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남양홍씨(洪)-1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남양홍씨)

 

 

본관(本貫): 남양(南陽):당홍계(唐洪系)

시조(始祖): 홍천하(洪天河)

유래(由來):

 

홍씨(洪氏)는 당()나라 태종(太宗)이 여덟 명의 학사(學士)를 문화사절(文化使節)로 고구려에 파견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온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으로 전한다.

천하(天河)는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했으며,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 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유학(儒學) 발전에 공()을 세워 문무왕(文武王) 때 당성(唐城 : 남양의 옛 지명) ()에 봉해지고, 신무왕(神武王)이 태자 태사(太子太師)로 추대했으며 효소왕(孝昭王)은 당성후(唐城候)를 삼았다고 한다.

그후 당성(唐城)의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후손들은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고 고려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를 지낸 은열(殷悅)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홍관(洪灌)

? 1126(인종 4).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무당(無黨). 당성군(唐城郡) 출신. 남양홍씨보 南陽洪氏譜 에는 시조 은열(殷悅)5세손, 군기감사(軍器監事) 덕승(德升)의 아들로 되어 있다.

과거에 급제해 1102(숙종 7) 사관 ( 史館 )의 직사관 ( 直史館 )으로서 왕명으로 신축된 집상전(集祥殿 : 왕의 정전)의 편액을 썼다. 신라 김생 ( 金生 )의 필법을 본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경전(會慶殿) 병풍에 서경 의 무일편(無逸篇)도 썼다고 전해지며, 해동역사 海東繹史 에는 보문각 ( 寶文閣 ) · 청연각(淸 博 閣) · 보전화루(寶殿畵樓)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고 전한다.

1111(예종 6) 2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이듬 해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11138월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요()에 정사 ( 正使 )가 되어 부사 ( 副使 )인 형부시랑(刑部侍郎) 김의원 ( 金義元 )과 함께 다녀왔다.

111412월 문덕전학사(文德殿學士)가 되고, 11167월 청연각학사, 1118년 정월 보문각학사가 되었다. 청연각에서 순전 舜典 을 시강(侍講)하였다. 예종의 명으로 이궤 ( 李軌 ) · 허지기(許之奇) · 박승중 ( 朴昇中 ) · 김부일 ( 金富佾 ) · 윤해 ( 尹諧 ) 등의 학사들과 함께 삼한 이래의 사적을 모아 편년통재속편 編年通載續編 을 찬진하였다.

11162월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국자감시 ( 國子監試 )의 시관 ( 試官 )이 되어 유승단(柳升旦) 99인을 뽑았다. 1123(인종 1)에는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지공거 임유문(林有文)과 함께 진사를 취해 변순부(卞純夫) 30인을 급제시켰다.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를 지내던 인종 때, 이자겸 ( 李資謙 )의 난이 일어났다. 그 때 도성 ( 都城 )에서 직숙(直宿)하다가 변고를 듣고 들어가 왕을 시위하였다. 왕이 연덕궁(延德宮)으로 옮기게 되자 노병(老病)의 몸으로 뒤따라가다가 서화문(西華門)에서 척준경 ( 拓俊京 )의 난군에게 살해당하였다.

이후 그의 순절을 포상해 추성보국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예부사 상주국(推誠報國功臣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禮部事上柱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평(忠平)이다.

 

홍자번(洪子藩)

1237(고종 24) 1306(충렬왕 3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운지(雲之). 동지밀직(同知密直) ()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해 남경유수판관 · 광주통판(廣州通判) · 충청경상전라안찰사를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호부시랑을 거쳐 1271(원종 12) 우부승선에 임명되자 왕에게 친히 서정(庶政)을 보살필 것을 건의하였다. 그 뒤 좌승선 · 승선 등으로 승진하였다. 1278(충렬왕 4)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왕을 시종해 원나라에 들어갔다. 이듬해 판밀직사사에 올랐다.

그 해에 일본정벌을 위한 몽고의 계획이 진행되자 전라도도지휘사로 파견되어 전함의 수리 · 건조를 담당하였다. 이후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 첨의찬성사를 거쳐, 1294년 첨의중찬 ( 僉議中贊 )에 이르렀다.

이듬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자리를 옮겼다. 1296년 다시 우중찬 ( 右中贊 )에 임명되자 백성들을 위한 대책으로 편민십팔사(便民十八事) ’ 를 올렸다. 이것은 공부 ( 貢賦 )의 균정(均定)과 정액 이외의 공부수납 억제, 의창 ( 義倉 ) 등을 통한 백성의 구휼, 수령의 민폐방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것이다.

1298년 충선왕이 잠시 즉위한 동안 좌복야참지광정원사(左僕射參知光政院事)가 되었다가 곧 첨의중찬에 임명되었다. 그 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벽상삼한진충동덕좌리공신경흥군개국후(壁上三韓盡忠同德佐理功臣慶興君開國侯)에 봉해졌다.

이 무렵 충렬왕 · 충선왕 부자 사이가 극도로 악화됨에 따라 갖가지 정치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 때 1303년 왕 부자를 이간시킨 오기(吳祈) · 석천보(石天輔)를 붙들어 원나라에 보내는 등 부자의 정의를 회복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그 해 도첨의좌중찬에 임명되었으나 1305년 참소로 파직되었다. 그 뒤 자의도평의사사(咨議都評議司事)로서 왕을 수행해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왕유소(王惟紹) · 송린 ( 宋璘 ) 등의 이간책동을 자세히 진술하고, 아울러 두 왕을 받들고 귀국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 원나라에서 죽었다. 뒤에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推誠同德翊戴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고,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홍규(洪圭)

?1316(충숙왕 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초명은 문계(文系). 인종 때 추성보국공신(推誠報國功臣)에 봉해진 관()5세손이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의 아들이며, 부인은 광주김씨(光州金氏)로 참지정사 ( 參知政事 ) ()의 딸이다.

