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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홍씨(洪)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풍산홍씨)

 

본관(本貫): 풍산(豊山)

시조(始祖): 홍지경(洪之慶)

유래(由來):

 

풍산 홍씨(豊山洪氏)의 시조(始祖) 홍지경(洪之慶)1242(고려 고종29)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한 후 풍산(豊山)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풍산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며 고려말에서 조선 헌종대(憲宗代)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명성을 날렸다.

 

가문의 중요 인물

 

홍간(洪侃)

? 1304(충렬왕 30).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자운(子雲) 또는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崖). 본관은 풍산 ( 豊山 ). 아버지는 지경(之慶)이다.

1266(원종 7)에 민지 ( 閔漬 )가 장원하였던 과방(科榜)에 함께 등제하였다. 벼슬이 비서윤( 煉 書尹)을 거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지제고(知製誥)에 이르렀다. 뒤에 원주의 주관(州官)으로 나갔다가, 언사(言事) 때문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시문에 능하였고, 시체가 청려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제현 ( 李齊賢 )역옹패설 饑 翁稗說 에서 그가 시 한편을 지어 낼 때마다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그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 ” 고 하였다. 그의 시가 뛰어나서 당시에 널리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균 ( 許筠 )성수시화 惺 馬 詩話 에서 그의 시가 아름다우면서도 맑고 곱다. ” 고 평하였고, 홍만종 ( 洪萬宗 )소화시평 小華詩評 에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허균이 뽑아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집을 밤새워 읽고 이인로 ( 李仁老 )와 홍간의 시가 제일 좋다. ” 고 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특히, 당시에는 모두 송나라 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시를 배운 것이 높이 평가되는데, 허균은 난부인 旣 婦引 · 고안행 孤雁行 등의 작품이 매우 뛰어난데, 성당의 작품과 같다. ” 고 하였으며, 홍만종은 당조(唐調)를 깊이 얻어 송나라 사람의 기습(氣習)을 벗어났다. ” 고 하였다.

저서에 12대손 홍방(洪 濤 )이 여러 시선집에 전하는 것을 모아 편찬한 홍애집 이 있다

 

홍유(洪侑)

3세 유()1294(충렬왕 20)에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 28년 문신친시(文臣親試)에 재차 급제하여 진현관(進賢館보문각(寶文閣춘추관대제학(春秋館大提學)에 올랐으며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묘는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신성1동 탑마을 도선산 선조 홍경 할아버지 묘소의 아래 슬하에 있다.

사공 자 할아버지 양위분 묘소이고 묘비가 있으며 묘지는 공의 13대손 양자 호가 지으시고 글씨는 14대손 락성이 쓰셨으며 배위 염주 이씨는 합폄이다.

고려 충렬왕 20년 갑오(1294)에 문과급제하시고 동28년 임인(壬寅) 문신(文臣) 친시(親試)에 또 급제하여 진현관, 보문각, 춘추관대제학에 올랐으며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홍구(洪龜)

5세 구()는 승의교위(承義校尉) 낭장(郞將)을 지냈으며 여말(麗末)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풍산(安東豊山)으로 하향(下鄕) 도중에 지금의 고양군(高陽郡) 벽제 성석리(碧蹄城石里)에 정착하여 그 후로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묘는 고양시 벽제읍(碧蹄邑) 성석 4(城石 4)에 위치하며, () 상산(尙山) 김씨(金氏)의 묘()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봉분(封墳) 앞에는 문인석(文人石) 4() 을 버리고 고향 풍산(豊山)으로 가는 도중 본() 고봉현(高峯縣)의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여 거처하게 되어 고양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공()의 주택유지(住宅遺趾)가 남아 있으며 그를 받드는 영모재(永慕齋)가 건립되어 있다.

출전(묘지기행)

 

홍만용(洪萬容)

대사헌 이상(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판 영()이고, 아버지는 영안위(永安尉)주원(柱元)이며, 어머니는 정명공주(貞明公主)이다.

