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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홍씨(洪)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부계 홍씨)

 

본관(本貫): 부계(缶溪)

시조(始祖): 홍좌(洪佐)

유래(由來):

 

 부계 홍씨(缶溪洪氏)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 홍은열(洪殷悅)의 손자(孫子)인 홍 난(洪 蘭)6세손 홍좌(洪佐)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려조(高麗朝)에 직장(直長동정(同正)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누대(累代)에 거쳐 토착(土着) 세거(世居) 해온 부계(缶溪)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계대(繼代)하여 오다가 1977(정사) 대동보(大同譜) 수보시(修譜時)에 부림파(缶林派:宰臣公派)로 합보(合譜)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홍귀달(洪貴達)

1438(세종 20) 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 ( 缶溪 ).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 함허정 ( 涵虛亭 ). 사재감정 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득우(得禹)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 효손(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1460(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에 등용, 예문관봉교로 승직하였다. 1466년 설서가 되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시애 ( 李施愛 )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정랑에 승직하면서 예문관응교를 겸하였다.

1469(예종 1) 교리가 되었다가 장령이 되니 조정의 글이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예가 되었을 때 외직인 영천군수로 전출하게 되자, 그의 글재주를 아낀 대제학 서거정 ( 徐居正 )의 반대로 홍문관전한과 예문관전한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직제학 · 동부승지를 거쳐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로 복직했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왕비에서 일반인으로 폐하고 쫓아내는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481(성종 12)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483국조오례의주 國朝五禮儀註 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 · 대사성 · 지중추부사 · 대제학 · 대사헌 · 우참찬 · 이조판서 · 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다.

1598(연산군 4) 무오사화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따라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 · 역대명감 歷代名鑑 을 편찬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 ( 杖刑 )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조심하라 했으나,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 ” 고 하였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되었다. 함창의 임호서원 ( 臨湖書院 )과 의흥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허백정문집 虛白亭文集 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홍언충(洪彦忠)

1473(성종 4)1508(중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 ( 缶溪 ).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 득우(得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손(孝孫)이고, 아버지는 참찬 귀달(貴達)이며, 어머니는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또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질정관 ( 質正官 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1503년 수찬(修撰)으로 복직해 교리(敎理)가 되고, 그 해에 정조사 ( 正朝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해 조용히 길을 떠났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 ( 直講 )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천성이 신중하면서 솔직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만사 自挽辭가 있다.

 

홍언국(洪彦國)

 학자(學者) 언국(彦國)은 귀달(貴達)의 세째 아들로, 문장(文章)과 지조(志操)가 뛰어나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며, 딸의 미모를 탐한 연산군이 그의 딸을 입궁(入宮) 시키라고 강요했으나 거절하여 거제(巨濟)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석방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심했다.

 

홍호(洪鎬)

  인조(仁祖) 때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홍여하(洪汝河)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홍언승(洪彦昇), 홍복창(洪復昌)

현감(縣監)을 역임한 언승(彦昇)과 복창(復昌)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부계 홍씨(缶溪洪氏)는 남한(南韓)에 총914가구, 3,6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洪三玉(홍삼옥)의 효행

 

자식들 앞에선 눈물도 감추며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군 사이에 우뚝 솟은 800m 높이의 화산 아래인 고로면 학성동 청학 마을에 아담한 비각과 단청도 산뜻한 사당이 있으니 곧 삼옥헌(三玉輕홍삼옥 여사의 효열비와 그를 모신 곳이다.

 

현대 문명의 병폐인, 물질만을 숭상하는 퇴폐풍조가 만연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경향이 있는 오늘날, 부모를 공경하여 섬기는 일과 남편에 대한 정성과 절개를 한 몸으로 감당해 온 우리들의 귀감이 될 분이 있으니 바로 삼옥헌 홍 여사이시다.

 

홍 삼옥(洪三玉) 여사는 1899년 군위군 산성면 무암동에서 허백당 홍귀달의 후예인 홍 준복의 세째 딸로 태어나 이름 있는 집안에서 여자로서의 도리와 예를 닦아 현모 양처의 자질을 몸에 익혔다. 나이 15 세에 함양 박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박 재덕의 맏아들 종락의 아내가 되었다.