원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으며, 매부인 임유무 ( 林惟茂 )의 집정기에는 송송례 ( 宋松禮 )와 함께 자문 역할을 하였다. 1270(원종 11) 원나라에 있던 왕이 개경환도를 명하고 귀환할 때 임유무가 왕을 배척하고 항전 태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그는 왕의 밀령을 받아 송송례 등과 함께 삼별초 ( 三別抄 )를 동원해 권신 임유무를 죽였다.

그 뒤 세자(충렬왕)를 호종해 원경(元京)에 갔는데 원제(元帝)의 명으로 고려 1품직에 올랐으며, 원의 좌부승선(左副丞宣)의 직을 받았다. 귀국해서는 국정의 문란을 한탄하며 사직하였다.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나 또 사퇴했는데, 이 때 나이가 40세도 안 되었다.

그 뒤 충렬왕과 공주가 양가(良家)의 여자를 징발해 원나라에 보낼 때, 딸이 징발되자 이를 기피한 죄로 해도에 귀양갔다. 결국 두 딸이 모두 원나라에 뽑혀가고 가산까지 적몰되었다. 중찬 ( 中贊 ) 김방경 ( 金方慶 )과 그의 종형 홍자번(洪子蕃) 등이 그가 이전에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점을 들어 면죄를 간청하였다.

가산이 반환되고 곧 풀려나, 이듬 해 첨의시랑찬성사 판전리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前理司事)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중찬을 더하고 이어서 판삼사사 수사도 영경령궁사(判三司事守司徒領景靈宮事)가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익성군 ( 益城君 )에 봉해지고, 또 첨의정승 익성군 지익성부사(僉議政丞益城君知益城府事)에 올랐다. 1316년 추성진력안정공신 남양부원군 상의 첨의도감사(推誠陳力安定功臣南陽府院君商議僉議都監事)에 이르러 별세하였다.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홍길민(洪吉旼)

1353(공민왕 2)1407(태종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경문(敬文). 아버지는 검교중추원부사(檢校中樞院副使) 보현(普賢)이다.

문음으로 출사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郎)에 이르고, 1376(우왕 2)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하여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가 되어 지방의 호강(豪强)한 무리를 억제함으로써 장령이 되었다.

1390(공양왕 2)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으나, 정몽주 ( 鄭夢周 )가 우상에 임명되자 한미한 가문의 출신으로서 언관을 축출하고 전제(田制)를 문란케 한 장본인이라 하여 고신 ( 告身 )에 서경 ( 署經 )을 거부하다가 파직되었다.

1392년 이성계 ( 李成桂 )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좌부승지에 임명되고, 개국공신 2등에 책훈되어 추성협찬개국공신(推誠協贊開國功臣)의 훈호를 받았다.

이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임명되고 관계를 자헌대부 ( 資憲大夫 )로 올려 남양군(南陽君)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홍여방(洪汝方)

? 1438(세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자원(子圓), 호는 연생당(戀生堂).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보현(普賢)이고, 아버지는 판서 길민(吉旻)이며, 어머니는 경진(慶臻)의 딸이다.

사마시를 거쳐, 1401(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에 원자우동시학(元子右同侍學)이 된 뒤 예문관검열과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1410년 지평이 되고, 1414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 해에 동부대언(同副代言)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했으나 판결을 잘못한 책임으로 한때 면직되었다. 1415년 복관되어 좌부대언 ( 左副代言 )이 된 뒤, 1417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일시 사직했다가 곧 순승부윤(順承府尹)이 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예조 · 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다음 해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병조의 아전 ( 衙前 )을 불법으로 책문해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처음에는 장기(長 垢 )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단으로 이배되었다.

1426년에 풀려나서 인순부윤(仁順府尹) · 평안감사 · 한성부윤 등을 거쳐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진상한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 해서 파직되었다. 1433년 복관되어 전주부윤이 되었고, 1437년 판한성부사에 올랐다.

이듬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본국으로부터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귀국 때는 황제가 칙명을 내려 원유관복(遠遊冠服 : 먼 길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관리복장)을 보내주었다. 귀국 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시와 술을 좋아하며, 직언을 잘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홍윤성(洪允成)

1425(세종 7)1475(성종 6).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우성(禹成). 자는 수옹(守翁), 호는 영해(領海). 연보(延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용()이고, 아버지는 제년(齊年)이다.

1450(문종 즉위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무재(武才)가 있어 특별히 사복시주부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에 임명되었다.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이 문종의 명을 받아 진서 陣書를 찬술할 때 좌랑으로서 참여하였다. 그 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에게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하니 정국(政局)을 바로잡을 큰 일을 일으켜야 된다고 진언(進言)하고는 권람 ( 權擥 )을 모사(謀士)로 천거하였다.

1453(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 인(皇甫仁김종서 ( 金宗瑞 ) 등 원로대신을 살해·제거하는 등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이에 적극 가담·협력하였다. 그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된 데 이어, 사복시판관·장령을 거쳐 1455년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세조 즉위 후 예조참의에 임명되고, 세조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익공신 ( 佐翼功臣 ) 3등에 책록되었다. 그리고 참판으로 승진하면서 인산군(仁山君)에 봉해졌다. 1457(세조 3) 예조판서·경상우도도절제사, 1459년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모련위(毛憐衛)의 야인(野人 : 女眞)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 ( 大將 ) 신숙주 ( 申叔舟 )의 부장 ( 副將 )이 되어 이를 토벌하였다. 1467년 우의정, 1469(예종 1) 좌의정에 올랐다. 그 해에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영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 해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71(성종 2)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 ( 佐理功臣 ) 1등에 책록되었다. 성질이 사나워 권세를 얻은 뒤에는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가노(家奴)를 놓아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그가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이라는 이유로 단지 책망만 할 뿐 처벌하지 않았다. 시호는 위평(威平)이다.

 

홍유손(洪裕孫)

1431(세종 13) 1529(중종 24).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 蜃 ) · 광진자(狂眞子). 가세가 청빈하였으나 경() · ()를 섭렵하고, 방달(放達)한 기질에 얽매임이 없었다.

