렬왕 6) 12월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이듬해 수군(水軍)을 이끌고 일기도(壹岐島)에 원정(遠征)하여, 왜군(倭軍)을 대파(大破) 정벌(征伐) 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지밀직사사(智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이때부터 방()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晉州)를 관향(寬鄕)으로 삼아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형찬(邢贊)

()의 현손(玄孫) ()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다.

 

형군소(邢君紹)

그의 아들 군소(君紹)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永明寺浮碧樓[영명사부벽루]

江樓孤笛動龍眠[강루고적동룡면]----강루의 외로운 피리에 잠자던 용이 움직이고

醉裏風流白日仙[취리풍류백일선]---- 술취한 속의 풍류는 한낮의 신선이로구나.

遠岫似雲雲似岫[원수사운운사수]----: 먼데 봉우리는 구름인양 구름은 봉인것 같고

長天浮水水浮天[장천부수수부천]---- 먼 하늘은 물에 뜨고 물은 하늘에 떠있구나.

兩崖出沒高低岸[양애출몰고저안]----양쪽 벼랑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높고 낮은 언덕에

萬派朝宗巨細川[만파조종거세천]----크고 작은 냇물이 만 갈래로 모여드네.

一葉扁舟何處客[일엽편주하처객]----일엽 편주는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가 ?

茫茫獨去夕陽邊[망망독거석양변]--- 석양 무렵에 아득히 홀로 가는구려.....

 

형군철(邢君哲)

군소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형세영(邢世英)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났다.

 

형협(邢浹)

()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邢國胤(형국윤)  선생의 일화.

 

암행어사가 탄복한 형(邢) 효자 : 남원군(南原郡)

형국윤(邢國胤)은 서기 1773년(영조 49) 남원군 사매면(巳梅面)에서 형억동(邢億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지평(持平) 한상기(韓尙箕)의 증손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아버지가 40상이 되었을 때, 우연히 눈이 멀어 장님이 되었는데 앞 못보는 사람은 세상일이 갑갑한지라 묻는 말이 많다. 또 옆에 사람이 없으면 더욱 심심해하므로 장님 부모를 모시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형국윤은 하루 몇 백 번 질문을 해도 다 응하되 한번이라도 타인을 시키지 않고 손수 그 보조역을 다하였다. 또 끼니마다 밥을 입에 넣어 주고 고기며 반찬도 맛있는 것으로 골라 넣어 주는 등 40년의 긴 세월을 하루같이 변함이 없었다.

80세가 가까우니 이제는 어머니마저 앞을 잘 못 보게 되었다. 두분을 한결같이 봉양하는 형국윤 부부의 효행은 근처에 화제가 되었는데 어느덧 암행어사 이교영(李敎英)이 이를 탐지하고 마을을 찾아 갔다. 어사는 그의 효행을 실지로 체험해 볼 양으로 형효자의 이웃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그때 마침 형효자 이웃집에 초상이 나 돼지를 잡으니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아버지가 궁금하여 저게 무슨 소리냐 물었더니 국윤(國胤)이는
「이웃 집 상가에서 돼지 잡는 소리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는데도 아버지는 똑 같은 소리를 세 번이나 되묻는다. 국윤이는 그때마다 더 자세하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이것을 몸소 보고 알게된 어사는
「세 번 같은 말을 묻되 세 번 대답이 더욱 공손하니 참으로 효자로다.」하고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부모는 이제 80세를 넘어 1년 간격으로 두 분이 다 별세하시니 가사는 한씨 부인에게 맡기고 국윤은 무덤 옆에 초막을 지어 여묘(廬墓)하기 3년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1854년(철종 5) 큰 은전을 내렸다. 형두원(邢斗元)은 형진(邢震)의 아들인데 서기 1793년(정조 17)에 출생하였다.
그는 운봉에 거주하는 동복(同福) 오씨 오몽진(吳夢鎭)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형두원은 아내에게 「우리 집은 대대로 가난한 중에도 부모님들이 나를 이 만큼이나 가르쳐 주신 은혜는 참으로 하해 같은지라 우리 부부는 열심히 일하여 부모 은혜 갚기에 온 정력을 다 합시다.」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씨 부인이 요절한지라 처음에는 장가를 재차 안가기로 마음먹었지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재취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재취부인은 같은 마을 동래(東萊) 정씨 였다.
두 부부는 먼저 별세하신 어머니 출상이 끝나자 이번에는 80세 고령의 아버지마저 별세하시니 두원은 전후 4년 간을 여묘(廬墓)하였다.
세상에서는 형두원의 효자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형씨가문(邢氏家門)을 효자 집안으로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邢世績(형세적)  선생의 일화.