1662(현종 3)에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663년 지평·정언, 1664년 수찬·교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665년 판결사 김소(金素)를 청선(淸選)에 천망하지 않았다 하여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어 수찬·헌납을 역임하였다.

1666년 중시문과에 다시 장원급제, 교리·겸문학·시강관·부응교·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75(숙종 1) 다시 대사간이 되고, 1676년인선왕후(仁宣王后)의 대상(大祥) 때에 크게 취한 죄로 파직되었다. 1680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689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예조·이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참찬·지경연사(知經筵事)에 이르렀다. 이 해에 기사환국으로 사직하고 고향인 고양으로 돌아가 오직 음주로써 세월을 보내며 세상일을 말하지 않았다.

왕실의 지친이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아 숙종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귀양보낼 때에는 조정에서 감히 아무도 이를 말리지 못하였으나 이들을 위하여 적극 원통함을 풀어 구제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홍만은(洪萬隱)

6세 만은(萬隱) ()1369(공민왕18)에 문과에 급제하고 소윤(少尹군사(郡事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했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고 여말에 관직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홍천경(洪千璟)

12세 응복(應福)의 아들 천경(千璟)은 선조 34년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광해군 원년(光海君元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급제하였으며 한림(翰林)에 재직시 김연흥(金延興)의 옥사(獄事)와 관련되어 옥고(獄苦)를 치른뒤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남하(南下)하는 세자를 도왔으며 군민(軍民)을 진무(鎭撫)하도록 상소를 올려 독대인견(獨對引見)의 광영(光榮)으로 별좌(別座)에 제수되었으며 월정서원(月井書院)에 배향되었다.

 

홍이상(洪履祥)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된 수()의 아들 모당(慕堂) 이상(履祥)은 선조(宣祖) <&24799>년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선조1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다음해 전시문과(殿試文科)에 재차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은(特恩)을 받았다. 경상(慶尙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개성유수(開城留守)와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되었다. 1793(정조17) 문경(文敬)의 시호와 부조묘()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한사람으로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시인에 이르기까지 사림파의 인식적 토대와 맥을 같이하면서 성리학적 실천윤리에 충실한 이상은 소학(小學)을 학문과 교육의 기본으로 삼아 제례의식(祭禮儀式)을 가례(家禮)대로 실행하였으며, 걸군소(乞郡疎)에 나타나듯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한 중민(重民), 애민사상(愛民思想)에 입각하여 향촌의 안정과 교화에 노력하는 등 이도(吏道)를 잃지 않는 고결하고 청렴한 선비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슬하에 여섯아들과 열한명의 손자를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하였다.

 

홍방(洪露)

()은 선조 36년 증광문과에 급제, 도관찰사(二道觀察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지계예설(芝溪禮設)과 선조(先祖)에 제사(祭祀)하는 의식과 법도를 저술하였다.

 

홍립(洪露)

()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홍집(洪露)

()은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홍영(洪霙)

()은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이르고 인조23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홍박(洪露)

()은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역임하였다.

 

홍탁(洪露)

()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영국공신(寧國功臣)에 녹훈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증직되어 풍산홍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홍주원(洪柱元)

인조 1년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결혼하여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진 모당공 이상의 손자 주원(柱元)은 인조25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시헌력(時憲曆)을 구해 귀국, 신식 역법의 시행을 건의하였으며, 1649(효종즉위) 고부(告訃청시청승습사(請試請承襲使)에 오르고 사은사로 1661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당대의 풍류객으로 시를 즐겼다.

 

홍만선(洪萬選)

숙종(肅宗) 때 학자로 이름난 예조참의(禮曹參議) 주국(柱國)의 아들 만선(萬選)은 현종(顯宗) 때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행실이 근엄하고 인격이 고매하여 당쟁에도 가담치 않아 세인들은 그를 완인(完人)이라 불렀다고 하며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實學) 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농예(農藝의약(醫藥구황(救荒)에 관한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후일 실학사상에 중요한 공적을 남겼고, 류중림(柳重臨서유구(徐有矩) 등의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홍보(洪霜)

형조좌랑(刑曹佐郞) 난상(鸞祥)의 아들인 보()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수찬(修撰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인조 5년 원주목사(原州牧使)가 되었다.