과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향리의 역()을 벗고자 꾀하지도 않았는데, 1481(성종 12) 남양군수 채수 ( 蔡壽 )가 문장이 능한 것을 보고 역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자 곧 영남으로 가서 김종직 ( 金宗直 )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이 때 김종직은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긴 바를 알고 있으니 학자들은 모두 본받을 것이다. ” 라고 하였다 한다.

이어 바로 두류산 ( 頭流山 )으로 들어가 수업한 뒤, 서울로 돌아와서 김종직이 시사(時事)를 아뢰지 않는 것을 보고 비판하였다. 그는 세상을 희롱하여 고답(高踏)하면서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

당시의 명류 김수온 ( 金守溫 ) · 김시습 ( 金時習 ) · 남효온 ( 南孝溫 ) 등과 특히 가깝게 지내면서 죽림7현을 자처하고 노자(老子) · 장자(莊子)의 학문을 토론하며 시율(詩律)을 나누었는데, 남효온은 그를 평하여 ()은 칠원(漆園) 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 ” 고 하였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제주도에 유배되고 노비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76세에 처음으로 처를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얻어 지성(至誠)이라 이름하였다. 저서로는 소총유고 가 있다.

 

홍인우(洪仁祐)

1515(중종 10) 1554(명종 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 齷 齋).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덕연(德演)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량(思良)의 딸이다. 서경덕 ( 徐敬德 ) ·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37(중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심경 · 근사록 · 중용 · 대학 에 전심하였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당시 명인들과 강마하고 논란하였다. 노수신 ( 盧守愼 )과 허엽 ( 許曄 )은 학문하는 중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서신이나 구두로 물었고, 김안국 ( 金安國 )도 그의 학행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어버이의 병환으로 의서를 배워 약의 처방을 알았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주의 기천서원 ( 沂川書院 )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치재집 2권과 관동일록 關東日錄 이 있다.

 

홍세공(洪世恭)

1541(중종 36) 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중안(仲安), 호는 봉계(鳳溪). 계복(繼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준경(俊卿)이고, 아버지는 군수 보( )이며, 어머니는 유곡(柳 激 )의 딸이다.

1567(명종 22) 생원이 되고, 1573(선조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588년 평안도구황경차관(平安道救荒敬差官)이 되어 영유현감(永柔縣監) 임태(任兌)를 처벌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왕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명군(明軍)의 군수조달의 책임을 지고 전진(戰陣)의 상황을 왕에게 수시로 보고하였다.

곧 참의로 승진되어 조도사를 겸하고, 이어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영흥의 적정을 보고하여 군의 계책을 진언하고, 각 지방에 남은 식량과 들판에 널려 있는 곡물을 거두어들이는 데 전력하였다. 1594년 전라도관찰사로 전주부윤을 겸하여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의 양곡을 조도(調度)하였다.

1596년 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 · 참찬 등을 역임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다시 평안도 조도사가 되어 군량조달에 힘쓰던 중 숙환이 재발되어 군중에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에 추봉 ( 追封 )되었다. 저서로 봉계일고 가 있다.

 

홍적(洪迪)

1549(명종 4) 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태고(太古) · 준도(遵道), 호는 양재(養齋) · 하의자(荷衣子). 사성 ( 司成 ) 이평(以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덕연(德演)이고, 아버지는 인우(仁祐)이며, 어머니는 생원 김영윤(金寧胤)의 딸이다. 판서 진()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2(선조 5)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곧 사관 ( 史官 )이 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1574년 정자로 홍문관에 들어가 10년 동안 봉직하였다.

1577년 부수찬에 오르고, 예조 · 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지제교를 겸하였다. 1580년 예조정랑이 되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옮겼다가 곧 경기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그 뒤 교리 · 수찬을 지내고, 1583년 정언이 되었다.

이 해 양사(兩司)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자, 이것을 반박하다가 장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88년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교리 · 검상을 지낸 뒤 사임이 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집의가 되었다.

경학(經學)에 밝고 논사(論思)를 잘하여 홍문관에서 학사전재(學士全才) ’ 라 불렸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는 하의집 · 하의시십 荷衣詩什 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

 

홍우경(洪友敬)

1590(선조 23)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부마.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경부(敬夫).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여겸(汝謙)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식()이며, 어머니는 윤견철(尹堅鐵)의 딸이다.

1603(선조 36) 선조의 딸 정인옹주(貞仁翁主)와 혼인하여 당원위(唐原尉)에 봉해지고 계()가 여러 차례 올라 봉헌대부 ( 奉憲大夫 )에 이르렀다.

성품이 검소하고 겸손하여 부마에게는 저택을 하사하는 관례가 있었는데도 이를 굳이 사양하였다. 1618(광해군 10) 폐모론이 일어나 245명이 정청(庭請)에 나아가 참례하였으나 이에 끼이지 않은 38명에 들었다.

이이첨 ( 李爾瞻 한찬남 ( 韓纘男 ) 등의 음모를 성토하다가 10()으로 몰려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관되었으며, 수록대부(綬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홍서봉(洪瑞鳳)

1572(선조 5) 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鶴谷). 예문관대교 계정(係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춘경(春卿)이고, 아버지는 도승지 천민(天民)이며, 어머니는 제용감주부 유당(柳 呪 )의 딸이다.

1590(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0년 사서가 된 뒤 정언 · 부수찬에 이어 1602년 이조좌랑과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경기도암행어사로 다녀와 1606년 사예가 되었다.

