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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洪)-2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남양홍씨)

 

 

본관(本貫): 남양(南陽):토홍계(土洪系)

시조(始祖): 홍선행(洪先幸)

유래(由來):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토홍계(土洪系)의 시조(始祖) 홍선행(洪先幸)은 당성(唐城남양의 옛 지명)에 세거(世居)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후손들이 당성(唐城)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繁昌)하였으므로 선행(先幸)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남양(南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온 것으로 전()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홍익생(洪益生)

익생(益生)은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를 거쳐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홍귀연(洪貴演)

귀연(貴演)은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홍식(洪湜)

()은 검열(檢閱)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정언(正言)을 지냈다.

 

홍언필(洪彦弼)

언필(彦弼)은 중종(中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시((()에 모두 뛰어났다.

 

홍섬(洪暹)

1504(연산군 10) 1585(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귀해(貴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언필(彦弼)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송일(宋 悲 )의 딸이다. 조광조 ( 趙光祖 )의 문인이다.

1528(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을 지낸 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 ( 金安老 )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 ( 許沆 )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3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수찬 · 부제학 · 경기도관찰사 · 대사헌을 거쳐, 1552(명종 7)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錄選)되었다. 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듬해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량 ( 李樑 )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당하였고,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 · 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67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연로한 정승)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으나 남곤 ( 南袞 )의 죄상을 탄핵하다 또다시 파직되었다.

1571(선조 4) 좌의정이 되어 궤장( 廓 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번이나 중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

흥양으로 유배당하였을 때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 寃憤歌 가 있으며, 저서로 인재집 인재잡록 이 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홍가신(洪可臣)

1541(중종 36) 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 간옹(艮翁). 아버지는 온( )이며, 어머니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명종 22) 진사시에 합격, 1571(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이 되었을 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되고 이어 형조좌랑 · 지평을 거쳐 1584년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에 정여립 ( 鄭汝立 )과 가까이 지낸 이유로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파직 당하였다.

1593년 파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해 1596년 이몽학 ( 李夢鶴 )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해 무장 박명현(朴名賢) · 임득의 ( 林得義 )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강화부사 · 형조참판 · 강원도관찰사 · 개성부유수 등을 지내고,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초 장례원정 · 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판서에 이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에서 죽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사문(師門)의 촉망을 받았으며, 체계있는 학문을 전수받아 문장으로서 조직적인 화실(華實)의 매력을 갖춘 외에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문(斯文)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기(理氣)의 본질을 우주의 본질로서 간파해 기와 이로 보고, 기와 이의 순환 과정에서 만물이 생성하며 음양으로 조화, 분리되는 이기일원론 ( 理氣一元論 )에 동조하였다.

또한 생사분리(生死分離)를 주장하는 노자철학과 인간 생명을 허무적멸(虛無寂滅)로 떨어뜨리는 불교관을 배척하였다. 아산의 인산서원 ( 仁山書院 )과 온양의 정퇴서원 ( 靜退書院 )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전집 만전당만록 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壯)이다

 

홍종록(洪宗祿)

1546(명종 1)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연길(延吉), 호는 유촌(柳村). 승지 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력 ( 經歷 ) 언광(彦光)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담()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익수(曺益修)의 딸이다.

1567(명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72(선조 5)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삼사 ( 三司 )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83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9년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 때 여립의 조카 집()의 문초에서 그의 이름도 거론되어 국문을 받고 구성으로 귀양갔다. 뒤에 풀려나와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정랑 신경진 ( 辛慶晉 )과 함께 도체찰사 유성룡 ( 柳成龍 )의 종사관으로 각 진영의 연락과 군수품 공급의 일을 맡았다.

같은 해 곽산에서 구성으로 들어가 그 곳 관민의 협조를 얻어 많은 양곡을 정주·가산 등지로 수운하여 군량공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뒤에 황해도암행어사·조도사(調度使)를 거쳐, 직제학에 이르렀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홍진도(洪振道)

1584(선조 17) 1649(인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자유(子由), 호는 청회(聽檜).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희()이며, 어머니는 능안부원로 구사맹 ( 具思孟 )의 딸이다. 아버지 희가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具思孟)의 사위여서 인조와 이종사촌 형제이다.