 이해 이인거(李仁居)가 난을 일으키자 그를 원주에서 체포, 난을 진압하여 소무공신(昭武功臣) 1등으로 풍녕군(豊寧君)에 봉해졌으며,1632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1638년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봉상(洪鳳祥)

()의 셋째아들인 봉상(鳳祥)은 선조12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진강(臨津江)에서 전사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道承旨)에 추증되었다.

 

 

 

영조(英祖) 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른 만조(萬朝)는 일찍이 대사간(大司諫좌빈객(左賓客) 등을 거쳐 7도관찰사(七道觀察使)2도안찰사(二道按察使)를 역임, 우참찬(右參贊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홍만용(洪萬容)

숙종(肅宗) 때 대사간을 지낸 만용(萬容)은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아들로 판서(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홍상한(洪象漢)

1754(영조31)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된 상한(象漢)은 조헌(趙憲)의 문집을 간행하는 한편 창절(彰節민민(愍民)의 두 서원(書院)을 중수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1759(영조36)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세손사부(世孫師傅)를 겸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봉한(洪鳳漢)

영의정(領議政) 봉한(鳳漢)은 영조(英祖)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현보(鉉輔)의 아들로, 그의 딸이 혜경궁 홍씨로 유명하며,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후 조선후기의 문화 부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홍인한(洪麟漢)

봉한의 동생 인한(麟漢)도 형조(刑曹)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홍낙성(洪樂性)

상한(象漢)의 아들 낙성(樂性)은 정조(正祖) 때 좌의정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를 명나라에 다녀온 후 1797(정조21) 80세로 궤장(!)을 하사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명문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홍중효(洪重孝)

만기(萬紀)의 아들 중효(重孝)는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형조·예조판서를 지냈으며 경전(經傳)에 조예가 깊었고 시집(詩集) 10여 권이 전한다.

 

홍의호(洪義浩)

정헌(正憲) 의호(義浩)는 의주부윤(義州府尹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우참찬(右參贊),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천주교를 탄압했다.

 

 

홍국영(洪國英)

정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국영(國英)과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현주(顯周)가 뛰어났다.

 

홍석주(洪奭周)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謨)의 아들 석주(奭周)는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문장에 있어서 십대가(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1795(정조19)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직장(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순조실록(純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홍범식(洪範植)

한말(韓末)에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여 독립의 의지를 덕욱 굳건히 했다.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충청북도 괴산 출생. 참판(參判) 승목(承穆)의 아들이다.

1888(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5통은 일본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담움 백과사전)

 

홍충희(洪忠熹)

독립운동에 몸 바친 충희(忠熹)가 뛰어났다.

 

호는 우봉. 1903년 대한제국 무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부위를 지냈으나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은거했다.

19193·1운동에 참여한 뒤 김규식(金圭植김찬수(金燦洙)와 함께 북간도로 망명했다.

그해 8월 서일(徐一현천묵·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지린 성[吉林省] 왕칭 현[汪淸縣]에서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를 편성했고, 같은 해 12월 북로군정서로 다시 확대·개편했다.

192010월 북로군정서 대대장서리 겸 제2중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노령으로 이동하여 만주의 독립군부대들이 대한독립군단을 만들 때 합류했으나, 자유시참변을 겪고 만주로 돌아왔다.

1934년 김영숙(金永肅김서종(金書鍾) 등과 함께 하얼빈[哈爾濱]에 대종교선도회를 설치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이다가 1942년 임오교변이 일어나자 피신했다.