1608(광해군 즉위년) 중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성 · 응교 등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610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 재직 중 김직재옥사(金直哉獄事)에 장인인 황혁 ( 黃赫 )이 연루되어 삭직당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동, 정사공신 ( 靖社功臣 ) 3등에 책록되고,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병조참의 · 이조참의 · 대사간 · 동부승지 · 부제학 · 대사헌 · 병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626년에는 도승지가 되었다. 1628년 유효립 ( 柳孝立 )의 모반을 고변, 영사공신 ( 寧社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예조판서를 거쳐 1630년 대사헌으로 재직 중 흉년으로 안팎이 곤궁할 때 사치가 심함을 지적, 이의 시정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우참찬 · 이조판서 · 좌빈객 · 병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뒤 1634년 예조판서와 부묘도감제조( 欖 廟都監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참찬 · 대제학을 지내고, 163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마침 그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和議)를 주장, 최명길 (崔鳴吉) · 김신국 ( 金藎國 ) · 이경직 ( 李景稷 ) 등과 청나라 군사 진영을 내왕하며 화의를 위한 실무를 수행하였다.

1639년 부원군 ( 府院君 )에 봉해지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한편 한재(旱災)로 인한 기민(饑民)의 구제를 위해 부민(富民)들에게 실직 ( 實職 )을 주어 모속(募粟)할 것을 주장하였다. 1640년부터 1645년까지 영의정과 좌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며 국왕을 적극적으로 보필하였다.

1645(인조 23)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 ( 昭顯世子 )가 급사하자 세손을 잇는 것이 상도(常道)임을 들어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인조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일찍이 시명을 떨쳐 청구영언 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홍명일(洪命一)

1603(선조 36) 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만초(萬初), 호는 보옹( 癩 翁). 황해도관찰사 춘경(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승지 천민(天民)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서봉(瑞鳳)이며, 어머니는 황혁 ( 黃赫 )의 딸이다.

1630(인조 8) 진사가 되고,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한림대교(翰林待敎) · 이조정랑 등을 지내고, 수찬에 올랐다.

1636년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를 지키기 위하여 검찰사(檢察使) 김경징 ( 金慶徵 )의 부장 ( 副將 ) 이민구 (李敏求)의 종사관 ( 從事官 )이 되어 싸웠다.

또한 김상헌 ( 金尙憲 ) · 정온 ( 鄭蘊 ) 등과 척화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들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오는 왕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난이 끝난 뒤 척화론자들의 처벌이 논의될 때 응교로서 부제학 이목(李 坍 ) 등과 함께 그들을 변호하였다.

그 뒤 장령 · 필선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영안군(寧安君)에 습봉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홍명하(洪命夏)

1608(선조 41)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 황해도관찰사 춘경(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성민(聖民)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서익(瑞翼)이며, 어머니는 심종민 ( 沈宗敏 )의 딸이다.

1630(인조 8) 생원이 되고, 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규장각대교, 정언·교리·부수찬·헌납 등을 지냈다. 그 뒤 1649년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를 적발함에 있어 당대에이름을 떨쳤다.

1650(효종 1) 이조정랑을 거쳐 1652년 동부승지에 승진하였고,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어 대사간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이조와 예조의 참판, 부제학·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약방제조(藥房提調)가 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삭직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1663(현종 4)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6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망하자 그가 나서서 엄정한 태도로 논리를 펴 반격하여 돌려보냈다. 이 일로 왕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다.

그는 또 성리학 (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효종의 신임이 두터워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하였고, 박세채 ( 朴世采 윤증 ( 尹拯 ) 등 명신들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순조 때 여주의 기천서원 ( 沂川書院 )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기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홍수헌

1640(인조 18)1711(숙종 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군택(君澤), 호는 담포(淡圃). 영필(永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명원(命元)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처후(處厚)이며, 어머니는 형조판서 정사호 ( 鄭賜湖 )의 딸이다.

1660(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82(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정언·지평 등을 거쳐 1686년 수찬으로 함경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동시에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이어 교리·이조좌랑을 거쳐, 1688년에 헌납으로 박세채 ( 朴世采 )를 변호하다 귀양간 영의정 남구만 ( 南九萬 )과 좌의정 여성제 ( 呂聖齊 ) 등을 구하려고 여섯 차례 계()를 올렸다가 북청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사예가 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자 무안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유배에서 풀려나 민비 ( 閔妃 )의 복위도청(復位都廳)에 기용된 뒤 집의를 거쳐, 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역임하고 이천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이조참판·대사헌 등을 거쳐, 1702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공조판서·판의금부사·호조판서·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홍우서(洪禹瑞)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했다.

1702(숙종 28)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충주의 유학(幼學) 최세일(崔世鎰)에 의해 삼촌 홍수헌(洪受瀗)의 사()로 등과했음을 비판받았다. 1703년 가주서로서 대내출입(大內出入)의 문제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설서로 기용되었다.

이듬 해 검열이 되었고, 1708년 신하들의 상소 내용이 정원(政院)에서 바뀌어 기록되는 잘못에 대해 주서로서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한 뒤 정언이 되었다. 그 해대학연의 大學衍義를 헐뜯는 박행의(朴行義)의 성토를 청하는 소를 올렸고, 부수찬이 되었다.

1709년 부교리가 되어 공주의 제택(第宅)을 마련하는 데 부조리함을 지적해 상소하였다. 1710년 수찬·부교리가 되고, 이어 교리에 올랐다. 재임 중 과거 합격자 발표시에 봉함을 뜯어 바꾸어 발표하는 부정이 있음을 상소하였다.

또한 박세당(朴世堂)의 손자 필기(弼基)가 상식(上食 : 상가에 아침과 저녁으로 올리는 음식)의 폐지를 유언한 그 할아버지에 대해 변명한 것을 논박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같은 달에는 언관의 직언정론(直言正論)에 대해 임금에게 소대(召對)해 성지(聖旨)를 거스르면서 무안으로 귀양갔다.

1712년 풀려나 은율현감으로 강등, 보직되었다가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에 의해 내직으로 복직되어 수찬이 되었다. 그 해 장령이 되어 돈화문 개폐(開閉)에 관한 조례를 세울 것과, 또한 옥사처리에 엄정을 기할 것을 상소하고, 이어서 이조좌랑이 되었다.