1613(광해군 5) 처음 별제 ( 別提 )를 거쳐 목천현감이 되고 의금부로 전임되었다.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구굉 ( 具宏 ) · 신경진(申景 所 ) 등과 모의하니 아우 진문(振文)도 이에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능창군 ( 綾昌君 )을 살해하자 능창군의 형인 능양군(綾陽君 : 뒤의 인조)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집을 반환하자, 그의 집을 능양군에게 헌납하였다.

이들을 의심한 광해군이 능양군의 아버지 원종 ( 元宗 )이 죽었을 때 조객(弔客)들을 주시하였으나, 그는 두려움없이 끝까지 장례를 치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공조좌랑에 특진되고, 이듬해 정사공신 ( 靖社功臣 ) 3등에 책록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하여졌다.

1625년 부평부사 ·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1631년 공주목사가 되고, 선정을 베풀어 가의대부에 승진하고, 한성부우윤을 역임한 뒤 남양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고, 이듬해 자헌대부에 올랐다.

1644년 모친상을 마친 뒤 도총관, 지돈녕부사 겸 지의금부사를 거쳐,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謝恩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35년 병자호란 때 신경진 등과 화의(和議)를 주장하였으며, 그 뒤 판의금부사 · 한성부판윤 ·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남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홍진문(洪振文)

1599(선조 32) 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질보(質甫).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희()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구사맹 ( 具思孟 )의 딸이다. 박지계 ( 朴知誡 )의 문인이다.

인조와 이종사촌 형제로서 형 진도(振道), 외삼촌 구굉 ( 具宏 ), 신경진(申景 所 ) 등과 모의하여 1623년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 ( 靖社功臣 ) 3등으로 남창군(南昌君)에 봉하여졌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비롯하여 한성부좌윤 ·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1629년 상의원판관 · 안산군수를 거쳐, 1631년 장례원사평이 되고, 이듬해 면천군수 · 청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33년 예천군수가 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려 하였으나 노부모 봉양을 위해 형제 중 한 사람이라도 전쟁터에 나오지 말도록 하라는 왕의 명으로 돌아왔다.

그 뒤 남양부사를 역임하였다. 1644년 광주부윤(廣州府尹) 재직 중에는 흉서(凶書) 8()을 발견하고 상소하여 이를 처리하였다.

1646년 해주목사를 지냈으며, 1648년 수원부사를 거쳐, 1650년 한성우윤 · 좌윤을 차례로 거쳤다.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아홉 고을을 다스렸으나 백성들을 구제하고 이들의 교육을 진흥시키는 데만 힘썼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홍헌(洪憲)

1585(선조 18)1672(현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정백(正伯), 호는 사촌(沙村묵호(默好은계(銀溪). 언광(彦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참찬 담()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종록(宗祿)이며, 어머니는 군수 이희의(李希義)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세마 ( 洗馬 )가 되고, 1616(광해군 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가 되었다. 1618년 주서, 이듬해 봉교를 지내고 1623년 정언 ( 正言 좌승지·우승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37(인조 15) 승지가 된 이래 1647년까지 좌승지·우승지 등 인조의 시신(侍臣)으로 재직하였다.

1648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는데 관하 각 고을에 공공연히 그 선생의 부의(賻儀)를 강요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664(현종 5)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네 임금을 섬기는 동안 성실 근엄했고,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은계필담이 있다.

 

홍숙

1654(효종 5)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옥여(玉汝). 진도(振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성원(聖元)이며, 어머니는 박안정(朴安鼎)의 딸이다.

7세에 이미 산법 ( 算法 )에 통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특히 주자강목 朱子綱目에 조예가 깊었다. 고금의 치란(治亂), 인물의 출처(出處)에서 산천(山川)의 험요(險要), 화이(華夷)의 성쇠(盛衰)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재사였다.

1675(숙종 1) 진사시에 오르고, 1683년 봉사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703년 충청도관찰사, 1704년 승지, 1705년 경기도수사를 지낸 뒤 남계군(南溪君)에 녹봉되고, 한성부우윤, 호조·병조의 참판,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707년 우윤 등 내외직을 역임한 뒤 병조참의에 이르고 남계군(南溪君)에 습봉되었다.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1712년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러 신병으로 사직하고 강호에서 여생을 보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홍봉조(洪鳳祚)

1680(숙종 6) 1760(영조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우서(虞瑞), 호는 간산( 刻 山).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원(聖元)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숙( )이며, 어머니는 이사익(李四翼)의 딸이다. 김창협 ( 金昌協 )의 문인이다.