8·15해방 직후 귀국했으나 곧 죽었다.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전(담움 백과사전)

 

홍진(洪震)

()은 통일독립정부수립(統一獨立政府樹立)을 위한 비상국민의회 의장(非常國民議會議長)으로 추대되어 명망높은 풍산홍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풍산홍씨 묘역

 

豊山洪氏(풍산홍씨) 墓群(묘군)

高麗直提學 洪之慶 及 配人 順天金氏

高麗賜紫金魚袋密直司奉翊大夫進賢殿大提學

藝文館大提學上護軍 洪侑

 

풍산홍씨 묘군

고려국 직제학 洪之慶(홍지경) 급 배위 順天(순천) 金氏(김씨)

고려 도첨사인 洪侃(홍간)

고려사자금어대밀직사봉익대부진현전대제학예문관대제학상호군 홍유

4기의 묘소는 풍천면 신성리 五仙堂(오선당) 아래에 있다.

 

시조 洪之慶(홍지경) 23세 묘소에는 戶牌碑(호패비)에 전면에 큰 글씨로 관직한 기록 되어 있고 陰記(음기: 비석 뒷면에 있는 작은 글써)는 없다. 시조의 배위 순천 김써의 묘 앞에는 耳谿(이계) 洪良浩(홍량호: 1724~1802)의 음기가 있는데 세데가 오래 지남에 따라 자손이 번성하고 나라 안으로 뻗어 나가 생원과 진사는 모두 300여명이 넘고, 문과에 급제한 자도 116, 무과 급제한 자도 90명이나 되고, 5명의 제상과 30명의 벼슬아치가 나왔으며, 시호를 받은 사람만도 10사람이나 되며, 제복을 입고 멀리시 성묘를 하러 온 사람이 부지기수 이며 ‥‥」라는 구절이 있다.

이렇듯 중산홍씨가 현달하게 된 것은 이곳의 묘 터가 명당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홍진사 댁에 아들 3형제가 있어 집안도 넉넉하게 지내는 중,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장성하여 적당한 혼처가 나서기에 성론을 시키고, 막내는 아직 미혼이었는데, 갑자기 흥진사가 별세하게 되어 장지를 구하였는데, 지판이 말하기를 이곳은 자자손손 만대로 번영하는 땅이지만 장사 지낸 후에는, 맏상주가 죽게 되고, 소상에는 둘째상주가 죽고, 大喪(대상)에는 셋째 상주가 죽게 된다. 그러나 자손들에는 3정승 6판서가 나고, 과거에 급제하늘 자가 수 없이 많이 이어질 것이다. 하였는데, 그래도 아버지를 이곳에 장사 지냈다.

과연 장사 지내고 집에 돌아오니 맏상주가 죽고, 이어 소상을 지내니 둘째상주가 죽었다. 두 과부가 생각하니 대상이 되면 틀림없이 셋째 상주가 즉게 될 것인즉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하여 액운도 피할 겸 막내 시동생을 팔도유람이라도 시켜서 대상 예 돌아오도록 권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막내아들은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서울 구경을 하고자 상경하여 어느 늙은 과부댁에 숙식을 정하였는데, 이 늙은 이는 어느 재상가의 유모였고, 그 유모를 찾아 오는 제상의 딸과 인연이 닿아서 지내다가 대상 일을 지나니 죽고 말았다. 고러나 제상의 딸은 이때부터 태기가 있었고, 시가가 있는 안동 풍산에 내려와 세쌍둥이를 낳아, 위에 두 동서와 나누어 기르니 3형제가 현달하여 그 자손이 대대로 영달하게 되어, 퐁산홍씨가 조전조에 많은 관료를 배출하여 가문이 번성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전설일 것이다.

이계가 기슬한 시조비 순천 김씨 묘표에도, 기술되지 않았음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풍수지리를 신봉하늘 풍습이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초기 유교사상이 널리 보급되어, 부모를 孝養(효양)함을 으뜸들으로 하는 도의교육이 성행하니 부모를 봉양하는데 생시나 사후에도 정성을 다해야된다는 괌념이 신앙으로 까지 발전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4세 보문각대제학 홍 (洪演)의 묘소는 임하면 천전러 뒷산에 있는데 인조 8(1639) 경상도 관찰사 ()이 그때까지 실전되었던 8대조 연()의 묘를 조사해서 찾고, 또 앞에 ()를 세웠는데안동 풍산현 신성포에 세거하였는데, 고려 때 붙어 동생과 자손들이 三嘉(삼가) 南平(남평) 高陽(고양) 등지로 이사를 하여 세월이 오래 흐르니 자연 돌보는 이가 없어 묘는 황패되고 랄았다. 라고 하였다.