 

여사가 시집왔을 때 남편의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작고한 시어머님의 몽상 중인 데다가 시아버님은 심약한 선비로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집안 일을 돌보지 않으니 17 세의 남편과 철없는 제매 4 남매 등 일곱 식구를 부양해야 할 고통과 빈곤의 무거운 짐을 홍 여사 혼자서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남편이 집을 떠난 어느 해 눈보라가 몹시 치던 엄동 설한에 홀로 계서는 시아버님께서 중병을 얻어 신음하게 되었다. 홍 여사는 걸어 6km 떨어진 군위읍 병원에서 약을 구해 드렸으나 별로 차도가 없자 깊은 산 속을 두루 다니며 약초를 캐어 병구완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깊고 험한 산 속에서 사나운 짐승을 만나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코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남편 없는 집안 형편은 점점 기울어져 하루하루의 끼니조차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 남의 집 날품팔이도 하고 삼 형제를 데리고 뒷산에 화전을 일구기도 하여 근근이 연명해 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 여름에는 산채를 뜯어 보리쌀과 함께 죽을 쑤어 먹다 일곱 식구가 식중독에 걸려 신음하다가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죽음 직전에서 헤어난 일도 있었다.

 

이처럼 뼈를 깎는 듯한 각고의 생활 17년의 세월이 흐른 33세가 되던 해에 일본의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있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선 일본 땅에서도 여사는 시아버님과 남편 섬기기에 온갖 정성을 다해서 그 곳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으셨다.

 

그러나, 운명은 여사의 편이 아니어서 함께 생활한지 석 달 만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남편이 앓고 있을 때 여사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남편에게 먹였고 임종 무렵에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숨을 연장하게 한 지극한 정성은 이웃을 경탄하게 했고 이국 땅 일본인에게 한국의 아내 상을 본보기로 보여 주었다.

 

의지할 곳 없는 이국땅에서 남편을 잃은 여사는 분연히 일어서서 9세의 장남과 6세의 차남, 생후 20여일 밖에 안되는 셋째를 안고 고향인 청학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고향 산천은 반가이 맞이 했으나 사람들의 인심은 이미 옛날과는 달랐다.

 

허물어진 초가집을 세우고 뒷산 기슭에 화전을 일구며 가파른 비탈을 개간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밥 달라는 자식을 달래며 손에 멍과 물집이 생겨 굳기까지 일을 계속했다.

 

하루의 끼니를 위해 날품, 방아품, 길쌈품 등 닥치는 대로 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좌절한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자라나는 자식들에의 희망으로 견디어 오셨다. 조금씩 개간지에서 수확을 얻게 되자 어린 자식들도 하나씩 국민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늘 모범생이요, 우등생의 자리를 지키면서 중학교에 진학했고 고등 학교까지 다니게 되었다.

 

집안 형편을 잘 아는 삼 형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집안일을 도와 살림에 보탬이 되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장학금의 혜택도 받았다. 어려운 시절 이 강렬하여 그들은 각자 가정교사를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마쳤다.

삼 형제가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홍 여사는 눈물겨운 뒷바라지를 했다. 남의 자식들도 잘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는 아픔 때문에 남 몰래 울기도 많이 하셨지만 자식들 보는 앞에선 한 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시질 않으셨다.

 

홍 여사는 객지에서 아들들이 돌아오면 이웃 어른들을 찾아뵙게 하여 그간의 도움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효행에 대한 가르침을 받게 했다. 그래서 삼 형제는 오랜 동안의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아 대대로 살아온 내 고향을 위해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마음속에 간직하며 자라났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홍 여사의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굵은 주름살은 그 동안의 고생을 말해 주었다. 홍 여사의 삶은 그야말로 인간 본연의 이성을 잃지 않고 효와 열로 이어진 정신으로 젊음도, 정열도, 지헤도, 몸도, 오직 박씨 가문을 위해 고스란히 바친 헌신의 산 모습이었다.