1713년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 등이 청한 존호를 받지 말도록 숙종에게 연명으로 소를 올리면서, 이조정랑·헌납이 되었다. 그리고 우황(牛黃)을 얻고자 수많은 소를 잡게 하는 숙종의 하명을 철회하도록 간청해, 곧 교리·승지가 되었다. 1714년 대사간에 승진한 뒤, 이듬해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1715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에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한 윤증(尹拯)을 비난한 정호(鄭澔)를 변호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고 서주현감(西州縣監)으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가례원류시비에서 승리한 노론이 집권하기 전에 죽었다. 시문에 능했으며, 당대 명필로서 특히 예서에 능하였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홍호인(洪好人)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였다.

1706(숙종 3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707년에 지평·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당의(黨議)에 관련되어 이덕영(李德英)의 장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한재(旱灾), 행전(行錢 : 물건의 유통과정에서의 돈을 주고 받음), 각 관사 아전들이 오랜 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저지른 폐단 등 시무에 대해 상소하였다.

1710년 장령이 되어서는 전라우수사 윤정주(尹廷舟)와 해곤(海閫)에 제수된 조이중(趙爾重)에 대하여 국방상 적합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고 반대하고 언관들을 함부로 파직, 삭직, 먼 지역으로 유배시킨 데 대하여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그 해 진해현감으로 나갔다가 1711년 사복시정이 되었는데 부하직원의 독직사건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정언에 복직되고, 장령을 거쳐 1713년 필선·장령·정언을 거쳐, 이듬해 헌납, 1715년 집의·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21(경종 1) 신임사화로 삭직되었다가 1725(영조 1) 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경기도수군절도사·좌부승지를 거쳐, 1734년 함경도병마절도사, 1744년 한성부판윤을 끝으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홍계적(洪啓迪)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자는 혜백(惠伯), 호는 수허재(守虛齋). 처후(處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환(受渙)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우석(禹錫)이며, 어머니는 이중린(李仲獜)의 딸이다.

 

1702(숙종 28) 진사가 되고 이듬 해 성균관 유생 180인과 함께 박세당(朴世堂)을 성토하는 소()를 올렸다. 그로 인해 이경석(李景奭)의 손자인 하성(廈成)으로부터 소척(疏斥)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해 6월 태학생으로서, 박세당의 사변록 思辨錄과 이경석의 비문을 수입한 뒤 태워 없애도록 상소해, 이를 관철하였다.

170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곧 이어 검열이 되었다. 1712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윤세수(尹世綏)의 소를 소척하였다. 한편, 궁중의 주악·유희가 지나친 것에 관해 소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가 하사되기도 하였다. 이어 수찬이 된 뒤 부교리에 올랐다. 그리고 1715년 사서를 거쳐 헌납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태인현감으로 부임하고, 교리가 되어서는 정사처분(政事處分)의 정당성이 없음을 상소하였다. 이 상소로 인해 유봉휘(柳鳳輝)로부터 소척을 당하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서용(敍用 : 죄로 벼슬을 면한 사람에게 다시 관직을 주어 씀.)되어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에 대해 비판하는 소를 올렸으며, 곧 이어 이조정랑이 되었다. 1717년 전라좌도어사가 되어 무능한 지방관리들을 파직시켰다. 그 해 응교가 되고, 세자(뒤의 경종)에게 거경진학지요(居敬進學之要)를 가르쳤다.

1718년에는 사간을 역임하고 이듬 해에는 경상감사가 되었으나, 전날 세수부실(稅收不實)의 문책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뒤 대사성으로 복직하고, 곧 부제학·이조참의가 되었다가, 1720년 호조참의로 자리를 옮겼다. 1721(경종 1) 대사헌에 올라 노론의 선봉으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해 소론과 대립하였다.

그 해 강화유수가 되고, 경종의 세제 대리청정 교시를 철회하도록 하는 조신회의에 승지로 참석하였다. 부제학이 되어서는 이정신(李正臣)의 소를 소척했는데,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처사라 해서 흑산도에 안치되었다. 1722년 노론 4대신의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윤성지(尹聖持)의 주관하에 심문과 형벌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 해 최석항(崔錫恒)이 그의 중형을 주청하는 가운데 옥중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수허재유고가 있다. 영조 즉위 후 정호(鄭澔)의 주청으로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 버림.)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간(毅簡)으로, 뒤에 충간(忠簡)으로 개시되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홍임

호군(護軍)을 지낸 임은 이름을 날렸다.

 

홍재철(洪在喆)

순조(純祖)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치경(致敬). 준해(準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협(秉協)이고, 아버지는 판서 기섭(起燮)이며, 어머니는 김상임(金相任)의 딸이다.

1816(순조 1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27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뽑혔으며, 이듬해 별겸춘추(別兼春秋)를 지냈다. 1834년 시관(試官)에 임명되었으면서도 패초(牌招 : 승지에게 패를 내려 왕이 신하를 부름.)를 받고 나오지 않아 장성부(長城府)로 귀양갔다가 곧 풀려난 뒤 예방승지로 기용되었다.

1840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다음 이조참판·성균관대사성·한성판윤·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45년 평안도지방이 극심한 수재를 당하자 백성들을 안정하여 살 수 있도록 방도를 강구하라는 특별 분부를 받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하였다.

1846년 사헌부대사헌·한성판윤, 형조·병조·공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다. 1860(철종 11) 경기관찰사를 2년간 지내고 돌아와 판의금부사, 예조판서·의정부우참찬을 지냈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홍직필(洪直弼)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초명은 긍필(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 서울 출신. 병마절도위 상언(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선양(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이간(履簡)이다.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한자로 문장을 지었다. 그리고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원로 명사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1810년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814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제배되었다. 이 때 동궁(東宮 : 뒤의 翼宗)이 새로 세자에 올라 당시의 유명인사들을 뽑아 매일 서연(書筵)을 열 때 발탁되었다. 1822년 장흥고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물리쳤다.

1838(헌종 4)에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장악원주부·황해도도사에 임명되고,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음해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집의에 이르렀다.