지금도 풍산 홍씨로서 본군에 남아 있는 호수는 극히 드물다.

참고로 洪厓集(홍애집) 世系(세계) ()을 소개 한다.

 

慶尙北道安東任內 豊山洪氏世系

一世 洪之慶 高麗高宗忠獻王朝 登壯元及第 官至 國學直學

二世 洪侃 字平甫 一字雲夫 高麗忠敬王朝 丙寅 閔漬牓登第 官至僉議舍人 知制 誥 出守原州官 貶爲東來縣監 大德甲辰 卒于官 所著有洪厓集刊于世

如孤雁行 懶婦引 山水圖 送秋玉蟾等詩 見于東文選 靑丘風雅 三韓詩

龜鑑中

三世 洪侑 高麗忠烈王壬寅 親試曺匡漢牓登第 官至賜紫金袋密直司 奉翊大夫

春秋館大提學 上護軍事

四世 洪演 文科 官至寶文閣大提學 又知錦州

五世 洪龜 生員 至龍騎巡衛司右領中郞將 麗末 棄官 將下于豊山 故鄕 而路入

高峰縣古基 遂卜居焉 墓在高陽郡歸耳洞 城山村 子孫因家焉

 

경상도 안동임내 풍산홍씨 세계

 

1

洪之慶(홍지경) 고려 고종 충헌왕조 장원급제를 하여 관직은 국학직학에 이르렀다.

2

洪侃(홍간) 자는 平甫(평보) 또 다른 호는 雲夫(운부), 고려 충경왕조에서 병인 년에 민지방에 등되어 관직이 첨의사인지제고에 이르렀고 수원 주관으로 나가 다시 동래현령이 되었다. 대덕 갑진년에 벼슬에서 물 어났다. 저서에 洪厓集(홍애집)이 세상에 나와 있고, 안행, 나부 , 산수도, 송추옥섬 등 시를 동문선, 청구풍, 삼한시구감 중에서 찾 아 볼 수 있다.

3

洪侑(홍유) 고려 충렬왕 임인년에 실시한 친시에서 조광한방에 등제되어 관직 이 자금대밀직사 봉익대부 춘추관대제학 상호군사에 이르렀다.

4

洪演(홍연)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보분각대제학과 지금주에 이르렀다.

5

洪龜(홍구) 생원으로 용기순위낭장에 이르렀고, 고려 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풍산에 돌아가 고봉현에 좋은 땅을 골라 살았다. 묘는 지금 고양군 귀이동 성산촌에 있는데 자손이 사는 집 때문이다.

 

 

洪崖遺稿跋[洪霶]

 

往在宣廟朝先子以弘文館應敎入侍經筵上論及麗朝文章仍問于領經筵李山海曰鄭誧東萊雜詩中有憶洪崖一首詞甚艶麗而盛稱洪崖文詞所謂洪崖是誰歟先子對曰洪崖是高麗忠敬王朝都僉議舍人洪侃之號而以文雅鳴世以言出爲東萊縣令卒于官卽臣之九代祖也上又問詩文有集乎先子對以舊聞洪崖集在嶺南而不得見矣戊申夏余在玉堂搜得古詩排律近體絶句四十餘首於東文選靑丘風雅大東詩林及三韓詩龜鑒等書謄寫一冊貯之靑箱者久矣今忝本道按節之任始得入梓以廣其傳而仍置板本於安東府蓋府之任縣豐山卽余之本貫而實先祖世居之地也直學舍人密直使大提學四代墳塋俱在焉展掃之後營豎墓表招聚宗人之在道內者六人與之同事而又有自京城自湖南不期而來會者三人印出詩集而屬之曰先祖詩律之傳于世者本不止此而兵火之餘採摭無憑今之所收拾只是九苞之一毛耳然從此謹護不至遺失則其視杜羔見先人數行文字於屋柱煤煙之下而寓其羹墻之慕者不亦多哉仍念小子之承命而南得以少伸情事於揄揚世業者此無非國家之盛恩先祖之所貽厥也其在後人寧不思所以盡孝於家而移忠於國以不墜家聲而享有榮寵也哉旣以勖在座諸君而又勉四弟 靈霙靌 之在洛者蓋以此四弟竝掇儒科他日奉使南中有足以益發先世之潛光耳若夫先祖詩格之高旣有鄭雪谷題品觀者自當知之今何用贅語藻飾之也崇禎紀元之二年己巳冬至十世孫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洪霶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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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崖(홍애) 유고발 洪霶(홍방)