 

197071 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홍 여사가 보여준 효열의 실행과 굳은 삶의 의지는 청학 마을 사람들의 본이 되었고 그 후 삼 형제는 어머님의 훌 륭하신 삶과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삼옥헌 홍 여사 효열비 건립회를 구성하 고 고로면 관내 유지 및 기관장 등 218 명의 추진 위원회가 삼옥헌 사당을 짓고 추모비 등을 1972년에 준공하여 해마다 음력 218일에 추모제를 지 내며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기가 힘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 급하여 삶의 빚을 던져주고 있으며 60 세 이상의 노인들을 모셔 경로 잔치 도 베푸는 등 지역 주민들에게 경로 효친 사상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

 

 

출전 孝烈行誌(효렬행지) 고로중학교장 송문현.

 

 

 

洪永燮(홍영섭)의 효행.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까마귀 떼

 

효자 홍 영섭 (洪永燮)은 관향이 부림으로 고려 때 문하사인 경제 (敬齊) 선 생의 후예로 아버지 병유(秉裕)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 1889(고종 261225)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에서 태어났다.

 

대율동은 대구 북쪽에 우뚝 솟은 팔공산 뒷편 기슭의 마을로 1, 192m의 신령스러운 팔공산 정상이 쳐다보이고 울창한 수목이 숲의 바다를 이루어 자 연 경관이 수려하여 고려 때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800여 년의 역 사를 지닌 곳이다.

 

영섭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웠고 기질이 비범하여 같 은 또래 아이들 가운데 뛰어났으며 특히 부모님을 섬김에 정성을 다하며 예 의 바르고 용기 있는 행동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었다.

어버이흘 섬기는 마음이 지극한 어린 영섭은 때때로 과일이나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입에 대지 않고 부모님께 드렸다. 또한 책 읽기와 어른으로부터 선현의 가르침을 배우기 좋아하여 8 세에 소학 명륜편을 익히니 효행 이 더욱 깊어지고 인간으로서의 밝은 도리가 두터워졌다.

 

영섭이 10 세가 되먼 해 어머님께서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병간호에 온갖 정성올 다함은 물론이었으며 목욕하여 몸을 청결히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깨끗하지 못함을 피했으며 어머님의 쾌유를 위해 팔공산 중턱 청악교에 올라가 간절한 마음으로 산신께 빌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여 이듬 해 어머님이 별세하자 어머님 무덤가에 혼자 드나들 수 있는 작은 집을 지 어 묘소를 떠나지 않고 지키며 슬피 시묘하기를 3 년 동안 하니 이웃 사람들은 모두 효자라 칭송하였다.

 

이처럼 효성이 지극한 영섭에게 불행히도 20 세가 되던 해에 아버님마저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영섭은 아버님의 병환을 고치고자 팔공산 골짜기를 두루 디니며 좋은 약초를 캐어 정성을 다해 탕재를 만들어 드리고, 또한 정성껏 마련한 입에 맞는 음식을 잡수시게 해서 병환을 구하고자 했다.

 

하루는 이웃 친척의 큰 잔치가 있어 참석했는데 모두들 술과 맛있는 고기를 먹으며 즐기나 홀로 앉아 슬픈 빛을 보이며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있었 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묻기를왜 음식은 먹지 않고 쳐다보고만 있느냐?”하 니 집에 어른이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데 자식으로서 어찌 맛있는 고기와술을 즐기겠는가 ! ”하며 못메인 소리로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 어른들이 그 효심에 감동하여 따로 음식을 담아 아버지께 드리도록 했다.

아버지가 자리에 눕게 된 지 두 해가 지나니 기동도 하시지 못해 부축을 받아야만 하셨고 잡수시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니 영섭이 아버님의 손발이 되어 드렸다. 홍 효자는 농사일을 제외하고는 아버님 곁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면서 더럽혀진 의복과 침구를 항상 깨끗이 하였고 때때로 아버님을 등에 업고 신선한 바깥 공기를 쐬시게 했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의 병환이 별로 나아지는 기색이 보이지 않게 되자 홍 효자는 새벽이면 찬물에 몸을 씻고 천지신명께 아버님의 병환을 낫게 해 주기를 간구했다.

 

아버님의 병환을 치료하며 돌보던 26 세 때의 어느 날. 마을에 도적떼가 들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 워서 팔공산 속으로 몸을 피했다. 홍효자는 몸을 피하지 않고 아버님을 간호 하며 그 곁에 있을 즈음 도적떼가 사람을 찾아 몰려 왔다.