양참의(梁參議)의 추천 받은 효자  : 남원군(南原郡)

형세적(邢世績)은 진양(晉陽) 형씨(邢氏)로 서기 1666년(현종 7) 보절면(寶節面) 괴양리(槐陽里)에서 형엽(邢燁)의 넷째 아들로 태어 났다.
그는 학문도 뛰어 났으나 부모에 효성이 지 극하였다. 아홉 살 때 일이다.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계시니 세적(世績)은 그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고 울면서 간호를 하는데 지나가는 중이 측은히 생각하고 그 까닭을 물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계시는데 약을 구하지 못해 울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낳게 해 주십시오」하고 세적은 중에게 하소연하였다.
중은 잠시 사라졌다가 여러 가지 풀뿌리와 나무 가지를 가지고 돌아와 세적에게 이것을 다려 드리도록 이른 후 사라졌다.

세적은 중에게 몇 번이고 절을 올리며 고마워 하고 약을 끓여 아버지께 드렸더니 몇 일 만에 아버지는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 중이 보통 중이 아니라 세적의 효성에 감동되어 나타난 도승이라 말하였다.

몇 년 후 아버지는 다시 병을 얻으니 이때는 70세가 넘은지라 온갖 약을 다 써도 병은 갈수록 악화되어 이제는 생명이 실날같이 위태하였다. 당황한 세적은 손가락을 짤라 피를 아버지께 드렸으나 정성의 보람 없이 별세하시니 아버지는 71세이고 이재 세적은 겨우 14세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이었지만 아버지의 3년 상을 지내는 동안 입에 고기를 대지 않고 몸가짐을 근신하니 하루는 마을 어른들이
「네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고기를 입에 대지 않으니 한참 나이에 몸이 수척하여 쓰겠느냐 ? 3년 상도 지났고 하니 이제는 먹을 것을 먹고 몸을 보신하는 것이 어떻겠느냐?」하며 고깃국을 권하였으나

「어른들께서 이토록 염려하여 주시니 감사하오나 집에 어머니가 계시니 여쭙고 먹겠습니다.」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 자리를 회피하였다.
어머니는 이러한 아들이 기특하였으나 한편 걱정도 되어 「너는 불행히도 형들 셋이 다 죽고 외아들이 되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만 생각하고 몸이 이렇게 파리하니 어머니 마음이 아프기 짝이 없다. 이제부터는 고기도 먹으면서 몸을 튼튼히 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니라.」하고 타이르니 그제야 어머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어육을 입에 대기 시작하였다.

나이 20세에 문화(文化) 류씨(柳氏) 류몽상(柳夢相)의 따님을 맞아 장가를 들었는데, 세적은 그의 아내에게 「부부는 일신이라 부인은 나와 뜻을 한가지로 어머니께 효도를 다 합시다.」하니 아내도 남편에게 따를 것을 거듭 거듭 맹세하였다.
그 어머니가 뜻 밖에 낙상하여 오래 까지 고생하니 두 부부는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노환으로 좀처럼 효과가 업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지나가는 길손이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고 효성을 탄복하며

「개똥으로 술을 빚어 드리면 신통한 효과가 있으리라」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부부는 길손이 시키는 대로 곧 서둘러 견분주(犬糞酒)를 만들어 드렸더니 과연 병이 완패되고 그 후 오래오래 살아 천수를 마치니 83세 까지 장수하고 별세하였다.

이 때 세적은 「아버지가 별세하실 때에는 14세의 어린 나이로 마음껏 섬기지 못한 것이 한되어 어머니나마 백세 넘도록 바랐더니 겨우 83세로 돌아가시니 망극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하고 슬퍼하였다.
그는 어머니 무덤 옆에 초막을 지어 3년 간을 시묘하였는데 삼년상을 치른 후 아내에게 「아버지 돌아가신 때에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안하기 위하여 여묘를 못하였는데 이제는 어머니 여묘가 끝났으니 그때 못한 아버지 여묘를 3년 더 할까 하니 부인은 그리 알고 뒷바라지를 부탁하오.」하며 아버지 무덤에 3년 여묘를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형효자(邢孝子)는 하늘이 낳은 효자라」 칭송해 마지않았다.

세적은 78세로 별세하였는데 참의(參議) 양주익(梁周翊)이 그의 행적을 낱낱이 조정에 상주하여 서기 1755년(영조 31) 그의 효자각(孝子閣)이 세워졌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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