옛날 선조 조에 선친께서 흥문관응교가 되어, 궁중에 들어가 경연을 하게 될 때, 상감과 고려조의 문장에 관해 논하였다. 거듭 묻자 경연 자리에서 李山海(이산해)가 말하기를 鄭鋪(정포) 동래잡기 중에 기억나는 洪崖(홍애)의 시 한수가 있는데, 그 시구가 매우 곱고 아름다워서, 홍애의 文詞(문사)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소위 洪厓(홍애)가 누구인가 하고 말 하였다.

선친께서 대답하시기를 洪崖(홍애)는 고려 충경왕조에서 도첨의사를 역임한 洪侃(홍간)()이며, 문장이 아름다워 세상에 소문이 난 사람이며, 그는 동래현령이라는 말이 있는데 관직을 물러났으며, ()9대조입니다.라 했다.

상감이 또 묻기를 시문을 모은 것이 있나.하였다.

선친께서 대답하시기를 옛날에 洪崖集(홍애집)이 영남에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무신년 여름 내가 홍문관에 있을 때, 古詩(고시) 가운데서 近體絶句(근체절구) 40여 수를 東文選(동문선), 靑丘風雅(청구풍아), 大東詩林(대동시림) 三韓詩龜鑒(삼한시구감) 등 책에서 찾아 사본을 한 책을 만들어 상자 속에 보관하고 있는지 오래이다.

이번 본도 按節使(안절사)로 부임하여, 비로소 가래나무를 구할 수 있어, 넓게 그것을 전하고자, 板本(판본)을 만들어 안동부에 두었다.

임지인 풍산현은 즉 나의 本貫(본관)이며, 실로 선조께서 世居(세거)한 땅이다.

直學(직학), 舍人(사인), 密直司(밀직사), 大提學(대제학)등의 4대 선영의 분묘가 모두 거기 있고 말끔히 소제를 하고 난 뒤 표석을 세우고서, 도내에 있는 宗人(종인) 6명을 불러 모아 함께 시집 발간하는 일을 하자고 했는데, 또한 스스로 京城(경성)湖南(호남)에서 예기치 않던 사람 3명이 와서, 간행하는데 대해 함께 하며 말하기를 선조의 ()를 세상에 전하는 일은 본래 그칠 수 없는 일인데, 兵火(병화) 속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찾아내어 지금 수습하게 되나, 이는 九牛一毛(구우일모)와 같다. 그러나 이나마 삼가 보호하여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하고, 선인이 집 기둥아래 등불 밑에서 남긴 몇 줄의 문자는 마치 단 꿀과 같이 귀한 것이고 또한 많지 않다.하였다.

이에 생각하니 소자가 남쪽으로 명을 받아 작으나마 世業(세업)을 할 수 있는 실정이니 국가의 은덕이며, 선조가 끼치신 덕 때문이다.