 

도적들은 이 마을에 재물은 어느 집에 많으며 모두 어디에 숨었느냐고 윽박지르며 먹을 것 을 달라고 소리쳤다. 홍 효자는 친절히 음식을 마련하여 그들을 성의껏 대 접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하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이 이치거늘 어찌 이와 같은 짓으로 사람을 해하려 하는가?”하고 이어서 세상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부모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니 도적들은 홍 효자와 누워 있는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온후하면서도 범할 수 없는 그 담대한 말에 눌리어 음식을 다 먹고나서 부친의 병환이나 잘 돌보시오·”하고는 마을을 떠나갔다.

 

정사년인 그 해 1115, 홍 효자의 온갖 노력과 정성도 헛되이 아버님 께서 별세하자 그는 장례 하루 전 날 아버님이 묻힐 무덤 속에 들어가 아버님께서 영원히 이 땅 속에 묻혀 지낼 것을 생각하니 슬프기 한량없어 그 속 에서 밤을 지새우고 돌아왔다.

 

장례 후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비바람과 차가운 눈을 맞으며 3 년 동안 생활하던 어느 해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여름날 갑자기 쏟아 퍼붓는 비는 팔공산 계곡 계곡이 합쳐져 큰 물로 변했다. 홍 효자는 아버님 무덤을 지 키는 가까이까지 물이 올랐을 때 위쪽으로부터 허우적거리는 호랑이 한마 리를 발견했다. 그는 통나무를 던져 띄우고 온 힘을 다해 그 호랑이를 물에서 구해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호랑이는 밤이면 무덤 옆 초가집의 홍 효자를 찾아와 그 곁에 앉아 함께 밤을 새우고는 새벽녘이면 팔공산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때때로 호랑이는 홍 효자를 등에 태우고 팔공산을 드나들며 함께 지내기 도 했다.

 

그 후 홍효자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탓으로 애석하게도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의 죽음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번 홍수가 났을 대 홍 효자에 의해 생명을 구하고 벗이 된 호 랑이가 문 밖에 와서 크게 울어 슬퍼했고 까마귀떼들이 온 하늘을 덮어 하 늘이 내린 효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슬픔으로 인도하였다 하니 그의 효행을 길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참으로 어버이를 섬김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홍 효자 의 효심을 하늘은 물론 말 못하는 짐승까지도 감동하게 하였다.

지금 군위군 부게면 대율동 마을 어귀에 있는 송림 사이에 홍 효자의 숭고

한 효심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출전孝烈行誌(효열행지), 전 부계중학교장 홍범락

 

 

 

洪貴達(홍귀달)의 효행

 

 

버선을 벗어 들고 다닌 아들

 

 

홍귀달의 자는 겸선이고 호는 허백당, 본관은 부계이다.

1438(세종 20)에 상주군 이안면 여물리에서 효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 되던 해에 문경군 영순면 율곡리에 옮겨 살았다.

 

그는 다섯 살에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어른과 아이를 구별하여 말과 행동을 할 줄 알았다. 한편 부모의 뜻을 읽어,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을 알고 항상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려고 애썼다. 여섯 살이 되어 남파 김 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것이 효의 첫걸음임을 아는 그는 선생의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 였다. 집에서 글방까지 내를 건너야 하는 십릿길인데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귀달은 글방에서 공부하는 제자 중 제일 어린 나이인데도 그의 바른 언동에는 모두가 탄복하였다.

 

어린 시절 귀달은 글방에 다닐 때 소매자락 속에 헝겊으로 싼 조그마한 도끼를 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산에서 관솔을 따기 위해서다. 집이 가난하여 남들처럼 기름이나 초로 밤을 밝힐 형편이 못 되었다. 어른들은 어린 것이 먼 글방 길을 다니는 것도 힘겨운데 일까지 하니까 걱정이 되어 못 하게 해도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이나 제가 하겠어요.” 하고 귀달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오랫동안 그와 같은 일을 계속하였다.