노론으로, 1722(경종 2)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일어난 신임사화 때 온성에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이듬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738년 헌납, 이듬해 부응교, 1740년 집의를 거쳐 1747년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750년 대사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알려진 것으로는 신라시조왕묘비(新羅始祖王墓碑) · 좌의정민정중비(左議政閔鼎重碑) · 좌의정이세백비(左議政李世白碑) · 영의정신완표(領議政申琓表) · 판중추부사홍진도비(判中樞府事洪振道碑) 등이 있다

 

홍용조(洪龍祚)

1686(숙종 12) 1741(영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희서(羲瑞), 호는 금백(金伯).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원(聖元)이고, 아버지는 참판 숙( )이며, 어머니는 이사익(李四翼)의 딸이다.

1717(숙종 4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와 설서를 거쳐, 1719년에 정언에 오른 뒤 곧 지평이 되었다.

때 송시열 ( 宋時烈 )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할 것과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 ( 權尙夏 )를 빈사(賓師)의 예로 부를 것을 청하였다.

1721(경종 1) 연잉군(延 艀 君 : 뒤의 영조)의 세제책봉을 반대하는 소론 유봉휘 ( 柳鳳輝 )를 처형하라고 상소하였다가 뒤에 소론의 탄핵을 받아 능주목사로 좌천되고 이어서 파직되었으며, 이듬해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온성에 안치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종부시정에 임명되었다. 곧 상소하여 소론들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쳤다. 이어 동부승지 · 좌승지를 거쳐 병조참지가 되었다.

그 해 충청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며 만기를 채우고 병조참의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다가 1727(영조 3) 정미환국으로 다시 정세가 바뀌어 소론이 등장하자 삭출되었다.

이듬해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으로 정세가 또 바뀌자 다시 병조참지가 제수되었으나 완강하게 사양하다가 외직인 충주목사를 거쳐, 1731년에 여주목사가 되었고, 이어서 회양부사를 지낸 뒤 호조참의로 조정에 들어와 대사간을 지내고 1741년 삼화부사로 나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홍자(洪梓)

1707(숙종 33) 1781(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양지(養之). 관찰사 성원(聖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 )이고, 아버지는 구조(龜祚)이다.

1753(영조 29) 시직(侍直)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54년 정언 · 호남어사 · 부교리 ·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756년 헌납, 1757년 수찬으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보덕을 거쳐 이듬해에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1762년 승지가 되었고, 1769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5년 한성부좌윤이 되고 이듬해 대사헌을 지냈다. 문필에 능하여 북청의 이지란신도비 李之蘭神道碑 와 경주의 삼강묘비 三綱廟碑 가 있다.

 

홍역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했다.

 

홍억(洪憶)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홍대용(洪大容)

1731(영조 7) 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실학자 · 과학사상가.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덕보(德保), 호는 홍지(弘之).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사간 용조(龍祚)의 손자이며, 목사 ( 牧使 ) ( )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풍 ( 淸風 ) 김씨 군수 방()의 딸이고, 부인은 이홍중(李弘重)의 딸이다.

특히, 지전설 ( 地轉說 )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 ( 金元行 )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 ( 朴趾源 )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그의 활약은 이런 관직과 관련된 것이기보다는 1765년 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담헌서 湛軒書 는 약간의 시 · 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 ( 燕行使 )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억()의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이 때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筠) · 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 杭傳尺牘 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 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 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 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 劉鮑問答 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 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과학사상을 담은 의산문답 醫山問答 역시 북경 여행을 배경으로 쓰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인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전설 · 생명관 · 우주무한론으로 전개되는 홍대용의 자연사상은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일관된 것으로, 이와 같은 상대주의는 그의 사회사상에 연장, 발전된다.

첫째,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쪽이 화()이고, 어느 쪽이 이()일 수 없다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한다. 둘째,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과거의 인본적(人本的)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것으로 상대화하였다. 셋째, 그는 당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과학사상과 그에 바탕을 둔 사회사상 등은 상당한 독창성을 보이고 있지만, 서양 과학과 도교적인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서양 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주해수용 籌解需用 이라는 수학서를 썼으며, 여러 가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농수각 ( 籠水閣 )이라는 관측소에 보관하기까지 하였다.