1844년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다시 동부승지에 제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좨주를 비롯해 1851(철종 2)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배되고, 이듬해에는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7월 형조판서에 제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홍순목(洪淳穆)

영의정(領議政) 순목(淳穆)은 한말(韓末)에 와서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자는 희세(熙世), 호는 분계(汾溪). 서울 출신. 현규(顯圭)의 손자로, 승지 종원(鍾遠)의 아들이며, 갑신정변을 일으킨 영식(英植)의 아버지이다.

 

1844(헌종 10)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수찬을 지내고, 1846년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다. 1849년 헌종이 죽자 빈전도감도청(殯殿都監都廳)이 되고, 부사과를 거쳐 1858(철종 9) 이조참의로 승진하였다.

1863년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 해에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4(고종 1)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1866년 이조판서·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 등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867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869년 우의정에 올랐다.

수구 세력 강경파의 거두로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1872년 영의정을 거쳐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다른 대간들과 함께 최익현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한 직후인 그 해 11월 파직되었으나, 다음 달인 12월 영돈녕부사직에 복직되고, 187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876년 일본이 통상을 요청하자 척화론을 펼쳤으며, 1879년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하고,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8823월 재차 영의정이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임오군란으로 집권한 대원군 밑에서도, 그 직후 그가 실각했을 때도 계속 영의정을 맡았다. 이 해 12월에 단행된 관제개혁 때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를 겸임하였으며, 1883년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같은 해 5월 총리대신을 겸직했고, 9월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884년 아들 영식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사흘 만에 실패하고 영식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관직을 삭탈당했고, 이어 자살하였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홍만식(洪萬植)

만식(萬植)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개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서울 출생. 영의정 순목(淳穆)의 아들이며 영식(英植)의 형으로, 교관(敎官) 순경(淳敬)에게 입양되었다.

1866(고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수찬·집의 등을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여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 때 선정을 베풀어 이조참판까지 지냈다.

그러나 1884년 아버지 순목이 의복제도의 개정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자 이 때 관직을 사직하였다. 같은 해 동생 영식이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실패,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자, 아버지 순목은 자살을 하였고 그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894년 관직에 복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방제도 개혁 때 춘천관찰사에 제수되어 여러 번 부임하라는 독촉을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 해 8월 일제에 의하여 민비(閔妃)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리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음독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4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얼마 후 찬정(贊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출사하지 않았다. 또한 상소 때마다 직함을 쓰지 않고, 다만 미사신(未死臣)’이라고 써서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 충의를 높이 평가, 숭정대부 참정대신(崇政大夫參政大臣)에 증직하고, 장례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출전(다움 백과사전)

 

 

홍재학(洪在學)

1848(헌종 14) 1881(고종 18).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문숙(聞叔). 아버지는 창섭(昌燮)이며, 어머니는 해평황씨(海平黃氏)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뒤 이항로 ( 李恒老 )에게 배웠다.

1876(고종 13) 일본과의 수호조약이 맺어지려 할 때 유생과 더불어 반대 상소를 가지고 상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 같은 뜻에서 반대 상소를 올린 당시 참판 최익현 ( 崔益鉉 )이 흑산도로 귀양을 가자 이를 통탄, 귀향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척사 의식(斥邪意識)이 더욱 강해져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에 앞장서게 된다.

1880년 일본에서 돌아온 수신사 김홍집 ( 金弘集 )이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 朝鮮策略 을 고종에게 올려 이에 대한 찬반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당시 조정은 개화정책을 강화, 추진하기 위해 조선책략 복사본을 전국의 유생에게 배포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개화 태도에 대해 수구파(守舊派) 정객과 전국의 유생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신사척왜상소(辛巳斥倭上疏)의 첫 포문은 18812월 이만손 ( 李晩孫 )을 소두로 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였다.

이 상소의 소두 이만손과 제소자 강진규(姜晉奎)가 귀양을 가자, 같은 해 3월 황재현 ( 黃載顯 ) · 홍시중 ( 洪時中 )이 반대 소를 올렸다.

5월에는 경상 유생 김진순(金鎭淳), 경기 유생 유기영(柳機永), 충청 유생 한홍렬(韓洪烈)이 상소했고, 7월에는 경기 유생 신섭(申 糖 ), 충청 유생 조계하(趙啓夏), 전라 유생 고정주(高定柱), 강원 유생 홍재학의 상소 등 신사척왜소가 연달아 올려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홍재학의 상소문이 가장 과격하였다. 그는 상소문에서 당시 개화정책에 앞장섰던 김홍집 · 이유원(李裕元)에 대한 규탄뿐만 아니라 국왕까지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 국왕이 국정을 보살핀 이래 위정척사(衛正斥邪)에 대한 태도가 애매했을 뿐만 아니라 사학의 무리를 방치한 실정을 지적하고, 나아가 척사윤음을 반포한 이후의 태도가 구태의연한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 극언하고 그 기만함을 비판하였다.

그는 또 개국 이래 국내에 보급된 중서문견 中西聞見 · 태서문견 泰西聞見 · 만국공법 萬國公法 등을 사악한 책으로 규정하였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신기한 것을 숭상하는 무리들이 견문을 넓히고 흉금을 여는 신서(新書)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육예육과(六藝六科), 즉 공자 · 맹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그 요사함을 규탄하였다.

결국 그는 이 상소로 위정자들의 격분을 사서 참형을 당하였다. 이 상소는 한말의 정통적인 위정척사사상과 애국 정신, 우국 충정이 가득한 내용으로, 신사척사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洪益三(홍익삼)  선생의 일화.

    일신현전설

영조 15년 경상도 두메산골에서 반란사건이 일어나 민심을 크게 현혹시킨 찬규가 남원부 사람인 까닭에 남원부가 「일신현」으로 한 단계 강등되었다.
그 뒤 일신현의 현감으로 부임한 홍익삼(洪益三)이 남원 명예를 되찾기 위해 상소를 올려 환원되어 다시 남원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 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할아버지는 효종의 외손인 치상(致祥)이며, 아버지는 태유(泰猷)이다

 

 

 

 

 

洪允成(홍윤성) 선생의 일화.