일곱 살에 효경을 읽은 그는 깊이 느끼고, 부모 은혜에 더욱 감사하며 한평생 정성을 다해 어버이 섬기기를 마음속 깊이 다짐하였다.

 

그의 어머니 노씨 부인 또한 어질고 착해서 자식에 대한 언어 행동을 바르게 가르침은 물론, 가난한 살림에도 자식들의 의복 수발은 늘 단정하게 해 주었다. 후에 허 백 선생이 지은 비문에

효도하고, 우애 있고,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옛날에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글방에 다니거나 남의 집에 출입할 때는 버선을 신어야 했다. 어린 귀달도 어머니가 예쁘게 지어 주신 버선을 신고 글방에 다녀야 했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한 살림살이에 어머니가 정성껏 지어 주신 버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때가 묻고 헤지는 것이 아까와서

십 리나 되는 길을 다니니 버선도 많이 떨어지고 어머니의 고생도 크실 테니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벗어 들고 다니자.’

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보시는 집에서 나설 때와 사람들이 보는 동네에서는 신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벗어 들고 다니다가 글방이 있는 마을 앞에서 다시 신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보다 항상 깨끗하고, 한 컬레의 버선으로 오래 신었다.

 

본인은 이런 일을 숨기고 있었으나 나중에 다른 사람이 알게 되에 소문이 퍼지니 모두가 어린 귀달의 효심에 탄복 하였다.

조금도 게으르지 않고 배움에 힘쓴 그는 일과표를 미리 짜서 그대로 실천 하여 그 날의 할 일을 다음 날로 미루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학문이 날로 성 취됨에 따라 읽고 싶은 책이 많았으나 집에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책을 사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읽을 만한 책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 책을 빌어 와서 읽고, 외고, 중요한 부분을 적은 뒤에는 꼭 정한 날 에 돌려 주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신의를 저버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홉 살에 용궁에 있는, 주 감사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논어 20 편을 외길 반 위에 구슬이 구르는 것 같다.” 라고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홍 귀달은 1461(세조 6)에 문과에 오른 뒤 많은 벼슬자리를 거쳐 제상의 지위끼지 올랐다. 특히 성종조에서 연산조에 이르는 12 년간 홍문관, 예문관 양관 대제학의 자리에 있으면서 학문을 크게 진작시키고 임금과 신하들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힘썼다. 성품이 화평하고 평생에 남과 말다툼 한 번 없었으나 의롭지 않은 일에는 단연코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연산의 포악한 정치에도 많은 신하가 후환이 두려워 감히 바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유독 선생만은 바른 말을 하였다. 연산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하여 올린 글 궁금 11는 유명하다.

 

서울의 벼슬자리에 있는 허백당은 정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고향에 있는 부모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중국에 가서 사신의 임무를 마 치고 몇 달만에 고국 의주에 돌아오니 뜻밖에 모친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부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에서 장례를 정중히 모신 그는 상을 마칠 때까지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자신의 부족한 효를 뉘우치면서 모친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52 세 때에 부친상을 당했다.

 

모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그는 부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여 애통함이 더욱 컸다.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시묘살이를 하면서 고기와 과일은 입에 대지 않았으며 비단 옷도 입지 않았다. 상을 마친 허백당은 부모의 묘가 보이는 맞은 편 언덕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양친의 신위를 모시고 사당 이름을애경당이라 하였다.

사당 이름을 애경이라 함은 어머니 섬기기를 로 하고, 아버지 섬기 기를 으로 한 나의 양친을 생각하여 이 집을 세웠다.”

하고 자손에게 이어서 말하기를

어버이에게 을 다해 섬기고 또, 남에게도 애경으로 대하여라. 나의 집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물려줄 것이 없다. 다만 이것을 물리니 여기 와서 보고 애경의 글 뜻을 깊이 새겨라.”

고 하였다.

 

지금도 애경당은 사당 이름뿐 아니라 동네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갑자사화 때 67 세로 죽으니 그에게 중종은 문광의 시호를 내렸다. 50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높이 374cm인 신도비는 오직 효와 충으로 일생을 마친 허백당 홍 귀달 선생의 훌륭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출전문경군 조령초등학교 홍 교감

참고 문헌 虛白先生年譜, 朝鮮金石總覽,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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