홍대용의 사상 속에는 근대 서양 과학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 또 근대적 합리주의와 도교의 신비사상, 그리고 지구 중심적 세계관과 우주무한론 등이 때로는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섞여 있는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였다.

 

홍치유(洪致裕)

한말(韓末)에 와서 의사(義士) 치유(致裕)가 유명.

 

홍필유(洪必裕)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했다.

 

홍사구(洪思九)

1878(고종 15)1896.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양 ( 南陽 ). 자는 우용(又容). 영주 출신. 성유(聖裕)의 아들이다. 일찍이 안승우 ( 安承禹 )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고 문장력이 뛰어났다.

단발령 반포 이후 안승우가 호좌의병대장 유인석 ( 柳麟錫 )과 함께 제천에서 거병한 뒤 중군장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자 그의 종사 ( 從事 )로 항일운동에 맹활약을 하여 충주·제천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1896413일 제천에서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싸우다가 안승우와 함께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洪大容(홍대용) 선생의 일화.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영조와 정조 사이의 실학자이면서 과학사상가이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 또는 홍지(弘之)이다. 그는 대사간 용조(龍祚)의 손자이며 목사 홍력(洪櫟)의 아들이다. 지금의 천안 출신으로 묘소 역시 천안에 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 계열의 학통을 이었으므로 학문적으로도 충청유학자에 속한다.

그는 여러 번 과거에 응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1774년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그는 노론계열의 성리학을 수학한 유학자였으나, 청나라 연경(燕京)을 다녀오고서부터 그의 생각이 급속도로 변하였다.

 

그는 서장관을 맡은 숙부 억()의 수행무관이 되어 연경에 갔다. 그는 60여 일 동안 연경에 머물면서 항주(杭州) 출신의 중국학자들과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또한 연경에 있는 서양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 받았다. 이것을 기화로 그의 의식세계는 일대의 변혁을 맞이하였다.

 

그가 가진 사상의 대개는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은 연경으로의 여행길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배경으로 한다. 그는 의무려산에 은거한 실옹(實翁)과 조선에서 온 유학자 허자(虛子)를 가상으로 등장시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실옹의 입을 빌려 인간의 미혹은 식색(食色이권(利權) 및 도술(道術)에서 비롯된 것으로 말한다. 여기서의 도술은 성리학을 말한다.

 

그는 당대의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다. 그는 도술은 공자와 맹자가 죽자 여러 사상가들이 어지럽혔고, 또한 주자학의 후예들이 도술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보면, 그는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후세의 학자들이 이론의 말류에 천착함으로써 도의 실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그의 세계관을 보면, 그는 중국과 조선, 그리고 서양세계를 화() 또는 이()로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중 인간을 우월시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사고방식을 비판하여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들과 본질에 있어서는 다름없다는 생각을 폈다. 그리고 그는 계급주의와 그에 따른 차별정책에 반대했으며, 또한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해야 하며 능력에 따라 업무를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혁신적인 사상은 서구의 근대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성리학적 입장을 보면, 우선 그는 경학의 연구에 있어 주자의 주석 역시 절대시할 것이 아니라 객관화시켜 평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사서문변(四書問辯)삼경문변(三經問辯)에서 볼 수 있다. 리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송시열과 다른 주장을 폈다. 그는 심()을 리()로 보아야 한다는 송시열의 의견에 대해 리와 기()를 혼동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심을 기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을 폈다. 또한 그는 같은 것은 리요 다른 것은 기이다라 하였고, 리는 인()일 뿐이다라 하여, 리기 개념을 소박하게 이해하여 당시의 주자학적 견해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의 과학사상을 보면,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은 한문으로 된 서학(西學) 서적들을 접함으로부터이다.

그는 인간과 만물은 별개 차원의 산물로 상호간에 귀천의 계층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또한 만물을 도덕의 차원에 볼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이치를 파악하기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윤리학에서 자연과학을 분화시키려는 시도이다.