 

洪允成(홍윤성)은 무사로서 1393년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일등공신이 되었고, 한평생 영화를 누린 성품이 매우 난폭한 재상이었다.

그의 자는 수옹이며, 본관은 회인이다.

그의 젊은 시절은 몹시 불우했다. 무과 시험을 보러 서울에 들어이름난 점쟁이 홍계관의 소문을 들었다. 그는 홍계관을 찾아가 자신의 앞날을 물었다. 이때 홍계관이 그를 보고 공손히 꿇어앉아 점괘를 풀어주었다.

당신은 참으로 귀한 상이올시다. 곧 귀하게 것이니 염려 마시옵소서.”

그 말을 믿어도 되는가?’

되고 말굽쇼. 대감은 모년 모시에 형조 판서가 것입니다. 그때 오늘의 점괘 풀이에 대한 보상을 하시옵소서 ,,

무슨 보상인가?’

제 아들놈이 그때 죄를 지이서 대감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빌게 것입니다. 모쪼록 제 아들놈을 살려 주소서.”

내가 형조 핀서만 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틀림없습니다.”

흥계관은 이들을 불러 일렀다.

네가 모년 모월 모일에 옥에 갇힐 것이다. 그때 사람에게 내 아들임을 밝혀라. 네 목숨을 구해 줄 분이 금방 다녀가셨다.”

그로부터 10, 마침내 홍윤성은 형조판서가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큰 옥사가 일어나 국문을 하는 중이었다. 한 죄수가 소리를 높여 외쳤다.

나는 소경 점쟁이 홍계관의 아들이오!”

홍윤성은 10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올라 그 약속을 지켰다. 그 소문 이 장안에 퍼져 흥계관이 점으로 더욱 이름이 나서, 흥계관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겨났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洪宇定(홍우정) 墓碣銘(묘갈명)

 

洪宇定(홍우정) 宣祖 28年 乙未(1595)~ 孝宗 7年 丙申(1656) 62.

字 靜而. 號 杜谷. 南陽人 刑曹判書 可臣. 漢城府庶尹 榮.

 

공의 묘는 와룡면 우무곡에 있다. 공의 형 南坡(남파) 宇遠(우원)이 인조 27(1649) 예안 현감에 재임 중 친상을 당해 우무곡에 入葬(입장)하게 되어 공과 공의 아들 (: 斗山) 3대의 묘가 이곳에 있게 되었다. 공은 병자호란 뒤에 문수산 아래 동양리에 운둔한 太白(태백) 五賢(오현) 중에 한 분으로 崇禎(숭정)처사라 하였다.

인조가 공의 절의와 명성을 듣고 공조좌랑, 태인현감, 대군사전 등을 제수 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했다.

大明天下無家客 太白山中有髮僧(대명천하무가객 태백산중유발승)이라는 시구는 공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증휘 介節公(개절공). 묘갈은 좌의정 眉叟(미수) 許穆(허목)의 찬이며, 행장은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 찬이다.

 

墓碣銘

公諱宇定字靜而姓洪氏本南陽人大王父昷有隱德高行仕爲掌苑署掌苑追爵領議政王父可臣以儒學顯用致重名宣祖世守洪州討平湖西之亂封寧原君致仕卒追爵左議政洪州有淸難碑牙山溫陽皆立祠以祀之父榮漢城府庶尹母陽川許氏吏曹判書筬之女也公兄弟三人公最長二弟宇遠嘗以言事斥諫官宇亮連守邊邑以政淸聞公卓犖好奇偉不局束以爲名修身潔行其文章亦然崔海州沂愛其奇才以女妻之二十二擧進士其年海州獄起崔氏之禍殆無遺類而公亦逮繫經夏每對獄詞明義直雖當時獄事鍛鍊文致無所不至而亦無詞而傅死議李爾瞻素重其才名欲令從己而動以福禍公歎之曰人固有一死無罪枉陷亦何愧於心終不動今右相元公斗杓判中樞李公澥素善以布衣陰結當路者日夜以計解之卒付處天安八年仁祖克大難大釋諸囚公旣得釋韜晦自隱弊衣放跡傲玩而自戲也前後除拜皆不就事親色養雖疏節細行皆人之所不及者人皆曰孝子之行也丙子避亂大嶺之南卜居奉化縣文殊山下從泉石之樂因自號曰杜谷從地名云仁祖召用遺逸以公特拜工曹佐郞後改泰仁縣監又爲司宰監主簿終不起或謝恩而去及拜黃澗縣監公已歿矣疾病必衣服冠而朝禰且曰男子死不絶於婦人之手出外舍令衮爲書與二弟訣遺敎其諸子一以爲惡爲戒因與客言消息聚散之常無慼慼於死生之變公有瓌才奇氣潔身遁世肆志於名利之外樂而終身豈不魁然大丈夫也哉公生於萬曆乙未十一月二十二日歿於還甲之明年七月二十八日葬於安東治北三十里憂無洞有男四人女二人其二壻林震喬兪命世銘曰

嫫母之喜子奢之詈罷牛之駕驥騏之恥高蹈尙志與物傲戲淸士之介可以廉頑夫可以礪濁世

 

<>

묘갈명

공의 휘는 宇定(우정), 자는 靜而(정이). 성은 洪氏(홍씨)로 본관은 南陽(남양)이다. 증조부 ()은 은덕이 있고 고상하고 뛰어난 행실을 하였으며, 벼슬은 掌苑署(장원서) 掌苑(장원)이었다. 追爵(추작)으로 영의정이 되었으며, 조부는 可臣(가신)으로, 儒學(유학)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 이름이 높았다. 선조 조에 洪州(홍주)를 지켜 호서의 란의 란을 평정하여 寧原君(녕원군)으로 봉해졌으며, 致仕(치사)를 하고 난 다음 좌의정으로 追爵(추작)되었고, 洪州(홍주)淸難碑(청난비)가 있다. 아산온양에 모두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있다.