 

後人(후인)들이 집안에서 효성을 다하지 아니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지 아니하면, 이래서는 가문의 명성을 오래도록 향유하고 번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미 이렇게 힘써온 많은 사람은 또 힘쓰신 四弟(사제)의 영혼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며, 四弟(사제)는 모두 儒科(유과)에 나란히 급제하여 후에 남방에서 봉사하고 先世(선세)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만약 선조의 詩格(시격)을 높여 이미 있는 鄭雪谷(정설곡)의 귀한 작품과 더불어 세상에 펴내면, 보는 사람은 마땅히 잘 알 것이니 지금 무슨 말을 더해서 수식할 필요가 있겠는가.

숭정 기원 2년 기사 동지, 십세손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홍방(홍방) 삼가 발.

 

 

板本舊在安東府經亂見逸不得壽其傳識者恨之堂兄參判公 萬鍾 頃涖玆邑有意鋟梓而旋卽遞歸以其所寫冊子藏之箱篋洎余忝任始得重刋以圖不朽云爾歲戊辰孟秋十二世孫安東大都護府使洪萬朝謹識

豐山南面申城浦卽始祖世居之地而亦載於永嘉誌鄕人至今傳之始祖以下三代墳塋在於舊基之傍而曾王考慕堂公仲從祖監司公相繼爲安東府使尋覓勤至而終不得眞兆十代祖大提學墓在臨河縣內川前村上被人偸葬 莫知其所己巳歲伯從祖大憲公按節本道得聞誌石參見者之言始得封築而豎碑紀事申城先墓自前子孫之來省者只行望拜禮則今此跋文中所謂豎墓表一款獨指臨河墓而言也恐致後疑謹敍其實用備參考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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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본은 오래전부터 안동부에 있었는데, 난리를 겪으면서 허수히 보아 부득이 전하지 못한 것은 識者(식자)들의 이었다.

집안 형뻘인 참판공 萬鐘(만종)이 근래 이 읍에 와서 가래나무 목판으로 새길 뜻이 있어 돌아보고 가며, 그 책자를 소장한 상자를 내게 맡기여 重刊(중간)을 하게하니 그 책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무진 가을 십이 세손 안동대 도호부사 洪萬朝(홍만조) 근식.

 

풍산 남면 신성포는 곳 시조가 대대로 살던 땅이며 또한 永嘉志(영가지)에 기록도 되어 있고 마을 사람들이 지금도 전하는 바이다.

시조이하 삼대의 옛 분묘가 있는 옆에 증조부 廟堂公(묘당공), 둘째 종조부 감사공의 묘가 있다는데 안동부사가 부지런히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십대조 대제학 묘는 임하현 천전 마을 위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暗葬(암장)을 해버려 그 장소를 알지 못하고 있다. 기사년에 종조부 大憲公(대헌공) 按節(안절)이 본도에서 誌石(지석)을 발견했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묘봉을 고치고 축대를 쌓고 비석을 세워 사실을 적으니 申城(신성)의 선조 묘를 참배하던 자손들 까지 와서 살펴보고, 望拜(망배)의 예를 올리니 지금 이 발문 속에 墓表(묘표)를 바로 밝혀 臨河(임하)에 묘가 있다고 말하는 바이며, 후에 의심 없기를 삼가 말하는 바이며, 행하는데 참고 되기 바란다.

 

풍산홍씨 집안의 전설.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에 전해지는 전설입니다.

큰마 뒷산에 있는 묘들이 풍산 홍씨의 묘소이다. 그런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중엽 안동시 풍천면 신성동 속칭 납성계에 살던 홍진사 집에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이미 장가를 들어 고운 자부들을 보았으나 아직 손자들은 없었다. 이제 막내아들이 장가들 일에 집안 대소가에서 마땅한 규숫감을 구하는 일로 분주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일이 일어났으니 홍진사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지관을 모셔왔다.

 

그러나 지관은 묘 터를 잡기 전에 상제들 앞에서 매우 난처해하는 것이었다. 아들들은 무슨 연유인지 거리낌 없이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관은 만약 그 자리가 명당이기는 하나 거기 장례를 치르게 되면 3년 내로 아들 3형제는 모두 죽을 것이오. 그러나 후세에는 반드시 큰 인물이 나리다" 고 하였다.