 

그는 지구구형설(地球球形說)과 자전설(自轉說)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학문을 체()와 용()으로 나누고 성의정신(誠意正心)의 윤리학은 체로, 예법(禮法율력(律曆산수(算數) 등은 용으로 보았다. 여기서 보면, 그는 도덕과 물질의 균형적 발전을 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유학과 과학을 소통시키려는 의도를 가짐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홍대용의 사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적 풍조를 확장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그가 비록 반주자학적 성향을 보여 성리학 중심의 충청유학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충청유학의 색채를 다양하게 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출처: 금강일보>

 

 

 

洪大容(홍대용) 선생의 일화.

 

1765(영조 41), 그의 나이 35세 되던 해 겨울, 담헌 홍대용은 연 행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 아버지 홍억을 따리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청나라 燕京(연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연경 벙문은 연기속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연기朴趾源(박지원)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 홍대용은 60여 일 동안 연경에 머무르면서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였다.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 출신의 중국학자들과 사귀어 평생에 마음을 터놓고 지벗을 가지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연경에 머무르고 있던 서양 교시들을 찾아가 서양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항조우 출신의 중국학자들의 이름은 엄성 · 육비 · 반정균 등이었다.

연경의 건정호 동에 머물고 있던 그들은 우연히 홍대용을 만나 서로 이 통하지 않아 글씨를 써서 주고 받으며 대회를 나누었다.

홍대용은 뒤에 그것을 모아서 건정필담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중에서도 엄성 과는 의형제를 맺었다. 해 후 엄성이 죽을 홍대용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조선 묵의 향기를 맡은 후 그것을 가슴 위에 얹어 놓고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엄성 · 반정균 · 육비 등과는 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우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으로 남아있다.

 

연기가운데 유포문답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 인 유송령(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인 포우관(Anton Gogeisl)을 만나 나눈 펼담을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홍대용의 간청에 이겨 세차 (지구의 자잔축의 방형이 해마다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함으로써 춘분점과 추분점이 약간씩 달라지는 현상)를 재는데 시용되는 천구의를 보여주었다.

또한 홍대용은 천문경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천문경을 통하여 해를 관찰했다. 선교사들은 만나고 뒤 홍대용은 관상대로 갔다. 당시 관상대는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접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홍대용이 끈질기게 즐라 대 그 열의에 감통한 수위가 관상대를 돌아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수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구리로 만든 천문기구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한편 연경 여행을 배경으로 하여 과학 사상을 담고 있는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인류의 기원, 계급과 국가 형성 법률 제도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양과학과 도교의 자연관까지 다루면서 특히 지전설과 우주 무한론을 주장했다.

의무려산에 숨어사는 실옹과 조선의 학자 허자의 문답 형식을 빌어서 홍대용의 학문관, 자연관, 역사관, 국가관, 사회관을 종협적으로 서술한 의산문답은 그가 연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허자는 전통적인 조선의 학자를, 실옹은 서양과학을 받아들인 새로운 학자를 상징한다.

 

첫째, 인간· 금수· 초목 등 세가지 생명체는 () , (), ()있고 없음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어느 것이 소중하다고 말할 없다며 인중심주의를 비파하고 있다.

둘째, 어느 쪽이 화(중국)이고 어느 쪽이 (: 종 오랑케) 없다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을 부정한다.

셋째, 교융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하고,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한다.

넷째, 무릇땅덩어리는 하루에 한번씩 돈다.

다섯째, 양반이라도 놀고먹는 자는 나라의 좀이다.

 

연경에서 돌아온 홍대용은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가문 덕분으로 44과거를 통하지 않고 벼슬자리에 임명되는 음관제도따라 선공감(토목 · 건축 · 수리 등의 일을 맡은 관청)감역(9)었고, 47사헌부의 감찰(6)이 되어 기강을 단속하는 일에 력을 기울였다.

내직(중앙의 벼슬자리)3년간 지낸 홍대용은 그 이듬해에는 전라도 태인 현감이 되었고, 50세에는 경상도 영주 군수 등을 임했다.

 

과학기술을 빨리 전파하여 이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나라의 힘을 울 수 없어 결국 다른 나라에 질질 끌려 다니게 되며 일하는 사람만이 먹고살게 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백성이 모두 일하는 정신을 갖는다고 주장한 그는 담헌서, 담헌외서, 을병연행록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수학책인 주해수 담헌외서에 편입시켰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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