부친 ()은 한성부 서윤이고, 모친은 양천 허씨 이조판서 ()의 딸이다. 공은 3형제인데, 공이 장남이고, 둘째는 宇遠(우원)으로 언사척간관이다. 宇亮(우량)은 변방의 읍을 계속 지기며, 정사를 맑고 바르게 한다고 한다.

공은 남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나 매우 훌륭하였으며, 작은 것에 매이지 않고, 명예를 위하여 수신하여 깨끗한 행실을 하며, 그 문장도 역시 그렇게 뛰어 났다. 海州(해주)崔沂(최기)는 그러한 공의 뛰어난 재주를 사랑하여, 자기 딸을 주어 처를 삼게 하였다.

22살에 진사에 오르고, 그 해, 海州獄起(해주옥기) 사건이 일어나, 최씨에게도 화가 미치게 되자, 공에게도 역시 화가 닥쳐왔다.

여름이 지나고, 옥사가 자자지자, 바른 사유로 변명해도 당시의 옥사는 쇠를 달구어 고문으로 무고한 사람을 죄는 주니,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또한 말도 못하고 죽게 되었는데, 李爾瞻(이이첨)이 공의 그 재주와 명성을 중히 여겨, 자기 명령을 따르면 화가 복이 된다 하였으나, 공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람은 오직 한 번 죽는 것인데, 죄가 없으면서도 굽어든다는 것은 또한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는가?하며 끝내 움직이지 아니했다.

이제 우상 元斗杓(원두표)공이, 판중추 李澥(이해)공이 평소 착하나, 벼슬이 없는 선비들을 모아 몰래 세력을 결집하려고 밤낮으로 계획하고 있으므로, 천안으로 보내 버린 지 8, 인조는 大難(대난)을 극복하고 많은 죄수에게 대사면을 하니, 공도 이에 석방하게 되었으나, 모두를 감추고 들어내지 아니하며 스스로 숨어버리니, 해진 옷을 입고 사라지며, 스스로 탄식했다.

여러 번 벼슬이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부모를 살펴 세세한 부분까지 잘 봉양 해 드리니, 모두 모통 사람이 할 수없는 일이라고, 다들 효자로구나.하였다.

병자년, 난을 피해 소백산 남쪽, 봉화현 문수산 아래 집을 지어서 사니, 泉石(천석)의 즐거움을 누리며, 自號(자호)杜谷(두곡)이라 하였는데 지명을 따른 것이다. 仁祖(인조)遺逸(유일)로 불러 공에게 특별히 공조좌랑을 제수하고 뒤에 태인현감으로 나갔으며 또한 사재감주부가 되었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사은하며 떠나갔는데, 황간현감을 배수 하였으나 공이 이미 몰한 뒤었다.

병이 진해지자 의관을 바로하고 아침에 사당에 가서, 예를 올리고 말하기를()에 남자는 죽을 때 절대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하며 사당 밖으로 나와, 유언을 쓰기 위해 도포를 입고, 두 아우에게 이별하고, 그 자식들에게 교훈을 남겨, 한결같이 악을 경계하라하며, 모인 사람들이게 영고성쇠와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인생의 상례이며, 生死(생사)의 변환을 슬퍼하지 말라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재기가 있어 깨끗한 몸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방자한 뜻과 명리 밖에 일을 즐기며 살다가 일생을 마치니, 어찌 우뚝한 대장부라 아니할 손가.

공은 만력 을미 1122일에 태어나, 환갑 다음해인 728일에 돌아가시니, 안동 북쪽 10, 우무동에 장사 지냈다.

아들 4명은 ()()()()이고 딸 둘은 그 사위가 林震喬(임진교)兪命世(유명세)이다.

 

명왈

嫫母(모모)의 기쁨 嫫母之喜

子奢(자사)의 욕설 自奢之詈

罷牛(파우)의 멍애 罷牛之駕

驥騏(기기)의 부끄러움 騏驥之恥

뛰어 넘은 높은 뜻 高蹈尙志

주어도 희롱하는 與物傲戲

맑은 선베의 절개 淸士之介

가이 청령하고 우뚝해 可以廉頑夫

가이 탁한 세상서 날카롭네. 可以礪濁世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805 황주 황.jpg 황주황씨(黃) 청남 14-08-30 3314
804 항주 황.jpg 항주황씨(黃) 청남 14-08-30 3110
803 평해 황.jpg 평해황씨(黃) 청남 14-08-30 5408
802 창원 황1.jpg 창원황씨(黃) 청남 14-08-30 6960
801 제안 황.jpg 제안황씨(黃) 청남 14-08-30 3519
800 장수 황.jpg 장수황씨(黃) 청남 14-08-30 5065
799 우주 황.jpg 우주황씨(黃) 청남 14-08-30 4583
798 성주 황.jpg 성주황씨(黃) 청남 14-08-30 2967
797 상주 황.jpg 상주황씨(黃) 청남 14-08-30 4097
796 덕산 황.jpg 덕산황씨(黃) 청남 14-08-30 3741
795 당인후씨(后) 청남 14-08-30 2839
794 진양 화.jpg 진양화씨(化) 청남 14-08-30 3482
793 홍주 홍.jpg 홍주홍씨(洪) 청남 14-08-30 3455
792 풍산 홍.jpg 풍산홍씨(洪) 청남 14-08-30 5380
791 부계 홍.jpg 부계홍씨(洪) 청남 14-08-30 4164
790 남양홍2.jpg 남양홍씨(洪)-2 청남 14-08-30 5275
남양 홍.jpg 남양홍씨(洪)-1 청남 14-08-30 6206
788 파릉 호.jpg 파릉호씨(胡) 청남 14-08-30 2992
787 보안 호.jpg 보안호씨:전주호씨(扈) 청남 14-08-30 2946
786 진주 형.jpg 진주형씨(邢) 청남 14-08-30 3758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