 

이 말에 홍진사댁은 발칵 뒤집혔다. 과연 장례를 치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한 의견 이 분분했다. 맏이와 둘째아들은 후대를 이을 아들 하나도 없이 모두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장례를 치르지 말자고 우겼고,

막내는 아버님의 유택을 마련하지 못함은 불효라 하며 어찌 장례를 치르지 않고 시신을 그냥 둘 수 있느냐고 막무가내로 우겼다. 막내아들의 의견대로 결국은 장례를 치르게 되어 지관이 정한 자리에 무덤을 썼다.

 

그로부터 1년 후 소상 때 모인 마을 사람들은 그때까지 아무런 변고가 없는 홍진사댁을 보고 지관이 거짓말을 했는가 의아해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맏아들이 원인을 알지 못하는 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대상 때가 되자 둘째 아들 역시 원인모를 병으로 죽었는데 슬하에는 모두 자녀가 없었다. 지관의 말대로 2년만에 남편들이 죽고 청상과부가 된 두 며느리는 신세타령을 하기에는 사태가 급해졌다.

 

바로 시동생문제였다. 두 며느리는 시동생을 불러 이대로 있으면 얼마 못 가서 지관의 말대로 죽을 것이니 이대로 죽으면 홍씨 가문은 영영 대가 끊어져버리니 액운이 들은 고향을 떠나라고 했다.

 

집을 나선 청년은 그 길로 한양으로 올라갔다. 신분을 감추고 문전걸식하며 지내던 중 다행스럽게도 어떤 큰 대감댁의 하인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인이 보기에 이번에 들어 온 하인은 어딘지 품위가 있고 태도와 범절에도 다른 하인들과는 달랐으며 때로는 밤늦도록 글을 읽기도 하여 그를 범상치 않게 여겼다.

 

마침 그 댁에는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청년의 남다름을 보고 아무도 몰래 사모의 정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그 해도 다 가는 늦가을 밤이었다. 가을밤은 심회의 적막감을 더욱 깊게 하여 청년에 대한 사모의 정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을 주체하지 못한 딸은 음식상을 해 들고 청년의 방을 찾아갔다. 그 청년은 주인 딸이 찾아온 것을 꾸짖었으나 마음은 이미 서로 사모하고 있었던지라 음식과 술을 들며 운우의 정을 통하게 되었다.

 

물론 청년은 왜 자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지 그 자초지종을 처녀에게 자세히 얘기했다.

새벽녘이 되어 지난밤의 따뜻한 정에 아직도 가슴이 뛰던 딸은 청년에게 혼례에 대한 말을 하였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나 생각하며 몸을 흔들어보니 이게 웬일인가 청년은 피를 토하고 죽어 있는 게 아닌가!

 

뜻하지 않은 변을 당한 주인은 남몰래 청년의 시체를 싸서 딸로 하여금 경상도 안동으로 내려가게 했다.

 

한편 시동생을 내 보낸 두 과부는 오직 시동생이 성공하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으나 객사하여 돌아온 시동생을 보고 까무러치듯 놀랐다.

홍진사의 무덤 아래에 세 아들을 나란히 장사한 며느리들은 하늘과 조상을 원망하며 한없이 울었다.

 

그런데 이 홍진사의 막내며느리는 천우신조인지 하룻밤의 정으로 태기를 얻어 열 달이 지나 아들 세쌍둥이를 낳았다.

막내며느리는 꿈에 아버지가 현몽하여 세 며느리에게 아들을 하나씩 맡아 기르도록 당부하였다하며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을 맏형에게 그 다음을 둘째형에게 맡기고 막내는 자기가 맡아 길렀다.

 

세쌍둥이는 모두 기개가 뛰어나고 학문과 재주가 비상하며 우애 또한 깊었다. 이들은 모두 장성하여 첫째는 목사 둘째는 현감 셋째는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일생을 조상이 묻힌 땅에서 번창하며 살았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남한(南韓)에 총 8,323가구, 35,1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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